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 https://arca.live/b/supernerimk2?category=%EC%86%8C%EC%84%A4&target=title&keyword=%EC%A1%B0%EA%B8%88+%EC%9D%B4%EC%83%81%ED%95%9C


모음 : https://arca.live/b/lastorigin/207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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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홓, 신사분, 감사합니다!

머리카락은 몰라도 겉옷은 흔쾌히 건네주시는군요?

죄송합니다. 코어에 물이라도 들어가면 큰일이라서 말이죠!”

 

“…”

 

 

 

집결 장소에서 모인 우리는 서둘러 북쪽의 블랙리버 연구실로 향했다.

이미 레아의 능력의 여파로 섬 전체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내 위치를 레아도 알고 있었을 테니 이곳은 그래도 버틸만 했다.

물론 버틸 만하다고 해도 손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으면 눈을 뜰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감기라도 걸리시면 제가 페더 양의 얼굴을 볼 낯이 없어지는데, 호홓”

 

“… 알았으면 빨리 움직이자고.

겨우 잡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잖아.”

 

“맞는 말씀입니다!

그럼 제가 먼저 가보도록 하죠!!”

 

“야, 잠깐만. 내 옷…”

 

 

 

알프레드는 신이 난 어린아이처럼 앞질러 달려가기 시작했다.

내 겉옷을 망토처럼 흩날리며 가는 모습이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그나마 연구실의 위치를 우리도 알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길을 잃었을 지도 모르겠다.

먹구름이 너무 짙게 깔려 10m 앞도 겨우 보이는 수준이었으니까.

 

 

 

“… 페더야, 네가 고생이 많았겠구나.”

 

“… …”

 

 

 

페더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내가 대답했다.

 

 

 

“저, 저렇게 보이셔도 믿음직한 분이셔요.

… 아마도요.”

 

“뭐… 능력 하나는 인정해줄 만 하지.

로버트의 프로토 타입이었으니까.”

 

“… 다시 들어도 조금 충격적이네요.

저런 아저씨를 토대로 만든 AI가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게…”

 

“나도 처음엔 그랬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지.”

 

“… 네…”

 

 

 

날씨가 어둑어둑해서 그런가, 저런 알프레드의 모습이 영 어울리지가 않는다.

한밤 중이기도 하고, 레아가 싸우고 있기도 하니 밝은 알프레드의 성격은 도통 따라가 주려고 해도 금새 숨이 벅차 오른다.

 

옆에서는 팬텀과 써니가 같이 투명 망토를 쓰고 재잘거리며 따라왔다.

잘 들어보면 팬텀의 목소리는 없고 써니가 말하는 것만 들려온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그래도 팬텀에게 친구가 하나 생긴 것 같아 다행이다.

 

 

 

“써니가 원래 저렇게 활발한 성격이었나?

생긴 대로 논다고, 그럴 성격인 것 같긴 한데.”

 

“원래는 그랬죠.

지금은 이런 저런 일들이 있었으니 전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진 것 같네요.”

 

“그런 저런 일들을 겪은 사람치고는 금방 회복하는 것 같은데?”

 

“인간 님이 오셨으니까요.”

 

“내가?”

 

“인간 님이 아니었다면, 전 마을의 감옥에 갇혀 아무 것도 못하고 있었겠죠.

어쩌면 다시 이 귀걸이를 차고 다른 분들과 똑같이 세뇌 당했을 수도 있었죠.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하고 갔던 거였지만…”

 

“… 그래, 감수했다고 해도 무섭지 않은 건 아니지.

잘 버텨줬어.”

 

“… 감사해요.”

 

 

 

페더는 날개로 자신의 얼굴을 살짝 가렸다.

비가 거세게 내리쳐서 그런 것인지, 깃털처럼 보인 페더의 하얀 옷은 잔뜩 물을 머금어 축 늘어져 있었다.

마음 같아선 겉옷이라도 둘러주고 싶었지만, 그건 이미 알프레드가 가져가 버려서 말이다.

 

그나저나 이 로봇은 대체 어디까지 달려간 거야?

이젠 발소리도 안 들리네.

 

 

 

“근데 페더는 어떻게 이 귀걸이에 대해 알게 된 거야?

전에 어떻게 따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던 건가?”

 

“아… 네.

마을의 리더로 계셨던 분이 저를 도와주셨었어요.

그 분이 아니었다면 저도 마을에 남아 있었겠죠.

