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모음집 : https://arca.live/b/lastorigin/21749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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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이스마엘이라 부르라.

- 모비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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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나는 살아있다.’


남자의 머릿속에서 생각 하나가 번쩍이며

전기 신호 하나가 생성 된 뒤

곧 전선을 타고 내려오듯 

머리로부터 시작해 척추를 타고 내려와

발가락 끝까지 흘러갔다.

전기 신호가 지나간 곳으로 

따뜻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나는 살아있다’


실로 살아있음을 체감하고나니

케케묵은 먼지 냄새와 

웅웅거리며 작동하는 낮은 기계 소리,

등에 닿는 딱딱하고 넓은 바닥이 

제일 처음으로 느껴졌다.

그가 감고있던 눈을 천천히 뜨자

눈 앞으로 낯선 천장이 보였다. 

그마저도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슬슬 답답함을 못이기고 몸을 일으킨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똑같았다. 

주변엔 어둠뿐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장소였다. 

의도적으로 빛이 배제된 공간이라니.



사진 출처




무언갈 감출 필요가 있었나?

아니면 단순히 버려진 장소인걸까?

의문점들을 머릿 속 깊숙한 곳에 쑤셔 넣은 채

남자는 어둠 속에서 눈이 적응하길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고 어둠으로 가득찼던 주변 공간에 

선과 형태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주변에는 네모난 캐비닛 같은 직사각형의 기계들이 

모든 공간에  빽빽하게 놓여져있었다.

서버실이라도 되는걸까?

눈 앞의 기계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댄 남자는

얼음처럼 차가운 기계의 냉기에 

깜짝 놀라 황급히 손을 뗐다.

동작하는 기계치곤 얼음장같은 온도였다.

남자는 어린이와 같은 호기심에 

주변에 놓인 기계들을 면밀히 조사했다.

기계들은 입력장치도 출력장치도 없었으나

꽃혀있는 복잡하게 얽힌 전선들은

모두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전선이 향하는 곳으로 조심스레 발을 옮기던 남자는

갑자기 비춰진 불빛에 놀라고 말았다.

눈이 빛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리고나니

눈앞으로 참 기묘한 광경이 펼쳐져있었다.

전원이 켜졌는지 빛을 내뿜고있는 

일인용 포드를 중심으로 아까 많이 보였던 

직사각형의 기계들이 원형으로 삥 둘러 설치되어있었다.

주변에 널부러진 크고 작은 전선들이 저 낡은 포드에 

간당간당하게 꽃혀있는것이 

아무래도 버려진지 오래된 것으로 보였다.

남자는 포드에 달린 투명한 

강화 플라스틱 창 속을 들여다 보았다.

포드 속에 있는 것은...




???




묘령의 여인이 마치 악몽이라도 꾸듯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잠들어있었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개폐장치를 찾았으나

어느 곳을 둘러봐도 포드의 컨트롤러를 찾을수 없었다.

딱 하나,

포드 앞쪽의 수상한 장치를 제외한다면.

그 장치는 포드의 앞부분을 

강제로 뜯어서 설치한 것이었다.

피복을 벗기고 임의로 납땜한 전선들과 

여기저기 널부러진 케이블 타이들,

그리고 조잡한 흔적들의 끝으로 

왠 VR 헬멧과 노트북 같은 것이 상자 위에 놓여있다.

상자에는 수산시장 마크가 그려져 있는걸로 보아

틀림없이 외부에서 가져온것 같았다.

어쩐지 남자가 보기에 이 조잡한 흔적들은 

굳센 문을 돌파하기위해 만들어진 

어설픈 공성추처럼 보였다.

남자는 지금까지 조사한 정보들을 조합해보았다.


“낡고 버려진 장소, 포드 속의 여인, 

그 포드에 강제로 침입하려는 기계와

그 근처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던 나까지...

흠... 

나는... 이 여인을... 구하려다...

기절 한... 건가...?”


“훌륭한 추리십니다만 한 가지를 빼먹으셨군요.”


갑작스런 여성의 말소리에 깜짝놀란 남자는

곧장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곳에 서있는 사람은... 사람?


“‘저희’ 가 저 여자를 구하려고 했죠, 

사령관님.”


벌거벗은 여인이 당당히 서있었다.

... 벌거벗은 여인?






벌거벗은 여인








“알아요, 일어나 산지 얼마 안 된 상황에 

주변 상황이 얼마나 혼란스럽게 느껴지실지.”


그렇다. 남자는 자신이 미쳐버린줄 알았다.

벌거벗은 여자라니?


“처음 보는 장소에 처음 보는 기계들,

거기에 처음 보는 바이오로이드까지.

하지만 안심하세요. 

저는 사령관님의 편이니까.”


남자는 벌거벗은 여인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내가 벌거벗은 여자의 사령관이라고?


“사령관님께서 또 다시 기절하신 후

걱정스런 마음에 잠시도 가만있질 못했어요. 

행여나 사령관님께서 잘못되기라도 하셨다간

오르카 호에서 기다리고있을 수 백명의 병사들은 

큰 절망에 빠지고 말았을거에요...”


남자는 돌아버릴것 같았다.

내 아래로 벌거벗은 변태들이 수 백 명이나 있다고?

남자는 최대한 벌거벗은 여인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저... 아가씨? 

아가씬지 누구신지 잘 모르겠지만 

거 사람을 잘못보신 것 같은데...”


“후우... 번 백의 후유증으로 기억이 또 날아가셨군요? 

다시 시작하죠. 제 이름은 스카디입니다.

제 이름을 알려드린건 

이걸로 서른 아홉 번째고요.”


서른 아홉 번째?  

그녀가 잘못 알고있는 것이리라.

저 근육질의 알몸을 보고 잊는다는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얼타고 있는 남자에게 벌거벗은 여인이 

착잡한 얼굴로 쥐고있던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남자가 주저하자 손에 강제로 쥐어주기까지 했다.

외부 스피커가 달린 작고 낡은 mp3였다.

얼마나 만지작거렸는지 

끝부분이 벗겨지기까지 했다.

남자가 조심히 화면을 들여다보자 두 개의 파일이 보였다.

그 중 첫번째 재생파일을 누르자

듣기싫은 기계음과 함께 

한 남자의 목소리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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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

...

깨어났나? 좋아.

