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를 여는 것이 제야의 종이라면, 한해를 마무리하는 것은 정산이려나. 문득 내가 썼던 글을 정리하고 팠기에, 나는 오르카 호의 도서실으로 향했다.

 

 닥터와 포츈의 존재로 인해 오르카 호는 최첨단 과학기술이 도입된 잠수함이지만, 도서실의 출입문만큼은 목재로 되어있다. 도서실은 무조건 목재 미닫이문이여야 한다던 하르페이아의 고집때문이었다. 다들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원탐색을 위해 고생한 그녀를 못본 체 할순 없던 노릇이었다. 나는 목재 손잡이를 잡고 문을 민다.

 

 하르페이아의 고집이 ‘끼이익’거리며 자기주장을 한다. 그리고 곧장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책들의 산. 책이 주는 압도감은 익스큐셔너, 칙케미컬이 주는 압박감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 압도감은 오래된 책이 주는 종이의 퀴퀴한 냄새와 뒤섞이며 오묘한 감각을 준다. 어쩌면 이 감각이 하르페이아가 의도한 건 아닐까.

 

 “사령관, 왔어?”

 도서실의 사서, 하르페이아는 천장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응. 내가 썼던 글들을 정리해보고 싶어서 말야”

 나는 간단히 방문한 이유를 말하며 도서실의 원형 테이블에 앉는다.

 그러자 하르페이아는 “그럴줄 알았어~”하면서 책무더기를 한아름 안은 채 날아와 내 옆에 앉는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책들 사이에 눌려있는 모습을 보는 건 도서실에서만 맛볼 수 있는 감상이다.

 

 이미 책에 몰두해버린 그녀는 나의 시선따위 아랑곳않는다. 아니, 나의 시선을 느끼는 것은 그녀로서 최고의 기쁨일지도. 그녀는 내가 썼던 부끄러운 결과들을 하나하나 꺼내 내 앞에 꺼내놓는다.

 처음에 내놓는 건 ‘사령관의 프로레슬링 이야기’ 시리즈(2021.02). 프로레슬링 정보들을 취합한 글이었다.

 '클로스라인과 래리어트의 차이'

 '크리스 벤와'

 '챔피언 벨트'

 '저먼 수플렉스'

 '기믹'


 “사령관이 침대 위 레슬링말고도 프로레슬링을 이렇게 좋아했을 줄이야” 하르페이아가 푸념하듯 혼잣말을 한다.

 “영화나 연극같은 일종의 엔터테인먼트니까. 하지만 괜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너희들을 통해 쓴다는 것에 양심이 찔렸지 뭐야”

 확실히, 내가 좋아하는 프로레슬링을 레나를 이용해서 풀어낸 단편이자 억지의 결정체였다. 그래서 금방 쓰는 걸 그만두었다.

 “요즘도 옛날 프로레슬링을 찾아보는거야?”란 하르페이아의 질문에 “응. 재밌거든”이라며 짧게 답했다.

 

 하르페이아는 그 다음으로 ‘닥터와 C구역 비디오보기(2021.01.13.)’를 꺼냈다. 드라큐리나가 합류하기 전, 닥터와 내가 비디오로 봤던 테마파크 C구역의 내용을 글로 푼 것이다. 드라큐리나의 팔다리를 자른다는 잔혹한 묘사가 있음에도, 그녀는 무표정으로 책더미를 정리하고 있었다.

 “저기.. 이런거 괜찮은거야?”

 하르페이아도 당연히 봤겠지. 나는 애써 괜찮은 척하며 물었다.

 “문학일 뿐이잖아. 그리고 닥터가 이런 책에 관심이 없단걸 다행으로 생각해”

 “응. 닥터를 완전 이상한 아이로 그렸었지”

 “애를 소시오패스로 만들면 어떡해”

 그러면서 그녀는 ‘합류를 거부하는 드라큐리나(2021.01.16.)’를 내 앞에 내민다. 역시나 드라큐리나가 주인공인 단편으로, 포츈과 바바리아나가 드라큐리나를 데려오기 위해 끙끙거리는 내용이다.

