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넓군요.


 

평생을 기억의 방주에서 머물다가 생을 마감하게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밖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니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입니다.


 

이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라?


 

이봐 예쁜 언니.


 

......


 

듣고 있어? 거기 새하얗고 야한 몸을 한 예쁜 언니.


 

본 개체를 부르는 겁니까?


 

물론이지. 이 근처에 새하얗고 야한 몸을 한 예쁜 언니가 언니 말고 또 누가 있어?


 

정정을 요구합니다.


 

본 개체는 새하얗고 야한 몸을 한 예쁜 언니가 아니라 기억의 방주의 전 관리인 므네모시네입니다.


 

정확한 지칭을 위해 명확한 개체명을 사용해주시길 요구합니다.


 

알겠어, 알겠어, 므네뭐시기.


 

정정을 요구합니다. 본 개체의 이름은 므네뭐시기가 아니라 므네모시네입니다.


 

하하, 화났어? 농담 한 번 해봤어.


 

친해지려면 농담만큼 좋은 게 없잖아?


 

나는 앵거 오브 호드의 멋진 언니 워울프.


 

그런데 므네모시네 바빠?


 

기억의 방주의 관리인 권한을 최후의 인간님에게 양도한 이후로 별도로 맡은 임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 그러면 잘 됐네.


 

한잔 어때?


 

한잔?


 

양과 사자와 원숭이와 돼지의 피에서 유래한 음료 같이 마시지 않겠냐는 의미지.


 

거부합니다.


 

하하하하하핫! 농담이야.


 

술이야, 술.


처음 마실 때는 양처럼 온순해지고, 조금 더 마시면 사자처럼 포악해지고, 

더 마시면 원숭이처럼 까불거리고, 그 이상 마시면 돼지처럼 추해지는 음료지.


 

좋은 술을 얻었는데 마침 딱 같이 마시기 좋은 사람이 눈 앞에 있었단 말이지.


 

본 개체의 어떤 면이 함께 술을 마시기 좋은 지 알고 싶습니다.


 

예쁘잖아.


 

바이오로이드 중에 안 예쁜 사람이 어딨겠냐마는.


 

므네모시네처럼 분위기 있는 미녀는 보고만 있어도 술이 술술 넘어간다니까.


 

마치 절경과 달을 마주한 채 술잔을 기울이던 이태백처럼 말이야.


 

그러니 한 잔 어때?


 

......


 

본 개체는 알코올을 섭취해본 경험이 없습니다.


 

오, 술아다야?


 

......이건 내 기준으로도 너무 경박했네. 쏘리.


 

술은 원래 잘 마시는 사람과 함께 마시면서 배우는 법이지.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오르카 호 내의 손꼽히는 주당.


 

술 상대를 잘 골랐어.


 

본 개체가 선택한 것이 아닌 워울프가 선택한 것 아닙니까.


 

에이, 그런 세세한 것은 그냥 넘어가자고.


 

그래서 한잔 어때?


 

......


 

거부합니다.


 

술의 해악에 대한 정보는 손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저는 알코올을 섭취하면서 제 신체에 부하를 주지 않겠습니다.


 

뭐, 술이 나쁜 점이 있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술에 먹혔을 때의 일이지.


 

적당한 술은 삶의 윤활유처럼 작용하여 삶을 윤택하게 해주지.


 

술을 안 마시면 인생의 절반을 손해보는 거라구?


 

......


 

그래도 거부하겠습니다.


 

......


 

나중에 사령관이 술을 마시자고 했을 때 자기 주량을 몰라서 실수할 수도 있어?


 

......


 

막상 그 순간이 오면 준비할 시간이 없을 수도 있어.


 

유비무환. 훈련은 전투다. 각개전투.


 

그 때를 대비한다는 생각으로 한 번 마셔보는 건 어때?


 

......


 

관리자님은...술을 좋아하십니까?


 

주당까지는 아니지만 즐기기는 하지.


술이 들어가면 한 마리의 짐승으로 변한다고? 어흥.


 

......


 

그러면 요청에 응하겠습니다.


 

하하, 은근히 솔직하잖아.


 

그런 사람 싫지 않아.




 

자 한잔해.


 

......(꿀꺽)


 

하아...


 

오? 처음 마시는 것 치곤 잘 마시는데?


 

초보자에게는 좀 쌘 술인데.


 

약을 마신다는 생각으로 최대한 혀에 술이 닿지 않게 마시면 참을 만합니다.


 

이봐~ 술 아깝게 왜 그래.


 

술은 오감으로 즐기는 거라고.


 

눈으로 색을 보고, 코로 향기를 맡으며, 혀로 맛을 보고, 입안과 목을 넘어가는 술의 느낌을 감상하는 거지.


 

이렇게.(꿀꺽)


 

캬아. 좋다.