지금 이 파일을 재생하고 있다는것은

철충이 아직 이곳까지 쳐들어오진 않았다는 말이겠지.

시간 없으니까 불필요한건 생략할테니 잘 들어. 
우선 내 목소리를 듣고 알겠지만, 나는 너다.

오르카 호의 사령관, 인류의 희망.

뭐,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저기 포드 속에 여자가 잠들어 있는거 봤지?

그래, 레이시야.

허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보통 레이시가 아니지.

저 여자는 멸망 전 코헤이 교단 소유의 

바이오로이드였어.

조느라 못들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르망처럼 무언가를 

볼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라고 들었어.

너는 저 여자를 구하기위해 

부하들의 간곡한 설득과

반 협박조의 으름장도 무시하고 

지금 이 장소로 쳐들어왔다가

무수히 많은 철충들의 습격으로 

본대와의 연락도 끊기고

스카디랑 나... 아니, 

너랑 단 둘이 이곳에 고립된 상황이야.

그러니까 어디 도망칠 생각 하지말고 

힘내서 그 여자를 구하면 되는거야. 쉽지? 

방법은 스카디가 알려줄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럼 이만... 아 참! 중요한게 있었지.

2번 재생 파일은 지금 틀지마,

최소한 지금 당장은 말이야.

날 믿어, 지금 재생해도 이해 못할 걸?

그럼 이만! 힘내고!

...

뭐 누르라고? 아 맞다...

*딸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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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멍청한 표정으로 재생장치를 보다가

곧 얼굴을 찌푸렸다.


‘철충? 오르카 호? 아르망? 바이오로이드? 그게 다 뭐야?’


남자는 싸구려 3류 소설마냥 고유명사를 남발하는 

재생장치 속 남자가 영 맘에 들지 않았다.


“다 들으셨나요?”


벌거벗은 여인... 아니, 스카디의 물음에도

남자는 한참을 그 장치를 들고 서있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고, 

남자가 장치로부터 고개를 들어 스카디에게 물었다.


“제 이름이 뭔가요?”


“네?”


남자의 질문에 스카디는 부자연스러워

보일 정도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남자가 연이어 물었다.


“혹시 저를 아시나요?

이상하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이름도, 가족도, 과거도 모두 모르겠어요.“


“... 죄송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저를 사령관이라 부르셨잖아요?”


남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령관씩이나 되는 인물의 이름을 모른다고요?”


남자는 스카디의 어색한 움직임을 읽었다.

남자는 단호하게 물었다.


“... 질문 몇 개만 합시다.

간단하게 예, 아니오로만 대답해요.”


“...”


“첫째,”


남자가 손가락을 하나 올렸다.


“당신은 저의 아군이 맞나요?”


“그건...”


“아까 제가 뭐라고 했죠?”


남자의 압박에 스카디는 초조한 듯 

입술을 핥으며 대답했다.


“네. 전 사령관님 편이에요.”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스카디가 뭐라 하려는 찰나 

남자가 또 다른 손가락을 올렸다.


“둘째, 제가 기억을 되찾는 과정이나 결과가 

결론적으로 당신에게 해가 되나요?”


“절대로 아니에요! 오히려...”


“좋아요, 그럼 셋째.”


남자가 마지막 손가락을 올리며 물었다.


“당신이 감추고 있는 무언가를 

제가 알아채기라도 한다면 

당신에게 손해가 되나요?”


“...”


스카디는 침묵했다. 남자에겐 답이 됐다.


“당신을 못믿겠어요.”


남자의 단호하게 말했다.


“적의가 느껴지진 않지만 

뭔가를 감추고있는 모습이 
좀 믿어주기 힘들게 만드네요.”


스카디가 말도 안된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령관님이... 이렇게 냉철했나...?”


“아무튼!”


남자가 단호히 외쳤다.


“내게 모든걸 털어놓을 생각이 없다면

나 역시 협조할 생각따윈 단 하... 컥!!


스카디의 낯빛이 한 순간 달라지더니

곧장 남자를 향해 달려들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남자가 팔을 내리치며 버둥대봤지만

스카디의 힘은 비상식적으로 강했다.

남자가 의식을 잃어가면서 스카디의 말소리를 들었다.


“감히 사령관님께 폭력을 휘두르다니...

제 잘못이 아니에요.

사령관님께서... 다 사령관님이...”


남자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스카디는 남자를 끌고와 머리에 VR헬멧을 씌운 후

노트북으로 다가가 전원을 켰다.

화면에 떠있는 ‘38’이라는 숫자가 

곧 ‘39’로 바뀌었다.









39.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운수 참 더럽지.’


남자의 텅 빈 머릿속으로 생각 하나가 스쳤다.


‘기억을 잃고 어딘가로 납치를 당해선,

왠 노출증 여인이 목을 조르더니,

이렇게 의식을 잃고 널부러졌다니...

다음은 뭐야? 

장기매매업자에게 홀랑 털릴 일만 남았나?

하아... 제발 콩팥이랑 허파 하나씩은 남겨주세요...

... 장기매매?

뭐지?’


남자는 방금 떠오른 생각이 믿기지가 않았다.


‘난 기억을 잃었잖아?

그런데 어떻게 장기매매라는걸 알고있는거지?

무의식적으로 떠오른거긴 한데

기억상실이면 다 잊어버려야하는거 아닌가?

특정 기억만 상실되는 일이 가능 한 건가?

난 도대체...!’


“... 이봐? 이봐!“


기절한 남자의 귓등으로 누군가가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놀라 일어나보니 

왠 양복쟁이 공무원같은 인간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근무중에 잠이 오나? 코헤이의 수치같으니...”


“누, 누구시길레 남을... 뭐야, 여기 어디야?”


남자는 전과는 달라진 주변 풍경에 놀라고 말았다.

새하얀 대리석 바닥과 천장에서

뜨거운 조명이 내리쬐는 일자식 복도는

이전의 서버실과는 판이 달라보였다.

멍 때리며 서있는 남자에게 귓속으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아, 아! 하나둘셋 하나둘셋.

사령관님, 들리시나요?”


스카디의 목소리를 듣고 흥분한 남자가 소리쳤다.


“너, 너! 내 목을 조른...!”


“...? 자네 누구에게 말을 하는건가?”


양복쟁이의 말도 무시한 채 남자는 계속 화를 냈다.


