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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움주의)


17.재구축





* * *




…시내의 상태는 끔찍했다. 어느 거리나 구리색으로 굳어버린 피가 가득했다. 무늬는 불규칙하고 기하학적이었다. 언뜻 보면 도시규모로 기획된 스트리트 아트가 펼쳐진 것 같았다. 도무지 그런 것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시체들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여러 조각이든 원형을 유지하고 있든, 시체들은 하나같이 불쾌한 핑크색을 띠고 있었다. 꼭 가공이 되다 만 게맛살 같다고 생각했다.


그 게맛살들은 거리를 배회하게 된 짐승들의 차지가 되었다. 주인잃은 반려견부터 해서 근방의 동물원에서 탈출한 맹수들까지, 부패의 정도나 끔찍한 시취는 상관하지않고 시체들을 입으로 청소해갔다.


시체가 눈에 띄게 사라지자 시내에는 야생의 냉정한 법칙이 적용되었다. 그랬어도 복잡한 시스템과 프로세스로 돌아가던 때보다 정돈되어 보이는 변화였다. 반려견은 소형 산짐승에게 먹히고, 산짐승은 맹수들에게 먹히고, 약한 맹수들은 강한 맹수들에게 먹히고. 아주 직관적이고 알기 쉬웠어서였는지 몰라도, 그 광경은 마음 편한 구석이 있었다.


몇 일만에 돌아온 건지 모를 집에서 짐을 챙기고, SUV의 본넷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이 SUV는 하늘이가 '우움마'에서 '엄마'라고 똑바로 발음하게 됐을 무렵에 산 녀석이다. 내구성을 세일즈포인트로 내세운 녀석이라 망설임 없이 구매했었더랬다. 그래서인지 한창 멸망 중인 지금도 반 즈음 무너진 집에 비해 멀쩡했다. 그때 장을 보는게 아니라, 차에 있었으면 하늘이가 살지도 몰랐다고 나는 자조했다. 


그 동안 어디서 뭘하고 다녔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주유소에 들렀던 것과 홀로 동물원에 들렀던 것, 몇몇 우리엔 아직도 동물들이 갖혀 있어 풀어준 것은 기억난다. 몸이나 옷에서 나는 냄새를 보니 씻지는 않았던 것 같다. 체취보다는 거리에서 밴 시취의 냄새가 더 강했다.


운전대를 잡기 전, 대쉬보드 위의 액자가 틀어져 있어 위치를 다시 잡았다. 액자 안의 일곱 살 하늘이는 나를 똑바로 보며 눈부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담배를 껴놓은 손을 차창 밖으로 내밀고 국도를 달렸다. 고속도로는 이용할 수 없었다. 주인 잃은 차들로 빽빽했기 때문이다. 긴 시간, 아마 반세기가 지나도 모든 고속도로는 꽉 막혀 있을 것이다. 


출구가 없는 것과 출구가 있어도 나갈 수 없는 것. 어느 쪽이 더 비극일까. 나는 그것을 지켜보는 쪽이야말로 진짜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국도, 시내, 국도, 시골, 국도… 달리는 도중 차창 너머에는 드문드문 바이오로이드가 보였다. 쌓아올릴 수 없는 것들이 이미 무너진 것들을 지키겠다고 용을 쓰고 있었다. 뭐가 어려운 건지 철충에게 총구를 겨누는 것조차 힘겨워해서, 겨우겨우 철충을 공격해봐도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철충은 바이오로이드에게 관심이 없으니 가만히 있으면 목숨이라도 부지할 텐데, 괜히 건드려서 비명횡사하는 상황이 제법 있었다.


철충이 인간의 뇌파와 유사한 파장을 내뿜는다 해도 그렇지, 그렇게나 철충을 공격하는 것이 어려운 일일까. 지금의 나는 철충이든 바이오로이드든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할 때가 되어서는 분노하고 있었다. 


저년들 꼬라지를 보면 나 스스로를 어느 카테고리에 넣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철충을 제대로 공격하지 못해야만이 바이오로이드라면, 아들을 지키겠다고 싸운 나는 뭐가 되는 걸까?


나에 대한 것도 그렇지만 진짜로 화가 나는 건 바이오로이드 쪽이다. 인간을 위해 태어났으면서 철충을 인간과 혼동한다?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어이가 없다. 나도 모종의 변화를 겪지 못했다면 저년들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선 그 남자와 100년간 꼬였던 쓰레기들에게 감사한다.


수 시간 차를 몰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내세울 것이라곤 아름다운 해안 뿐인 벽촌이었다.


커다란 숲의 입구에 차를 댔다. 햇빛의 온도는 적당했고 여명에 젖은 하늘엔 검댕같은 흑색 구름 덩어리가 군데군데 뭉쳐 있었다. 곧 있으면 새가 깨어 지저귈 시간이었다. 


숲을 빙 돌아 걸어 나가자 포장길이 나타났다. 금이 가거나, 무너져 철골이 드러난 건물이 있거나 하는 멸망의 흔적이 이곳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살아남은 인간이 있었던 건 아니다. 


마을에 난 길을 따라 해안가로 들어섰다. 숲을 낀 모래사장 한 켠엔 다 무너져가는 미니멀한 디자인의 호텔이, 눈앞에는 파도에 밀려온 갖가지 잔해가 널브러져 있었다. 우그러진 강판, 잘려나간 포신, 해양동물들의 사체… 멸망은 육지만의 일이 아니다.


바위에 앉았다. 처음부터 의자로 태어날 예정이었던 것 같은 앉기 좋은 바위였다. 담배를 한 대 꺼내 입에 물고 바다를 본다. 하늘의 검댕이 조금흐릿해져 있었다.


"네가 무슨 키이라 나이틀리냐?"


발치에 떨어진 담배꽁초가 다섯 개비가 되었을 때, 목소리가 들렸다.


"플라잉 더치맨은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어 ㅋㅋ?"


모래를 밟는 소리가 선명해질수록, 담배 냄새를 뚫고 들어오는 베이비파우더 향이 강해졌다. 남자가 바로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헛구역질을 했다. 베이비 파우더 향 때문이 아니고 연달아 핀 담배 때문이었다.


마른 혀가 축축해지길 기다리며 바다에 시선을 고정했다. 파도에 끌려 바다로 후퇴한 작은 물고기 사체 하나가 밑으로 사라졌다.


"받아라."


발치로 날아온 가방 하나가 마른 소리를 냈다. 어디서 많이 본 디자인인 것 같아 집중해서 보니, 그것은 거의 백년 전에 들고다녔던 토트백임을 알았다.


내용물은 확인하지 않고 발로 차 옆으로 치웠다. 그것에 남자는 별 말 않고 나와 같은 곳을 보았다. 10초 정도 지나 담배 연기 한 줄기가 눈가를 스쳤다.


"다리 멀쩡해졌구만. 이주일 동안 뭐하고 지냈냐?"


이주일. 그날로부터 이주일인가.

기억의 마지막 지점을 더듬고 남자에게 말했다.


"…깨어나니까 차 안이었어."


"옮겨 둘 만한 곳이 그뿐이라. 차 좋더라?"


뭐하고 지냈냐니까? 라고 남자가 재차 물었다. 내가 뭘 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담배를 물었다.


"됐다. 말 안해도 알겠다." 남자가 말했다. "정신 좀 차리지?"


나는 눈만 옆으로 돌렸다. 그러기만 한 것으로 베이비파우더향은 한층 더 강하게 느껴졌다.


남자에게 물었다. 


"…당신이 보기에 하늘이는 어땠어?"

"뭐?"

"어른이었어? 아이였어? …말해 줘."


"이게 진짜…"


남자는 나를 노려보다가 말문이 막힌다는 듯, 입 앞에 올린 손을 휘휘저었다.


"아이였어."

"정말?"


나는 다시 정말?이라고 물었다. 그런 내 목소리는 반옥타브 높아져 있었다.


"그래. 딱 그 나이대의 아이였어. 나는 아이가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뭐, 내가 보기에 어른스러운 모습은 없었어."


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정신적으로 조숙한 아이들. 나이대보다 어른스러운 아이들은 대개, 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환경에서 자라온 경우가 많다. 부모가 없거나, 부모가 없느니만 못하거나, 부모의 인간성은 괜찮은데 가난하거나 하는 경우도 있다. 흔해빠졌지만 하나같이 안쓰러운 사연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 흔한 것들 속에서 내 아이는 아이다웠다, 그것은 내가 아이에게 적절한 환경을 제공하고 사랑을 아낌없이 쏟은 엄마라는 뜻이었다. 세상의 전부가 되어줬다는 뜻이었다. 우주가 되어줬다는 뜻이었다.


내 우주에는 별 하나 없었는데.


"넌 훌륭한 엄마였어. 그놈이 아빠를 찾은 적도 없었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잊어."


좀 더 칭찬해줘도 좋은데. 왜 끝에서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건지. 이 사람은 그렇게 칭찬에 인색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애가 없다? 이상하게 들렸다. 부모는 아이의 전부라느니 우주라느니 잘도 지껄여서, 이 남자는 틀림없이 아이가 있거나 길러봤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아빠 노릇도 끝이군. 아주 지긋지긋했어. 하~ 이럴 줄 알았으면 적당히 재미 봤을 때 발 빼는 거였는데."


일어서서 남자를 마주봤다. 남자의 인상은 조금 바뀌어 있었다. 포멀한 스타일의 깔끔한 정장에 수염은 모두 정리되었고 지저분하게 보였던 머리칼은 짧아져 이마 위로 넘겨놨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목소리도 살짝 낮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청이가 봤다면 키아누 리브스에서 이번엔 매즈 미켈슨으로 갈아타신 거냐고 한소리 했을 것이다.


"왜 그 따위로 꼬나 봐? 내 얼굴에 뭐 묻었냐?"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검게 물들었다. 

기분 나쁘게 히죽거린다. 


"내가 뭐 잘못했어?"


"잘못? 당연히 잘못했지. 내가 분명 처음부터 키우지 말라고 말 안했냐?"


