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링크

 

1화 :   (문학, 삽화) 우리집 브닐라 -1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2화 :   (문학/삽화) 우리집 브닐라 2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3화 :   (문학/삽화) 우리집 브닐라 3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4화 :   (문학/삽화) 우리집 브닐라 4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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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기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앍!"

 

...내가 미쳤지.

 

아무리 등이랑 어깨가 결렸어도 그렇지, 군용 바이오로이드에게 안마를 맡기다니.

 

"주인님, 아프시면 말씀해주십쇼."

 

내가 말을 할 정신이 있었으면 이러고 있겠냐 이 ㅆ

 

"에딷딷딷뜨기뜯뜨야아아아악!"

 

내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는지 이젠 나도 모르겠다. 

 

.....한 많은 인생, 이렇게 끝을 맺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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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전의 일로 많이 놀라서 그런지 온몸이 딱딱하게 굳은 것 같았다. 인상을 써가며 어깨를 주무르고 있으려니 슬쩍 말을 붙여오는 브닐라.

 

“어? 주인님 어깨가 많이 뭉치신 것 같지 말입니다. 제가 풀어드림까?”

 

그간 행적이 행적이라 솔직히 의심이 먼저 든다.

 

“어...무시하는 건 아닌데, 네가 할 수 있겠어?”

 

“에이, 이래 봬도 왕년에 훈련 끝나고 나면 전우님들 뭉친 근육은 제가 다 풀어드렸지 말임다! 어떨 때는 그 무뚝뚝한 연대장님도 몰래 찾아오시고 그러셨슴다.”

 

브닐라는 팔을 돌려대면서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씩 웃어 보였다. 뭔가 관록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흠, 미심쩍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얘기하니까 한번 믿어볼까. 마침 약속까지는 시간도 꽤 남았으니.

 

“알았어. 그럼 한 번만 부탁할게.”

 

나는 이 순간 자살을 선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차라리 그런 건 보통 빨리라도 끝나지. 이건 차라리 극형에 가까웠다. 

 

온몸을 손으로 장조림 찢듯 찢어발기는, 능지형 플래티넘 에디션. 상대방이 죽는 그 순간까지 고통받게 하면서도, 그 와중에 또 절대 빨리는 보내주지 않으려는 그 무서운 집념이 담긴 형벌. 바로 그것이 내가 잠시 후 겪게 될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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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매트를 깔고, 그 위를 탁탁 두드리는 브닐라. 시키는 대로 매트에 엎드리자 녀석이 내 허리에 살포시 올라탔다. 여자애가 내 몸 위에 걸터앉은 건 살면서 처음이라, 어쩐지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녀석의 탄탄한 엉덩이가 내 살갗을 통해서 느껴진다. 이건...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아니, 오히려 좋다. 부드러운 살결과 적당한 무게, 그리고 따뜻한 피부의 온기가 전해져 오면서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야릇한 기분이 들어 절로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좋은 건 딱 여기까지.

 

“전우들한테 해줬던 그대로 해드리겠슴다! 조금 아프실지도 모르지 말임다.”

 

뭐 여자애 고사리손이 아파봐야 얼마나 아프겠어-하는 안일한 생각에, 나는 싱글벙글하며 ‘응’하고 대답해버렸다. 하지만 기억하는가. 내 위에 앉아있는 이 가녀린 소녀는 결코 평범한 여자애가 아니라는 것을. 

 

첫째, 이 녀석은 무지막지한 근력을 자랑하는 군용 바이오로이드다. 

둘째, 같은 군용들을 풀어주었던 방식 그대로 나를 안마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셋째, 이 친구들은 평범한 성인 남자쯤은 쉽게 구겨버릴 수 있는 존재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곧바로 이어진 격통은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내 신경을 사정없이 쑤셔대기 시작했다. ‘허억’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야야야야야, 잠깐, 너무 아파! 조금만 살살해!”

 

...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사람이 지나치게 아프면 말이 나오질 않는 법이다. 지금 내가 딱 그랬고. 실제로 내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이랬다.

 

“흐끼이이이엑....”

 

인간의 신체를 아득히 상회하는 스펙을 지닌, 군용 바이오로이드들의 강력한 근육을 이완시켰던 손놀림이 나의 전신을 유린하고 있다. 내 살을 한 덩이 한 덩이씩 찢고 있다고밖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집요한 손길이었다. 뿐인가, 브닐라는 내 사지를 잡아 뜯을 기세로 꺾고 당기기까지 하고 있었다.

