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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기상하실 시간입니다."

"조금만 더 자면.."

"당장 일어나십시오."


어느 때와 다름 없는 아침.

바닐라는 여전히 차가웠다.


"아침 식사를 차려 놨습니다. 드십시오."

"응, 지금 갈..."


쿵.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닐라는 방에서 나가버렸다.


"...."


라붕은 머리를 긁적였다.


밖으로 나가자, 바닐라가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라붕이 오늘 입을 정장과 와이셔츠, 양말을 챙겨서

베란다로 나갔고, 먼지를 턴다.


"오늘은 좀 쉬엄쉬엄하지... 너 생일인데."


"나태함에 물들어서는 안 됩니다. 어서 드십시오.

칫솔에 치약을 묻혀뒀고, 입안을 세척할 가글액도 준비했습니다."


"으응..."


먼지를 턴 다음에는 옷을 다렸다.


바닐라는 항상 바빴다.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전부 다 해주는 그녀의 정성이

처음에는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아니, 아직도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바닐라의 차가운 태도는, 그를 싫어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바닐라는....


현관에서, 바닐라가 넥타이를 매줄 때였다.

라붕이 슬쩍 다시 한 번 묻는다.


"오늘 뭐 필요한 거 없어?"

"없습니다."

"그래도 생일인데..."

"생일이라고 해서 어리광을 부릴 수는 없습니다."


너무 단칼인 반응에 라붕은 할 말이 없었다.


머쓱해하는 그를 보자, 바닐라가 한 마디 덧붙인다.


"전 항상 완벽해야 합니다.

제가 완벽하게 준비를 해야,

주인님이 완벽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주인님."


"응.... 고마워."


라붕이 나가고 문이 닫힌다.


하지만 바닐라.


'네가 그렇게 말을 해도.... 역시 난 챙겨주고 싶어.'


사실 라붕은 오늘 휴가를 낸 날이었다.

그는 회사를 가는 척하며, 생일 선물을 사러 간다.


오늘은 바닐라가 그의 집에 오고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다만 큰 문제가 있었다.

그는 여자에게 선물 한 번 해본 적 없는

순수혈통 동정이라는 점이었다.


'뭘 사야 좋아할까....'






몇 시간 후, 바닐라는 빨래는 널고 있었다.


주인이 없을 때도 그녀는 타이트한 일정을 가지고 행동했다.

그래야만 주인을 만족 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돌연, 하늘이 변했다.


구우우우웅-


"어...?"


하늘에 핏빛 같은 불길이 깔렸고

그 불길 사이사이에 무수한 구멍이 얼렸다.


인간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이어서 비명이 들려온다.


"꺄아아악!"

"으아아아! 날 지켜! 날 지키라고!"

"아아아아악!"


"저, 전쟁...?"


바닐라는 망연자실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인간들이.

지상의 인간을 죽이기 시작했다.


전쟁이었다.


"주인님!!"


바닐라는 돌격 소총을 들고 달려나간다.







하늘에 구멍이 뚫리면서 재앙이 시작됐다.


무수히 쏟아지는 괴물들.

그리고 그것에 속부터 갉아먹히는 사람들, AGS들.


어떤 괴물은 큰 대가리에 뱀처럼 꾸물거렸으며,

어떤 괴물은 상공을 날아다니며 지휘했다.


누구 하나, 어떤 바이오로이드나 AGS도

제대로 반격하지 못하고 죽어나갔다.


"으아아아아아!"


라붕은 도망쳤다.

달리고 또 달렸다.


그의 입에서는 딱 세 가지 소리만 나왔다.


하나는 비명.


"으아아아악! 아아아!"


또 하나는 거친 숨소리.


그리고 이름.


"바닐라! 바닐라!!!"







회사에 도착했지만 라붕 주인은 없었다.


"저기 누가..!"

"우아아아아앙."


어떤 아이의 울음소리.


"누가 제 주인님을..."


총 맞은 인간의 비명.


죽어가는 바이오로이드.


살고 싶다고 울부짖던 절규가 비명으로 바뀌는 과정.


"제 주인님 성함은 라붕이에요! 혹시 누가...!"


누구도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녀도 누구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엄마! 엄마! 어딨어 엄마!!"


그러나 바닐라는 도울 수 없었다.

눈으로는 구분이 가지 않았다.


뇌파가 똑같았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도 인간.

죽어 나가는 쪽도 인간.


둘 다 인간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바닐라!!"


익숙한 목소리.


그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자, 라붕 주인이 보였다.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걸 보면,

라붕 주인도 한참이나 그녀를 찾아다닌 듯했다.


"바닐라! 어디 있어, 바닐라!"

"주, 주인님!"


