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이 이끄는 앵거 오브 호드 부대는 어디에서든 싸웠다.


평원에서, 고원에서, 사막에서, 해변에서, 도시에서, 산에서, 늪지에서, 숲에서.


맑은 날에, 폭우가 내리는 날에, 태풍이 부는 날에, 눈이 오는 날에, 안개가 낀 날에.


인간과 싸웠고, 바이오로이드와 싸웠고, 철충과 싸웠다.


쉬웠던 적을 고르라면 너무 많아서 고르기 힘들었지만, 가장 힘들었던 적을 꼽으라고 하면 쉽게 꼽을 수 있었다.


멸망 전쟁에서 싸웠던 철충들.


그리고.


2차 연합 전쟁 당시 알프스 산맥에서 만난 철혈의 레오나가 이끄는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와의 전투는 승리하기 위함이 아니라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 싸웠던 전투였다. 그러했기에 많은 전우를 잃었던 전투.


칸은 그 전투가 있었던 전장을 다시 찾았다.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의 접견 지역. 이득보다는 개발비용이 커서 개발이 안 된 오지에 칸은 발을 내디뎠다.


칸은 이곳에서 전사한 전우들을 떠올렸다.


때는 여름이라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높은 산에는 아직 지난 겨울에 내린 눈이 남아있었고, 산세가 험해서 앵거 오브 호드의 강점인 기동성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든 지형이었다. 겨울이 되어 눈까지 내리면 말할 것도 없었다.


이 땅을 사수하라는 멍청한 명령 때문에 허무하게 죽어간 전우들.


이 땅에서도 오랫동안 장송을 하게 될 것이다.


칸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오랜 기억에 따르면 전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 후에는 주민들이 대피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언가가 남아있을지도 몰랐다.


칸이 기억에 따라 마을로 찾아가니.


“…….”


많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2층 밖에 되지는 않았지만 새로 지은 게 분명한 번듯한 건물도 있었다.


의외의 상황에 잠깐 얼이 빠져있던 칸을 향해 누군가가 다가왔다.


“관광객이신가요?”


이 근처의 전통복장을 입고 채소가 담긴 소쿠리를 옆에 끼고 있는 미녀였다.


“아니.”


“혹 주무실 곳이나 도움이 필요하신 건가요?”


필요하다면 필요하지만……의외의 상황에 칸은 잠시 머리를 굴려야했다.


미녀는 잠시 칸을 보다가 말했다.


“신속의 칸이시로군요.”


또 칸을 알아보는 사람과 만났다.


칸은 열심히 기억을 뒤져 상대가 누군지 떠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미안하군. 그쪽이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괜찮습니다. 기억 못 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미녀는 생긋 웃었다.


“길에서 계속 서서 이야기하는 것도 죄송스럽군요. 저희 집으로 모셔도 될까요?”


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가 개발되는 시대이지만 미녀의 집은 몇백 년 전부터 계속 이어져 내려오는 듯한 벽돌집이었다. 물론 가전제품은 있었지만 동시에 말린 약초나 과일 같은 것도 공존하는, 시대를 전부 품는 듯한 인상을 주는 집이었다.


미녀는 말린 약초로 우린 차와 과일이 들어간 과자를 내면서 말했다.


“입에 맞으시면 좋겠군요.”


“다행히 입맛이 까다롭지 않다.”


그렇게 말하고 칸은 차와 과자를 입으로 옮겼다.


“맛있군.”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성격 때문인지 예의상 하는 말처럼 되어버렸다.


“다행이네요.”


“음. 미안하지만 이름을 알려줄 수 있나?”


“오르페오예요.”


칸은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같다고 생각했다. 오래 살다보면 이것저것 듣게 되는 것이 많으니 들 수밖에 없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확하게 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바이오로이드의 이름이란 전부 어딘가에서 유례 했는데. 칸이란 이름도 유목 국가 군주의 호칭에서 따오지 않았던가.


“그래, 오르페오. 그런데 우리가 언제 만났지?”


칸은 스스로도 너무 직설적으로 딱딱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다. 군에 너무 오랫동안 적을 두고 있었나 보다.


