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쪽이 제갈민님이시로군요. 이렇게 뵈어서 다행입니다.” 

 


단말기에 나타난 붉은 점을 따라 트럭을 타고 산 위로 구불구불난 도로를 지나서 발견한 임시 초소로 들어가자 우리에게 무전을 보낸 바이오로이드가 건물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는 같이 온 일행인 레프리콘과도 같았지만 헤진 와중에도 단정하게 차려입은 검은 양복과 검은 팬티스타킹과 하이힐은 성숙한 그녀의 외모와 합쳐져 그녀를 지적인 사무직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석궁을 무기로 쓰나? 과학으로 마법을 만들어 쓰고 로봇들이 돌아다니는 이 시대에 석궁이라니 정말 특이하네. 그녀에 손에 들린 석궁을 빤히 바라보자 홍련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바이오로이드는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보란 듯이 그녀의 석궁을 손으로 한번 쓸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는 잘 알겠습니다. 전 대테러부대인 몽구스 팀 소속인 탓에 여기 계신 스틸라인과 아머드 메이드 분들에 비해 제 무장이 초라해 보일 수는 있겠으나 제 연산 능력은 전장에서 유용합니다. 게다가 제 화살은 단순한 화살이 아니라 특수 빙결 볼트입니다. 철충에게도 위력을 충분히 발휘하죠.”

 

“아니,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괜히 혼자 찔려서 저러는 거 아냐? 차갑고 딱딱한 태도를 유지하는 그녀의 모습에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대테러부대 소속이라는 걸 보니 SWAT팀 비슷한 곳에 소속되어 있던 것 같은데..150년 후의 대테러부대는 SWAT이나 GIGN, 경찰특공대 같은 간지나는 명칭 대신 몽구스팀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쓰나 보다. 


 

일단 대테러부대니 경찰 소속이겠지. 그러면 다른 부대 소속이긴 하지만 엄연한 군인인 블러디 팬서와 레프리콘, 브라우니와는 아예 다른 일을 맡겨야겠구나. 나란히 짐칸에 앉은 그녀를 빤히 바라본 나는 일단 몽구스 팀에서 그녀가 무슨 역할을 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홍련은 대테러부대에서는 주로 무슨 일을 했어? 작전관은 어떤 위치야?”


“주로 적들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교전 상황에 특화된 연산 능력을 이용해 전황을 파악하고 예측해 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어..쉽게 말하면 대테러부대 지휘관이라는 소리지?”


“네. 정확하시군요.” 

 


작전관이라길래 지휘관 보좌 역할인 줄 알았는데 부대 대장이었잖아. 그럼 앞으로의 전투 지휘는 누가 맡지? 부대는 달라도 계급이 높은 홍련에게 맡겨야 하나? 아니면 계속 맡아왔고 브라우니와 레프리콘과 같은 군인 출신인 블러디 팬서에게 맡겨야 하나? 갑자기 계급이 높은 애가 들어오니 인사과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막 시동을 걸고 덜컹거리는 트럭에 나란히 앉은 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앞으로의 지휘권을 누구에게 넘겨야 하나 고민했다. 내 고민이 얼굴에 드러난 것인지 마주 보던 블러디 팬서는 피식 웃으며 풍선껌을 쫙쫙 씹어대었다. 


 

“무슨 주제로 고민하시는지 대충 견적 나왔지 말입니다. 현재 저희가 지금 좀 근본 없이 뭉쳐있긴 하지 말입니다. 전 민님이 어떻게 하던 불만 없슴다.”


“아니, 난 근본 없다고 한 적 없는데..”


“현재 상황이 어떻길래 그렇습니까?”


“전투병만 따지면 ‘앵거 오브 호드’의 정찰병 하나, ‘스틸라인’의 일반 보병 둘, ‘아머 메이든’ 소속의 나와 ‘몽구스팀’의 당신. 이렇게 다섯이지 말입니다. 여기서 ‘페어리 시리즈’의 레아씨와 다프네씨까지 끼면 지휘계통이 더 복잡해 지지 말입니다.”


“확실히 숫자에 비해 장교 계층이 너무 많군요. 이래서는 지휘에 혼선이 와도 무리는 아닐 것 같습니다.”


