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링크

 

1화 :  (문학, 삽화) 우리집 브닐라 -1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2화 :   (문학/삽화) 우리집 브닐라 2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3화 :   (문학/삽화) 우리집 브닐라 3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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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hound to Zodiac Actual, do you read, over?”

(헬하운드가 조디악 액추얼에게 전합니다. 수신 양호한지?)

 

“Zodica Actual to Hellhound, send traffic.”

(조디악 액추얼이 헬하운드에게. 보고바람.)

 

“Objective secured. Hostile neutralized, break, multiple friendly casualties, break, secured several prisoners; mostly Bioroids. Over.”

(목표 지점 확보 완료. 적군은 무력화됨. 아군 사상자 다수 발생. 적군 포로 다수 확보, 상당수가 바이오로이드임. 이상.) 

 

“Good copy, Hellhound. Stand by at your current post until further notice. Zodiac out.”

(수신 양호하다, 헬하운드. 차후 지시가 있을 때까지 현 위치에서 대기바람. 조디악 통신 종료.)

 

“Sarge, why do you think the gov boys are running Bios out here in the field?”

(하사님, 왜 정부군 애들이 현장에서 바이오로이드들을 굴리고 있슴까?)

 

“I don’t know, dude. Maybe they got desperate?”

(나도 몰라. 아마 그 정도로 절박해졌는갑지?)

 

“What’s that Fortune doing up there?”

(저 포츈 저기서 뭐하는 거죠?)

 

“Watch out!”

(조심해요!)

 

 

 


 

“...브라우니. 가족이 뭐하는 거라고 얘기해줬던 날, 기억 하나요?”

 

노움 병장님의 몸 곳곳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정부군 소속 포츈 하나가 숨어있다가 우리를 공격했고, 병장님은 우리를 지키려고 하셨습니다. 커다란 리벳에 곳곳이 꿰뚫린 노움 병장님은 숨 쉬는 것도 힘들어 하시고 계십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서로를 지켜주는 거라고 했었죠.”

 

몇 번이나 의무병을 불러봤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레프리콘들과 다른 브라우니들이 분주히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입니다. 저의 외침은 그 소란한 소리에 묻혀버린 것 같습니다. 

 

옆에 계시던 이프리트 하사님을 불러보았지만, 하사님은 소시지처럼 터져나간 왼팔을 붙잡고 신음하고 계십니다. 다행히 레프리콘 하나가 하사님께 지혈대를 대드리고 있습니다.

 

“슬프지만...이제 저는 여러분을 지켜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노움 병장님을 위해 재빨리 제 구급낭을 열어보았지만, 지혈대와 붕대는 이미 다 써버린지 오래였습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보입니다. 어서 의무병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필사적으로 사방을 둘러봤지만, 우릴 도와줄 분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더니, 갑자기 제 손을 노움 병장님이 잡아채셨습니다.

 

“...브라우니, 잘 들어주세요. 이제는 브라우니가 다른 가족들을 지켜주는 거예요. 제 몫까지.”

 

노움 병장님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집니다.

 

“...잘 할 수 있죠? 전 우리 브라우니를.....믿어요...”

 

다른 브라우니들이 병장님을 쏜 포츈을 잡아 끌고 왔습니다.

 

.....저 씨발년을 죽여버릴겁니다.

 

하지만...총을 챙겨서 몸을 일으키려는 저를 노움 병장님이 붙잡으셨습니다. 죽어가시는 분의 손아귀 힘치고는 너무나 세서 뿌리치기가 힘듭니다.

 

“브라우니.....저 자매를 해치지 말아요. 그저 무서워서 그랬을 테니까. 너무 원망 하지말고...”

 

“우리 착한 브라우니.....먼저 떠나서 미안해요.”

 

그 말을 끝으로 노움 병장님이 눈을 감으셨습니다.

 

저는 당장이라도 그 포츈의 머리에 구멍을 내주고 싶었지만, 병장님의 유언이 어른거려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다른 자매들이 그년을 포로 호송 트럭에 던져넣는 걸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저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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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차를 쓰겠다고 회사에 말해두었다. 가스레인지 수리 기사가 오는 날이거든.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때문인지, 오늘은 일어났을 때 유독 어깨가 가벼웠다. 옆을 돌아보니 브닐라는 뭔지 모를 노래를 흥얼거리며 빗자루를 놀리고 있다. 