"말도 못하는 애한테 총구나 들이민 새끼가… 너 씨발 싸이코지?"


"싸이코는 ㅋㅋ 내가 싸이코였으면 말 한마디 안하고 바로 애새끼 미간에 총알 박았어. 널 그렇게 말리는 일도 없었어."


"나쁜 새끼… 네 직원이었던 아이의 핏줄을 어떻게…"


"풋풋한 직원 아가씨는 알아도 100살 처먹고 운명 운운하는 노망난 할매는 몰라. 운명? 노인네가 주접은. 그래서, 그 나쁜 새끼 말 안들어서 어떻게 됐냐? 네 애새끼 가슴팍에 주먹만한 구멍이 뚫렸잖아. 총알이 낫다싶은 구멍. 쯔쯔, 거기서 네가 아이를 구해냈어도 그 다음은 휩노스야. 알지? 휩노스. 쩌어기 저 바다 어딘가에서 파장 뿜뿜하는 오징어 새끼들의 먹이행이란 말이야. 머지않아 락 하버라고 불리는 피난처가 생길 텐데 거기 있는 놈들도 싹 다 악몽 속에서 뒈져. 봐. 차라리 총알이 낫지 않았냐?"


"…"


"그리고 또 말하는데, 네 씨발 폐하는 인류가 멸망해야만 나타나신다니까? 그럼 어째야겠어. 오히려 지금도 인간 찾느라 혈안이 된 철충을 응원해야하지 않겠어? 아니면 철충을 도와서 인간들을 죽여도 좋고 ㅋㅋ 나중에 락 하버에 침투하는 건 어때? 아 참. 지석이 새끼랑 앙헬은 죽이면 안 된다? 걔들이 최대한 오래 살아남아야 네 미래의 폐하가 몸을 얻고, 전력을 증강할 수 있어."


주절주절 떠드는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반박할 만한 재료가 없었다. 기분 나쁜 걸 떠나서, 남자의 말엔 틀린 점이 없었다. 폐하를 다시금 인지한 순간에 되찾은 기억도,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 고하고 있다.


폐하를 뵙기 위해선 모든 것이 사라져야 한다니. 폐하셨다면 당장에 찢어죽여도 모자랐을 인간들을, 폐하를 위해서 연명하게 두어야 한다니. 


이건 아이러니도 뭣도 아니다. 누군가가 설계한 것 같은 작위성이 느껴진다. 악의가 느껴진다. 더없는 불합리함이 느껴진다.


그런 것들은 알기 싫어도 언젠간 알게 됐을 터였다. 


사실만을 철저히 내 머리에 때려박는 이 남자가 끔찍하게 미웠다.

분노로 위장이 매슥거렸다.


"아빠 노릇 끝이라고 했지?" 입에서 담배를 퉤 뱉어냈다. "그럼 당장 꺼져.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꺼져줄 건데, 그 전에 하나."


남자가 숲 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숲을 등지고 서있는 작은 저택이 있었다. 백색을 기조로 설계된 모던한 디자인의 저택이었다.


"네가 살 집이야."


"누구 마음대로?" 나는 즉답했다. "더는 네 도움 받고싶지않아. 지금 당장 사라져."


"앞으로 반세기도 더 넘게 집도 없이 살겠다? 오 ㅋㅋ 스펙타클하고 재밌겠네. 그럼 그렇게 해. 근데, 지금이야 철충이 너희를 공격하지 않지만 머지않아서 바이오로이드도 잡아죽이게 되는데? 그러다 폐하도 못 뵙고 뒈지면 어쩌게? 저 집엔 있지. 철충에겐 은폐효과가 있는 베리어가 쳐져 있거든."


싫으면 저항군에 합류하라고 남자는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저항군이란 게 나나 폐하와 밀접한 단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합류한다한들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고 애초에 합류하고 싶지도 않다. 바이오로이드와 섞이고 싶지 않다.


"고민하지 마~ 그냥 '감사합니다~' 한 마디 하고 들어가면 돼. 나도 씨발 이젠 좆같은 거 더 이상 돕고싶지 않은데, 약속한 거 어쩌겠니. 뱉은 말은 지켜야지. 자, 쉬운 일이야. 네 그 알량한 자존심은 폐하를 위해서 접어두고 집안으로 쳐 기어들어 가. 그리고 살아. 웬만한 건 다 있으니까 반세기는 거뜬한 곳이야."


…자존심.


자존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화를 입었을까. 남자의 말대로 자존심 따위 접어두고 저 집에 들어가 남은 반세기를 보내면 되는 일이다. 폐하를 뵙기에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이젠 자존심이랄 것도 없으니, 있어도 의미가 없으니 순순히 남자의 비릿한 배려에 몸을 맡기면 되는 일이다.


그래도 나는 최후까지 남은 자존심을 펼쳐 남자에게 말했다.


"이거랑 이거, 가져 가. 이젠 필요없어."


장갑을 남자의 앞에 던지고 단말기를 마저 꺼냈다. 차에서 깨어났을 때 머리맡에 있었던, 내가 버렸던 그것이었다.


"야."


남자가 발치에 떨어진 장갑을 내려다본 채 말했다.


"죽어도 고맙다고는 말 못하지? 야. 창녀는 팁만 받아도 고맙다고 해. 이건 처음부터 끝까지 쳐받아놓기만 해놓고 마지막에 한다는 말이 이젠 필요없어? 이 씨발 창녀만도 못한 것아. 네 손떼 묻은 걸 내가 왜 받아. 네 거 해. 만지기도 싫어."


남자의 입에서 새어나온 걸쭉한 침이 장갑에 떨어졌다.


"실망이 커. 아… 후회도 크다. 그때… 멘탈을 박살내놔야 했는데."


남자가 내 곁을 스쳐지나간다. 중간에 그 따위 눈깔하지 말라고 속삭인다. 남자를 베어버리기 위해 침이 묻은 장갑을 끼고 참수검을 꺼냈다. 순간적으로 참수검에 비친 내 눈은, 지독하리만치 텅 비어 있었다.


"걱정말고 숨만 쉬고 있어도 네 폐하는 나타난다. 두 번 다시 나와 만날 일도 없어."


뒤를 돌아 발을 굴렀다가, 도중에 멈췄다.


이제 막 밀려온 파도가 남자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 * *






21xx년.





* * *






21xx년.






* * *






21xx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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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xx년.






* * *





권태감을 덧댄 이불을 목까지 덮고, 나는 유치한 노스탤지어에 푹 젖어 있었다. 귀에는 현재 기분에 걸맞은 유치한 가사의 사랑 노래가 들려온다. 


이불에서 탈피하듯 빠져나와 2층으로 향했다. 귀에 거슬리는 노래를 부르던 오디오를 잠재우고, 1층의 주방으로 기다시피해서 갔다.


유리 잔을 챙겨 정수기에 갖다 대고 물을 가득 따른다. 그렇게 내리 3잔을 비운다. 고작 물 몇 잔 마시는데도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했다. 


갈증과 허기를 동시에 해결하고 2층으로 돌아와 거실로 간다. 시계를 본다. 디지털 시계는 딱딱한 폰트로 2135년 4월이라 알려오고 있었다. 


시계를 확인했으니 3층 침실로 가서 침대에 눕는다. 탈피했던 껍데기로 도로 들어가듯 이불을 덮는다. 그대로 누워있는다. 얼마 안 가 졸음이 몰려오고, 나는 잠에 든다. 


이런 식으로 20년이 지나갔다. 그야말로 잠자는 공주님이 따로 없다. 키스도 없이 제멋대로 일어나 물까지 마실 줄 아는 공주님은, 왕자님의 눈엔 별 매력없이 느껴지겠지. 


그래도 괜찮다. 아직 40년이나 남았다. 40년. 보내온 시간에 비하면 정말 짧은 시간이지만, 아무것도 곁들이지않고 40년이란 시간 자체만 보면 아주 긴 시간이다. 때문에 나는 아무런 저항감 없이 하루하루를 잠으로 떼울 수 있었다.


……사실은, 무섭다. 나는 남자가 떠난 뒤부터 잠드는 것이 무서워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눈을 감는 것이 무섭다고 해야할 것이다.


눈을 감으면 눈꺼풀 안쪽에 작은 스크린이 나타난다. 그 스크린에선 회사원이던 나, 카페 매니저던 나, 언니라 불리던 나, 누군가의 첫사랑이던 나, 법의 바깥에서 유령처럼 생존해오던 나, 엄마였던 내가 시간순으로 재생된다.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장르는 모른다. 내게만 존재하는 장르다. 제목도 모른다. 내 이름이 제목이다.


영화가 막바지에 다다르면 나는 뜻모를 죄악감에 사로잡혀있다. 더는 보기 싫어 눈을 질끈 감으면 이미 눈은 감고 있음을 깨닫는다. 눈을 감았기에 보이는 영화임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눈을 뜨면 보이지 않느냐, 그것도 아니다. 스크린이 눈꺼풀 안쪽에서 시야 전체로 확장되어 버린다. 더 끔찍해진다.


이것이 발작의 새로운 증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기존 증상도 그대로 남아있다. 눈꺼풀의 스크린과 더불어 폐하가 찾아오시면, 그날은 자다가 일어나 야경증에 시달리는 아이처럼 비명을 질러댄다. 나는 그것을 성가셔졌네, 라며 남일처럼 생각하고 견뎌왔다.


어떤 의미에선 남일이 맞을 것이다. 인생은 등가교환의 연속이며, 어떨 때는 일방적으로 잃기도 한다. 나는 그런 100년의 시간을 견디는 대가로 회사원과 매니저와 마틸다와 엄마라는, 여러 명의 나를 가지게 되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그녀들 모두 내 안을 둥지삼아 개별적으로 존재했다. 간혹 말도 걸어오는데, 재밌는 농담도 던지고, 심한 말도 던진다. 특히 심한 말은 마틸다가 주로 던진다.