“최고 지휘권자는 물론 민님이지만 말입니다.” 

 


최고 지휘권자라기에는 내가 너무 아는 게 없는데. 생존자를 구출한 건 좋지만 고민거리가 하나 더 늘어버렸다. 

 


차라리 지휘관을 두 명 두는 체제로 할까? 그런데 그러면 지휘계통에 혼선이 올 것 같은데. 병력이 수십 명 돼서 부대를 두 개로 나눌 수 있으면 모를까, 일반병이라곤 브라우니와 레프리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지휘관을 두 명 뒀다간 멀쩡하게 잘 굴러가는 자동차에 핸들을 하나 더 다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버릴 것 같다. 둘 중 한 명은 지휘관으로, 그리고 남은 한명을 지휘관의 보좌역으로 두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 같은데 누구를 지휘관으로 두고 누구를 보좌역으로 둘지 모르겠다. 


 

정 모르면 둘이 번갈아 가면서 지휘관 맡아보라고 한 다음,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 쪽을 지휘관으로 세우면 되겠지. 아니면 브라우니를 블러디 팬서에게 맡기고 레프리콘을 홍련에게 맡겨도 되니까. 


 

다음 지휘관을 안일하게 생각한 나는 트럭에 몸을 실어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공단으로 향했다. 일단은 그녀를 어디 배치할 생각을 하는 것보단 우리 생활에 적응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겠지. 오늘 식사는 특별히 내가 직접 만들어야겠다. 고기가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까 터키식으로 야채를 좀 섞어서 꼬치구이를 만드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고. 아니면 팬서가 전기 낚시로 잡은 생선들이 아직 냉동실에 남아있으니 탕을 만들어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일단 저녁밥은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 그녀와 정식으로 인사나 나눠야지. 트럭에 앉은 나는 그녀를 향해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홍련이라고 했지? 우리에게 합류해줘서 고마워. 앞으로 잘 부탁할게.”


“저야말로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갈민님이라고 하셨나요.”


“그냥 민이라고 불러. 전부 그렇게 부르니까.”


 

합류한 홍련과 함께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공단으로 향하던 도중, 숲속 사이로 드러난 건물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숲속으로 난 길 앞에 난 아치형 입구는 어딘가 위화감이 들지만, 입구 너머로 보이는 오솔길은 눈에 익숙해 보인다. 분명 오늘 처음 보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왜 어딘가 눈에 익어 보이는 걸까. 나무 사이로 드러난 가림막을 슬며시 걷은 나는 운전대를 잡은 레프리콘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미안한데 레프리콘, 공단에 가기 전에 잠깐 저쪽으로 가 줄래? 확인해보고 싶은 게 좀 있어서.”


“알겠습니다. 그럼 핸들 돌리겠습니다.”


“저기에 아는 곳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아는 건 없는데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확인하시는 건 좋지만 곧 해가 지니 빨리 하셔야하지 말입니다.”


“오래 끌진 않을게.” 


 

블러디 팬서의 질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아치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뭐가 있는지 알지는 모르지만 분명 저곳에 내가 아는 것이 있을 것만 같다. 어쩌면 불국사의 입구일 수도 있겠지. 첨성대가 개판이 났는데 불국사라고 해서 개판이 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만약 저곳에 있는 것이 불국사라면 하다못해 처마에 있던 기왓장 한 조각이라도 챙겨가고 싶다. 첨성대와는 규모를 달리하는 불국사는 우리 힘만으로 복원하는 건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해서 천년 역사를 이렇게 묻어버리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니까. 

 


아치형 입구를 지나 산길을 타고 산 중턱까지 깊숙이 들어가자 기대한 것과 다른 엉뚱한 시설이 우리 일행을 반겨주고 있었다. 입구 쪽에 배치된 매표소 위로 다 녹이 슨 테마파크의 간판을 본 나는 헛웃음만 흘렸다. 뭔가 익숙해 보여서 찾아왔건만 정작 있는 것이라곤 테마파크라니. 회전목마 탈 나이는 지났는데. 


 

테마파크라고 하면 사람 많이 오는 곳에 화려한 마스코트도 좀 세워두고 장사해야지, 어느 미친놈이 대로도 아니고 이런 후미진 곳에 테마파크를 지어놓지? 