그런데 라붕 주인은 누군가와 함께였다.


저건 죽는 쪽의 인간일까.

아니면 죽이는 쪽의 인간일까.


눈으로 보이게는, 라붕 주인이 어떤 여성을 보호하고 있었다.


뇌파로 판단하기에는,

어떤 인간이 라붕 주인의 몸속으로 파고들기 직전이었다.


"주인님!! 위험합니다!"


바닐라는 들고 온 소총으로 그 인간을 겨누었다.


"당장 주인님에게서 떨어지십시오! 경고했습니다!"

"바닐라?"

"마지막 경고입니다, 당장 떨어지세요! 안 그러면 발포하겠습니다!"

"히, 히익...!"


여자가 떨어진다.


다행히 죽는 쪽의 인간이었다.

다리를 다쳤는지 제대로 걷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믿을 수 없다.

식별이 불가능했다.


"바닐라! 저 분은 다치신 것 같아 우리가 도와야..."


바닐라는 라붕 주인의 손목을 잡고 거칠게 끌었다.


"가요, 주인님. 여기서 빠져나가요."

"뭐? 잠깐, 저 분은.."

"남 신경 쓸 때가 아니에요!!"


구분할 수 없었다.

익숙하게 아는 형태의 사람이 아니면 그 누구도.

그리고 바닐라가 익히 아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가야 합니다, 어서!"


바닐라는 라붕을 반 강제로 끌고 달렸다.


"바닐라 왜 이러는 거야! 저 사람은 어쩌고!"

"다른 이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무슨...?"

"죄송합니다. 피아를 식별할 수 없습니다."


라붕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인간 분! 뒤로 물러서세요. 안 그러면 쏘겠습니다!"


총을 들고 괴물을 위협하는 콘스탄챠.


"인간님! 더 이상 제 주인님에게 해를 가한다면....!"


덜덜 떨면서도 주인을 지키려는 포티아.


모두의 상태가 이상했다.

괴물을 앞두고 인간이라고 칭한다.


".....!"


무언가 일어났음을 라붕은 깨달았다.

그는 잠자코 바닐라를 따라 달렸다.





두 사람은 어떤 골목에 숨어들었다.


"어떻게 하지? 바닐라, 계획이 있어?"

"집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주인님은 저, 바닐라만 믿고 따라오십시오."


"집이 아니면 어디로.."

"좀 조용히 하십시오. 들킵니다."

"잠깐만, 바닐라. 좀 진정하고.."

"닥치세요!"


바닐라가 버럭 외쳤다.

라붕은 입을 다물었다.


"제 임무는 주인님을 지키는 것입니다. 제발.

제발 부탁이니 제 지시에 따라주십시오.

누구도 믿을 수 없습니다.

저는 주인님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지만...

인간님과 인간을 죽이는 '그것들'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러니 제발 평소처럼 얌전히 제 지시를 따라주십시오. 제발."


라붕은 그런 바닐라를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판단, 바닐라는 다시 말한다.


"주인님. 제 말을..."

"알았어."


라붕은 바닐라의 손을 꼭 잡았다.


"바닐라가 하자는 대로 할게. 대신, 약속해줘."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조금만 진정해. 다 괜찮을 거야."

"지금 상황에 그런 태평한 말씀이.."

"내 말을 따라해."


라붕은 평소와는 달리, 강압적으로 나갔다.


평소와는 다른 그 모습에 압도된 걸까,

바닐라가 움찔했다.


"바닐라. 내 말을 따라해. 다 괜찮을 겁니다.

당장 말해. 천천히, 또박또박."


"....다 괜찮을...."


잠시, 바닐라가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짧은 침묵이 이어진 후,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얗게 질렸던 얼굴에 다시금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주인님 걱정 말고 저만 따라오십시오. 다 괜찮을 겁니다."

"...응. 난 바닐라를 믿어."


그때부터, 두 사람은 둘만의 도피를 시작했다.


때로는 괴물과 마주쳤다.

때로는 다른 인간과 마주쳤고,

때로는 인간에게 습격 당할 뻔했다.


운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대체로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러다가 바닐라가 등을 다친 날 밤에,

라붕이 그녀의 상처를 돌봐주다가

격정에 휘말려 바닐라를 거칠게 껴안았다.


처음으로 두 사람이 이어진 날이었고,

바닐리가 상처 외의 피를 흘린 날이었다.


하지만 바닐라는 아프다는 이유로 그를 밀치지 않았다.

암울한 상황 때문이었을까, 오히려 둔부의 아픔이

그 순간에 더 몰입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두 사람은 거친 숨소리만 교환하며 몸을 섞었다.


여러 시간이 지난 후 격한 몸부림의 끝.