 

이 자식 분명히 아까 아줌마라고 불렀다고 이러는 걸 거야, 그거 말곤 설명이 안 돼, 하며 나름의 이유를 분석해 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신줄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잡생각으로라도 의식을 보존하려는 시도마저 이 고통 앞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녀석이 어서 이 짓거리를 끝내주길 바라는 것뿐. 그렇게 나는 인간의 문자로 옮길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괴로움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녀석이 잡아당긴 내 목에서 “빠가닥” 하는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눈앞이 흐려진다. 아아,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부모님, 이 아들이 지금 만나러 갑니다.

 

.

.

.

.

.

 

“...주인님! 주인님!”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여긴 어디지. 저승인가.

 

“이히히, 주무시는데 깨워서 죄송함다. 슬슬 친구 분하고 만나실 시간이라.”

 

해맑게 웃으며 내 옆에 앉아 있는 브닐라가 눈에 들어온다. 보아하니 내가 아직 죽지는 않은 모양인데, 목 아래로는 힘이 안 들어간다. 뭐지, 혹시 식물인간이라도 된 건가.

 

“잠까지 주무신 거 보니 엄청 좋으셨던 모양입니다. 열심히 한 보람이 있었지 말임다!”

 

잔말 말고 구급차나 불러-라고 말하려던 찰나, 녀석이 “영차”하고 내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일어나고 보니, 확실히 몸이 개운하다. 이곳저곳을 슬쩍 움직여보니, 결렸던 어깨며 등이고 허리고 다리고 죄다 가벼워져 있었다. 진짜 효과가 있었던 건가.

 

“오...개운해.”

 

“헤헹, 주인님이 좋으셨다면 저도 기쁩니당!”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생글생글 미소짓는 브닐라. 나 또한 미소로 답례하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짜식, 가끔은 제대로 하는구나. 

 

부드럽게 풀린 목을 돌려가며 시계를 쳐다보았더니, 정말로 약속했던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늦지 않으려면 빨리 움직여야 쓰겠구만.

 

바쁘게 옷을 챙겨입고 머리를 매만지던 중, 브닐라의 내력서가 눈에 들어왔다. H는 외국물도 꽤 먹은데다, 바이오로이드 관련한 지식도 많으니 저 서류를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혹시 모르니 저것도 챙겨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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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약속장소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버스를 잡아타고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H 녀석이 말해준 곳으로 가 보니, 근처 카페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H와 녀석의 바닐라가 보인다. 음료를 호로록대던 그 녀석이 우릴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오! 야, 간만에 본다!”

 

녀석의 바닐라도 흘깃, 머리를 돌려 우리를 보고는 일어나서 공손히 인사했다. 생긴 건 참 귀엽게 생겼는데, 그 귀염상과 대비되는 저 차갑고 매정한 인상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잘 지냈지? 이게 얼마만이냐. 그런데 어째 넌 하나도 안 늙은 것 같다?”

 

살갑게 너스레를 떠는 H.

 

“나야 뭐.....똑같지, 여러모로. 너는 그새 좀 삭은 것 같다.”

 

“하하, 뭐...최근에 괜한 내기를 했다가 돈을 왕창 잃었거든. 하필 알래스카에서 블랙리버가 질 줄 누가 알았겠냐.”

 

“삼안 땅에 사는 놈이 블랙리버에 판돈 걸어도 되냐? 그보다 얼마나 깨졌길래?”

 

“...5천.”

 

“5천원? 뭐야, 고작 그정도로-”

 

“달러.”

 

이런 개슈키.

 

“우리 바니한테는 비밀로 좀 해주라. 저번에 축구 내기 걸렸을 땐 진짜, 으으...”

 

손사래를 치며 괴로운 표정을 짓는 H.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메이드 구하면서 바닐라 A1은 거르고 시작한 게 바로 저것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랑 제일 친한 놈이 저렇게 시달리는 꼴을 봐 왔으니. 게다가 놈의 바닐라, ‘바니’는 동형 모델 중에서도 특히 말에 가시가 돋쳐있는 듯한 녀석이었다.

