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링크

 

1화 :   (문학, 삽화) 우리집 브닐라 -1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2화 :   (문학/삽화) 우리집 브닐라 2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3화 :   (문학/삽화) 우리집 브닐라 3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4화 :   (문학/삽화) 우리집 브닐라 4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5화 :  (문학/삽화) 우리집 브닐라 5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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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야, 브라우니! 이리 와봐!”

 



 

“이히히, 이 토끼귀 어때? 귀엽지?”

 

이프리트 하사님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가 보니, 하사님의 후드에 복슬복슬한 흰색 솜뭉치 두 개가 달려 있었습니다. 뭔가 생뚱맞으면서도....하사님하고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건...”

 

“저기 구석에 인형 공장에서 찾았어. 거기 창고에 이런 게 널려 있더라구.”

 

정말 마음에 드시는 모양인지, 하사님께선 아담한 몸까지 폴짝대가며 토끼귀를 흔들어 보이고 계십니다. 계속해서 “귀엽지? 응? 귀엽지이?”라고 물으시는 모습이 퍽 앙증맞습니다. 저렇게 하사님이 천진난만하게 구시는 모습을 본 지도 꽤나 오래된 느낌입니다. 

 

“귀엽긴 한데....연대장님이 보시면 또 큰일 나는 거 아님까?”

 

“브야, 애초에 내가 임관 당한 게 누구 때문인데. 양심이 있으면 심하게 갈구진 않겠지.”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레후도 이건 인정할걸? 귀엽잖아아...”

 

손을 머리에 대고 토끼 흉내를 내시는 이프리트 하사님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처음 뵀을 때 무턱대고 어린아이 대하듯이 했다가 정강이를 차였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솔직히 저럴 땐 아직도 애 같으십니다. 저는 푸흡, 하고 웃으며 고개를 돌렸습니다.

 

“뭐야, 웃어? 꼽냐? 꼬우면 니가 부사관 할래?”

 

“아닙니다! 전 지금 그대로가 좋지 말임다!”

 

“난 진짜로 너랑 계급장 바꿔 달고 싶다아.....예전이 좋았어어....”

 

아련한 표정을 하고 깊은 한숨을 쉬시는 하사님. 그 때 다른 이프리트 한 분이 하사님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분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왔습니다.

 

“저기...머리 위에 그거, 어디서 났어?”

 

그분을 시작으로, 곧 수많은 이프리트들이 하사님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습니다.

 

“우와아....귀엽다아...그거 나도 구할 수 있을까?”

 

“나도오!”

 

“나도!”

 

“저 뒤쪽에 무너진 공장. 엄청 많으니까 알아서 가져가아...”

 

하사님께서 하품을 뱉으며 뒤쪽을 가리키시자, 모여들었던 이프리트 무리는 어느새 공장 방향으로 흩어졌습니다. 혹시라도 저 바느질거리를 전부 각 분대 레프리콘들이 떠맡게 된다면...참 불쌍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한동안 이 삭막한 곳에서 바쁘게 지냈는데, 이런 사소한 소동 정도는 잠시 즐겨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렇게 웃으며 재잘대던 것도 대체 얼마 만일까요.

 

.

.

.

 

“Rapporter.”

(보고바람.)

 

“...Les forces hostiles sont rassemblées dans la ville, fini.”

(...적군이 마을에 집결하고 있음, 이상.)

 

“Feu à volonté. Ne laissez pas les ennemis traverser le pont.”

(자유 사격을 허가한다. 놈들이 다리를 건너게 두지 말도록)

 

“Copie solide.”

(입감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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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의 차를 얻어타고 새로 오픈했다는 백화점으로 가는 길이다. 브닐라는 (틈만 났다 하면 으레 그러듯이) 뒷좌석에서 침까지 흘려가며 졸고 있었다. 마침 H 녀석이 용케 빈자리를 찾아 주차를 마친 참이라, 브닐라를 세차게 흔들어 깨웠다.

 

“흐에에....으에? 벌써 다 왔슴까?”

 

아직도 비몽사몽한 채로 눈을 비비는 브닐라. 저렇게 수시로 졸아댈 수 있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안 내리고 뭐 하십니까, 모조품 씨.”

