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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2095년




* * * 





"주인님! 그런게 아니에요! 잠시만 제 말을 들어주세요!"


무지개가 낀 분수대를 배경으로 무릎꿇고있는 개체, 마리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한다. 주인이라 불린 여자는 싸늘한 시선을 내리꽂는 중이다. 무언가 크게 잘못한 듯하다. 


"어떻게 가르쳤길래 이 모양이야?" 옆에 낀 아이를 팔로 감싸며 여자가 말했다. "방금 확인해봤는데 이번 시험에서 10등 안에도 못들었어! 어떻게 책임질 거야!?"


"그, 그게… 공부시간마다 도련님께서 집중을… 앗!"


"지금 우리 애한테 문제가 있었다는 거야!?"


"주인님… 저는 교육이 아니라 경호에 특화된 개체에요…"


여자의 발이 마리아의 흉부에 직격했다. 그러나 마리아 쪽은 살짝 기우뚱했을 뿐, 넘어진 건 여자 쪽이었다. 한숨이 나온다. 저럴 때는 적당히 고통스러운 척 뒤로 넘어가줘야 하는데.


킥킥거리는 소리가 군데군데에서 들려온다. 급히 일어선 여자는 한차례 주변을 돌아보고,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게! 너 지금 감히 변명을 해!? 너 하나 사자고 얼마를 들였는지 알아!? 안되겠어. 이건 바로 매장에다 연락을 해서…!"     


"주인님! 그건 안 돼요! 제발!"


마리아가 더욱 애원하며 매달릴수록 여자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 발만 아니라 손도 쓰고, 매고있던 백까지 동원해 후려친다. 그래봤자 마리아에겐 생체기 이상의 피해는 없어 매달리는 걸 저지하기에는 모자르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마리아는 한 발 떨어져서 "죄송합니다. 주인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다음 번엔 도련 님께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라고 공손하게 나와야한다.


저렇게 애걸복걸할 게 아니라.


"고객님. 혹시 대동하신 바이오로이드가 있으신가요?"


나비넥타이로 포인트를 준 턱시도 차림의 지배인이 물었다. 나이는 60대 정도일까. 시대를 불문하고 통하는 것들이 몇몇 있다고 생각하며 지배인을 위아래로 훑었다.


"아뇨. 없어요."


대답하고 다시 뒤를 돌았다. 여자의 다리에 달라붙던 마리아는 땅바닥을 짚고 있었다. 슬슬 포기한 듯했다.


"확인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바이오로이드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기에…"  "알아요. 매번 확인하잖아."


지배인의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섰다. 작은 레스토랑. 여기는 바이오로이드 금지구역이다. 반 바이오로이드 주의자가 오너로 있는 곳이어서 그렇다. 


늘 차지하는 창가자리에 앉아 주문을 받길 기다렸다. 얼마 안있어 웨이터가 다가와 양손을 배 앞에 모으고 내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블랙. 각설탕, 우유, 시럽 다 필요없어." 시큰둥하게 말하고 창밖에 시선을 줬다. 마리아는 양복차림의 두 남자에게 양팔을 잡혀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었다. 표정이 아주 어둡지는 않은 걸 보아 견딜만한 처분을 받은 듯했다.


아마도 여자는 재조정을 주문했겠지. 길 한복판에서 갑자기 험하게 굴던 것 치고는 궁색하게 구는 걸. 이해는 된다. 바이오로이드 한 대 값이 만만치 않으니까. 시원하게 폐기처분하고 재구매할 정도의 재력은 없는 것이다.


대단하지도 않은 잘못을 구실로 바이오로이드를 마구 대하고, 끝에서는 재조정을 주문한다. 오늘 날의 졸부들이 갖는 이미지다.   


막 나온 커피를 한 입 홀짝였다. 창에 비친 내 얼굴은 커피 잔이 놓인 테이블을 향해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내 얼굴이라며 다시금 뇌리에 재각인시킨다.


원 컬 펌이 들어간 흑색 단발.

눈썹을 덮은 일자 앞머리.

녹색 눈동자.


하나하나, 전부.






* * *



      




인간여자와 잘 바에는 바이오로이드를 산다. 결혼을 할 바에는 바이오로이드를 산다. 일을 할 바에는 바이오로이드를 산다. 자식교육을 위해 학교를 보낼 바에는 바이오로이드를 산다. 일상 속 단순히 귀찮은 것들은 모두 바이오로이드에게 맡긴다. 그보다 좀 더 귀찮은 것들도, 골치아픈 것들도.


