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작 설정과 다를 수 있읍니다.


* 알고 있던 캐릭터 성격이 이상해질 수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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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처럼 맞춰둔 시간에 일어나 기계처럼 일정을 따라 일을 반복한다. 다만 인간의 몸으로는 청결 상태의 유지나, 식사와 같은 업무에는 불필요한 행위를 해야 했기 때문에 인간이 경쟁사회에서 기계에 뒤쳐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서류를 바라보다가도, 단말기에 탐색과 정찰 보고가 올라오는 것을 틈틈이 읽고 있노라면 한 가지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게 되는 때가 온다. 이때서야 굳었던 몸을 풀고 잠시나마 글자에 사로잡혀있던 눈도 휴식을 취하게 되는데 인간들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 나무랄 인간이 없는 세계라는 점에서, 사령관은 자그마한 위안을 얻었다.

 

“그래, 모모의 가족을 되찾아 주고 싶다고?”

 

휴가 이후의 반동이라 해야 할지, 평소보다 많아 보이는 서류더미의 앞에 앉아있던 사령관은 마치 자신의 일인 양 간절해 보이는 레아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에서 벗어나 모두들 제 삶을 살고 있는 와중에서도 이미 씌어져 있는 각본대로 움직이는 이들이 있다는 것으로 사령관은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눈치 챘다. 곁눈질로 레아를 쳐다본 사령관은 그녀의 표정에서 진심으로 모모를 위한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상냥하고도 배려가 몸에 익어 늘 손해 보기 쉬운 성격이라고 묘사되어 있는 그녀의 캐릭터 설정과 한 치 어긋남이 없었기에, 사령관은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역시 주인님! 믿고 있었어요.”

 

해맑게 웃는 레아의 모습에 사령관은 모든 이들이 그녀와 같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젖어보았다. 남의 일도 자신의 일처럼 걱정하며 말만 번지르르하지 않고 직접 행동하는 레아는 말 그대로 손해 보기 좋은 성격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일수록 손해를 봐서는 안 되었다.

 

“레아, 남의 일에 도움을 주려는 이유가 뭐야? 네 자매들의 일도 아닌데.”

 

사령관은 이유가 듣고 싶었다. 자매들의 일도 아니고, 면식도 없던 이가 어째서 이야기만 듣고 도울 수 있는가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성격상의 이유라도 초면에 도움을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같은 곳에 살아도 서로 온기를 나눈 적 없는 사령관의 경우에는 더더욱.

 

“이유요? 글쎄요. 만약 모두가 자신의 이익만 생각해 상대에게 등을 돌린다면, 그건 아주 슬픈 세상일거에요.”

“누군가는 돕겠지.”

“그 누군가가 자신이 되면 안 되는 걸까요?”

 

느긋하고도 당돌한 대답이었다고, 사령관은 생각했다. 어쩌면 조금 더 살아가다보면, 그녀 같은 사람을 만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뒤편에 묻어둔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그래, 너 같은 애들이 대장해야지. 호의가 조건 없는 호의일 수 있게, 모두가 외면 받지 않을 수 있게, 노력해야지. 내가.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지.”

“후훗, 잘 해내실 것 같네요.”

“탐색 인원 편성해 줄게, 나가봐도 좋아.”

 

레아가 물러난 후 사령관은 이벤트를 정리한 서류를 꺼냈다. 스토리를 읽고, 메인 키워드를 정리하는 것이 그의 업무 중 하나였다. ‘만월의 야상곡’이벤트는 모모가 그녀의 ‘친구’인 백토를 구하고 싶은 염원이 들어가 있었다. 사령관이 스토리에서 파악한 바로는 팬텀과 네오딤의 경우로도 보아 ‘친구’가 메인 키워드임이 분명했다.

 

“친구라…….”

 

사령관은 친구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언젠가 배신할 것이라면 정을 주지 않는 편이 나았으니까. 그의 아버지는 수십 년을 알고 지낸 친구에게 사기를 당했다. 사령관은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라는 말의 의미를 아버지의 실패를 통해 지독한 가난에서 깨우쳤다. 다행인 것은 그가 정을 주기도 전에 아무도 사령관에게 정을 주지 않은 점이었다.

