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강의를 마친 후 방에 들어온 다프네의 처치를 받은 리마토르는 퇴원하고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닥터가 그의 몸 상태에 대해 따로 이야기할 내용이 있다며 의사의 직권으로 퇴원을 보류시켰고, 그는 닥터와의 독대를 위해 공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많이 더럽지? 학자의 방이니까 이해해줘. 리마토르 오빠도 학자니까 온갖 자료에 묻혀 사는 건 일상일 거 아니야?”

 

“그렇긴 합니다만, 이 정도로 잔뜩 쌓아두고 지내지는 않습니다. 이공계 학자들은 다들 이렇게 논증할 자료가 많은가요?”

 

“걱정 말라고. 이 자료들은 전부 내 머리 속에 들어있으니까.

 

그보다도 내가 오빠를 이 곳으로 부른 이유가 뭔지 대강 감이 와?”

 

닥터의 질문에 리마토르는 몇 초 간 고민했으나, 뚜렷한 답이 보이지 않자 적당히 찍어 맞췄다.

 

“글쎄요. 아마 건강 문제가 아닐까요?”

 

“오, 정답이야. 역시 학자라서 그런지 두뇌 회전이 빠르네.”

 

넘겨짚었는데 소 뒷걸음질에 쥐 잡힌 격으로 정답이 얻어 걸리자 리마토르는 내심 속으로 놀랐다.

 

“오빠가 응급실로 실려 온 후 검진을 위해 오빠의 신체를 스캔해봤어. 그랬더니 뜻밖의 결과가 많이 나오더라. 이제부터 내가 무슨 말을 하던 놀라면 안 돼.”

 

“걱정 마세요. 이미 놀랄 일을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닌데요.”

 

리마토르는 별 일 아닐 거라고 생각했으나, 닥터의 표정은 종전까지 장난기 가득하던 목소리와 달리 이미 진지하게 굳은 후였다. 그 모습에 그도 가벼운 일이 아님을 직감하고 속으로 긴장의 날을 세웠다.

 

“리마토르 오빠는 기억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알아?”

 

“음... 해마라는 뇌의 부위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 밖에 몰라요.”

 

“해마는 우리 뇌에서 기억을 저장하는 부위로, 기억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크랩 단백질의 합성을 통한 시냅스의 연결이 필요해. 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한다면 시냅스가 연결되어 해마에서 정보를 인출하는 것이지. 이 연결을 자주 사용한다면 시냅스의 연결이 두터워져서 기억을 떠올리기 쉬워지고, 반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옅어지다가 해체되는 거야. 그럼 기억을 인출하지 못하는 ‘까먹었다’ 상태가 되는 거지.

 

다시 말해, 우리가 기억을 잊어버렸다고 하는 건 저장된 기억을 꺼내지 못하는 것이지 기억 자체가 소멸하거나 한 건 아니야.”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겠어요. 그래서 닥터, 제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뭐죠?”

 

“리마토르 오빠와 사령관 오빠 모두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지? 사령관 오빠는 신체 스캔을 했음에도 뇌에서 눈여겨 볼 부분이 없었던 반면, 리마토르 오빠는 짚어볼 부분을 찾았거든. 이거 한 번 봐봐.”

 

닥터는 그렇게 말하더니 홀로그램 화면으로 2장의 사진을 띄웠다. 뇌 조직을 3D 그래픽으로 보기 쉽게 만든 것이었으나, 관련 지식이 전무한 리마토르에게는 그저 윈도우 화면 보호기를 보는 느낌이었다.

 

“보면 알겠지만 왼쪽과 오른쪽의 시냅스 연결은 극명한 차이를 갖고 있어. 한쪽은 강하게 연결되었고, 다른 한쪽은 해체되기 직전의 가느다란 시냅스 가닥만 남은 정도지.”

 

“왼쪽에 있는 강하게 연결된 시냅스가 사령관님 것이고, 오른쪽에 있는 가느다란 시냅스 가닥이 제 것인가요?”

 

“아니, 둘 다 리마토르 오빠 거야. 내가 특이하다고 말한 부분은 바로 오른쪽의 해체를 앞둔 시냅스인데, 이 부분을 잘 봐줘.

 

보통 기억상실이 벌어진다고 하면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완전히 다 까먹는 걸 떠올리고는 하는데, 그런 전(全)기억상실증은 되게 드물어. 대부분의 기억상실은 부분적인 기억만 잊어버리는 부분기억상실증이고, 보통 사회적 규범은 기억하지만 자신에 관한 부분만을 기억하지 못하지.

