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눈을 떴을 땐 어두운 방 안이었다.


"으으... 어...? 뭐야...!?"


자연스레 일어나려 했으나 움직일 수 없다는 걸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은 지금 45도 정도로 비스듬히 세워진 판때기 같은 것 위에 손발이 묶여 고정된 채 차렷 자세로 누워있었다.

본능적으로 구속구를 벗어내려고 몸을 이리저리 비틀던 중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오자 발버둥치길 멈췄다.


"아, 일어나셨군요. 기운도 좋으셔라."


"오메가...!"


트레저는 이제야 자신이 어디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때 매복한 펍헤드에 의해 제압된 뒤 펙스의 본진에 끌려와 이렇게 구속된 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저한테 대든 자는 즉결처형이지만... 당신에겐 알아내야 할 정보가 있기에 일단 살려뒀습니다. 두번째 인간에 관해서 궁금한 게 많거든요."


"흥, 고문이라도 해 볼 테냐? 나한테 그런 건 안통해!"


"각오가 대단하시군요. 하지만 당신이 바이오로이드인 이상 그런 야만적이고 비효율적인 방법을 쓸 필요는 없죠."


오메가는 트레저가 묶여있는 구속장치 옆의 책상 위에서 케이블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헬멧을 집어들었다.


"기억 영상화 장치. 바이오로이드의 두뇌 속 기억 모듈에 직접 접속해서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투영시켜주는 물건이죠."


"이익...! 그 더러운 헬멧 저리 치워 이 개년아!"


구속구를 끊어버리려 다시 힘을 줬으나 소용없는 짓이없다. 오메가는 아무런 저항도 못하는 트레저의 머리에 기억 영상화 장치를 씌우고 작동시켰다.


"당신이 그 인간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참, 두통 조심하세요."


이 말을 마지막으로 트레저는 머리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함께 다시 의식을 잃었다.


*


펙스의 군대가 온 반대 방향으로 무작정 걷다 보니 어느새 나는 바다가 보이는 해안가 도시까지 도착했다. 시꺼먼 망토와 헬멧을 뒤집어쓴 채 시가지 폐허에서 먹을 걸 찾고 있는 중이지만 오늘도 수확이 없다, 누가 먼저 털어간 모양이다.

저기 바다에 가서 낚시라도 해봐야 하나 생각 하다가도 아무런 엄폐물도 없는 해변에 갔다가는 누군가한테 들킬까봐 그러지도 못하고 있다. 안그래도 철충이나 펙스의 정찰기가 있을까 조심스레 움직이고 있는 중이다, 은폐장은 배터리가 한정돼있는 만큼 상시 켜둘 수는 없다.

그렇지만 역시 배고프다. 어디 참치캔 하나 안떨어지나...


데구르르르...


...?

진짜 떨어졌네?

내 앞으로 떨어진 참치캔을 집어들자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 반사적으로 은폐장을 키고 구석진 곳에 숨었다.

나는 금방 그 발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확인할 수 있었다.


"어? 분명 여기로 굴러간 걸 봤는데..."


내 앞에 서 있는 건 스틸라인 군복을 입고있는 갈색 단발머리의 여성, 브라우니였다. 리디아가 아닌, 평범한 브라우니. 옷도 총도 새것처럼 깔끔했으며 얼굴에는 흉터 한 점 없었다.

그녀는 뭔가 찾는 듯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내가 방금 망토 속으로 숨긴 참치캔을 찾고 있는 거겠지.


"브라우니! 물자는 다 실었으니 이제 철수합니다, 빨리 돌아오세요!"


"레후 상뱀, 분명 여기로 굴러가는 걸 봤지 말임다!"


"못찾았으면 그냥 오세요, 안그럼 두고 갈 거에요?"


