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초중고때부터 귀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고 수능을 보기 전날 할아버지가 하신 훈계 안에도 있었던 말이다. 오랜시간이 지나 인류가 멸망해도 계속 유효한 말인지 저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과 총이 발사되는 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실전을 방불케 했다. 


 

아스널이 열심히 이끌고 있나보네. 역시 준장이야. 멀리서 들리는 포성에 작게 울리는 귀를 벅벅 긁은 나는 들고 있는 쪽가위로 조심스레 딸기의 꼭지를 딴 다음, 허리에 찬 바구니에 담았다. 

 


원칙대로라면 훈련자리에 참석해 그들이 잘하고 있는지, 어떤 점이 장점이고 어떤 점이 미흡하며 고쳐야 할 곳은 어딘지, 전체적인 훈련의 목적은 어느 방향으로 잡아야 할지 봐야하는 나지만 군수사령관이라는 번지르르한 감투만 썼지, 속은 평범한 스무살인 내게 그런 걸 일일이 살펴볼 안목 따위는 없었다. 


 

전문적인 지식 없이 함부로 군 관련된 걸 건드렸다가 화를 입은 경우는 인류역사상 세고 셌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보단 차라리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아스널이나 홍련에게 맡기는 쪽이 훨씬 낫다고 판단한 나는 훈련에 참석해 그녀들에게 방향을 정해주는 대신, 장갑을 끼고 쪽가위를 써가며 페어리들의 수확을 도와주었다. 


 

150년 후의 딸기는 어떤 맛일까 궁금하다. 딸기는 온실이 완성되자마자 처음 심은 작물이니 거진 한 달 만에 수확이 가능할 정도로 자랐다는 셈인데..빨리 자라준 것도 좋고 많이 달리는 것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맛이 썩창이라면 심은 보람이 없다. 바구니에 담은 딸기를 하나 입에 담았다. 

 


씨알이 굵은 딸기를 한번 베어 물자마자 과육에서 풍부한 과즙이 입 안에 터져 나와 제철 딸기 특유의 달콤한 풍미를 퍼트린다. 단언컨대 이런 딸기는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 


 

생으로 먹어도 이런 맛을 자랑하는 딸기라면 뭘 만들어도 맛있을 것이다. 잼으로 만들면 하루 지난 빵에 발라먹어도 엄청난 맛을 자랑할 테고 케이크 위에 올려놓는다면 맛을 끌어올려주겠지. 



“와..이거 장난 아닌데..리리스 너도 한번 먹어볼래?” 


 

장점을 있는대로 극대화시킨 딸기의 맛에 감탄한 나는 장갑을 벗고선 바구니에서 가장 튼실하고 윤기 도는 딸기 하나를 꺼내 리리스의 앞에 내밀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흑백이 어우러진 옷을 입고 내 옆을 지키는 리리스는 딸기를 집고 있는 내 손가락과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살풋 웃었다. 


 

겨울철에 핀 백합 한 떨기 같은 미소를 지어 주는 것도 잠시, 고개를 숙이며 머리카락을 옆으로 슬며시 넘긴 리리스는 딸기를 받아먹는 걸 넘어 딸기를 집은 손가락까지 통째로 입에 넣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느껴지는 과즙과 섞인 타액과 손가락 사이사이를 뜨겁게 달구는 숨결이 느껴졌다. 


 

“하아..하아..주인님..!” 

 


당돌한 아가씨 같은 외모와는 반대로 하는 짓은 브레이크 고장난 트럭이 따로 없다. 악셀을 밟아도 너무 밟아버린 리리스의 행동에 질린 난 그녀를 밀어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굳은 채 황홀한 표정으로 내 손가락을 입에 넣은 리리스에게 휘둘렸다. 성인물에서도 나오지 않을 신음을 내뱉으며 혀를 굴려가며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대는 리리스의 행동을 보자 뒤통수에 망치를 후려 맞은 것처럼 점점 얼얼해져 온다. 

 


“저, 저기 리리스..? 지, 지금 수확중인데..?”


“하아아~ 주인님..!”


“리리스씨? 주인님이 곤란해하시잖아요.” 

 


리리스에게 휘둘리는 날 구해준 사람은 페어리들의 장녀인 오베로니아 레아였다. 나와 리리스가 하는 짓을 보자마자 딸기를 가득 담은 바구니를 손에 든 채 황급히 날아온 레아는 나와 리리스를 떨어뜨려 놓고선 내 앞에 서서 나와 리리스 사이를 막아섰다. 


 

“리리스씨. 아무리 주인님을 지켜주는 분이라곤 하지만 주인님을 곤란하게 하면 못써요.” 

 


상냥하게 생긋 웃는 레아의 푸른 눈과 손수건으로 호를 그린 입가를 우아하게 닦는 리리스의 황금색 눈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서로 말 없이 바라보는 것과는 달리, 적정선을 아는 리리스와 레아는 다행히도 충돌을 일으키진 않았다. 리리스가 레아의 훈계에 이를 살짝 악물긴 했지만 금방 미소 짓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는 레아를 지나 내 옆에 서서는 경호 업무를 계속 이어 나갔다. 