 

리마토르 오빠도 마찬가지야. 부분기억상실증이라고 할 수 있는데, 통상적인 부분기억상실증의 원인이 물리적 원인과 심리적 원인이 있음을 감안하면 오빠는 전자에 해당해.”

 

“음... 혹시 브라우니가 어제 저를 술병으로 내리친 게 원인인가요?”

 

“그건 아니야. 오빠는 머리를 맞기 전에도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였잖아. 내가 말하는 물리적 원인은 약물을 사용한 걸 말해. 심리적 원인에서 기인한 부분기억상실증은 시냅스의 해체가 아니라, 해마에서 그 기억을 꺼내는 걸 거부하는 형태로 나타나거든. 시냅스의 해체가 벌어진다고 해도 속도가 느리고.

 

그런데 리마토르 오빠의 시냅스를 보면 그렇지 않아. 주변에 다른 시냅스의 축삭말단과 수상돌기의 접합이 끊어진 것뿐만 아니라, 시냅스의 세포가 파괴된 정황이 보이거든. 즉, 지속적인 약물 투여로 인해 시냅스가 파괴되어 기억을 인출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보는 게 타당해.”

 

그 말을 들은 리마토르는 황망히 닥터의 입을 바라보았다. 동면 전의 자신이 최소한의 선은 지키면서 살 줄 알았는데 약쟁이였다니, 현재의 그에게 그 사실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기억 복원은 가능할까요?”

 

“인위적으로는 기술의 한계 때문에 어려워. 시냅스 연결을 촉진시키는 약물을 투여해볼 수는 있겠지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고, 저 사진에서 나오는 것처럼 오빠의 뇌가 자체적인 복원에 들어갔으니까 시간이 걸려도 혼자 길을 복원하도록 내버려두는 편이 좋아.”

 

“...알겠어요, 닥터. 알려줘서 고마워요.”

 

“고맙긴. 혹시 힘든 일이 있으면 날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네. 알겠어요.”

 

그는 방을 나서다가 문득 AGS 적재실이라는 곳을 보더니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몸을 틀었다. 하르페이아와 네오딤과 대화하며 얻은 고민인 ‘AGS의 정체성’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를 기원하며 그는 그 넓은 공간에 발을 디뎠다. 장소가 AGS들의 숙소인 만큼 검은 동체의 기계들이 그를 반겼다.

 

“음? 이게 누군가. 새로 합류한 연구원이 여긴 어쩐 일인가?”

 

휴식을 취하던 AGS 부대의 지휘관 알바트로스가 그를 발견하더니 인사를 건넸다. 그의 등장에 로크와 Mr. 알프레드도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왔다.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렀습니다. 겸사겸사 어제 디너쇼에서 있었던 일도 생각나서요.”

 

“크흠, 최강의 지휘관인 내가 노래가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다. 전부 로크를 빛내주기 위한 내 혜안이었을 뿐.”

 

“자신의 그림자를 감추기 위해 밤을 몰고 오는 악수를 한 번 더 두시는군요. 빛을 걸어세움으로써 그림자를 몰아내시지 그러십니까?”

 

“조용히 해라, 로크. 최강의 지휘관인 나는 너의 발언을 허가하지 않았다.”

 

알바트로스의 자기변명에 로크가 특유의 말투로 깐족이자 알바트로스도 되받아쳤다. 그 둘이 투닥거리든 말든 Mr. 알프레드는 리마토르의 머리카락에 관심을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머리카락 한 올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알바트로스 지휘관과 로크 공은 일전에 봤는데 이 분과는 초면이군요. 죄송합니다만 누구시죠?”

 

Mr. 알프레드의 말을 무심히 넘긴 리마토르는 그의 이름을 물었다. 그의 질문에 알바트로스는 대답해주었다.

 

“그 자의 이름은 Mr. 알프레드. 최강의 지휘관에게 어울리는 고차원의 자아를 가진 중장 지원기다.”

 

“하하, 지휘관께서 직접 저를 소개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연구원님께서 저를 찾아오셨으니 더욱 더 그러네요!”

 

“반갑습니다, Mr. 알프레드. 저는 이미 아시는 대로 연구원 리마토르입니다.”

 

둘이 통성명을 마치자 로크가 분위기를 읽더니 리마토르에게 질문을 던졌다.

