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링크

 

1화 :   (문학, 삽화) 우리집 브닐라 -1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2화 :   (문학/삽화) 우리집 브닐라 2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3화 :   (문학/삽화) 우리집 브닐라 3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4화 :   (문학/삽화) 우리집 브닐라 4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5화 :   (문학/삽화) 우리집 브닐라 5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6화 :    (문학/삽화) 우리집 브닐라 6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7화 :   (문학/삽화) 우리집 브닐라 7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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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re pinned! Someone help us!”

(꼼짝도 못하겠슴다! 누가 좀 도와주십쇼!)

 

“Hellhound, This is Golf 2-1! They’re about to overrun us! We need assitance!” 

(헬하운드, 당소 골프 2-1! 곧 놈들에게 무너질 것 같습니다! 지원이 필요합니다!)

 

“Those 3P fucks ain’t stop coming!”

(저 삼안 씨발년들이 계속 몰려옵니다!)

 

“Get out! Get the fuck out! This AO is lost!”

(튀어! 씨바 튀라고! 이 구역은 이미 망했어!)

 

원래라면 시베리아 전선에서는 아군 SOV(시스터즈 오브 발할라)가 삼안 소속의 앵거 오브 호드 부대와 교전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스틸라인은 그저 후방 지원을 맡을 예정이었고요. 

 

어디서부터 일이 어그러진 건지, 저로서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Zodiac Actual to Hellhound.....Be advised, additional hostiles are converging on your position.”

(조디악 액추얼이 헬하운드에게 전한다. 적 증원병력이 귀소 위치로 이동 중이다.)

 

“Zodiac Actual, this is Hellhound. Requesting permission to withdraw and regroup!”

(조디악 액추얼, 당소 헬하운드. 퇴각 후 재집결 허가를 요청합니다!)

 

“That’s a negative, Hellhound. Stand your ground at all costs.”

(불허한다, 헬하운드. 무슨 수를 써서든 위치를 사수하라.)

 

말도 안 됩니다. 지금 우리가 숫자로든 화력으로든, 어디로 보나 밀리는 판국인데 뭘 어떻게 사수하란 말입니까.

 

제 앞에는 수많은 자매들과 부하들이 쓰러져 있습니다. 저와 똑같은 얼굴을 한 브라우니들, 아직도 무기를 놓지 않은 레프리콘들, 잠자듯 누워있는 이프리트들.....그리고 그런 그들을 감싸다가 숨을 거둔 노움들까지도요.

 

그 주변으로는 아직까지 –간신히나마- 살아있는 자매들이 보입니다. 하나같이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끝도 없이 쇄도해 오는 호드 병력을 향해 필사적인 항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매들의 수는 계속해서 하나씩 줄어들고 있습니다.

 

.....결국 저는 아무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도요.

 

“LT! I can’t move! I think I’m stuck here!”

(소위님! 움직일 수가 없슴다! 낀 것 같지 말임다!)

 

잠시 넋이 나가 있었더니, 브라우니 70,288번이 제게 소리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까 교전하던 삼안 소속 호드의 샐러맨더 기체에 깔려 움직이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Hey, 56 and 28, you go get her outta there.”

(야, 56번이랑 28번, 너네가 가서 쟤 꺼내줘.)

 

주변에 있던 다른 브라우니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나니, 갑자기 무전기에서 이상한 통신이 들려옵니다.

 

“Zodiac Actual to Six Shooter, requesting CAS on target area, grid follow: Echo-2-1-0...”

(조디악 액추얼이 식스 슈터에게 전한다. 목표지점에 근접항공지원 바람. 좌표: 에코-2-1-0...)

 

“Uh, This is Six Shooter, Interrogative: are you sure there aren’t any friendlies down there?”

(어, 당소 식스 슈터, 질문이 있다. 목표 지점에 아군이 없는 것이 확실한가?)

 

“That’s none of your concern, Six Shooter. You’re cleared hot. I say again, you’re cleared hot.”

(귀소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식스 슈터. 공격 개시하라. 재송한다. 공격 개시하라.) 

 

....저 좌표는 지금 우리가 있는 위치입니다. 