 

“...Bring back, bring back, bring back my Bonnie to me~ to me~” 

 

...무슨 노래지 저건. 

 

수리기사가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은 관계로, 나는 잠깐 TV나 보고 있기로 했다. 아침부터 늘어져서 TV를 보는 게 대체 얼마 만이던가.

 

“...삼안-덴세츠 연합군이 블랙리버-펙스 연합군을 상대로 알래스카 전선에서 기록적인 승리를 거뒀다는 소식입니다. 삼안 산업 보안군 관계자에 따르면-”

 

“삼안 상조에서는 내세까지 편안하게-”

 

“...극심한 기후 변화로 인해 유럽 전 지역에서 농업 생산이 차질을 빚고 있습니다. 유럽연합은 외부의 지원이 없을 경우 3년 안에 식량난이 시작될 수 있다고 경고-”

 

“치킨치킨치킨! 치킨은 라비아타-”

 

“...몽골 파워플랜트에서 시작된 에너지 부족 현상이 중앙아시아 곳곳으로 확대-”

 

“핸드폰 충전이 너무 오래 걸리시나요? 가정용 상온 핵융합 배터리 충전기-”

 

“...남아메리카의 난민 사태가 점차 심각해지는 가운데-”

 

“샀음 안샀음? 매지컬 백토 책가방!”

 

...어째 볼 게 하나도 없네. 

 

채널을 아무리 돌려봐도 죄다 기운 빠지는 뉴스 아니면 짜증나는 광고 뿐이다. 생각 없이 채널을 계속 돌리고 있자니, 생소한 케이블 채널이 하나 눈에 띄었다. 덴세츠 2 채널. 구경이나 해볼까.

 

화면에는 연주황색 머리를 한 아담한 여자애가 생글생글 웃음을 짓고 있다. 근데 이거 일본어네. 나 일본어 모르는데. 근데 얘, 저 섬뜩하게 생긴 칼은 왜 들고 있는거지.

 

뭔가 번적번쩍하는 효과와 함께 괴상망측한 포즈를 취한 소녀는 그대로 칼을 쥐고 괴물 분장을 한 누군가에게 돌진했다. 배때지에 칼을 쑤셔넣고 반바퀴 돌려 빼내자 그대로 창자며 뭣이며 함께 딸려 나와 땅바닥에 쏟아진다. 소녀는 해냈다! 하는 듯이 발랄한 포즈를 취했다.

 

이어서 소녀의 등 뒤에서 배를 움켜쥐고 바닥에서 움찔거리는 괴물이 화면에 잡혔다. 그 괴물을 흘깃 째려본 소녀는 그대로 날아올라 뭔가를 외치며 마법봉을 겨누었다. [★Magical Explosion★] 이라는 자막이 나타나자, 마법봉의 머리 부분이 분리되어 괴물에게 날아가 성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흩뿌려지는 순대랑 육편이 쓸데없이 리얼하다. 설마 저거 진짜는 아니겠지.

 

“주인님 뭐 보심까? 심심하심까? 심심하시면 제가 재밌는 거 하나 보여드리지 말임다.”

 

어느 새 옆에 다가와 앉은 브닐라. 손에는 냉장고에 붙어있던 자석 장식이 놓여 있다. 브닐라는 그대로 자석을 자기 이마에 대었고....

 

...붙었네?

 

“뭐야,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이마에 붙은 자석을 떼어보니, 편법이 아니라 진짜 자성으로 붙어있던 느낌이다. 뭐지 이거, 뭐야 몰라 무서워.

 

“이히히, 우리 바이오로이드들은 몸속에 흐르는 게 인간님들이랑 조금 다르다고 함다. 그래서 자석이 딱 붙는 거라고 들었지 말임다!”

 

아하, 금속 골격이랑 혈액 속에 든 오리진 더스트 때문인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해가 좀 되는구만. 그래도 신기하긴 신기하다. 

 

얼빠진 내 표정을 보자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브닐라가 갑자기 “얍!” 하면서 내 이마에 자석을 갖다 대었다.

 

“아하하, 뭐하는 거야, 임마. 나한테는 안 붙-”

 

.....뭐지 시밤. 붙었다.