 

“주인님의 친구분, 안녕하십니까.”

 

바니가 내게 다가와 고개를 숙인다.

 

“옆에 계신 분은...”

 

내 옆에서 고개를 쉴새 없이 돌려가며 시내를 구경하기에 바쁜 브닐라. 그런 브닐라를 아래위로 찬찬히 뜯어보던 바니는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주인님의 병적인 성도착증이 순수하셨던 친구분에게까지 옮아버렸군요. 믿었던 친구분까지 노리개를 들이셨을 줄이야.”

 

“아니 바니야, 내가 무슨-”

 

“그럼 어젯밤에 제게 하셨던 일을 친구분께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아이고 죄송합니다.”

 

바니의 지나친 단어 선택에 항의하려던 H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그보다 어젠 무슨 일이....아니, 그건 내가 신경 쓸 게 아니지. 으, 저 둘이 티격태격대는 걸 보기만 해도 숨이 다 막힌다. 하지만 나도 할 말은 해야겠지.

 

“야, 노리개라니. 난 그냥 집안일 도와줄 사람이 하나 필요했을 뿐이야.”

 

“다들 처음엔 그렇게 말씀하시죠.”

 

“난 진짜 그런 데는 관심 없-”

 

“혹시 성기능장애가 있으십니까? 아니면 남색이 취향이신 건가요?”

 

“...말을 말자.”

 

자기 주인한테도 말뽄새가 저 모양인데, 나한테는 오죽하겠나. 이럴 땐 기분 상하는 놈이 바보겠지. 바니는 고개를 젓는 나를 뒤로 하고, 황홀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브닐라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오, 안녕하심까!”

 

바니를 보고 반가워하는 브닐라. 반면에 바니는 브닐라가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당신은 삼안의 자매가 아닌 것 같은데, 삼안의 메이드복을 입고 있군요. 그것도 제 것을...”

 

인상을 잔뜩 구기는 바니.

 

“...덜떨어진 모조품 같으니.”

 

“잘 못들었슴다?”

 

“아닙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삼안산업의 배틀 메이드 바닐라 A1, 주인님께서는 ‘바니’라고 부르십니다.”

 

“에헤헤, 저도 바닐라 선배님 말씀은 많이 들었지 말입니다. 잘 부탁드림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는 두 메이드. 하나는 태도 면에서, 하나는 능력 면에서 나사들이 빠져있는 게 아무래도 메이드 조무사들이라 해야 맞지 않을까. 

 

그나저나 쉽사리 눈물을 터뜨리기 일쑤인 브닐라가 걱정이다. 바니가 워낙 말투가 독해야지. 둘을 지켜보면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지만,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H를 무시할 수도 없어서 이내 녀석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별일은 없겠지.

 

“우리 주인님께서 결국 또 다른 인간님 한 분을 타락시키고 말았군요.”

 

“에이, 우리 주인님은 착하신 분임다. 선배님 주인님은 어떠심까?”

 

“말도 마세요. 우리 주인님께선 정말이지 엉망이십니다. 게으르고, 바보 같고, 유능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지요. 그나마 얼굴이라도 잘 생기셨으면 또 모르겠지만.....뭐, 그러셨다면 굳이 인간 여성분이 아니라 절 데려오시진 않으셨겠죠.” 

 

“그러심까?”

 

“그뿐인가요. 우리 주인님께서는 저 나이에도 아직 철이 덜 드셔서, 가리는 음식도 많으신 데다 어울리지 않게 입맛까지 까다로우셔서 걱정입니다.”

 

“헤헤, 우리 주인님은 진짜 어른다우신 분임다. 요리도 직접 하시고, 그것도 엄청 잘하심다! 히히, 저보고는 가리는 거 없이 잘 먹어서 기특하다고도 해주셨지 말임다!”

 

“...그런가요. 에휴, 우리 주인님께선 당신 주인님과는 다르게 집안일 감각이라곤 전혀 없으십니다. 빨래 바구니에 양말이며 속옷을 전부 뒤집어 넣어놓는 못된 버릇까지 있으시죠.”

 

“그러심까? 우리 집에선 주인님이 빨래를 직접 하셔서 저는 잘 모르겠슴다. 딱 한 번은 제가 했었는데, 그 뒤로 주인님께서 저는 그냥 노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하셨지 말임다.”