 

타액과 과즙으로 범벅이 된 내 손을 본 리리스는 손목을 부드럽게 잡더니 손수건으로 내 손을 정성스레 닦아주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주인님. 딸기가 너무 맛있어서 제가 순간 정신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아..어...그래..응...이해는 안 되지만 이해하도록 노력할게.” 


 

딸기가 너무 맛있었다고 하기에는 내 손가락을 지나치게 빨아댄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리리스가 그렇다고 하니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그냥 앞으로 거리를 좀 두자.


 

리리스와의 작은 트러블이 끝나자 우린 다시 수확을 이어갔다. 딸기를 담은 바구니가 하나둘 늘어가고, 오르카호에게 선물로 보내 줄 양질의 것까지 따로 골라내는 것까지 마무리 짓는 동안, 내 옆을 따라다니는 리리스는 그녀의 옆에 어느샌가 따라붙은 더치걸을 바라보고 있었다. 밀짚모자에 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 호미와 바구니를 들고 서 있는 더치걸은 리리스를 올려다보며 말없이 저 멀리 있는 레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레아가 일을 도우라고 보냈구나. 쓴웃음을 지으며 더치걸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나는 레아를 지긋이 노려보는 리리스의 어깨를 툭툭 친 다음, 더치걸과 함께 감자를 캐기 시작했다. 트랙터나 경운기가 없어서 속도가 좀 느리긴 했지만 더치걸과 함께 캐니 힘들지는 않았다. 몸을 바꾼 이후로 전보다 키는 작아졌지만 훨씬 좋아진 근력과 지구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깊게 뿌리내린 감자를 동전 줍듯이 쑥쑥 뽑아 재끼는 더치걸 덕이 많이 컸다. 감자가 가득 든 상자를 한 손으로 들고가는 더치걸의 모습은 그녀들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생긴 건 종이 상자 하나도 못 들게 생겼는데 힘은 나보다 훨씬 세잖아. 성인 남성도 쉽게 못들 상자를 한 손으로 들고 레고블럭 쌓듯이 쉽게 올려놓는 더치걸의 모습을 보는 동안, 팔목을 겉어붙인 리리스는 흙먼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옆에 바짝 쪼그려 앉았다.


 

“주인님. 저도 도울게요. 리리스가 더 잘할 수 있어요.”


“리리스는 가만히 있어도 돼. 원래는 쉬는 날인데 일부러 날 지켜주려고 온 거잖아? 게다가 밭일하면 옷 더러워져. 예쁜 옷 더러워지면 안 되지.”


“주인님..리리스의 옷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시나요?”


“응. 검은색이랑 하얀색이 잘 어우러져서 엄청 예쁜데. 왜?”


“아아~ 주인님...!” 


 

단순히 솔직하게 옷을 칭찬했을 뿐인데 두 손을 뺨에 얹고 취한 표정을 짓는 리리스를 보자 식은땀이 주르르 흐른다. 아스널과 리리스를 겪은 이후로 얘네를 겉모습만으로 판단하지 않기로 했지만 리리스가 보여주는 외모와의 갭은 그걸 감안 하고서라도 정말 무서워진다. 겉모습은 양갓집 규순데 속은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음습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것만 같다. 


 

일단 일이나 계속해야지. 빨리 끝낸 다음, 씻고 훈련 결과 보고 받아봐야 하니까. 슬그머니 리리스와 멀어진 나는 더치걸과 함께 감자를 캤다. 

 


“더치걸, 힘들진 않아? 힘들면 가서 쉬어. 애는 일하는 거 아냐.” 

 


완력만으로 감자를 뿌리째 땅에서 뽑아버린 더치걸은 내 말을 듣자마자 감자를 든 채 조용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혀 힘들지 않아. 레아 언니와 다프네 언니와 함께 기른 작물을 손수 수확하는 것만으로도 기쁜걸. 빛 안 드는 탄광에서 석회석을 캐는 것보다 훨씬 좋아.” 


 

말을 마친 더치걸은 입고 있는 드레스처럼 흙투성이가 된 얼굴로 작게 웃었다. 군데군데 흙이 묻은 얼굴과는 달리 입가에 지은 미소는 눈 부실 정도로 하얗게 빛났다. 순수한 기쁨이 물씬 피어나오는 더치걸의 미소를 보자마자 시선을 받은 나는 물론이고 내 뒤에 서 있던 리리스까지 아무 말 없이 애잔한 눈으로 더치걸을 바라보았다. 레아에게 몰래 부탁해서 더치걸을 더 잘 챙겨 달라고 해야겠다. 앞으로 많이 행복하게 해 줘야지. 힘들게 살아온 날을 다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수확을 마친 뒤 짧은 샤워와 함께 흙먼지로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고 사무실의 문을 열자 쇼파에 앉아있는 아스널이 몸을 일으켜 날 맞이해주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땀이 흐르는 목덜미는 그녀가 훈련이 끝나자마자 씻지 않고 바로 달려왔음을 알려주었다. 


