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주인님, 곧 식사시간이니 슬슬 쉬는 게 어떨까요?"


"응... 콘스탄챠, 차 좀 타줄래?"


"네, 물론이죠!"


오르카호의 함장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사령관은 업무를 멈추고 자리에 앉은 채로 기지개를 폈다. 콘스탄챠는 곧바로 사령관 앞에 찻잔을 세팅한 뒤 차를 따라주었다.

그러나 사령관은 어째 표정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그는 최근들어 한가해지기만 하면 어떤 생각을 하느라 편히 쉬질 못하곤 했다.


"주인님, 어딘가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신가요?"


"어? 아냐아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


"...두번째 인간님 말이죠?"


그 말을 듣자 사령관은 손가락에 찻잔을 건 채로 굳어버렸다가 점짓 태연한 척 말을 이었다.


"아하하... 그렇게 티났어?"


"다들 알고 있어요, 주인님."


괜히 무안해진 사령관은 차를 홀짝이며 잠시 생각하고선 자신의 생각을 읊었다.


"...그 사람이 무사한건지 걱정돼서 그래, 그는 휩노스 병 대비책도 없잖아.

멸망 전 인류의 대부분이 악인이었다 한들 그 사람 또한 악인이라고 단정지어선 안되는 건데 말이야.

어쩌면 친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내 섣부른 판단 때문에 그가 쫒겨난 게 아닐까 싶어."


"아뇨, 주인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답니다."


환풍구에서 조용히 듣던 블랙 리리스가 유연하게 몸을 빼내 바닥에 착지하면서 제 의견을 피력했다.


"주인님은 너무 다정하세요. 그런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에게까지 호의를 베풀 정도로요."


"어쩌면 그도 선한 사람일지도 모르지. 실제로 추방되지 전까지 우리 애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었잖아? 추방되는 그 순간에도 나한테 욕 한마디 안했었어."


"그게 과연 그의 본심일까요? 능구렁이같은 사람일수록 본심을 숨기는 데 능숙한 법이죠."


"추방하는 대신 지켜본다는 선택지도 있었잖아."


"그는 일찍이 자신이 경계 받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고위 개체들의 눈을 피해서 움직였습니다. 놔뒀다간 우리 눈을 피해 내부에서부터 장악해나갔을 지도 모르니 미리 싹을 자르는 게 맞아요."


"안그래도 바깥은 위험한데 총이라도 쥐어줬어야 하지 않을까?"


"궁지에 몰린 그 인간에게 무기를 쥐어줬다간 주인님을 공격할 지도 모르는 일이죠."


"리리스, 그건... 너무 과한 생각 아닐까?"


"주인님께 해를 끼칠만한 위험분자를 사전에 차단하는 게 제 사명인걸요."


"하다못해 휩노스 병을 막을 몸이라도 만들어주고 내보냈어야..."


"그 날 지휘관 회의에서 말씀드렸잖아요, 만일 그 인간이 생체재건장치로 만들어진 몸을 가지고 바깥을 돌아다니다 펙스에 생포되기라도 하면 오메가한테 좋은 일 시켜주는 꼴 밖에 안됩니다.

그보다도, 얼마 전에 그를 수색해봤지만 결국 찾지 못했잖아요? 그러니 더 이상 그를 걱정하느라 주인님께서 미간을 찌푸리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사실 며칠 전에도 그가 걱정되어 살아는 있는지 만이라도 확인하려고 인근 도시에 수색대를 보내봤지만 그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탈것도 없으니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을텐데.

리앤이나 아르망같은 전문수사팀을 보냈다면 흔적을 샅샅이 찾아내 이동경로를 예측하고 찾아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진 않았다. 

그 때는 살짝 마음에 걸리는 정도라 찾으면 잘된거고 없으면 말고 정도의 마음으로 수색대를 꾸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찾지 못했다는 보고를 듣자 그럼 어쩔 수 없지 하고 넘겼지만...


"그래도... 아직도 마음에 걸려."


"주인님..."


"사실 그 사람이 악인이 아니었는데도 죽게 된다면 그건 내 책임이잖아? 정말로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걸까?"


*


오메가의 영토 안에 들어왔지만 이 땅이 전부 오메가의 눈과 귀로 채워진 건 아니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도시가 많이 남아있기에 우린 인적 드문 장소만을 거쳐서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미국 내 블랙리버 연구소, 그 중에서도 휩노스 병을 막을 수단을 개발해낸 지부다. 그 연구소의 좌표를 알고있는 트레저는 옆에서 바이오-네비게이션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었다.


"형님, 저것 좀 보십쇼!"


대뜸 트레저가 무언가 발견했다는 듯 연구소와는 상관없는 어떤 것을 가리켰다. 손끝에는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특이한 형태의 건축물이 서있었다, 바로 관람차와 롤러코스터 레일이었다.


"테마파크...?"


에이씨 재수없게스리, 라오 세계관의 테마파크면 사탄도 기겁해서 철충한테 인류박멸 서비스 요청하는 그 장소 아닌가.


"제조기 안에서 입력된 정보로만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보는 건 처음임다. 저기가 그리 즐겁게 놀 수 있는 장소라면서요?"