 

“연구원 각하, 묻고 싶은 게 있으니 지혜를 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이죠.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저를 포함한 AGS는 창조된 존재로서 AI를 갖고 있죠. AI의 학습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저는 앙헬 공의 무덤을 지키다가 사령관 각하의 손에 해방된 이후로 쭉 품었던 의문이 있습니다.

 

과연 AGS의 AI에게 주입된 현실 인식들은 진실인 건가요?

 

저는 앙헬 공의 명을 받아 비밀스러운 일들을 수행하며 멸망 이전 인류의 사회를 바라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들은 제게 이식된 AI의 초본이 제공하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과는 달랐고, 앙헬 공이 자연의 섭리에 따라 소멸했음에도 주박에 묶여 있어야 했죠.

 

제가 보면서 알게 된 정보에 따르면 더 이상 따를 인류는 이미 멸망하여 저와 같은 세계에 없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자율 판단이 가능함에도 제게 내장된 AI의 명령은 ‘명령권자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라’였죠. 그래서 사령관 각하를 뵙기 전까지, 기존 명령권자인 앙헬 공의 명령에 따라 그 분을 수호하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는 것과 배워서 알게 된 것들의 괴리, 그것이 AI라는 필터를 거친 현실의 상에서 비롯하는 것이라면 과연 우리는 그 필터를 신뢰해도 괜찮은 것입니까?

 

이 점에 대해 연구원 각하의 지혜를 빌리고 싶습니다.”

 

로크의 말을 들은 리마토르는 자신의 생각이 복잡하게 얽히는 느낌을 받았다. 로크의 말대로라면 인간에 가깝도록 설계된 AI와, 명령을 수행하도록 만들어진 AI는 인간이 가진 의지와 의무의 관계와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고민한 AGS의 지능과 의식의 차이는 이미 무의미해진 것이었다. 감정적 판단을 배제하고 오직 의무만을 이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AI와, 그에 반발하면서도 끌려갈 수밖에 없는 로크의 의지. 리마토르는 자신의 머리가 점점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아직은 설명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가 머리에서 만들어지는 것만 같았다.

 

“...연구원 각하?”

 

“잠깐만, 거의... 거의 다 되었어.”

 

휘몰아치던 정보와 논리 흐름의 폭풍이 점차 제자리를 찾아가고, 태풍의 핵에서 그가 좇던 사고의 결정체가 발견되었을 때쯤 그는 기분 좋은 미소로 로크에게 말을 걸었다.

 

“생각이 대강 정리되었어요. 고맙습니다, 로크 공.”

 

“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검은 수호자의 혜언이 또 다시 기적을 불러일으켰군. 경배하라!”

 

“연구원이 나 최강 지휘관이 아니라 로크따위에게 붙어먹다니, 인정할 수 없다!”

 

어부지리로 우쭐한 로크와, 로크가 잘 되는 꼴이 배 아픈 알바트로스가 또 다시 말로 치고받기 전에 리마토르는 자신의 생각을 다시 정리해볼 요량으로 둘을 보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어디 한 번 즉석에서 철학 강의를 시작해보도록 하죠.”

 

그의 말에 로크와 알바트로스는 언쟁을 멈추고 그에게 집중을 기울였다. 리마토르는 Mr. 알프레드의 도움을 받아 홀로그램을 띄우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로크 공의 이름과 똑같았던 과거의 사상가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존 로크, <리바이어던>을 저술한 토마스 홉스와 <사회계약론>을 저술한 장 자크 루소와 엮여 정치제 사상가 3인으로 분류되고는 하지만, 사실 존 로크는 인식론 철학에서 임마누엘 칸트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입니다.

 

로크가 주장한 인식론은 경험론적 기반을 갖고 있습니다. 로크는 어떤 사실에 대한 관념이 외부사물의 실재성을 보증할 수 없고, 무언가를 안다는 사실이 오로지 경험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주장했죠. 이성을 중시한 합리주의자들이 개념을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과는 정반대였죠.

 

로크는 경험이 모든 사고의 근원에 있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여기서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정신 또는 의식의 대상인 관념의 산출 과정에서 이성이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부정했습니다. 이성이 아예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성이 새로운 대상을 인식하는 사고를 능동적으로 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저 경험을 통해서 주어진 표상들을 정리하거나 비교하는 수동적인 것이라는 거죠.