 “역시나 드라큐리나. 사령관은 드라큐리나가 애지간히 맘에 드나보네?”

 하르페이아는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어.. 그.. 문학일 뿐이잖아 왜그래”

 하르페이아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준다. 하르페이아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답한다.

 “하지만 드라큐리나가 마음을 열고 바바리아나와 협력하는 부분은 꽤나 마음에 들어”

 “응. 나도 그래”

 하르페이아는 다시 책속으로 고개를 파묻는다. 이내 “킥킥”거리며 웃더니 책 하나를 내게 내민다.

 

 그녀가 내게 내민 책은 ‘인성갑 블랙 리리스(2021.03.11.)’.

 “어.. 아마 히루메가 합류하고 컴패니언 능력에 의문이 있을 때 썼던 걸 거야..”

 “하지만 리리스보다 콘스탄챠를 재밌게 표현했으니까 이건 인정할게”

 “콘스탄챠가? 왜?”

 “완전히 오르카 호의 흑막으로 표현해놨잖아”

 그녀는 킥킥거리며 대답한다.

 “그럴 의도는 없었어”

 “없었긴 뭘. 이 책을 읽은 동료들 모두 만족한 표정을 지었으니까 괜찮아”

 “설마 콘스탄챠도 읽은거야!?”

 “그건 비이밀. 그리고 목소리를 크게 내면 안됩니다, 학생”

 

 그녀가 다음으로 내게 내민건 ‘명탐정 리앤(2021.04.18.)’. 무료한 일상 속에서 리앤이 사건을 해결하지만, 사실 그 사건엔 흑막이 있다는 내용이다.

 “리앤 양을 너무 속이 검은 아이로 묘사한거 아니야? 친구라며?”

 “어 으.. 반성할게”

 “반성하긴. 어차피 문학일 뿐이라니까”

 다시 한방 먹었다.

 

 “이건.. ‘블랙라군’이라는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이 떠올라서 썼던거야”

 “아, 로쿠로 말이구나”

 “하르페이아, 만화도 읽는구나?”

 “만화책도 훌륭한 책이야”

 “어쨌든.. 그 주인공의 성격이 좀 이상하잖아?”

 “사태를 점입가경으로 만들고는 중요한 순간에 본인이 나타나는 못되먹은 성격이지”

 “응. 그래서 리앤한테 록을 투영해봤었어”

 “음,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아. 그럼 이건 무슨 의미였어?”

 그녀가 내게 내민건 ‘통 속의 코코(2021.06.09.)’.

 “왜 코코한테 팔다리를 자를려고 한거야? 가만보니 팔다리 자르는거 엄청 좋아하네 사령관?”

 “아.. 이건...” 등이 식은 땀으로 젖는다.

 “그.. 문학이라서...”

 “문학이라도 어린애는 안돼”

 하르페이아가 사령관인 나를 나무란다.

 “알았어. 주의할게... 그래도 해피엔딩이잖아”

 “참나. 알았어”

 하르페이아는 한숨을 쉬며 답한다.

 

 다음으로 하르페이아가 준비한 책은 ‘소시지 얻어먹는 프서(2021.07.18.)’ 미스 오르카 투표 때 득표율이 낮던 프로스트 서펀트를 위해 쓴 글이다. 하지만, 나도 눈치는 있는 사람. 그녀의 명예를 위해 이 사실은 숨기기로 했다.

 “딱 이 정도면 무난하지? 딱히 문제될 건 없어보이는데..”

 “무난하긴 한데.. 출격횟수가 적은 친구를 가지고 이러는건 그만둬”

 “그,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응. 미안해..”

 “만약에 본인이 읽었다면, 울면 뛰쳐나갔을걸? 프로스트 서펀트가 이럴 아이는 아니잖아?”

