『   때는 여느 따스한 봄날, 한 소녀의 발자국만이 도보를 어지럽히고 있다.

    세련된 구두 소리가 시내 한복판에서 울려 퍼진다.

    이윽고 한 학교의 앞에서 발걸음이 멈춘다.


    "오르카 고등학교......"


    세찬 바람이 그녀의 혼잣말에 호응하듯 불어닥쳤다.

    소녀의 이름은 린드블룸, 올해로 19살이 된 파릇파릇한 고삼. 그리고            


    "여기가 린티가 다닐 고등학교......!"


    이 학교에 폭풍을 몰고 올 전학생이기도 하다      .


  "응. 컷."


  맥빠지는 슬레이트 소리가 조용히 세트장을 휩쓸었다.

  정적이 이어지길 잠시, 곧이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직감한 나는 귀를 막았다.


  "이~번~에~는~ 또 왜!"


  이야아. 린티야. 역시 아이돌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귀를 막아도 고막을 찢어버릴 것만 같은 이 성량! 고음!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여실히 증명해 줘서 고맙다!

  ......이게 몇 번째야. 피 나오겠네!


  "왜긴 왜야."

  "으아~!"


  귀를 막고 괴로워하는 나와는 달리 그리폰은 익숙하다는 듯, 귀까지 후비며 대답하는 위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멋지네 그리폰. 반하겠어.

  그녀 뿐이랴. 다른 스카이나이츠 대원들 역시 묵묵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존재가 있었다. 하르페이아...... 오늘도 고생하네.

  각본과 음향 담당을 제외하면 나머지 역할은 제비뽑기로 뽑았다고 했는데, 무대 담당이라니.


  그 외에는 무슨 담당이 있었더라? 어디 보자.

  '주연: 린티' ...드잡이 하고 있고

  '감독: 그리폰' ...이하동문

  '조명: 슬레이프니르' ...할 일이 없어서 졸고 있고

  '무대 및 각종 세팅: 하르페' ...힘내라

  '조연: 블랙하운드' ...아, 하르페이아 돕고 있구나? 착하네.

  '각본: 흐즈믈르그' "푸흡!" 이, 이거 누구야. 그런데 얘는 어디 가서 안 보여?

  '음향: 뮤즈' 어라? 얘는 또 왜 여기 있어?


  나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안 보이는데.

  없다고 생각하려던 찰나, 린티가 다시 빼액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나는 청각을 잃었다.


  잃을 뻔했다.


  그리고 소리에 맞춰 무대의 한 구석에서 크게 떠는 검은 덩어리도 보였다.

  저거 뮤즈였구나. 나는 커다란 쿠션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따가 모르는 척 뒤에서 껴안아 볼까?

  그런데 너도 아프구나? 나만 이상한 줄 알았네.

  음, 그건 그렇고.


  "슬레이프니르."


  나는 옆에서 곤히 잠든 그녀를 보았다.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어떻게 이런 소란 속에서 잠이 들 수 있는지 그 비결을 좀 알려줬으면 한다.

  부르는 걸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아서 흔들어보았다.


  "......어, 응? 남편? 남편?"

  "어 그래. 나야 나. 정신 차려."

  "아냐. 습, 나 안 잤, 안 자써."

  "......볼에 묻은 침이나 마저 닦고 말하지 그래."


  나는 소매로 그녀의 볼을 닦아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더니 볼을 내 팔에 부벼대는 게 아닌가.

  귀, 귀여워. 주변에 보는 눈만 없었으면 뭐라도 했을 텐데 참 아쉽다.


  어라. 생각해보면 나 얘네랑 다함께 잤는데.

  그럼 사양할 필요도 없지 않나?


  "슬레이프니르, 나 봐 봐."

  "음...... 더 잘래. 음, 읍?!"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화들짝 놀란 슬레이프니르가 토끼눈을 했다.

  응. 반응 좋고. 그런데 너무 세게 때리진 말아줬으면 하는데. 아야, 아야야.


  "뭐, 뭐야. 무슨, 무, 무무, 무슨 일인데."

  "아무것도 아니야. 정신은 좀 들어?"

  "응. 응? 어, 응. 아니, 음...... 한 번 더, 하면?"


  하하하, 이 녀석. 하하하. 오냐. 내 천국을 보여주.


  "잠깐잠깐잠깐! 지금 뭐하는 거예요! 린티가 앞에 있는데!"

  "아, 린티. 왔어? 교복 오랜만이네. 이쁘다. 헤어스타일도 잘 어울려."

  "앗, 알아보시겠어요? 후훗. 린티가 얼마나 공들여서...... 이게 아니라!"


  린티는 볼을 부풀리며 "칭찬으로 넘어가시려 해도 소용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아주 다양한 반응들을 하고 있었다.