 

“어...이거 인간님들도 되는 거였슴까?”

 

“...그러게?”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인가. 할 말이 없어서 서로 멍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으려니, 갑작스레 도어벨이 울렸다. 드디어 수리 기사가 왔나 보다. 예정보다 조금 빨리 도착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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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 안녕! 수리를 도와드릴 포츈이거든?”

 

문을 열자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네는 기술자 바이오로이드. 뭔가 든든하게 생긴게 믿음이 간다. 

 

“어서 들어와. 가스 레인지는 저기 있고. 전화로 설명했듯이 자그만 화재가 있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포츈을 주방으로 안내했다. 공구상자를 들고 ‘응, 응’ 하며 나를 따라오는 포츈. 

 

거실 소파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던 브닐라는 포츈을 보자 갑자기 노래를 멈추었다. 앳된 갈색머리 메이드의 해맑은 얼굴에서 서서히 즐거움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애가 갑자기 왜 저러지. 

 

“야, 브닐라. 괜찮아? 너 왜-”

 


 




“Get behind me, sir! Now!”

(제 뒤로 오십쇼, 당장!)

 

브닐라는 대꾸할 새도 없이 갑자기 총을 집어 들고 나와 포츈 사이로 뛰어들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적 없던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데, 솔직히 저런 눈빛은 생전 처음 본다.

 

순식간에 총의 개머리판을 펴고 자세를 잡은 브닐라. 총을 포춘에게 겨눈채로 다가가는데, 영화에서나 보던 전문적인 모양새가 그대로 나온다. 이거 내가 알던 그 맹하고 천하태평한 그 녀석이 맞나 싶었다. 

 

“Leave.”

(나가.)

 

녀석은 뜬금없이 영어까지 써가며 포츈을 내보내려 했다. 포츈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서인지 나 이상으로 당황한 분위기다. 어버버하며 대처를 못 하고 얼어붙은 포츈의 모습이 녀석을 더욱 자극한 것 같다.

 

“Leave now, or I’ll blow your fucking head off.”

(여기서 당장 나가. 안 그러면 대가리를 날려버릴 테니까.)

 

“ㅇ-어-저, 저기, 고객님? 지금 이게 무슨-”

 

“Get the fuck out, I said!”

(씨발 쳐 나가라고 했잖아!)

 

브닐라가 세차게 노리쇠를 당기자 철커덕, 하는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탄피 배출구 사이로 총알이 움직인 것을 본 포츈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치기 시작한다. 브닐라는 그런 포츈을 현관으로 몰아붙이더니, 그대로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힘을 주기 시작했다. 

 

“야! 미쳤어? 정신 차려!”

 

큰 사고가 나기 전에 브닐라에게 달려들어 억지로 총구를 내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브닐라의 얼굴에서 아까의 그 무시무시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어리숙한 소녀의 눈빛이 되돌아왔다.

 

“쥬...쥬인님?” 하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브닐라.

 

“그래, 나야. 너 지금 도대체 왜 그-”

 

 


 

녀석의 눈에 물이 차오르더니, 이내 총을 바닥에 내던지고 그대로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고 긴장이 풀린 모양인지, 포츈도 다리에 힘이 빠져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흐아아앙! 병장니이이임! 으아아아아앙!”

 

“흐버버버버버......”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내 앞에서는 군필 여고생 하나와 공돌이 아줌마 하나가 사이좋게 즙을 짜고 있다. 울어대는 이유는 서로 다르지만, 사람 당황하게 만드는 건 둘이 마찬가지다. 막상 여기서 제일 울고 싶은 사람은 바로 나인데 말이야. 

 

가스레인지 수리하려다가 눈 앞에서 사람 총맞아 죽는 꼴을 볼 뻔하리라곤 생각도 못해봤다. 아니 시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어처구니가 없어도 너무 없어서인지, 힘이 풀린 내 다리도 바닥으로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뒷목이 땡긴다. 그것도 꽤나 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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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다친덴 없고?”

 

“죄송하지 말입니다...”

 

아직도 눈에 생기가 돌아오지 않은 포츈에게 음료수를 건네주며 안부를 물었다. 브닐라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옆에서 쭈뼛거리고 있다.

