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링크

 

1화 :  (문학, 삽화) 우리집 브닐라 -1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2화 :   (문학/삽화) 우리집 브닐라 2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3화 :   (문학/삽화) 우리집 브닐라 3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4화 :   (문학/삽화) 우리집 브닐라 4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5화 :   (문학/삽화) 우리집 브닐라 5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6화 :    (문학/삽화) 우리집 브닐라 6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

 

 

 

우리집 브닐라에게 ‘이비’라는 이름을 지어준 다음 날 아침, 하품을 해대며 방을 나섰더니 녀석이 탁자 위에 앉아 한창 뭔가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슬쩍 쳐다보니 이비는 내가 줬던 낡은 노트북을 켜 놓고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다. 그 옆에는 바니가 줬던 가사 매뉴얼과 노하우, 일명 ‘메이드 핸드북’이 놓여 있었다. 제대로 집중하고 있는 게 아마 가사일 공부라도 하는 모양새다. 녀석이 보고 있던 영상의 소리가 들려온다.

 

“...욕실 청소가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거든요.”

 

인터넷에서 집안일 꿀팁이라도 찾아보는 모양이지. 녀석, 어울리지 않게 노력하는 모습이 가상하다. 

 

....많은 건 안 바라니까 이제부턴 세탁기에 스웨터 돌리거나, 청소랍시고 바닥에 치약 뿌리는 짓만 안 했으면 좋겠구먼.

 

문득 시계를 쳐다보니 어느새 사무실로 나가 볼 시간이다. 

 

“저기...이비? 출근할 시간인데, 같이 갈래?”

 

부장놈이 얘를 못 보게 하는 게 어렵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이 녀석을 집에 혼자 두고 가긴 아직 좀 불안하단 말이야.

 

“아, 괜찮슴다. 걱정 안 하셔도 됨다. 저 오늘은 얌전히 공부만 하고 있을 검다.”

 

히힛, 하고 웃어 보이는 녀석. 그 밝은 함박웃음에 분명 안심이 되어야 할 테지만, 어째 걱정 밖에 들지를 않는다. 

 

“근데 말임다, 주인님. 그보다.....제 이름 한 번만 더 불러주시면 안 됨까?”

 

“어....이비?”

 

“에헤헹. 한 번만 더 부탁드림다.”

 

“이비.”

 

“에헤헤헹....”

 

그게 뭐가 그리 좋다고 헤실헤실하는지 모르겠다.

 

“그 이름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

 

“당근이지 말입니다. 진짜 인간님들 이름 같아서 너무 예쁨다!”

 

양손을 볼에 대고 황홀한 얼굴을 하는 녀석. 아주 좋아 죽는다 죽어. 이런, 시간이 아슬아슬해졌다. 얼른 나가야겠네.

 

“어어, 그래, 나는 이제 가 볼 테니까....그....사고치지 말고! 이따 보자!”

 

“네, 주인님!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

 

.

.

.

 

“좋은 소식이랑 나쁜 소식이 하나씩 있는데, A씨는 뭐부터 듣고 싶어요?”

 

오늘은 출근하자마자 인사 담당자랑 마주쳤다.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자기 방으로 날 끌고 가더니, 대뜸 한다는 말이 저 소리다.

 

“...일단 좋은 소식이요?”

 

“좋은 소식은, 저번에 올려주셨던 제안서에 대한 반응이 아주 좋아서, 그 덕분에 A씨가 이번 진급 대상에 포함되셨다는 거예요. 급여도 오를 거고, 현재 주어진 C-급 거주 시설에서 B+급 거주 시설로 옮기시게 될 수도 있고요. 축하드립니다.”

 

오 예스. 그동안 몇 번이나 퇴짜를 먹이더니 이제야 통과가 된 모양이다. 

 

“그럼 이제 나쁜 소식. A씨는 다른 곳으로 전출되실 거예요.”

 

...이건 또 무슨 소리래.

 

“그게 무슨-”

 

“현재 근무하고 계신 삼안 산업 중앙 네트워크 센터가 아니라, 자회사 중 하나인 ‘애덤 커뮤니케이션즈’의 제 1 통합 중계시설 쪽으로 배정되실 예정입니다.”