 

어느새 다가온 바니가 뒷좌석 문을 열고 브닐라를 노려보았다. 아직 안전벨트도 채 풀지 않았던 브닐라는 후다닥 차 밖으로 뛰어나왔다. H쪽을 바라보니 마침 엘리베이터가 왔다며 녀석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 

 

여기, 개장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곳치고는 손님들이 꽤 많은 편이었다. 거기다가 넓기는 또 얼마나 넓은지, 바깥에서 봤을 때보다도 내부가 훨씬 더 거대해 보이는 기분이었다. 들뜬 얼굴을 한 H가 우리 쪽을 돌아보며 말을 건넨다.

 

“자아, 그럼 어디부터 둘러볼까?”

 

“골프나 낚시용품점 쪽으로 가실 생각이면, 저는 그냥 직접 운전해서 집으로 가겠습니다. 주인님은 걸어오시든 어쩌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아 참, 이젠 그런 데 돈 안 쓴대도 그러네...”

 

그 순간 브닐라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녀석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나와 H 쪽을 바라본다.

 

“맞다. 배고프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니까 일단 배부터 채울까?”

 

“마침 시설 안내도에서 적당한 곳을 봐 두었습니다.”

 

바니가 위층을 가리킨다.

 

“주인님과 친구분의 수준에 비하면 상당히 고급스러운 곳이라 두 분의 입맛에 맞지 않을까 걱정은 됩니다만, 괜찮아 보이는 레스토랑이 한 곳 눈에 띄더군요.”

 

“...그냥 네가 거기 가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네, 정확하십니다.” 

 

내 물음에 표정 하나 안 바뀌고 태연히 대꾸하는 바니. 저렇게 당당하게 나오니 할 말이 없다. 이어서 바니는 내 뒤에서 정신없이 고개를 돌려가며 실내를 두리번대는 브닐라에게 말을 붙였다.

 

“모조품 씨? 당신 생각은 어떠십니까?”

 

“그-그-그-그게, 잘 못들었슴다...?”

 

화들짝 놀라선 잔뜩 당황하는 브닐라를 보고, 바니가 땅이 떨어져라 한숨을 쉰다.

 

“한 번만 더 말씀드리죠. 아까 제가 찾은 레스토랑, 가보고 싶으십니까?”

 

“저-저야... 주인님이랑 선배님이 좋으시면 어디든 좋지 말입니다.”

 

그제야 바니는 만족한 듯이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좋습니다. 그럼 정해졌군요. 식사는 그곳에서 해결합니다”

 

“바니야, 나는-”

 

“주인님의 의견은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다. 가시죠.”

 

.....웬만큼 기가 센 인간 여자를 데려와도 저 정도는 아닐 것 같다. 

 

그 와중에 바니는 살포시 H에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말은 틱틱대면서도 저럴 때는 꼭 사귀는 사이라도 되는 것 같다. 아니, 관점에 따라선 이미 사귄다고 할 수도 있으려나.

 

내 옆에 선 브닐라도 그 광경을 보더니, 쭈뼛대며 슬쩍 내 팔에 자기 팔을 감아온다. 짜식, 귀엽네. 나는 모르는 체하며 슬쩍 팔을 내밀어주었다. 이렇게 팔짱을 끼고 있으려니, 느긋한 속도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가 마치 놀이공원 대관람차처럼 느껴진다.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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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니가 이야기했던 레스토랑은 –그녀의 표현대로- 실로 고급스러움 그 자체와도 같은 장소였다. 프랑스어로 된 가게 이름하며, 요 앞에 걸어놓은 메뉴판에도 온통 불어 일색이다. 문제가 있다면 척 봐도 지갑 거덜내기 딱 좋은 분위기였다는 거지만, 알 게 뭐냐. 오늘은 내가 사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입구로 막 들어서려던 순간 메이드들이 갑자기 신음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여잡기 시작했다. 심지어 바니는 정말 괴로워 보이는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버리기까지 한다. 얘들 왜 이러지? 


당황스러운 마음을 안고 둘에게 다가가던 찰나, 갑자기 내 머리에도 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마치 누군가가 두개골 안쪽에서부터 송곳으로 이곳저곳을 사정없이 찔러대는 것 같다. 엄청난 고통에 신경이 바짝 곤두서서, 머리 곳곳은 물론이고 귓바퀴에 있는 작은 혈관들까지도 하나하나 느껴질 정도다. 

 

나까지 덩달아 바닥에 주저앉아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소스라치게 놀란 H가 다급히 우리에게 달려왔다.