 “그렇지..”

 “뭐, 문학이니까”

 제멋대로 대화를 정리한 그녀는 다시 새로운 책을 꺼낸다.

 

 “또 닥터 이야기야”

 ‘엘리를 섬으로 보내려는 닥터(2021.10.11.)’ 엘리의 안전을 위해 섬으로 귀향을 보내려는 마음착한 닥터의 내용이다.

 “닥터는 착하니까”

 나는 닥터의 이야기가 잦은 이유를 설명한다.

 “그렇다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아니야. 보면 사령관은 닥터를 통해 진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하는 성향이 있는 것 같아”

 “알고있어.. 고치려고 노력 중이야”

 “차기작을 기대해볼게”

 그러면서 그녀는 다시 책을 뒤진다. “슬슬 끝이 보일텐데”라며 책 속을 뒤지던 그녀가 책 한권을 내민다.

 

 “이건 좋았어”라며 내민 책의 내용은 ‘LRL 숙제도와주기(2021.11.11.)’ LRL이 그림 숙제를 그리느라 고민한다는 내용이다.

 “역시 나는 이런게 맞는거 같더라고” 나는 단편을 쓴 이유를 설명했다.

 “맞아”라며 하르페이아는 맞장구치더니

 “이게 딱 사령관수준에 맞아”라고 덧붙인다. 나는 할말을 잃고 그녀의 모습을 쳐다본다.

 

 그녀가 다음으로 내민 것은 ‘알비스 초코바 먹기(2021.11.26.)’ 언젠가 보았던 레오나에 대한 음해글을 보고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썼던 글이다. 물론 레오나 뿐 아니라 발할라 부대 전체를 다뤘었다.

 “사령관이 처음으로 부대 전체를 다룬 내용이지?”

 “맞아. 한두명의 바이오로이드를 다루기보단 좀 더 넓은 이야기를 다뤄보고 싶었어”

 “직접 써보니 어땠어?”

 “내 능력 부족을 실감했지. 이런거 쓰는 사람들은 진짜 대단한 사람들이야”

 “앞으로도 자주 써보자”

 나는 레오나에 대한 반응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며, "그래"라 대답했다.

 

 하르페이나는 “이게 마지막이야”라며 책 한권을 내게 꺼낸다. ‘눈사람만들기(2021.12.29.)’ 오르카 호의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든다는 내용이다.

 “어린애들 비율이 높아. 사령관 혹시..?”

 “하하. 어린애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표현하기가 쉬워서 그래”

 “어린 아이 주제가 쓰기 쉽다고?”

 “딱히 그런건 아니지. 바이오로이드는 나이를 먹지 않으니까”

 나는 괜히 책을 넘겨보며 이야길 이어간다.

 “아직 경험이 적은 나로서는,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이야기를 이어가는게 편할 뿐이야”

 “알고 있어 사령관. 괜히 진지해지기는” 하르페이아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나는 아랑곳않으며 하르페이아를 바라본다.

 “슬픈 이야기는 이제 쓰고 싶지 않은걸”

 “응. 슬픈 이야기는 싫어. 우리 바이오로이드는 지금껏 너무나도 많이 겪어왔는걸”

 언제나 밝던 하르페이아의 시선이 떨어진다.

 그녀의 말처럼 바이오로이드들은 지금껏 행복하게만 살아온 건 아니다. 인간에게 멸시받고, 철충들에게 상처입으며, 같은 바이오로이드들에게마저 버림받아왔다. 사령관인 내가 바이오로이드들을 상처입히는 내용을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래. 따뜻하고 기쁜 이야기만 쓸게”

 나는 하르페이아의 손을 잡으며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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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할만큼 많이 쓰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부 캐릭터 혐오밈 붙은거 꼴뵈기 싫어서 일부러 애호문학을 쓴 경우가 있습니다.

어쨌든 다들 애호문학 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