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링크

 

1화 :   (문학, 삽화) 우리집 브닐라 -1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2화 :   (문학/삽화) 우리집 브닐라 2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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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다리에 감각이 없슴다.

 

“Fuck, mate. So they actually pay for these crippled pussies?”

(아니 씨바, 사람들이 진짜로 이런 불구 섹돌들을 돈 주고 산다고?)

 

       ...아픔다.

 

“I kid you not. You won’t believe how Asians go crazy over them.”

(농담 아냐. 동양놈들이 이것들한테 아주 환장을 한다니까.)

 

       ...너무 아픔다.

 

“Heh, insane motherfuckers. Why would you get a fake one when you can just pick up any random chicks in the streets?”

(헤, 별 미친놈들 다 보겠네. 길거리에 널린 게 잡년들인데 뭐 하러 가짜를 산대?)

 

“...You know people here also buys Bio-fuck-toys right?”

(...너 여기 사람들도 바이오 섹돌들 사고 그러는 거 알지?)

 

“Actually everyone on this fucking planet does.”

(씨바 지구촌 전체가 섹돌을 사 모으고 있다고.)

 

      무섭슴다.....이렇게 죽기는 싫지 말임다.....

 

“Besides, who knows if those hobos have STDs or something.”

(그것도 그렇고, 길거리 잡년들한테서 병이라도 옮으면 어쩌려고.) 

 

“Meh, whatever dude. I prefer the real ones.”

(메, 알게 뭐야. 난 진짜가 더 좋거든.)

 

“Heh, if you say so.”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누가 좀 도와주십쇼.....아무나....제발.....

 

“...Uh guys? I think this one’s awake...”

(어...지금 이거 깬 거 같은데...?)

 

“Shit! Get me some god damn tranquilizers! Now!”

(이런 썅! 진정제 갖고와!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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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자리에 앉혀놨더니 브닐라는 벌써 꾸벅꾸벅 졸고 있다. 그 와중에 꿈자리가 뒤숭숭한지 연신 “으으...”하며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보는 내가 다 찝찝하니까 흔들어서 깨워주자.

 

“야, 일어나. 주인은 뼈 빠지게 일하는데 메이드가 졸고 있으면 그림이 맞냐?”

 

“에...으벱...죄송함다...하암-”

 

여전히 졸린 모양인지 연신 하품을 해대는 브닐라. 나는 고개를 젓고는 다시 작업에 들어간다. 보아하니 누가 또 멋대로 단말기 하나를 옮긴 것 같다. 다들 위치 고정이라 함부로 옮기면 사내 네트워크 전체가 다운될 수 있다고 수차례 경고를 했는데도 이 모양이다. 이 인간들은 학습 능력이란 게 없나.

 

그렇게 업그레이드 하자, 이거 더 달아놓자, 하는 데도 예산 아낀다고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이런 꼴이 나오지. 더구나 하도 연식이 오래된 점검 시스템 때문에 정확히 어느 단말이 말썽인지도 알 수가 없다. 알 수 있는 건 6층과 7층 두 곳에서 문제가 시작되었다는 정도. 

 

근데 여기가 뭐 제일 많은 곳인데. ZOT됐네.

 

우선 케이블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으니, 점검 장비와 LAN 다발을 챙겨 일어난다. 그새 다시 비몽사몽하는 브닐라를 깨우는 것도 잊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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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동안 두 층을 돌아다니며 모든 공유기, 프린터, 전화기 및 PC를 일일이 헤집고 다닌 끝에 얼추 사태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누가 그랬는지는 몰라도 책상 위치는 외워 놨다. 다음번에 보이면 조인트를 아주 세게 걷어차 줄 생각이다. 각오해라 쓰바것들.

 

참으로 정신없었던 일이 끝나자 마침내 잠시 자리로 돌아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브닐라는 빈 의자에 앉아 심심하지 말라고 던져준 스페어 노트북을 한참 만져대는 중이다.

 

이어폰까지 끼고서 뭘 그리 열심히 보는지, 간간히 ‘오오’ 하면서 감탄사를 뱉는다. 뭐 이상한 거라도 보는 건 아니겠지. 

 

이런 저런 도구들을 공구 상자에 가져다 놓으러 가던 중,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고마운 줄을 모르는 한 여사원, 미스 K다. 상대방 기분을 아주 효과적으로 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여자다. 