 

저는 다급히 무전기를 부여잡고 목청껏 외쳐댔습니다.

 

“Hellhound to Six Shooter, Abort! Abort! There are friendlies! I say again! Friedlies in target area!

(헬하운드가 식스 슈터에게, 공격을 취소하라! 거기엔 아군이 있다! 재송한다, 목표 지점에 아군이 있다!)

 

Danger close! Danger close! Do you copy?”

(위험사격, 위험사격이다! 입감했는가?)

 

...분명히 듣고 있을 텐데도 아무런 답이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Zodiac Actual! Sir! There are still-”

(조디악 액추얼! 각하! 아직 아군이-)

 

“Six Shooter, payload ready. ETA 70 seconds.”

(식스 슈터, 무장 투하 준비 완료. 도착예정시간 70초.)

 

.....시간이 없습니다. 저는 제 앞에 남아 있던 모든 병사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Everyone fall back! Fall back! They’re about to hit us! Run like hell!”

(모두 후퇴해라! 후퇴해! 공습이 우리한테 날아온다! 뛰어!)

 

“But llieutenant, 8-8 is still-”

(그래도 소위님, 88번이 아직-)

 

“Shut your trap and run! I’ll help her!”

(입 다물고 뛰어! 쟤는 내가 꺼내올게!)

 

“LT!”

(소위님!)

 


 

 

 

56번과 28번 브라우니를 뒤로 보내고, 저는 죽을힘을 다해 88번에게 달려갔습니다. 녀석이 빠져나오려고 용을 쓰면서 제게 울먹였습니다. 

 

“LT, please! I don’t wanna die out here!”

(소위님, 제발 도와주십쇼! 여기서 이렇게 죽긴 싫슴다!)

 

“Bitch, you won’t!”

(죽긴 뭘 죽어, 썅년아!)

 

“LT!”

(소위님!)

 

“Hang in there! I’m almost ther-”

(잠깐만 버텨! 거의 다 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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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diac Actual, this is Six Shooter, target area is history. Over and out.”

(조디악 액추얼, 당소 식스슈터. 목표 지점 제압 완료. 통신 종료.) 

 

“Sir, we’re seeing multiple 3P casualities.....as well as ours.”

(다수의 삼안측 피해가 관측되었습니다. 우리 쪽 피해도 만만찮습니다.)

 

“Good. Send out recovery teams and collect any remaining assets.”

(잘 됐군. 회수팀을 보내서 남아있는 자산들을 수거해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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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그 날이 다 됐다. 본사 전산실에서 방 빼는 날. 내 개인 물건이랑 장비들이 꽤 많아서 혼자 옮기긴 힘들었으므로 우리집 브닐라, 이비의 손을 빌리기로 했다. 나름대로 그동안 조금씩 가져왔는데도 이래저래 남은 게 상당하니, 힘 좋은 그녀의 도움이 절실하다. 

 

“이비, 준비됐어?”

 

겉옷을 챙겨입으며 이비에게 물었더니, 녀석이 엄지를 척 들어 올리며 화답해온다. 믿음직스럽구먼.

 

(곧 내 집이 아니게 될) 집을 나와 한참 전철역으로 이동하던 중, 이비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시는 주인님 보고 나가라는 게 이해가 안 감다.”

 

“토사구팽이란 말은 알지? 그냥 그 말 그대로야. 단물 다 빨았으니 이제 쓸모없다 이거지.”

 

“.....모셨던 분들에게 버림받는 검까. 저도 그 기분 잘 알지 말입니다.”

 

녀석의 눈썹이 축 처진다. 나는 녀석을 위해 애써 밝은 척을 해 보았다.

 

“뭐...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공기 좋고 한적한 데로, 더 넓은 집으로 옮겨가는 거잖아. 그 동네도 새로 지은 곳이라 있을 건 다 있다 그러고. 뭣보다 이제 그 망할 놈들은 더 안 봐도 되잖아?”

 

“...오늘까지는 뵈어야 하는 거 아님까?”

 

“아.”

 

그것도 그러네. 머뭇거리는 내 얼굴을 보자, 녀석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상급자 분이 또 저 때문에 주인님한테 못되게 굴까 봐 걱정임다.”