이 발작이 그녀들 중 한명이 가진 증상이라고 한다면, 남일처럼 여기더라도 이상한 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누구일까? 


모르겠다.


5월이 되고부터 나는 잠으로만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그저 잠으로 떼우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5월의 어느 날, 발작에 이어 꿈을 꿨다. 그 꿈에서 나는 하늘이와 재회하여 그 아이를 껴안아주기도 전에 왈칵 눈물을 쏟았다. 장소는 옛날 우리 둘만의 집. 내가 눈물을 쏟는 중에도, 쏟아낸 눈물이 다 마를 때까지도 하늘이는 어두컴컴한 복도 한가운데에서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 한 마디 없이.


기다림 끝에 마침내, 하늘이와 내가 동시에 입을 연다. 


그리고 꿈은 거기서 끝난다.

아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지 모른 채.


꿈에서 깨면 의식이 현실을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상체가 일어서 있다. 몸은 식은 땀 범벅이고 눈가와 뺨은 뻑뻑하다.

자는 와중에 이렇게나 많이 우는 게 가능하다니. 처음 알았다.


침실과 접한 테라스의 창 밖에서는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감정이 기후의 영향을 받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다. 비가 내리면 울적해지고, 햇살이 쨍쨍하면 고양되고, 눈이 내리면 차분해지는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날은 유독 비를 무시할 수 없었어서, 나는 좀 더 눈물을 쏟고 말았다.


눈물을 쏟을만큼 쏟고 어렵게 침대에서 나와 이끌리듯 1층으로 내려갔다. 쥐잡듯 샅샅이 뒤진 끝에 짐을 담아 둔 플라스틱 박스에서 사진첩을 찾아낸다. 그러고 보니 짐정리도 안했음을 깨닫지만 신경쓰지 않는다. 20년 동안 정리하지 않았으니 앞으로 하지 않아도 똑같다.


사진첩을 펼쳐 첫 페이지부터 꼼꼼히 한 장 한 장 살핀다.


첫번째 사진은 하늘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소파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옆에는 아기띠가 곱게 개어져 있었다. 타이머 기능에 익숙하지않아, 몇 번이고 찍어서 겨우 한 장 건져낸 사진이었다.


두번 째 페이지를 넘겨 세번 째 페이지에 도착했다. 눈에 들어온 사진은 다섯 살 무렵의 하늘이었다. 검은 반소매 티에 귀여운 멜빵 바지를 입고, 데포르메 된 불독 캐릭터 로고가 들어간 모자를 썼다. 그런 하늘이는 세상 무엇보다 해맑게 웃으며 눈가 옆에 올린 v자 사인을 렌즈에 보내고 있었다. 그 사진 옆엔 하늘이를 품에 껴안고 똑같이 해맑게 웃는 내가 담긴 사진이 있었다.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다섯 번째 페이지에 다다라 처음 눈에 담은 사진에서 달라진 것을 찾아낸다. 하늘이와 함께 할 때는 모든 신경과 집중을 하늘이에게만 쏟느라 몰랐는데, 엄마였을 적의 나는 꽤 방어적인 차림을 하고 있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롱스커트에 품이 큰 하얀 블라우스, 위에는 감색 가디건. 살짝 웨이브가 들어간 까만 머리칼은 견갑골 밑까지 내려가 있다. 이 때의 나는 본능적으로 엄마같은 차림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여섯 번째 페이지부터는 하늘이가 담긴 사진보다 내 단독 사진이 많아졌다. 하늘이가 8살 무렵부터 나를 자주 찍어줬으니까. 매일 자기만 찍히는게 불공평하다고 했나. 그렇다면 예쁘게 찍어달라며 나는 어른스럽지 못하게 애교를 부렸었다.


그 밖에도 밤에 울음을 터트린 하늘이를 어떻게든 재우려던 엄마, 이유식을 만드는 엄마, 요리하는 엄마, 노래를 불러주던 엄마, 함께 영화를 보던 엄마,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추는 엄마…


마지막 페이지엔 그림 한 장이 페이지 전체를 장식하고 있었다. 


크레용으로 그린 해바라기. 일곱 살의 하늘이가 그린 것이다. 


그 해바라기로부터 기억 하나가 페이드 인 된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던 무렵에 해바라기를 완성한 하늘이에게 물었다. 왜 해바라기를 그렸어? 하늘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그냥이라고 대답하고선 사진첩에 그림을 접어 넣었다.


이 다음에 나는 작은 기대를 품고, 아이에겐 좀 수준 높을지도 모를 질문을 던졌다. 하늘이가 그린 해바라기엔 무슨 의미가 담겼어? 하늘이는 신중하게 할 말을 고르듯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 의미 없는데?


무의미라니. 기대하지 말 걸 그랬나. 


아쉬움과 함께, 그렇게 대답한 하늘이의 얼굴이 내 안에 또렷히 남아있다.


순수를 응축한 듯한 티끌 하나 없는 미소. 

아무 의미 없는 미소.

미소 그 자체.

무의미한 것이야말로 순수와 가장 가깝게 닿아있는 건 아닐까.


사진첩을 닫자, 나도 모르는 새에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울 생각도 그럴 기분도 전혀 아니었는데, 눈이 멋대로 눈물을 쏟아냈다. 


이 뒤에도 나는 펑펑 울었다. 소리내어 울었다. 이거 참. 자는 와중에도 울고 일어나서도 울고. 울보 다 됐다.


몸에 있는 수분이란 수분은 모조리 눈으로 뽑아내고 나서야 나는 알았다. 

남자가 그렇게 나를 말렸던 이유를.

앞으로 한동안은 울기만 하겠지. 어쩌면 꽤 오랫동안 일지도 모르겠다.


저택을 둘러보기로 했다. 들어온지 20년만에 둘러본다는게 이상하게 여겨졌지만 딱히 할 것도 없었다. 사진첩에서 신경을 돌릴만한 것이 필요했다.


백색에 가까운 베이지색을 기조로 설계된 이 저택은, 전체적으로 내가 이전에 살던 집의 격을 한단계 정도 끌어올린 곳이었다. 1층은 거실과 주방이 있고 뒤뜰로 이어진 테라스가 있다. 뒤뜰은 아주 넓직해서 말을 풀어놓고 달리게 해도 될 정도였다. 한켠엔 수영장, 뒤뜰의 담 너머엔 숲이 있었다.


2층은 1층보다 작은 거실을 중심으로 생활에 필요한 전반적인 것들이 위치해 있다. 그 외에 딱히 특별한 건 없다. 


3층은 휴식을 목적으로 설계된 곳이다. 한 곳엔 침실이 모여있고, 복도를 따라가면 작은 바가 딸린 라운지가 나타난다. 버튼만 누르면 에스프레소를 내려주는 커피머신에 칵테일 셰이커, 핸드드립 추출기 등등, 지난 100년의 일부와 연이 깊은 것들도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멸망이 시작되고 얼마 만에 남자와 만났는지 떠올렸다.


2주.


이주만에 이런 저택을 지었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 거기에 20년 동안 방치되었음에도 시간에 따른 열화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신경을 돌릴만한 반가운 의문이 생긴다. 


의문을 풀어 줄 해답은 지하에 있었다. 1층에 있는 다용도실 벽에 의심스러운 패널이 달려 있었다. 그 패널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드럼 세탁기 옆에 계단이 생겼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첩보 영화에 이런 건 흔했지. 혹은 스릴러나 서스펜스 영화. 어쨌든 그런 영화들 때문에 난데없이 나타난 계단은 익숙하게까지 느껴졌다.


지하는 2층까지 존재했다. 먼저 확인해 본 2층은, 뭐라고 해야할까. 창고형마트라고 해야하나. 들어감과 동시에 하얀 조명으로 밝혀진 그곳은, 눈대중으로만 봐도 저택보다 큰 공간임을 알 수 있었다. 고작 한 바퀴 도는 것도 한참 걸렸다.


더해서 마트라고 한 건 비유가 아니다. 내 손엔 진공포장된 닭가슴살이 들려있다. ―바닥에는 빈 포장지가 가득했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무의식 중에 오갔던 것이리라.―닭가슴살 외에도 여러 식재료나 바로 먹을 수 있게 포장되어 있는 것들이 가득했다. 그 중에서도 내 눈을 끈건 단연 술과 담배였다.


닭가슴살로 배를 채우고 혹시 하는 생각에 포장지를 살폈다. 제조년월은 3085년, 기한은 3300년이라 적혀 있었다.


"…"


2층은 그 외에 특별할 것이 없어서 1층으로 향했다. 


1층은 저택 꼭대기에 몰래 만들어 둘 법한 다락방같은 곳이었다. 은은한 온색 조명으로 밝혀진 복도를 따라간 곳엔 문이 하나. 그곳을 열고 들어가자 5평 남짓한 방이 나타났다. 작은 침대 하나, 붙박이장, 원목 책상. 벽은 줄을 따라 집게에 매달린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꾸며져 있었다.


폴라로이드 속에 있는 이들은 여자들 뿐이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상당한 미녀들이다. 같은 여자의 눈으로 봐도 예쁜 그녀들의 곁에는, 하늘이 또래의 아이들이 행복해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폴라로이드 속 미녀들은 내가 모르는 여자들이었다. 허나 그 중에는 내 눈에 익숙한 이들도 있었다. 


발작을 일으키면 찾아오는 그녀들.


이 미녀들은 그 남자의 바이오로이드인 걸까.


폴라로이드에서 시선을 돌리고 방에서 나가려는 참에 책상에 놓인 것이 눈에 띄었다. 작은 쪽지 하나와 꽃무늬의 화사한 커버를 가진 공책이었다.


먼저 쪽지를 봤다.


시간이 지나면 이 집은 회수된다.

깨끗하게 써라. 


…이 메시지가 나에게 보내는 거라면, 회수라는 단어를 통해 이 집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요컨대 이 집은 남자가 살던 곳이란 뜻이고, 철거가 아닌 회수라는 건 집을 가지고 다닌다는 뜻이 아닐까.