바이오로이드 하나면 모두 해결된다.


기계를 제외하면 인간이 관여하는 모든 분야에서 바이오로이드를 투입하는 것이 훨씬 긍정적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다. 효율적인 부분에서는 완벽히 인간을 상회하고, 목숨줄이 가볍게 왔다갔다하는 분야에서는 필수적이다.


이런 바이오로이드의 효용은 인간 개개인의 사적이고 본능적인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쳐, 이제 바이오로이드 없이는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간단하게는 식사, 몸관리, 유흥, 섹스. 넓게는 육아까지. 특히 육아사례 중에선 갓 태어난 아이시절부터 바이오로이드에게 맡겨져 길러진 아이들도 있었다는 모양인데, 인간의 손에 길러진 아이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수준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니 누가 바이오로이드를 구매하지 않겠는가. 만능인데.


물론, 이런 만능을 구매하려면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가정용 바이오로이드 중에서 가장 저렴하다고 알려진 바닐라가 풀옵션 소형차 한 대 값이다. 좀 더 우수한 콘스탄챠는 중형차, 방금 분수대 앞에서 애원하던 애니웨어 시리즈의 마리아도 엇비슷하다. 이보다 더 고급 모델도 존재한다. 높으신 분들에게나 제공된다는 금란, 핵폭발에서도 안전하게 지켜준다는 블랙 리리스, 상류층의 특권이라 일컬어지는 알렉산드라, 재력만으로는 꿈도 못꾼다는 소완, 위 사례의 장본인인 이터니티.


돈이 없다면? 유감스럽지만 그림의 떡이다. 얼핏보면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바이오로이드의 숫자는 인간보다 많아보이지만, 바이오로이드라는 인간 문명 최대의 이기를 맛보는 것은 중류층 이상으로 한정된다. 그 외 대다수의 인간은 바이오로이드보다도 못한 삶을 산다. 왜? 전술했듯 바이오로이드가 완벽히 인간을 상회하니까. 더는 인간이 필요없어진 것이다. 애초에 오늘 날의 인간은 근로와 거리가 멀다. 모두 바이오로이드가 벌어다오는 돈으로 먹고 산다. 따라서 실업률이 90퍼센트에 육박한다는 통계는 세세하게 걸러서 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통계야 어쨌든, 당연히 인간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요 몇 십년 간 시위가 없던 날보다 있던 날이 더 많았다. 제발 인간이 인간답게 살게 해달라는 성토가 끝도 없이 이어졌고 바이오로이드의 제작 기업들에 대한 크고작은 음모론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좀처럼 보기힘든 하나된 인간의 모습이었다. 누군가는 그런 모습을 보고 인류사상 인간이 가장 단합된 순간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었다. 


그 단합된 바람은 통했다. 통하긴 했다. 많이 위험한 방식으로.


터키의 모술, 미국의 뉴올리언스. 그 두 장소에서 블랙리버의 고블린이 대학살을 일으켰다. 당연히 인간들은 분노했지만 그 분노 사이사이에는 '이제 다시 인간답게 살 수 있다.' 라는 기대가 엿보였다. 대학살의 피해자에 대한 추모보다도 앞선 기대였다.


그러나 그 기대와는 다르게 대다수의 인간은 여전히 인간답지 못한 삶을 유지한 채 오늘 날에 이른다. 기업이 세계를 꽉 쥐어잡은지는 꽤 됐고, 그 기업들은 인간의 삶의 질을 공평하게 끌어올리는 것보다 바이오로이드의 격을 낮추는 쪽을 택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키리시마 법이 있다. 인간들의 불만이나 기업의 노선과는 하등 상관없어 보이는 법이지만, 결과적으로 그 법에 의해 인간들의 불만이 다소 누그러진 것은 사실이다.


제발 바이오로이드를 없애라는 성토는 '붉은 아레나'의 런칭으로 쾌재가 되었다. 에머슨 법이 불러온 공공재 바이오로이드들의 탄생에 숨통을 틀었다. 공공재들이 어떤 식으로 인간들의 숨통을 트여주는가, 에 대해서는 상상에 맡기겠다. 으슥한 골목 하나만 돌아도 강간의 현장이 펼쳐지는 것은 제법 가벼운 축에 속한다고 말하면, 얼추 짐작이 될 것이다.