 

“아싸, 이제 되네. 아니 근데 뭘 했길래 이렇게 늦은 거야? 병신 아냐? 이럴땐 빠릿빠릿-”

 

“지금 우리 주인님 보고 ‘병신’이라고 하셨습니까?”

 

어떻게 들었는지 브닐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인상을 찌푸린다. 미스 K는 벙찐 얼굴로 브닐라를 쳐다보다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거 니 거야?”

 

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미스 K는 잔뜩 인상을 구겼다.

 

“우웩, 이거 쪼다새낀줄 알았는데 완전 변태새끼였네? 꼭 창년을 구해도 지 닮은 것만...” 

 

썅것이 선 넘네.

 

나는 재빨리 미스 K의 PC 뒤편, 파워 서플라이를 내려버렸다.

 

네트워트 오류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수 시간을 작업해온 파일이 한순간에 무(無)로 돌아간 것이다. 아이 꼬시다. 그러나 하늘이 꺼진 듯 허탈한 표정을 짓던 미스 K의 얼굴이 분노로 가득 차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 시바! 아직 저장 다 안 됐는데! 뭐하는 짓이야 개새끼야!”

 

“뭐긴 뭐야. 병신이 병신짓 한 거지.”

 

열 좀 더 받으라고 어깨를 한 번 으쓱여주고, 스리슬쩍 브닐라를 데리고 전산실로 들어갔다. 등 뒤에선 미스 K의 괴성이 들려온다. 아직까지 세상에 익룡이 있었다면 아마도 저런 소리를 내었으리라. 저런 꼴이 되기 싫으면 Ctrl + S를 생활화합시다, 여러분.

 

“저 분 마음에 안 듬다.”

 

브닐라가 입을 삐쭉였다.

 

“주인님처럼 부지런하시고 착하신 분이 또 어딨다고 저러는지 모르겠슴다.”

 

“만난 지 이틀밖에 안 된 애한테서 그런 말 들으니까 우습다, 야.”

 

그러자 브닐라가 내 쪽을 보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감이라는 게 있지 말입니다! 전 주인님을 처음 뵀을 때부터 정말 좋은 분이라고 느꼈슴다!”

 

그러더니 녀석은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제 감은 틀리지 않은 것 같지 말임다.”

 

뭐래.

 

무슨 감이 어쨌다는 건지 난 잘 모르겠다. 어쨌든 급한 불도 껐고, 여기서 내가 더 할 일도 없을 것 같으니 슬슬 다시 나가서 남은 휴일을 즐겨볼까.

 

...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부장이 전산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지.

 

“어, 야, 여깄었네. 가서 내 컴퓨터도 좀 만져봐라. 뭐가 문젠지 이게-”

 

뚱땡이 부장의 눈깔이 구석에 앉아있던 브닐라에게로 향했다. 브닐라 또한 갸웃거리며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부장을 쳐다본다.

 

“혹시 주인님 상급자 되십니까?”

 

“어쭈, 노리개도 하나 뽑았네? 새끼 요즘 살만한가 봐?”

 

“살만하면 달랑 하나만 뽑았겠습니까?”

 

부장이 나를 보려본다.

 

“...말뽄새는 한결같네. 그나저나 이거 못 보던 년인데? 어디서 구했냐?”

 

놈이 브닐라를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옆에서 봐도 알 수 있는 끈적하고 음흉한 눈빛이다. 브닐라도 그 시선을 느꼈는지, 얼굴을 피하며 앞치마를 잡아당기고 있다.

 

“동양적인 미가 부족한 게 삼안 거는 아닌 거 같고....덴세츠 건가? 아닌데, 거기 거 치곤 너무 수수하고...펙스 건가?”

 

품평하듯 바닐라 주변을 거닐며 중얼대는 부장. 나는 챙기던 가방을 내려놓고 놈을 지켜보았다.

 

“흠...펙스 년들 치고는 또 눈에 총기가 없단 말이지. 어디 듣보잡 메이커 제품인가?”

 

놈이 갑자기 브닐라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어우 시바, 여긴 또 존나게 탱탱하네. 뭐 운동하던 년이냐?”

 

“무...무슨.....병영부조리지 말입니다!”

 

“뭐? 병영? 이거 총알받이였어? 으하하하!”

 

박장대소를 터뜨리는 부장.