 

“.....당신, 이제 보니 모조품이 아니라 불량품이었군요.”

 

“잘 못들었슴다?”

 

“자, 얘들아! 슬슬 출발할까?”

 

H가 두 메이드를 불렀다. 근처에 있는 실내 사격장으로 가자는 이야기다. 아침의 소동 때문에 약간 불안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솔직히 나도 브닐라가 총 쏘는 모습을 구경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긴 하다. 

 

둘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브닐라가 살랑살랑 H에게로 다가왔다. 

 

“주인님 친구분 되십니까? 인사가 늦었지 말입니다!” 

 

“어, 안녕? 네가 그-”

 

언제 챙겨왔는지 냅다 H의 이마에 자석을 들이박는 브닐라.

 

“아야! 왜 그래?”

 

“...어? 왜 친구분한테는 안 붙슴까?”

 

녀석이 의아한 얼굴로 갸웃거리고 있다. 이어서 황망한 얼굴로 눈에 물음표를 띄우고 있는 H를 제쳐두고, 녀석이 자석을 들고 바니에게로 다가갔다. 자기 주인에게 무례한 짓을 해서 화가 난 것인지 바니의 표정이 영 좋지 않다.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죠? 물러서세요, 이 불량품.”

 

탁, 하고 바니의 이마에 자석이 붙는다. 그녀의 표정이 한층 더 구겨들었다.

 

“...주인님, 발포를 허가해주십시오. 불량품을 폐기해야 합니다.”

 

금방이라도 총이 들어있는 가방을 열어젖힐 기세다. 

 

“바니야, 좀... 괜찮으니까 진정해.”

 

“하하, 미안. 애가 엉뚱한 구석이 있어서.”

 

나도 정말 당황스럽다. 얘 진짜 왜 이러냐.

 

“아니, 우리 주인님한텐 붙었단 말임다! 뭔가 이상하지 않슴까?”

 

“얌마, 그만해 좀.”

 

계속해서 재잘대는 브닐라와 함께 H의 뒤를 따랐다. 그 와중에 바니는 H의 이마를 문질러주며 연신 “괜찮으십니까? 멍이 들진 않으셨나요?” 하며 자기 주인 걱정에 여념이 없다. 표정을 보니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것 같은데, 평소엔 또 정말 H를 싫어하는 것처럼 굴고. 쟤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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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탁한 총성이 울려대는 이곳은 실내 사격장. 일반인들도 가끔 찾는 곳이지만, 주된 용도는 경호용 바이오로이드들의 사격 훈련이라고 한다. 과연, 강화유리 너머로 다양한 모델의 바이오로이드들이 보인다. 

 

“네, 결제되셨습니다. 3사로랑 4사로 쓰시면 되구요, 표적지 사용법은 벽에 붙어있으니까 참고하시면 됩니다.”

 

이용권을 받아들고 입구 앞에 마련된 옷장에서 귀마개를 낀 후 방탄조끼를 들어 올렸다. 뭐가 들었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딱딱하고 무겁다. 어떻게 걸치는지를 몰라 아크로바틱한 쌩쑈를 하고 있으려니, 브닐라가 다가와 조끼에 갇힌 양팔과 머리를 해방시켜 주었다. 브닐라의 도움을 받아 복부 쪽 찍찍이까지 단단히 고정시키고 나서야 사로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귀마개 너머로도 ‘투쾅, 투쾅’ 하는 소리가 꽤나 크게 울린다. 옆 칸들을 보니, 한쪽에선 안경을 낀 포니테일 메이드가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총을 쏘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선 은색인지 연보라색인지 모를 긴 생머리의 바이오로이드가 쌍권총을 다루고 있다. 

 

한 발 한 발 쏠 때마다 온갖 괴상망측한 폼을 잡는 게 우스워 보였지만, 그러면서도 표적지를 빗나가는 게 없다는 점이 또 대단하다. 그 와중에 다들 생긴 게 몸값이 꽤 비싸 보인다. 조금 부럽네.

 

브닐라는 어느새 사로 앞에 마련된 테이블에 총을 올려두고서 탄창에 총알을 집어넣고 있었다. 한두 번 해본 게 아닌지 손놀림이 굉장히 날쌔다. 탄창 하나를 채우자 그걸 손바닥 위에 탁탁 두드리곤 금세 다음 탄창을 채워나간다. 