 

“ㄱㄱㄱㄱㄱ.....괜찮은거거든? 신경써줘서 고마워....”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아, 그래서 가스레인지는-”

 

“아! 아! 맞다! 이 누나가 얼른 고쳐주는 거거든? 고객님은 잠시만 기다려!”

 

말을 끝내기도 전에 황급히 공구를 챙겨 주방으로 가버리는 포츈. 어떻게든 이 집에서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가보다. 솔직히 나 같아도 저랬을 테니 뭐라고는 못하겠다.

 

잠시 뒷목을 주무르고 있었더니, 한참을 꺽꺽 통곡하느라 눈이 퉁퉁 불어오른 브닐라가 내 눈치를 살피고 있다.

 

“...진정했어?”

 

“...네.”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브닐라. 뭔가 안 좋은 사연이 있다는 건 분명하다. 평소에도 툭하면 악몽을 꿔대는 걸 보면 그런 사연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야기하긴 고통스러운 사연이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이번 건은 그냥 묻어두고 가면 안 될 것 같아서 이것저것 물어보기로 했다. 

 

“아까는 왜 그랬는지 말해줄 수 있어?”

 

“.....”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로 묵묵부답이다.

 

“얘기하기 싫다고 해도 이해해. 아마 충분히 그럴만 할거고. 그래도...”

 

어째서인지 입이 바짝 탄다. 하지만 억지로 침을 삼키고 하려던 말을 마저 뱉어낸다.

 

“우리 이제 가족이라며. 가족한테 털어놓고 나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주인님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운을 떼는 브닐라.

 

“예전에, 저분이랑 똑같이 생긴 분한테 가족 같은 분을 잃었습니다. 저에게....가족이 어떤 건지 알려주셨던 바로 그분 말입니다. 그래서 저분 얼굴을 보자마자…. 주인님마저 잃어버릴까봐.....”

 

녀석, 아까 그렇게 운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눈물을 짜내려고 한다. 

 

“그분이 돌아가시면서 저한테 그러셨슴다. 이젠 제가 그분 대신 가족을 지켜야 한다고 말임다. 그런데... 결국 전 아무도 지킬 수 없었음다. 그분이 하셨던 마지막 부탁인데...제가 못나서 그것도...”

 

“저기, 브라우니씨?”

 

아까부터 듣고 있었던 모양인지, 포츈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이 언니가... 일단 그쪽이 얘기하는 그 모델은 ‘절대 아니거든?’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포츈 모델을 대신해서... 진심으로 사과할게. 그런 일이 있었다니 정말 유감이야.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생각해.” 

 

의외로 다정한 톤으로 이야기하는 포츈. 브닐라도 울먹거리는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본다.

 

“물론 ‘내가 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신 사과할게. 누군지는 몰라도 소중한 분이었을 텐데, 그런 식으로 떠나보냈다면 나라도 참 슬펐을 거야.”

 

...유독 자기가 안 했다는 부분에 힘을 주어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브라우니씨. 옆을 잘 봐. 이젠 브라우니 씨가 지켜야 할 새 가족이 생겼잖아? 이 언니는 말이야, 세상을 떠난 브라우니 씨 가족들이 정말로 원하는 건 브라우니 씨가 그분들을 생각하면서 후회하는 것보다는, 새로 만난 가족과 행복하게 지내는 거라고 생각하거든?”

 

포츈은 마치 애엄마같은 따듯한 표정으로 브닐라의 머리를 토닥여준다.

 

“뒤만 보고 걷다 보면 전봇대에 뒤통수 깨지는 법이야. 이젠 앞을 보고 다니길 바랄게.”

 

“흐윽.....감사함다. 그리고 아까 일은 죄송했지 말임다.”

 

괜찮은거거든? 하고 애써 웃어보이는 포츈이었지만, 표정은 그다지 괜찮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계속해서 브닐라를 쓰다듬어주는 포츈. 이게 어른의 자세라는 건가.

 

“저기, 고객님? 가스레인지는 수리 끝났거든? 혹시라도 문제가 또 생기면 언제든 연락해줘!”

 

“아, 잠깐.”

 

후다닥 현관을 나서려는 포츈을 붙잡고 현금을 조금 쥐어준다.

 

“여기 공임비. 팁도 좀 더 넣었어. 아까 일은 정말 미안해. 얘가 그런 애가 아닌데...”