요컨대 나같은 년한테는 살기 어려운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즉흥적이고 돌발적이고 휘발적이고 쾌락지향적인 세계. 편의주의가 극도로 팽창한 세계. 창밖에 펼쳐진 풍경은 무지개 낀 분수대와 정갈한 백색 보도블럭 때문에 지극히 차분해 보이지만, 실은 아주 위험한 현 세계의 일부에 속한다. 치명적인 세균을 배양 중인 투명한 샬레의 내부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 * *






먼저, 반 바이오로이드를 지향하는 이 레스토랑에 온 것을 설명하려면, 내가 처한 상황부터 설명해야한다.


나는 쫓기고 있다.


과거, 인류문명 최대의 이기가 스마트폰이었다면 오늘 날은 바이오로이드다. 둘의 공통점은 상품이다. 따라서 일률적으로 부여되는 일련번호가 존재한다. 소유주가 누구인지는 알아야 사후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 아닌가.


바이오로이드에게는 주민등록번호와도 같은 그 일련번호가, 내게는 없다. 당연하다. 나는 상품이 아닌 폐하의 '추기경'으로 탄생한 존재니까. 멸망 후의 복원개체니까. 그런 번호를 가진 건 멸망 전의 개체라 불리던 년들 밖에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대강은 짐작되리라 생각한다. 인간과 다를 것 없는 겉모습을 가졌지만 세간에선 특수한 취급을 받는 바이오로이드가, 상품이, 일련번호가 없다? 그것도 아르망 추기경이라는 고급 개체가? 기업 입장에서는 그 연유를 밝히기 위해서라도 기를 써서 회수조치 할 것이다. 스마트폰과는 비교도 안되는 입지를 가진 바이오로이드가 일련번호도 부여받지 않고 출하되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기업 이미지에 가해질 타격을 우려할 것이다. 바이오로이드 기업을 곱게 보는 이들은 거의 없으니까.


따라서 나는 기업의 눈이 그나마 덜 드는 곳으로 숨어들게됐다. 소위 말하는 할렘이라는 곳이다. 본래 이 나라에는 할렘이라고 부를 구역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시대가 바뀌어감에 따라 그런 단어가 어울릴만한 곳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곳엔 치안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나 조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담당하는 '시티가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유? 돈이 안되니까. 과거가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는 시대였다면, 지금은 돈이 권능인 시대다. 남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렇다. 할렘가의 치안을 유지함으로 생기는 득과 실을 저울질한 끝에 기업은 시티가드를 철수시켰다. 아니,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배치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할렘을 거주지로 선택한 것은 그나마 그 쪽이 감당할 수 있어서다. 내 정체를 들켜 기업과 충돌할 바엔, 죽어나가든 말든 누구도 신경안쓰는 범죄자들의 타겟이 되는 편이 낫다. 강간을 노리는 양아치들은 적당히 손봐주면 되고, 규모가 되는 집단은 조금 신경써서 박살내면 된다. 그런 경우는 없었지만 제대로 된 ―제대로 라고 표현하기엔 어폐가 있지만― 마피아나 갱이 접근해오면 골치아프긴 할 것인데, 기업의 표적이 되는 것 보다야 백 배 낫다.


……백 배 낫긴 한데, 그 없던 골치아픈 경우가 지금 생겼다. 그래서 이 레스토랑에 오게 됐다는 것이다. 시내는 예측할 수 없는 샬레 빛 위험이 도사리지만 오전 중에는 안전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녀석들이 계속해서 접근해 오고 있다. 아주 치밀하고 조직적인 것이 왠만한 규모의 집단이 아니고서야 볼 수 없는 움직임이다. 마치 내가 바이오로이드라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나를 노리는 이유, 짐작은 간다. 


주인도 없어보이는 바이오로이드, 공공재로도 쓰이지 않는 바이오로이드, 인간의 위협에 능동적으로 맞서는 바이오로이드.