 

“에이, 이제는 사실상 남남인데 이상한 짓 하겠어. 너한테도 별소리 안 할 거야 아마.”

 

희망 사항이긴 하지만..... 뭐, 그 인간도 최소한의 상식이 있다면 굳이 오늘까지 날 건드리진 않겠지. 

 

....그런데 왜 느낌이 안 좋을까. 아무래도 기분이 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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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간만에 보네, 백마!”

 

한창 박스에 물건을 쑤셔 담고 있었더니 부장이 아는 체를 하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슈밤, 안 좋은 예감은 틀리질 않는다더니. 이 자식은 마지막까지 날 가만 내버려 두는 법이 없네.

 

“상급자분.”

 

놈을 향해 평소의 모습답지 않게 냉랭한 목소리로 답하는 이비. 표정도 그에 걸맞게 아주 차갑다.

 

“그리고 제 이름은 백마가 아니라 ‘이비’입니다.”

 

“됐고, 네 주인 새끼하고는 해 봤어?”

 

부장이 그 뚱뚱한 손 하나를 말아쥐고, 다른 손을 거기에 부딪히며 짝짝 소리를 낸다.

 

“솔직히 말해봐. 졸라 작았지? 성에 안 차지? 조루지? 씨바 당연히 그렇겠지. 그런 반면에 이 물건으로 말할 것 같으면,”

 

놈이 자랑스레 살집 가득한 허리를 내밀며 자신의 사타구니를 가리켰다. 

 

“너 같은 짜가 보지들 여럿 울린 대단한 말자지라 이 말씀이야. 어때? 한 번 맛보지 않으련? 네 병신같은 주인보단-”

 

“좆까십쇼.”

 

분명 내가 하려고 하던 말이긴 한데, 저건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태연히 한마디를 건넨 이비는 열중쉬어 자세로 서서 똑바로 놈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라고?”

 

“우리 주인님 귀찮게 하지 말고, 가서 좆이나 까시라고 했슴다.”

 

“이 씨발년 봐라? 이젠 아예 대놓고 저러네?”

 

난 금방이라도 이비에게 덤빌 듯이 다가오는 부장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도 지금 기분 좆 같으니까 도와줄 거 아니면 저리 꺼지세요. 내 일까지 뺏어가서 이제는 존나 바쁘시다 안 했습니까?”

 

“좆만이 새끼가 말투 보소? 저 수입산 걸레한테 말뽄새 그따위로 가르친 게 너냐?”

 

“썅, 당신 이제 내 상사 아닙니다. 아가리 좀 신중하게 쓰세요. 또 우리 이비 건드리면 나도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허, 그렇다 이거지.”

 

끄응, 하고 숨을 내쉬고는 팔짱을 끼는 부장. 그런 놈을 무시하고, 이비와 나는 물건 정리를 끝낸 후 각자의 품에 박스를 안아 들었다. 그러자 놈이 다시금 혀를 놀리기 시작한다.

 

“거기로 간다고 인생이 필 것 같냐? 거긴 존나 미래가 없어요, 미래가. 회사 자체가 몇 년 안에 망할걸? 넌 시한부라고 이제, 알아들어? 그리고 그 짧은 명줄도, 내가 친히 그쪽에 연락 넣어서 제대로 조져줄게. 기대해라.”

 

나는 그놈을 무시하고 복도 쪽으로 계속 발을 옮겼다.

 

“니 새끼는 이제 가진 것도 이룬 것도 없이 그 허공처럼 헐렁한 중고 보지에 씹질만 하다 뒈지는 거야. 케케, 생각해보니까 존나 어울리는 최후네. 병신으로 태어나서 최후도 병신같이, 캬, 그림으로 그린 듯한 수미쌍관 아니냐, 이거.”

 

놈을 향해 한마디 하려던 이비를 제지하고 계속해서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꼴에 그 백마 걸레한테 이름까지 줬대? 뭐였냐, 이비? 입이 뭐? 저게 입으로 그렇게 잘 빨아주냐? 하기사, 입도 크고 관상도 맹한 게 빠는 거 하나는 잘하게 생겼네. 너 그런 취미가 있었나? 의외다?”