  이쪽을 가만히 지켜보는 그리폰,

  귀를 붉히고 뜨거운 눈빛을 보내오는 블랙 하운드,

  달아오른 얼굴을 가렸지만 손가락 사이로 확실히 보고 있는 뮤즈

  어느샌가 돌아와서 땡땽이 안경을 매만지고 있는 흐즈믈, ㅋ, 흐레스벨그

  뚱한 눈으로 바라보는 하르페, ......너한테는 진짜 미안하다.

  아이스크림 사줄게. 두 번 사줄게.

  슬레이프니르, 너는 왜 아직도 잠자는 공주는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리고 나는 주변을 둘러본 끝에!

  린티의 빵빵하게 부푼 볼을 꾹 눌러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 오늘 왜 이러지? 뭐가 쌓였나?

  에라 모르겠다. 눌러야지.


  "푸후~."

  "푸핫."


  괜히 힘빠지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음, 왠지 향이 좋네. 복숭아향인가?

  나 설마 입냄새 페티쉬는 아니겠지. 에이.


  그런데 갑자기 린티는 안색이 싹 변해서 뒤로 물러났다.

  어, 음. 이런 반응을 기대했달까 예상하고 한 건 아닌데. 사과해야 하나?

  구렁이처럼 굴다가 사과하는 것도 좀, 하고 고민하던 차에 린티의 목소리가 들렀다.


  "그리폰, 그리폰."

  "뭐야 또. 얘기하다 말고 와서는......"

  "하아아~."

  "읍, 야 잠깐. 뭐하는 거야!"


  정말 뭐하는 거야?


  "린티 입냄새 나?"

  "......응. 나. 엄청 나."

  "이익, 대충 대답하지 말고!"

  "......너 방금 전까지 멋낸다면서 풍선껌 씹었잖아. 무슨 향이었는데."

  "아, 맞다! 고마워!"


  그러더니 후다닥 달려온 린티.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감쌌다.

  진짜 오늘 왜 이렇게 귀여운 애들이 많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참 그렇지! 칭찬으로 넘어가시려 해도 소용없어요!"

  "으응. 뭘 해주면 될까."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면 좋겠는데. 가능한 쉬운 걸로.


  "지금 모두들 열심히 하고 있는데 사령관님은 전대장이랑 놀고 있고!"

  "죄송합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대원들이 제각기 할 일 하는데 할 일이 없다고 자고 있는 슬레이프니르랑 노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린티가 이렇게 예쁘게 꾸며왔는데 전대장만 예뻐하고!"

  "그것도 죄송합니, 어라? 나 방금 전에 칭찬했지?"

  "한 번 더! 마음을 담아서 해주세요!"


  린티는 자! 하고 양팔을 벌렸다.

  딱히 화난 게 아니라 사심이 듬뿍 담긴 요구 같은데. 

  열심히 하는 '모두'는 어디 가고......아무렴 뭐 어때. 

  그럼 어떻게 칭찬한다.


  "음, 전에 봤을 때도 생각했는데 린티의 분위기와 정말 잘 어울려서 예뻐."

  "후흥. 당연하죠! 린티는......"


  어깨를 으쓱이며 좋아하는 린티.

  그런데 내 말 아직 안 끝났다.


  "한창 꾸미기를 좋아할 때의 복장이라서 린티의 성격과 잘 맞는 부분이 있지?

  리본이라든지 정말 귀여워. 머리 모양 바꾼 것도 그래. 트윈테일도 좋지만 헤어스타일을 바꾸니 또 새롭더라니까."

  "엑."


  경직돼서 당황하는 린티. 저건 그거네.

  어...... 좋긴 좋은데 부끄럽고, 또 그렇다고 좋다는 걸 숨기기 힘든 그런 표정.

  진짜 귀엽다.


  "그런 귀여운 차림새를 하고서 교사와 학생의 일탈이라는 엉큼한 망상을 하고 있다는 것도 포인트지. 소악마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소악마라기에는 튕기는 게 미숙하고 날 굉장히 좋아해주는 게 눈에 보여서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워."

  "잠까, 잠깐만요."


  응, 안 돼. 안 멈출 거야.


  "그런데 왠지 모르게 섣불리 건드려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경각심이 드는 거 있지. 그래서 더 애가 타. 손을 뻗으면 가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가지면 안 된다니. 하면 안 되는 나이도 아니거니와 이미 했던 사이인데도 그런 기분이 들어서 곤란하다니까. 역시 복장에는 분위기를 휘어잡을만한 힘이 있다고 생각해. 응."

  "사, 사령관! 님!"


  린티는 갑자기 내 품에 뛰어들었다. 보아하니 홍당무가 되다못해 아주 노릇노릇 익어버린 듯했다.

  봤지? 내가 진심을 다하면 이 정도라고.


