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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 이 서류 좀 그쪽 책장에 꽂아줄래?''


''공간 없습니다. 차라리 이쪽 서랍 안에 넣는게...세상에. 이게 다 뭡니까?''


책장 밑에 달린 뻑뻑한 서랍을 열자, 먼지 낀 종이뭉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또다른 서류였다. 심지어 내가 지금 들고있는 것보다 더 두꺼운.


''그거요? 아마 공방에서 그레고르 씨가 결제한 서류일걸요?''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왜 결제된지 넉 달이 지난 서류가 아직도 여기에 박혀있는 겁니까?''


''그건...그...심심할 때 읽어보려고...''


''...''


말을 말자. 한 주인님은 서류라면 학을 떼시더니, 다른 주인님은 중증 서류 호더(hoarder)이신 모양이다. 정말 완벽한 균형이 아닐 수 없다. 죽여주는군. 일단 여긴 놔두고, 지금 들고 있는 서류부터 정리하는 편이 낫겠다. 급한 대로 옷장에라도 넣을까?


''주인님, 라비아타 언니가 곧 이쪽으로 오신대요! 서류는 대충 쑤셔넣고 복장부터...잠깐, 바닐라! 그쪽 옷장은 열지 마!''


''엥?''


옷장의 문고리를 잡고있는 나를 보자 콘스탄챠 언니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만류했지만, 아쉽게도 이미 한 발 늦은 모양이다. 살짝 벌어진 문 틈 사이로 무언가가 주르르 흘러내렸고, 이윽고 바닥을 뒤덮었다. 그 정체는 다름아닌...


''...서류? 이게 왜 여기 있습니까, 주인님?''


''말하자면 긴데...''


주인님이 쭈뼜거리며 입을 여시려는 찰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들어가도 될까요?''


''라, 라비아타 언니에요! 주인님, 빨리 복장을...아, 근데 서류는 또 어떡하지? 이, 일단 넥타이부터 매고 생각하죠!''


콘스탄챠 언니는 허둥대며 어떻게든 준비를 끝마치려 했지만, 넥타이를 매어드린다고 해놓고 주인님의 목에 먼지털이를 들이대는 걸 보니 아무래도 조금은 더 걸릴 듯 하다.


''개판이 따로 없군요...''


                                                                                               


한적한 복도에 가벼운 노크 소리가 메아리친지 몇 분. 슬슬 다시 노크를 해볼까 싶던 찰나, 문 건너편에서 잔뜩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 들어오세요!''


남자의 목소리인 걸 보니 아마 마리 대장님이 예전에 말씀해주신 인간님 중 하나일 것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었다. 여기서는 첫인상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말이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몇 가지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 방 한가운데, 책상에 긴장한 채 앉아계시는 10대 정도의 소년. 그 옆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고 있는 콘스탄챠. 그리고 방 구석의 옷장을 등지고 뭔가 불만이 많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바닐라. 내가 이 방에 들어서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물어서 좋을 건 없으니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인간님. 전 라비아타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그, 오르카의 사령관...사령관? 함장? 어느 쪽이지?''


''사령관이요, 주인님.''


''그, 사령관을 맡고있는 프란츠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프란츠 주인님. 다른 자매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계실 것 같긴 하지만, 얼마 전까지 바이오로이드 저항군의 지도를 맡고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물어보실 일이나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그렇게 말하고는 눈 앞에 앉아있는 사령관님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마리 대장님의 말씀대로 관자놀이 부근에 큰 철충 감염이 반점마냥 나타나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크기가 더 크긴 했지만, 일단은 예상했던 바다. 문제는 또다른 한 분의 인간님인데...이 방에는 계시지 않은 건가?


''전에 마리 대장님에게 들은 바로는 또다른 인간님이 계신다고 했는데, 그 분은 어디 계시죠?''


''...''


''...후우.''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프란츠 님과 콘스탄챠는 고개를 숙였고, 바닐라는 아예 한숨까지 내쉬었다.


