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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30분. 저녁 배식이 시작되기까지 40분가량을 앞두고 주방 인원들은 분주히 뛰어다녔다.


소완의 지시 하에 포티아와 아우로라가 준비된 식사들을 데우고, 인원에 맞게 배식할 수 있도록 양의 분배를 했으나 그 날은 약간 다른 점이 있었다. 평소에는 다른 인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사령관이 그녀들에게 먼저 찾아온 것이었다.


“소완, 거기 있어?”


“무슨 일로 소첩을 찾으신지요?”


사령관의 부름에 응한 그녀가 들고 있던 국자를 내려놓고 주방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고된 주방 일을 매일하면서 살아감에도 늘 깔끔한 하얀 조리복을 유지하는 소완의 성실함을 치하하기 위해 사령관은 칭찬을 건넸다.


“언제나 성실하게 일하네. 대단해 소완.”


“후후, 주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오늘은 특식을 드려도 되겠군요.”


소완은 상투적으로 건넨 말이었으나, 사령관은 뜻밖에 정곡을 찔렸다는 생각에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놀랍네, 그렇게 티가 났어?”


“...진짜셨습니까. 그런 일이라면 좀 더 일찍 말씀을 하시는 편이-”


“아니, 너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번째 인간이 발견된 건 때문에.”


‘두 번째 인간’이라는 말이 사령관의 입에서 나오자 소완은 방금까지도 웃던 눈살을 찌푸리면서 그의 말을 받았다.


“제게 주인은 한 분뿐입니다. 그 분을 섬기란 말씀은 하지 않으셨으면 하는군요.”


“걱정 마. 그런 말을 하러 온 건 아니니까.


원래대로라면 한동안 두 번째 인간의 존재를 감춰놓고 안전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려고 했는데, 오늘 하루에 보여준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안전하다고 판단되었어.”


“그렇다고 하더라도 소첩은 조금 더 지켜보는 편이-”


“바로 그거야.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해.”


사령관의 말을 들은 소완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칼 쓰는 일이라면 정원 일을 하는 리제에게 맡겨도 될 건데, 굳이 요리를 하는 자신의 손을 빌리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주인의 뜻이라면 따를 의향은 얼마든지 있었으나 그녀는 자신보다 더 적임자가 있는데 왜 그런 요청이 자신에게 들어오는지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뭔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만, 일단 칼 쓰는 일은 아니야.”


“아, 역시 그렇습니까.”


“인간이 가장 경계심을 푸는 순간 중 하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지. 저녁 먹기 직전에 두 번째 인간의 존재를 공표할 테니, 모두가 보는 식사시간에 그 자와 만찬을 하며 속내를 파헤쳐보는 면접을 해보려고 해.”


“알겠사옵니다. 주인께 어울리는 만찬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고마워. 갑작스런 부탁이라 미안하네.”


“괜찮사옵니다. 최선을 다해 그 자의 경계를 모두 풀 수 있는 요리를 만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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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이 소완에게 식사를 주문한 시각, 리마토르는 자신의 방에서 ‘정의론’을 묵묵히 독파하고 있었다. 경호와 감시를 위해 들어온 컴패니언들도 페로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미 달콤한 잠에 빠져 든 지 오래였다.


“.....”


어색하다 싶을 정도로 심한 침묵이 감도는 공간 속에서 페로는 자신이 바라보는 저 남자가 학자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보기에는 벽돌이나 다름없는 800쪽 두께의 논문을, 그것도 영어로 된 걸 저렇게 집중해서 읽는 건 저 분야를 제대로 파려는 이가 아닌 이상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읽은 논문의 장수가 절반을 넘겼을 쯤, 리마토르는 마지막으로 읽은 곳에 종이를 접어 만든 임시 책갈피를 꽂아놓더니 페로에게 말을 건넸다.


“페로, 혹시 화이트보드랑 보드 마카가 있으면 갖다줄 수 있나요?”