 

“어어? 너희들 왜 그래? 어디 아파?”

 

“손님. 우선 바이오로이드들을 데리고 조금 물러나 주세요.”

 

입구에 서 있던 종업원이 우리를 몇 발짝 뒤로 밀어냈다. 그러자 브닐라와 바니, 그리고 내 머리를 헤집고 있던 두통이 갑작스레 사라져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두통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영문모를 고통이 사라지자, 깊은 짜증과 분노가 그 빈자리를 대신했다.

 

“방금 그거 뭐였어 이 씨바-”

 

“우리 매장에서는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 바이오로이드 차단파 발생기를 가동 중입니다. 아마 들어오시기 전에 안내문을 미처 못 보신 것 같네요.”

 

....뭐?

 

“아....여기는 바이오로이드 출입 안 되나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바니를 부축하던 H가 힘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네. 죄송합니다, 손님.”

 

자기가 할 말은 다 했다는 것인지, 종업원은 우리에게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훌쩍 제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저 사람 태도가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으으...방금은 진짜 죽는 줄 알았슴다.”

 

“역시 인간님들답군요. 좋은 것은 한사코 나누려 들지 않다니.”

 

토라진 얼굴로 한마디씩 뱉는 메이드들. H는 그런 바니를 달래보려 애를 쓰고 있다.

 

“하는 짓 보니까 어차피 그다지 맛도 없었을 거야. 그냥 다른 데 가자. 장사 저렇게 하면 자기들만 손해지. 그치 바니야?”

 

“...이번에는 주인님이 골라주십시오.”

 

“그래, 그래,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천천히 찾아보자.”

 

“다른 곳은 저런 이상한 게 없었으면 좋겠지 말입니다.”

 

이 뭐 같은 레스토랑을 뒤로하고 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두 다리로는 친구와 메이드들의 뒤를 따르면서도, 내 머릿속은 온갖 의문으로 가득 차 혼란스러웠다.

 

인간의 상당한 악의가 느껴지는 바이오로이드 차단파 발생기. 왜 굳이 그딴 걸 만들 필요가 있으며, 그걸 또 식당 입구에까지 박아 둘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어째서 그것의 영향을 받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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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는 수없이 많은데 막상 들어갈 데가 없다.

 

일식집도 바이로이드 출입 금지, 고급 중식당도 바이로이드 출입 금지. 저기 한정식집은 출입은 가능한데 인간이랑 합석은 안 된단다. 또 다른 프랑스 레스토랑 한 곳은 대놓고 광고라도 하듯 차단파 발생기를 문 앞에 달아놓고 있었다. 

 

이렇게 헛물만 켜며 입구에서 돌아서길 몇 번째, H와 나, 그리고 두 메이드는 가뜩이나 배고픈데 이젠 기운까지 쪽 빠져버렸다. 

 

주변에 보이는 바이오로이드들이라곤 죄다 청소부나 다른 손님들 짐꾼이었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다. 그 와중에 저 옆에선 어느 아줌마가 애완견을 안고 아까 그 레스토랑으로 들어가고 있다. 하다못해 개까지 받아주면서 왜 얘들은 안된다는 거지. 

 

결국 이곳저곳을 흐느적거리며 돌아다닌 끝에 우리가 안착한 곳은 한 수제 버거집. 말이야 수제라니까 그럴싸해 보이겠지만, 가격에 비해 지독하리만치 성의 없고 맛대가리는 더더욱 없는 햄버거를 파는 곳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이 백화점 안에서는 이곳이 바이오로이드와 인간 동시 출입이 가능한 유일한 장소였는데.

 

...솔직히 이거 반값 정도 하는 프랜차이즈 버거집이 훨씬 맛있겠다. 나와 H, 그리고 바니까지도 ‘배고프니까 마지못해 먹는다’라는 표정으로 인상을 써가며 이 유사-버거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성비는 진작에 엿 바꿔 먹은 햄버거를 먹으면서도 브닐라는 싱글벙글 즐거워 어쩔 줄을 모른다.

 

“진짜진짜 너무 맛있슴다! 인간님들 버거는 원래 이렇게 맛있는 검까? 부대에서 먹던 거랑은 완전히 다르지 말입니다!”

 

“...모자라면 이거도 먹을래?”

 

“어, 진짭니까? 감사함다, 주인님!”