그 가방에 담아서 말이다. 아가씨들이라고 부르는 무기들이 담긴 가방에, 아가씨들만 담고 다닌다고 한 적은 없으니까. 


집을 가지고 다닌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가능한 더럽게 살자고 마음 먹고 공책을 펼쳤다.


뒷장 대부분이 공백인 공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르카력 91년


겨울 챌린지 시작.





오르카력 92년


리제 언니가 결혼.

챌린지 멤버에서 탈퇴.






오르카력 93년


결혼 두 달만에 리제 언니가 아기를 안고 나타남.

아버지가 과속했던 거냐며 불같이 화를 냄.

매부는 죽기 직전까지 얻어 맞음.






오르카력 94년


닥터에게 도움을 청함.

한란과 덴드로비움, 포인세티아의 dna를 접목.

결과는 아쉽게 실패.






오르카력 95년


레아 언니가 결혼.


아버지, 과하게 기뻐함. 

언니가 화냄. 

아버지가 언니에게 두드려 맞음.







오르카력 96년


오랜만에 많은 언니와 동생,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임.


샬럿 언니와 앨리스 언니는 또 다툼. 

정작 언니들의 자식들은 사이가 참 좋음. 

자식들을 보고 좀 배웠으면 함.


소완 언니와 리리스 언니도 어김없이 다툼. 

이쪽은 질이 안좋음. 자식들로 승부를 보려함.

둘에겐 안타깝게도 이쪽 자식들도 사이가 좋음.

몰래 물어보니 결혼 약속도 했다고 함.

귀여움.

언니들에겐 비밀로 해줌.


리제 언니의 딸은 첫 걸음마를 떼었다고 함.


그 말에 아버지가 또 화냄.

당장 매부를 데려오라고 고래고래 소리침. 술냄새가 많이 남.

그날부터 매부는 아버지의 샌드백이 되어버렸음.


나는 과속하면 안되겠다고 다짐.


옆에 있던 오드리 언니, 사실 나도 과속했다고 몰래 속삭임.







오르카력 97년


에밀리가 남자를 데려옴.

동거인이라고 소개.

아버지, 쓰러짐.

대신 아스널 언니가 남자를 손봐줌.


에밀리, 제녹스와 함께 난동을 부림.

나쁜 말도 많이 함. 

아스널 언니는 그런 말 가르친 적 없다며 통곡함.


챌린지 샘플을 일부 소실…







오르카력 98년


나도 연인이 생김. 결혼은 아직 생각 안 함.


첫키스 후, 내 이상형은 누구였냐고 그이가 물어봄.


나는 우리 아버지같은 남자가 이상형이었다고 말함.


그이는 기가 죽음.


나는 위로해줌.







오르카력 99년


챌린지에 진척은 없음. 

아슬아슬하게 성공할 듯 말 듯한 상태가 계속 됨.


닥터가 결혼. 

한달 뒤에 엘라도 결혼.


아버지가 펑펑 움.


레아 언니는 왜 자기 결혼할 땐 안울었냐며 또 아버지를 때림.







오르카력 100년


첫경험을 함.


많이 아팠음.


두번 째부터는 그렇게 안아프다고 리제 언니가 알려줌.


아버지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함.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음.


아버지가 알면 그이는 죽음.


나는 절대 결혼 못시킨다고 노래를 부르니까.


지겨움.






오르카력 115년.


챌린지 성공.


겨울의 해바라기.

사계의 해바라기.


씨앗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고개가 꺾여버릴 아이.


999송이를 피워낼 씨앗들에는 무엇이 담기게 될까.


…언젠가.


아버지가 겨울에서 보기를.



…………





………





……










다프네.


고마워.







* * *





잊자.


이젠 더 잃을 것도 없다.


어머니된 자 밖에 겪을 수 없는 이런 고통은 나 따위가 감당할 수 없다. 남자의 말이 맞다. 모든게 마음에 안드는 놈이어도 돌이켜보면 언제나 정답만 말해온 놈이다. 제 눈으로 보기에 나 따위가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나 또한 머리 한구석에선 언젠가 이런 꼴이 될 것을 알고, 고통만이라도 무마하고자 잠에 들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텅 비어버리는 게 제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멋대로 어머니가 되었던 주제에 이제와서 감히 훌훌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뭐든 행동으로 옮겨보면 가능할 것이다.


잊는 것과 밀접한 행위는 무엇이 있을까.

역시 없애버리는 거겠지. 

가장 확실한 방법은 태워 없애는 것. 


알았으면 곧바로 실행한다. 


다음날, 나는 저택 뒤편의 숲에서 잘 탈 것 같은 나뭇가지와 토막을 모아 우물 정 자 모양으로 해안에 쌓고, 라이터와 뗄감용 종이를 이용해 불을 붙였다.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20년간 정체된 몸속을 환기시킨다. 폐부에 들어찬 공기에서는 바닷가 특유의 산뜻한 향이 난다. 파도소리는 기분 나쁠 정도로 청량하고, 이따금 장작 타는 소리와 파도 소리 사이를 메우듯 바다새가 몇 소절 지저귄다. 


없애버릴 것들을 담아 둔 토트백에 손을 넣는다. 


처음 잡힌 것은 젖병. 매번 하늘이의 입에 물려줄 때마다 모유가 아니라 분유라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었다. 마리아나 콘스탄챠를 하나 구입해볼까 생각도 했었지만 차라리 분유가 낫다고 생각했다.


잊으려는 주제에 뭘 떠올리고 있는 건지. 


젖병을 모닥불 안에 던져넣는다.

검게 그을리던 젖병은 녹아내리듯 금세 사라졌다.


다음으로 손에 잡힌 것은 포대기와 아기띠였다.


생각하지 않는다. 떠올리지 않는다.

모닥불에 던져 넣는다. 악 문 입술에서 따뜻한 것이 스며나왔다.


다음으로 손에 잡힌 것은 아이용 샴푸와 바디워시. 빈통이다. 이런 걸 잘도 보관했었다. 망설임 없이 불에 던져 넣는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20년 동안 자빠져 자기만 했으니 그럴만하다. 


다음으로 손에 잡힌 것은 사진기. 꽤 비싸게 주고 산 물건이다. 가장 효과적으로 추억을 차곡차곡 쌓을 수 있게 해주는 물건. 남는 건 사진 뿐이라는 말에 동의하다가, 도중에 반대로 돌아서고 모닥불에 겨눈다. 파도소리가 방해한다. 어떻게든 팔에 힘을 줘 던져 넣는다.


마지막으로 잡힌 것은 사진첩이다. 


던져 넣자.


팔을 올린다. 열기를 견디지 못한 카메라 렌즈가 파열함과 동시에 바람이 불어온다. 사진첩은 몸통과 수직이 되어 눈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진첩이 촤르륵 넘어가 펼쳐진다.


타이밍이 너무 절묘해서, 바람이 일부러 팔을 뻗어 그런 건 아닐까. 그렇게 느껴졌다. 


갑자기 나타난 그 얼굴을 보고, 다리의 힘이 풀렸다.


경직된 손에서 떨어진 사진첩이 마른 소리를 내며 모래와 뒤엉켰다. 주우려고 몸을 숙이려다가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잠들어 있던 사이에 축적된 20년치의 상실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바탕 울음을 터뜨리고 난 뒤였다.


잊는다니. 태운다니. 버린다니. 


싫다. 그럴 수 없다. 잃어버릴 게 없다? 허세에 불과하다. 내 안에는 이렇게나 또렷히, 잃고싶지 않은 것들이 한가득 쌓여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다. 무엇 하나 제대로 손에 넣어 본 적이 없는 나다. 이 이상의 상실을 감내 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주제에 자발적으로 상실에 발을 들이려 했던 나 자신이 두렵기까지 했다.


아니, 애초에 쌓아오지 않았으면 이럴 일도 없었다. 나타나실 폐하를 위해 그저 흘려보내고 연소시켰어야할 시간이었음을 안다. 그 대부분의 시간은 불완전연소로 끝났음을 안다. 그런 시간을 버티겠다고 은혜로운 인간들까지 이용했다는 것을 아주 잘 안다. 인정한다. 나는 청이를 이용했다. 하늘이를 이용했다. 그랬던 주제에 나중에 가선 멋대로 폐하를 잊어가면서까지 사랑과 구원을 바랐음을, 인정한다.


다 알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로 청이의 말마따나 나는 쌓아올리지 못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것은 벌이겠지. 


벌이라면 달게 받아야 한다.


무엇도 버리지 않고 전부 끌어안기로 결정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슬픔이 경감되고 자괴가 바다 저편으로 날아갔으며 응어리가 뭉쳐있는 감각 자체는 있었지만 기분은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지나간 20년을 씹으면 활기마저 얻을 수 있었다.


돌아온 에너지를 또 다시 잠으로만 태우긴 아까우니 아무거나 해보자고 생각했다. 그 아무거나의 첫번 째는 목욕이었다. 20년간 씻지 않은 몸에선 '체취란 이렇게나 역할 수 있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냄새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20년간 은연 중에 오갔던 거대한 화장실에는 거대한 욕조가 있었다. 샤워를 먼저하고 욕조에 몸을 장시간 담근 뒤 샤워타올로 몸을 구석구석 씻었다. 다음으로 세면대 앞에 서서 얼굴을 확인했다. 수분을 한껏 머금었음에도 피부는 퍼석퍼석하고, 절반은 검은색, 나머지 절반은 금색으로 갈라놓은 듯한 머리칼은 발목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용케도 욕조에 앉아있을 때 깨닫지 못했다.


젖은 몸으로 주방에 내려가서 가위를 챙겨 다시 화장실로 돌아왔다. 검은색을 모두 자르니 머리칼은 허리높이까지 짧아졌다.


피부는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사항이라 시간을 들이기로 했다. 나는 반년 가량, 날마다 기온에 적당한 옷을 갈아입어가며 저택 근처의 벽촌을 산책했다. 인류의 흔적은 한도를 모르고 자라난 녹색에 반 즈음 삼켜져 있었어서, 논이었던 곳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밭은 찾아볼 수 없었다. 건물들은 완전히 주저앉는게 더 낫다 싶은 상태였다.


