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https://arca.live/b/lastorigin/47089480


모음집 : https://arca.live/b/lastorigin/46509299


핫.


아, 수복실인가? 어휴. 철남씨 머리가 상당히 단단하네.


농담할 기력 있는거보니 멀쩡한가봐. 이쪽은 인류의 희망을 아주 그냥 보내버린줄 알고 쫄았었는데.


침대 주변으로 쳐진 커튼의 건너편에서 묘하게 상기된 목소리가 차박차박 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철남씨? ...화나신거 이해해요. 그저 저와 함께할 동료가 생겼다는 마음에 혼자 신나서 일을 그르쳤죠. 정말 미안해요.


누워계시죠, 사령관님? 그리고 이만한 규모를 이끄시는데 그정도는 신중해야 하는게 맞잖아. 외부에서 온 불온분자가 갑자기 자신을 병사로 써달라니. 나라면 불안해서 한 3일간 사상검증만 했을거야. 난 아직 내 목이 붙어있는것 만으로도 차암 고마운걸.


    

...


커튼 아래로 보이는 슬리퍼가 사령관이 누운 침대를 지나 옆 침대에 앉았는지 풀썩 소리가 났다.


그리고, 말 놔. 난 너한테 쓰기 싫어서 관둔거지만 여기서 네가 나한테 자꾸 존댓말 쓰면 아래 사람들이 자존심 구겨질거야.


 

...알았어. 그럼 혹시 내가 뭔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정말 사과하고 싶어서 그래.

 

아하하. 그래. 사람 마음 후벼파놓았으면 성의를 보여주셔야지.


거의 적의를 숨기지도 않는 말투에 사령관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거 참. 누워있으래도. 


그래서, 어디까지가 진짜였어?


어?


어디서부터 조작된거냐고. 내가 철충이랑 싸우고 싶다 한거부터야?


아냐. 애초에 억지로 파견을 보내서 지휘경험을 늘리는게 시나리오였는데 네가 갑자기 가고싶다 하더라고. 조작이라 해봤자 알바트로스가 철충역의 ags를 지휘해주고 마지막에 연결체가 나오던 날, 폭포에서 네 다리가 잘리면 연결을 끊는게 다였어.  이프리트가 돌발행동으로 익스큐셔너를 막길래 상황을 더 지켜본거지.


흐. 다리가 잘렸을 땐 다 포기하고 싶긴하더라.


 

...미안해.


그래도. 난 만족했어.


뭐를?


예전에 내가 동료들을 버리고 도망갔댔잖아. 난 내가 교활하고 추잡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아니더라고.

마지막 순간만큼은 녀석들을 위해 몸을 던질 용기정돈 있다는 걸 알았어. 

정말 멋지게 떠나지 못한건 아쉽지만.

그 감정만큼은 거짓이 아니었으니 나중에 정말로 죽었을 때. 조금 먼 곳에 간 동료들에게 당당히 무릎꿇고 사과할 수 있겠더라. 그러니까 사실, 진짜 화나진 않았어. 지금은.

하지만 부탁할 건 있는데. 들어줄래?


물론이지! 뭐든 말해줘!


나 다시는 지휘 시키지 마라. 다른 일은 다 해주겠는데 지휘만은 안돼.


...응.


 

그리고 내가 발견된 곳 근처에서 유채꽃이 피어있는 곳이 있을거야. 거기에 한번 더 가고싶어.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지금 갈 사람을 모집...할...게?


아.


커튼을 젖히자 거기엔 기이한 모습의 철충 하나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 뭐야, 그 머리!


나 오리진 더스트에 알러지가 있대. 운도 지지리도 없어라. 크흐흐. 그러길래 내가 누워있으랬지. 닥터가 오면 설명하려 했더니만.


근데 왜 그 형태인데!


철남의 몸은 여전히, 아니 훨씬 더 발달한 대흉근을 환자복 너머로 슬쩍슬쩍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목 위로는 철충의 머리가 있어 마치 극도의 네크로필리아인 예술가가 만든 전위적인 작품과도 같았다.