 

반도 채 안 먹고 내려놓았던 유사-버거를 브닐라에게 내밀었더니, 녀석이 그걸 또 홱 채가서는 순식간에 먹어 치운다. ....배가 고프긴 고팠나 보다. 하도 와구와구 먹어댄 탓인지, 녀석의 입가에는 소스가 잔뜩 묻어있었다. 접시 주변이 엉망진창인 건 말할 것도 없고.



 

 

 

크기가 작지도 않은 버거를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 것에 감탄하고 있었더니, 어느새 바니가 냅킨으로 브닐라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다.


“제가 당신 엄마도 아니고, 이런 것까지 일일이 해 드려야 합니까? 아니지, 차라리 제가 당신 엄마였으면 좋겠네요. 확 내다버릴 수라도 있게.”

 

녀석, 말은 그렇게 하면서 물까지 묻혀가며 참 정성스럽게도 닦아 준다. 자기도 내심 아까 사격장에서 갈궜던 게 미안했던 모양이지.

 

“에헤헤...죄송함다, 바닐라 선배님.”

 

“바니라고 부르세요. 그 멍청한 웃음도 그만두고요.”

 

“네, 알겠슴다, 바니 선배!”

 

두 메이드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걸 보고 있었더니 그 귀여운 광경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식사는 정말 별로였지만, 저 쬐깐한 여자애들이 저러는 걸 보고 있자니 그 불만조차도 절로 녹아 없어지는 것 같다.

 

내려올 생각을 안 하는 입꼬리와 함께 아직도 컵에 한참 남아있는 콜라를 쪽쪽 빨고 있으려니, 남은 감자튀김을 먹던 H가 슬쩍 말을 걸어왔다.

 

“그...너네 메이드 씨는 이름이 어떻게 돼? 네가 이름 부르는 걸 못 들은 것 같아서.”

 

“브닐라.”

 

“아니, 모델명 말고. 네가 붙인 이름.”

 

.....그런 거 없는데.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었더니, H가 불만이 있다는 듯 팔짱을 낀다.

 

“거 같이 사는 사이에 정 없게 이름도 하나 안 지어줬냐? 메이드 씨 서운하시겠다.”

 

“꼭 붙여야 돼? 자기 바이오로이드한테 이름 새로 지어줬단 얘긴 못 들어봐서.”

 

“야, 하다못해 애완견도 이름이 있는데. 그럼 너는 걔들도 ‘어이구 우리 개~’ 할거냐?”

 

“.....”

 

뭐라고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도 이름이 중요하지만, 쟤들한테는 특히 더 중요해. 자기랑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성격을 한 수많은 존재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몇 안 되는 게 바로 이름이거든. 그것도 주인이 직접 붙여준 애칭같은 거.”

 

감자튀김 몇 개를 더 집어먹더니, 놈이 이렇게 덧붙인다.

 

“사람들이 많이들 간과하는 부분이지만, 보드랑 모듈 조금 붙은 거 말고는 쟤들도 우리랑 똑같아. 두뇌 있고, 감정도 다 느끼고.....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도 하고.” 

 

녀석이 브닐라와 한창 수다를 떠는 바니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그러니까...멋 모르고 그런 고차원적이고 감수성 깊은 ‘사람’들을 사들인 이상, 최소한 ‘사람’처럼은 대해줘야 맞겠지. 사람다운 이름부터 시작해서, 안 그래?”

 

‘어때, 존나게 멋있지?’ 하는 듯, 무게 잡는 표정으로 내 쪽을 돌아보는 H.

 

“...병신, 똥을 싸요. 똥을 싸.”

 

“아니, 왜? 내 말이 틀렸어?”

 

“네 말은 백번 맞는데, 너 폼잡는 게 같잖아서 그런다, 병신아.”

 

“아 새끼, 이걸 안 받아주네.”

 

우리는 킥킥대며 잠시 서로를 보고 웃었다. 이 녀석이랑 이러고 헛소리하고 논지도 간만이네. 좋았던 옛날 생각이 나서 아련한 마음이 든다.

 

“아, 근데 진지하게, 메이드 씨 이름은 꼭 좋은 걸로 지어줘. 분명 좋아할거야.”

 

“어이구 그러셔요. 그래서 너는 성의 없게 그냥 바니라고 지었냐?”

 

“에이, 본인이 좋아하는데, 뭐. 토끼 같아서 귀엽기도 하잖아.”