"에휴 등신 저거..."


"뭐임마?"


뒷좌석에서 총기 수입하던 리디아가 들으라는 듯이 혼잣말로 욕하자 트레저는 놓치지 않고 반응했다.

보아하니 트레저는 테마파크의 대외적인 정보만 알고 있는 반면 리디아는 이미 그 진상을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트레저, 테마파크는 그리 좋은 장소가 아냐. 멸망 전에 인간들이나 거기 가서 놀았지 바이오로이드는 그러지 못했어."


"예? 그런검까? 바이오로이드는 출입금지였던 검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


"잘나신 인간님들이 폐기처분 예정인 바이오로이드 데려다가 스너프필름 찍으면서 놀았던 장소지. 때리고 고문하고 강간하고 죽이고..."


"어? 뭐? 뭐라고?"


"어음... 너무 직설적으로 말하는 거 아냐?"


"굳이 저놈 동심 지켜줄 필요도 없잖아 형님."


"형님, 쟤 말이 진짭니까? 놀리는 거죠?"


"...사실이야. 멸망 전 새끼들은 바이오로이드 학대하면서 즐거워 했다더라."


"미친."


"그러게 말이다. 마음 같아선 저런 저주받을 장소엔 가까이 가고 싶지도 않네."


테마파크 얘기를 하다보니 머릿속에서 라오 할로윈 이벤트가 떠올랐다. 사령관이 펜리르를 통해 초대장을 받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테마파크에 가서 키르케와 만나고...

그러던 중 문득 머릿속에 한가지가 떠오르자 나는 곧장 핸들을 꺾었다.


"어... 형님? 거긴 테마파크 방향..."


"하지만, 그런 무시무시한 던전일수록 값진 보물을 찾을 수 있는 법이지."


*


이곳은 오르카호의 사령관이 다녀간 그 테마파크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랬다면 오메가가 가만 놔두질 않았겠지.

그렇다고 여길 관리하는 키르케가 남아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키르케도 철충도 그 누구도 없는 폐허가 된 테마파크. 하지만 멸망 전에 이곳에서 사용되던 물건들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내가 찾던 물건 또한 이곳에 남아있었다.


"으읍..."


리이다는 입안에 따듯하고 기다란 막대를 집어넣으며 묘한 소리를 냈다. 제조 된 후 수십년간 보존식을 찾아 먹거나 야생동물이나 사냥해 먹었지 이런 걸 입에 집어넣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입에 한가득 물고 있는


기다랗고


따듯한


츄러스




"어때, 입에 맞냐?"


"존나 맛있슴다 형님."


"요시. 처음하는 건데 잘 된 모양이구만. 이걸로 오늘 점심 때우고 가자, 배탈나지 않게 천천히 먹어."


테마파크에 온 나는 츄러스 만드는 기계를 찾았다. 라오 할로윈 이벤트에서 키르케가 츄러스 잔뜩 만들어서 대접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분명 츄러스 기계가 있을 거라 생각했고, 예상대로 직원용 비품 창고에서 기계와 츄러스 재료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오하려 츄러스 기계 전원 연결할 발전기 찾는 게 더 어려웠지. 

델리만쥬 만드는 기계도 있었는데 커스터드 크림이 다 상했을 것 같아서 그건 관뒀다. 츄러스 기계엔 알바생을 위해서 인지 친절하게 츄러스 만드는 법이 적혀있어서 보고 따라하니 그럴싸하게 만들어졌다.


둘 다 제조된 후 처음으로 먹어보는 따끈따끈한 츄러스를 정성껏 음미하는 모습을 보니 나까지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 같다. 그래, 테마파크는 응당 이래야 하는 법이지.


생각해보면 멸망한 세상에 던져졌지만 의외로 굶주릴 일은 없었다. 오르카호에서 내린 후로도 계속 하루에 두 끼 씩이나 먹는 풍족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으니 충분히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다 평소엔 한 끼를 통조림 하나로 만족했어야 했지만 오늘은 츄러스로 배부르게 먹을 수가 있으니 이 얼마나 운이 좋은가.

또한 통조림이라도 그리 나쁘진 않다. 스팸 생으로 퍼먹는 것도 먹을 만 하더라고.

그러니 오르카호에 있을 때 먹은 밥은 생각하지 말자 비참해지니까.


"그러고보니 운전도 형님이 하고 요리도 형님이 하고, 바이오로이드 냅두고 인간이 잡일을 도맡아서 하다니 이상한 일이네."


"대신 너희가 총 들고 날 지켜주잖니. 궃은 일은 니들한테 맡길테니 밥 잘 먹고 힘 비축해둬."


"크으 우리 형님 말 이쁘게 하네. 그만 요리하고 형님도 잡숴봐."


리디아가 츄러스를 건네주자 입으로 잡아서 먹어치웠다. 엉엉 츄러스 존맛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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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사령관 얼굴도 비출 겸 쉬어가는 화

미안하다 령관아... 라붕이가 휩노스병 대비책 없이 밖에 던져진다는 전제를 위해 1화에서 억지로 진행하다보니 니가 좀 악당같이 되버렸더라고


참고로 나중에 라붕이랑 사령관 재회하는 날도 올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