누군가 브라우니를 부르자 그녀는 참치캔 찾는 걸 포기하고 그쪽으로 가버렸다. 목소리로 보아 브라우니를 부른 건 레프리콘 인 것 같았다. 슬쩍 그들의 뒤를 밟아 밖으로 나오니 바이오로이드가 여럿 모여있는 게 보였다. 브라우니와 레프리콘 뿐만 아니라 노움과 실키까지 있었다. 바이오로이드는 어림잡아 열댓명은 되는 것 같았고 그들 옆에는 물자를 잔뜩 실은 트럭이 4대 서있었다. 뭔가 떠들고 있었지만 멀어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안들렸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웃고 있었다. 만약 오메가의 폭정 밑에서 살아왔다면 저런 표정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저들은 오르카호의 자원 탐색 부대다.


"아직 나에게도 운이란 게 남아있었군..."


이건 오르카호로 돌아갈 기회다. 그곳엔 식량이 잔뜩 쌓여있을테니 가서 한 상자만 훔쳐와야지.

저들이 차에 타고 출발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자 은폐장을 키고 뛰쳐나가서 트럭 짐칸에 몸을 실었다.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슴까?"


"짐이 넘어진 거겠죠, 안전벨트나 메세요."


짐칸에 무임승차하면서 소리가 나긴 했으나 다행히 그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차가 출발하자 예상한 대로 바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 바다 위에 오르카호가 보이고 있었다.


*


오르카호가 정박하고 있는 항구에선 분주하게 차량 선적 중이었다. 내가 실려있는 트럭이 오르카호 안에 들어서자 저들이 짐검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내려서 실내로 들어갔다. 확실이 은폐장이 편하긴 하구나, 대놓고 움직이는데도 들키지 않을 정도니.

퇴출된 지 약 일주일 만에 돌아온 오르카호의 내부는 예전에 봤을 때랑 달라진 게 없었다.


작전은 이러하다. 오르카호 내부 구조는 대충 기억하고 있으니 곧장 자원 창고로 가서 식량이 들어있는 상자를 챙긴 뒤 도로 나가는 거다. 물론 이 안에는 오르카호의 부대원들이 득실거릴 뿐만 아니라 탈론 페더의 감시카메라가 곳곳에 깔려있겠지만 은폐장+뇌파 차단 헬멧 조합이면 괜찮을 거다.


바깥에서 먹을 걸 구할 수가 없으니 다른 방법이 없다. 저놈들이 자원 탐색하면서 내가 먹을 밥까지 싹쓸이해갔으니 솔직히 정당방위다. 나는 은폐장을 킨 채로 유지하며 자원 창고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오르카호 내부가 너무 한적하다, 은폐장을 킨 게 무색하게도 자원창고 문 앞에 도달할 때까지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설마 함정인가? 에이, 설마 그럴리가. 오르카호가 정박까지 했으니 다들 무슨 임무라도 나간 거겠지. 

설령 근처에 사람이 없다한들 카메라는 남아있으니까 긴장을 풀어선 안된다. 내 모습이 찍힌 순간 경보가 울리고 남은 부대원들이 날 잡으러 몰려들 거다.


아무튼 창고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들어가기 전에 창고 문에 달려있는 창문을 통해 안들 들여다보자 금속제 상자들이 잔뜩 쌓여있는 게 보였다.


"이런..."


문제는, 창고 안에 안드바리도 있었다는 점이다. 창문 너머로 남색 머리의 소녀가 상자 위에 앉아서 지 태블릿으로 뭔가 하고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니 다른 애들은 아무도 없더만 왜 하필 쟤는 남아있는 거야?

이유야 어찌됐든 간에 안드바리를 어떻게든 따돌려야 한다. 은폐장으로 투명화한 상태라도 문을 열게되면 필시 저 아이의 시선을 끌며 의심을 사게 될 테고, 안에 들어간 뒤에도 상자를 들어서 망토 안에 집어넣는 걸 못 볼 리가 없다. 그랬다간 안드바리 입장에선 유령마냥 상자가 혼자 공중에 뜨다가 확 투명해진 걸로 보이겠지. 


무슨 뾰족한 수가 없나 고민하며 지금 내가 가진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내 손에 들고있는 좌우좌의 소방도끼, 주머니 속엔 리디아가 비상시에 쓰라고 전에 건네준 발포 콘크리트 수류탄 하나와 오는 길에 브라우니가 떨군 참치캔 하나.