내가 바이오로이드라는 것을 파악했다는 가정 하의 이야기지만, 범죄자 녀석들에게 있어 나보다 군침도는 '물건'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꿔다놓은 보따리 쯤으로 여기고 있는 거겠지. 먼저 채가는 놈이 임자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 뒤엔 내다팔든, 범죄에 이용하든. 일단 포획만 했다하면 활용법이 무궁무진한 바이오로이드. 내가 범죄자였더라도 그런 바이오로이드를 노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가정이라고 해도 이상하다. 이 레스토랑을 포함해 내가 바이오로이드라는 걸 알고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 날, 남자가 쪽지와 함께 선물로 두고 간 용도 모를 장치. 그것이 내 정체를 숨겨주고 있는데.


가죽 자켓 안주머니에 넣어둔 물건을 확인했다. 평균적인 스마트폰 크기의 절반 만한 물건. 납작한 반지케이스 같은 이 물건은 인간의 뇌파와 유사한 파장을 발한다는 듯하다. 단말기로 들은 남자의 설명에 따르면 그랬다. 자신이 사령관이던 시절에 철충을 유인하던 용도로 쓰던 전술미끼였다나.


덕분에 이런 바이오로이드 출입 금지 구역에서도 손님으로 있을 수 있으니 다행이긴하다.

아이러니가 느껴지지만 뭐, 무시 못할 정도는 아니다.





* * *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거리를 순찰하는 시티가드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인간은 나를 인간으로 볼 뿐이지만, 바이오로이드는 뇌파로 인간과 바이오로이드를 구분한다. 장치가 있는 한 문제 될 것은 없으나 만약이란 것이 있기에 서둘러 시내를 벗어난다.


할렘에 들어서자 지린내가 코를 찔렀다. 골목의 벽이란 벽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래피티가 빠짐없이 새겨져있다. 녹슨 쓰레기통을 집으로 삼은 쥐들은 겁도 없이 인간들의 다리 사이를 빠져나간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존재하는 가선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가 의심 될 정도로 축 늘어져있다. 있으나마나 한 가로등은 이따금 제 역할을 기억해냈다는 듯 미약하게 껌벅였다.


빠르게 귀가하기 위해 골목길을 이용했다. 미로같은 곳이라 할렘의 주민들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용하지 않지만, 익숙해지면 제법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 할렘 내에서도 내 집은 꽤 깊숙한 곳에 있어 나는 종종 이용한다.


어스름이 드리워진 오물바닥을 피해가며 걸었다. 중간에 시간을 더욱 단축시키기 위해 난간이나 벽도 넘었다.

벽을 세 번째 넘고 10분 정도 골목길을 걸었을 때였다.   

쓰레기통과 담벼락에 등을 기댄 세 개의 실루엣이 건들거리는 게 보였다.


오늘도 다를 것 없는 일상이네. 라고 나는 생각했다. 골목길을 거쳐온 템포를 똑바로 유지하며 실루엣에게 다가간다.

왼쪽, 금속배트. 오른쪽, 맨손. 소매나 주머니에 흉기가 들어있을 가능성 높음. 중앙, 칼.


그냥 양아치다. 장갑을 사용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실루엣과의 거리가 5m도 안되었을 때 목소리가 들렸다. 무시한다. 이 할렘에서 이런 상황을 맞닥드린 여자가 들을 수 있는 말이라고는 두 가지 정도다. 하나는 순순히 따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 어쨌든 둘 다, 최소 강간을 하겠다는 의미이다. 에둘러 말하는 경우는 없다. 


왼쪽부터, 그 다음 오른쪽, 중앙의 칼을 든 놈이 마지막.


10초.


3m남짓 했을 때, 발을 굴렀다.


 

       


   

* * *



"야. 뭐 하나만 물어보자."


턱이 나간 놈의 멱살을 잡아올려 물었다. 두 놈은 잠깐 염라대왕 보러 갔다.


"너, 노렸냐?"


"너…려?"


"씨발아. 날 특정하고 노렸냐고."


"아히… 그향… 아무나…"


양아치의 턱을 타고 내린 핏물이 손목에 떨어졌다. 거칠게 놈의 턱에 비벼 닦았다. 옹알이같은 신음과 함께 피 이외의 분비물이 터져나왔다.


쓰레기통을 열어 대가리부터 처박아줬다. 


턱을 부수고, 의식을 날려버리기까지. 실수는 없었다. 이 짓만 거의 30년 째니까. 