 

그곳이라면.....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삼안 특별 자치구역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다. 아니, 까놓고 말해서 거의 깡촌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그곳은 거창하게도 창립자 중 하나인 애덤 존스의 이름을 딴 것 치고는 상당히 보잘것없는 중소규모 통신사. 삼안 본사와의 관계도 희미하고, 더 이상의 승진 가능성은 더더욱 희박한 곳.

 

이건 진급이 아니라, 진급의 탈을 쓴 좌천이었다.

 

“...그럼 제가 제안했던 IT 관리팀 확장은...제가 그곳을 맡았으면 했었는데요.”

 

그 문제의 제안서. IT 관리 인원을 확충하고 보다 체계적인 점검 및 유지 시스템을 만들자는 얘기였다. 그간의 내 노하우를 모조리 집약해서 내 선에서는 도저히 흠잡을 데 없는 계획을 만들었었지. 그 모든 건 사실상 내가 없으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위쪽에서도 A씨의 제안서는 그대로 수용하기로 했어요. IT 관리팀도 A씨 계획서대로 지금보다 대규모로 확장할 계획이고요. 단지 책임자가 A씨가 아니게 될 뿐이죠.”

 

“하지만 이쪽 시스템은 거의 제가 혼자 다 구축했는데....그럼 대신 책임자가 된다는 사람은 누군가요?”

 

“C부장님이요.”

 

.....하필이면 그 자식이다. 그 여색에 환장한 뚱땡이. 서버는 커녕 자기 컴퓨터 바탕화면 정리조차 제대로 못 하는 놈이, 이젠 새로 개편되는 IT 관리팀 책임자가 된단다. 그것도 내가 고안한 체계로 개편될 관리팀에. 

 

“너무 안 좋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어쨌든 진급은 진급이고, 지금보다 근무여건도 훨씬 나아질 테니까요.”

 

“왜 이렇게 된 거죠?”

 

인사 담당자가 무슨 그런 질문이 다 있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건 아니죠?”

 

“몰라서 묻는 겁니다.”

 

그녀가 지금 농담하냐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본다.

 

“...A씨는 신분이.....불분명하잖아요. 조금....부정적인 소문도 있고요. 반면에 C부장님은 삼안의 전직 이사님 중 한 분과 혈연이시죠. 이렇게 되면 상부 입장에서는 선택하기가...”

 

울화가 치밀어오른 나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 인간은 무능합니다.”

 

“그래도 반기업 활동가의 후손이라는 의혹은 없죠.”

 

그녀도 지지 않고 대꾸하며 나를 노려본다.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대화는 끝났다는 듯한 태도로 물어오는 인사담당자. 일이 그렇게 정해졌다면, 내가 뭘 해도 결과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쓴물을 삼키며 애써 태연히 대답했다.

 

“...없습니다.”

 

“네, 그럼 이만 나가보셔도 됩니다. 이번 주 안에 소식이 올 테니까 이삿짐은 미리 정리해두시면 편할 거예요.”

 

볼일이 다 끝난 나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니, 정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이윤이면 다 되고 실적이면 충분하다는 기업 사회에서도, 신분과 혈연은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나에게는 그 두 가지 모두 없고.

 

“진급한다며? 기분 째지겠네.”

 

전산실 쪽으로 들어서자 부장이 나에게 친한 척 말을 붙여온다. 만면에 느글느글한 미소가 걸려있는 게, 내 상황이 어떤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느낌을 풍긴다. 

 

“부장님도 IT 관리팀 맡으신다죠? 제거 가져가셔서 존나 기분 째지시겠습니다.”

 

“에이 씨발놈이. 좋은 날에 말이 왜 그래, 임마.”

 

같잖게 친한 척, 인자한 척이나 해대는 걸 보니 정말로 즐거운 모양이다.

 

“아, 그 중고 백마는? 오늘은 안 갖고 왔네?”

 

아쉬운 눈길로 브닐라, 아니 이비를 찾는 부장.