 

어차피 오늘까지만 보고 말 사이다. 반응하는 게 바보짓이지.

 

“맞다, 너 뒤지거나 파산하고 나면 저 걸레는 내가 사 갈게. 얼마나 헐렁한지, 아님 아직도 쪼이는지 한 번 보고, 저 실한 입에 한 번 물려도 보고. 좋아갖고 앙앙대면서 질질 짜는 게 벌써 눈에 선하다. 저 걸레년도 너 같은 새끼한테 박히는 것보단-”

 


 

 

 

“이비, 여기 가만히 있어.”

 

“주인님?”

 

쿵, 소리를 내며 거칠게 박스를 내려놓고 몸을 돌린다. 당황한 얼굴의 이비를 뒤로하고서 나는 성큼성큼 그 뚱보를 향해 걸어갔다.

 

“뭐야, 빡 돌았냐? 그래서 뭐, 어쩔-”

 


 

 

 

놈의 불룩 튀어나온 배를 힘껏 걷어찼다. 그간의 울분을 가득 눌러 담은 일격에 부장은 그대로 보기 좋게 자빠져버렸다. 주변에 널린 파티션이며 책상 따위의 기물이 와르르 무너져내린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놀란 얼굴을 한 이비가 기다리고 있던 엘리베이터 앞으로 돌아왔다. 등 뒤에서 온갖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부장 놈의 안부를 묻는 목소리부터 해서, 자기 파티션이 무너졌다고 내지르는 욕지거리까지. 버둥거리던 부장놈이 저 멀리서 내게 소리치는 소리도 들려온다.

 

“너 이 개새끼, 넌 꼭 내 손에 뒈질 줄 알어!” 

 

아이고 그러셔요.

 

“가자.”

 

“...네, 주인님.”

 

우리는 지체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잠깐의 적막이 흐르고, 이내 내 표정을 힐끔힐끔 곁눈질로 살피던 이비가 운을 뗀다.

 

“Serves him right, sir. Nicely done, sir.”

 

“응?”하고 이비를 돌아보니 녀석이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다.

 

“꼴 좋았슴다. 잘 하셨지 말임다.”

 

“...이런 건 따라 하지 마. 아까 일은 고맙긴 한데, 앞으론 먼저 나서는 것도 삼가고.”

 

“넵, 명심하겠슴다. 그리고 주인님? 저도 아까 일은 그....감사합니다.”

 

“.....그게 뭐 별거라고.”

 

사람을 쳐 놓고 감사를 받으니 어딘가 이상야릇한 기분이 든다. 그래도 어째 후련한 게 싫지는 않구만. 박스를 들고서 출입문을 나서니, 이 지긋지긋한 곳과의 인연도 끝났다는 것이 이제야 비로소 체감된다. 이비도 저 기분 나쁜 곳에 다시 갈 일 없다는 게 기쁜 모양이다. 

 

...아디오스다, 개슈키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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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정들었던 도심을 떠나 이 낯선 곳에 온 지도 어느덧 시간이 꽤 지났다. 새로운 동네와 일터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바빴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달력까지 바뀌어 있었다. 

 

이번에 오게 된 ‘애덤 커뮤니케이션즈’는 다행히도 상당히 느슨한 근무환경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근무지래 봐야 깡촌에 있는 기지국이랑 서버 시설이 전부다 보니 이렇다 할 정치적 알력도 없었고, 사소한 업무처리 방식을 가지고 이래저래 따지는 사람도 없었다.

 

가장 만족스러운 부분은 이 시설의 유일한 인간이 바로 나라는 것. ‘관리자’라는 그럴싸한 직함도 썩 마음에 들었지만, 귀찮게 다른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혼자서 시설 전부를 관리하는 게 힘들지 않으냐는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 인간보다 싸고 효율 좋은 직원들은 널리고 널려있다. 지금 여기 주저앉아있는 이 작달막한 친구를 포함해서 말이지.

 

 

 

 

 

“흐아아, 이제야 다 끝났네요. 진짜 정 떨어져요오...”

