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라오SS

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7편  8편

9편


문을 열자 실외인데도 진한 습기가 폐를 짓누른다. 뜨겁고 하얀 안개를 들이마신다. 눅눅하지만 그것이 불쾌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어디서 예의범절이라고 들었던 대로 하반신에 하얀 수건을 감은 양혼이 평평한 수석으로 장식된 바닥을 밟는다.

밤 하늘에 별이 총총하다. 혼욕탕 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생각하면 굳이 수건으로 몸을 가릴 이유도 없었지만, 여행 온 김에 기분을 좀 내기로 한다.

요즘은 듣기 힘든 나무 미닫이 문 소리, 드르륵 하는 플라스틱 바퀴소리로 눈을 돌리니 역시나 하얀 수건으로 가슴과 다리 사이를 감싼 바닐라가 걸어온다.

연무에 가리워진 공간은 고인 물이 내는 초연한 소리만이 가득했다.

 

앗 뜨거 이씨”

 

생각없이 발목을 온천탕 안에 담근 양혼이 호들갑을 떨며 발을 턴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에 바닐라가 눈을 감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몽환의 연무는 그냥 땃땃한 수증기로 변하고 고요한 온천탕은 그저 료칸의 부대시설로 변한다.

 

이거 엄청 뜨거운데?”

호들갑 떨지 마시죠”

 

양혼을 비웃기라도 하듯, 바닐라가 천천히 발목부터 탕에 담근다. 찌릿한 느낌이 피부를 타고 전신에 퍼진다. 얇은 발목을 지나 종아리, 허벅지, 그리고 엉덩이와 상반신까지 탕에 담근다. 전신을 온탕에 담그자 훈훈한 기운이 확 퍼진다. 온천의 효능이나 약효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은 명백해보였다.

 

빨리 들어오시죠, 어린애 처럼 그러고 있지 말고”

 

바닐라의 타박에 양혼이 그제서야 몸을 담근다. 괜히 뜨거운 걸 피하려는 듯 급하게 몸을 담그자 물보라와 함께 커다란 파형이 일어난다.

 

어린애입니까?”

 

전신에 엄습하는 온수를 인내하려는 듯 표정을 찡그리는 양혼을 보고 바닐라가 툭 쏘아붙인다. 바닐라가 무어라 말해도 양혼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얼굴만 찡그리고 있었다.

탕의 벽에 등을 기대자 자연스레 몸이 늘어진다. 노곤한 기운에 고개를 뒤로 살짝 젖히자 담장 너머로 검은 주단이 깔린다. 영화라고 하기엔 스크린에 한 장면만 상영되고 그림이라고 하기엔 작가의 감정이 담겨져 있지 않은 그저 풍경에 불과하지만, 별들이 눈부시게 깔려있는 밤하늘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었다. 우윳빛의 탕에 몸을 담그고 자연이 캔버스에 그린 예술을 눈으로 감상하는 것, 그것 보다 더한 호사가 있을까

그런 호사도 즐길 줄 알아야 감동할 수 있었다. 아직도 눈을 찡그린 양혼보다 바닐라가 먼저 그 풍경을 보고있었으니 말이다. 답답한 자기 주인의 모습에 바닐라가 양혼의 허벅지를 쿡 찌른다.

 

왜”

하늘 좀 보시죠. 언제까지 눈 감고 있을겁니까?”

 

온천탕에서 올라오는 수증기는 그 자체로 탁월한 블러효과였다. 마치 밤하늘을 누군가가 편집해서 완벽한 그림으로 만든 것 같은 광경이었다. 새삼 자연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낀다.

밤하늘에 시선을 빼앗긴 통에 양혼의 몸도 온탕에 서서히 적응해간다.

 

그러고보니, 여기도 아무도 없네?”

탕을 즐기기엔 좀 늦은 시간 아닙니까?”

 

기왕 남의 돈으로 온거 즐길 만큼 즐기기 위해 비싼 료칸을 예약했었다. 숙식비가 높기 때문인지 다른 관광지에 비해 이번에는 사람들이 좀 있던 편이었다.

아직도 다른 사람, 특히 남성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여기는 바닐라에게 수건 하나 가리고 탕에 들어오는 건 역시 부담되는 일일 테니, 일부러 탕이 비는 시간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뭐 좋지, 굳이 다른 사람이랑 부대낄 일도 없고”

여행와서 어째 둘만 있었던 느낌입니다”

응?”

 

둘은 서로를 마주보진 않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눈다. 하나의 공간에서 하나의 장면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한다면, 마음도 자연히 전해질 테니 말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행와서 만난 사람이라고 해봐야, 저번에 만난 카나에씨 정도 잖습니까, 그것도 잠깐이었고”

하긴”

여행에선 만남도 중요하다고 하던데 말이죠”

그래서 싫었어?”

아뇨, 좋았습니다”

 

바닐라는 베시시 웃는다. 붉어진 볼은 탕이 따뜻해서일까, 아니면 부끄러워서일까, 굳이 그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저는 주인님만 있으면 됩니다. 다른 사람…뭐 평생 보고 살 것도 아니니까요”

나는?”

평생 보고 살거란 말을 기대하시는 겁니까?”

응”

 

너무도 뻔뻔하게 평생의 약속을 걸기를 기대하는 양혼의 모습에 오히려 어이가 없어질 정도였다. 참 뻔한 남자다. 하지만 뻔한 매력이 있다.

 

평생…보고 살아야죠”

역시 나밖에 없지?”

하아…괜히 말한 것 같습니다”

 

기어이 바닐라에게서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낸 양혼이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몸이 많이 풀렸는지 양 팔을 넓게 펴고 몸을 쭉 늘인다. 괜히 삐진듯한 바닐라의 반대편 어깨를 톡톡 건드려본다.

 

그러게, 생각해볼수록 여행왔는데도 다른 사람을 만나 본 적이 거의 없네”

평소엔 다른 사람 만나고 다니신 것 처럼 말씀하십니다?”

사실 일부러 피한 거 같기도 하고”

아싸 본능입니까?”

아니…주제를 그런 쪽으로 정했거든”

주제?”

컨퍼런스”

 

그제서야 양혼이 컨퍼런스를 준비해야했단 사실을 상기한다.

 

그래서, 주제는 정하셨습니까?”

응”

가르쳐주시죠”

싫어”

어린애입니까?”

히히, 기다려”

 

씩 웃는 양혼이 탕 밖으로 몸을 꺼낸다. 료칸에서 나오는 불빛이 벌겋게 익은 그의 몸을 비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바닐라 역시 몸을 꺼낸다. 더 늦기 전에 잠을 자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해야할 테니, 빨리 올라가야했다.


일주일 동안 던파좀 하고 이력서좀 쓰고 왔습니다.

9편엔 아카콘도 없던걸 보니 드디어 다 떨어져나갔군

아마 다음편이 완결일겁니다.

10편까지 썼는데 1편,3편,5편,6편만 창작물챈에 백업이 됐더라고

나머진 념글을 못갔나봐

참 글을 재미없게 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