 

“이 새끼 이거 반병신된 고기방패한테 메이드복 입혀놓고 정신승리하고 있던 거였냐? 와, 웃기네, 웃겨...”

 

놈이 이어서 브닐라의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으앗! 이러지 말아주십시오...”

 

“오, 의외로 여긴 또 말랑하니 촉감이 좋네.....야, 이거 하루만 빌려주라. 시승해보고 후기 남겨줄게.”

 

얼굴 전체로 당혹감을 표현하는 브닐라였지만, 인간의 손길을 함부로 거부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몸만 움찔대고 있다. 

 

하지만 난 다르다. 영 못미더운 신세긴 해도, 일단 인간은 인간이란 말씀. 여기선 내가 총대 메고 나서는 수밖에 없다.

 

“컴퓨터 손봐달라고 오신 거면 일 얘기만 하세요. 남의 식구 함부로 주물럭대지 말고.”

 

나는 부장의 손을 잡아떼며 그를 문 쪽으로 몰아갔다. 그러자 그 뚱보는 개껌을 뺏긴 치와와 마냥 이빨을 드러내며 입가를 파르르 떨어대기 시작했다.

 

“시발놈이 지금 누구한테 손 대고 지랄이야? 저 누더기 중고 백마가 그렇게 아깝냐? 하긴, 흙수저 물고 자라 갖곤 애비애미도 없던 새끼한테 뭘 바래. 어휴 드러운 새끼.”

 

놈이 칵 퉤, 하며 누런 가래침을 내 신발 위에 뱉어냈다.

 

“반기업 활동가 집안 출신이라매? 새끼, 딱 봐도 견적이 나오네. 저건 내가 드러워서 손 안 댄다. 니 더러운 손 닿은 거면 떡감도 존나게 별로일거야. 안 봐도 비디오지 씨이바.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저 외국산 걸레나 주무르고 있든가.”

 

놈이 비웃음을 흘리며 문고리를 돌리던 순간, 갑자기 브닐라가 부장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우리 주인님께 사과하십쇼! 뱉으신 것도 치우고 가십쇼!”

 

“.....뭐?”

 

놈이 다시 몸을 돌려 브닐라와 마주했다. 온몸에서 노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브닐라의 기세도 놈에 뒤지지 않았다.

 

“저같은 건 뭐라고 욕하셔도 신경 안 씁니다. 하지만 우리 주인님께서는 그쪽 인간분한테 함부로 욕 들을 분이 아닙니다! 게다가 자기가 못하는 일을 해달라고 부탁하러 오셨으면서, 무슨 태도가 그따위심까! 군기가 엉망이지 말입니다!” 

 

부장의 이마에 온작 주름이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새겨지기 시작한다. 아니 얌마....나야 인간이니까 깽값 물기 싫어서라도 안 덤벼도, 넌 상황이 다르잖아...

 

“아무리 상급자라고 해도 하급자에게 그런 불합리한 요구를 하는 건 군기위반입니다! 그리고 지금 인간님께서 저지르신 건 징계도 경고도 아니고 그냥 근본 없는 꼬장이지 말입니다! 그런 걸 우리 쪽에선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똥군기라고 함다! 인간님이시면 품위를 지키실 줄 아셔야 합니다! 모범을 보이지 않는 상급자는 하급자한테 존경받지 못합니다! ”

 

부장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브닐라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그리고 저도! 그쪽 인간님같이 막돼먹은 분은 싫지 말입니다!”

 

“야야, 브닐라야 그쯤 하고-”

 


 

 


“이런 쒸발년이.”

 

말릴 새도 없이 부장은 브닐라의 뺨을 세차게 올려붙였다. 짜악! 하는 소리가 온 방을 울린다. 군용 출신인 브닐라의 고개가 홱 돌아가는 것이 꽤나 힘껏 내지른 일격인 모양이다. 

 

“이게 개념을 사료에 말아처먹었나. 어딜 인간한테 따박따박 말대꾸야, 개썅년이. 아우 씨바 이 좆같은 걸 그냥-”

 

그대로 한 대 더 올려붙이려던 부장을 제지한다.

 

“애 다치면 물어낼 자신 있으니까 치신거죠 지금? 사람만 깽값 무는 줄 아시나. 수복비 물어낼 자신 있어요? 지금 쟤 주인은 엄연히 납니다?”