  "이, 이렇게까지 말해달라고는 하지 않았......"

  "그랬던가? 난 내 마음을 담았을 뿐인걸."

  "우으......"


  내 품에 얼굴을 묻고 도리질을 해대는 린티.

  ......어어. 그러지 마라. 뭐가 막 스친다. 어어.


  "......히힛."

  "너 설마......"

  "사령관님. 애타신다고 했죠. ......린티, 가질래요?"


  뭐, 튕기는 게 미숙해? 헛소리하네. 그냥 소악마가 맞는 것 같다.

  그리고 난 평범한 인간이라서 악마의 유혹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후회하지 마. 오늘 난 120퍼센트 사령관이거든?"

  "꺄아~ 무서워. 잡아먹히겠어~."


  안 되겠다. 더 이상 까부는 걸 두고 볼 수 없다.

  다시금 서열 정리를 해야지.


  "좋아. 그럼 비밀의 방으로......"

  "보자보자하니 어이가 없군요."


  역시, 나서는구나. 안경을 벗으며 나선 그녀는.


  "흐레스벨그."

  "지금은 '함께' 연극을 연습하고 있었을 텐데요? 주역인 린티만 데리고 가면 나머지 인원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 그렇지."

  "우   . 흐레스벨그, 우우      ."


  린티가 나를 꼭 껴안은 자세 그대로 흐레스벨그에게 야유를 했지만, 당연히 그녀는 들은 체도 안 하였다.

  역시 안경을 벗었을 땐 뭐랄까, 참 지적이고 대하기 어려운데 매력적이란 말이야.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불공평하지. 응."


  어떤 부분이 불공평한지 구체적인 건 잘 모르겠지만.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어, 연극 연습이 끝나고 린티를 데려간다?"

  "그게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 흐레스벨그는 다시 안경을 꺼내 쓰면서 말을 이었다.


  "'함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일탈도 '함께' 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


  흐레스벨그......너, 천재냐고!


  "우~. 이렇게 될 것 같기는 했지만. 오늘은 린티가 사령관님을 독점하고 싶었는데......"

  "죄송하지만 참으세요."

  "......그래도 그건 흐레스벨그만의 의견이잖아? 다른 사람들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걸."


  그제서야 눈치만 보던 아이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나는 할 거야! 남편! 함께 쉬어야 한다고 생각해!"

  "나, 나는 좀 피곤해서 쉬고 싶었는데에. 그럼 사령관한테 마사지나 좀 부탁해볼까."

  "그러면 저도 부탁드릴게요. 마사지......헤헷. 뮤즈는?"

  "네, 네에. 저는 꼭, 꼬옥 안아주셧으면 좋겠어요......프로듀서."

  "어, 응."


  뮤즈, 그 때 이후로 되게 당돌해졌네. 말투는 아직 어눌한 면이 남아있는데 매칭이 잘 안 되는걸......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한 사람.


  "............"

  "......뭘 봐. 인간."

  "아, 아니이~ 혹시나 해서. 하하하."


  그리폰이 날 싫어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그리폰 앞에서는 왠지 모르게 긴장하게 된다니까......


  "그, 그럼 쉬고 있어? 우리는......"

  "잠깐만."


  갑자기 소매를 붙들려 잠시 휘청였지만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쿨하게 뒤돌아본다.


  "응, 으응."


  쿨하지 못한 목소리가 원망스럽다. 이런.


  "............사해."

  "어, 응? 뭐라고?"


  그리폰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쥐어짜내듯 말했다.


  "치사, 하다고...! 나만 빼고......! 저번에, 행복하게 해준다고 말한 주제에......! 앗."

  "더 들을 것도 없어. 가자."


  나는 그리폰을 번쩍 안아들고 잰걸음으로 달렸다.


  "아앗! 그리폰 치사해! 거긴 린티 자린데!"

  "남편! 기다려. 같이가!"

  "역시 그리폰......훌륭한 전략이었습니다."

  "아하하, 전략이려나 그거......"

  "그러게~ 그래도 좋은 걸 배웠어!"

  "저, 저렇게 하는 거군요......"


  그 이후로 메챠쿠챠 하늘을 날았다나 뭐라나.



  뒤는 너희의 상상에 맡길게.

  저 하늘 너머 끝까지, 러버러버! 별이 빛나는 한, 하늘의 수호자 스카이나이츠는 영원할 거야!


                                                                                                                                                           




취미였다지만 글을 손에서 놓은 지 꽤 돼서 정말 가볍게,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써봤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스카이나이츠한테는 무거운 이야기는 안 어울리더라고. 그리고 메이 다음으로 최애인 린티는 언제 한 번 굴려줘야겠다 생각하고 있다.


근데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

재밌게 읽었다면 다행이고, 고맙고. 뭐 그렇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