“옛날에 전쟁 중에 만났어요.”


“……미안하지만 몇 년도인지 알려주겠나?”


칸의 삶은 전쟁으로 점칠 되어 있으니 전쟁 중이라고 말해도 알 수가 없었다. 칸의 생 전체라고 말해도 다를 게 없었다.


“아, 죄송해요. 옛날에 이 근처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만났어요. 2108년도였어요.”


2108년. 2차 연합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


칸 자신도 오래 살았지만 오르페오도 만만치 않게 오래 살아온 바이오로이드였다. 어쩌면 칸보다 더.


칸은 주당이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신 다음 날에 느낄 법한 감정을 느꼈다.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앞에 있었다.


칸은 그래서 오르페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르페오는 자신의 차를 홀짝인 후에 말했다.


“이 근처에서 전투를 하셨지요.”


“그래.”


“그때 전투 전에 이곳의 주민들을 대피시키셨지요.”


“……그래.”


칸의 기억 밑에 깔려있던 2108년의 기억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마을 뒤편의 산이 요지가 될 거라 생각했던 칸은 오폭으로 인해서 마을에 피해가 가지 않게 마을 주민들을 대피시켰다.


결과는 실패였다.


마을 주민들은 바이오로이드 따위의 대피 유도를 따르지 않았다.


회사가 정부를 무너트리고, 회사와 회사가 전면전을 벌이는 시대였지만 옛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바이오로이드는 여전히 인간처럼 생긴 도구였을 뿐이었다.


직접 해를 입어보지 않았던 이들은 바이오로이드가 자신들에게 해를 끼칠 거라 생각을 하지도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결국 칸은 그들을 설득하는 것을 실패한 채로 요지에 진지를 만들었다.


“실패했지.”


“네. 그리고 전투가 벌어졌지요.”


기동력과 순간 화력이 생명인 앵거 오브 호드에게 방어전은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칸은 피해가 커지자 전멸을 피하기 위해서 후퇴하기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길은 여러 곳. 그중 가장 퇴로로 적합한 곳은 마을이었다. 엄폐할 수 있었고, 길도 잘 닦여져 있었다.


하지만 칸은 그 길은 선택하지 않았다.


“칸 님의 부대는 왜 마을 쪽으로 후퇴하지 않으셨나요?”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칸은 옛 시대의 군용 바이오로이드였다. 아직 바이오로이드로 인한 민간인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서 노력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칸의 뇌리에는 그 원칙이 단단히 새겨져 있었다.


“저희 주인님께선 그것을 당연시 여기셨어요. 하지만 나중에는 생각을 바꾸시더군요.”


오르페오는 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오르페오는 칸을 이끌었다.




오르페오가 칸을 데려간 곳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묘지였다.


묘지에는 무덤이 여럿 있었는데 모든 무덤은 오래되었지만 최근까지 손을 봤는지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이건…….”


칸은 가장 가까이 있는 무덤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묘비명을 보았다.


‘T-75 워울프 899’


이곳에서 전사한 칸의 전우, 칸이 장송하려던 전우였다.


오르페오는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칸에게 말했다.


“주인님께선 전화에 휩쓸려 옆 마을을 뿐만 아니라 여러 마을, 도시가 사라졌다는 것을 아시고, 칸 님께서 얼마나 저희를 생각해주셨는지 아시게 되시더군요.”


칸이 오르페오를 돌아보았다. 오르페오는 칸을 향해 말했다.


“감사합니다.”


오르페오의 감사 인사가 칸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칸 님 덕분에 저희 마을은 무사할 수 있었어요.”


“……처음부터 우리가 없었다면 피해를 입을 가능성 자체가 없었다.”


“네, 그랬겠죠. 하지만 칸 님의 부대는 우리 마을로 왔고, 칸 님께선 마을에 피해가 오지 않는 방향으로 명령을 내리셨죠.”


오르페오는 먼 곳을 보는 눈으로 말했다. 그녀의 눈은 저 멀고 먼 산이 아니라 먼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주인님께선 바이오로이드가 군인으로서의 도리를 다 하느라 죽어갔는데 그대로 썩게 두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무덤을 만드셨어요.”