 

속물에겐 속물다운 경고가 가장 잘 통하는 법. 녀석은 손을 올린 자세 그대로 한동안 씩씩대더니, 이내 손을 내리고 나를 돌아본다.

 

“그래, 그럼 주인이 훈육하면 문제 없는 거지? 설마 저 버릇 없는 년을 그대로 둘 거야?”

 

뭐래, 새끼가. 버릇은 지금 누가 없는데.

 

“옛말에 고장난 기계는 세게 때려줘야 고쳐진댔다. 내 앞에서 니가 얘 다섯 대만 쳐줘. 그럼 좀 나아지겠지. 네 말대로 이런 건 주인이 해야지, 그쟈잉?”

 

이 새끼 표정이 진지하네. 진짜로 내가 얘 뺨을 올려붙이기 전까진 안 나갈 기세다. 

 

“주인님, 전 괜찮슴다. 저 때문에 이 이상 난처해지시면 안 되지 말임다.”

 

브닐라는 눈을 질끈 감고, 열중 쉬어 자세로 내 앞에 섰다. 그 옆에서는 부장이 숨을 쒹쒹대며 나를 노려보고 있다. 놈의 비대한 배가 팽창하고 수축하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이대로 따라가주면 안될 일이지.

 

난 과장되게 놀란 듯 행동하며 재빨리 폰을 꺼내 얼굴에 바짝 대었다.

 

“어어, 이럴 때 호스팅 업체에서 전화가 왔네. 아, 네네, 네 웹스토리지 오류 원인은 찾으셨나요? 아, 아직이요? 네, 네, 괜찮습니다.”

 

혼신의 연기를 펼치며 브닐라의 손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선다.

 

“주인님, 전화기 꺼져있-”

 

“아아!!! 예!!! 잘 들립니다!!! 예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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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브닐라를 끌고 옥상 정원까지 올라왔다. 어느새 하늘은 주황색이 되어 있었고, 연하늘색 색조가 은은히 남아있는 가운데, 곳곳엔 비행정들과 구름이 섞여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따금 낮에 보이는 달처럼, 몇몇 궤도 플랫폼들도 하늘 위에서 나름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고생했어. 자.”

 

자판기에서 꺼낸 따뜻한 캔커피를 브닐라의 손에 쥐어주었다. “감삼다”하며 양손으로 캔을 꼭 쥐고 홀짝이는 녀석을 보니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든다. 놈에게 맞은 뺨이 아직도 벌겋게 부어 올라있었거든. 의도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내 탓인 셈이다.

 

“저...주인님.”

 

금새 커피를 비워낸 브닐라가 입을 열었다.

 

“아까는.....감사했습니다. 그냥 절 때리셨으면 더 편하셨을 텐데...”

 

“그게 무슨 말같지 않은 소리야. 그럼 널 무슨 낯으로 보라고. 한번 보고 말 사이도 아닌데.”

 

뜨끈한 커피가 목을 타고 넘어간다. 니글니글한 단 맛이 혀를 자극한다. 이 맛이 싫어서 캔커피를 잘 찾지 않지만, 자판기에 따끈한 거라곤 이게 전부라 어쩔 수 없었다.

 

“그...상급자 분이 저 때문에 주인님을 더 괴롭히고 그러면 어쩜까?”

 

“괜찮아. 저래 보여도 간이 작은 놈이라 우린 안 건드려. 고소도 여러 번 당해봐서 나름 몸을 사리고 있거든.”

 

“손대기가 무서워서 말로 갈구는 검까? 무지 치사하지 말임다!”

 

“킥킥, 치사한 거 맞지.”

 

 


 


잠시 침묵이 흐른다. 쌀쌀한 바람이 등을 몇차례 훑고 지나가자, 브닐라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제가...주제넘게 나섰다면 죄송합니다, 주인님. 도처히 참을 수가 없어져서...” 

 

“아냐, 잘 했어. 보통은 그러면 안 되지만...솔직히 나야말로 고마웠어.”

 

거짓말이 아니다. 나 때문에 뺨 맞은게 미안해서 빈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제까지 살면서 내 편 들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거든.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누명을 쓰건 억울한 일을 당하건 아무도 도와주질 않았어. 그런데 오늘 네가 그렇게 나서주니까...엄청 고맙더라. 뭐라고 표현해야 될 지를 모르겠네. 마치...”