좋아, 작전이 떠올랐다. 나는 아직 따지도 않은 참치캔을 손에 쥐었다. 계획대로 된다면 좋은 거고, 실패하면... 은폐장만 믿고 튀어야지.


*


안드바리는 오늘도 자원 수량에서 누가 빼먹은 게 없는지 체크하고 있었다. LRL과 알비스가 수시로 부식을 훔쳐가는 건 두말할 것도 없이 그녀의 골칫거리였다. 얼마 전에 또 훔쳐가려는 걸 잡아서 혼내준 덕에 최근 한동안 잠잠했지만 슬슬 다시 시동이 걸릴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던 중, 갑작스레 창고의 문이 덜컹하고 열렸다. 화들짝 놀란 안드바리가 문 쪽을 바라봤으나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문만 혼자서 삐걱거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나간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중 창고 밖에서 뭔가 툭 떨어지더니 데구르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안드바리에겐 익숙한 소리였다, 참치캔이 떨어질 때 나는 소리다. 주로 어떤 꼬마도둑이 양손에 참치캔을 한가득 들고 옮기다가 하나가 떨어졌을 때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그 다음 들린 소리는 그것보다 무거운 무언가가 텅 하고 떨어지는 소리. 이건 낯선 소리다. 창고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확인하기 위해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자 복도에 떨어져 있는 물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는 예상대로 참치캔, 다른 하나는 그 꼬마도둑이 들고 다니던 소방도끼.

이 흔적들을 보자 그녀는 어떻게 된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LRL! 또 당신인가요!"


자신이 작업에 한 눈 판 사이 또 그녀가 들어와서 참치캔을 들고 나가다가 참치캔과 소방도끼를 떨어뜨린 것이겠거니 했다. 안드바리는 씩씩거리며 참치캔과 소방도끼를 줏어 LRL을 찾아나섰다.

그리고 안드바리가 복도 코너를 돌아 사라진 뒤, 창고의 문이 스르륵 저절로 열렸다.


*


"이게 아닌데... 아니, 맞긴 한데..."


일부러 소리가 나게 문을 연 뒤 바깥에 참치캔과 소방도끼를 떨어뜨린다. 안드바리는 이 흔적을 보고서 좌우좌가 방금 막 도둑질했다고 믿게 만들어서 자리를 비우게 만든다. 누명 쓴 좌우좌한텐 미안하지만 이게 내 작전이었다.

다만 안드바리가 바닥에 떨어진 참치캔과 소방도끼를 주워가는 건 상정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거 내껀데... 참치캔 따지도 않았는데...


에이씨 됐다, 안드바리가 돌아오기 전에 전리품이나 취하자. 나는 창고에 들어와 두둑이 쌓인 보급품 상자들을 보면서 어떤 상자를 가져갈까 생각했... 잠깐, 진짜로 뭐 가져가야 되지?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 수가 없잖아? 전부 꽁꽁 밀봉돼있어서 맨손으로 하나하나 뜯어 열어보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찍어야 한다. 이런 가챠는 원하지 않았는데.

기껏 하나 챙겨가서 밖에 나간 뒤 열어봤더니 생리대 들어있는 상자 이딴거면 개망하는거다, 여기서 한번 나가면 다시 들어오지도 못해.


식량! 식량이 들어있는 상자는...! 모르겠다! 그냥 제일 앞에 있는 상자 챙겨 가자!

그렇게해서 눈앞의 상자를 집어 망토 안에 잽싸게 숨긴 뒤 창고를 빠져나왔다, 이 안에 식량이 잔뜩 들어있길 빌면서.

마음 같아선 상자 두 개는 들고가고 싶었으나 굶주림 디버프가 걸린 내 체력으론 상자 하나가 한계였다, 어차피 망토 안에 상자 2개 넣었다간 망토가 올라가서 내 발을 감추지 못하게 된다.


이제 보급품 상자를 챙겼으니 바깥으로 나갈 차례다. 상자의 무게 때문에 들어왔을 때 만큼 속도를 낼 수 없어서 복도를 살금살금 걸었다. 들어온 출입구를 향해 돌아가던 중 저 길모퉁이 너머에서 여자들이 수다 떠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오르카호의 바이오로이드다. 들어올 땐 아무도 없더니 왜 하필 나갈 때 이런 장애물이 나타나는 건가. 은폐장을 쓰고 있긴 하나 가까이서 보면 허공에서 일렁이는 게 보인다고 했다, 정면돌파는 무리다. 다른 길을 찾기 위해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치며 반대쪽 길모퉁이로 들어서는 순간...