''혹시 제가 괜한 이야기를...?''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니긴 한데...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격리 때문에 다른 곳에 계십니다. 공방에.''


격리? 인간님을?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잠깐만요, 제가 이해가 잘 안돼서 그러는데, 설명을 좀 자세히 해주실 수 있나요?''


''...일단 거기 소파에 앉으세요. 콘스탄챠 씨, 라비아타 씨에게 차 한잔 드릴 수 있을까요? 이야기가 좀 길어질 거 같아서요.''


                                                                                               


어...이걸 어디서부터 설명드려야 하나? 일단, 라비아타 씨를 구출하기 위해 저희가 대규모 작전을 펼친 건 이미 들으셨죠? 네, 그거에요. 프레데터랑 언더왓쳐 둘이 지하에서 날뛰던 그 작전.


자세히 설명하면 너무 길어지니 짧게 설명하면, 저와 마리 씨, 레오나 씨의 지휘로 언더왓쳐 한 기를 파괴했고, 또다른 사령관님...그러니까 그레고르 씨가 코코와 함께 남아있던 언더왓쳐 하나랑 프레데터를 해치우는 데 성공했죠. 진짜에요. 거짓말 같이 들린다는 건 저도 인정하지만요.


어쨌든, 그렇게 해서 적도 다 처리했고, 시설 밖에 조금씩 몰려들던 철충도 다 처리해서 아군 사망자 없이 작전을 끝마치긴 했는데...완전히 손실이 없었던 건 아니었죠. 언더왓쳐와 프레데터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희생이 조금 있었거든요. 근데 그게 그리 원만하게 처리가 되지 않아서...


네? 어떻게 처리를 한 거냐고요? 그게...


                                                                                               


''어쨌든, 그렇게 해서 코코가 언더왓쳐를 처리, 내가 프레데터를 처리했다 이말이지. 뭐, 그 와중에 내 외골격, 그러니까 토미 워커 버전 외골격이 완전히 던X 도너츠1)가 돼서 고철이 되기는 했지만.''


''...''


''표정이 왜 그래, 벌레라도 씹은 거 마냥. 혹시 던X 말고 크리스X 크X2) 쪽이 취향인거야? 뭐, 개인 취향은 존중한다만.''


''...지금 말이죠. 말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뇌가 오버플로우 된 느낌이에요.''


''괜찮냐? 다시 처음부터 설명해줄까?''


''그러니까...지금 그 설명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다고요!''


''어우, 깜짝이야.''


''뾰족한 수가 없었다는 건 그렇다고 쳐요. 왜 마지막에 그런 식으로 마무리를 지은 건데요? 어떻게 하면 언더왓쳐의 입자포에 사이좋게 관통되는 작전이 떠오르는 건데요? 왜? 상황이 어땠길래? 애초에 뭘 어떻게 해야 그런 작전이 최선의 방안이 될 정도로 상황이 꼬인 건데요? 게다가 그 작전이라는 것도 무슨 치밀한 계산으로 나온 것도 아니고 그냥 감으로 떠올랐다고요? 감만 믿고 지금 그 자폭작전을 실행하신 거예요? 소수라도 지원군을 요청하거나 장비를 지원받자는 생각은 안하신 거예요? 아니, 우연찮게 조종석이 언더왓쳐가 조준한 곳보다 낮아서 무사히 살아오신 건 다행이라고 쳐도, 그것 때문에 코코가 얼마나 안절부절 못했는지 아세요? 애초에 결과가 좋았다는 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잖아요, 그레고르 씨가 무슨 킹 크림슨3)도 아니고!''


''워, 워. 숨 쉬어, 숨.''


''...후우...''


''그렇지. 심호흡 하고. 물 한잔 할래?''


''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그나저나 젊은 애들은 기운도 좋아. 그렇게 말도 쏟아낼 수 있고. 두 시간 전에 바닐라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 걘 한술 더 떠서 중간중간 매도도 같이 날리더라고. '이 세상 작전이 아니다'4)라는 둥, ''던전 크롤'의 '좀'5)이냐'라는 둥. 하여간 대단해, 걔도.''