 

덩치로만 보면 무슨 초중생 정도 사이즈 밖에 안되지만, ‘커넥터 유미’라는 이 친구는 언제나 스스로를 ‘커리어우먼’이라고 자랑스레 칭하고 다닌다. 

 

“수고 많았어, 유미 씨. 유미 씨 아니었으면 진짜 난리 났을 거야.”

 

유미에게 자판기에서 꺼낸 커피를 건넸다. 그 중에선 그나마 제일 비싸고 좋은 거로 골라온 물건이다. 그녀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캔을 받아들었다.

 

“아이고오, 말도 마세요. 빌드 버전 확인도 안 하고 펌웨어 업데이트를 보내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는지....롤백한다고 죽어나는 줄 알았네요.”

 

“흐흐, 사람들이 워낙 생각이 없어야지.”

 

“관리자님도 고생하셨어요. 이상 생긴 터미널이랑 라우터 하나하나 다 체크하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나야 뭐, 워낙에 그런 건 익숙하니까....”

 

기억에서 잊혀가던 예전의 개고생들이 떠오른다. 그때는 정말 가관이었지.

 

“그런데 관리자님,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뭔데?”

 

“...관리자님은 왜 저한테 이렇게 잘 해주세요?”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질문이지.

 

“그럼 이제부턴 괴롭혀줄까? 말만 해, 나 잘할 자신 있어.”

 

“아잇, 그런 뜻 아닌 거 아시면서!”

 

녀석이 마구 손사래를 치는 모습이 꽤나 앙증맞아서 웃음이 나온다.

 

“그, 인턴 시절부터 동기였던 친구가 하나 있거든요. 걔가 지금 몽골 쪽 울란우데 시설에 있는데, 걔 얘기 들어보면 그쪽 인간님들은 다들 조금.....친근하시진 않은가 봐요.”

 

유미가 우물쭈물하며 신중히 단어를 고르고 있었다. 녀석의 눈 밑 다크서클이 유난히 짙어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그런데 관리자님은 절 꼬박꼬박 이름으로 불러주시고, 퇴근도 일찍 시켜주시고, 가끔은 간식까지 사 들고 오시잖아요. 보통 인간 직원분들이 그러는 경우가 별로 없다고 들었는데...”

 

그녀가 갑자기 뭔가 중요한 사실이라도 깨달은 듯 몸을 흠칫 떨었다.

 

“서-서-서-설마 제게 흑심이라도 품으신건...”

 

“...내일부터 괴롭혀주면 되지? 24시간 철야부터 시작하자.”

 

“아-아녜요! 죄송합니다!”

 

또다시 당황해서 허공에 손발을 마구 휘저어대는 유미. 

 

“그-그냥...다른 유미들 하는 얘기를 듣다 보니까, 다른 분들보다 관리자님이 유독 친절하게 대해주시는 것 같아서요. 혹시 따로 이유가 있나 궁금했을 뿐이예요.”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게 이상하게 보인다면...그건 세상이 잘못된 거지, 내가 이상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나도 끙차, 하며 녀석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지금은.....너희들을 같은 사람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 생겼으니까.”

 

내게 의문 가득한 시선을 보내오는 유미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간다.

 

“예전에 어딘가 모자란 친구 하나를 떠안게 됐거든. 그런데 같이 지내다 보니까, 행동이나 표정, 감정 하나하나가 사람하고 다른 게 없더라고. 아니, 어떤 부분에선 사람보다 나은 면도 많더라. 한마디로 그 친구가 식구가 되고 나서...여러모로 느낀 게 많았다고 해야 하나.”

 

“...혹시 저분 말씀이세요?”

 

유미가 가리킨 곳에는 외부 CCTV 모니터가 있었다. 그리고 화면에는.....시설 입구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이비가 있었다. 퇴근 시간에 딱 맞춰서 찾아왔나 보다.

 

“....쟤 맞아.”

 

“헤헤, 되게 친하신가 봐요. 여기까지 마중도 다 나오시고.”

 

“뭐...그렇지. 너도 슬슬 정리하고 퇴근해. 여긴 해가 생각보다 금방 지니까.”