 

“테마파크....”


“테마파크군요..”


“그래, 테마파크네. 뭔가 있을 줄 알았는데.” 


 

식어버린 분위기에 한숨을 쉬며 머리만 긁는 나와는 달리 블러디 팬서와 홍련은 노련한 지휘관 개체답게 뭔가를 느꼈는지 표정을 굳히고선 내 팔을 붙잡았다. 팔에서부터 느껴지는 굳은 악력에 나는 물론이고 뒤에 있는 브라우니와 레프리콘도 당황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갑시다, 민님. 여긴 민님이 갈만한 곳이 아니지 말입니다.”


“아니, 놀러 온 게 아니라는 건 아는데..”


“그녀의 말이 맞습니다. 어서 돌아가죠. 이런 곳은 시민..아니 민님께 어울리는 곳이 아닙니다.”

 


내가 뭐 어땠길래 테마파크가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는 거지? 어른이여도 가끔식은 놀이동산에 가고 싶은 때가 있다고. 나도 신밧드 탈 줄 알고 후룸라이드 탈 줄 알아. 바이킹이나 자이로드롭같은 건 무서워서 못타지만.. 


 

어렸을 적 바이킹을 타고 나서 거하게 토악질을 한 기억을 떠올린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내 팔을 붙잡고 만류하는 블러디 팬서를 바라보았다. 항상 씩씩한 모습만 보여주던 그녀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내게 애원하듯이 팔을 뒤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민님. 민님이 150년 전에서 오셔서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이 전부 신기하게 보인다는 건 이해하고 있지 말입니다.”


“잠깐만요. 150년 전이요?! 그게 가능한 말인가요?!!”


“그런데 저기는...진짜 가시면 안 됩니다. 그냥 못 본 셈 치고 돌아가시면 안됨까?” 


 

눈을 휘둥그레 뜬 홍련의 질문까지 무시한 채 내 팔을 잡아당기는 팬서는 곧 죽을 것만 같은 절박한 얼굴로 내 팔을 잡아당기며 돌아갈 것을 종용하였다. 대체 저기에 뭐가 있기에 항상 앞장서서 철충에게 맞서는 그녀가 이런 절박한 모습을 보여주는 걸까? 내 눈에는 다 쓰러져가는 테마파크로 보이는데. 

 


어쨌든 그녀는 나와 함께 울진쪽에서부터 철충들을 해치우며 포항까지 내려온 동료다. 게다가 그녀는 멸망전쟁 이전에 태어난 베테랑 중 베테랑이다. 이제까지 그녀의 경험을 믿어서 손해본 일은 없다. 그냥 등 돌려 가는 게 낫겠지. 


 

팬서에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등 돌려 세워놓은 트럭으로 가려고 하던 도중, 입구에 있는 매표소 너머로 흉물스런 장식물을 덕지덕지 단 네모난 석재 건축물이 보였다. 다보탑과 함께 불국사 내에 있는 석탑 두 개 중 하나이자 석가탑이었다. 비록 윗부분은 다 잘려 나갔지만 균형잡힌 네모난 몸통과 통일신라 불교 특유의 절제된 미관은 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팔을 잡은 팬서의 손을 거칠게 뿌리친 나는 첨성대를 발견했을 때처럼 멍하니 석가탑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저게 왜 저깄어? 불국사 안에 있어야 하잖아. 단순한 테마파크에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라고. 국가 유적이란 말이야. 그런데 왜 테마파크 안에 저렇게 흉물스런 장식물까지 붙어있는데? 


 

테마파크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나는 탑 주변을 둘러보았고, 그제야 내가 느낀 익숙함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테마파크의 정체는 불국사였다. 완전히 테마파크로 완전히 바뀌어 있지만 불국사의 흔적들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단체 사진 찍는 장소로 유명한 돌계단도 그대로 남아있었고, 특유의 돌 벽들도 형체나마 남아있었다. 

 


설마 이 근본 없는 새끼들이 불국사를 밀고 거기다가 테마파크를 지었나? 생각이 닿은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천년 역사가 고작 이런 볼품없는 테마파크 때문에 없어지다니. 철충에게 무너졌다면 이해할 수 있다. 유적지보단 사람 생명이 우선이니까. 자연재해로 완전히 복원 불가능할 정도로 형체까지 뿌리 뽑혀도 이해는 할 수 있다. 자연재해는 사람이 이겨낼 만한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고작 찰나의 즐거움 때문에 천년 역사를 밀어버렸다는 것 사실 자체가 도저히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씨발 근본 없는 씹새끼들이..아악!!!”