 

그렇게 탄창 여러 개를 채워 놓고 그중 하나를 총에 끼워 넣은 브닐라. 총을 몇 번 들었다 놨다 하더니 이내 자세를 잡고 내 쪽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벽면에 붙은 사용방법을 더듬더듬 읽어보고, 여러 개의 버튼 중 하나를 눌러보았다. “삐빅”, 하는 소리와 함께 사로 여기저기서 과녁이 튀어 오른다. 

 

 

 


“총알 나가신다!”

 

브닐라는 빠른 속도로 과녁들을 쓰러뜨려 나갔다. 타당, 타다당, 하며 표적지에 두어 발씩을 꽂아 넣는 브닐라는 놀라울 정도로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자세히 보니 총알구멍이 하나 같이 머리 아니면 가슴팍에 나 있다. 

 

적지 않은 수의 표적지가 있었음에도, 녀석이 그것들을 전부 처리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타탕, 하고 몸을 돌려 또 타탕. 아닌 게 아니라 무슨 영화 같다. 브닐라가 다음 표적지를 준비해달라고 부를 때까지도, 나는 멍하니 ‘어우야...’ 하며 감탄만 하고 있었다. 

 

 



 

어느새 준비된 과녁이 모두 쓰러졌다. 쓰러진 과녁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던 브닐라는 잠시 후 총을 옆으로 살짝 비틀더니, 이곳저곳을 당기고 빼고 하고 있다. 뭔가 점검이라도 하는 모양새다. 녀석의 총구에서는 연기가 폴폴 피어나오고 있었다. 이야, 좋은 구경했다.

 

“아으음, 간만에 몸 잘 풀었지 말입니다!”

 

총을 내려놓고 팔을 뻗으며 기지개를 켜는 브닐라. 

 

“우와, 솔직히 놀랐어. 이렇게까지 잘 쏠 줄은 몰랐는데. 짜식, 다시 봤어.”

 

“이히히, 저도 그동안 구르면서 먹은 짬이 있지 말임다.”

 

하기사, 그 정도 경력이면 저 정도 실력이 나와도 이상할 건 없겠지. 그나저나, 브닐라가 하는 걸 보다보니 저것도 꽤 재밌어 보인다. 그러고 보니 난 살면서 총을 만져본 적이 아예 없었지. 내 앞 세대랑은 다르게 난 군대랑은 인연이 없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서 있자니, 녀석의 총에 고정된 내 시선을 의식한 브닐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주인님도 한번 쏴보시고 싶슴까?”

 

당근 빳따지.

 

“오, 난 저런 거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그래도 돼?”

 

“안될 거 없지 말임다! 제가 차근차근 가르쳐드리겠슴다.”

 

크, 절로 기대가 된다. 남자는 나이 먹어도 애새끼라더니, 지금 들떠있는 내 마음이 딱 그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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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닐라가 가르쳐 준 대로 총을 어깨에 대고 단단히 그러쥐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모르겠다. 내가 느끼기에도 내 자세가 조금 엉성한 게 영 모양이 안 산다. 역시 그런 것도 다 경험이 있어야 태가 사는 법인가보다.

 

“잘 하고 계심다! 주인님 멋지시지 말임다!”

 

등 뒤에서 브닐라의 힘찬 격려가 들려온다. 에라이, 까짓거 한 번 해보지. 뭐 별 거 있겠어.

 

 



오산이었다.

 

방아쇠를 당긴 순간 AK 소총은 내 손을 떠나 하늘을 날고 있었고, 내 몸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호기롭게 처음부터 조정간을 자동에 놓고 당긴 내 잘못이겠지. 

 

“흐-흐에에? 주인님?!?!”

 

사색이 되어 나를 내려다보는 브닐라가 보인다.

 

“쿠휅!”

 

그 순간, 저 높이 떠올랐던 소총이 내 배 위로 떨어졌다. 이거 꽤 무겁더니만 엄청 아프네.

 

“ㄱ-괘-괜찮으심까?”

 

“...일단 살아는 있어.”

 

보기좋게 자빠져서 그런지 뒤통수랑 등이 얼얼하다. 총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아랫배도 상당히 아프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아프긴 되게 아프구만.

 

“제...제가....주인님을....”