 

“...가족이 생긴 것...같으셨슴까?”

 

응? 하고 옆을 돌아보니 브닐라가 예의 그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니, 뭔가 다르다. 몇차례 보았던 순박한 함박웃음이라기보단, 어딘가 아련한 듯한 눈빛을 하고 있다.

 

“예전에 제가 알던 분이 그러셨지 말입니다. 함께 지내는 전우들은 뭐가 됐든 다 가족이라고. 그리고 가족이란 건, 전우들이 곤란할 때면 무슨 수를 써서든 도와주는 거라고 말임다.”

 

녀석이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어간다.

 

“제 주제에 이런 말 하기도 그렇지만 말임다, 이제 주인님께서는 제 가족같은 분이심다. 그러니까...가족..이니까 말임다...어떻게든 도와 드리고 싶었던 검다.”

 

멋쩍은 듯 머리를 긁는 브닐라.

 

“제가 워낙 띨빵해서 제대로 못한 것 같긴 하지만 말입니다.”

 

“아냐, 무지 잘했어. 그 양반 아마 집에 가면 고작 너 같은 거한테 그런 소리 들었다고 질질 짤 걸?”

 

가족이라. 말이야 많이 들어 왔지만, 내게는 조금 생소한 개념이다. 어렸을 땐 내게도 가족이 있었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었지. 살다 보니 그런 공상을 할 겨를도 없어져서 잊어먹고 있었지만.

 

그런데 이 녀석...브닐라는 나를 가족으로 여긴단다.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나를. 뭐라고 해야 할까. 웃기는 일이다. 바보 같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맙다.

 

...그런데 가족을 돈으로 사는 경우도 있나. 

 

에라이, 알게 뭐냐. 같이 살기 ZOT같은 가족들도 널려 있다는데, 돈으로 산 가족이라고 안 될 거 있겠나.

 

“아까... 내가 네 가족이라는 얘기, 진심이야?”

 

“그럼 제가 거짓말 하겠슴까!”

 

이히힛, 하며 녀석이 웃음 짓는다. 묘하게 설득력 있는 표정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난 그런 가족을 반품하려고 했는데도?”

 

“안 하셨으면 됐지 말임다! 그리고 그런 얘기는 안 하시면 안됨까?”

 

“하하, 알았어. 미안, 미안.”

 

괜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딱히 볼만한 게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나도 모르게 눈가가 시큰해져서 그런다. 모양 빠지게. 서서히 눈앞이 흐려진다.

 

내가 하늘에 구경거리가 있어서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브닐라도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다.

 

“뭐가 보이심까?”

 

자기 생각엔 아무런 볼거리가 없다고 여겼는지, 브닐라가 의아한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아니.”

 

“그럼 저기는 왜 보고 계심까?”

 

“...좋아서.”

 

“잘 못들었슴다?”

 

“아무것도 아냐. 아우, 그보다, 하도 화면을 많이 봐서 그런가 눈이 뻑뻑하네.”

 

고인 눈물을 브닐라가 볼세라 잽싸게 눈가를 비빈다. 

 

“슬슬 갈까? 지금쯤이면 그 놈도 딴데 갔을 테니까. 가방만 얼른 챙겨서 나가자.”

 

“아...아, 예! 알겠슴다!”

 

빈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려던 그 때, 브닐라가 내게 손수건을 불쑥 내밀었다.

 

“주인님, 이거 받으십쇼.”

 

“엥, 이건 왜?”

 

브닐라는 아무 말 없이 손수건을 들고 날 바라본다.

 

“히힛,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게 가족이지 말입니다.”

 

슬쩍 자기 눈가를 가리키는 브닐라. 결국 본 건가. 쪽팔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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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출퇴근 때를 피한 한적한 시간대여서인지, 별다른 문제 없이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이고 피곤하다. 근데 뭔가를 잊은 것 같은데.

 

아, 브닐라 구경시켜주는 걸 깜빡했네.

 

아침에 나갈 때만 해도 들어오면서 외식이라도 시켜줄까 했는데...하도 정신이 없어서 잊어버린 것 같다. 당장 부엌도 못 쓰는데 집에 달리 먹을 것도 없고.

 

집에 돌아와서 기분이 좋은 건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브닐라. 그 녀석 몰래 한숨을 쉬고는 물이라도 꺼내려고 냉장고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눈에 딱 들어오는 배달음식 전단지.