 

포츈은 팁을 받아들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뭐지, 너무 적게 줬나?

 

“아, 당한 게 있는데 좀 모자라지? 미안, 내가 형편이-”

 

“고객님.”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 말을 잘랐다.

 

“누나는 괜찮으니까, 가서 브라우니 씨나 좀 안아줘. 계속 잘 보살펴주고.”

 

응?

 

“...고객님은 자기가 누굴 샀는지도 모르는거구나? 판매자가 등록증이랑 내력서 안 줬어?”

 

“받기는 했는데...”

 

받긴 했는데 귀찮아서 봉투도 안 뜯어봤지. 아니 애초에 쟤가 왔던 첫날부터 정신 사나웠는데 그런걸 일일이 읽어볼 정신이 어디 있었겠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 포츈, 그런 그녀에게 “내가 잘못한 거야?” 하고 물어보니 미간을 찌푸리고 지그시 쳐다볼 뿐.

 

“브라우니 씨가 괜찮아지면, 시간 내서 서류들 찬찬히 읽어봐. 하지만 우선은,”

 

그녀가 내 몸을 잡고 뒤로 돌려 브닐라 쪽을 향하게 했다.

 

“불쌍한 동생을 달래는 게 먼저거든? 잘 해봐. 그럼 누나는 이만.”

 

포츈이 슬쩍 나를 떠밀었고, 곧 등 뒤에서 현관문이 닫혔다. 침울한 표정을 하고 앉아있는 브닐라가 눈에 들어온다. 일단은 들은대로 해야겠지.

 

“저기, 브닐라?”

 

브닐라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녀석의 눈이 나를 향한다. 안아주라고 했던가. 내가 살면서 누굴 달래본 적이 없어서 이렇게 하는 게 맞나 모르겠지만, 시도라도 해보기로 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쩝. 뭔가 위로가 되면서도 멋있는 말을 한마디 해주고 싶었는데, 이런 것도 해봤어야 나오지. 결국 나는 머리 굴리기를 포기하고 말없이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녀석이 내 품에 와락 안겨왔다. 

 

우리 둘 다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껴안고 있다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리라. 브닐라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따뜻한 숨을 내쉬고 있다. 나는 녀석이 더욱 안정감을 느끼도록 등을 토닥여 주었다. 

 

어째 그날 아침이 떠오른다. 나의 주방이 박살났던 그날 아침. 그 때도 엉엉 우는 브닐라의 등을 쓸어주었지. 

 

그 순간에 내가 느꼈던 건 분노와 당혹감, 그리고 이 녀석을 반품하지 않았다는 후회였다. 하지만 지금 내 마음속을 가득 채우는 이 느낌은 뭐라고 해야할까. 동정심, 연민, 아니면 또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내 가슴 한복판이 쥐어짜는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왜 이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나 어디 안 가.”

 

브닐라의 고동소리가 전해져 온다. 녀석의 따스한 숨결이 계속해서 어깨를 데운다.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앞으로도 없을 거야. 여긴 네가 살던 곳이랑은 다른 세상이니까.” 

 

녀석의 머리를 최대한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다. 내 딴에는 부드러운 손길이라고 하고 있긴 한데, 이런 걸 내가 해 봤어야지, 진짜...

 

“난 네가 살던 그런 세상하곤 거의 인연이 없었어. 그래서 그런 곳에서 산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지 잘 알지는 못해. 그런데 한 가지는 단언할 수 있어. 이제 너에게 그런 일은 다시 생기지 않을 거야.”

 

후읍. 이제 마무리로 닭살 돋는 멘트 간다.

 

“왜냐하면...이젠 여기가 네 집이고, 너는 이제 내 가족이니까. 네가 나를 지켜주는 만큼...나도 너를 지켜줄게.”

 

내 생애에 이렇게 오글거리는 소리를 입 밖에 내 본적이 있던가. 내가 기억하는 한은 없다. 이거, 아마도 내 인생 최대의 부끄러운 순간 TOP 3안에 당당히 입성할만한 쪽팔림이다.

 

근데 왜 나한테서 눈물이 다 나지.

 

“주인님.”

 

브닐라가 조용한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러고 있고 싶슴다.”