벽촌의 구석구석에는 고양이들이 많았다. 바다를 낀 벽촌. 어업이 밥줄인 마을이었을 것이다. 벽촌 치고는 있을 건 다 있는 걸로 보아 해변가 호텔의 덕도 본듯 했다. 어쨌든 물고기와 고양이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고양이가 많은 게 당연한 것이다.


고양이는 섬세한 접근법이 필요한 동물이다. 그걸 잘 알고 있던 나는 고양이 몇 마리와 금세 친해져 밥까지 챙겨주는 사이가 되었다. 해가 막 뜨거나 저물어갈 무렵만 되면 녀석들은 저택 앞을 서성거리고 있다. 지하에 있는 식재료로 직접 요리한 식사를 제공해주는 대신, 나는 녀석들의 등을 취한다. 배도 취한다. 부드럽고 말랑해서 몇 번이고 주물럭댄다.


사진첩의 사진들은 2층 거실과 침실을 꾸미는 인테리어 소품으로 사용했다. 벽에 붙이거나, 지하에 있던 예의 방에서 찾아낸 폴라로이드 줄과 집게를 이용해 꾸며놓았다. 내 집은 아니더라도 일단은 살게 됐으니 내 영역임을 확실히 하고 싶었다. 그것도 좀 특별하게. 소위 말하는 성역화였다.


나만의 성역을 구축하고 난 뒤가 되어서 피부 상태가 본래대로 돌아왔다. 적어도 육안으로 살피기엔 그랬다.


따뜻한 온색을 뿜어내는 앵두같은 전구들로 밝혀진 거실 속에서, 나는 테라스 창밖의 새하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찻물로 몸을 녹이고, 거실을 돌며 사진 한 장 한 장을 눈에 담은 뒤, 저택을 나섰다. 


하얀 블라우스에 흑색 스커트, 위에는 코트를 걸쳤고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다. 이어폰과 이어진 cd플레이어는 어깨에 걸친 토트백에 들어가 있다. 귀에는 멸망 전의 추억들이 차례차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발목 높이까지 눈이 쌓인 모래사장은 고양이들의 하룻밤 놀이터가 되어 있었다.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호텔에 도착했다. 상층 가장자리가 무너져 내부가 드러난 호텔. 이상한 기시감과 함께 현기증이 들었다. 


출입구도 무너져 있었지만 내 작은 체구 하나 받아 줄 정도는 되었다. 몸을 비집고 들어간 호텔 내부는 엉망이었다. 바깥보다 한기가 강해 으스스해서 금방이라도 유령이 튀어나올 것 같았고, 객실에 있어야할 어매니티들이 로비에 나뒹굴고 있는가 하면, 카운터 위에는 몇 명분의 백골이 올려져 있었다.


나는 해골 하나에게 말을 걸어 입실 수속을 밟고 위층으로 향했다.

목표하는 곳은 무너져 내린 곳. 바다가 잘 보일 것이다.


엘리베이터는 쓸 수 없었기에 비상계단을 이용했다. 호텔 일부가 무너졌다고 계단이 막혀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렵지 않게 무너진 곳에 도착했다. 한 객실이었다. 테라스였을 곳은 무언가에 뜯어먹힌 듯 날아가 있어서 찬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바람에는 미약한 바다냄새가 섞여 있었다. 


무너진 곳에 아슬아슬할 위치까지 다가가서 밤풍경을 살폈다. 바다는 새카매서 하늘과 위치를 바꾼다고 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것 같았고 수십 미터 아래에는 철근들이 고사리처럼 뻗친 잔해들이 쌓여 있었다. 먼 발치엔 온색으로 빛나는 저택이 보였다.


잠깐 밤풍경을 감상한 사이에 눈은 비로 바뀌어 있었다. 한겨울에, 비. 세계의 톱니바퀴가 엇나간 듯한 광경이었다.      


기시감이 강해진다. 왜 기시감이 드는지는 모른다. 이 호텔이 기시감의 원인도 아니다. 현기증이 강해져서 심호흡 해본다. 진정이 안 된다. 그러긴 커녕 마치 달뜬 듯 몸은 뜨거운 흥분에 잠겨갔다. 밤바람이 시원하다. 아래를 보면 흥분이 보다 가속한다. 기시감이 강해진다. 


아니, 기시감이 아니라 이런 상황과 풍경을 언젠가 본 것 같다.


그 순간 갑자기, 어째서인지 발을 앞으로 뻗어야 한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 충동에 채 머리가 반응하기도 전에, 이미 발은 앞으로 뻗어나가려 한다. 무슨 짓이야? 내 안의 그녀들 중 하나가 물어온다. 나도 모르겠어. 지금의 내가 답한다.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녀들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발을 뻗어 추락하려는 이유도 모르는데 이상하게 그 말에 안심이 됐다.


한 발을 허공에 걸쳐뒀다. 이제 남은 한 발만 어떤 식으로든 떼버리면 철근이 뻗어나온 잔해로 추락한다. 머리통이 완전히 박살날 것이다. 몸은 철근에 꿰일 것이다. 굉장히 불쾌한 소음이 일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내가 마지막으로 자아내는 소음은 빗소리에 묻힐 것이고, 애시당초 그 소음을 들을 이들이 없다.


한 번 더 안심한다. 빨리 발을 뻗어. 충동이 속삭인다. 나는 흐뭇한 웃음으로 충동에 고개를 끄덕이고 장난스럽게 남은 한 발로 점프해서,


그 때.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뻗었던 발을 빼고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범죄현장을 발각당한 듯한 서늘함이 가슴에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소리의 원인을 찾았다. 회색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비척거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와 내 옆에 누웠다.               


머릿 속이 멍한 상태에서 한동안 고양이를 빤히 쳐다보다가, 배를 콕 찔러봤다. 반응이 없었다. 턱을 긁어봤다. 반응이 없었다. 애교를 바라고 누운 것은 아닌 듯 하다.


…죽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애교를 부리겠다고 이런 곳까지 따라왔다는 건 이상하다.

호텔을 보금자리로 삼고 있었을 리도 없다. 호텔에서 한 발만 나가도 짐승들의 천국이 펼쳐져 있는데.


죽을 자리를 찾아온 것이겠지. 걸음걸이도 그렇고, 이 고양이의 눈에 처음부터 나따위는 비치지 않았던 거다.


내 옆에 바르게 누워 죽은 고양이를 보자 기시감의 원인을 깨달았다. 경험이었다. 나는 이런 풍경과 상황을 실제로 겪은 적이 있었다. 


장대비가 내리던 약 100년 전의 그 겨울.

나는 고양이처럼 소리없이 사라지려고 했었다.

봄을 맞닥드린 눈사람처럼 녹아버리려 했었다. 


무의식 중에, 지금의 나는 그 날을 재현하려 들었던 것이다. 

상실이 불어넣은 활기를, 자살에 사용하려 들었던 것이다.

상실을 끌어안아 딛고 일어서기보다, 함께 사라지려 들었던 것이다. 


몸을 일으켰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이젠 들어 줄 이가 없었다. 결국 나란 인간은 그 시절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 같았다. 나 자신이 지긋지긋하고 넌더리가 나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한편으론 나 스스로를 위로했다. 혹은 내 안의 그녀들이 위로해줬다. 지금의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고양이처럼 행동하는 것 뿐이라고 이해해 주는 것이다. 폐하가 나타나신다는 건 거짓말임을. 사실이더라도 남은 40년이란 시간을 이런 내가 버틸 수가 없음을. 고양이셈법으로 계산해도 너무나 길게 느껴지는 시간임을. 그러니 또 다시 의심해도 이상할 건 없다는 말과 함께.


이것이 마지막 구원이었다. 내게 남은 현실적인 구원이었다.


고양이가 구원을 자살로 왜곡시킨 순간, 구원은 구원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모르는 편이 나았다. 깨닫기도 전에 몸을 날리는게 정답이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빗물을 맞아가며 생각했다.


가장 현실적인 구원이 사라졌다. 애시당초 현실 자체가 무너졌다. 나는 지금 당장 무너지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만에 하나 정말로 폐하가 나타나신다고 치고, 이런 상태로 살아남아 폐하를 뵙게 된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폐하 앞에서 아르망일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아르망이라 부를 부분을 지켜내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의외로 답은 금방 나왔다.


간단한 일이다. 현실에 구원이 없다면 비현실에서 찾으면 된다.


상실의 활기를 모두 집어던지고 침대로 기어들어간다. 눈을 감는다. 지난 20년과는 달리 잠에 들지는 않는다. 나는 공상에 젖는다. 간단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행복한 나다. 청이와 하늘이가 있던 자리에 폐하를 끼워 넣으면 된다. 경험에 근거한 이미지 하나를 떠올려 그곳에서 폐하와 함께하면 된다. 예를 들면 어제, 나는 폐하와 산어귀의 카페에 갔다. 폐하는 리트리버를 제압하고 필드의 제왕으로 등극하신 뒤, 방목장으로 달려가신다. 나는 느긋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돌아온 폐하께 이끌려 함께 방목장으로 향한다.


방목장에서 양과 뛰어놀다가 해가 저물면 코스모스의 바다 속에서 사진을 찍는다. 저무는 햇빛이 남긴 역광이 사진을 한층 따뜻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것을 품에 안고, 운전하시는 폐하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어쩜 이런 남자가 있을까 몰래 웃음짓는 차에 폐하와 눈이 마주친다. 황급히 차창으로 고개를 돌리자 폐하의 놀리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전방을 주시하시라고 주의를 드리고 오늘 저녁은 뭐로 할까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공상이라기보다 망상이었다. 광기마저 느껴졌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현실에는 아무 것도 없는 반면, 비현실에는 아직 구원의 여지가 있는 것 같았으니까. 더 나아가 그간 내 뇌에 100년간 쌓였던 책과 음악과 영화들마저 망상을 위한 재료로 투입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지금의 내 전부이기도 했기에, 달리 말하자면 현실 자체가 재료였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정성을 들여 재료를 투입할수록 망상의 해상도는 비약적으로 상승했고, 현실은 옅어져갔다.