“너 도대체 누구야? 나한테 원하는게 뭐야?

난 지금 어딨고 넌 어디서 내게 말을...!”


순간 남자가 말을 멈추었다.

그의 팔이 이상했다.

마치 잿더미가 바람에 날아가듯

손이 점점 비트(bit)화 되더니

 가루처럼 분해되고 있었다.

금세 손의 절반이 분해되자

남자는 두려움에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으아아악!!! 뭐, 뭐야?! 내 손... 내 손이...!”


“사령관님! 살고싶으면 옆에 서있는 자에게

‘죄송합니다, 긴장한 탓에 그만...’ 이라고 말하세요!

빨리요!”


남자는 뭔소리냐고 묻고 싶었으나 

벌써 절반이 날아간 손을 보곤

어쩔수 없이 소리쳤다.


“죄, 죄송합니다! 긴장한 탓에 그만!!!”


그러자 절반 쯤 날아간 손으로

검은색 비트들이 하나둘 달라붙으면서 

서서히 복구 되어가기 시작했다.

그 신기한 광경을 보고도 옆에 있는 양복쟁이는 

아무것도 못 본 것마냥 말을 이어갔다.


“쯧쯧쯧, 정신차리게, 정신!

곧 그녀를 만날 시간인데 그렇게 멍청하게 있을건가?

빨리 따라오게!”


그리곤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스카디가 다시 소리쳤다.


“따라가세요! 아까처럼 되고싶지 않으면!”


남자는 억울했으나 별 수 없이 

양복쟁이를 따라가는 수 밖에 없었다.

복도에 떠다니는 먼지들 때문에

남자는 연이어 기침을 하며 바쁘게 발길을 옮기자

스카디가 상황 설명에 앞서 사과인사를 건냈다.


“사령관님, 정말 죄송합니다. 

사령관님께 충분한 설명을 드리기도 전에 

VR기기에 강제로 접속시키는 바람에...”


“VR? 너 설마 나한테 그 VR 헬맷을 씌운거야?!”


“사령관님! 쉿!”


스카디가 다급히, 그리고 빠르게 외쳤다.


“사령관님께선 현재 레이시양의 기억을 

관리하는 포드에 침입하신 상태입니다!

포드에서 요구하는 입력값을 크게 벗어나셨다간

포드의 백신 프로그램이 침입자인 사령관님을 

바이러스라 판단하고 삭제하려 들겁니다!”


“그, 그럼 어떻게...?”


“제가 코치 해드리는 것 이외의 행동은 모두 자제해 주세요.

아시겠나요?”


남자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


“너... 내가 여기서 나가기만 해봐라...

아주 그냥...!”


“네, 네. 

평소처럼 목줄도 마련해둘게요. 

가죽 좋아하시죠?

... 도착하셨네요, 준비하세요.”


“뭘?”


남자의 질문에 대답하듯

양복쟁이가 남자의 옆구리를 툭치며 말했다.


“암호.”


“예?”


양복쟁이와 남자는 녹이 슨 문 앞에 다다랐다.

툭치면 그대로 무너질것 같은 모양새에

작게 나있는 덧창 사이로 날카로운 

두 눈이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남자가 버벅이고있자 스카디가 외쳤다.


“ ‘빛이 드는 성역’ 이에요 사령관님! ”


“비, 빛이 드는 성역입니다!”


“맞아, 그랬지.”


암구호를 들은 문 뒤의 사람이 덧창을 닫자 

곧 걸쇠들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문에 달려있는 걸쇠의 갯수를 짐작하는 사이,

14개 째 걸쇠가 풀리면서 문이 활짝 열렸다.

양복쟁이와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가며 

덩치 큰 사나이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자

남자는 뭐 대단한게 있다고 이러는지

툴툴거리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 중앙으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 포드에 있던 그...!”


“잘 지내셨나요?”


같이 온 양복쟁이가 책상 맞은편 의자에 앉아있는 

레이시에게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몸은 좀 어떠신가요? 

지난번보다 나빠지진 않으셨나요?”


남자는 양복쟁이의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취조실같은 방 모양새에 낡은 침대 하나, 

책상 한 개, 의자 두 개가 전부인 

허접한 방에 갇혀사는 여자에게 몸상태를 물어보다니.

이 방을 그녀에게 내준 사람이 누구건

절대 좋은 의도로 내준 것은 아닐거라 생각했다.

여성은 피곤한 얼굴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いいえ、大丈夫です...


생전 처음 들어보는 언어에 눈이 휘둥그레해진 

남자에게 양복쟁이가 물었다.


“일본어 맞나?”


남자의 귓속으로 스카디가 빠르게 대답했다.


“일본어 맞습니다, 사령관님. 

번역팩을 이걸 깔면...”


남자는 양복쟁이에게 일본어라 대답했다.

양복쟁이는 들고 온 서류가방에서 무언가를 찾더니

녹음기와 통역기, 두툼한 서류와 만년필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더니 통역기에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남자에게 명령했다.


“말하게. J19840205# 사건 기록시간이라고.”


남자가 머뭇거리자 스카디가 안심시켰다.


“괜찮습니다, 사령관님. 통역팩을 깔았으니

자동으로 번역되서 말이 나올거에요.”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저... 레이시... 양? 

J19840205# 사건... 기록 시간 입니다.”


그의 말을 들었는지 아닌지

레이시는 침을 흘리며 멍하니 앉아 중얼거렸다.


「담배를 안 핀지... 얼마나 됐더라? 죽겠네...」


양복쟁이가 참을성없이 책상을 똑똑 두들기며

주의를 주자 레이시가 양복쟁이를 쳐다봤다.


「... 뭐라고요...? 기록시간이요...?

... 아직도 궁금한게 남아있나요?

그보다 나 담배 한 대만 피면 안될까요?

몇 일 째 못 피니까 죽겠어요...」


양복쟁이는 한숨을 쉬더니

이내 품속을 뒤지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중얼거리는 입은 멈추지 않았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 말지어다.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고 있다면.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 말지어다. 

악을 보고도 양심의 소리를 따르지 않을거라면.

... 여깄군.”


그리곤 남자가 말릴 세도 없이

양복쟁이는 품속에서 찾아낸 

작고 붉은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레이시의 머리에서 전기가 튀더니 

이내 머리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멘’ 하지 말지어다.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을것이라면.