존댓말에서 반말로 갔다가 다시 존댓말로 돌아온 그의 말투를 들으며, 페로는 역시 감정에 따라 보여주는 면이 급격히 바뀌는 인간은 아직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대꾸했다.


“리마토르님, 화이트보드와 보드 마카는 오르카 호 내부에서도 귀중품입니다. 종이와 펜을 사용해주시죠.”


물론 거짓말이었다. 필수품도 아닌 화이트보드와 보드 마카가 귀중품일리는 없었고, 아이들의 놀이방에도 비치된 만큼 보급량도 넉넉한 편이었다. 하지만 페로는 그 작은 방심이 크나큰 피해를 부를 거라 경계하며, 그가 하려는 모든 행동에 최대한 제약을 걸고자 했다.


거절의 답이 돌아갔음에도 리마토르는 크게 상심하지 않았다. 그 대신 A4용지 여러 장을 벽에 붙이더니 볼펜을 들고 혼잣말을 했다.


“힘 안들이고 닿기만 해도 써지는 보드마카가 확실히 편하긴 한데.”


그러고는 빠르게 무언가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얀 공백의 A4용지들이 글자로 채워지는 모습을 보는 페로는 그가 대체 무엇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으려는 듯, 리마토르는 말문을 열었다.


“원래는 말 안하는 편입니다만, 이렇게 머리가 팽팽 돌아갈 때는 말하면서 안 쓰면 잊어버리니 페로 씨께 특별히 말씀드리죠.


정의란 무엇인가요?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상가들이 이 질문에 답을 달고자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를 강자의 이익이라 말했고, 중세의 종교 철학자 아퀴나스는 신의 뜻에 따르는 것을, 근대의 철학자 벤담과 밀은 최대 다수의 이익을 정의로 삼았죠.


이처럼 정의가 무엇인지는 해석이 전부 갈립니다. 멸망 전쟁이 벌어져 인류가 멸절을 향하는 그 순간까지도 답을 찾지 못했죠. 하지만, 멸망 이전의 인간들이 외친 ‘권리’가 무엇인지를 고민해보면 제법 괜찮은 답이 보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정의는,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입니다. 실로 당연해보이지만,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시대를 관통하는 혜안이죠. 노예제가 폐지된 이유와 사회복지가 강조되기 시작한 이유 모두 경시되는 약자들의 목소리를 인정하고 그들의 몫을 보장해주자는 움직임이 생겨난 것이니까요.


이 주장을 처음 펼친 게 1971년의 정의 철학자 존 롤스입니다. 제가 읽은 A Theory of Justice, 다시 말해 <정의론>을 쓴 저자이기도 하죠. 롤스의 주장이 정의 철학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이유가 위에 빨간색으로 칠한 말을 꺼내서가 아닙니다. 롤스는 정의가 성립하기 위한 원칙도 함께 제시했거든요.


모든 이가 동등한 기본적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정의의 제1원칙.


가장 불리한 이에게 이익이 돌아갈 수 있는 차등은 인정되는 상황을 전제로 했을 때만 사회적 지위에 접근할 권리가 평등하게 부여될 수 있다는 정의의 제2원칙.


간단히 말해 누구나 동일한 출발선에 서야하며, 충분한 노력이 있다면 원하는 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약자들이 무시되지 않도록 그들의 권리를 챙겨야한다는 것이죠.


동면되기 전의 제가 정의론을 연구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바이오로이드의 등장으로 인간이 대량 실업당해 그 존재가치를 잃어가고, 빈부격차가 극에 달해가는 사회에 가장 필요한 철학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동시에 한 가지 질문을 더 풀고 싶었습니다. ‘바이오로이들도 이 정의의 원칙들을 적용 받을 수 있는가?’라는 주제 말이죠.”


리마토르는 말을 잠시 멈추더니 펜을 종이 위에서 떼고 자신이 쓴 걸 쭉 읽어보았다. 눈으로 두어 번 훑은 그는 흡족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꽤나 찾아볼 것들이 많았습니다.