이 귀걸이를 쓴 채로요.”

 

“그럼 귀걸이에 대해서도 잘 알아?”

 

“… 아마도요?

직접 착용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분들이 어떻게 변해가는 지는 여러 번 봤으니까요.”

 

“그럼 설명 좀 해줄래?

나중에 닥터한테 설명해주면 좋아할 것 같아서 말이야.”

 

“음… 우선 귀걸이는 두 쪽 다 착용해야 효과가 있어요.

마을에서 보셨을 지 모르겠지만, 한 쪽만 착용하신 분들은 금방 세뇌 효과가 풀려버리죠.

저도 아저씨가 도와주실 때 한 번 착용해본 적이 있어요.

별 일은 일어나지 않았죠.”

 

“그래?

그럼 이 귀걸이 하나로는 아무 쓸모도 없는 건가?”

 

“그건 아닐 거에요.

한 쪽만 있어도 어느 정도 효과는 발휘하죠.

다만 쓰고 있는 사람이 저항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저항할 수 있는 정도에요.

필름이 끊기 듯이 기억을 잃을 수도 있지만, 보통은 기억하려고 하면 다시 기억이 나죠.

그냥 얕은 꿈에 들어갔다가 깨는 기분이에요.

물론 별로 저항할 생각이 없다면 귀걸이 하나로도 충분하겠지만, 그럴 사람은 없겠죠.”

 

“왜 그렇게 불편하게 만들었지?

그냥 하나로 한 번에 확 효과를 내면 안 되는 건가?”

 

“아무래도 하나로는 안정성이 부족하니까요.

아저씨의 말씀에 따르면, 강제로 출력을 높여버리면 바이오로이드의 뇌 일부가 파손될 수 있다고 하네요.

개개인의 성격이라던가, 심하면 전신 마비가 올 수도 있죠.

… 아저씨가 그랬다고 했으니 틀린 정보는 아닐 거에요.”

 

“그래?

… 그렇단 말이지.”

 

 

 

난 내 손에 든 귀걸이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냥 단순하게 생긴 귀걸이.

귀에 구멍 하나만 뚫으면 나도 낄 수 있을 것만 같은 평범한 귀걸이였다.

 

이런 게 두 개만 있어도 그 정도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니,

닥터에게 주면 연구할 게 생겼다고 좋아라 할 것이 분명하다.

 

 

 

“… 어우, 그나저나 날씨가 아주…”

 

“이것도 인간 님 휘하의 계신 분의 능력이라 하셨죠?

대단하네요…

저희 같은 일반 바이오로이드에겐 전설처럼 이야기만 들려오던 분들인데…”

 

“누구, 레아가?”

 

“그 분도 그러시고, 티타니아... 라는 분도 있다고 들었어요.

저희 리더가 제게 가끔 이야기해주곤 하셨어요.

… 그리고…”

 

 

 

페더는 눈동자만 힐끗 돌려 앨리스를 쳐다보았다.

 

 

 

“… 아, 맞다.

앨리스도 원래 강한 아이이긴 하지.”

 

“… 그냥 강한 정도가 아니란 건 알고 계신가요?”

 

“걱정하지마.

우리 앨리스는 지금은 쉬고 싶어서 온 거거든.

애가 싸우는 일은 볼 일 없을 테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옆에서 내 옷자락을 잡고는 조용히 따라오는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착 하고 달라 붙어 있었다.

내가 손을 뻗어 그걸 치워주니, 앨리스는 눈을 꼭 감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리카락을 치워주다가 눈꺼풀에 살짝 걸린 모양이다.

 

 

 

“봐봐, 이렇게 착한 아이잖아.

그리고 상처도 많은 아이고.”

 

“…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글쎄…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서.

그렇지? 앨리스?”

 

“… …”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앨리스는 입을 다물고 말을 아꼈다.

페더는 날개를 잔뜩 움츠린 채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오늘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가 봐.

페더가 좀 이해해주면 좋겠네.”

 

“네… 네.

아, 알겠습니다.

제 3자가 끼어들 수 있는 문제는 아, 아니었을 테니까요…”

 

“아냐, 다른 거 궁금한 게 있으면 더 물어봐도 돼.

그건 내가 대답해줄 수 있으니까.”

 

“… 괘, 괜찮아요…”

 

 

 

페더는 앨리스에게서 멀어지려는 듯이 걸음을 재촉했다.

