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시죠. 언제까지 그렇게 주무시기만 할 겁니까.


유난히 무거운 눈을 뜨자, 단발머리 메이드 소녀가 못마땅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녀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는 그에게 옷을 건넸다.


"왜 잘 하시다가 종종 늦잠을 주무시는지 모르겠군요."


"…."


"부디 예전의 허접한 때로 돌아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남자가 순간 눈을 들어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굳어 있자, 소녀는 당황했다. 본의 아니게 말버릇이 나쁜 그녀였다. 자칫 주인의 심기를 거슬렀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다행히도 남자는 곧바로 웃는 낯을 지었다.


"하하하, 미안해. 컨디션이 나빴나 봐."


"…그런 거라면 다행입니다."


"바닐라가 깨워주는 날이라 마음이 느슨해진 걸지도 모르지."


"닭살 돋습니다."


바닐라는, 남자가 화내지 않은 듯해 안도하면서도 겉으로는 톡 쏘았다.


그러나 바닐라가 방을 나선 직후 남자의 웃음기는 다시 사라졌다.


바닐라에게 악의가 없음은 잘 안다. 알고 지낸 지도 벌써 수 년, 그녀와는 친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독설만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 오늘처럼 컨디션이 더욱 저조한 날에는.


어쨌든 그로서는 바닐라 같은 메이드만 신경쓸 순 없었다.


한 군대를 이끄는 사령관이자 마지막 남은 인간이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바이오로이드와 로봇들이 그를 돕는 중이라지만 그가 신경쓸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우선 그날은 바이오로이드 생존자들의 보급과 주거지 마련 문제로 더욱 일감이 늘어나 있었다.


"주인님. 힘드시다면 제가 처리할게요."


비서가 한마디 했다.


"아니야, 알파는 바쁘잖아. 내가 선택한 난민이니까 내가 해결해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공연히 일거리만 늘어난 것 같아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난민을 받지 않을 것을 그랬나.


그런가 하면, 군사 지휘관 바이오로이드와 작전을 세우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이날 새로운 작전을 수립하는 자리에서 지휘관들은 앞다투어 자신을 써 달라고 나섰다.


실은 이것도 은근한 골칫거리였다.


모두들 유능할 뿐더러 자존심까지 강해서, 어느 한 명을 소외시키는 것은 곤란했다.


바이오로이드라고 해도 공명심에 불탄다는 점은 인간 지휘관 못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들은 경쟁을 할 뿐만 아니라 서로끼리 파벌을 나누는 경우도 상당했다.


그렇다고 작전 때마다 모든 지휘관들과 부대를 출동시킬 수도 없었다. 병력과 자원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회의 중에 철혈의 레오나 소장이 손을 들었다.


"사령관. 이번은 마리의 부대가 아니라 우리 발할라가 나설 때라고 생각하는데. 지형도 그렇고, 무엇보다 마리 쪽은 전번에 실패했으니까."


공군을 맡은 멸망의 메이도 질세라 나섰다. 공명심으로 치자면 레오나에 뒤지지 않는 그녀였다.


"육군이 실패했는데 또 육군을 내세운다고? 이번에야말로 이 몸이 나설 차례 아니야?"


"우리 포병대와 아머드 메이든을 대량 투입해서 화력전을 펼치는 건 어떨까. 그 편이 확실하겠지."


"탄약의 소모는? 준장은 화력 밖에 생각이 안 들어?"


"여기서는 빠르게 치고 빠지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신속의 칸의 말에 레오나가 발끈했다.


"그쪽에 맡겼다가 뒤치닥거리는 누가 하라고? 우리 발할라가?"


노련한 칸은 넉살 좋게 웃었다. "뒤치닥거리라니. 연계 작전이라고 하는 편이 옳지 않겠나."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언쟁이 격화될 조짐을 보이자 남자는 얼른 손을 들어 막았다. 뭐든지 시끄러운 건 질색이었다.


"그만. 말다툼은 그만 둬. 작전 부대는 내가 정할 테니, 부대가 정해지는 대로 세부 계획을 세워 주길 바래. 계획을 잘 세우는 쪽한테도 공을 나눌게."


물론 날 선택할 거라고 믿어. 지휘관들은 다들 그런 표정이었다.


그녀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남자는 골머리가 아파올 것 같았다. 십중팔구 선택하지 않은 쪽 지휘관을 달래야 할 터였다.


"달랜다, 라."


지휘관들이 물러가고, 넓은 사령실에 홀로 남은 그가 중얼거렸다.


멸망 전의 군인들이라면 바이오로이드를 설득하기보다는, 단순히 명령해서 작전을 진행했을 것이다.


굳이 어려운 길을 걷고 있는 건 아닐까. 그는 때때로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그녀들이 아무리 장군이라고 하지만, 결국 바이오로이드의 계급이란 군견이나 마찬가지일 터인데.