 

“그때도 부장님 좋으라고 데려온 거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걔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마세요.”

 

“새끼, 꼴에 네 계집 얘기라고 가오잡냐? 아, 쑤셔는 봤어? 맛은 어떻든? 중고답게 허벌-”

 

그놈 면전에서 쾅, 하고 문을 세게 닫아주었다. 그럼에도 부장은 기어이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고서야 저 멀리로 사라졌다.

 

“그거 군대에서 구를 때 아래 위로 온갖 놈들이 신나게 썼을걸? 나중에 쪼이는 게 영 부실하다고 실망하지 마라!”

 

 

-------------------

 

 

참 좆같은 날이네, 오늘은.

 

씨발 좆같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이상 좆같을 수 없다. 길 가는 사람 하나하나 다 패 죽이고, 길가에 보이는 물건 하나하나 다 때려 부수고 싶었다. 집에 오는 길, 오늘따라 유난히 붐비던 전철도 좆같이 짜증 났다. 

 

떠밀리듯 객차에서 내려 역을 나서던 길, 계단 모서리에 신발 끝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씨발 좆같다.

 

“세상이 곧 망할게야! 하늘에서 불벼락이 쏟아지고! 바다가 끓고! 가진 놈들부터 땅바닥에 묻힐 것이야!”

 

참전 용사 모자를 쓴 미친 노인 하나가 ‘언약의 성경’인지 뭔지를 들고 역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다. 듣기가 심히 좆같다.

 

“삼안산업이 이듬해부터 ‘애사 기금’ 분담률을 기존의 10%에서 20%로 상향 조정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직원들의 재정부담이 가중될 전망입니다. 사실상의 감봉조치라고 평가되는 이러한 정책은-”

 

길거리에서 짜증 나는 뉴스가 들려온다. 듣기 좆같다. 씨발 내년은 또 어떡하지.

 

집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오늘따라 유난히 자주 선다. 막상 타는 놈은 아무도 없다. 좆같다.

 

급하게 도어락 키패드를 눌러대다가 두 번이나 틀렸다. 집에 있던 이비가 열어줘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존나 씨발 좆같이 짜증 난다.

 


 


 

“헤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주인님!”

 

녀석의 생글생글한 미소가 나를 반긴다. 그런데 왜인지 오늘따라 그 미소가 왠지.....좆같다.

 

“청소는 다 끝내놨슴다! 아, 저 이제 욕탕 준비하는 방법도 알지 말입니다! 마침 피곤해 보이심다! 지금 목욕물 받아드릴 테니까-”

 

“닥쳐.”

 

녀석이 눈에 띄게 당황한다.

 

“주인님?”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닥치라고.”

 

“....무슨 일 있으셨-”

 

“씨바 닥치라고 안했냐!”

 

가방을 내던지고 이비에게 목청껏 윽박을 질렀다.

 

“아까부터 기분 좆같은데 존나게 재잘대네, 씨발것이 진짜! 시끄러워, 시끄러워! 존나 정신 사납다고! 오늘따라 다들 왜 이 모양이야 씨발!”

 

근처에 있던 쓰레기통을 힘껏 걷어차자 온갖 먼지와 쓰레기들이 쏟아져나와 바닥을 뒹군다.

 

“여기도 저기도 정신 좆 박은 저능아 새끼들 뿐인데 난 왜 씨바 내 집에도 정신박약 병신을 사와 갖고!”

 

“...주인님-”

 

“그래 뭐! 뭐! 뭐 씨발아! 이번엔 또 뭘 깼는데! 뭘 태웠는데! 씨발 방 구석 닦는다고 치약이라도 다 썼냐! 세탁기에 처넣는다고 퐁퐁이라도 다 썼냐고! 아님 좆 같은 염소새끼마냥 휴지를 처먹었냐! 씨발 뭔데 이번엔!”

 

“주인님, 일단 진정-”

 

“진정은 개 씨발 니미 콧구멍으로 쳐 드시고요, 제발 좀 닥치라고! 그게 그렇게 어렵냐!”