 

흠. 그러고 보니, 이제 와서 계속 ‘브닐라야’ 하며 불러대자니 조금 삭막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마치 아무나 붙잡고 ‘인간아’ 부르는 거나, 아니면 아무 개나 붙잡고 ‘푸들아, 말티즈야’ 하는 것같이 들리기도 하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집에서 챙겨왔던 서류가 떠올랐다. 생각 난 김에 곧바로 서류봉투를 꺼내서 H에게 내밀었다.

 

“음? 이게 뭐야?”

 

“우리 브닐라 사면서 같이 받은 서류. 등록증이랑 같이 들어 있더라. 나는 이제 뭐... 배운 거 다 까먹어서 읽기 귀찮아졌으니까 대신 좀 봐주라. 어차피 이쪽은 네가 더 잘 알잖아.”

 

“허이고, 영재 학교니 뭐니 하는 것도 세월 앞에선 다 부질없네.”

 

새끼, 어차피 지도 나랑 동문이면서. 

 

어쨌든 이런 걸 당사자들 앞에서 대놓고 읽기도 좀 그랬던 관계로, 우리는 따로 나눌 말이 있다고 둘러대며 멀찍이 떨어진 빈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내가 녀석의 감자튀김을 뺏어 먹는 동안, H가 봉투를 열고 서류를 집중해서 읽기 시작했다. 

 

“...야, 메이드 씨 나이가-”

 

“그건 나도 봤어. 패스.”

 

“아, 응.... 그리고 네 메이드 씨, 1차 연합전쟁이랑 지금 2차 연합전쟁까지 전쟁이란 전쟁은 다 뛰고 온 거 같아. 그리고 보자....퇴역 당시 계급이 소위래. 메이드 씨 동형모델이 이 정도까지 올라간 건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적혀있네.”

 

“그래? 혹시 다른 중요한 얘기는 없나 더 봐주라.”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리는 H. 그렇게 시답잖은 정보를 얘기해주며 몇 장을 넘기더니, 문득 어느 한 곳에서 시선이 멈춘다.

 

“왜, 뭐 있어?”

 

“야...너 이거 못 봤어?”

 

“뭐길래?”

 

녀석이 보여준 건 서류 사이에 클립으로 끼워진 사진이었다. 단순화되어 여러 부분으로 나뉜 인체가 그려져 있고, 곳곳에 무어라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이건 수복 소견서인데, 여기, 다른 부상도 심각했지만, 두뇌에 가해진 충격이 정말 심했대. 베이스 모듈까지 고장을 일으켜서 몇몇 필수적인 기능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아무튼 이거 잘 봐봐.”

 

H가 구석에 쓰인 작은 글씨를 가리켰다.

 

“집착적인 생존 본능 발현. 감정 모듈 과잉 반응 현상. 기억 모듈 손상.....하여간 전반적으로 머리가 맛이 갔는데, 여기 이 부분이 제일 심각해.”

 

녀석이 손가락을 힘주어 쿡 짚은 곳엔 이런 문장이 쓰여 있었다.

 

“Unable to recognize human brainwave. Unwilling to comply direct human instructions. Unfit for both military & civilian use. Recommend complete termination.”

(인간의 뇌파 인식이 불가능함. 인간의 직접적인 지시에 따르지 않는 경향을 보임. 군사 및 민간 분야 사용 모두에 부적합. 완전한 폐기를 권장함.)

 

“...그러니까, 사람한테 자주 개긴다는 얘긴가?”

 

“고작 그 정도면 블랙리버 애들이 완전 폐기 운운하지도 않았겠지. 쉽게 말하면 메이드 씨는 지금 사람이 사람으로 안 보이는 상황일 수도 있어. 쟤들이 인간을 인식하는 첫 번째 요소가 뇌파잖아, 그걸 지금 제대로 못 읽고 있다는 건데....”

 

H가 평소에 짓지 않던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함부로 인간을 해칠 수 없다는 제약까지 풀렸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야.”

 

“...뭐라고?”

 

“그러니까, 재수 없으면 쟤가 어느 날 갑자기 네 모가지를 꺾어버릴지도 모른다고.”

 

난데없는 소식에 깜짝 놀라 브닐라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생글생글한 얼굴로 바니와 담소를 나누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보면, 도저히 그럴 녀석이라곤 생각이 안 드는데..... 아니, 그보다 그 새끼들은 어떻게 이런 애를 가정용으로 팔 생각을 다 했지?