저도 모르게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던 그는 흠칫 놀랐다.


바이오로이드를 인간처럼 대우해 주기로 맹세하지 않았던가. 그는 얼른 가슴 한켠의 검은 생각을 밀어냈다.


지휘관들이 물러간 뒤에도 여러 대원들이 남자를 찾아와서 이런 저런 부탁을 하거나, 같이 시간을 보내길 원했다.


바이오로이드란 본래 인간에게 호의를 품고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러니 바이오로이드를 아껴 주기까지 하는 남자는 대원들의 우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몸은 하나였으므로 모두와 연인이 되어 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평소였다면 몰라도 오늘만은 장단에 맞춰 줄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무리한 부탁은 듣기 좋은 말로 거절하고, 장난을 치거나 놀리는 대원한테는 화보다 미소로 대신했다.


허나 그 또한 정신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 * *



저녁 나절이 되어서야 일이 끝났다. 남자는 홀로 함장실에 들어와 벌렁 누웠다.


공식적인 일정은 끝났지만 그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밤의 할 일이.


지구의 유일한 인간이자 저항군의 청일점으로서, 그는 수많은 바이오로이드와 하룻밤을 보내 주고는 했다.


명목은 멸망한 인류의 재건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굳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성적인 쾌락도 하루 이틀이지, 그 짓도 매일 하면 질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애초에 정말로 번식을 위한다면 그의 정자만 채취해 인공 자궁에서 수정을 시키는 편이 더욱 빨랐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바이오로이드와의 잠자리는 일종의 봉사활동이었다. 그가 소중히 여기는 대원들을 위한 서비스인 셈이다.


이날의 잠자리 순번은 그의 충신이자 좋아하는 블랙 리리스였다.


호출을 받은 리리스는 부리나케 달려왔다.


"착한 리리스가 왔어요, 주인님!"


막 달려온 차림새는, 아름답고 청순한 미모와는 딴판이었다.


속이 비치는 메이드복에 결박을 해온 건 물론이고, 채찍과 구속구 등의 SM도구까지 가지고 온 것이 아닌가. 과연 사디스트이자 마조히스트인 그녀다운 모습이었다.


"뭐 하고 놀까요? 뭐 하고 놀까요?"


남자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가 쌓인지라, 마침 잘 됐다 싶었다.


그는 칵테일을 한 잔 들이키더니, 리리스를 거칠게 쓰러뜨린 다음, 채찍과 회초리를 들고 마구 갈겼다. 이윽고 그녀의 혈색 좋은 피부가 순식간에 붉그스름해졌다.


"주인님, 오늘은 처음부터 격렬하세요-."


아흥, 리리스가 엎드려서 콧소리를 냈다.


"닥쳐."


찰싹, 찰싹- 그녀의 펑퍼짐한 엉덩이에 빨간 손자국이 났다.


남자는 그녀를 암퇘지처럼 거칠게 다루었다. 기구, 스팽킹, 촛농, 집게, 애태우기… 아름답고 완벽한 몸에, 내면의 더러운 욕망을 마음껏 토해냈다.


범해지는 그녀가 신음을 흘리고 아픈 표정을 지을수록 그의 가학심과 분노도 커져 갔다.


총 맞을 때도 쾌감을 느끼는 여자가 이따위 겁탈과 손찌검에 아파할 리가 없지 않은가. 맞을 때마다 아픈 척하며 오히려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서 괘씸하였다.


그리하여 방 안은 금새 끈끈한 체액과, 살 비린내와, 화끈한 열기로 가득 찼다.


하지만 욕망에도 한계는 있었다. 아무리 초인적인 육체를 가진 그 역시 정신적인 피로에는 이길 수 없었다.


불현듯이 가학의 쾌감조차 허무해졌다.


지친 그가 누워서 시선을 돌리자, 정액과 붉은 자국 투성이인 채로 엎어져 있는 그녀의 몸이 들어왔다. 누가 보면 능욕이라도 당했으리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뒤늦게 아차 싶었다.


머리가 한결 식어서일까. 이유 모를 답답함과 짜증이 확 달아난 느낌이었다.


"오늘은 많이 아팠지? 미안해."


"미안하시긴요. 오늘따라 화끈하셨는데."


이쪽을 돌아본 리리스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의 위로가 무색하게도, 그녀는 격렬한 고통으로 오히려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하나도 안 아팠나 보네."


"아팠어요. 딱 좋을 정도로."


"…하하. 내가 졌다, 졌어."


남자는 특제 약을 가져다가 리리스의 피부에 발랐다.


"이런 건 금방 낫는데."


그러면서도 리리스는 감격한 기미가 역력했다.


"내 꺼가 흉해지는 게 싫을 뿐야."


"후훗."


그녀는 고통받는 것도 좋았지만, 그가 플레이 하고 나서 이렇게 다정히 상처를 돌봐 주는 것이 더욱 좋았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보살핌 받는다는 느낌이 더할 나위 없었으니까.