... 아시겠나요, 레이시양?

당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었는지를 말 할 시간이에요.

... 이정도면 알아 쳐먹었나?”


남자가 분노한 표정으로 

양복쟁이에게 달려들려하자

귓속에서 스카디가 만류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령관님! 벌써 잊으셨어요?!

사령관님께서 포드가 의심할 행동을 하셨다간...!”


“구하러 왔다며?!”


남자가 외쳤다.


“내가 여기 놀러온것도 아니고

저 여잘 구해야한다고 네가 말했잖아!

뭔소린지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야 알겠어.

세상 어느 개자식이 이 광경을 보고도 가만히 있겠어!!”


“아 좀, 사령관님!!!”


스카디가 격하게 소리를 질렀다.


“제 앞에서 포드한테 개기다 삭제당했다간

당장에라도 사령관님을 포드에서 끄집어내서

죽을때까지 두들겨 팰테니까 제발 명심 좀 하세요!!

지금은 가만히 있어요, 알았죠?!”


스카디의 강경한 외침에 남자는 

어쩔수 없이 분노를 삭혀야만 했다.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레이시를 보며

가슴 한 켠이 아려옴을 느꼈다.

레이시는 가엾게도 머리를 붙잡으며 애원하고 있었다.


「죄, 죄송해요...! 아, 안 그럴게요...

다... 다 말 할테니까... 제발...!」


레이시의 외침에도 양복쟁이는

낄낄거리며 몇 번이나 버튼을 누르다 

옆에 내려놓고는 팬을 붓잡으며 말했다.


“그러면... 시작하죠. 

신께선 당신을 어떤 모양으로 빚으셨나요?”







*딸깍*







「저는 시마네현에서 태어났어요.」


“시마네현... 깡촌에서 태어나셨군요.”


「네... 다섯 자매중에 막내였죠.」


“자매들 얘기는 됐고, 가정환경으로 넘어갑시다.

좋았나요? 나빴나요?”


「나빴죠. 어머니는 절 낳다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그 때문에 절 미워하셨거든요.」


“미워하셨다... 이유가 뭐죠?”


「아버지의 욕심때문이었죠.

대를 이을 아들이 필요하다고 

병 때문에 쇠약해지셨던 어머니를 강제로...

그러다 돌아가시니까 절망한 아버지가

모든 책임을 전부 저에게 돌리셨어요.」


“그렇군요...”


「욕을 하시거나 소리를 지르시고...

술이라도 드셨을 땐 막... 때리고... 목을...

허억... 조르...」


“그렇군요... 다음으로 넘어갑시다.

당신의 주변 사람은...”


「괴, 괴로워요... 이, 이것 좀 풀어주세요...!」


“하아...”


(양복쟁이가 버튼을 짧게 몇 번 누른다.

레이시가 고통받다가 쓰러졌다. 

양복쟁이는 옆의 컵을 들어 그녀의 머리에 쏟았다.

레이시가 간신히 일어나자 양복쟁이가 이어서 말했다)


“정신이 드세요?”


「으... 아... 예, 예...」


“다음으로 넘어갑시다.

아버지의 학대에 다른 자매들은 뭘 했죠?”


「저, 전혀... 도와주질 않았어요.」


“왜죠?”


「아, 아버지가 무서워서...

똑같이 맞을까봐... 그래서...」


“그래서 아버지의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예...」


“심정은 어떠셨나요?”


「슬펐어요...」


“슬펐다...”


「다들 날 싫어했어요...

학교에선 음침한 년이라고 왕따 당하다

집에 돌아오면 꼴도보기 싫다고 재떨이로 얻어 맞고...

피랑 담뱃재를 흘리면서 집밖으로 도망쳤을 땐

너무 아프고 억울해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울었어요.

왜 다들 날 싫어할까... 하고.」


“그래요...”


「그래도...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았어요.

힘들어도 꾹 참고 견디다보면

제게도 언젠간 밝은 날이 올거라고...

그렇게 믿고 꾹 참았어요.」


얼씨구. 그래서요?”


「그러더니 정말 좋은 일이 생겨났지 뭐에요?

집이 가난해서 고등학교 등록금을 못내니까

더이상 고등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었어요.

거기다 아버지의 간경화가 심해지면서 

앓아 누우셨어요.

저는 그 날로 자유가 되었죠.」


(기분나쁜 웃음소리)

“... 예, 그렇군요. 

그래서 정말 양에게 좋은 일들만 있었나요?”


「어... 아뇨, 아버지께서 일을 

못하시니 집안이 어려워지고... 

중학교도 겨우 졸업 한 여자에겐 

반반한 직장 하나 잡는 일도 매우 어려웠어요. 

언니들은 이른 나이에 독립해서 취업전선에 빠졌거나

일찍 시집을 가서 가정을 꾸렸는데 

저는 그게 참 부러웠어요. 

나같은 년은 누구도 데려가지 않을테니까.」


“허나 인생은 모르는 일이죠.

당신을 찾는 남자가 세상에 존재할 줄이야.”


「... 네.」


“누구였죠?”


「...」


(버튼을 만지작거리며)

“누구였죠?!”


「... 구로다... 규이치씨...」


(서류를 뒤적이며)

“구로다... 구로다... 구로... 아, 여깄군.

52세 남성. 직업은 비료 공장 사장.”


「...」


“이 신문에 사진, 이 여자가 당신 맞죠?”


(전혀 다른 인물이건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야마모토가의 비극, 17세 소녀 팔려가다.’ 

허허, 그 시대에도 시집팔이가 존재했군요?”


「...」


“아버지는 허락하셨나요?”


「아버지가 강행하신거에요.」


“아버지가요?”


「전 싫었는데... 쓸모없다고... 

약값이라도 벌어오라고 욕하면서 억지로...」


“파셨군요? 자기 딸을!”


「... 예.」


“허허, 참 좋은 아버지셨네요.”


「...」


“... 예, 뭐... 그건 그렇다치고.

시집살이는 어떠셨나요?”


「... 싫어요」


“싫으셨고...”


「아니, 말 하기 싫다고요!

더 말하기 싫어요. 그만할래요...」


(버튼을 만지작거리며)

“싫으시다...?”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세요!

정말 말하고 싶지 않다고요.」


“흐흐흐... 그걸 반항이라고 하는겁니까?