 

잔뜩 놀란 표정으로 얼어붙어 어버버거리는 브닐라. 갑자기 벌어진 일에 상당히 놀란 것인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기세다.

 



 

“당신 지금 제정신인가요?”

 

어느새 이쪽으로 다가온 바니가 노기 어린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어찌나 급하게 왔는지 연기가 폴폴 나는 총까지 그대로 메고 있다.

 

“바이오로이드용 특수탄을 훈련도 안 된 인간님께 쏘게 하다니, 첫눈에 바보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머리에 사고 회로 대신 전구라도 박혀있는 겁니까?”

 

표독스런 표정을 하고 브닐라를 몰아붙이는 바니. 브닐라는 울상이 되어서 앞치마를 그러쥐고 고개를 숙였다.

 

“이제껏 수많은 배틀메이드 모조품을 보아 왔지만, 당신 같은 불량품은 처음 봅니다. 아니, 불량품이란 말은 원래 설계라도 멀쩡한 물건들에나 붙이는 말이죠. 당신은 근본부터 글러 먹은 게 분명합니다. 어떻게 당신 같은 바이오로이드가 존재할 수 있는 거죠?”

 

허리에 손을 얹고 속사포처럼 갈굼을 쏟아내는 바니 앞에서, 브닐라는 그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대며 연신 사과하며 움츠러들 뿐이었다.

 

“흐윽....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

 

”흥. 가사도 못 해, 말도 제대로 못 해, 이젠 하다못해 제 주인님 목숨을 지키긴커녕 도리어 명을 재촉하고 있군요. 안 그래도 짧은 인간님들 수명을 대체 얼마나 단축시켜야 만족하실 참이죠? 당신이 노인이나 아이가 딸린 집에 팔리지 않은 게 천만다행입니다. 그랬다면 분명 줄초상이 났을 테니까요.“

 

”끄흐윽...“

 

”당신한테 무슨 쓸모가 있죠? 생각이란 게 있다면 한번 말해보세요. 당신 같은 걸 구매하신 당신 주인님께 부끄럽지도 않냐고요.“

 

”으흐흑...저는...“

 

”그냥 제가 대신 말씀드리죠. 당신은 쓰레기예요. 자, 따라해보세요. ‘저는 쓰레기입니다’.“

 

”저는...흑...“

 

”안 들려요. 웅얼대지 마세요.“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지나친 것 같다. 굳이 따지자면 멋모르고 나선 내 잘못도 클텐데 말이지. 바니는 숨을 잔뜩 들이쉬고 또 다시 사자후를 내뱉을 준비를 하고 있다. 녀석이 더 심한 소리를 내뱉기 전에 끼어드는 게 좋겠다.

 

”쓰레기면 쓰레기답게 원래 있었어야 할 폐기장으로 돌아가시죠. 이대로는-“

 

”야, 그쯤 해 둬. 경험도 없이 객기 부린 내 잘못이 더 커. 혼내는 건 좋지만 아까부터 말이 너무 심하잖아.“

 

그제서야 나를 흘깃 내려다보는 바니. 픽, 한숨을 뱉더니 고개를 젓는다.

 

”그 메이드에 그 주인이로군요. 아까 일로 불구가 되진 않으셨길 바랍니다.“

 

바니가 손을 내밀어 나를 일으켜주었다. 한번에 쑥 일으키는 게 보기보다 힘이 장사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정성스레 내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는 바니의 뒤에선 여전히 움츠리고 선 채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브닐라가 보인다. 

 

”괜찮아, 멀쩡해. 그나저나 H는?“

 

”조금 전에 화장실에 가셨습니다. 어디 문제가 있으신건지, 핸드폰 보는데 빠져서 그러시는지, 항상 오래걸리시더군요.“

 

그런 것까지 물어본 건 아닌데.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브닐라를 보자, 아무래도 바니에게 한마디 해 둬야 하겠다 싶었다. 이럴 땐 가족이 챙겨주는 거라고 안했냐. 이럴 때 가족 행세 한 번 해야지.

 

”...바니. 나도 쟤가 많이 어리숙하고 경솔한 건 아는데, 나쁜 애는 절대 아니야. 나름대로 신세 진 것도 있고. 본인도 많이 노력하고 있으니까 너무 몰아붙이진 말아줘. 애가 좀....마음이 약하거든.“

 

내 나름대로 브닐라를 변호해 보았다. 그러자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바니.

