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연필을 한 자루 들어서 칼로 슥슥 깎아낸다. 연필깎이가 아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의 수업을 받는 바이오로이드들이 미술 시간에 간간히 사용하는 커터칼이다.

 구식 방법으로 최대한 멋을 내 보아도 연필 깎이 같은 기계보다 정교하게 깎아낼 수 없다. 최대한 덜 울퉁불퉁하게 보일 수 있을 뿐. 가까이서 보면 불규칙하고 삐뚤빼뚤하게 깎여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연필이 꽤 잘 깎였구나 하고 만족한다. 그리고 전자 문서가 아닌 몇몇 서류들을 이 연필로 결재하기 시작했다.

 멸망 전 서류 작업은 대부분 전자 결제로 이루어 졌고, 굳이 종이를 고집하는 이들도 서명할 때는 도장이나 만년필 같은 것으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멸망 후의 세계이다. 그런 규칙에 굳이 얽메일 필요가 없다. 어찌보면 나는 소소하게 규칙을 깨는 반항아가 아닌가 생각하고 스스로 웃기도 한다.

 사실 현재의 오르카 호는 모든 서류를 전자 서류로 처리할 수 있다. 그것이 더 간단하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갓 합류하였던 오르카 호는 전력이 때때로 부족하여 작전 패널을 오래 켜 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서류 작업들의 대부분을 종이 서류로 처리하였다. 그나마 종이도 부족하여 때때로 중요도가 덜 한 사안들은 그 조차도 하지 못하였지만.

 잉크 역시 부족하였다. 무엇보다 잉크는 잘못 보관하면 마르기도 하였으므로 처리할 서류에 파 묻혀 깜빡하고 선 잠을 자다가 잉크를 마르게 한 날에는 그리폰의 잔소리가 나의 귓가를 쏘아대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요안나, 콘스탄챠, 그리폰, LRL이 내 방으로 다가왔다. 예쁘게 포장한 상자를 들고서. 삐뚤빼뚤하게 묶은 리본이 상자를 감싸고 있었다. LRL이 서툴지만 정성스럽게 묶인 것임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지... 짐이 권속을 위해서 제일 좋은 것으로만 모아놓은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LRL은 콘스탄챠의 뒤로 쪼르르 달려가 숨었다. 나는 그런 LRL에게 고맙다고 하며 포장을 조심스레 풀었다. 수줍게 포장된 상자 안에는 연필들이 들어있었다. 길이는 제각각이지만 좋은 연필들이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좋았다.


 "인간. 그거 이 꼬맹이가 등대에서 쓰던거 갖고온거래. 왠일로 기특한 일 했더라."


 그리폰이 콘스탄챠 뒤의 LRL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요안나는 그리폰의 머리를 쓰다듬던 LRL을 번쩍 들며 말했다.


 "주군. 기특한 일을 한 LRL 양에게 직접 뭐라도 말씀 해주길 바라네. 우리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인간님의 칭찬만큼 달콤한 보상이 또 어디 있겠나."


 부끄러워 하는 LRL의 손등에 키스를 하고 먼 옛날 기사가 그랬듯 LRL의 앞에 한 무릎을 꿇고 앉아 나는 권속으로써 큰 은혜를 입었다고 LRL에게 맞는 감사의 인사를 해 주었다. 그 말에 LRL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우쭐해하는 모습이었다. 원래같았으면 그리폰의 꿀밤이 있었겠지만, 그날 만큼은 그저 웃으면서 LRL을 바라보았다. 내가 오르카호에 합류하고 나서 처음으로 편안하게 지냈던 날이었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철충들을 어찌저찌 격퇴시키면서 오르카호의 살림은 점점 괜찮아졌다. 살림이 괜찮아 진다는 말은 그만큼 물자들의 보급이 원활해지는 것을 의미했고, 더 이상 전력난으로 전자 서류들을 모두 처리하지 못하는 날을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종이 서류의 감촉이 없어지는 것을 아쉬워 한 나는 동침 일정 같은 서류는 종이 서류로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이것만큼은 아직까지도 아르망과 알파도 꺾지 못한 황소고집이다.

 우리의 거점이 좀 더 탄탄해진다는 것이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요리 대회, 여름 날의 수영복을 입었던 휴식, 마법소녀들의 화해 이야기, 테마파크의 어두운 뒷면, 나 몰래 진행된 겨울 이벤트, 아직도 무서운 초콜렛 홍수를 지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방만해졌었다. 그날의 나는 고급스러운 만년필을 사용하여 종이 서류에 결재를 하고 있었다. 발할라 인원들이 어찌 구했는지 모를 고급스러운 옷까지 입고서.

 사실 나는 내가 마지막 인간이라는 것이 그 전까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내 주위에는 바이오로이드들 아니면 AGS 밖에 없었으니까. 스스로 '인간'이라고 느끼기에는 그 단어는 어쩐지 멀리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당시에 몸을 다소 돌보지 않고 험하게 굴리고 있었다. 그래도 위험은 크게 없었으니 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호위라고는 브라우니 2056번 한 명만 데리고서 잠시 근처 섬에 상륙한 적 있었다. 사실 나 혼자 섬에 무엇이 있는지 잠깐 보고 오겠다고 했지만 그날따라 콘스탄챠나 마리의 고집이 강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집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조치였지만.

 결국 나는 나이트 칙 몇 개체를 마주쳤고, 그것들의 공격에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나를 호위하던 브라우니가 경상을 입었다. 그날 처음으로 나는 '인간'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을 느꼈다. 그리고 나의 행동에 대한 후회 역시. 그 날 이후로 며칠 간 방에서 나가지 않고 서류 역시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였다.

 내가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기에 그래도 자리에 앉아 서류를 다시 하나 둘 씩 처리하였다. 그러다가 본 것이 언젠가 LRL이 나에게 준 연필이 필기구통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우리의 기반이 튼튼해진 뒤엔 상징적으로만 갖고있던 그 연필들이었다. 하지만 그때에는 적어도 방만하지 않았다. 가진 것이 적은 만큼 신중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가진것이 많은 지금은...

 그날 이후, 나는 다시 연필을 깎았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때 사용했던 연필. 하지만 그만큼 내 곁을 오랜시간 동안 지켜주었고 항상 처음을 생각하게 해주는 연필. 연필깎이 조차 없어서 칼로 깎았던 그 연필을 계속해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나는 오늘도 연필을 한 자루 들어서 칼로 슥슥 깎아낸다. 연필깎이가 아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의 수업을 받는 바이오로이드들이 미술 시간에 간간히 사용하는 커터칼이다. 오늘도 이 연필로 나는 종이 서류에 서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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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연필이 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