 

“혹시 메이드 씨가 이상 행동 같은 거 보이지 않았어?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이나 바이오로이드들한테 시키지도 않았는데 공격적으로 행동한다든지 그런 거.”

 

그 말을 듣고 보니, 문득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떠오른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부장에게 대들었던 일이나, 대뜸 수리 왔던 포츈을 위협하며 총을 겨눴던 일이나.... 나는 H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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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때 메이드씨 반품하겠다고 했으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아니, 얌마. 나도 이런 얘기 하긴 싫지만.....메이드 씨가 너나 다른 사람을 함부로 해치거나 하면 어떡할 건데? 그땐 현실적으로 대책 있어?”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H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내 목숨도 위험할 수 있지만, 다른 인간이나 바이오로이드들을 함부로 공격했다간 그건 또 그것대로 보통 큰일이 아니게 될 것이다. 

 

“나도 내 추측이 지나친 거라면 좋겠지만, 그 구두쇠 같은 블랙리버 애들이 완전 폐기를 권했다면 아무래도...”

 

껄끄러운 말을 입에 올리기를 주저하는 H.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바이오로이드들을 아끼는 그가 저렇게 나올 정도라면 그만큼 심각한 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나는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브닐라가 완벽히 정상이라고 믿고 싶고, 그 업체 측이 문제가 있던 부분을 제대로 고쳐주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지금까지 봐 왔던 일들은 저 서류에 적힌 것이 사실일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었다. 그날 판매업체 쪽에서 얘기했던 ‘심각한 하자’란 것은 아마 이런 걸 가리켰던 것일까.

 

어째서인지 가슴 한복판이 쥐어짜듯 아파온다. 

 

‘...가족이 생긴 것...같으셨슴까?’

 

그 알수 없는 고통이 찾아옴과 동시에, 갑자기 머릿속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감이라는 게 있지 말입니다! 전 주인님을 처음 뵀을 때부터 정말 좋은 분이라고 느꼈슴다!’

‘이제 주인님께서는 제 가족같은 분이심다. 그러니까....어떻게든 도와 드리고 싶었던 검다.’

‘히힛,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게 가족이지 말입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녀는... 평생 외롭게 지내왔던 내게 처음으로 함께할 사람이 생겼다는 느낌을 주었다. 

 

‘주인님...’

 

평생을 살면서 나를 위해 일어서 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나를 껴안아 준 사람도, 나에게 저렇게나 환한 미소를 지어준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명도, 나를 가족이라고 불러 준 적도 없었고.

 

‘..조금만, 조금만 더 이러고 있고 싶슴다.’

 

가족은, 곤란할 때면 어떤 수를 써서든 도와주는 거라고 했었지.

 

내가 할 일은 정해졌다.

 

“...안 버려.”

 

“감당할 수 있겠어?”

 

H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처음 바니가 왔던 날, 나한테 전화 걸어서 한탄했던 거 기억나냐? 내가 이딴 소리나 듣자고 메이드를 샀냐느니, 차라리 그냥 지금 옥상에서 떨어져 죽고 싶다느니 그랬잖아. 그런데 지금은?”

 

H가 내 눈을 응시한다.

 

“이제는 하루라도 쟤가 반겨주지 않으면 못 살 것 같다며. 조만간 반지도 끼워주겠다고 했지?”

 

“.....바니는 상황이 다르잖아.”

 

“나한텐 똑같아.”

 

녀석이 한숨을 쉬며 브닐라와 바니 쪽을 돌아보았다.

 

“...만약에 메이드 씨가 정말 사고라도 치면?”

 

“사고 안 쳐. 내가 장담해.”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런 일이 꼭 생길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지.”

 

H는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녀석의 눈빛이 평소와 달리 굉장히 또렷해 보이는 느낌이다.

 

“저 녀석이 지금까지 벌였던 일들... 지 딴에는 나름 새 가족, 그러니까 나를 챙기겠다고 그랬던 모양이야. 예전의 기억들 때문에, 예전 가족들처럼 나도 언젠가 자기 앞에서 죽어버리는 거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것 같더라.”

 

타들어가는 입을 콜라로 적시고 말을 이어간다.