 

”아량이 넓으신 건지 미련하신 건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잘 어울리는 조합입니다.“

 

”무슨 뜻이야 그게.“

 

”우리 주인님께서도 성격이 좋다 못해 미련하시죠. 그러니까 제 말투도 참고 같이 지내주시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친구분과 저 불량품 씨도....“

 

”오, 여기 다 모여 있었네. 연습은 끝났어?“

 

바지 지퍼를 올리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H. 혼자서 싱글벙글한게 굉장히 튄다.

 

”...내가 놓친 거 있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인님. 언제나처럼 남대문은 뒤늦게 닫으시는군요.“

 

”하하, 자꾸 깜빡하더라고. 아, 이건 내가 치울게. 얘기 마저하고 있어.“

 

바니의 가방을 대신 정리해주는 H. 다급히 H 쪽으로 가려던 바니는 어느새 몸을 돌려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선 어딘가에서 조그만 수첩을 꺼내 나에게 건네었다.

 

”이건 뭐야?“

 

”불량품 씨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가사 매뉴얼입니다. 제가 그동안 알아낸 노하우를 적어 두었습니다.“ 

 

”어. 응, 고마워.“

 

갑자기 이런 걸 받으니 조금 당황스럽지만, 일단 기왕 주는 물건이니 잘 받아두기로 했다.

 

”훌륭한 메이드가 되는 길에는 많은 시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괴로움을 이겨내는 것이야말로 메이드의 자격을 증명해주는 요소라고 할 수 있죠.“

 

그게 그렇게까지 거창한 일이었나.

 

”하지만 그 온갖 역경을 이겨내는 데는...주인님의 따뜻한 격려가 필수입니다. 우리 주인님께서 제게 해주셨던 것처럼요...“

 

눈을 내리깔며 얼굴을 붉히는 바니. 얘가 원래 이런 애였나?

 

”아무튼, 친구분께서는 그것만 명심하시면 됩니다. 이해하셨나요?“

 

”...응, 알아들었어.“

 

내 대답을 들은 바니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곤 H에게 달려갔다. 가방 여러개를 낑낑거리며 옮기려는 녀석을 구박하며 가방을 받아드는 녀석.

 

”그 물렁한 팔로 잘도 이 무거운 걸 다 드시겠습니다. 이리 주세요. 그러다 다치십니다.“

 

녀석의 파란 눈동자에는 그 날카로운 말투와 대비되는 따뜻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제야 H가 바니에게 껌뻑 죽어 지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근데 저 말뽄새는 진짜 어떻게 안 되는 건가.

 

”주인님....죄송합니다....제가 또...“

 

내 옆으로 다가와 울먹이며 사과하는 브닐라. 나는 녀석을 살짝 안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난 괜찮다니까 그러네. 쟤도 말이 저래서 그렇지, 네가 진짜로 싫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 너무 신경쓰지 말고.“

 

옳지 옳지, 착하다, 하며 어린 아이 달래듯 브닐라를 달래준다. 몇 번을 해도 난 이런 거랑은 잘 안 어울리는 느낌이다. 그래도 자꾸 하다 보면 좀 늘지 않을까.

 

”아, 맞다. 여기서 바로 헤어지기도 섭섭하니까, 저기 새로 생긴 백화점 구경이라도 갈래? 차는 여기 대놨으니까 내 차로 움직이면 되는데.“

 

내 등 뒤에서 또 다시 솔깃한 제안을 해 오는 H.

 

”너랑 메이드씨 밥도 내가 살 게. 어때?“

 

”나는 콜. 근데 우리 메이드는....“

 

내 품에 고개를 묻고 있는 브닐라를 내려다본다. 결국 중요한 건 이녀석 의향이니까. 그러자 녀석, 아직도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애써 미소지으며 대답해온다.

 

”저는...주인님이랑 함께라면.....당연히 좋슴다.“

 

.....


"아무렴. 나도 마찬가지야."


녀석의 머리를 다시 가볍게 헝클어주었다. 

 

...그리고 넌 웃는 얼굴이 더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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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가장 많은 그림을 집어넣은 회차 같습니다.


그리면서 나름 재밌었네요.


매번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피드백과 감상은 언제나 환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