닥터가 연구용으로 남겨둔 내 옛날 몸은 내가 알러지 반응이 안 일으킨다더라? 그래서 개발부에서 만들어준 인간형 파워 슈트에 신세지고 있지. 개인적으론 빨강이랑 금색 도색을 해주길 원했는데.


'어질어질하네. 진짜.'


...일단 여기 보자기라도 쓰고 있어줘라. 다른 애들 보면 경기들라.


오. 이거 좋네. 근데 좀 답답한ㄷ


시끄럽고 밖에선 좀 쓰고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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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토나에 몸을 실은 철남은 앞에 앉아 있는 여성이 입을 떼자 긴장했다.


승차감은 괜찮은가?


아, 예.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겠냐. 사령관보다 더 카리스마있는 사람이 눈 앞에 있는데. 그 자식은 붙여줄 애들이 없어서 대장급을 붙이냐고오오.'


마리는 조용히 가방에서 캔 두 개와 캔따개를 꺼냈다.


폴칵


마시게. 커피라네. 그 머리로도 마실 수는 있다고 들어서말이네. 현장에선 이런 쓰고 달기만 한 커피도 각별해지지. 그래서 언제나 챙겨 놓는다네.


어. 네. 잘 마시겠습니다?


하하하. 회의실이나 시뮬레이터에서 했던 당당한 말투는 어디 갔나? 편하게 하게. 편하게. 듣자하니 내 상관이신 각하와도 말을 텄다던데 나라고 못 트겠나.


'난 안들린다 안들린다 안들을거다...'

'제발 앞좌석엔 말걸지 말아주세요 말걸지 말아주세요'


앞에 운전병으로 온 노움과 선탑자 이프리트는 속이 말그대로 녹는듯한 복통을 느꼈다.


하물며 바로 앞에 있는 철남은 어떻겠는가. 아예 속에 날뛰는 철충 한 마리가 들어찬 것 같았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철남을 놀리던 마리는 패널에서 지도를 펼쳐보았다.


그나저나, 여기는 자네가 발견된 곳이라던데. 뭔가 찾으려는게 있나보지?


찾으려는거라기 보단 거기 있던 유채꽃밭이 신경쓰여서 말입니다.

그런데 대장님이 몸소 같이 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뭐, 나도 가끔 숨돌리기 위해 탐색작업에 참가하곤 하지. 저번엔 칸이 얼마나 즐거운 얼굴로 말하던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더군. 그래서 자원한걸세.

그러고보니 이런 노란 꽃이 그렇게 좋은가? 


그러자 철남은 자신이 유일하게 죽이지 않은 식물인 유채꽃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한참을 떠들었다. 

마리는 일전에 만났던 오렌지에이드 양의 수다와 맞먹는 방대한 정보의 향연에 정신을 잃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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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다.


마리의 눈엔 그저 며칠동안 비가 오지 않아 시들해지고 있는 꽃밭만이 제 꽃잎을 휘날리며 죽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


실망하지 말게. 오르카호엔 페어리 양들의 정원이 있는데 이보다 훨씬...


아뇨. 충분합니다.


철남은 죽어가는 유채꽃밭에 서서 그저 고개를 떨군 채 말했다.


뭐? 벌써 말인가? 근처에 산도 있고 하니 공기를 좀 더 쐬는게...


여기. 녀석은 있었어요. 내 오래된 부관은, 미련한 부관은 여기 있었습니다.


마리가 철남이 서있는 곳에 다가가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이건... 무덤?


작은 둔덕엔 무언가 새겨져 있는 나무 팻말, 그 앞엔 먼지가 피에 뒤섞여 뭍어있는 후드티가 가지런히 접혀져 있었다.


쳇. 요령도 없는 녀석... 뒈진 놈은 빨리 잊고 떠날 것이지. 지금껏 바보같이 여기있을게 뭐야...


마리가 다가가 팻말에 새겨진 이름을 보자 그곳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원사 이프리트. 이곳에 잠들다.'


그렇군.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나. 


...예


이 무덤의 주인이 자네의 부관인건가?


철남은 말없이 일어나 주변의 꽃을 꺾어모아 무덤 앞에 올려놓고 고개를 떨구었다.