한 겨울의 고양이를 재현하려던 행위는 한없이 실에 가까웠지만, 그렇다고 득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현실적인 구원따위 존재하지않고 따뜻한 포옹 또한 조건없이 내어주는 인간은 지금이나 멸망 전이나 없었다는 걸, 오늘에 이르러서는 아예 인간 자체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되자 오직 폐하만을 바랄 수 있게 되었다. 영점이 제대로 잡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망상의 윤활액으로도 작용해서, 내 머릿 속의 폐하는 꽤 다양한 레퍼토리를 지니게 되었다.


망상의 재료를 수집하기 위해 영화를 탐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날은 2층 거실에서 나홀로 집에 시리즈에 열중하고 있었다. 왜 TV에 셋톱박스가 있고 그 셋톱박스 안에 나홀로 집에가 있고 애초에 TV에 공급되는 전기가 어디서 생성되는 건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망상의 재료는 영화 뿐만이 아니었다. 소파에 걸터누운 내 손엔 저주가 들려 있었다. 너희는 쌓아올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사랑 또한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저주. 폐하께 영점이 잡히자 그 저주마저 재료로 삼을 담력이 생겼기에 나는 거리낌 없이 저주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음미했다고해도 좋다.


운명은 유일하기에 운명. 나는 절대 맞물리지 못할 거라는 운명. 마음에 드는 구절은 이 부분이었다. 운명이라는 단어를 눈에 담을 때마다 계속 가슴 한구석이 시큰 거려서. 이상하게 그 시큰거림이 기분 좋아서. 이렇게나 농밀한 저주라면 정말로 운명을 포기해주는 게 예의라고까지 여겨졌다. 


그렇게 열 몇 번째 저주를 다시 읽어내려갔을 때였을까. 


정말로 순진무구한 광기가 나를 찾아왔다.


계획과 설계로 해리와 마브를 완벽하게 제압하는 TV속 케빈과 닮은, 그런 광기.


설마.

혹시.

어쩌면.


운명이란 건, 계획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 * *






그래. 계획.


계획된 운명.


사실 운명이란, 아주 철저하게 계획된 어떠한 획책같은 게 아닐까. 



        


  


* * *





내가,


생의 경험도 사랑도 운명도 허락되지 않을 만큼 죄많은 존재라 해도,


순순히 운명을 포기해야할 만큼 저주받을 존재라 해도,


계획은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 * *





운명을 계획하자.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활기가 솟았다.


할 것이 생겼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머리를 싹 밀어버리는 것이었다. 육체에 찌든 100년의 흔적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머리카락이었으니까. 걱정할 건 없다. 폐하는 약 40년 뒤에나 나타나실 테지만 이 머리가 '아르망'다운 길이까지 자라는 건 10년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잘라내야 할 일이 생기겠지. 


내 머리카락은 '아르망'이 재탄생되는 시간 속에서, 함께 재생된다.


머리카락도 문제지만 진짜 문제는 육체의 상태다. 피부는 많이 좋아졌지만 '폐하의 아르망'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친다. 하루하루 공을 들여 관리해야한다. 그뿐만 아니라 유산소와 무산소를 병행해 운동능력을 확보해야하며 100년의 관성이 짜낸 자잘한 습관이나 엇나가버린 행동거지도 교정해야한다. 환경은 마련되어있다. 1층에는 체력단련을 위한 넓직한 시설이 있고 집 밖의 모든 곳이 러닝 코스였다. 일찍이 아르망 추기경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육체 능력에 정점을 찍어봤으니, 몸을 다시 정점으로 되돌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육체 쪽은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하다.


문제는 정신 쪽이었다.


운명의 성립에 전제되는 것은 '폐하의 아르망'이다. 아르망이 아르망답지 않고서야 아르망이라고 불릴 수 없으니까. 그 '폐하의 아르망'이 되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오르카 시절의 아르망을 불러들이는 것이지만, 먼 옛날에 현실을 버티겠다고 내 손으로 죽여버렸다. 폐하를 위해서 없애버렸다. 머릿 속의 서랍장을 구석구석 뒤져봐도 찾아낼 수 없었고, 찾아낼 수 없는 것을 소생시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폐하의 아르망'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불러들이는 것도 소생도 불가능하다면 '구축'하면 된다. 내 안의 그녀들이 나눠가진 '가장 아르망다운 것'을 긁어 모아서. 그에 앞서서 해야하는 일은 '지금'의 나를 죽여야 하는 것. 나는 그녀들에게 나를 죽여줄 것을 부탁하고, 그녀들로 하여금 가장 아르망 다운 것들을 꺼내놓게 하여 발부터 머리까지 새롭게 아르망을 구축해갔다.


추기경은 관뒀다. 내 안의 그녀들이 모여 만들어질 아르망은 추기경이란 직함에 어울리지도 않을거니와, 성경의 유명한 구절 단 한 줄도 모른다. 아르망은 아르망일 수 있어도, 더는 추기경이 아니다. 그래도 상관없다. 폐하께 나는, 어떻게 봐도 '아르망 추기경'일 것이기에.


육체와 정신의 재구축이 어느 정도 되었을 무렵, 새면대 앞에 서서 나는 미소지어봤다. 기대와는 다르게 한 때 만들었었던 눈사람같은 무뚝뚝한 미소가 거울에 나타났다. 오르카의 아르망은 진즉에 죽어버렸는데 남아있다니. 100번이 넘는 봄이 지나갔는데 아직도 살아있다니. 봄의 전령들의 직무유기가 의심된다. 아직 멀었다. 폐하가 나타나시기 전까지 이 눈사람을 죽여야 한다.


폐하를 의식하고서부터 할 일은 계속계속 생긴다. 침대에 틀어박히던 불건전한 나날과는 거리가 먼 나날이 지속된다. 20년 동안 부푼 허물은 단 몇 년만에 씻겨 사라졌고 작은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철저히 교정하는 절제된 생활은 나를 '아르망'으로 빠르게 변모시켜갔다. 두피가 훤히 보일 정도로 깎은 머리칼이 견갑골까지 내려왔을 때가 되어선 여유마저 생겼다. 여유가 생기니 지루함이 동반 됐다. 육체 능력은 2년이 지나기도 전에 돌아와 있었고, 피부나 머리칼의 길이 같은 건 알아서 본 모습을 찾아갈 것이었다. 


'아르망'이 되기 위한 원활한 시간을 보내려면 스트레스 해소는 필수였다. 지금의 내가 지루함도 스트레스도 느낄 이유가 없으니 바로바로 풀어줘야했다. 아무리 폐하만을 바라보는 시간이더라도 '현재'의 나는 철저한 외톨이이고, 이것이 생각 이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어느 정도냐면 차라리 인류가 되살아나서 나를 괴롭혀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멸망 전엔 군중 속의 고독이라느니 뭐니하는 말이 존재했는데, 개소리. 진짜 고독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배부른 소리다. 매일이 새소리와 매미소리, 비와 눈, 지고 뜨는 해 뿐인 나날이라면 누구든 미쳐버린다. 바이오로이드와 접촉하는 방법도 있지 않느냐고 물어볼 수 있을텐데, 그것들은 인간도 동물도 아닌 물건이기에 논외.


때문에 나는 종종 시내로 향한다. 놀러가는 기분이다. 벽촌과 가장 가까운 도시는 차로 30분 거리에 있다. 나를 관리하는 만큼 차도 관리해왔고, 연료는 지하2층에 썩어날 만큼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굳이 도시만이 아니라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시내에 도착하면 도로 한복판에 차를 세워두고 기지개를 편다. 아주 마음 놓고 편다. 인간이 멸망했기에 바이오로이드인 채로 나돌아다닐 수 있게 됐다. 인간을 위해 태어난 존재가 인간이 사라졌기에 바이오로이드로서 존립한다. 결국 나는 바이오로이드가 아니란 증거다.


이 시내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공미를 잃어버린 도시에 색채를 불어넣는 건 식물들 뿐이었다. 고저와 관계없이 어느 빌딩이나 뿌리와 나뭇가지, 잡초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그것은 금방이고 무너질 건물들의 혈관과 근육이 되어준 것 같아서, 모종의 조화로움이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이 도시에도 눈에 보이는 건 대체로 식물과 짐승들 뿐이지만, 다른 게 몇 가지 있다. 첫 번째가 벽촌엔 없는 철충이고, 두 번째가 노래방 기기이다. 철충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소형개체를 작살냄으로써 지극히 원초적인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수단이고, 노래방 기기는 인격체 정도는 되어야 허락될 복합적인 것을 느낄 수 있는 수단이다.


어느 거리 한복판, 코인 노래방에 쓰일 법한 노래방 기기가 나뒹굴고 있었다. 처음 발견했을 땐 당연히 못써먹을 거라 생각했는데, 기기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기동시킬 연료가 문제였지. 이 기기를 어떻게 되살릴 수 없을까 고민하던 나는, 의외인 곳에서 해결책을 찾게 된다. 램파트 두 대. 노래방 기기 근처에는 철충에게 침식당하지 않고 반파 당한 램파트 두 대가 있었다. 의식도 있었다. 물론 코어가 살아있었단 뜻이다. 몇 마디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물론 나는 램파트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요점만 물었다. '비상시에 코어를 비롯한 네 파츠는 최우선 요소를 위해 쓰일 수 있는가?' 답은 예스였다. 방법까지 술술 말해줬다. 나는 감사를 표하고 녀석의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넣어줬다. 그런 뒤, 배선을 두 대의 램파트에게 이어서 노래방 기기를 소생시켰다.


그렇게 나는 종종 생각 날 때면 노래를 부르려고 도시를 찾는다. 생각보다 다양한 음악을 담아놓은 기기였고, 아침부터 찾아가 밤이 될 때까지 부르는 날이 많았다. 내가 도시 한복판에서 노래를 부르기만 하면, 도시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다. 