 

“하아암-전 이것저것 점검해볼 게 남아서 잠깐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내일 편하려면 오늘 해두는 게 나을 테니까요. 관리자님은 먼저 들어가 보세요.”

 

“으, 고생 많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먼저 가 볼게. 너무 무리하진 말고.”

 

“네, 살펴 가세요오-”

 

하품하며 손을 흔들어주는 유미를 뒤로하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반갑게 날 맞아주는 이비. 

 

“아, 일 끝나셨슴까, 주인님? 가방 주십시오, 제가 들어드리겠슴다!”

 

녀석이 내 팔에서 휙 가방을 낚아채서는 자기 품에 안아 들었다. 나는 픽 웃으며 이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짜식,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더니 최근에는 꽤나 가사일에 능숙해졌다. 이제는 주인님을 모시는 건 메이드의 본분이라면서 이렇게 시키지도 않은 일까지 하고 있고. 

 

“오느라 힘들었겠네. 굳이 여기까지 안 나와도 된다니까.”

 

“에헤헤, 전 주인님하고 같이 걷는 게 너무 좋지 말임다.”

 

나도 너랑 걷는 게 너무 좋아,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쑥쓰러움을 이기지 못해 입을 열 수 없었다. 근질거리는 입을 겨우 다스려가며 이비와 산길을 산책하듯 내려가고 있자니,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녀석이 갑자기 불어로 노래를 시작했다. 아마 이번에도 군가겠지.

 

“Trois jeunes tambours s'en revenaient de guerre-

Trois jeunes tambours s'en revenaient de guerre-

Et ri et ran, ran pa ta plan.

S'en revenaient de gue-rre!”

 

새삼 녀석의 고운 목소리가 참 아름답게 들린다. 만면에 미소를 띤 저 즐거운 얼굴도 비할 데 없이 예쁘게 보이고... 무엇보다, 이런 사람이 내 곁에서 함께 걷고 있다는 그 자체가 너무나도 행복하게 느껴진다.

 

“...이비?”

 

“Oui, monsieur? 아니, 네, 주인님?”

 

 

 

 

 

내가 부르자 곧바로 나와 얼굴을 마주하는 이비. 여전히 내 가방을 소중하게 껴안고 있다. 나뭇잎 사이로 새어 들어온 저녁 노을빛이 녀석의 얼굴을 은은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수줍은 듯 발갛게 물든 볼과 매끄러운 입술이 반짝인다. 

 

모듈 이상 때문에 자꾸만 언어가 왔다 갔다 하는 저 모습조차도 오늘따라 너무나 사랑스럽다. 아니, 저 녀석의 모든 면이 새삼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기묘했던 첫 만남부터, 제대로 된 메이드가 되겠다며 열심히 정진하는 지금의 모습까지. 하고 싶은 말은 너무도 많았지만, 애써 부끄러움을 이겨내고 이비에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다음의 한마디뿐이었다.

 

“고마워. 나랑 같이 있어 줘서.”

 

그 말에 헤헹, 하고 기쁜 듯 웃어 보이는 이비.

 

내 기구한 삶에 생긴 유일한 행운이 나를 향해 웃어준다. 매번 보아왔던 녀석의 함박웃음이지만,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느낌이 다르다. 가슴 언저리가 울리듯 저려 온다.

 

살면서 ‘행복하다’라는 말을 입에 올린 기억이 없다. 그동안은 그런 걸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기분은..... 정말로 행복이란 것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실로 과분할 정도로 행복한 기분이다. 

 

사랑해, 이비.

 

내가 정말로 전하고 싶었던 이 한마디는, 결국 집에 돌아올 때까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제대로 내 마음을 알리고 싶다.

 

언젠가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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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라스트오리진 세계관이랑 연표까지 찾아보면서 이야기를 짜고 있습니다. 어렵네요, 이것도.


다음 회차는 (약후)가 될 예정입니다.


삽화 수위가 좀 신경쓰이긴 하지만, 적당히 타협을 볼 생각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군장 두른 코쟁이 아저씨들이나 잔뜩 그렸을텐데 


 라스트오리진 덕에 평소라면 그리지 않았을 것도 다 그려보네요.


매번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브라우니 애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