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사랑의 폐허


 “아르망.”


 “알고 있어요. 폐하를 안심시키려 그러셨던 거죠?”


 “…서방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니니까요.”


 사령관에게서 잠시 떨어져 있는 틈을 타 용과 아르망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원으로서가 아닌 아내로서. 가만히 한숨 쉬는 용을 다 이해한다는 듯 아르망은 어제부터 몇 번인지도 모를 쓴웃음을 다시 짓고 있었다.


 “일단 저 아리아드네라는 분이 폐하나 저희를 적대할 확률은 극히 낮아요. 지금까지 모인 데이터로만 봐선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게 무방할 거예요.”


 “허나 펙스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알파조차 그 존재를 몰랐다지 않습니까. 멸망 후에 제조된 개체라 보기엔 연식이 너무 오래돼 보였는데…….”


 아르망의 예지 능력과는 종류가 다르긴 했지만, 용의 눈썰미도 어지간한 능력 저리가라 할 정도로 뛰어났다.


 괜히 대함대를 이끄는 지휘관이겠는가. 한두 마디 말로도 전황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그녀에게 바이오로이드 한 기의 행동 하나 파악하는 것쯤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우선 두려움. 사령관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분명 멸망 전 인간을 대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악질적인 인간들만 골라서. 사력을 다해 그녀를 일으켰던 건 감사의 뜻이 아니라 공포심 그 자체였다.


 그리고 움직임. 만약 시각 상실이 후천적인 것이라면 오리진 더스트에 의한 신경망 부식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몸을 떠는 것도 근육 계통에 이상이 생겨서일 가능성이 높았고 말이다.


 “그 와중에 성대만은 괜찮다는 건 행운이라 해야 할지…….”


 “어떻게든 노래만은 부르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요.”


 “…지금 상황에서 가장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는 게 겨우 그거라니, 새삼 제 능력의 한계가 느껴집니다.”


 용은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칼자루들을 어루만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까도 서방님께서 달려나가실 때 제가 대신 나갔어야 했는데…….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통에 그러질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아르망.”


 “그건 저도 예상 못 했던 거였어요. 정말 폐하의 돌발행동은 예측하기가 너무 어렵단 말이에요. 가뜩이나 더 어려워져서 제발 돌발행동만큼은 하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려도 들어주질 않으시네요.”


 “저까지 그 변수에 넣은 후로 말이군요.”


 “네, 저희는 폐하의 반려니까요.”


 배시시 웃는 아르망의 얼굴엔 예지를 못한다는 곤란함 대신 기쁨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르망은 서약 때 했던 맹세를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 어떤 때라도, 폐하의 앞날에 저와 용 님이 같이 있을 거예요.’


 그것은 영혼의 맹세. 바이오로이드도 영혼이 있다고 말해 준 사령관에 대한 감사, 그리고 자신에 대한 다짐.


 비록 그것으로 인해 그녀의 예지가 무뎌졌다고 해도, 차라리 미래를 보는 눈을 가릴지언정 현재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시간을 더 소중히 하겠다는 다짐이었다.


 “폐하…….”


 [저기 언니들, 한창 신혼 분위기 내고 그런 거 다 좋은데. 거기 오빠랑 데이트 나간 거 아니란 것 좀 알아줄래?]


 한창 분홍빛으로 물들어가는 아르망의 뇌를 깨운 건 다름 아닌 닥터의 통신이었다. 만약 용이 잡아주지 않았다면 아르망은 그대로 뒤로 넘어졌을 터였다.


 “꺄악?!”


 “험, 험험. 벌써 정기 보고 시간이 되었나보군.”


 [이미 지났거든?]


 “…….”


 소형 패널에는 에너지 드링크 몇 캔과 함께 짜증이 덕지덕지 묻은 닥터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참고로 에너지 드링크 개수는 그날 닥터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에 대한 척도였다.


 보통의 경우는 1개 아니면 없는데…지금 닥터 앞엔 무려 10개나 되는 음료수 캔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말은 짜증이 정말 최고조에 치달았다는 뜻. 그 와중에 다시 한 손으로 캔을 까는 솜씨가 꼭 야근하는 당직이 맥주캔 까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다, 닥터. 여기 지금까지 모은 저 신원불명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데이터에요. 첨부해서 보낼 테니까 알아낼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좀 알아내 주세요.”


 [이미 하고 있어. 근데 아르망 언니 예지로도 이상 없으면 그냥 아무 문제 없는 거 아냐?]


 “…아뇨. 폐하를 적대하지 않을 거라는 게 폐하를 해칠 가능성이 없다는 건 아니니까요. 오히려 폐하를 해칠 가능성이 있는지 계산해보면 예지 결과가 나오질 않는답니다.”


 여러 일들을 거친 이후로 아르망은 자신의 예지를 그다지 맹신하지 않게 되었다. 예지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선 커다란 성장이었다. 특히 사령관의 일에 대해선 이제 예지보다는 여자의 ‘감’을 더 믿는 아르망이었다.