골목은 검푸른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얼마 안있어 새카매지겠지. 그렇게 되면 위험해진다.


돌아가자. 빨리.






* * *






"과거부터 쌓아올려진 윤리관, 도덕관, 성인들의 말씀, 지식! 여러분! 이것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기 위한 노력들입니다!"


씻기 전에 틀어놓은 TV가 설정해놓은 볼륨 이상으로 떠들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머리를 말리면서 리모콘을 찾았다. 


"오늘 날의 인류는 타락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바이오로이드 때문에! 수천 년간 쌓아올려진 그 모든 것들이! 등장한 지 이제 막 40년된 인공 생명체 앞에 무너졌단 말입니다! 인류애가 부정 당하고,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들을 모조리 잃었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스크린 너머의 시청자 여러분, 라디오 너머의 청취자 여러분! 바이오로이드를 몰아내야 합니다! 모조리! 폐기해야만 한단 말입니다!"


유감스럽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 이미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바이오로이드의 영역이 되었으니까. 본능적인 부분부터 선택적인 부분까지, 인간은 모두 바이오로이드에 의지하니까. 당장 바이오로이드가 없으면 목숨을 잃을 인간들도 여럿이고, 기본적인 생활조차 안 될 인간이 수두룩하다.


"다음 주 주말, 삼안 본사 앞에서 데모를 펼칠 예정입니다. 필히 참석해주셔서 함께 목소리를 내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되찾읍시다. 권리를! 인간됨에 있어 필요한 모든 것들을! 바이오로이드를 몰아내야만 합니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빼빼마른 스크린 속 노년의 남성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본인의 연설에 본인이 감동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목소리가 모두의 눈을 뜨게 만들어, 데모 예정일에 삼안 본사 앞을 수많은 인파가 매울 것이라 지레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짓이다. 별 반응은 얻지 못할 것이다. 연설이 방영된 채널은 시청률이 제로라 봐도 좋은 변방 케이블 채널이고, 그런 케이블 채널이라도 저런 말을 지껄인 이상, 기업 쪽에서 이미 조치에 들어갔을 것이다.


인간이 타락, 원인은 바이오로이드인가. 이런 말을 하기엔 뭐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바이오로이드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위태로운 부분은 있었어도 저 남자가 말하는 '인간적인' 것들이 존재하기는 했다. 앞에서는 세상이 말세네, 하면서도 뒤에서는 아직 살만한 세상이라고 여겼다. 연마다 남몰래 기부하는 날개없는 천사, 인종을 뛰어넘은 우애 등등, 인류애가 실천된 다양한 사례들에 감동하면서.


정작 본인들은 단 한 번도 그런 인간적인 것들을 실천한 적이 없는 주제에.


바이오로이드가 악영향을 끼쳤으면 얼마나 끼쳤다는 걸까?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지만, 바이오로이드의 등장으로 인류는 한 꺼풀 벗어던진 것이다. 그 뿐이다. 자신의 감정에, 본능에, 좀 더 솔직해졌을 뿐이다. 그것을 타락이라고 하면 서운하다. 게다가 타락도 타락 나름이다. 마약, 술, 담배. 그런 것들과 바이오로이드가 비할 바 인가? 누구라도 단번에 부정한다. 악영향이 있었을지언정 바이오로이드는 착실히 제작된 목적을 수행하고 있고, 그것의 효율은 악영향을 가볍게 상회한다. 


무엇보다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이 만들었다. 인간이 원했고, 인간이 명한다. 아무리 애덤 존스나 김지석, 앙헬을 천하의 개새끼 취급해도, 바이오로이드를 원한다.


게다가 정말로 바이오로이드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인간들은, 이미 그들 나름 대로 바이오로이드를 거부하고 있다. 오늘 내가 들렀던 레스토랑이 그렇고, 집안에 들이진 않지만 그들 또한 인간과 다를 것 없다며 인간과 같은 대우를 하는 이들도 소수 존재한다.


바이오로이드가 전해주는 극상의 쾌락과 생생한 유흥에 지들이 멋대로 젖어들어갔을 뿐. 그런 인간들은 아마 바이오로이드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도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했을 거라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이 세상에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수 없다고 직감한 나머지 폭주해버린 버러지놈들. 굳건할 것만 같았던 입지를 빼앗긴 시건방진 년들. 타락이 가진 성질 중 하나인 편리와 편안을 가장 잘 이용해먹는 역겨운 놈들. 대부분 그런 인간들이 바이오로이드를 탐하고 바이오로이드를 욕한다. 