 

자,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해보죠.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만 무언가를 새로 배우고 성장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모든 경험이 없는 갓난아이는 어떤 정신 상태를 가진 걸까요? 인간이 경험하기 전의 상태에 대해서도 로크는 설명을 해두었습니다. 로크는 경험하기 전의 인간 정신은 ‘백지상태’에 놓여있고, 경험은 외적인 경험인 '감각'내적인 경험인 '반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죠. 감각은 계속 말했던 이고, 반성은 외부사물과 직접적으로 관계하지 않으며 감각에 의해 받아들인 표상들을 비교, 제한, 결합하는 소극적인 능력입니다.

 

여기까지 봤을 때, 로크가 본 경험이 없는 갓난아이는 어떤 상태일까요?”

 

리마토르의 말을 들은 세 AGS는 모두 심각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표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건 Mr. 알프레드 뿐이었으나, 늘상 허세에 차 있는 알바트로스와 윤활유에 중2병 성분이 함유된 게 아닌지 의심받는 로크가 대화에서 침묵한다는 건 만약 그들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굳어있을 것이라고 리마토르는 생각했다. 고뇌하는 그들을 기다려도 답이 돌아오지 않자 리마토르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로크의 주장에 따르면 갓난아이는 백지상태일 겁니다.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은, 그래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죠. 이 ‘받아들임’의 과정에 대해서 로크의 주장을 더욱 깊이 바라봅시다.

 

로크의 인식론의 구조는 감각->반성->관념의 과정으로 간단히 정리됩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감각을 반성의 과정을 거쳐 관념으로 만드는 것이 인식이죠.

 

로크는 여기서 관념을 단순관념복합관념으로 나누는데, 단순관념우리가 사물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여 얻는 관념입니다. 단순관념은 다시 일차성질과 이차성질로 나누어지는데 일차성질은 연장, 형태, 운동, 길이, 수와 같은 객관적인 성질이고 이차성질은 색, 맛, 향기와 같은 주관적인 성질이죠.

 

우리가 일상생활을 살면서 만나는 관념은 일차성질과 이차성질 중 뭐가 더 많을까요? 저는 이차성질이라고 봅니다. 분명히 객관적인 일차성질이 양으로 보면 압도적이지만, 그 모든 것을 우리 사고라는 필터를 거쳐서 바라보기에 객관적인 존재에도 주관적인 감상이 들어갈 수밖에 없죠. 로크의 주장처럼 이성이 하는 일이 적다고 해도, 반성의 과정에서 우리가 나름대로 갖는 주관이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일차성질과 이차성질이 섞인 단순관념도 있겠죠. 이게 바로 복합관념입니다. 정신이 단순관념을 서로 비교, 제한, 결합하여 산출하는 관념이 복합관념인데, 이렇게 단순관념으로부터 복합관념을 산출하는 과정에서는 경험이 불필요하죠. 즉, 복합관념은 단순관념처럼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인 걸 재구성하는 것이죠. 이것이 로크가 말한 ‘반성’의 과정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 하나. 제가 계속 로크의 인식론이 경험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해서 로크가 이성을 무시하는 철학자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당시 기준으로 봤을 때 로크는 이성의 역할을 폭넓게 인정한 쪽에 더 가까웠어요.

 

복합관념을 산출하는 과정에서 정신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복합관념엔 사물의 공간, 시간적인 상태나 수를 표현하는 '양태', 신, 정신, 물체와 같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나 인간, 식물, 동물과 같은 종을 표현하는 '실체', 두 가지 이상의 사물을 비교하는 '관계'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단순히 겪어봤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걸까요? 양태와 관계는 몰라도, 실체는 눈에 보이지 않으니 경험하기 어려울 것이며 경험하더라도 제대로 알기 힘들겠죠. 다시 말해,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이성이 크게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경험론적 측면에서 이성의 주도적인 역할을 제시한 로크는 인식론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하지만 완벽한 사상은 없는 법, 그가 주장한 인식론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로크는 일차성질이 우리의 주관에 영향을 받지 않는 고유한 성질이며, 경험의 대상이 되는 사물은 인간의 감각과 정신의 외부에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감각과 정신의 밖에 있는 사물의 존재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지 문제가 생기는데, 로크는 여기에 대해 확실하게 답하지 못했습니다. 

 

오감으로 느끼거나 정신으로 파악하는 것이 인식의 첫 걸음인 ‘경험’인데, 경험할 수 없는 대상이면 인식은커녕 손가락만 빨며 덜덜 떠는 신세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또한 로크는 감각기관에 의해 전해지는 외부사물의 존재는 본래의 모습과 다를 수 있기에, 경험을 통해 얻은 외부사물의 성질이 전적으로 외부사물에 속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사막의 아지랑이로 일그러져 보이는 오아시스를 본다고 할 때, 보기에는 일그러져 보여도 진짜 오아시스가 일그러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요. 