사실, 애초에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도 없어요.

우리에게 필요한건 강력한 증거가 될만한 

몇 마디 증언이 전부니까.”


「... 예?」


“당신 과거 정도는 당시 사건 파일이나 신문, 

기타 자료들로 파악해 놨지만

이 정보들을 가치있게 만드는것은

바로 당신의 그 생생한 증언이란 말이라는거죠.”


「그게... 무슨...?」


(녹음기를 두드리며)

“당신의 생전 증언이 얼마에 팔리는지 알면

당신 아버지도 눈이 뒤집혀서는 

바로 목을 또 조르며 협박할걸요? 

빨리 말 해! 안 그럼 죽어! 하면서.

으하하하!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양복쟁이가 옆의 남자에게 농을 걸었다.

남자는 증오스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 뭐, 그러니까.

말하기 싫다면 안 하셔도 그만이다, 이 말입니다.

대신 제가 말씀 드리는 당신의 과거에 대해 

맞는지 아닌지만 말씀해 주세요. 아시겠죠?”


「...」


“동의도 구했으니 계속하시죠.

당신은 17세의 나이로 비료 공장을 운영하는 

구로다 규이치에게 팔려갔습니다.”


「...」


“흠... 거기서도 적응을 잘 못하셨나봐요?

여기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 보이십니까?”


「...」


“뺨을 맞고 있으시군요. 보이시죠?”


「...」


“어떠신가요? 

본인이 맞고있는 사진을 보는 느낌이?”


(레이시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였다)

「...」


“한 번 맞춰볼까요?

당신은 타의로 팔려갔지만 

그래도 희망을 잃진 않았을거에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뭐 대충 그딴 헛소리로 자1위나 하면서 말이죠. 

그죠?”


(레이시가 고개를 떨궜다)


“이 구로다라는 분도 처음에는 잘 대해줬을 거에요.

원래 처음 장난감을 받으면 

누구나 아끼면서 가지고 노는 법이니까요.

그렇죠?”


「... 그만.」


“당신은 그런 구로다씨를 보며 혼란스러웠겠죠.

정말 자기를 좋아해서 잘 대해주는건가? 하고.

원래 상처입은 짐승들이 더 잘 속거든요.

그렇지 않나요?”


「그만해요...」


“그렇게 점점 그에게 마음을 열려던 찰나,

침대 위에서 본색을 들어낸 구로다씨에게 

존나게 따먹혔을 때, 어떠셨나요?

기분 좋으셨나요? 그러셨나요?”


(울부짖으며)

「그만! 그만해요, 제발! 제발... 그만하세요...」


(뒤집어질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으하하하하!!

아, 이 구간이 이렇게나 재밌다니까?

이런게 사내복지지. 안 그런가?“


(남자는 질문에 대답도 않고

주변에 묵직한 것이 있나 찾아보고있었다)


“이 부분은 편집하기로 하고...

어쨌든! 제가 계속 얘기할까요, 

아니면 양께서 이어서 하실건가요?

두 번 물어보진 않겠습니다.”


「... 알겠어요. 할게요...」


“좋습니다! 어차피 거의 다 끝났으니

양께서 마음대로 얘기하세요.”


(눈을 거칠게 닦으며)

「... 말씀대로 전 구로다씨에게 속았어요.

네, 속았다고요! 아주 멍청하게!!

근데 그게 죈가요? 그 때의 전 정말 절박했다고요...

살면서 처음으로 다정히 대해주는 사람을 만나서

저도 모르게 믿어버렸단 말예요.

... 멍청하게도. 

당신 말이 맞았어요.

그는 제 몸을... 좋을데로 만지고 강간하려고...」


“강간은 아니었죠. 법적으로 부부관계였으니.”


「닥쳐요! 뭣도 모르면서 나불거리긴...!」


“아 예, 예. 알겠습니다. 계속하시죠.”


「후우... 저는 구로다씨에게 부탁했어요.

집으로 돌려보내달라고.」


“그래서 맞았나요?”


「예... 처음엔 가식적으로 나오셨죠.

뭐 불편한거라도 있냐,

처음이라서 그런걸테니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라,

되는대로 지껄였죠.」


“그리고요?”


「그런데도 제가 보내달라고 때를 쓰니까

구로다씨도 인내심이 다 했는지

그 친절한 가면을 벗어 던지곤 

다짜고짜 제 뺨을 갈기는거에요. 그 사진처럼요.

거지같은 집안에서 팔려온 년이

잘 해주니까 뭣도 모르고 기어오른다고...

또 이딴식으로 나오면 오사카쪽 

창녀촌에 팔아넘길거라고...」


“아... 그래서...?”


「... 전 절망했어요.

배신감에 저항할 마음도, 의지도 사라졌죠...

그냥... 그냥 받아들였어요. 

그 구역질나는 입으로 제 온 몸을 핥을 때도

전 억지로 좋다고 흐느끼고...

제 모든걸... 다 버렸어요...」


“그래서요?”


「그런데도 구로다씨는... 

일 년도 안 되서 질렸다고... 밥맛 떨어진다고...

저를...」


“팔았군요? 창녀촌으로?”


「...」


“이야... 참 다사다난 하십니다, 그죠?”


「...」


(서류를 뒤적이며)

“그리고 매춘부가 되서... 오래 못하셨네요?”


「... 예.」


“일 년도 못 버티셨군요. 왜죠?”


「... 처음엔... 받아들였어요...

내 처지가 이런데 뭘 어쩌겠냐는 식으로.

최소한 굶진 않겠지 하면서

별 변태같은 놈들에게 몸을 팔았어요.

쥐꼬리만큼이지만 돈도 벌고,

말 잘들으면 맞을 일도 적고.

몇 개월 지나니까 적응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나요?”


「어느 날, 가게 안으로 손님이 찾아왔어요.

여느때처럼 접대를 하려 나오니까

그 남자 뒤로 갑자기 덩치 큰 남자 열댓명이 

가게 안으로 우루루 몰려들어오는거에요. 

손엔 사시미를 들고.

알고보니 적대 조직의 야쿠자들이

쳐들어 온거였어요.」


“호오...”


「가게 안은 곧 난장판이 되었어요.

가게 어깨들이 야쿠자들과 싸우는동안

가게 언니들은 비명지르면서 뒷문으로 도망쳤는데...