“민님! 피하십쇼!!”


“교전 시작하겠습니다!! 브라우니는 민님의 보호를 우선해주세요! 레프리콘은 저와 같이 블러디 팬서를 엄호해주세요!!” 

 


어두운 계단 안에서 순간 붉은빛이 반짝인다 싶더니 총성과 함께 탑을 향한 날 향해 총탄이 쏟아졌다. 철충이 있다는 걸 안 순간 황급히 탑 뒤로 몸을 피했지만 어깨를 뚫고 지나가는 차가운 총알의 감촉 뒤로 불에 지진 듯한 통증이 어깨에서부터 밀려왔다. 

 


“민님! 정신 차리십쇼! 돌아가시면 안됨다!!”


“나 아직 안 죽었어!” 


 

눈물이 들어차는 브라우니의 부축을 받아 뒤로 빠진 나는 앞장선 블러디 팬서와 홍련에게 철충의 섬멸을 지시했다. 내 지시를 받자마자 그녀들의 행동은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홍련의 분석에 힘입은 블러디 팬서는 우리들중 가장 뛰어난 화력을 앞세워 밀어치는 철충의 공세를 꺾어 놓고, 주변 지리의 분석을 마친 홍련은 레프리콘과 함께 블러디 팬서의 사각에 위치한 철충들을 차근차근 제거해 나갔다. 

 


비상용 구급상자에서 붕대를 꺼낸 브라우니가 어깨를 꽉 묶자 아릿한 통증과 함께 어깨에서 흐르는 피가 그대로 느껴졌다. 참아보려고 했지만 이가 덜덜 떨릴 정도로 아팠다. 

 


“아윽!!!”


“총탄이 완전히 어깨를 관통했지 말임다..지혈해야 하니 아프셔도 참으셔야 함다..” 

 


등 뒤로 폭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돌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년 역사가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어깨의 상처에서 느껴지는 통증보다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 허무함이 더 컸다. 

 

 

*

 

 

“..그래서 두 번째 인간은 지금 어때? 현장에서 뛰다가 총상을 입었다고 했잖아. 그는 괜찮은거야?”


-다프네 양 덕분에 위험을 벗어났어요. 지금은 회복기랍니다.- 


 

탈론페더의 보고를 받은 오르카호 사령관과 오늘 그의 부관을 맡은 신속의 칸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령관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만약 자신이 현장에서 직접 뛰다가 철충에게 총상을 입으면 오르카호의 그녀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상상도 하기 싫다. 아마 유래 없을 혼란이 오르카에 불어닥칠 것이다. 컴패니언과 배틀 메이드는 보호를 빌미삼아 24시간 밀착감시를 할 것이고, 같이 작전에 나간 부대는 지휘관의 호통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다 나을 때까지 오르카에 감금되는 건 확정일 테고. 

 


그런 면에서 오르카의 사령관이 보는 두 번째 인간의 행동은 너무나도 색달랐다. 세상에 둘 밖에 없는 인간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부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즉각적으로 지시를 내린다. 철혈의 레오나는 전형적인 철없는 지휘관이라고 대 놓고 깠고, 불굴의 마리 또한 저러다가 곧 큰일이 날 것이라며 어서 빨리 오르카 호에 그를 데려와 보호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들고 있는 펜을 책상에 몇 번 두드린 오르카호의 사령관은 탈론페더와 대화하는 신속의 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칸, 네가 보기에 두 번째 인간은 어떤 것 같아?”


“용기도 있고 부하를 아끼는 마음도 있지만 그 방식이 너무 무모하다. 가지고 있는 적은 병력으로 사상자 없이 여러 작전 들을 성공시키는 모습은 대단하다고 평가하지만 만용이 심하지. 군 지휘관이라기보단 민병대나 갱단의 대장 같은 모습이다.” 