난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앨리스의 표정이 조금 무서웠나?

하긴, 저 무표정이 언뜻 보면 조금 살 떨리긴 하지.

안 그래도 야행성인 동물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니, 밤눈은 페더가 나보다 더 좋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연구실로 향한 우리는 가는 도중에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지금 서있는 곳이 비도 잘 들이치지 않기도 하고, 앨리스가 이 날씨에 걸으면서 너무 많이 지쳤다.

레아로 AGS를 상대할 생각이었다면 이런 상황도 예상했어야 했는데, 내 불찰이다.

 

 

 

“알프레드는 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설마 혼자서 연구실 안까지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아저씨라도 해도… 그 정도 상황 판단은 하실 수 있으실 거에요.”

 

“그랬으면 좋겠네.

팬텀이랑 써니는 어때?

아직 움직일 수 있겠어?”

 

“당연하죠!

이 망토, 생각보다 좋던데요?

방수도 되고, 움직이기도 편하고!”

 

“괘… 괜찮습니다. 사령관님.

저는 지금 바로 움직여도…”

 

 

 

써니는 이젠 아주 팬텀을 잡아 삼킬 듯한 기세다.

팬텀에 등에 거의 업히다시피 한 써니를 팬텀은 낑낑대며 바쳐주고 있었다.

 

 

 

“후우… 알프레드가 혹시 뭔 짓을 할 지 모르니까…

… 너희 둘은 먼저 연구실 쪽으로 향해줄래?

그 괴상한 AGS가 자기한테 어울리는 짓 같은 걸 하기 전에 잡고 있어줘.

알았지?”

 

“네에! 맡겨만 주세요!”

 

“알겠습니다아… …”

 

 

 

신이 난 써니와 달리, 팬텀은 죽어가는 목소리로 망토를 덮었다.

그래도 아무 말 없이 같이 가주는 걸 보면 자기도 내심 만족하는 것 같다.

혹시라도 연구실 쪽으로 가다가 타이런트라도 보면 큰일나긴 하겠지만, 광학 미채를 쓰는 팬텀이랑 홀로그램 장비도 멀쩡한 써니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다.

 

걱정이라면 여기까지 오는데 타이런트는커녕 AGS 한 마리도 보지 못한 우리가 해야겠지.

 

 

 

“아무튼, 그 AGS 좀 잘 부탁해.

만약 가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질 것 같거든.

아, 가다가 타이런트 같은 걸 만나면 꼭 안전해질 때까지 움직이지 말고.

너희 둘이니까 믿고 보내는 거다? 알았지?”

 

“네! 팬텀 양이라 같이 있으면 타이런트 몇 마리가 와도 상관 없을 걸요?

그렇죠? 팬텀 양?”

 

“… … 가… 가보겠습니다. 사령관님.”

 

“그래, 몸 조심해서 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인사를 마친 팬텀은 또 다시 스르륵 사라졌다.

눈을 감았다 뜨면 누가 있었냐는 듯이 거센 비바람만 불어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게 딱 이 모습을 보고 하는 말 같다.

 

 

 

“어때? 페더?

너도 먼저 갈래?”

 

“… … 인간 님이 여기 계시면 위험하지 않으실까요?

아저씨가 걱정되긴 하지만 써니와 팬텀 양이 먼저 가셨으니 저는 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아냐,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사실 우리 부대 애들하고 이쯤에서 만나기로 했거든.”

 

“날도 어두운데 혹시 그 분들이 놓치기라도 하시면…”

 

“괜찮다니까 그러네.”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뇌파 증포기를 꺼냈다.

물을 조금 머금긴 했지만, 방수로 만들어서 그런지 아직 잘만 작동했다.

 

 

 

“뇌파 증폭기야.

아무리 주변이 어두워도 이걸 틀고 있으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걸?”

 

“하… 하지만 그래도…”

 

“여기 오는 애들 중에는 멸망 전부터 살아남았던 애도 있고,

다리 하나가 통째로 잘려도 이 악물고 싸우는 애도 있어.

다른 건 몰라도 우리가 걱정할 만한 짬은 아닐 거야.”

 

“… 그렇겠네요.”

 

 

 

페더는 검게 그을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빗방울이 점점 세차게 내렸고, 이젠 보고 있기도 힘들 정도다.

이따금씩 귀를 먹먹하게 하는 천둥 소리가 들리기도 하는데,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그런지 그 소리가 상상이상이다.

