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https://arca.live/b/lastorigin/43650148?category=%EC%B0%BD%EC%9E%91%EB%AC%BC&p=1


2편- https://arca.live/b/lastorigin/43656535?category=%EC%B0%BD%EC%9E%91%EB%AC%BC&p=1


3편-https://arca.live/b/lastorigin/43656680



리마토르는 방에 도달하자 우선 침대에 몸을 뉘였다. 자신이 갑자기 인류가 멸망한 세계에서 정신 차린 것도 놀라운 일인데, 부사령관 직을 제안하다니. 분명 무언가 찜찜한 뒷배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역시 그 선택지를 피한 게 정답이었나...”


그 대신 받아낸 연구원 자리는 무척 안전해보였다. 자신이 가진 연구원의 경력을 살릴 수 있기도 했고, 군권을 쥐는 것도 아니기에 사령관의 권위에 도전할 여지가 아예 없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조용히 목숨을 부지하는 편이 자신이 택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수라고 생각하며 리마토르는 몸을 뒤척였다.


“아 근데 진짜 오리지날 포 뭐시기가 뭐지? 생각이 날락 말락 하는데...”


머릿속에서 빙빙 맴돌지만 희뿌연 안개의 형상 밖에 보이지 않는 기억의 윤곽을 명확하게 잡아보려고 했으나, 결국 잡히지 않자 그는 생각을 포기하고 현재 자신의 처지로 방향을 돌렸다.


“그래, 일단 내가 앞으로 뭘 할지부터 생각해보자.


내가 연구했던 게 바이오로이드와 관련된 철학은 맞는 거 같은데... 이게 정확히 무슨 분야였는지가 기억이 안난단 말이지.


오리지날 포 뭐시기랑 관련된 거 같기는 한데, 내가 같이 있던 곳에서 자료라도 나오면 좋으련만...


우선 연구 방향은 이게 아니라 바이오로이드의 존재에 대한 걸로 잡아보자. 바이오로이드 밖에 남지 않은 사회니까 기존의 연구가 어떻든 신경 쓰지 않아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인간이 없으니 인간이 있는 사회에서 바이오로이드의 존재를 조명해도 큰 의미가 없으니까.”


그가 중얼중얼 혼잣말을 이어가던 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자 녹색 단발의 메이드가 그를 맞이했다.


“리마토르 씨인가요? 문 여는 시간이 늦을 정도로 행동이 이렇게나 굼뜰 줄은 몰랐네요.


당신에게 오르카호를 소개해드리라는 사령관님의 명령을 받은 바닐라 A1입니다. 당신 같은 저지능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해드릴 테니 안심하시길.”


그녀의 말을 들은 리마토르는 생각했다.


분명 사령관은 자신을 갈굴 목적으로 이 바이오로이드를 보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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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를 따라 오르카호를 둘러보던 리마토르는 자신이 보는 것들을 기억에 새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앞으로 생활하게 된 곳인 만큼 기본 지리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지만, 사령관 다음으로 큰 명령권을 갖고 있는 자신이 합류하게 된 이상 필시 사령관의 지위에 균열이 갈 것이기에 자신을 고깝게 보는 이들이 존재할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장소를 보는 동시에 마주치는 바이오로이드들이 자신을 보는 시각도 읽어내고 기억에 담아두고자 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완벽하게 읽어내는 건 불가능해. 하지만 웬만한 이들은 표정에서 상대방을 향한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감정을 숨기는 이들도 눈썹과 볼, 입술 근처의 사소한 반응을 통해 어느 정도 유추하는 게 가능하지.


자, 과연 너희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 번 보자고.’


리마토르는 살아남고 싶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안개 속에서 발판마저도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실날 같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형세 판단과 처세술의 확보가 필수였다.


그 첫 단추를 꿰기 위해 그는 자신의 시야각에 들어오는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의 표정에 묻어나는 감정을 읽고자 했다. 때마침 스틸라인이 복귀하여 막 식사를 하러 식당을 빽뺵히 채운 참이었고, 바닐라가 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리마토르는 즉각 머리를 굴렸다.


‘꽤나 큰 규모의 식당인데 전부 채울 정도로 많은 머리 수. 오르카호를 이루고 있는 부대가 몇 개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은 이 정도의 수만으로도 나에 대한 여론을 짐작하는 표본으로 삼기에는 충분해.’


“이 곳이 식당입니다. 소완 주방장의 관리감독 하에 있는 시설로써 사령관님께서도 여기서 식사하십니다. 리마토르님께서도 그 허접한 몸뚱이의 공복을 해결할 생각을 할 정도로 머리가 돌아가신다면 식사시간에 맞추어 이 곳을 방문하시길.”


“네, 알겠습니다.”


그는 바닐라가 하는 말에 답하는 걸 놓치지 않으면서도 주변의 바이오로이드들을 하나씩 관찰하기 시작했다.


‘갈색 머리의 바이오로이드들은 대개 나를 대놓고 바라보는군. 올라가 있는 눈썹과 어렴풋이 대화하는 주변인물과의 대화로 미루어 짐작하기에 저들은 나를 단지 신기한 존재로만 볼 뿐이야.


빨간 머리의 바이오로이드들은 곁눈질이군. 하지만 그게 질투나 경계로 보기에는 어려워. 질투나 경계면 보통 오랜 시간동안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는데, 저렇게 힐끔거린다는 것은 호기심과 흥미에 기인한 것일 가능성이 더 높지.


토끼 후드티를 한 분홍머리 바이오로이드들은... 별 거 없네.


퀭한 눈으로 식사만 깨작이는 걸 보니 이슈보다는 개인의 생존에 더 관심이 많을 것으로 추정돼. 내가 어떻게 활동하든 아주 큰 사건을 치는 게 아닌 이상 저들이 날 예의주시할 일은 없겠어.’


식당을 나오던 그는 얻은 정보를 조합해 다시 계산을 돌리기 시작했다.


‘전반적인 여론은 아직 나를 흥밋거리로 볼 뿐이야. 여기서 괜히 튀는 행동 없이 조용히 묻히는 편이 장기적 관점에서의 생존에 좋은 선택지겠지.’


“왜 그렇게 표정이 굳어 있으신 겁니까? 그 쓸모없는 얼굴이 기본값 복원이라도 된 건가요?”


“아아, 별 거 아니에요.”


바닐라가 자신에게 날리는 독설을 얼버무린 리마토르는 최대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존재감을 없애는 방법을 강구했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로 명령권이 두 개로 쪼개질 수 있다는 것은 곧 자신이 이 곳에서 잠재적인 반란분자로 취급될 수 있다는 것.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를 운명이기에 그는 바닐라가 자신에게 내뱉는 독설에까지 일일이 반응할 여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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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토르의 최우선 과제는 생존. 오로지 그걸 위해 움직이지.

참고로 리마토르(rimátor)는 라틴어로 연구자라는 뜻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