 

사령관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사실상 게임 스토리를 읽고 모두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이야기 따위,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자신이 무능한 모습을 보였을 때의 반응이 차라리 나았다. 적어도 자신에 대한 악의를 여과 없이 드러낸 이가 있었으니까. 바닐라의 매도에도 익숙한 듯 넘긴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것이 당연한 반응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주인공의 자리를 꿰찬 엑스트라인 사령관. 능력을 드러냄으로써 그를 인정해주는 이들이 생겼다. 더 이상 무능한 인간은 아닐지 몰라도 좋은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좋은 인간이었을 주인공을 흉내 내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오르카호의 인원이 사령관을 좋아한다 해도, 주인공을 연기하는 사령관을 좋아하는 것이지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오롯이 그일 수 있으려면, 역할에 잡아먹히지 않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사령관의 삶은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와도 같았다. 누군가는 답을 쉽게 구해내지만, 사령관은 정답은커녕 푸는 방법도 몰랐다. 그의 인생은 누군가 내린 ‘오답’이라는 표시로 가득 채워졌다. 세상은 오직 정당한 풀이로 얻은 정답만을 원했다. 다른 풀이가 있을 법만도 한데, 정도(正道)를 따라가지 않은 인생은 편법 취급을 당했다. 그러나 대다수가 따라가는 삶의 방식에 순응하지 못하면 답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처럼 불행해질 뿐이었다.

 

“…일이나 하자.”

 

사령관은 한숨을 내쉬며 기계처럼 다시 손을 움직였다.

 

***

 

모모는 자신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백토 수색 팀을 흘긋 바라보았다. 이야기가 나왔을 당시 돕겠다던 레아와 트리아이나 이외에도, 팬텀과 네오딤, 닥터와 켈베로스까지 꾸려진 믿음직한 편성을 보자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모모는 오르카호에 합류하고 그와 대화한 적이 없다. 그렇기에 이번 수색 요청도 아주 소수의 인원들로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모모 일행의 안전을 위해 편성된 이들을 보니 왠지 모르게 그녀의 눈가가 시큰거리는 것만 같았다.

 

“하핫, 역시 캡틴이네. 안전 과민증다워.”

“사령관님은 평소에도 이러세요?”

“어휴 말도 마.”

 

트리아이나는 모모에게 자신이 겪었던 일을 상세히 말해주었다. 사령관이 얼마나 자신들을 아끼는지, 바이오로이드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면서도 위험할 것 같으면 거부하고 본다는 것, 그러면서도 막상 세이렌이 위험할 때 인간의 몸이면서도 직접 감싸려고 희생한 사령관의 무용담은 모모 또한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정말, 저희랑은 다르게 진짜로 마법을 부리시는 분 같아요.”

 

모모는 자신의 복장을 내려다보았다. 거추장스러운 프릴이 달린 옷, 기능 따위 하나도 없이 그저 예쁨 받기 위해 장식된 불편하기 짝이 없는 마법소녀의 복장. 그것을 보고 모모를 동경할 어린 아이들은 이 세상에 없다.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것이 그녀의 존재 이유라고 여겨왔기에, 상실감은 더욱 컸다. 더군다나 막상 남겨진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것은 아이들의 우상이었던 자신이 아닌 사령관이었기에, 모모는 당장 거추장스러운 자신의 옷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백토.”

 

백토의 경우는 어째서인지 세뇌에서 풀리지 않아 자신이 배우로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잊고 허상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모모는 차라리 현실을 잊고 허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지키며 백토처럼 사는 것이 나을지, 자신처럼 깨어나 비참한 현실을 맞이하는 것이 나을지 고민했다. 애초에 백토가 자신처럼 세뇌에서 깨어나도 행복할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 그녀의 고민이 표정에서 드러났는지, 트리아이나가 모모에게 안심시키려 했다.

 

“걱정하지 마. 캡틴이라면 뭐든 해결해 줄 테니까!”

“사령관님은 유능하시니 말이에요. 저랑은 다르게…….”

“응? 뭐라고? 주변이 시끄러워서…….”

 

트리아이나는 편성된 이들의 잡담에 웃음을 띠고 말하는 모모의 자조 섞인 말을 듣지 못했다. 모모의 안에서 어둠이 침식하기 시작했지만, 그녀 본인을 포함해서 주변의 모두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늘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띠고 밝은 것이 그녀와 그녀의 특징이었기에, 꿈과 희망을 가져다준다는 마법소녀가 우울의 늪에 빠질 거란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했다. 일종의 확증편향이었던 셈이었다. 그러나 민폐를 끼치기 싫어하는 그녀의 성격상, 백토를 한시라도 빨리 찾아 모두와 귀환해야 했다.

 

“저는 이 쪽을 찾아볼게요!”

 

***

 

“세이렌 양. 오늘 왜 여기 있는지는 알고 계시죠?”