 어떻게 여자의 감을 믿냐고? 그야 뜨거운 밤을 몇 번이나 보내면서 뒤엉킨 사이니까.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유였지만 정말 그게 그녀가 감을 더 믿는 이유였다.


 [그 아리아드네란 언니에 대해선 딱히 이렇다 할 만한 게 없어. 차라리 여기로 데려오면 정밀 검사라도 해볼 텐데.]


 “혹시 그녀의 노랫소리가 감각을 마비시킨다거나 그런 건 없소?”


 [노래가 그럴 수 있다고? 에이, 용 언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다. 그렇게 치면 우리가 방송으로 노래 들었을 때부터 뭔가 이상했어야 했는데 그러진 않았잖아? 그냥 평범한 노래야.]


 “그럼 리리스 양이 우려했던 건…….”


 [그냥 노래랑 분위기에 취한 거겠지 뭐. 영상으로 보는 나도 참 분위기 좋다고 생각했는데, 감수성 풍부한 리리스 언니는 오죽하겠어.]


 닥터에게 그건 대수롭지도 않은 문제인 듯했다. 오히려 그 다음 말을 이을 때 닥터의 목소리는 무거워졌다.


 [그런데 딱 하나 걸리는 게 있긴 하네.]


 “무엇이오?”


 [저번에 오메가가 유적에서 우리한테 털리고 난 뒤에 도망쳤잖아? 오메가 근거지와 유적 사이의 거리를 역산해서 루트를 예상해봤는데……. 거기, 오메가가 최소 한 번은 지나갔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야.]


 레모네이드 오메가. 설마 여기서 튀어나올 줄 몰랐던 이름이 튀어나오자 아르망과 용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단순히 오염 구역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일이 커지고 있었다.


 “그럼 설마, 이 방사능 오염 구역도 오메가의 소행이란 말이오?”


 [그건 아냐. 지금 밖에 나가 있는 AGS 언니 오빠들한테 자료 받아서 주변 탐색 중인데 방사능 오염 자체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던 거야. 아마 이 공장지대, 안쪽에 핵융합로 비슷한 게 있었던 거 같아.]


 “그 말은…….”


 [단순히 칫솔이나 생산하던 곳은 아니란 거지. 무기 공장이었다는 거야.]


 방사능 오염으로 가득한 폐허의 공장지대. 그것도 과거에는 무기를 제조했을 가능성이 높은.


 폐허 안에 갇힌 채 끊임없이 노래부르던 정체불명의 바이오로이드, 그리고 마치 헌화처럼 건물 전체가 가득 피어있던 해바라기들…….


 “이 정보, 리리스 님께도 보냈죠?”


 [오빠한테 빼고 다.]


 “건물 구조 파악하는 대로 즉시 탈출 루트부터 짤게요. 제가 루트 보내드리면 그곳에 AGS 부대들 좀 호위로 보내주세요.”


 [알았어. 언니들도 몸조심하고, 특히 오빠는 더 조심하게 하고. 알겠지? 진짜 이번뿐이야! 다음번에는 언니들이 막아야 해! 알겠지! 특히 용 언니!]


 “왜, 왜 그러시오?”


 거의 화면에서 튀어나오려 하는 닥터의 기세는 천하의 용도 물러나게 할 정도로 사나웠다.


 [오빠가 감정적으로 나오면 가장 이성적으로 막아야 할 언니가 같이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어떡하잔 거야? 오빠만 거기 안 갔어도 이런 일 없었다고!]


 “…미안하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군.”


 [나도 알아, 오빠가 나쁜 거! 근데 그래도 우리 오빠니까 우리가 맞춰…아냐! 그냥 가서 한 대만 때려줘! 아니 두 대! 돌아오면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알비스랑 LRL한테 손대려고 했다고 세이프티 언니한테 다 일러바칠 거야!]


 “…….”


 “…….”


 어찌나 닥터가 날뛰던지 아르망과 용이 어르고 달래서 겨우 통신을 종료할 수 있었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그 단정하던 용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물론 아르망이라 해서 그다지 다른 꼴은 아니었다.


 “…이런 거 보면 정말 우리 폐하는 폐하시다라는 생각밖에 안 드네요.”


 “동감입니다. 언제 철이 드실지.”


 “전 돌아가서 혼낼 테니까, 언니는 이따가 기회 봐서 혼내주세요.”


 “그럼요. 이번 기회에 버릇을 단단히 들여놓겠습니다.”


 대화만 들어보면 이게 애 기르는 엄마들 얘긴지, 신혼 부부 얘긴지 감이 안 잡히는 내용이었지만…….


 뭐, 확실한 건 이러나 저러나 사령관 앞엔 암울한 미래밖에 없단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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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 많아서 1인칭으로 하자니 어렵더라구요. 

그래서 3인칭 시점으로 바꿨습니다. 훨씬 낫네요.


시점은 정말 고난도 스킬 같아요.


아무튼 얘기는 거의 한 중반? 정도 왔습니다.


담화부터 슬슬 시리어스하게 가 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