 

오감이라 함은 시각후각미각촉각 외에 청각도 있는데 청각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함께 마시는 친구의 정다운 말소리지.


 

......


 

친구 맞냐는 소리는 안 하네?


 

지금까지 방주에서 홀로 지냈던 지라...친구가 있어본 적이 없기에 무엇을 친구라 규정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간단해.


 

이렇게 얼굴 마주하고 무언가를 함께 하는데 거부감이 없으면 친구지.


 

그러면 본 개체와 워울프는 친구입니까?


 

친구지.


 

......


 

......


 

관리자님과...저도 친구입니까?


하하하하. 우리 언니 알기 쉽네.


 

친구라...


흠...친구라면 친구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친구...만으로는 만족 못하지?


 

......


 

쑥스러워 하지마.


 

오르카 호의 모두가 비슷할 테니까.


 

조금 덜 솔직하거나, 조금 더 솔직할 뿐이지.


 

워울프는 어떻습니까?


 

사령관이랑 뜨거운 밤을 함께 보낸 사이지.


 

......


 

......언니, 겉보기에는 잘 깎인 빙하처럼 예쁘고 냉랭하지만 은근히 솔직순진하네.


 

좋았어, 내 마음에 쏙 들었어.


 

우리 므네모시네랑 사령관이랑 쿵떡쿵떡 잘할 수 있게 발 벗고 나서주지.


 

쿵떡쿵떡이 뭔지 알고 싶습니다.


 

교미, 성교, 섹스, 떡치기, 교배, 흘레, 교접, 아기 만들기


 

......


 

뭐, 이건 너무 나간 거 같긴 해.


 

하지만 사령관이랑은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거지?


 

그렇습니다.


 

도와줄게.


 

이해불능입니다.


 

뭐가?


 

본 개체를 돕는다고 하더라도 워울프에게 아무런 이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워울프의 자원을 소모하는 것이기에 손해라고 판단됩니다.


 

재고하기를 권합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친구잖아.


 

바로 내일 서로를 죽일 원수 사이라고 하더라도 함께 술잔을 기울였으면 친구 사이인데.


 

우리는 그런 흉흉한 사이는 커녕 함께 싸우는 동료잖아.


 

그리고 나에게 재고하라고 말한 것은 므네모시네가 내 입장을 고려했다는 의미잖아?


 

친구 사이가 아니라면 이러지 않지. 그리고 친구 사이엔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지.


 

너무 사양하지는 말라구?


 

......


 

본 개체는 지금까지 방주에서만 홀로 지냈기에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데에는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워울프는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됩니다.


 

멋진 언니니까. 그리고 멋진 언니는 대체로 좋은 사람이지.


 

관리자님께선...멋진 언니를 좋아합니까?


 

멋진 언니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


 

......


 

저도...멋진 언니가 될 수 있습니까?


 

사령관과 친하게 지낼 수 있게 도와주면서 멋진 언니가 될 수 있게도 도와줄게.


 

어느 쪽이든 내 전문 분야니까.


 

감사합니다.


 

잔이 비었네?


 

한 잔 더 하라고.


 

아.


 

잠시만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알겠습니다.


 

혹시 누가 나 찾아도 모른다고 해줘.


 

? 알겠습니다.



...이 상습 땡땡이범 또 어딜 간거야!


근무지 이탈이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하루가 멀다하고 땡땡이야!


칸 대장님이니까 그냥 넘어가지 보통은 군사법정에 처벌 받고도 남는다고!


어디 있어요!



 

나 왔어.


 

나 찾는 사람 있었어?


 

없었습니다.


 

다만 누군가를 찾는 한 명이 있었습니다.


 

탈론인가...


 

소리가 작아서 잘 듣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주기를 요청합니다.


 

아무것도 아냐.


 

우리의 만남과 미래의 멋진 언니를 위해서 건배하자고.


 

멋진 만남과 멋진 언니를 위하여


 

건배.


 

......


 

짠 해야지.


 

짠이 뭡니까?


 

거기서부터 가르쳐야 하나?


 

내가 건배사 선창을 하고 선창이 끝나면 함께 건배를 외치면서 잔을 부딪히는 거지.


 

다시 해보자.


     

멋진 만남과


       

멋진 언니를 위하여


     

건배!


     

......                         ......


       

                                건배.


 (짠)


 

잘했어.


 

이걸로 멋진 언니로의 한 걸음을 내딛었다고 할 수 있지.


 

앞으로 내가 멋진 언니가 될 수 있게 차근차근 가르쳐 줄게.


 

......관리자님과...


 

당연히 그것도 잊지 않았지.


 

나만 믿으라고.





이 농땡이 상습범 도대체 어디 간거야! 누가 군바리 아닐까봐 짱박히는 거 하나는 잘해요!


잡히면 단단히 혼쭐을 내줄거야!


=====================


후편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