 

역시 좋은 평가는 나오지 않는구나. 레오나와 같이 솔직한 평가를 내린 칸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오르카호의 사령관은 화면 너머로 보이는 탈론페더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전에 비해 탈론페더가 앉아있는 의자가 좀 바뀐 것 같다. 마지막으로 연락했을 때는 단순한 사무용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지금은 고급스러운 붉은 벨벳으로 감싸진 거대한 의자에 앉아있다. 

 


마치 옥좌와도 같은 휘황찬란한 의자를 본 칸과 사령관은 순간 말을 잃고 탈론페더가 앉아있는 의자만 바라보았다. 

 


“탈론페더. 그러고 보니 의자가 바뀐 것 같은데..두 번째 인간이 준 의자야?”


-네. 오래 앉아있으면 힘들 것이라고 하시면서 안마의자를 선물해 주셨어요. 오다가 어느 저택에서 가져오셨다고 하는데...- 

 


보란 듯이 팔걸이에 놓인 버튼 하나를 누르자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의자의 목 부분이 꿈틀거리더니 탈론페더의 목을 부드럽게 풀어주기 시작했다. 늘어지는 신음소리를 내며 점점 나른해져 가는 탈론페더의 표정을 본 신속의 칸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두 번째 인간이 편의를 많이 봐주나 보군. 나중에 대장으로써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는걸.”


-두 번째 인간님이 여기 편의를 많이 봐주시긴 하죠. 여긴 낮잠 시간도 있는걸요. 문제가 몇 개 있긴 한데..-


-탈론페더씨? 주인님 오셨어요. 잠깐 들어갈게요- 

 


무전 너머로 갑자기 제3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탈론페더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마지막으로 들린 목소리의 주인공은 오르카호의 사령관과 신속의 칸도 익히 아는 목소리였다. 경호부대 컴패니언의 대장이자, 오르카호의 경호 실장. 바로 블랙 리리스였다.

 

 

*

 

 

생존자를 구출하기 위해 나가서 총에 맞고 돌아온 직후, 공단안의 분위기는 정말 최악이었다. 그러게 왜 가서 총을 맞냐는 블러디 팬서의 잔소리에서부터 시작해서 방금 한 행동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는 홍련의 잔소리에 더해 세상 떠나갈 듯이 엉엉 울어 재끼는 브라우니와 레프리콘, 그리고 어디서 총 맞고 왔냐며 눈을 크게 뜨고 물어보는 오베로니아 레아와 붕대를 감으며 눈물을 훔치는 다프네까지. 그녀들을 달래느라 일주일은 소비한 것 같다. 


 

사태를 보다 못한 포츈은 이제는 하나 남아있는 바이오로이드 생산 시설에서 유전자 씨앗들을 가져오더니 다짜고짜 내게 내밀었다. 

 


‘누나 생각인데 전문 경호 인력이 필요할 것 같거든?’ 


 

맨 처음에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 머리수가 급하긴 하지만 싸울 수 있는 병사와 기술을 가진 전문 인력이 급하지 보디가드가 급한 건 아니니까. 그래서 맨 처음에는 컴패니언 부대를 복원해야 한다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 급한 건 포츈과 같은 엔지니어와 브라우니들과 같은 병사들이지, 보디가드가 아니라고. 내가 다친 건 내가 경솔해서지, 팬서 때문이 아니라고 간곡히 설득했다. 

 


그러자 이를 악문 포츈은 잠시 날 노려보더니 내게 가불기를 시전했다.

 


‘거절하면 이 누나 파업할 거거든?!’ 

 


포츈의 파업은 곧 이 공단 시설이 멈춘다는 것을 의미했다. 몇 번씩이나 설득해도 포츈은 내 목숨이 우선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같은 삼안 출신인 오베로니아 레아와 다프네 또한 삼안의 컴패니언은 경호뿐만이 아니라 비서일과 전투에도 능숙하다며 어떻게든 복원해야 한다고 날 설득하기 시작했다. 결국 슈퍼을 포츈의 파업 협박과 하나 된 모두의 주장을 이기지 못한 나는 컴패니언의 대장인 블랙 리리스를 시작으로 컴패니언을 완전히 복원시켰다. 리리스의 말로는 ‘포이’라고 불리는 자매가 하나 더 있다는데 아쉽게도 그녀의 유전자 씨앗은 발견하지 못했다. 