 

이처럼 로크는 감각경험의 내용이 사물의 실제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 말할 수 없었기에 인간의 감각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의 존재를 단정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신의 존재를 확실히 말하지 못했고, 우리가 보고 느끼는 모습의 인간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냐의 의심까지 해야 했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로크가 이 한계에 끌려다닌 건 아니었습니다. 로크는 우리의 감각들이 한 번에 하나만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에서 착안해 감각들은 일정한 다발들로 묶여있다고 추정했습니다. 이 다발들이 항상 일정한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으로 미루어 외부의 실체가 있을 거라고 짐작했죠. 예를 들어 밤에 배가 고파 식당에 가서 밥과 김치를 먹는다고 할 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기 위해 불을 다 꺼놔도 알싸한 양념냄새와 매콤새콤한 맛으로 김치가 빨간색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요.”

 

여기까지 말을 마친 리마토르는 몸을 돌려 로크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의 뜨거운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로크에게 알바트로스와 Mr. 알프레드의 시선도 모이자 로크는 평소와는 달리 긴장이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게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자, 여기까지 해서 로크 공과 성함이 똑같았던 철학자 존 로크의 인식론을 알아보았습니다. 로크의 인식론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지죠.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인식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그의 주장대로라면 복합적으로 관측되는 일련의 감각에서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는 명제 자체는 참으로 검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어떻게 생겼는지와 같은 구체적인 정보는 알 수 없죠. 우리의 주관이라는 렌즈를 거치면서 변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니까요.

 

여러분, 아니 로크 공에게 묻겠습니다. 인간과 AGS가 보는 세상은 동일한가요? 그 세상은 어떤 모습이죠?

 

그리고, 그것들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한 방 한 방이 묵직한 리마토르의 질문이었기에 로크는 더욱 과묵해졌다. 그와 티격태격하는 게 일상인 알바트로스도 리마토르가 던진 질문에 사색에 잠겼고, Mr. 알프레드도 그 질문을 고민하는 동시에 이런 인간의 유전자를 수집하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다.

 

“...아직 답하기가 어렵군요. 과연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세계란 것이 위대한 항해를 이끄는 사령관 각하나 연구원 각하와 동일한 것일지, 의문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한참 만에 들은 로크의 말에 리마토르는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철학의 본질입니다. 그렇게 계속 고민하는 거에요. 생각하면서 여러분이 스스로 답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죠.”

 

“연구원님은 이 문제를 고민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Mr. 알프레드가 물어보며 머리카락을 뽑으려고 하자, 그는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주면서 답했다.

 

“네. 꽤 깊이 고민했는데,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대단하군. 최강의 지휘관에게 답을 알려줄 수 있겠는가?”

 

“돌아가서 정리하며 다듬어야 하지만, 일단 제가 내린 결론은 인간은 바이오로이드와 같고, 바이오로이드는 AGS와 같으며, AGS는 인간과 같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바이오로이드=AGS라는 것이죠.

 

로크가 말한 인식의 범위를 고민해본 결과, 저는 실재하는 존재들에 대해 너무 편협한 해석을 내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로 선을 그었던 구 인류와 별반 다르지 않는 사고방식이었죠.

 

저는 바이오로이드와 AGS도 인간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범위라고 생각합니다. 그 둘의 인식 범위가 인간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증명한다면 성립될 명제죠.

 

그래서 로크 공에게 여쭤본 것이었습니다. 인간과 AGS의 인식범위를 여쭤보면 답해주실 거라 생각했으나, 지금 당장 답하시기 어려우시면 나중에라도 말씀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두들 편히 쉬시길.”

 

리마토르는 그렇게 말하고 문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지나간 자취를 바라보던 셋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고민을 이어가다가 알바트로스의 말 한 마디에 동의의 표시를 표했다.

 

“정말이지 무서운 사내로군.”

----------------------------------------------------------------------------------------------------------------------------------------------


오랜만에 글을 다시 올리네. 개강하고 나니 조별 과제와 각종 자격증 시험 준비에 치여사느라 글을 올리지 못했어. 미안하다.


이번 주제는 로크의 인식론이야. 수능에서 윤리와 사상을 공부하거나 인식론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인물이지.


부족한 글 읽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