 

그래도 저 먹구름이 우리 편이라는 것이 어찌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페더도 그걸 알까?

 

 

 

“어차피 우리 세 명이 뭉쳐 다닌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거야.”

 

“… 혹시라도 인간 님이 해를 입기라도 하면…”

 

“됐어. 걱정 받는 건 이제 지긋지긋하다니까 그러네.

그리고 지금 내 몸보다 네 몸을 더 생각해야지.

그렇게 젖은 옷 입고 다니면 감기 걸리겠다.”

 

“바, 바이오로이드는 그런 거 안 걸려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눈 앞에 처량해 보이는 애가 있으면 도통 못 지나가겠단 말이야.

나한텐 이게 약간 트라우마 같은 거거든.”

 

“…”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라도 먼저 연구실로 가.

가서 몸도 좀 녹이고.

안 그러면 내가 못 참겠어.”

 

 

 

질척해진 땅과 축축한 공기.

물웅덩이 위로 파장을 일으키는 빗줄기와 썩어가는 나뭇잎들.

이런 곳에서 죽은 아이들의 사진을 난 이미 너무도 많이 봐왔다.

그래서 가끔씩 페더의 얼굴에 그 모습이 겹쳐 보이기까지 한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조금 불편해지는 건 사실이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게 있다는 걸 아니까.

 

 

 

“… 알겠어요.

그럼 제발… 제발 무사히 오세요.”

 

“알았어.

귀걸이까지 가지고 있는데 내가 안 가면 큰일이잖아?

반드시 따라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그래도 연구실 내부라면 여기보다는 따뜻하겠지.”

 

“…”

 

 

 

페더는 날개를 활짝 펼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무리 어두운 숲 속이라고 하지만, 온통 하얀색으로 반짝이던 페더의 넓은 날개는 빛이 났다.

 

페더는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커다란 날개의 소용돌이가 땅 위에 잠시 머물며 흙탕물과 진흙을 튀겼다.

그것 때문에 잠시 눈을 가리긴 했지만, 그래도 멋진 모습이었다.

 

 

 

“역시 저런 애들은 당당하게 할 때가 제일 멋진 것 같아.

그렇지 않니? 앨리스?”

 

“… 으브…”

 

“그래도 이젠 말도 잘 나오네?

조금은 괜찮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다.”

 

“… 으… …”

 

“이리로 와.

날도 추운데 사람 두 명이 굳이 떨어져 앉아 있을 필요는 없잖아.”

 

 

 

나는 무릎 사이를 벌려 손바닥으로 땅바닥을 쳤다.

그러자 앨리스도 알았다는 듯이 그 자리로 들어와 내게 몸을 기댔다.

빗소리보다 두 박자 정도 느리게 앨리스의 심장은 뛰었다.

조금 차가워진 앨리스의 체온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우, 잠깐 혼자 있었다고 벌써 추워지네.

역시 난 너희들이랑 이렇게 딱 붙어 다니는 게 최고인 것 같아.

그래야 더 따뜻하거든.”

 

“으브… …”

 

“너희 없었으면 어쩔 뻔 했니, 정말.

내가 옛날에 그런 문학 같은 것도 많이 봤었거든?

막 너희들이 날 버리고 배신하는 이야기, 그리고 후회하는 이야기.

그런 거 재미있다고 많이 읽었었는데.”

 

“… 으브브…!!”

 

 

 

앨리스는 심술 난 사람처럼 내 볼을 양손으로 꽉 붙잡았다.

내가 붕어처럼 몇 번 뻐끔거리자 그제서야 내 얼굴을 풀어주었다.

 

앨리스의 고개가 좀 더 내 몸 안으로 들어왔다.

숨에서 나오는 숨결이 앨리스의 몸을 타고 흘러 내려 팔 안쪽에 가둬졌다.

그 안이 우리 둘 사이에 가장 따뜻한 공간이 되었다.

 

 

 

“그럴 일 없다는 거야?

그래도 앨리스는 날 믿어주는 것 같네. 다행이야.”

 

“… 으… …”

 

 

 

앨리스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목이 원망스러운 것처럼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꽉 쥐기도 하고, 손톱으로 긁기도 하고,

그러다 내가 목에 손을 가져다 대면 날 쳐다보면서 다시 내 몸에 얼굴을 기댄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 정도만으로도 앨리스의 감정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옛날에는 그렇게나 말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하고 다녔는데,

정작 지금은 말 한마디 없어도 다 알아 듣겠다. 그렇지?”