바이오로이들이 인간에게 호감을 갖도록 강제한 에머슨 법이 모든 이의 동등한 자유를 보장하는 정의의 제1원칙에 위배되는가,


바이오로이드라는 존재가 인간과 갖는 차이점은 무엇인가,


바이오로이드가 애시당초 인간은 맞는 건가.”


점차 리마토르가 하는 말이 구 인류와 다를 바가 없어지자 페로는 발톱을 꺼냈다. 자신의 단분자 클로라면 단 한 번에 저 인간을 썰어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완벽한 기습의 때를 노렸다.


그런 그녀의 위협이 있든지 말든지, 그는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자신이 쓴 글을 보며 말을 계속했다.


“이런 연구가 진행되던 중에서 휩노스 병이 퍼져 인류가 대폭 감소하기 시작했고, 저 역시 휩노스 병의 예외는 아니었죠. 그래서 동면에 들어간 겁니다.


그때 끝마치지 못한 연구를 이번에는 다 마쳐야겠어요. 바이오로이드를 인간으로 볼 수 없다는...”


페로는 더 이상 들어줄 것도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향해 단분자 클로를 휘둘렀다. 오른쪽 목덜미에서 시작해 왼쪽 옆구리를 관통하는 공격은 그를 단 한 번에 고깃덩이로 만들 터였다.


그녀 스스로도 완벽한 기습이라고 자부했건만, 리마토르는 고개를 뒤도 돌리지 않은 상태에서 재빠르게 몸을 왼쪽으로 던졌다.


단 0.5초 차이로 그녀의 공격이 아슬아슬하게 그를 빗겨나갔고, 그녀의 공격이 닿은 자리에는 리마토르를 대신해 찢어발겨진 종이만이 나풀거렸다.


“말도 안돼...”


오리진 더스트로 강화되었다는 보고를 듣지도 못한 평범한 인간이 자신의 공격을 피해냈다는 것에 경악한 페로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찢어진 종이 한 조각을 잡아든 리마토르는 페로를 향해 몸을 돌리더니 말문을 열었다.


“당신이 저를 감시하고 사살까지 염두에 두는 이상 저를 공격할 거라는 건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보드마카를 갖다달라는 간단한 요청에도 비협조적으로 나온 걸 보면, 당신은 분명 제가 구 인류와 비슷한 모습을 아주 조금이라도 보이는 순간 저를 죽이려 들 거라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죠.


또한, 당신이 사용하는 무기가 클로임은 아까 저를 위협할 때 확인했습니다. 클로는 찌르는 것보다 베는데 특화된 무기죠. 다시 말해 저를 죽이기 위한 공격은 정 중앙에서 찌르는 것보다 특정 방향으로 길게 직선을 그리는 방식이 될 거라는 겁니다.


그럼 어디를 공격해야 단 한 번에 보낼 수 있을까요? 급소 부위겠죠. 경호원인 당신이 인간의 급소가 어디인지 모를 리는 없을 테니, 인간의 급소인 목과 심장, 간과 복부를 공격할 겁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즉사를 원하니 과다출혈로 죽는데 시간이 걸리는 간과 복부보다는 생명활동에 필수적인 목의 호흡기능과 심장을 파괴하려고 하겠죠. 즉, 공격은 목과 심장을 한 번에 공격할 거라는 겁니다.


목과 심장을 한 번에 공격하기 위한 방법은 3가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베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베냐, 아니면 위에서 아래로 긋느냐. 어떤 방법을 택하더라도 한 쪽 방향으로 예측하고 클로의 공격 범위 밖으로 몸을 피하기만 한다면 피할 수 있는 공격입니다. 물론 어떤 방향으로 공격할지는 몰랐으니 저도 이건 찍어 맞춘 겁니다.


당신이 클로를 꺼내는 소리를 들려주었을 때부터 저를 공격할 의사가 있음은 확인했고, 행동까지 옮길지 확인해보고자 일부러 자극적인 말을 한 뒤 몸을 피했는데 실제로 공격당했군요. 당신이 저를 향해 발걸음을 떼는 순간에 맞추어 움직였으면 100% 피하지 못하고 당했을 겁니다. 이렇게 공격전에 미리 움직였으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거죠.”