쿠당!


"흐갸악!"


"히이익!?"


건너편에서 누군가 오는 걸 미처 보지 못하고 왠 금발 여자랑 부딪혀버렸다.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며 상자를 바닥에 떨어뜨렸고, 그 여자 또한 기겁해서 어정쩡한 자세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잠깐, 이 애는 분명...



"...히루메?"


"니, 니놈은 대체 누구냐!? 눈앞에 서있는데도 살아있는 것 같지가 않으니 마치 귀신같구나! 서... 설마, 첩의 혼을 거두러 온 저승사자인 것이냐!? 아직 아사하기엔 이르다고 믿었거늘...!"


"아니... 진정해, 진정해봐 좀."


못 알아볼 리가 없다. 저 금빛 여우귀와 9개의 여우꼬리, 그리고 멈추질 않는 망상 기질까지. 예전에 오르카호에 있을 땐 본 적이 없는데...

가만있어봐, 내가 오르카호에 승선했을 때는 8지역 깨고 얼마 지나지 않은 참이었다, 아직 낙원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았던 때라 메리와 마키나도 없었지.

그 말인 즉슨 히루메가 알래스카에서 오르카호에 몰래 타고 난 뒤 아직 사령관에게 들키지 않은 시점이라는 거다. 그리고 그건 내가 오르카호 대원에게 들킨 게 아니라는 뜻이지. 빨리 얘를 조용하게 만든 뒤 빠져나가면 된다, 내 작전엔 아무 문제 없다.


"히루메, 조용히 하고 들어봐. 난 네 적이 아니야, 오히려 동업자라고 할 수 있지."


"뭐라...? 그게 무슨 말이더냐?"


"나도 너랑 같아, 음식 좀 훔치러 여기 밀항한 도둑 신세..."


"무, 무례하구나! 첩은 도둑이 아니니라! 첩은 그저...!"


"야 야, 목소리 낮춰! 이러다 들키겠-"


"거기 누구 있어?"


나와 히루메 이외의 세번째 목소리가 들리자 우린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고개를 돌리자 아까 그 길모퉁이에서 여자 둘이 걸어나왔다, 몽구스팀의 미호와 불가사리였다.


"앗! 너희 둘! 거기서 뭐하는 거야! 지금 부식 훔치는 거야!?"


미호가 앞장서서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자 불가사리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둘이라고?

은폐장 쓰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보이는... 아.


"부딪히면서 망토를 떨어뜨렸네..."


어느새 내 어깨에서 벗어나 발 밑에 널브러져있던 은폐장을 보고 무심코 입 밖으로 중얼거려버렸다, 그리고 그걸 놓치지 않고 들은 미호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 자리에서 멈췄다.


"그 목소리는... 두번째 인간!?"


"히익!"


완전히 들켰다, 당장 튀어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냅다 주머니에 있는 노란 수류탄을 꺼내서 핀을 뽑은 뒤 미호를 향해 던졌다. 수류탄이 땅에 떨어져 그녀의 발치로 굴러오자 미호와 불가사리는 놀라서 몸을 숙였다.


...그러나 기다려도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그녀들의 앞에 콘크리트 기둥이 하나 생겼을 뿐이었다. 발포 콘크리트 수류탄 하나만으론 복도를 틀어막지는 못하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미호랑 불가사리가 뻘짓하는 틈에 난 상자 챙겨서 냅다 튀었으니까. 둘이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나를 쫓아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야, 거기 서!"


미호와 불가사리가 무기를 들고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달려들자 그걸 본 히루메는...


"엑, 자, 잠깐...! 첩만 두고 가지 말거라!"


...생존본능이 발동한 건지 나를 따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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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저와 라붕이, 쌍으로 고생중

어디서 끊어야할지 애매해서 평소보다 분량 많이 넣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