 

“그러니까 내 말은, 여긴 전쟁터가 아니잖아. 이제 저 녀석이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하게만 해 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시간은 좀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마무리할 말을 떠올리며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지만 그다지 그럴싸한 게 생각나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냥 앞서 밝혔던 결론을 반복하기로 했다. 

 

“어쨌든 나는 쟤 못 버려.”

 

“.....너 답지 않게 진심인가 보네, 이번엔.”

 

“저 녀석이 나한테 진심인 만큼은.”

 

나도 녀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리의 시선이 교차하는 가운데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내 침묵을 깬 것은 H였다.

 

“.....하긴, 네 일이고 네 메이드니까.”

 

놈이 몸에 주고 있었던 힘을 풀고 의자에 축 늘어졌다. 

 

“그래서, 이름은 뭘로 할 생각인데?”

 

“그건 당사자랑 생각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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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번호가 사공칠칠이니까....칠칠이?”

 

“아앙, 그게 뭡니까, 주인님!”

 

“왜, 너 칠칠맞긴 하잖아. 아, 그럼 나이가 오십이니까 피프티-”

 

“지금부터 주인님 미워할 검다!”

 

“친구분은 가셔서 작명 감각부터 기르고 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 이미 말라붙어서 기를 싹조차 없겠군요. 죄송합니다.”

 

버거집에서 나온 우리는 별다른 목적 없이 백화점을 걸어다니며 브닐라의 이름을 정해보고 있었다. 내 개그 센스 만큼이나 엉망인 작명 솜씨는 오늘도 빛을 발하고 있다. 근데 진짜 뭐라고 붙여주지. 그 순간 H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 바니가 바닐라에서 따왔으니까....브라우니에서 따서 브라-”

 

그대로 H의 등짝을 후려치는 바니.

 

“짐승.”

 

“아야야...농담도 못하니.”

 

“그딴 걸 농담이라고 하십니까? 한 대만 더 맞으십시오.”

 

그렇게 실없는 소리를 주고 받다보니, 문득 브닐라의 시선이 어느 인형 가게로 향해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쇼윈도에는 여러 종류의 인형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그 중에도 녀석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후드를 입은 토끼 인형이었다. 뭔가 별나게 생겼다. 가격표를 보니 7만원, 싸지는 않구나.

 

“갖고 싶어?”

 

그 인형만 계속 멍하니 쳐다보고 있길래 사줄까 생각했더니, 녀석이 의외로 한사코 사양하며 손을 저었다.

 

“아-아님다! 전 괜찮지 말입니다. 신경 안 쓰셔도 됨다. 그냥....저걸 보니까 옛날 생각이 좀 나서 그랬던 검다.”

 

그러더니 브닐라는 잽싸게 몸을 돌려 아직도 티격태격대는 바니와 H에게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돌려 뭔가 아쉬운 눈빛으로 인형을 흘깃 쳐다보는 녀석. 나도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뒤 다시 일행과 합류했다.

 

애써 태연한 체하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브닐라 이 녀석, 풀 죽은 게 표정에서 티가 너무 난다. 애써 못 본 척 해봐도 녀석의 어두운 낯빛이 자꾸만 눈에 밟혀 신경이 쓰인다. 어느새 주차장 근처까지 왔지만, 이대로 그냥 가버리면 마음이 영 찝찝할 것 같다.

 

에라 모르겠다. 저지르자.

 

“어, 난 화장실 좀 잠깐 다녀올게.”

 

그렇게 말해놓고 전속력으로 아까 그 인형 가게로 달려갔다. 하도 길이 복잡해서 잠깐 헤매기도 했지만, 결국 어찌어찌 그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거 선물 포장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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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오늘 잘 놀았다.”

 

고맙게도 H가 우릴 집 앞까지 태워주었다. 덕분에 차비까지 아꼈네. 

 

“그래, 나도 간만에 얼굴 보니 좋더라. 메이드 씨도 잘 지내고. 이름은 정해졌어요?”

 

“헤헤...아직임다. 저도 오늘은 정말 감사했지 말입니다. 친구분도 살펴 들어가십쇼!”

 

H가 어딘가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래. 그....메이드 씨도 조심하고. 저 친구 말 잘 듣고. 알았죠?”

 

“주인님? 잠시 시간을 주실 수 있으십니까?”

 

바니가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리더니, 곧장 나에게로 다가왔다.

 

“아까 드렸던 핸드북은 갖고 계십니까?”

 

아, 사격장에서 줬던 그 수첩 말인가.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바니에게 보여주었다.