머리를 다 말리고 젖은 수건은 대충 옆에 던져뒀다. 채널을 돌리기 전에 주방으로 가 물을 한 컵 챙기고,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돈이나 벌자.


붉은 아레나가 방영되는 채널로 돌리자마자 나타난 것은, 깔끔하게 날아간 아탈란테의 머리통이었다. 아직 뇌에서 신호를 발산하고 있는지 카메라를 향한 눈은 꿈벅대고 있다. 몸통 쪽은 멎지 않은 맥박에 맞춰 절단면에서 핏줄기를 뿜어낸다. 그 모습은 막 목을 절단 당한 닭이랑 크게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다.


아탈란테의 목을 날린 것은 카엔, 25시즌만에 첫등장한 신예이다.


정배였군. 스마트워치의 패널을 띄워 베팅내역을 살폈다. 경기시간과 승리방식, 모두 맞췄다. 정배라 큰 수익은 기대할 수 없지만… 맞춘 것에 만족하자. 


내가 기다리는 것은 바로 다음 매치. 샬럿 대 짐승들의 매치다. 전 시즌 챔피언 샬럿은 오늘, 강화된 사자와 호랑이 바이오로이드를 상대한다.


베팅내역을 확인한다. 나는 짐승들 쪽에 걸었다. 댓글란에선 베팅현황 5:5의 열기를 대변하는 듯한 각축이 벌어지는 중이다. 지면 진짜로 뒤진다,  덴세츠 뒤집어엎는다, 샬럿 이 씨발년한테 전재산 다 걸었다, 사자랑 호랑이를 어떻게 이기냐, 이쪽이 정배다, 저쪽은 역배다……


아무래도 좋을 캐스터의 메인 이벤트 매치 소개가 지나가고 선수들이 입장한다.  샬럿이 먼저 들어섰고, 그 다음 사자와 호랑이가 우리에 갖힌 채 등장했다.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을 본딴 넓직한 원형 경기장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술은 발전을 거듭해왔는데 인간들은 퇴행이라도 한 것 같다. 내면만이 아니라 취향까지.


알 바 아니다. 나는 돈만 벌면 된다. 제대로 된 일은 커녕 제대로 된 주거지도 가질 수 없는 년이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런 것 밖에 없다. 바이오로이드의 목숨줄로 돈을 버는 바이오로이드. 그게 지금의 나다. 떳떳하지 못하다는 건 알지만 내가 처한 상황이 상황이니 이해받을 수 있을거라 믿는다.


장중한 음악이 흐르는 장내를 카메라가 비춘다. 간간히 나오는 관중들의 표정은 긴장으로 굳어있다. 나는 아마 그들과 다르지 않을 표정을 짓고서 혹여나 베팅이 빗나가면 어쩌나 하며 속을 졸였다.


마침내 경기가 시작됐다.


장중한 음악이 선사한 긴장감을 버저소리가 찢었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열리고, 관객들의 함성을 받아가며 짐승들이 샬럿에게 쇄도한다.


일반적인 인간의 눈으로는 제대로 쫓을 수 없는 움직임의 연속이 펼쳐졌다. 짐승들의 발톱이 샬럿의 어깻죽지에 박힐 것 같으면 양쪽 모두 허공에 떠올라있고, 영거리에서 머스켓이 호랑이의 눈을 제대로 노렸다 싶을 때면 사자가 방해했다. 현란함과 야성이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면서 발톱과 레이피어를 꽂을 때를 노린다.


노린다… 노린다… 계속.


노리기만 한다.


현란함은 처음 뿐이었다. 


나 같이 폭력에 익숙한 자라면 이해가 가는 상황이지만 관객들은 그렇지 못했다. 야유와 함께 이물질이 투척된다. 현장 캐스터의 자중 요청에도 사그라들긴 커녕, 되려 자극을 받아 관객들은 미쳐날뛰기 시작했다. 그 소란이 짐승들에게도 전해진 걸까. 한층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저런 식으로 싸움판에서 살아온 짐승들은 인간들의 원초적인 니즈를 이해할 수 있게되는 건지도 모른다.