 

“윽!”

 

나는 필사적으로 나를 진정시키려는 이비를 거세게 밀어냈다. 녀석이 눈을 질끈 감으며 인상을 쓴다. 불쾌한가? 그럼 어쩔 생각인데? 죽이기라도 하게? 나야 씨바 환영이지.

 

“왜, 너도 내가 좆같냐? 당연히 좆 같겠지. 그래서 뭐? 내 모가지라도 똑 따시게? 그래, 니 대가리 씹창난 걸 내가 모를까 봐? 너 사람도 막 죽일 수 있다며?” 

 

이비를 사정없이 벽 쪽으로 몰아세운다. 내가 한 발짝 다가가면 녀석이 한 발짝 뒷걸음질 치고, 그러기를 몇 차례 반복하자 이내 녀석의 등이 벽에 딱 붙어버렸다.

 

“죽이고 싶지? 죽여봐! 아니, 제발 좀 죽여줘! 나도 씨발 이젠 다 때려치고 뒤지고 싶다고! 그 고장난 대가리 좀 유용하게 써봐, 이번 한번만 제발! 제발 좀, 씨발년아!” 

 

....그렇게 한참이나 마음에도 없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더니 조금은 머리가 식기 시작했다. 흥분이 가라앉고, 거친 호흡이 다소나마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도 모르게 고여버린 눈물을 닦아내자, 뒤늦게 이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녀석이 잔뜩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이 불쌍한 녀석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미안해.”

 

“...”

 

녀석이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본다.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야. 오늘은 그냥 좀.....아냐. 신경쓰지 마.”

 

저 멀리 내던져진 가방을 가지러 가다 보니, 평소보다 훨씬 깔끔하게 정리된 집안이 눈에 들어온다. 이번엔 치약 냄새도 나지 않는다. 먼지가 쌓인 채로 구석에 방치해 두었던 조화랑 가짜 과일 소품까지 식탁 위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었다. 아마 이비가 용케 찾아내서 올려 뒀겠지. 

 

....나름대로 열심히 했구나.

 

“...오늘은 일찍 쉬어. 나도 일찍 잘게.”

 

방에 들어가기 직전, 나는 아직도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녀석에게 한마디를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청소, 정말 잘해놨네. 수고했어. 그리고....고마워.”

 

 

-------------------

 

 

잠이 안 온다. 여러 가지로 머리가 복잡하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출세는 아예 물 건너간 셈이고, 인상된 급여만큼이나 애사 기금까지 올라버렸으니 지갑 사정도 걱정이다. 거기다 여기서 일궈놨던 것도 전부 버리고 저 멀리 지방의 소도시로 가야 한댄다. 

 

아까의 일 때문에 마음도 편치 않다. 아무리 머리에 열이 올랐다 한들, 아무 잘못도 없는 이비에게 그런 식으로 화를 푼 건 무슨 말로도 변명이 안 된다. 내일은 제대로 사과해야겠지. 하지만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 순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주인님. 혹시 주무십니까?”

 

이비였다. 평소보다 조심스럽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 있다. 나는 일어나서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아니, 잠이 안 와서. 너는 안 피곤해?”

 

이비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다.

 

“저...주인님. 드리고 싶은 말씀이....있습니다.”

 

겨우겨우 입을 떼는 녀석.

 

“아까 말씀하신 대로....전 머리가 망가진 바이오로이드임다. 예전에는 우리 브라우니들 중에서도 엄청 똑똑했다고 그러는데... 이제는 다른 브라우니들처럼, 할 줄 아는 것도 없으면서 의욕만 앞서서 일을 망치는 신세가 되어 버렸지 말임다.”

 

아까 했던 얘기 때문에 상처를 크게 받은 모양이다. 진심이 아니었는데.

 

“사실 저 머리만 나빠진 게 아님다. 이것저것 다 엉망진창이 돼버렸슴다. 기억도 뒤죽박죽이고, 언어모듈도 망가져서 말도 마음대로 안 나옴다. 아까......정신박약이라고 하신 거, 어떻게 보면 맞는 말씀이심다.”