 

그중에 가장 무난해 보이는 치킨과 피자 전단지를 떼어냈다. 솔직히 지금 입맛엔 피자에 맥주지만, 오늘은 브닐라가 먹고 싶은 쪽으로 시켜보도록 하자.

 

“브닐라, 혹시 후라이드 치킨 좋아해?”

 

“후라이드 치킨? 허억, 닭을 튀겨도 먹슴까? 무지 맛있을 것 같슴다!”

 

.....후라이드 치킨을 몰라?

 

“...어, 그럼 피자는 먹어봤어?”

 

“우웩, 전투식량 팩에 있는 건 먹어봤슴다. 케찹 묻힌 마분지 맛이었지 말임다. 으으...”

 

“...”

 

슈밤 그냥 둘 다 시키자. 

 

주저 없이 주문을 넣은 지 20분 정도 지났을까, 베란다 창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다.

 

“익스프레스 왔어요! 라비아타 치킨 반반 무많이, 스마트 엣지 피자 엑스트라 라지 맞나요?”

 

창문을 열고 신속하게 카드를 긁었다. 힘차게 인사하고 날아가는 배달 바이오로이드의 뒷모습이 참 씩씩해 보인다. 어차피 보진 못하겠지만 손을 흔들어주고, 음식들을 들고서 식탁 앞에서 대기 중인 브닐라에게 다가갔다.

 

콜라와 절임무, 피클과 디핑 소스까지 보기 좋게 세팅을 마쳤다. 냉장고에 넣어놓은 맥주를 꺼내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싸리 캔맥주는 히야시가 되어 있어야지.

 

 



 

 

이 녀석, 눈도 잔뜩 풀려서는 침 넘어가는 소리가 꼴깍꼴깍 들리는 게 어지간히 배고픈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근데 왜 가만히 있지.

 

애처로운 소리까지 내어가면서도 음식에 손을 대지 않는다. 굳이 음식들을 브닐라의 방향으로 돌려주어도, 녀석은 넋을 놓고 쳐다만 볼 뿐.

 

“...배 안고파?”

 

“조금 고프긴 합니다. 그런데.....저건 주인님께서 드실 음식이지 말임다. 제가 손대면 안 되는 검다.” 

 

“...얼른 먹어. 이거 너 먹으라고 시킨 거야.”

 

 


 

그제서야 화색이 되는 브닐라. 눈동자에서 별과 하트 표시가 보일 지경이다. 살면서 저렇게 행복한 표정은 처음 본다. 사람이건 바이오로이드건.

 

“자...잘먹겠습니다!”

 

인내의 시간만큼 보상을 받겠다는 건지, 녀석은 그야말로 걸신들린 듯이 치킨과 피자를 집어먹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다리, 한 손에는 치즈가 줄줄 녹아내리는 피자. 양 손을 바쁘게 놀리며 녀석은 허겁지겁 배를 채워갔다.

 

“우음...의궈...짐짜 마쉬음다!”

 

“야, 야, 안 뺏어먹으니까 천천히 좀 먹어. 그러다 목에 걸리겠다.”

 

군용 출신 아니랄까봐 식사도 참 전투적이다. 식탁의 반 이상을 덮었던 피자는 어느새 3/4이 사라져 있었고, 치킨도 남아있는 조각이 거의 없었다.

 

입가와 손가락에 묻은 기름기를 행복한 얼굴로 핥아대던 브닐라가 그제서야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 그...주인님은 안 드십니까?”

 

네가 하도 절박하게 먹어대서 차마 끼어들지 못했다, 라고는 할 수가 없어서 멋쩍게 ‘하하’하고 웃음을 짜냈다.

 

나야 뭐 맥주랑 남은 거랑 좀 먹으면 배는 얼추 채워지겠지. 그래도 별것 아닌 배달음식에 저렇게 행복해하는 녀석을 보니, 먹은 것도 없지만 배가 부른 기분이다.

 

짜식, 기회되는 대로 맛난 거 좀 자주 사 줘야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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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회사에서 별 할 일이 없어서 글 쓰고 그림이나 그려댔네요.


원래는 내일이나 모레 쯤 올리려고 했는데, 그 때는 바쁠 것 같아서 지금 미리 올립니다.


짧지 않은 분량인데도 다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힣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