 

“… 으브.”

 

“역시 세상 사는데 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거지.

말 하는 사람도 있고, 말 안 하는 사람도 있고.”

 

“…”

 

“너무 화난다고 그렇게 목 잡아 뜯지 마.

그러다가 흉터라도 생기면 내가 얼마나 가슴 아프겠니.

내가 앨리스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 …”

 

“솔직히 말하자면, 페더를 먼저 보낸 것도 이렇게 앨리스와 단 둘이 얘기할 시간이 없어서 그런 것도 있어.

여기서 몸이란 몸은 다 섞고 다녔던 것 같은데, 정작 앨리스와는 한 마디도 못했잖아.

난 그게 너무 아쉽더라. 앨리스는?”

 

“… 으부부…”

 

 

 

앨리스는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손을 자기 몸으로 가져와 천천히 자신의 가슴에 대었다.

차가웠던 몸은 어느새 온기가 돌고 있었다.

그게 내 몸이었던 건지, 아니면 앨리스의 몸이었던 건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 앨리스.”

 

“으부…?”

 

“내가 계속 생각을 해봤는데, 솔직히 무리한 부탁이었던 것 같아.

옛날 기억을 잊고 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하물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앨리스잖아.”

 

“…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그랬을 거야.

하트 카트 모양의 병정들이 자기를 죽이려 쫓아왔을 지 언정, 보이는 대로 다 죽이고 다니는 미치광이 싸이코는 아니었거든.

담배 피는 애벌래? 키 커지는 버섯?

하, 우리한테는 우스운 이야기지.

그것보다 더한 것들도 봐왔잖아.”

 

“…”

 

“앨리스와 내가 사는 세계는 이상한 나라라고만 하기엔 뭔가 부족한 것 같아.

... 잔혹하고, 끔찍한 나라지.

절대 잊을 수 없는 악몽 같은 곳.

그리고 또… 이렇게 비가 주구장창 게 어울리는 곳이기도 하고.”

 

“… …”

 

“그래서 나도 생각을 바꾸려고.

그냥 그 악몽에 계속 있어도 좋아.

깨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그렇게 목을 잡고 물어 뜯어도 돼.

내가 옆에 계속 있어줄 테니까.

꿈? 꿈은 그냥 꿈일 뿐이야. 앨리스가 잠겨 있고 싶다면 언제까지든 그럴 수 있는 꿈.”

 

“… … …”

 

“그러니까, 앨리스가 편한 대로 해줘.

대신, 깨고 싶을 때는 내게 말해줘.

그것만 해주면 난 충분해.”

 

“으…부… …”

 

“...

... 아, 맞다.

뇌파 증폭기를 켜놓고 있는 걸 깜박했네.

다른 애들이 우리 기다리고 있겠다.

날도 어두워서 찾기 힘들 텐데 말이야.”

 

 

 

나는 앨리스가 앉아 있는 다리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증폭기를 빼냈다.

다이얼을 돌려 화면에 나오는 숫자를 50으로 맞췄다.

82만 넘기지 않으면 될 거라 했으니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할 것이다.

 

앨리스와 이렇게 껴안고 있으니 체온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냥 다른 대원들이 올 때까지만 천천히, 이 시간을 즐기면 된다.

 

 

 

“… …”

 

“… …”

 

“…”

 

 

 

그렇게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빗방울을 맞으며 다른 부대가 합류하길 기다렸다.

십 분, 이십 분.

얼마나 오래 기다렸을까, 앨리스는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그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꽤 귀여웠지만, 안전을 위해 나는 앨리스를 무릎에서 내려 놓았다.

 

 

 

“오는 동안 뭔가 문제가 생겼나 봐.

방해 전파도 무력화됐을 텐데, 뭔 말이라도 들어와야 말이지.

레아는 지금 한창 싸우고 있을 테니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다른 애들은…”

 

“… 으브…?”

 

“아, 아직 잠에서 다 안 깼구나?

더 자게 해주고 싶은데, 아직은 일이 안 끝나서 힘들겠다.

나중에 오르카 호로 돌아가면 그 때 해줄게.”

 

“으부… …”

 

 

 

앨리스는 졸린 눈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감정이 치솟았다.