칸이 옛 전우를 그리워하는 만큼 오르페오도 옛 주인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로 보아 그 주인이 얼마나 선량하고 도덕적인 인물인지 알 수 있었다.


칸은 묘지를 둘러보았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녀들은 패병(敗兵)이었다. 그러나 패배한 순간에도 그녀들은 군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는 하지만, 살아있는 자들에게는 죽은 자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덕분에 칸의 옛 전우들은 무덤에서 칸을 기다릴 수 있었다.


칸은 옛 전우들의 추억을 기억하는 것으로 그들을 추모했다. 한참 후 칸이 고개를 돌려 오르페오를 돌아보자 오르페오가 말했다.


“칸 님의 부하분들을 추모하시려면 당분간 지내실 곳이 필요하시죠?”


“그래.”


“그러면 당분간 저희 집에서 지내시는 건 어떠신가요?”


“폐를……끼치도록 하지.”




오르페오의 집으로 가는 길. 칸은 오르페오에게 물었다.


“너는 왜 아직도 이곳에 살고 있는 거지?”


“주인님의 명령이 있었거든요.”


오르페오의 말에 칸은 키르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죽은 인간의 명령 때문에 100년 동안 끔찍한 장소를 지켰던 그녀.


“하지만 이번에 사령관의 새로운 명령이 떨어졌는데, 모르나?”


“음. 들었어요.”


“그러면 너는 왜 이곳에 있나?”


“칸 님과 비슷해요.”


“나와?”


“네.”


오르페오는 뒤로 돌았다. 그녀는 칸과 마주한 채로 뒤로 걸으면서 말했다.


“주인님께서 영원한 잠에 빠져들기 전에 내리신 마지막 명령이 있었거든요.”


칸은 오르페오가 묻기를 원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그녀의 원하는 바를 들어줬다.


“그 명령이 뭐지?”


오르페오는 웃으며 말했다.


“자유롭게 살아라.”


“…….”


사령관이 내린 명령과 같았다.


“그래서 자유롭게 살기로 한 거죠. 제 멋대로 주인님께서 남기신 집을 관리하고, 주인님의 물건을 정비하고, 주인님의 무덤을 가꾸고, 아, 덤으로 칸 님의 부하분들의 무덤도 가꾸고요. 그리고.”


오르페오의 눈이 다시 먼 곳으로 향했다.


“멋대로 주인님을 그리워하고.”


“…….”


“그렇게 멋대로 자유롭게 살고 있어요.”


오르페오는 그렇게 말하고 서글프게 웃었다.


“이상한 일이죠? 제 이름의 어원이 되는 오르페오는 죽음의 절대성을 의미하는데 말이죠.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데.”


오르페오의 말을 듣고 나서야 칸은 오르페오가 나오는 신화를 떠올렸다.


오르페우스 신화.


오르페우스는 아내가 죽자 아내를 되찾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간다. 그는 저승의 모든 고난을 뚫고 하데스와 만나 아내를 데리고 돌아가도록 허락을 받지만, 하데스는 이때 한 가지 조건을 붙인다. 저승을 벗어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


오르페우스는 이를 수긍하고 저승을 벗어나고 지상의 입구까지 올라가지만 마지막 한 걸음을 두고 뒤를 돌아봐 아내를 영원히 잃게 된다.


오르페우스의 여성형 이름이 오르페오였다.


“그렇지만……그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몸을 돌렸다.


칸은 오르페오와 동질감을 느꼈다.


누구의 그리움이 더 큰지, 누구의 그리움이 더 간절한지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오르페오.”


“네?”


“혹시 술은 즐기나?”


“음. 가끔 즐기는 정도?”


“그러면……같이 한잔하지 않겠나?”


오르페오가 다시 돌아보았다. 그녀는 칸의 이어질 말을 짐작하고 있다는 듯이 두 눈에 깊은 이해심을 담고 있었다.


“옛사람들을 그리워하는 유물들끼리 같이 술과 함께 그리움을 나누지 않겠나?”


오르페오는 일말의 주저 없이 칸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