저는... 저는 멍하니 서있었어요.

머릿속이 새하얘져서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어요.」


“흠...”


「그러다 한 야쿠자가 저를 향해 달려오더니 

제 팔목을 확 붙잡았죠.

저보다 한참 큰 어른이 달려드니

그제서야 무서워선 막 비명지르고

제 팔목을 붙잡은 손을 막 물어뜯은 후

가게 언니들이 도망쳤던 뒷문으로 도망갔어요.」


“그리고요?”


「뒷문으로 나와서 왼쪽으로 꺽으면 차도가 나와요.

차도를 건너서 제일 먼저 보이는 건물 지하실로 내려가면

가게 매춘부들이 숨는 곳이 있었어요.

혹시 단속나오면 거기로 숨으라고 배웠죠.

그런데 제가 그곳에 도착할 때 쯤에는

이미 야쿠자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어요.

그 중에 한 명이 절 보고 소리쳤죠.

저기 냄비년 하나 있다고.

그러더니 야쿠자 몇 명이 절 쫒아오기 시작했고

제 뒷쪽으로도 아까 쳐들어온 

야쿠자들이 달려나온거에요.」


“완전히 포위됐군요?”


「어쩔수 없이 차도를 따라 도망치고 말았어요.

다리가 짧은 탓에 금방이라도 잡힐것 같았지만

그래도 숨이 끊어져라 달렸어요.」


“흠...”


「뒤에서 들려오는 욕설과 고함소리도

무시하고 미친듯이 달리니까 

야쿠자들로부터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어요. 

그 놈들이 헐떡거리며 숨조차 제대로 못쉬는 모습을 보니까

드디어 희망이라는게 제 마음속에서 피어나더라고요.

어릴때부터 도망만치던 버릇 덕분에 내가 사는구나,

나도 할 수 있는게 있구나하고 기뻐했어요.

난 할 수 있다... 난 쓰레기가 아니다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면서 달렸는데...」


“달렸는데...?”


「반대편에서... 신호를 위반한 오토바이가 

저를 치고 지나갔어요.」


“아이고...”


「오토바이에 치여서 몇바퀴 구르다

어느 음식물 쓰레기통에 쳐박혔을땐

입에서 피거품이 끓느라 숨도 제대로 못쉬었죠.

뒤늦게 쫒아온 야쿠자들이 제 처참한 모습을 보곤

코를 막으며 짜증을 내더군요.

중국에 팔아 넘겨야 하는데 

이 상태면 쓸모 없겠다고, 버리자고 하면서...」


“...”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저는 버려졌어요.

음식물 쓰레기더미 속에서 죽어갔죠.

누구도 찾지 않은 채, 비참한 쓰레기처럼.」


“...”


「감각이 사라지고 의식도 멀어져가면서

생각 하나가 제 곁을 떠나가질 않았어요..

제가...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러는거죠...?

전 노력했어요. 

누군가 욕하면 웃어보였고

때리면 굽신거리면서 용서를 구했죠.

남들이 싫어할 짓을 멀리하고

남들이 싫어하는 일은 먼저가서 도맡았어요.

그렇게까지...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절 사랑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어요...

왜죠...? 제 노력이 덜했던 건가요...?

도대체 뭘 해야 전 사랑받을수 있는건가요?

도대체 뭘... 어쩌면 좋은거죠...」


(녹음기의 종료버튼을 누르며)

“좋아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딸깍*














양복쟁이가 녹음기를 끄고

짐을 챙기며 말했다.


“수확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윗선에선 양의 실적이 실망스럽다며

폐기까지 하려 든 것을 

필사적으로 뜯어 말린 보람이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주십시오.

그럼 이만, 신께서 그대 곁을 걷기를.”


“지금이에요, 사령관님!”


스카디가 남자에게 외쳤다.


“레이시양을 설득하세요!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세요!”


“어, 엉?”


남자가 멍때리며 서있다가 정신을 차리자 

스카디가 답답하다는듯 소리쳤다.


“아이 참, 사령관님! 

중요한 상황에 뭘 하시는거에요!”


“미, 미안. 이야기에 집중하느라고. 

그래서 뭘 하라고?”


“설득이요, 사령관님! 설득!”


스카디가 단호히 말했다.


“레이시양의 포드는 현재 긴급 정지상태에요.

외부의 모든 친입이 막힌 상태라고요.

그 정지상태를 풀기 위해선 포드의 주축인 레이시양이 

정지상태를 해제하라고 명령해야만 해요.

그래서 VR기기로 어떻게든 우회로를 만든거라고요,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서!

이해 되셨어요?”


“어... 어... 어...”


“그냥 빨리 구하기나 해요!”


“어!”


남자는 서둘러 레이시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황급히 입을 열던 찰나...

갑자기 주변 공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각 세포가 손상됐는지 

모든 사물과 배경이 회색으로 보였다.

남자가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자

천장과 벽의 틈 사이로부터

균열이 벌어지는것을 보았다.

벽과 바닥이 서서히 무너져내리고

남자가 서있는 주변으로 금이 쩍쩍 갈라지고있었다.

남자가 소리쳤다.


“뭐, 뭐야!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거야?”


“이런... 사령관님! 설득은 집어치우세요.

당장 연결을 해제해야 해요!”

 

“뭐?”


“그녀의 기억이 여기서 끊겼어요.

사령관님이 그 곳에 있을 시간이 끝났다고요!

당장 꺼내드릴테니 조금만...”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예?”


그러더니 남자는 다시 황급하게 

레이시의 어깨와 다리를 붙잡아 

그녀를 들어올리려 했으나 헛수고였다.

레이시는 바위처럼 꿈쩍도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제발... 제발...! 좀... 좀 만 더....

크흑! 왜, 왜 안 들리는거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레이시 양을 설득해야 한다고!”


그러는 사이 공간의 균열이 

걷잡을수 없을만큼 벌어졌다.

이제 남자와 레이시 주변만을 

남겨두고 전부 무너져내렸다.

남자는 다급히 레이시에게 외쳤다.


“이봐요, 그... 레, 레이시양?

당신... 당신 벌써 죽으려는건 아니지요?

아니, 이게 아닌데...

그... 레이시양?

지금... 지금 주변 보이시죠?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다 죽을 판국이에요.