샬럿이 검을 고쳐 잡았다. 짐승들이 정면으로 육탄돌격해오는 타이밍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지 스텝이 꼬인게 보였고, 거기에 당황해 호흡이 흐트러진 것도 느껴졌다. 카메라 너머로 알 수 있을 정도로.


결말이 예상되어 채널을 돌렸다.


10초 뒤, 스마트워치의 패널에서 알람이 울렸다.

짐승들의 승리다.


그것만 확인하고 TV를 껐다. 그대로 소파에 누워 한 켠에 둔 담요를 펼쳐서 몸 위에 덮었다. 자기 전에 장갑을 끼고 공간에 손을 넣어 검을 한 자루 꺼냈다. 참수검, 티아멧. 남자가 그 날 남기고 간 선물들 중 하나다. 티아멧 외에도 네 개가 더 있는데, 잠을 잘 때엔 티아멧 하나로 충분하다. 이게 없으면 잠이 안온다. 품에 안고 있어도 수시로 눈을 떠 제대로 품고 있는지 확인하고, 너무 피곤해 눕자마자 잠든 날에도 꼭 중간에 깨서는 티아멧을 챙긴다. 요컨대 라이너스의 담요 같은 것이다.


애착같은 건 조금도 갖고 있지 않지만.


베란다 쪽에서 여자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품에 티아멧이 확실히 있는지 한 번 더 확인하고, 눈을 감았다.



                  



* * *





다음 날. 뿌연 시야가 최초로 포착한 것은, 남자였다.


소파 끄트머리에 앉아, 내가 언제 일어날지 기다렸다는 눈치로 쳐다보던 남자가 물었다.


"연락." 손에 들린 단말기를 가리키며 남자가 말을 이었다. "왜 안 받아?"


"…연락했었어?"


"어. 열 번도 넘게."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눈빛이 싸늘해진 걸 보니 삐진 건 아닌 것 같고, 내 쪽에서 뭔가 문제 될 짓을 한 듯했다.


"그나저나 이런데서 살아? 혼자 살기엔 너무 큰 거 아닌가?"


"……왜 왔어? 아니, 어떻게 알고 왔어?"


"딸. 네가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다 알아."


됐고, 저거나 봐. 라며 남자는 TV앞을 가리켰다. 테이블과 TV사이,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저거 몰랐냐?" 남자가 누워있는 것에 다가가며 말했다. "너, 뒤질 뻔 했어."


"누구야?"


"누구긴 누구야. 뒤질 뻔 했다니까? 이야. 내가 가르쳐준게 얼만데. 대가리에 칼 꽂힐지도 모르는데 태평하게 자빠져 자고있어?"


어떤 새끼지. 수면 중에 몰래 침투한 발칙한 것의 정체를 알고자 남자 옆에 섰다.


"…카엔?"


어제 아탈란테의 대가리를 날린 카엔이 머릿 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복부가 시원하게 뚫린 이 카엔이 그 카엔일 리는 없다.


"넌 나 아니였으면 뒤졌어. ㅋㅋ 그건 그렇고 흑복을 입은 카엔이라. 드문데. 딸, 너 누구한테 원한 산 적 있니?"


"아니."


"널 따먹으려고 온 건 아닐테고, 흐음. 뭘까?"


턱에 댄 손가락을 튕기는 남자를 지나쳐 외출준비를 했다. 따먹고 자시고 간에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어디 가?"


"피해있으려고."


"왜?"


"위치가 발각됐어."


허물벗듯 벗어 둔 옷을 챙겨입고 자켓을 걸쳤다. 대문 쪽 신발장에서 골목을 거치느라 더러워진 신발을 꺼내고, 급하게 신었다.


"발각?" 뒤따라 온 남자가 물었다. "누가 널 쫓고 있어?"


"…아마도, 였는데 저 카엔으로 확신했어. 날 쫓는 놈들이 있어."


"미끼는 잘 가지고 다닌 거 맞지?"

"응."

"ㅋㅋㅋㅋ 재밌네."


대문 손잡이에 손을 뻗으려던 차에 남자가 앞서 문을 열었다.


"가자. 지금까지 있었던 일, 자세히 설명해 봐."







 

* * *

     

     


     


TMI: '붉은 아레나'는 공식 설정에 등장하는 멸망 전 콘텐츠였다.


그 외엔 모두 창작임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