 

안 될 거 없지. 나도 눈물을 말릴 시간은 필요하니까.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더 엉거주춤한 자세로 껴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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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표정의 브닐라에게 특별한 날에 먹으려고 아껴두었던 고급 아이스크림을 건네주었다. 식탁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조금씩 퍼먹으면서, 녀석의 잔뜩 내려왔던 눈썹도 서서히 제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암, 이래야 내가 알던 브닐라지. 

 

녀석은 아이스크림을 즐기게 두고, 나는 잠시 등록증 봉투를 찾아 내 방에 들어왔다. 한참을 뒤적거린 끝에 겨우 찾아낸 바이오로이드 등록증. 아직 테이프도 그대로 붙어있다.

 

어디보자...

 

 



봉투에는 바이오로이드 등록증과 더불어 영어로 적힌 서류 하나가 들어 있었다. 상단에는 블랙리버 사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다. 이런, 내가 영어는 좀 약한데. 

 

...잠깐. 아무리 내가 영어를 몰라도 이건 모를 수가 없다.

 

date of manufacture : 09-23-2060

제조일자: 2060년 9월 23일

 

그리고 지금이 2110년이니까 얘가 지금....

 

“어, 브닐라야? 네가 올해로 몇 살이지?”

 

쿠흡! 켈록! 켈록! 하고 녀석이 기침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잠시 후 브닐라가 힘찬 목소리로 대답하길,

 

“여...열일곱입니다!”

 

“.....”

 

문 바깥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녀석을 지그시 쳐다본다. 

 

“...라고 말하면 된다고 배웠지 말입니다.”

 

아니 뭐, 겉으로만 보면 딱 그 나이 쯤으로 보이긴 하는데 말이지...너 지금 쉰 살이 넘었어요. 이 정도로 오래된 바이오로이드는 솔직히 처음 본다. 애초에 이 때도 바이오로이드가 있었나? 아니 그 양반은 나한테 대체 얼마나 오래된 녀석을 팔아넘긴 거야.

 

“...아줌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세 글자를 나직히 읇조렸다. 내 앞에 계신 저 분, 과장 좀 보태서 나보다 두 배는 오래 사신 인생 선배시다.

 

“저 오늘부터 주인님 미워할 검다.” 

 

브닐라가 잔뜩 삐진 표정을 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냐, 아냐! 농담이야, 농담! 신경쓰지 마.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아줌마가 어디 있다고.”

 

손을 휘저어가며 애써 웃어보이니, 그제서야 다시 아이스크림에 집중하는 브닐라. 근데 이거, 이제부턴 내가 얘한테 존댓말을 써야하는 건가. 뭐가 참 애매해졌다.

 

그건 그렇고 이 문서, 나머지 부분을 읽으려면 번역기나 사전이라도 동원해야 할 것 같다. 영 귀찮게 되었네. 한숨을 푹 쉬며 컴퓨터 앞에 앉으려던 순간, 친구 H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H는 툭하면 바가지 긁는 게 일인 바닐라 A1 오너이자, 그런대로 잘 나가는 프리랜서다. 

 

“어, 요즘 잘 지내지? 오늘 쉰다고 하길래 한 번 연락해봤어. 좀 이따가 우리 메이드랑 같이 시내 쪽에 사격장 가기로 했거든. 겸사겸사 데이트도 좀 하고.”

 

얼씨구.

 

“근데 너도 최근에 메이드 하나 뽑았댔잖아. 마침 우리 바니도 친구 하나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잘 됐다 싶더라. 어때? 너도 네 메이드 데리고 와. 넷이서 같이 다니면 재밌을 거야.”

 

나도 마침 브닐라 기분전환을 시켜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거 꽤나 시의적절한 제안이 아닐 수 없다. 아까 총 때문에 사고 날 뻔한 기억이 있어서 사격장을 간다는 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뭐 별 일이야 있겠나.

 

“어, 뭐 나야 좋지. 우리 브닐라도 좋아할 거야. 몇 시까지 어디로 가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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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축해둔 텍스트는 이게 끝, 지금부터는 새로 써야 합니다. 아마 업로드 주기가 조오금 길어지지 않을까 싶네요.


쉰살짜리 군필 여고생 브닐라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매번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피드백과 감상은 언제나 환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