 


어쨌든 울며 겨자먹기로 복원한 컴패니언은 내 생각보다 훨씬 유능했다. 하얀 고양이의 유전자가 들어간 CS페로는 내가 부상당한 탓에 졸지에 모든 서류를 떠맡게 된 홍련을 도와 공단의 일을 처리해 갔고, 페로의 자매이자 개의 유전자가 들어갔다는 하치코는 경호뿐만이 아니라 다프네를 도와 가사일을 처리해 주었다. 붉은 머리와 꼬리가 인상적인 펜리르와 천사와도 같은 하얀 날개를 가진 스노우페더는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을 도와 공단 내부 순찰을 도와줬다.


 

성격은 제각각이지만 붙임성이 좋은 덕에 그녀들은 구출해 온 홍련과 함께 금방 녹아들었다.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바로 그녀들의 큰 언니인 블랙 리리스다. 내가 어딜 나가도 그녀는 그림자처럼 내 뒤에 따라붙었다. 심지어 잘 때도 내 곁을 벗어나지 않는다. 우린 다 같이 방을 쓰고 다 같이 자니 잘때만큼은 자유시간을 가져도 된다고 설득해봐도 그녀는 내 옆에 누워 날빤히 바라보고 내가 잠들 때까지 절대 잠드는 법이 없다. 

 


잠깐 짬을 내 탈론페더를 보러 온 지금도 그렇다. 혼자서 다녀오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느새 나타난 건지 내 뒤에 바짝 따라붙어 수상한 미소를 짓고 있다. 

 


경호를 해 주는 건 고맙지만 왠지 뒤통수가 싸늘한 이유는 뭘까. 검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복장을 하고 있는 블랙 리리스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황금색 눈을 곱게 접어 눈웃음을 지어주었다. 


 

“탈론페더씨. 갑자기 라디오 방송이 끊긴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잠깐 목이 아파서 쉬고 있었어요..”


“미안, 내가 너무 부려 먹었나보네.”


“부려먹다뇨. 이런 멋진 의자까지 주셨는데. 리리스였다면 더 잘했을 거에요.”


 

말을 마친 리리스는 탈론페더의 옆으로 다짜고짜 가더니 안마의자의 버튼을 마구 눌러대기 시작했다. 안마의 강도가 높아진 안마의자가 인정사정없이 풀파워로 온몸을 꾹꾹 눌러대자 앉아있는 탈론페더의 몸이 빼배 꼬이고 입에서 으그극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직장 내 괴롭힘 에반데. 블랙 리리스의 옆으로 간 나는 페더를 괴롭히는 그녀의 손을 쳐낸 다음 안마의자에서 고문의자로 변한 의자를 다시 정상으로 돌려 놔줬다. 

 


“리리스. 대체 왜 탈론페더를 못살게 구는 거야? 우린 가족 같은 사이니 사이좋게 지내 달라고 부탁했잖아..”


“레아씨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 말이죠.”

 


얘는 레아에게 대체 무슨 말을 들었기에 온 지 몇 일 안됐는데도 탈론페더를 이리 못살게 구는 걸까. 다른 바이오로이드들한테는 나름 살갑게 굴던데. 황금색 눈을 곱게 휘어 보이는 리리스를 향해 한숨을 쉰 나는 방송기구 앞에 앉아있는 탈론페더를 바라보았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시선을 피하는 모습을 보자 없던 동정심마저 생겨날 지경이다. 나중에 그녀와 단 둘이 대화하는 자리를 가져봐야겠다. 직장 내 괴롭힘은 초기에 뿌리 뽑아야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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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밀어버리고 테마파크 지은 좆간. 실제로 저 지랄 했다간 징역으로 끝나진 않을 듯.


탈론페더 첩보 난이도 급상승. 레아와 리리스 있는 곳에서 안들키고 간첩질 하려면 꽤나 고생일듯. 삼얀중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


그리고 엔지니어 하나밖에 없는 곳에서 엔지니어가 파업한다고 하면 알아서 기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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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https://arca.live/b/lastorigin/46363544

14화 https://arca.live/b/lastorigin/46558197 

15화 https://arca.live/b/lastorigin/47054292

16화 https://arca.live/b/lastorigin/47163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