 

“그건 그 뜻이 아니라-”

 

“아닙니다! 주인님은 잘못 없으심다. 다 제가 못나서 그런 거지 말임다. 첫날부터 주인님을 위험하게 만들고....이것저것 망가뜨려서 손해가 크실 거라 생각함다. 전 그 뒤로도 계속 일을 망치기만 했고.... 그러니까....아까 화 내신 것도, 아마 전부 제 잘못 때문일 검다.”

 

“아니야. 네 잘못 없-”

 

“주인님께서 오늘 안 좋은 하루를 보내셨을 거란 건 알지 말임다. 머리는 망가졌지만 저도 눈치는 있슴다. 그래도....제가 좀 더 좋은 메이드였다면, 이렇게까지 화를 내시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함다.”

 

녀석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저, 주인님이 그렇게 화를 내시면서도.... 저한테 손찌검은 안 하려고 애쓰시는 거 다 느꼈지 말임다. 그런 것만 봐도 주인님은 정말 좋으신 분임다. 저번에 직장에서 뵀던 다른 인간님들보다 훨씬, 훨씬 훌륭한 분이심다.”

 

“그-”

 

“그러니까 주인님, 저는 언제나 세상에서 제일 훌륭하고 착하신 주인님 편임다. 전 끝까지 주인님만큼은 믿을 검다.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면 저한테라도 풀어주십쇼. 저, 주인님 기분이 풀리신다면 저한테 뭘 하시더라도 기쁠 검다. 아, 아픈 건 익숙하지 말임다!”

 

녀석이 어딘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너한테 그런 짓을 왜 해, 내가.”

 

녀석이 애써 웃어 보이며 계속 말을 이어간다.

 

“역시 주인님은 착하심다. 그....저, 머리가 나빠져서 주인님이 하시는 말씀을 잘 이해 못 할지도 모름다. 그래도, 들어드리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지 말임다. 그러니까.....”

 

그 지랄을 했던 나에게조차 진심으로 사과하며 위로를 건네는 이비. 대체 얘는 얼마나 착하고 순진한 걸까. 그리고 그런 녀석에게 차마 입에 담아선 안 되는 말을 쏟아낸 나는 대체 얼마나 글러먹은 놈인 걸까. 

 

“내가 미안해, 이비.”

 

이비가 의아한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본다.

 

“괜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어. 너랑은 상관도 없는 일들을 여기까지 가져와선....내가 미안해. 전부 내 잘못이야.”

 

“주인님?”

 

“네가 못 나서 그런 거 아니야. 못난 건 나지.”

 

“주인님-”

 

“솔직히 난 죽어도 싸.”

 

“주인님!”

 

녀석이 갑자기 단호한 목소리로 힘을 주어 말한다.

 

“죽는단 말은 가볍게 하시는 거 아닙니다. 주인님 같은 분은 더더욱.”

 

녀석이 내게 다가와 몸을 밀착시켰다. 

 

“아까 제가 사람도 죽일 수 있다고 하셨지 말임다? 그럴 수도 있을 검다. 사실 저, 사람들이랑 다른 자매들 뇌파를 아예 느끼질 못함다. 직접 눈으로 봐야 그나마 구분이 됨다. 근데...”

 


 


 

“우리 주인님 뇌파만큼은 못 알아볼 수가 없지 말입니다.”

 

내 얼굴에 두 손을 대는 이비.

 

“특별함다, 주인님 뇌파는. 다른 인간님들하고도 다르고, 자매들하고 다른, 따뜻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 있슴다. 제가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신호라서 알 수 있슴다.”

 

“...”

 

솔직히 무슨 원리인지는 이해가 안 가지만, 녀석의 눈빛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 제가 주인님을 해칠 리가 없슴다. 제가 이 이상으로 망가져서 완전히 미쳐버린다 해도, 이 느낌만큼은 절대 잊지 않을 검다. 주인님께선, 저 만의 주인님이심다. 그리고, 저도 마찬가지로 주인님만의 메이드임다. 그러니...”

 

녀석이 내 얼굴을 끌어당겨 자신의 얼굴에 가까이 대었다.