 

“모조품씨, 이거 받으세요.”

 

그대로 내 손을 끌어 브닐라의 손 위에 수첩을 내려놓은 바니.

 

“여기 적힌 대로만 하시면, 아무리 모조품씨라도 일을 크게 망치지는 않을 겁니다. 하루아침에 제대로 된 메이드가 될 거라곤 기대조차 안 하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더 이상 당신 주인님께 손해나 끼치지 않도록 하세요.”

 

바니는 그 위로 자기 손을 덮어 브닐라의 손을 감싸 쥐었다.

 

“굳이 이런 말 안 드려도 기운은 쓸데없이 넘쳐 보입니다만, 힘 내세요. 언젠가 당신이 정말로 메이드로서의 몫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때는.... 저를 언니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바니 선배님.....”

 

평소에 짓지 않던 자애로운 표정을 띤 바니와 감격한 듯한 브닐라. 뭔가 꽤나 훈훈한 분위기다. 근데 묻고 싶은 게 몇 가지 있는데 말이지.

 

“바니야, 이럴거면 수첩은 굳이 왜 나한테 미리 줬던 거야?”

 

“제 마음입니다. 설마 주인씩이나 되셔서는 가사 매뉴얼도 미리 훑어보지 않으신 건가요?”

 

“그리고 나이는 쟤가 한참 언-”

 

“그것도 제 마음입니다.”

 

제 할 말만 하고는 다시 조수석에 쏙 올라탄 바니. 작별인사를 마친 H는 그대로 차를 몰고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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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고 자켓을 벗으니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도 온 몸이 노곤한게 나이가 들긴 들었구나 싶다. 그렇게 소파에 늘어져 있으려니, 문득 인형 가게에서 사 왔던 그것이 눈에 들어온다.

 

“저기, 잠깐 여기 와 볼래?”

 

“네, 주인님?” 하고 살랑살랑 다가오는 브닐라에게 리본까지 묶여서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건네주었다. 

 

“오? 이건 뭡니까? 저 주시는 검까?”

 

“응, 선물. 열어봐.”

 

“히힛, 뭘 이런 걸 또 다 주시고. 감사함다, 주인님.”

 

신난 얼굴로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어 본 녀석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다.

 

“...혹시 마음에 안 들어?”

 

 

 

 

 

녀석은 천천히 토끼 인형을 품에 껴안더니, 이내 나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짝이곤 있지만, 울먹이는 목 때문인지 별다른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생각났다는 예전 일이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브닐라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상처를 받아왔지만, 나는 그 상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이쪽 방면으로는 아는 것도 없어서 크게 도움을 주지도 못할 것이고.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S...Sir, I...”

 

녀석이 잔뜩 흔들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나로서도 해 줄수 있는 게 별로 없지만, 이런 나에게라도 녀석이 의지해준다면 더할나위 없이 기쁠 것 같다. 받은 만큼 갚아주는 게 사람의 도리 아니겠는가. 내가 평생 짊어졌던 외로움을 이 녀석에게 덜어놓았듯이, 이 녀석도 내게 그 두려움과 아픔을 덜어놓기를 바란다. 

 

브라우니 4077EV. 그리고 브닐라 4077. 

 

등록증과 내력서에 적힌 녀석의 개체명과 생산번호. 녀석은 평생을 이렇게 불려왔다. 또 그 삭막한 식별명만큼이나 비참한 삶을 살아왔고, 살아있다면 당연히 누려야 할 사소한 즐거움조차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4077번째로 생산된 ‘물건’에 불과했으니까. 

 

단지 태어나는 과정에서 몇가지 단계를 더 거쳤다는 이유만으로 인격체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물건들. 그런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이름이란 것이 그토록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리라. 

 

“...EV.”

 

사람다운 것에게는 사람다운 이름을 주라고 했었지.

 

“이비.”

 

“...네?”

 

“네 이름은 이비(Evie)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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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타가 강하게 오긴 했지만 어떻게 대강 마무리해서 올릴 수 있었네요. 모두 여러분 덕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이번 화는 그야말로 떡밥의 도가니였습니다.


앞으로 준비된 이야기는 많은데 그림이나 글이나 손가락이 영 느려서 큰일이네요.


짧지 않은 글인데도 매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모두 내년에도 행복하시길 바라고, 라오도 잘 되길 기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