 

오르카호 내부에 있는 다목적실, 엄한 표정의 교사가 한 손에 회초리를 들고 한 명을 위해 열린 교실에서 위협적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약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공진의 알렉산드라는 가정교사를 필요로 하는 최고위층을 위해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였다.

 

“네.”

 

반면 책상에 얌전히 앉아있는 어리고 여린 소녀의 이름은 세이렌. 겉보기와 다르게 호라이즌 부대의 부함장이라는 중책을 맡은 얌전한 소녀였다. 그러나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라는 말이 있듯, 겉보기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알렉산드라는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칠판에는 단 세 글자, ‘성교육’이라고 적혀있었다. 예의바르고 얌전한 소녀가 저지른 일은 무려 사령관 강간 미수였다. 처음 그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세이렌을 본 알렉산드라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무엇이든 겉보기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어려보이긴 해도 세이렌은 바이오로이드고, 사령관은 인간이었다. 힘으로 제압하면 저항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게다가 왜인지 바이오로이드에게 쩔쩔매는 사령관의 모습을 떠올리면 애초에 그가 스스로 세이렌을 타이를 유형이 아니었음을 직감했다. 그렇기에 사령관이 세이렌에 관한 교육을 요청해왔을 때, 알렉산드라는 자신이 맡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도 성적인 행위를 하려하면 그건 ‘죄’입니다. 아시겠어요?”

“알렉산드라 님.”

“지금은 ‘선생님’입니다.”

“네, 선생님. 제가 생각하기엔 사령관님이 당황하셔서 그렇지, 좋아하셨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알렉산드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소녀는 무엇이 지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그릇된 교육이 아이를 망치는 것을, 알렉산드라는 잘 알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워울프도 이 자리에 앉혀서 교육하고 싶었으나, 지금 당장 급한 것은 눈앞의 소녀였다.

 

“성행위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 쪽의 욕망으로는 안돼요. 그리고 법적으로도 문제입니다. 어린 아이와 어른의 사랑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불공평해요.”

“네?”

“저희는 수년이 지나도 계속 이 모습일 텐데, 그 ‘법’대로라면 저는 사령관님을 아무리 연모해도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건가요?”

 

알렉산드라는 교사 생활 중 처음으로 당황했다. 시험 문제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대답해줄 수 있었어도, 이런 방면에서는 그저 아동보호법에 따라 인간이 세운 ‘법’이 그렇다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저는 바이오로이드인걸요. 인간의 법은 인간에게 적용시켜야 하잖아요.”

“그…런가?”

 

멸망 전 바이오로이드 문제로 떠들썩했던 그들의 인권문제. 결국 바이오로이드들은 법을 제정해 줄 인간이 모두 사라져 그들 관련된 법은 주인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에머슨 법만이 있었다. 자신들의 처지에 불평을 가지던 바이오로이드들은 몇몇 보아왔으나, 오히려 인간의 법을 자신을 위해 이용하는 세이렌의 모습을 본 알렉산드라는 골이 지끈거렸다.

 

“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사령관에게도 사회적 위신이라는 것이 있죠!”

“선생님. 저는 사령관님을 연모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런 체형으로는 사령관님이 소아성애가 아닌 이상 그분의 관심을 받기 힘들겠죠. 그러나 인간이 만든 법을 지킬 인간은 사령관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졌고, 아무도 사령관님을 욕보일 수 없어요. 그렇다면 이건 기회가 아닐까요? 저희도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릴 기회요. 선생님이 가르쳐 주셔야 할 것은 어린 몸의 저희라도 그분과 사랑할 수 있도록 어른의 사랑을 알려줘야 한다고 봐요.”

 

알렉산드라는 세이렌의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가 알고 있는 성지식을 모두 세이렌에게 전해주었다. 왜 그녀가 부함장이 되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세이렌은 지식의 습득이 빨랐다. 알렉산드라가 하나를 가르쳐주면 세이렌은 새로 얻은 지식을 응용해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는 법을 익혔다. 다목적실은 두 사람의 교육열로 데워져갔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아는 세이렌의 모습에, 알렉산드라는 교사로서 뿌듯함을 느꼈다. 긴 시간동안 세이렌에게 지식을 주입한 알렉산드라는 만족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령관에게 찾아가 교육 진행 상태를 보고하며 그녀와 관계를 맺어도 된다고 일렀다.

 

“…….”

“…….”

 

사령관은 마침 라비아타에게 내린 벌의 기간이 다 되어 그녀에게 자유를 허락하던 참이었다. 그는 라비아타의 안경에 걸린 자물쇠를 풀고는 곧바로 알렉산드라의 안경에 다시 채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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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오려는 모모

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