마리 또한 오래 전, 임무에 최선을 다한 전우에 대해 예의를 갖추어 한동안 철남과 함께 묵념을 했다.


조용히 레토나로 돌아가는 철남을 달래기 위해 이프리트와 노움이 달려가자 문득 마리는 무덤을 응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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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 그렇게 된것이었어.


오르카에 돌아와 자신의 업무용 사무실에서 마리는 턱을 괸 채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네였던거군. 411번. 아니, 원사 이프리트. 어쩐지. 그와 지나칠 정도로 잘 지낸다 했어.


죄송하지만 저는 원사가 아니라 하사 이프리트입니다. 마리 소장님.


편하게 말하게. 이번엔 그저 이 배에 올라탄 선원과 선원 사이의 입장으로 이야기하러 부른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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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프리트는 작전에서 복귀하고 며칠 뒤, 사령관이 시뮬레이터에서 고생했다며 참가 인원에게 준 휴식을 만끽하려했다.


오늘 하루종일 근무고 작업이고 다 빠지니까 좋지 않냐?


네. 사령관님이 직접 내린 휴식시간이라 다른 간부분들이 터치를 안하시니까 편하네요.


어? 나도 간부인데 작업 좀 시켜줘?


이프리트는 몇 달 전 오르카에 합류했을 때부터 함께했던 노움과 깔깔거리며 이야기를 하다 px에 거의 다 왔을 즈음에 무언가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야, 노움. 스탑. 뭔가 이상한...


오, 여기있었군. 이프리트 하사.


승리!!


승리. 바쁘지 않으면 잠시 이야기 좀 하지.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있어서 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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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x앞에서까지는 온몸의 피가 식는 듯한 기분을 느꼈지만 지금은 피가 빠져나가는 심정이었다.


뭐, 직접 말하기 싫다면 내가 정리하지. 어떤 100년정도의 연식을 가진 바이오로이드가 오래전 같은 기체를 부관으로 삼던 인간과 비상식적으로 호흡이 잘 맞았네. 서로의 생각을 꿰뚫어보는 수준으로. 


그리고 철남의 부관이 죽었다 해도 그녀가 그 무덤의 주인일리가 없어. 짐승의 피를 뭍혀서 죽은것 처럼 연출했나본데, 그러기엔 옷에 찢어진 흔적이 너무 인위적이었네.

정식으로 추모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 무덤을 파보았는데 아무것도 묻혀있지 않더군. 옷은 있고 시체만 없으니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닌것 같고, 아무리 봐도 죽음을 연출한거 같단말이지. 이 팻말에 적힌 사람은 죽었다고, 잊으라고 말이네.


자, 그럼 그 철남의 부관과 몇 달 전 그 무덤 근처 지역에서 원래 전투복은 망실하고 하계전투복만을 입고 발견된 동지가 같은 인물이라 생각하는건 너무 로맨틱한 망상인가? 말해보게.


굳은 얼굴의 이프리트는 조그마한 주먹을 꼭 쥐고 입을 열었다.


주제넘은 발언일지도 모르지만 만일 그 말씀이 사실이라 해도 무언가 문제가 있을것 같진 않습니다. 마리 소장님.


물론 문제는 없네. 먼저 말했듯 개인적인 호기심때문이지. 내 질문은 지금부터야.


왜 그에게 말하지 않지?

100년동안 별 기약없이 기다린 사람이 돌아왔어. 나라면 맨발로 달려가 온 힘을 다해 꼭 끌어안아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만.


...저는 아니지만 그런 인원이 이곳에 있다는 전제하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음, 좋네. 말해보게.


그녀가 만일 말씀하신 대로 달려나가 그를 끌어안으면 감동적인 이야기일것입니다. 100년 만의 해후라는게 흔한 이야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철남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녀의 행동이 이해갑니다.


성격?


자신을 무엇도 주지 않고 이익만 뜯어낸 교활한 자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자신이 남에게 무엇을 준 지도 모르는 순박한 사람.

남의 죽음을 편집적으로 기억하며 괴로워하는 죄책감 많은 사람.

현재를 과거에 투영하여 결국 목숨까지 내던진 미련한 사람.