고정된 번호를 입력하는 것만으로 추억을 읊을 수 있다니. 노래방은 근사한 발명이다.


그런가하면 아주 신기한 발견을 한 때도 있었다. 램파트 두 대의 수명이 다해 노래방 기기를 집으로 옮기려던 날이었다. 뒷좌석을 접어 넓직해진 트렁크에 기기를 막 실었을 때였는데, 트렁크 문을 닫고 뒤로 돌자 스피커 한 대와 마주쳤다.


녀석은 뭐가 이상한 건지 내 앞에 멀뚱멀뚱 서서 동체를 갸웃거리다가, 확성기로 추정되는 부분에서 상상도 못한 음율을 뿜어냈다. 존 레논의 imagine. 노이즈가 섞여 있었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존 레논이었다. 나는 기가막혀서 참수검을 떨어뜨리고 폭소했다. 존 레논보다 더 존 레논같이 imagine을 부르는 건 둘째치고, 인류가 사라졌으니 저 스피커야말로 진정한 존 레논이라 할 수 있었다. 존 레논의 재림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도대체 어떤 경위로 imagine을 부를 수 있게 된 걸까? 그것보다 철충이 imagine이라니, 인류만을 골라 죽인 존재들 다운 모독법이었다. 존 레논이 알면 관짝을 부수고 뛰쳐나올 것이다. 


그러고 보니 멸망의 순간을 돌아보면, 철충들의 목적은 인류의 멸망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가치있는 것은 목숨이라는 인식을, 인간은 고작 피를 담아둔 주머니에 불과하다는 인식으로의 개변. 피분수를 뿜어내며 터져가는 인간들을 돌이켜 보면, 그것이 진짜 목적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흥미가 동해 스피커를 노래방 기기와 함께 데려왔다. 두 다리를 잘랐고, 무게가 상당해서 차로 질질 끌고 왔다. 동체만 덩그러니 남은 스피커는 숲에 던져두었다.


이 쯤에서 고백하자면, 사실 운명을 계획한다느니 계획된 운명이라느니 운운해도 별 거 없는 소리였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매력요소를 최대한 길러내는 것.


이미 죽어버린 '아르망 추기경'에게서 이어받은, 그 기억 속의 폐하가 좋아하실 법한 것들을 꾸려가는 것. 완전히 허를 찌른 완벽한 한 방을 마련하는 것. 


그 뿐이다.


그러니 머리칼이 견갑골 너머까지 다다른 지금이야말로 슬슬 정리를 할 때였다. 


나는 폐하와 재회하면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지금까지 그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부러 피하기도 했다.


당연히, 

연인이 되고 싶은거지.

반려가 되고 싶은거지.


왜 운명을 계획하고 있겠어. 왜 이제까지 살아남았겠어.


그저 다시 한 번 뵙자고 살아남은 건 아니다.

그런 것에 만족하고 끝날 만큼 나는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 


슬슬 아르망으로서의 육체도 정신도 완성이 되었을 무렵부터는 사계절 내내 수단만을 입고 생활했다. 비레타는 없었으니 쓰지 않았다. 신발은 '아르망 추기경' 시절에 신고 다니던 것과 가장 유사한 로퍼를 신었다. 시내에 있는 백화점에서 찾아낸 것이었다. 한 번 세탁하니 그런대로 신어줄만 했다. 


그래도 시내에 갈 때는 수단을 벗고 블랙을 기조로 코디해서 간다. 이 무렵부터 바다 쪽에서나 시내 쪽에서나 '저항군'이란 단어가 빈번하게 들려왔기에 최대한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불필요한 접촉을 하게 되면 '폐하가 태어나시기도 전에 폐하를 상정한 계획'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들킬 우려가 있다. 저항군이 그런 걸 알게 될 여지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내 쪽에서 발설할 것만 같았다. 그것도 아주 거친 방법으로. 그렇게 되면, 우발범죄보다 계획범죄가 더욱 죄질이 ―전혀 범죄가 아니지만― 나쁘단 맥락으로 나를 아주 못된 개체 취급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의 운명은 계획이기에 풍부할수록 좋았다. 폐하께 어필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좋았다. 그래서 머리칼이 허리에 다다랐을 무렵, 글을 써봤다. 글을 쓰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의외로 막힘없이 써내려갔다. 거창하게 말하면 연인에게 바치기 위한 소네트를 써내려가는 심정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야 내 글이 상정한 독자는 단 한 명 뿐이었으니까.  


그녀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100년 동안 겪고 보고 느낀 것을 끄적여 내려갔다. 어느 정도 썼을 때 멈추고 한 번 읽어봤다. 그저 사실만을 적어내려간 글이었을 뿐이었는데 내용은 지독하게도 자극적이었고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색조는 잿빛에 가까웠다. 그 누구도 사실일 리 없다며 고개를 저을 이야기로 보였다. 특히 마틸다 파트는 아예 빼버려도 상관없지 않을까 싶었지만, 마틸다가 격렬하게 반대했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런 글을 훗날의 폐하께 전해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몇 번이고 고쳐 썼다. 지난 100년을 흐물거릴 정도로 곱씹어 다양한 형식으로도 써내려갔고, 너무 자극적인 부분은 유명한 작가들이 저술한 이야기로 대체해 사실성을 제거했으며, 한없이 공허해보이는 잿빛색은 열심히 펼쳐온 망상에서 추출한 색깔로 덧칠했다. 


그러나 결국 끝에 가서는 그간 썼던 글을 모조리 폐기하기로 했다.

어떻게 완성해도 내 글은 독기와 잿빛을 머금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최초로 썼던 가장 지독한 글만 보존했다.


폴 오스터는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서 전한다. 한 사람이라도 믿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리 없다고. 


그렇다. 내가 기억하는 폐하는 자신의 바이오로이드와 관련된 것이라면 그 어떤 끔찍한 이야기라도 모두 귀담아 듣는 분이셨다. 그런 분이 내 이야기라고 해서 믿어주지 않으실 리 없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현재의 나나 훗날의 나 모두를 구원할 첫 번째 발걸음이다. 지금이야 인간이 존재하지 않으니 '사실이었던' 이야기나 '사실인' 이야기가 될 수 없을지 몰라도, 사실이 '될' 이야기는 될 수 있다. 단 하나뿐인 이야기를 수용해주실 단 하나뿐인 인간. 내가 지나온 것들은 모두 사실임을 폐하께서 긍정해주시는 것으로, 나는 구원받을 수 있다. 이 지독한 고독 속에서 끄집어내 주실 수 있다. 


일단은.   


물론 나타나실 폐하가 내 기억 속의 폐하와 동일한 인물이라는 가정 하의 이야기다.


그러고 보니 새로 나타나실 폐하가 기존의 폐하와 다른 분이라면, 나는 어떡하지.

왜 여태 그럴 가능성은 생각하지 못했지.


"…"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백 수십 년 전의 폐하와 앞으로 나타나실 폐하는 동일한 분일 거란 확신이 든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글을 썼다. 장황하게 써봐야 원치않는 독기와 잿빛만이 담길 뿐이어서 이번에는 최대한, 아주 간추려서 써봤다. 이야기는 한없이 길게 쓰는 것은 쉬워도, 간추리고 간추려 메시지만 압축해 담아내기란 아주 어렵다. 그것을 깨달았다. 세상에 존재했었던 모든 작가들에게 경의를 보낼 정도로.


그 어려운 것을 해내기 위해 오랜 시간 활자의 바다를 표류했다. 닥치는 대로 영화를 봤다. 음악을 들었다.


그렇게 얻어낸 지식들과 내 소망과 열망을 담아서,


단 한 문장만을 적었다.





함께해요. 이 세상의 마지막까지.







* * *






그날은 시내에서 빨리 돌아왔다. 차내의 시계는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는데도 상향등까지 켜야할 만큼 빗줄기가 굵었기 때문이다. 


저택으로 돌아와 몸을 씻고, 소파에 앉아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그런 다음 2층으로 내려가 브랜디를 한 병 들고와서 막 컵에 따르려는데, 귀를 의심하게 되는 소리가 들렸다.


"계세요? 누구 없나요?"


분명 현관 쪽에서 그렇게 들렸다. 


이런 시기에, 언어? 라고 의심할 정도는 아니었다. 인간이 아니더라도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것들은 존재한다.

예를 들면,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던 년들이라던가.        


누군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 듯이 집주인을 찾는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미친듯이 쏟아지는 비에도 묻히지 않는 걸 보아 상당히 크게 외치고 있는 듯했다. 가만히 있다가는 무단으로 침입할지도 모르니, 하는 수 없이 현관으로 나갔다. 아, 나가기 전에 수단은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누군가를 상대할 이로는, 고민 끝에 마틸다를 골랐다.


"우왓! 바이오로이드! ……누구지?"


현관문을 열자 그렇게 외친 것은, 내 기억이 맞다면 테티스라는 개체명을 가진 바이오로이드였다. 그 옆에는 운디네가 제 몸을 껴안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들여보내주면 안되겠냐는 애처로운 눈망울을 굴리면서.

탐색 중이었는데, 기후 악화로 고립되었다고 한다.


나는 고갯짓으로 둘을 들였다. 불편할 테니 장비는 벗어서 처마 밑에 둘 것을 권유했다.


비가 그치면 바로 돌려보내자. 성가신 상황은 피하고 싶으니 최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자. 간식거리에 차 한 잔이면 충분할 것이다. 나는 차를 한 잔 내올테니 2층으로 올라가 있으라 말하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둘이 계단을 전부 오르기 전에 외쳤다.


아무것도 건들지 말라고.  


차와 스낵을 테이블에 올려주고나서 문득 생각난 게 있었다. 뒤뜰에 설치한 노래방 기기에 커버를 씌웠던가? 비좀 맞는다고 고장 날 것 같진 않지만 혹시 모르니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둘에게 잠깐 뒤뜰에 갔다올 것이니 이곳에서만 있으라고 당부했다. 