자신을 조롱이라도 하듯이 장황하게 설명해주는 그의 모습에 페로는 자신의 모든 것이 꿰뚫리는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리마토르는 그녀의 공격으로 찢어진 종이 뒤로 나타난 갈라진 벽을 보고 나직히 경악했다.


“...아무래도 맞았다면 제 생각 이상으로 더 잔혹하게 죽었겠군요.


제가 이렇게 말해도 저를 죽이려고 하시겠으나, 확실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바이오로이드도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골격과 금속 코팅된 중추신경처럼 일부 신체적인 차이를 제외하면 모든 부분에서 생물학적 인간과 동일하니까요.


하지만, 바이오로이드가 ‘인간다움’을 갖추고 있는지는 확실하게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그 연구가 진행되던 중도에 동면에 들었거든요. 그걸 이번 기회에 이어갈 생각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아직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페로와 눈을 마주치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분명 좋은 표정이었으나, 페로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며 풀린 다리에 힘이 돌아오지 않는 것만 같았다.


“음, 벌써 6시네요. 저녁 먹을 시간이 된 거 같으니 식당으로 이동해야겠습니다. 안내해주시겠어요?”


리마토르는 그렇게 말하며 소동에도 일어나지 않고 잘 자던 하치코와 펜리르, 포이와 스노우 페더를 깨우고 문밖으로 나갔다. 비몽사몽하던 상태에서 정신을 차린 하치코가 무슨 일이 있었냐는 걱정 어린 물음을 한 후에야 간신히 일어난 페로는 어떻게든 저 인간을 죽이지 않으면 필시 사령관이 위험해질 거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다시 클로를 휘둘렀다.


“죽어버려!!!!”


“언니!!”


그 광경에 다른 컴패니언들은 전부 경악하여 그녀를 막아 세웠다. 페로는 저 인간을 죽이지 않으면 사령관이 위험하다며 악을 썼으나, 전후 상황을 알지 못하는 컴패니언들은 왜 페로가 그렇게 반응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컴패니언 내부에서 확고한 신뢰를 받는 페로가 그런 과민 반응을 보일 정도로 리마토르가 큰 문제를 저질렀으리라고 예측했다.


“페로 언니가 이렇게 반응할 정도라니...”


“두 번째 인간은 포이의 주인이 될 수 없었어요.”


“주인님께 즉각 보고해서 제거해야해!”


페로로부터 리마토르가 식당으로 간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녀들은 그가 현재 공식적으로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음에 집중했다. 오르카호의 거의 모든 바이오로이드가 모일 저녁 시간의 식당에 도착해 존재가 알려지기 전에 사령관에게 구두 보고를 올리고, 그를 위험 분자로 판단하여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결정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사령관의 목소리가 함내 전체에 스피커를 타고 퍼졌다.


“아아, 사령관입니다. 오늘 두 번째 인간이 합류하였습니다. 저녁 식당에서 볼 예정이니 오늘 저녁 식사는 환자와 부득이한 사정이 있는 자를 제외하고 모두 참석해주길 바랍니다.”


사령관의 공언으로 두 번째 인간의 존재가 공표된 순간. 이제 그를 사살하면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게 확정되자 그녀들은 일동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 침묵을 깬 건 페로의 한 마디였다.


“.....망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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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존 롤스의 정의 철학에 대한 내용 일부가 들어갔어. 최대한 쉽게 핵심만 짚어보려고 했는데 제대로 전달 될지 모르겠네.


참고로 리마토르가 페로의 클로를 피하는 걸 보고 인간이 가능한 게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공격한다는 걸 인지하고 피한 게 아니라 공격이 들어올 거라는 '예측'하에 피하려고 한 게 된 거야.


그러니 만약 페로가 공격하지 않았다면 자기 혼자 말하다 말고  옆으로 펄쩍 뛰는 기행을 했을 거란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