그런 성격의 사람은 과거를 넘어 돌아온 동지에게 종속될 것입니다.


종속이라.


예. 새로운 만남을 피하고 언제고 그녀라는 우리를 최대한 벗어나려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그 상황을 피하고, 그가 새로운 만남을 만들며 살아가길 원했기에 해후를, 고백을 피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인연은 진지한 관계로 변할 가능성도 있지. 다른 자에게 그를 뺏기는게 두렵지 않은건가?


두렵지 않습니다.


마리는 이프리트의 웃음에 잠시 몸이 굳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유약한 토끼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먹이인 토끼를 두고 그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으리라 포효하는 맹수와도 같았다.


그는 제 남자입니다. 누구를 만나든, 몸이 어떻게 생겼든, 그는 결국 제가 쟁취할겁니다. 이건 맹세가 아닌 결론입니다. 100년 전부터 말입니다. 지금이야 그에게 우리 밖을 알려주기 위해 방목을 하였지만 언젠간 다시 제 우리로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풉...


열변을 토하던 소녀는 어느샌가 웃음을 가까스로 참고있던 마리를 보았다.


하하하하하! 마침내 인정했군!


이프리트의 자신만만한 웃음은 아차하는 당혹으로 바뀌었다.


알겠어. 자네는 아직 철남의 부대에 속해있던거군. 100년전부터!


웃음속에서 이프리트는 머리를 빠르게 돌렸다.


'어떡하지? 보고하면 둘 다 스파이라고 쫓겨나는건가? 그래, 머리를 세게 때려서 기억을 잃게 하자. 아냐, 저 부유체를 넘어갈 자신이 없는데...'


그런 이프리트에게 마리는 소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후후. 보고는 좀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지. 이를 말씀드린다해도 각하는 눈물을 한 바가지 쏟으며 그대들의 만남을 축복할뿐이겠지만. 그러니 걱정 말게. 위험하진 않아보이니 자네의 계획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지.

그 대신 언제 그에게 사실을 고백할 예정이지? 그 정도는 말해줄 수 있겠지.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프리트는 대답했다.


원사 이프리트는 죽었습니다. 이곳엔 하사 이프리트 411번이 있을 뿐. 그러니 그가 알아채기 전까진 절대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곳의 이프리트로써 다시금 그에게 다가갈 겁니다.


...알았네. 돌아가도 좋아.


예. 승리!


경례를 받아준 마리는 문을 열고 떠난 이프리트에게 건네듯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다음 인사내용을 기대하게. 내 한가지 선물을 준비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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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후, 시원하드아.


샤워를 마치고 철남이 방에 돌아오자 소녀가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당황한 철남은 후다닥 머리에 두건을 걸치고 미처 가리지 못한 하반신을 의자를 끌어당겨 가렸다.


으어어! 뭐야. 이프리트. 너 아직 일과시간 아니냐?!


무슨 그런 무서운 말을. 오늘 나 휴무야... 여기면 다른 간부들이 못찾을거같아서 왔어.

그래도 방 주인이 없는데 자고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닐거 같아서. 대장 올때까지 안 자고 기다리고 있었어... 옆자리 비었는데, 같이 자자.


'와. 로비에서만 듣던 대사같아. 오랜만인걸...'

어허. 씁. 그래도 여자가 남자 방 침대에 누워있는거 아니야. 나 오늘 무지 피곤하니까 얼렁 니네 생활관으로 돌아가.


멋없는 소리 말고 이리 와아...!


으억! 으... 안되는ㄷ.... 쿠우...


이 비싼 인간아... 일단 같이 좀 자자...


이프리트가 몸을 집어 당긴 그대로 숙면에 빠진 철남은 오랜만에 좋은 꿈을 꿨다.

100년전 하지 못했던, 그녀와의 서약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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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ㅋㅋㅋㅋㅋ   이 콘으로 무덤 씬 쓰려니까 집중이 안돼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이번에만 두건 씌웠습니다.


이 철충남 얼굴로 콘문학은 진지한거 쓰기 어렵겠다. 개그물에만 써야지.


언젠가 소재 정리되면 다음편 써오겠습니다. 긴 글자 뭉탱이들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