알몸이 된 두 사람이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남쪽... 섬으로 가자."

"....갈 수 있을까요?"

"해봐야지."

"거기에는.... 그 괴물들이 없을까요?"

"없는 곳이 있을 거야, 분명히."


라붕은 그녀를 꼭 껴안아주었다.


한편, 바닐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봉투를 봤다.

세계가 멸망한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라붕이 계속 가지고 다닌 짐 하나 있었다.


먹을 것은 아니었고, 생존에 도움이 될 것도 아니었다.

짐을 담은 봉투가 찢어져서 새 걸 주운 적은 많다.

하지만 라붕 주인은 내용물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대체 뭔데 저렇게나 소중하게 가지고 다니는 걸까?


"주인님."

"응."

"........"


어쩐지 묻기가 묻기가 무서웠다.

저 안에 담긴 게...

혹시나 다량의 수면제는 아닐까?

쥐약은 아닐까?


라붕 주인님은, 아닌 척하면서도 이미 희망을 잃은 게 아닐까?

그저 나 때문에.

아니면 아직 마음을 다잡지 못해서?


지금까지 손 대지 않았다가 오늘에서 손을 댄 것은...

죽기 전 마지막 결의나 자포자기가 아니었을까?


바닐라는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래, 바닐라?"


주인이 살짝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머리칼을 정리해주었다.


"......주인님 사랑해요. 제가 언제나 곁에 있을게요."

"나도. 나도 사랑해. 진심으로."



그리고 날이 밝았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 앞으로 나아갔다.

오늘은 15km.

내일은 20km.

그 다음날은 괴물이 너무 많아서 겨우 1km.


과연 남쪽 바다에 다다를 날이 올까 싶을 정도로 느린 행군이 계속됐다.


하지만 끝은 왔다.






"저쪽도 확인했지? 구석구석?"

"네. 주인님은?"

"나도."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섬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 섬은 둘이 살기 충분히 넓어요. 차고 넘칠 정도로."

"식량 구해야 하는 걸 생각하면 딱 적당할지도 몰라."

"아, 걱정이네요. 농사는 할 줄을 모르는데...."

"내가 조금은 알고 있어."

"훗."


둘은 웃음을 터트렸다.


끝내 도착했다. 사람도, 괴물도 없는 둘만의 세계에.


"...여기가 저희의 종착지 같습니다."

"그러게. 이제 여기서 평생 살아야겠지."


"주인님. 이곳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주인님께서 필요한 물자도... 다 충족해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 특기인 초코케이크는 어쩌면 평생 드시지 못할 지도..."


"괜찮아."


라붕은 바닐라의 한손을 꼭 잡는다.


"바닐라와 함께라면, 난 괜찮아. 야생에서 사는 것도 좋아."

"....저도 그렇습니다."

"참, 줄 게 있어."


라붕이 봉투를 건넨다.

그토록 궁금해하던 판도라의 상자였다.


"아..."

"그때가 너 생일이었잖아."

"네?"

"내가 널 데려온 지 1년이 되는 날..... 좀 많이 늦었지만."


라붕은 하하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네가 입으면 정말 예쁠 것 같아서 사왔어."


내용물을 확인한다.

옷이었다.

머리띠부터 상의 하의, 스타킹에 신발.

심지어 핸드백까지.


"....이 바지는 엉덩이가 조금 꽉 낄 것 같습니다만..."

"사실 내 사심도 조금 섞였어."

"...."


"바닐라는 여유가 없어서.

그날 만큼은 이걸 입고, 여유롭게...

휴일을 챙겨줬으면 했었어."


"아...."

"좀 많이 늦었지? 세상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막상 일이 터진 다음에는, 이걸 주는 게 뭐랄까...

되게 눈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돼서 참았었어."


바닐라는 웃으며 옷을 받았다.


"입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응."


바닐라는 옷을 갈아입고 다시 라붕 앞에 섰다.


"어떻습니까?"

"예뻐. 귀여워. 세상이 멀쩡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


바닐라는 크흠,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라붕에게 손을 내밀며 말한다.


"이제 데이트를 시작하는 거 아니었나요?"

"어?"

"제가 리드할게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스케줄을 짜놨답니다.

나만의 주인님과 저. 둘 만을 위한 데이트를."


햇살의 후광을 받은 바닐라의 환한 미소.

라붕은 홀린 듯 그녀의 손을 잡고 따라간다.

두 사람은 손을 꼭 맞잡고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해변을 걸었다.



그렇게 바닐라의 휴일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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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링크는 이거 후속편

 "드디어!! 드디어 연구소 밖으로 나왔어..!!"




이 링크는 내가 지금까지 쓴 것들

라오 창작글 모음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