그러니까...”


허나 레이시는 그의 말을 듣고있지 않았다.

그녀는 이마에 손을 짚으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어쩌면 좋지...’ 라는것 같다.


“사령관님! 너무 늦었어요! 연결을 끊을게요!”


“아냐! 하지마! 아직 안 끝났어!”


“사령관님, 안돼요!!!”


남자의 무모한 외침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제 그의 주변으로 큰 진동이 울려퍼졌다.

당장이라도 바닥이 무너져내릴것 같았다.

그럼에도 남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제발! 레이시양! 당신은 죽어선 안된다고요!

왜, 왜인진 모르겠지만 난 다, 당신이 살았으면 해요!

하 씨,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되지?

아, 진짜 어쩌면 좋지...?

... 저기 레이시양?”


레이시는 듣고있지 않았다.


“레이시양... 난 당신이 필요해요.

누구의 자식으로서도 아니고 매춘부로서도 아닌,

레이시양 자체가 필요하다고요.

당신이 누구고 어떤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제발, 꼭 능력이 있어야 살 가치가 있는건 아니잖아요?

예? 제발 부탁이에요.”


레이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스카디는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듯이 말했다.


“그만하세요, 사령관님!

바로 연결 해제하겠습니다!”


“안돼! 절대로 안돼!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끊지마!! 너 끊었다간...!”


남자의 처절한 외침도 소용없이

 천장에서 내려온 물방울 하나가 

남자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물방울이 남자의 몸 전체로 퍼져나가자

곧 남자의 몸이 위로 떠오르면서

어딘가로 빨려 나가지는 것을 느꼈다.

남자는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처절히 외쳤다.


“안돼... 레이시! 레이시!!!”


남자의 외침은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공간은 무너져내렸고 그 사이로

빛 줄기 하나가 빠른 속도로 어둠을 뚫고 나갔다.

 







40.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남자가 정신을 차리더니 황급히 일어났다.

후유증으로 곧 구역질이 나는 바람에

고개를 돌려 토악질을 해댔다.

주변이 수면처럼 울렁거리는것 같았다.

꼭 누가 머릿속에 거품반죽기를 넣고

미친듯이 휘저은 느낌이었다.

남자가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헉헉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의 곁엔 이미 누군가 서있었다.

스카디. 팔짱을 낀 자세로 그를 내려다보고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몸은 좀 어떠신가요, 사령관님?”


“꺼져...”


남자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거의 됐는데... 다 됐는데 네가...”


스카디가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치더니

갑자기 남자의 멱살을 붙잡고 

뺨을 사정없이 갈기기 시작했다.

남자가 벗어나려 발버둥을 쳐봤으나 소용없었다.

스카디를 뿌리치기엔 그녀의 힘이 너무 강했다.

그녀가 말했다.


“제가 뭐라고 했죠?”


“악! 컥! 너, 너 무슨... 악!”


“제 앞에서 포드한테 개기면 어쩐다고 했죠? 예?!”


“그만두지... 못해...!”


“어쩐다고 했냐고요?!!”


“... 패... 패죽인다고...”


“근데!!!”


스카디는 때리는걸 그만두더니

남자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근데 그딴식으로 나오기에요?!

남은 사람은 초조하게 기다리고있는데

그딴식으로 위험하게 굴면 재밌어요? 즐거워요?”


“켁, 켁... 아니...”


“맹세하세요!”


스카디가 죽일듯이 남자를 노려보며 경고했다.


“‘다시는 위험하게 제멋대로 굴지 않겠습니다‘

따라해요!

‘다시는 죽을고비 넘어다니지 않겠습니다!’

빨리요!”


안 그래도 어지러운 상황에 

스카디의 폭력까지 더해지자 

남자는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것 같았다.


“으... 끄르릃...”


남자의 이 처참한 모습에 마음이 조금 동해졌는지

스카디가 말투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따라하세요, 다시는 목숨걸지 않겠다고.”


“...”


“따라하세요!”


“만약...”


남자가 혼미한 상태로 중얼거렸다.


“만약 네가 저기에 갇혀버렸다해도

난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널 구할거야.

넌...”


...

침묵이 잠시 흘렀다.

스카디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넌? 넌 뭐요?”


“... 어?”


남자가 정신을 차렸다.


“어... 뭐라고?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스카디가 한숨을 내쉬며 남자를 놔줬다.

남자는 어지럼증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중얼거렸다.


“... 뭔가 이상해.

기억을 잃었는데... 무의식적으로...

뭔가가 자꾸 튀어나와! 뭐지?

아니, 애초에... 난 왜 기억을 잃은거지...?”


“번백 현상 때문이에요.”


스카디가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번백 현상이 일어나려면 먼저 조건이 필요한데...

음... 알기 쉽게 비유법으로 설명해드릴게요.

사령관님은 USB, 포드는 컴퓨터에요?

USB를 컴퓨터에 꽃았는데

USB가 막 파일들을 들쑤시고 시스템 건드리고

문제를 많이 일으켰어요.

그래서 컴퓨터가 USB를 검사해보니까

 출처를 알 수 없는 파일이 너무 많다,

위험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서

강제로 전부 포맷을 시켰어요.

USB는 깨끗하게 비워지고 컴퓨터는 만족하겠죠.

이해가 가시나요?”


남자가 놀란 눈으로 머리를 짚었다.


“그래서 내 기억이...!”


“네, 사령관님. 그 강제 포맷을 전문 용어로

번백 현상(Burnback)이라 부르는거에요.

사용자의 동의없이 뒤에 남긴걸 

모조리 태워버린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죠.”


스카디가 피곤한듯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부턴 제발 무리하지도,

무식하게 달려 들지도 말아주세요.

사령관님의 정신은 이미 너덜너덜한 상태라고요.

사령관님은 그 번백 현상을 벌써 39번이나 겪으셨어요!

그 이상 번백을 경험했다간 정신에 영구적인 장애가 

발생할 지도 모른단말이에요.

그러니까 제발...”


“...”


“... 듣고 있어요?”


남자는 듣고있지 않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기다가... 

궁금한게 생겨서 스카디에게 질문했다.


“레이시는 어떻게 된거야?

설마 죽은건 아니지?”


스카디가 매우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살아 계세요... 정신은 죽어있지만요.”


“정신이 왜... 아, 설마 그 번백인가 하는것 때문에?”