그러나 약을 다 발라 준 남자는 다시 누워서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후희라든가 2라운드라도 돌입했을 텐데.


리리스는 물끄러미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주인님.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응?"


"오늘은 조금 달라 보이셔서요."


"그래 보였어?"


그녀는 남자가 별로 사디스트도 아니고, 누구도 상처입히지 않으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그녀를 위해 사디스트를 연기할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그는 평소와 분명 달랐다. 어딘지 불안정하기 짝이 없어서, 더욱 무리해 그녀를 학대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는 방금 전만 해도 그녀를 잔뜩 때리고 난 뒤 얼핏 슬픈 눈빛을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 눈빛에서, 그가 사실은 그 자신까지 학대하고 있었음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마조히스트이자 사디스트인 그녀만이 느낄 수 있는 마음이었다.


묵묵히 있던 남자는 리리스의 눈빛을 더는 받아내지 못하고 털어놓았다.


"그래… 오늘은 내가 좀 심했지? 미안해."


그가 사과하자 그녀는 손사래를 쳤다.


"심하긴요. 괜찮아요. 리리스는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통조차 즐겁게 받을 수 있어요."


"…."


"그보다도 주인님, 뭔가 힘든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음… 글쎄. 그냥 평소대로지 뭐. 일거리는 가득하고, 지휘관들은 서로 견제하고, 애들은 장난치고. 뭐 그런."


리리스의 눈이 빛났다.


"혹시, 어떤 년… 분이 주인님께 무례하게 굴기라도 했나요."


남자는 빙그레 웃었다. 집착 혹은 과잉 충성이라고 느낄 정도로, 자신의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는 그녀가 우습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했다.


"아니, 그냥. 갑자기 짜증이 많이 났거든. 아침부터…."


리리스는 그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리리스도 가끔은 까닭 없이 신경질적이고, 우울해질 때도 있으니까."


"그래도 난 모두를 책임져야 하니까."


"…힘드시면 리리스한테 풀으셔도 되고요, 오늘처럼."


후후, 그럴까. 남자는 귀여운 그녀의 귀를 매만져 주었다.


"있잖아. 리리스가 보기에 난 착한 것 같아?"


"…착해도 너무 착하시죠."


"가끔은 그런 것 때문에 좀 우습게 보이려나?"


"그런 년은 제가 반 죽여 놓겠어요. …라고 말씀드리면 주인님이 실망하실 테니까."


말은 그러면서도 리리스는 어딘가 못마땅해 보였다.


"뭐, 너무 기분 내키는 대로 살면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질 거야. 너나, 나나."


"그렇겠죠? 주인님 덕분에 저도 많은 걸 배웠어요."


남자가 쓴웃음지었다.


"솔직히, 나도 그렇게 착한 인간은 아닐지도 몰라. 겉으로야 얼마든지 너희를 받아 주지만, 속으로는 기분 나빠하거나 거슬려할 때도 정말 많으니까."


리리스는 잠시 미소를 띠고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대답했다.


"괜찮아요. 저도 착한 리리스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으니까요… 사실, 지금도 전부 착하다곤 못하는 걸요. 질투도 심하고, 성질도 급하고."


"알아."


"아이, 이럴 땐 아니라고 해주세요."


"하하하…."


흰색은 물들기 쉽다. 착한 사람으로 지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오르카호처럼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상황에서는.


착하고, 다정하고, 정의로운 이상적인 '사령관'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남자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언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지 몰랐으니.


"주인님. …주인님은 주인님이세요."


문득, 리리스가 남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언젠가 말씀하셨죠. 리리스는 리리스라고. 착하든 나쁘든, 모두 억지로 노력할 필요 없다고요. …주인님의 그 말씀 때문에, 저도 더욱 착해지려고 노력하게 되었어요."


남자가 생각해 보니, 분명 예전 리리스와 몸을 섞기 전에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힘들고 지치실 땐, 굳이 착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생각해요. 오늘 리리스를 험하게 다루신 것처럼요…."


"미안해."


"전혀요. 리리스는 좋았는걸요."


그녀가 가볍게 볼에 입맞춤해 주었다.


"그냥, 하나만 알아 주시면 되어요. 리리스에게, 그리고 다른 아이들에게도 주인님은 무엇보다 소중하단 걸요. 그러니까, 어떤 주인님이든 사랑해요. 정말로요…."


싱긋 웃는 리리스의 얼굴에, 다른 모든 바이오로이드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아아, 그리운 느낌. 남자는 순간 목이 메었다.


"나도… 나도 정말로 사랑해."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그녀 손을 잡아 주었다.


왜 잊고 있었을까.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라면 분명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착한 것도 나쁜 것도, 즐거운 것도 슬픈 것도 모두 같이.


처음부터 그랬듯이, 앞으로 언제까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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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가라앉은 어느 날의 소소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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