내가 지금까지 보여준 사랑이 충분했을까, 더 해줘야 했던 건 아니었을까, 

더 친절하고, 더 보살펴 줬어야 하는 거 아닐까,

 

앨리스의 표정 없는 얼굴은 아주 조금 올라간 입꼬리만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걸로 성에 차진 않았지만, 그와 별개로 그 표정이 난 너무나 기뻤다.

그냥 이대로 계속, 저 아이가 전부 치료될 때까지 계속 함께 있어주고 싶었다.

 

 

 

“… 내가 주변에서 애들을 찾아보고 올게.

아마 여기라면 앨리스도 안전할 거야.”

 

“으브…”

 

 

 

앨리스는 촉촉해진 눈망울로 내 바지자락을 잡아 당겼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파 그대로 있어야 할까 생각도 했지만, 더 기다리는 것은 손 놓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앨리스와 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움직여야 했다.

 

 

 

“그래, 나 가는 걸 싫어해주는 건 고마운데 지금 가지 않으면…

…!”

 

 


---콰과과과광!!!!!!

 

그 때였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크기의 천둥 소리가 주변을 덮쳤다.

하늘이 순간 하얘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 순간, 귀청을 찢을 듯한 천둥이 다시 한 번 들려왔다.

 

 

 

“레…아…?”

 

 

 

통신은 여전히 먹통이다!

아니, 뭔가 짙은 방해 전파가 통신을 가로 막고 있던 것이다.

 

하늘이 수 차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한다.

빗방울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번개가 내리쳤을 때, 무전기 너머로 약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이…ㄴ…. …니ㅁ…!!!!!!!”

 

“레아?

레아야?”

 

“주이…ㄴ… …님…!!

당장 피하셔야… …!!!”

 

“잘 안 들려!

레아! 다시 말 해봐!!”

 

“… … 미ㅊ…겠네 진짜!!!!!!!!”

 

 

 

지직거리는 음성을 끝으로 엄청난 크기의 번개가 하늘에서 쏟아졌다.

번개의 빛 줄기가 선이 아닌 면으로 내리치는 것이 보였다.

여기서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진 곳.

그 때의 천둥 소리는 정말 내 귀를 멀게 할 뻔했다.

 

 

 

“주인님!! 제 말 들리세요?!!!”

 

“아아... 천둥 소리가...

...

... 아, 이제 들린다.

레아야, 지금 갑자기 무슨… …”

 

“당장 거기서 도망치세요!!!

철충이… 철충이 오고 있단 말이에요!!!!”

 

“뭐?!”

 

“아이...!!! 2분!

아니, 1분만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갈 테니까!!"


"온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제가 번개로 전파장을 찢어버리긴 했지만, 곧 방해 전파가 다시 활성화될 거에요!!

지금이라도 당장…!!! ㄷㅐ…ㅍ… …!!!!”

 

“레아!!

레아!! 내 목소리 안 들려?!!!”

 

 

 

레아의 말대로 곧 통신은 종료되었다.

들어줄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소음만이 통신 피드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철충…?

AGS말고 철충이 갑자기 왜 나타난 거지?

분명 스토리에서는… …

… 아니다.”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이 없다.

이런 곳에서 상념에 빠져 있다가 철충들한테 잡혀 죽는 건 한사코 사양이다.

 

난 앨리스가 있는 곳으로 달려와, 앨리스를 품에 끌어 안아 업었다.

 

 

 

“으브!!”

 

“앨리스! 미안한데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 것 같다!

당장 도망쳐야…!!!”

 

 

---풀썩.

 

 

“… 뭐?”

 

 

 

앨리스를 챙기고 달리려는 순간, 우리가 쉬고 있던 나무 위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그리 크지 않는 덩어리였다.

30cm도 되지 않는 크기, 온통 빛나고 있는 초록빛 눈.

 

잊혀졌다고 생각했지만, 난 그걸 보자마자 그것이 뭔지 알 수 있었다.

 

 

 

“끼이이이ㅣㅣㅣㄱ------“

 

“아… 아냐… 안 돼…

왜 저게 여기에…”

 

“끼에에ㅔ에ㅔㅔ에ㅔㅔㄱㄱㄱ------------!!!!!!!!!!!!!!!!!”

 

 

 

익숙한 굉음이 숲 전체에 울려 퍼졌다.

저 멀리서 수풀을 뚫고 달려오는 것들의 소리가 들렸다.

 

난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저것들은,

사람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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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빨간색 글씨를 처음 썼을 때만 해도 다시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게 이렇게 되네




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