''...''


''아, 말이 나온 김에. 코코는 어때?''


''자기 방에서 쉬고 있어요. 잔뜩 토라진 채로. 누구누구 씨 덕에 말이죠.''


''이따가 한번 보러 가야겠네.''


''간식이라도 좀 챙겨가세요.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조언 감사. 그 외에 더 할말은 없어? 다 한 거야?''


''없어요. 더 있다고 해도 말할 힘도 없고.''


''오케이, 그럼 내 차례. 자, 받아.''


''뭐에요, 이건? 쇳조각?''


''프레데터의 부품이야. 시체에서 뜯어온 거지.''


''?!''


''너나 나나 피곤할 테니 용건만 말할게. 이걸로 새 외골격을 만들까 생각 중이야. 재료가 재료다보니 꽤 좋은 물건이 만들어질 것 같더라고. 잘만 하면 프레데터의 성질도 어느 정도 따라할 수 있을지도 몰라. 공방 인력들은 고생깨나 하겠지만.''


''너무 혹사시키는 거 아니에요?''


''걱정 마. 자원하는 애들만 받고 있으니까. 보수도 준비해놨고. 네 허리에 달려있긴 하지만.''


''네?''


''그냥 내가 알아서 하겠거니 해. 자, 본론으로 돌아와서, 포츈 왈 이걸 이용해서 외골격을 만드는 건 꽤 위험하다고 하더라고. 가능하면 지난번처럼 뭍으로 올라가 만들고 싶지만, 지금은 싸울 병력도 얼마 없으니 올가갔다 공격이라도 받으면 바로 나가리고, 그렇다고 계속 기다리자니 언제 이 재료가 변질될 지 모르는 일이잖아. 갓 잡았을 때 손질해야지.''


''프레데터의 시체를 무슨 횟감마냥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굳이 따지면 '몬스터 헌터'6) 비슷한거지만. 쨌든, 그래서 이 작업은 공방에서 하기로 결정했어. 걱정 마, 안전장치는 다 제대로 있으니까. 뭐가 많이 필요하기는 한데, 그건 내가 다 준비할 거고, 넌 이쪽만 읽으면 돼.''


''어디...'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경비 인력을 제외한 대원은 프란츠(이하 을이라고 칭함)가 지정한 위치에서 대기하도록 함.'? 이게 무슨 소리에요?''


''뭐, 간단히 말하자면...격리지.''


                                                                                               


''...이렇게 된 이야기에요.''


프란츠 사령관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멋쩍게 웃으셨다.


''그럼 방금 말씀하신 '격리'는...''


''네. 격리'당한' 거에요. 저희가. 아마 그레고르 씨를 직접 보시는 건 외골격의 제작이 끝난 뒤에나 가능하실 걸요?''


''...''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군요. 제 주인님이 그럼 그렇죠.''


''아하하...차라도 한잔 더 들겠어요, 언니?''


                                                                                               


    패러디 목록    
1) 도넛 프랜차이즈 '던킨 도너츠'


2) 도넛 프랜차이즈 '크리스피 크림'


3) 만화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 등장하는 능력. '이 세상엔 『결과』만 남는다!'라는 능력인데 자세한건 필자도 모른다.


4) 과거 레쓰비 광고 문구


5) 게임 '던전 크롤'에 나오는 혼돈의 신. 플레이어가 리스크 높은 행동을 취할수록 좋아하며, 축복을 내려줄 가능성이 높아진다.


6) 게임 '몬스터 헌터' 시리즈. 작중 사냥한 몬스터의 소재로 새 무기와 방어구, 장신구를 만든다.


이제 6지 끝나고 몸 바꾸는 장면만 처리하면 지고다.


지난주 토요일에는 다른 일정으로 인해 업로드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근데 어째 다음주 토요일도 제때 업로드하지 못할 거 같아 미리 사과드립니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