 

“주인님께서 제게 주신 저만의 이름, 그 이름이 듣고 싶슴다. 저는 그거면 충분함다.”

 

“....이비.”

 

“....한 번만 더 부탁드림다.”

 

“이비, 우리 착한 이비......내가 미안해.”

 

이번엔 내게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비는 말없이 나와 이마를 맞대어 온다. 입장이 거꾸로 되어버린 상황이 조금 우습기도 했지만, 애써 딴 생각을 해봐도 울음이 그치질 않았다. 슬슬 콧물까지 흐르는 것 같다. 꼴이 흉하겠네.

 

그렇게 한참 눈물 콧물을 쏟아내고 나자, 마침내 이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진정하셨습니까?”

 

“...응. 그런 거 같아.”

 

나도 모르게 쿨쩍, 하고 코를 훌쩍였다. 녀석의 눈을 바라보며 제대로 사과하고 싶었지만, 그럴싸한 말도 떠오르지 않는 데다, 여전히 이비를 똑바로 바라볼 엄두가 안 난다. 

 

그러자 갑자기 녀석이 수줍은 얼굴로 내 볼에 입술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가 들린다. 얘가 지금 나한테 뽀뽀라도 한 건가?

 

“...인간님들은 이런 거 좋아하신다고 들었슴다. 기분이 좀 나아지셨으면 좋겠지 말입니다.”

 

아니, 싫진 않았는데.....

 

“....그 얘기는 어디서 들었어?”

 

“집안일 공부하다가 인터넷에서 봤슴다.” 

 

그럼 그렇지.

 

“혹시 제가 또 이상한 짓 한검까?”

 

이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아니, 기분이 훨씬 나아졌어. 고마워.”

 

“히힛, 다행임다.”

 

녀석이 평소처럼 씩 웃어온다. 그 해맑은 웃음 속엔 이루말할 수 없는 따스함이 있었다. 다시금 죄책감이 밀려왔지만, 그 이면에는 이비를 향한 고마움도 섞여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비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방을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피곤하셨을 텐데 제가 또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것 같슴다. 푹 주무십쇼, 주인님.”

 

“....응. 너도.”

 

녀석이 얌전히 방문을 닫았다. 아직도 기분이 참 복잡하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방향이긴 하지만... 말주변이 없어서 이런 느낌을 표현하지 못하는 게 아쉽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가 날 진심으로 아껴준다는 느낌을 받는 게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모르겠다.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억지로나마 잠을 청하기로 했다.

 

이비 그 녀석은 좋은 꿈을 꿨으면 좋겠다. 걱정 따윈 없이. 

 

 

-------------------

 

 


 

“잘 주무셨슴까, 주인님? 아침 식사도 준비해뒀슴다!”

 

방을 나서자 이비가 어느때처럼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식사라는 말에 식탁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상이 보인다.

 

.....햇반에 구운 스팸, 레토르트 김치랑 인스턴트 미소시루가 전부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엔 뭘 태우거나 하진 않았네. 이 정도면 녀석에겐 장족의 발전이겠지. 

 

“수고했어, 이비. 좋은 아침.”

 

내 나름대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녀에게 인사해주었다. 그러자 헤헤, 하며 헤실대는 이비.

 

“To you as well, good master.”

 

“응?”

 

“주인님도 좋은 아침임다.”

 

“아, 고마워.”

 

“식기 전에 드시지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도 힘 내시는 검다!”

 

슈밤, 뜬금없이 또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오늘은 퇴근길에 녀석이 좋아할만한 거라도 하나 사와야겠다. 치킨이면 되려나.

 

 

--------------------


 

 

머리는 망가졌을지언정, 마음은 누구보다도 멀쩡한 브닐라, 아니 브라우니4077EV, 아니 이비.


필력도 별로인데 제가 원체 삭막하기까지 해서 쓰는 데 특히 애를 먹은 회차였습니다.


매번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브라우니 애껴요


....그리고 인생사 새옹지마, 지방으로 쫓겨난 게 결과적으론 행운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