남자의 외침에 스카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시양은 저 포드에 갇힌 채

수십 만 번의 번백 현상을 경험했어요.”


“뭐... 뭐라고?”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수도 있죠.”


스카디는 착잡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구시대 인간의 탐욕은 무저갱보다도 깊었으니까요.”


“탐욕? 저 여자 정신이 탐욕이랑

무슨 연관이 있다는거야?”


스카디가 머뭇거리다 곧 남자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레이시양은... 

시체의 기억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어요...

사이코메트리에 빙의를 더했다고하면 

이해가 되시려나요?”


“...!”


순간 남자는 포드속에서 

양복쟁이가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저기서 양복쟁이가... 

레이시의 증언이 비싸게 팔린다고...”


“네, 맞아요. 죽은자의 기억은 

산자에게 아주 쓸모가 많으니까.”


스카디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살인사건의 피해자의 기억과

상속분쟁 속 피상속인의 유언,

법정공방 중 제거당한 증인의 증언까지.

레이시의 기억은 높은 값으로 팔려나갔어요.

특히 다른 기억들과 뒤섞이지 않은 

깨끗한 기억은 부르는게 값일 정도였죠.”


“깨끗한... 기억? ... 설마?”


“네, 맞아요.”


스카디는 씁쓸하게 웃어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기억을 번 백 현상으로 깨끗하게 만든 다음

시체의 일부분을 만지게 한 후

그 양복쟁이가 레이시의 증언을 녹음해요.

그 내용을 실제 사건 기록과 대조해 본 뒤

증언으로서 가치가 있다면, 파는거죠. 

그 과정이 끝나면 레이시 양을 

다시 번 백 현상으로 깨끗하게 만들고...

그 과정이 수 십년동안 반복되었어요.”


스카디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

남자는 두 주먹을 꽉 쥐곤 분노를 토해냈다.


“어떻게... 어떻게 사람이 그럴수가...”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는거죠...”


스카디는 오른손으로 왼팔을 주무르며 읋조렸다.


“옛날 사람들이 얼마나 썩었는지 아시면

이정도는 애들 장난으로 보이실걸요?

작은것이라도 뺏기위해 서로를 죽이고,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것을 당연히 여기고,

단체는 이익을 위해 개인이 죽더라도 신경쓰지 않고...

정말, 그런 마경도 없었어요.

그에 반해 사령관님은... 선한 분이라서 다행이었죠.”


“난 선한게 아니야, 스카디.”


남자가 잔뜩 흥분한듯 

숨을 거칠게 쉬며 자기주장을 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아.

그저 선과 악 두 가지를 앞두고

우리의 정신, 즉 영혼이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거지,

처음부터 선하니 악하니 그런게 아니라고.”


남자는 거침없이 자기주장을 펼쳤다.


“그 새끼들은 자기들 배나 불리자고

한 사람의 정신을 망가뜨렸어.

도대체 무슨 권리로? 무슨 자격이 있다고 

한 사람의 순수한 영혼을 더럽힐 수 있는거지?

어떻게 그런 잔인한 짓을?!”


스카디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 치곤 

너무 뚜렷히 자기주관을 보였다.

그녀는 의아해하면서도 

남자를 시험 할 겸 질문 하나를 던졌다.


“영혼이... 있다고 믿으세요?”


“영혼이 정신이고 정신이 영혼이지.”


남자가 손을 휘휘 저으며 빠르게 말했다.


“영혼이야말로 인간의 중심이라고 종교인들이 말하잖아?

난 그 영혼의 정체가 정신이라고 믿고있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런 말 있잖아?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기관이 뭐야?

정신이지? 그래서 정신이 영혼이다, 이 뜻이야!”


남자의 열변에 스카디는 

믿기지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아를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정신을,

그녀의 영혼을 그 돼지같은 코헤이놈들이 

자기 배나 불리자고 제 멋대로 주물럭거리다니...

역겨운 인간놈들... 쳐 죽여도 시원찮을...”


“정말... 기억을 잃으신거 맞아요?”


스카디가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무리봐도 멀쩡해 보이시는데요?

설마 이것도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건가요?.”


남자는 순간 말을 멈추었다.

그는 스카디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내려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은 땀으로 푹 절어있었다.

남자가 손을 굽혔다 폈다하며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아 생각에 잠겼다.

스카디의 의아해하는 눈빛도 무시한 채

그는 가만히 서있었다.


“...”

 

그리고 잠시 뒤, 남자가 소리쳤다.


“스카디!”


“네, 네 사령관님?!”


남자가 달라진 눈빛으로 스카디를 쳐다봤다.


“확실히 알겠어.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아니, 기억을 되찾은건 아니야. 미안.”


스카디가 일순간 환하게 웃자 남자가 부정했다.

축 쳐진 스카디를 보며 남자는 자신감을 표현했다.


“그래도 어둠속에서 방황하듯 갈피를 못잡던 이전과는 달라.

이제는 뭘 해야될지를 알겠어. 

나는 사령관, 포드속의 레시피를 구할 사람인거지?”


“레이시요.”


“아무튼, 대화는 이 쯤 해두자. 

다시 포드 속으로 들어가야겠어.”


그러곤 사령관은 주저없이 VR헬멧을 주워 들었다.

스카디가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는 그녀에게 다짐했다.


“걱정마, 이번엔 성공시킬게.

... 가능하면.”


스카디는 어쩔수 없다는 듯

옆의 노트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사령관이 헬멧을 쓰고 

엄지 손가락을 올리자 버튼을 눌렀다..

남자의 정신이 기계속으로 빨려들어가자

남자는 갑자기 딴 생각을 했다.


‘사람은 생각하기에 존재하는 법인데

레이시의 속엔 다른사람의 기억이 들어있잖아.

그럼 레이시는 누구인거지?

레이시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건가?’


남자의 의식이 포드속으로 빨려들어간 후

미처 쫒아가지 못한 잡념 하나가 빛을 발했다.


‘그럼 나는 누구지? 

기억을 잃은 나는 내가 맞는건가?

기억을 잃은 나는 나라는 존재가 아닌걸까?

... 도대체 내 이름이 뭐지?’


사령관의 잡념은 환하게 빛을 뿜으며

사령관을 뒤 쫓아가기 위해 허둥지둥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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