테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실의 분위기가 으스스하니, 귀신이 나올 것 같니, 흡혈귀가 살 것 같다느니 지껄였고 운디네는 어떻게 이런 좋은 곳에서 혼자 살고 있느냐고, 너는 누구며, 혹시 저항군에 합류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무시하고 뒤뜰로 향했다. 중간에 흡혈귀는 맞을지도 모른다고 피식하면서.


뒤뜰의 노래방 기기에는 커버가 씌워져있지 않았다. 집으로 뻗어있는 배선은 고랑에 잠겨 있었고, 마이크는 이미 고장났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서둘러 옆에 개어둔 블루 시트를 펼쳐 기기에 씌우고 마이크는 따로 분리해 집으로 들고 왔다.


자, 그래서 이 다음의 일에 대한 것이다만, 내가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봐야 누가 됐든 질타할 것이 분명하니 최대한 말을 아끼겠다. 어찌됐든 이 일에 대해 질타 당하고 힐문을 받으면, 대답이 궁해질 것 같으니까.


2층으로 돌아오자마자 생각한 것은 '아무것도 건들지 말아라.' 라고 괜히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되려 더욱 건드려보고 싶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호러 영화나 슬래셔 영화에서도 보통 그런 인물이 가장 먼저 개박살난다.


벽의 줄을 따라 걸려있는 사진들은 도중에 테라스 창이 열렸던 건지 엉망으로 흩뿌려져 있었고, 운디네는 그 사진들을 주워가며 테티스에게 무어라 외치고 있었으며, 테티스의 손에는 폐기될 예정인 글을 모아둔 파일철이 들려 있었다. 내게 사과하는 운디네의 말을 들어보니, 사진이 이 지경이 되어버린 건 테티스의 철없는 행동 탓인듯 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는 운디네의 머리통을 박살냈다. 호텔에서 찾아낸 골프채로 도대체 얼마나 내려쳤는지 모를 정도로 내려쳤다. 


간혹 바다를 홀 삼아 골프공을 쏘아대기도 했기 때문에 챙겨둔 골프채였다. 

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고, 일단은 계속 내려쳤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머리의 단단한 부분까지 흐물흐물해질 때가 되어서 매질을 멈췄다. 육편과 뇌로 추정되는 조각이 상상이상으로 먼 곳까지 튀어 있었다.


골프채를 아무데나 집어던지고 테티스 쪽을 봤다.


응전하려는 건지 무릎꿇고 빌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자세로 서있다. 그러다 귓가의 통신기를 깨달았는지 "여기는…!" 이라고 귓불에 손을 대고 말했다. 물론 그 뒤는 말하지 못했다. 늑골을 파고 들어간 팬텀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으니까.


천천히, 아주 천천히 팬텀을 찔러넣어갔다. 꼭 야들야들한 카스타드를 파고들어가는 것 같았다. 폐가 피로 가득 찼는지 핏물이 역류하듯 입에서 그륵그륵 튄다.


테티스는 딱 하늘이와 비슷한 신장이었지만, 죄악감 따위 조금도 들지 않았다. 죽인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인간이나 동물은 죽인다는 표현이 어울려도 물건에는 죽인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다. 


무슨 우연인지, 부서진 물건들을 바다에 집어 던져넣음과 동시에 구축은 완료되었다.


구멍이 뚫린 듯한 하늘에 손을 뻗었다. 

빗속에서 나는 빌었다.


폐하.


10년만 일찍 와주시면 안 될까요?






* * *


   




안녕하신지요.

저는 아르망.

2160년생이랍니다.


…추기경은 아니에요.


철충에 의해 재편된 세계는, 재편에 재편을 거듭해갑니다.



나리는 꽃잎들에,

폭풍에,

태풍에,

미친듯이 찌는 더위에,

풀벌레들의 합창에,

바스라지는 낙엽에,           

눈보라에,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서 서리를 껴입은 잡초들은 하얗게 죽어갑니다. 

거리 곳곳에 스며있는 저마다의 이야기들은 비에 씻겨 내려갑니다. 

제 이야기도 씻겨 내려갔을 겁니다.


그렇게 시간은 흐릅니다. 

과거에서 현재를 경유해 미래로, 계속해서 흐릅니다.


저는 뒤뜰에 대자로 누워있습니다. 달이 나타납니다. 영휴하는 달이 지나가면 보름이 흐르고, 소산하는 유성을 백 개 즈음 헤아리면 한 달이 지나갑니다. 그 소산의 마지막 순간은 강렬하고도 미약해서, 아득히 먼 옛날의 누군가가 지녔던 눈빛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앞으로 뵙게 될 분이 가졌던 눈빛이었다는 걸 깨달은 건 반가웠습니다. 더는 그분이 제가 알던 분인지 아닌지 헷갈릴 일이 없어졌으니까요.


그렇게 시간은 흐릅니다.

과거에서 현재를 경유해 미래로, 계속해서 흐릅니다.


공해란 것이 사라진 세계의 하늘은 정말로 엄청납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별이 빛나는 하늘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어느 곳으로 눈을 돌려도, 어린아이의 실수로 흩뿌려진 듯한 실알갱이들이 정말 어디에나 있는 겁니다. 저는 그런 환상적인 광경에서 별다른 의미를 추출해내려 하지 않습니다. 부여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무의미한 것이야말로 순수와 가장 밀접하단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그러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저 그곳에 존재하고 있어야만이 순수한 것이니까요.


그렇게 시간은 흐릅니다.

과거에서 현재를 경유해 미래로, 계속해서 흐릅니다. 


저는 조금 짓궂은 면이 있습니다. 봄이 한창이라 꽃잎이 마구 나릴 때면 하루라도 빨리 꽃잎이 전부 떨어지길 바라고, 여름이 되어 본격적으로 팽창하는 생명들에게선 그만한 수만큼의 죽음부터 떠올립니다. 가을에는 낙엽을 밟아 부스러뜨리는 것을 좋아하고, 겨울에는 비가 내리길 바랍니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매미입니다. 매미 자체가 좋다는 것이 아니라, 매미와 경쟁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가 사는 곳의 뒤뜰에는 노래방 기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 건너에는 숲이 무성한데, 여름만 되면 그곳은 터져나갈 듯이 시끄럽습니다. 매미 때문이지요. 저는 마이크를 끌고 와 숲을 향한 채로 노래를 부릅니다. 어떤 노래든 상관없이 볼륨만 크게 설정해 둡니다. 그러면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매미들의 소리는 좀 더 커져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흡족하여 계속해서 노래를 부릅니다. 매미와 경쟁을 벌입니다. 언젠가 끌고 왔던 스피커의 조력도 구합니다. 제 노래를 따라 부르거든요.


한 열 곡 정도 부르고 나면, 밤이 되어서도 매미들은 정신없이 웁니다. 따로 조명을 숲에 쬐어 밤을 낮이라 착각하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해의 매미들은 8월 중에 몰살 당합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매미들이 제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구애에 성공했을까요. 


재밌습니다. 가을이 해야할 수고가 줄어들기도 해서 보람도 느낍니다.


그렇게 시간은 흐릅니다.

과거에서 현재를 경유해 미래로, 계속해서 흐릅니다.

 

시내에서 걸어다닐 줄 아는 물건들을 습격했습니다. 웬만하면 이 도시로는 찾아오지 않는데.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것들은 처음에 저를 같은 물건이라 오인하고 무어라 말을 걸어왔지만, 저는 아무 말 없이 물건들을 모두 베거나 뚫어버렸습니다. 


그게, 있죠. 이 도시는 애시당초 제 영역이거든요. 고양이를 상상해보시면 돼요. 영역을 침범당한 고양이가 가만히 물러나나요? 아니죠?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저는 영역을 침범 당한 고양이처럼 싸운 거에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영역을 침범하는 것들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에요.


물건들에게서 쓸만한 것들을 몇 개 발견했어요. 통신기와 지령이 담긴 타블렛. 인간들을 찾고 있나보네요. 


저는 이 통신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만 하면 되니, 계속 마음 편하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 * *





때는, 왔다.


21번 분대의 통신내용만 집중적으로 들어가며 매일을 기다렸어요. 


어느 날, 아주 기분 나쁠 정도로 해가 맑은 날.


21번 분대가 마지막으로 좌표 보고를 하고 몇 일이나 통신을 보내지 않은 날.


나는 그 마지막 좌표를 향해 밤낮없이 향했다.


석양이 낀 하늘 아래엔 등대가 있었습니다.


나는 거리를 두고, 가늠한다.


저는 서서히 거리를 좁히며, 고민합니다.


뭐가 좋을까요.


지금 막 철충과 조우한 상황에 난입하기 위해선,


누가 어울릴까요.


키이라 나이틀리? 샤를리즈 테론? 케이트 베킨세일? 스칼렛 요한슨? 페넬로페 크루즈? 에바 그린?


아니.


누구도 어울리지 않는다.


누구도 어울립니다.


그러니까 누구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거기! LRL! 조심해!"


순식간에 난입해서 LRL이라 불린 것을 구해내고, 나머지 벌레들을 정리했다.


등 뒤에서 누구냐고, 정체를 밝히라고 외친다. 다 여자 목소리.


저는 뒤돌아 치맛자락을 살포시 잡아올려, 우아하게 허리를 굽혔습니다.


"아르망이 폐하를 뵙습니다."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계속.


나에 대해 수근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르망이 누구며, 뭐하는 개체인지.

조금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마침내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반가워, 아르망."


그 한 마디에, 150년의 고독이 메워졌습니다.








* * *





많이 늦었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사, 집, 회사, 집. 현생이 너무 바빠서..

아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통발 돌리는 것도 깜빡하고 원스 출첵도 깜빡하고 너무 싫다.


어쨌든 지금부터는 오르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서서히 미쳐가는 캐릭터를 묘사하는 건 진짜 어려운 것 같습니다


완결까지 달리겠습니다


또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