 

수확도 제법 오래 걸렸는데 그냥 가서 쉬지. 고된 휴식 시간을 제쳐두고 보고를 위해 내게 달려온 아스널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왔는가 그대여. 수확이 제법 오래 걸렸나보군.”


“제법 일이 많았거든. 너도 지치면 쉬지 그랬어.”


“지치더라도 보고는 미룰 수 없지. 그리고 고작 훈련 한번으로 지칠 내가 아니다.” 


 

그녀가 자랑하는 포병들만큼이나 당당하게 웃은 아스널은 들고 있는 서류를 내게 주었다. 그녀가 분석한 훈련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이 잘 해낼 수 있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아스널과 홍련의 훈련에 매우 잘 따라와 준 걸 보면 역시 몸에 배인 경험은 무시할 만한 게 못 된다.


 

“그래서, 결정했어? 편성은 어떻게 하고 싶어?”


“캐노니어와 함께 묶는 것보단 홍련을 지휘관으로 두 개의 부대를 운용하는 게 좋다고 본다. 부관으로 두기엔 그녀의 능력이 아깝더군.” 


 

그래. 아스널이 그렇다면 그런거겠지. 쇼파에 털썩 앉은 나는 펜을 들어 부대 편성을 마무리 지었다. 훈련도 잘 되었고, 수확철을 맞은 작물들도 얼추 수확했으니 자라고 있는 것들을 수확하고 울산으로 가 식량 자원을 포함한 남아있는 자원들을 회수한 뒤, 조선소로 들어가 거점 발전에 필요한 물건들을 싸그리 쓸어온다. 배가 남아있으면 그 배도 가져와야 되고.


 

생각해 보니 할 일이 엄청 많잖아. 특히 포츈과 그렘린. 이 둘이 엄청나게 바빠지겠는데? 공장에서 스패너와 망치를 들고 열심히 일하고 있을 둘을 생각하자 손에 들려 있는 단말기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휴식이 끝난 포츈은 오르카에 보낼 부품과 물자를 생산하는 AGS를 감독하는 것도 모자라 그렘린과 함께 뭔가를 만들고 있다. 포츈 말로는 컨테이너 안에서 먼지를 맞고 있는 전술 차량 들과 안 쓰는 탄환들을 이용해 그렘린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도움이 될 무언가를 개발하는 중이라고 하는데. 군수 생산 감독과 작업용 AGS들의 점검도 모자라 병기까지 개발하는 그녀들에게 조선소에서 할 일까지 떠넘겨지면 그렘린과 포츈이 나란히 손잡고 과로사할지도 모른다.


 

“그대여 단말기는 충격에 약하니 소중히 다뤄야 한다. 망가지면 포츈의 일이 더 늘지 않나.”


 

떨어진 단말기를 주워 내 손에 들려준 아스널은 쇼파에 걸터앉더니 갑자기 어깨를 붕붕 돌리기 시작했다. 

 


“흠. 오늘 훈련에 열을 들여서 그런가, 나답지 않게 어깨가 뻐근하군. 이러다간 다음날 큰일나겠어.”


 

날 향해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인 아스널은 실실 웃으며 눈짓을 보내기 시작했다. 열심히 했으니 안마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쇼파 뒤로 돌아간 나는 내게 등을 보이는 아스널의 어깨를 열심히 손으로 주물러 주었다.


 

“그냥 대놓고 주물러 달라고 말해. 이런 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으니까.”


“포츈 말대로 그대의 손길은 정말 섬세하군. 침대 위에서는 어떨지 기대되는걸.”


“방금 섹드립은 좀 선 넘었어. 옐로카드 하나 줄게.”

 


물 흐르듯 자연스레 섹드립으로 이어가는 아스널에게 경고를 줄 겸 골탕도 먹일 겸 두 손가락을 세워 어깨를 꾹 누르자 부드러운 살결 너머로 탄탄한 근육이 느껴졌다. 슬림하고 날씬한 외모여서 힘은 상대적으로 약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티 안나는 근육이 숨어 있었잖아? 

 


아무렇지도 않게 웃음을 터트리는 아스널의 모습에 약이 좀 오른다. 연장자인 내가 참아야지 어쩌겠어. 참지 않고 힘을 써도 근력에서 아스널에게 밀릴 것 같지만.

 


“의외로 근육이 붙어있잖아. 놀랐는걸.”


“하하하. 내 몸에 대해 궁금한가? 그러면 나와 같이 목욕을 하면서 살펴보는 건..”


“방금 것까지 합해서 레드카드야.”


 

아스널의 섹드립을 더 이상 들어줄 자신이 없었다. 아스널의 옆으로 간 나는 그녀의 뺨을 꼬집어 쭉 당겼다. 미동도 하지 않고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주제에 입으로는 아프다며 엄살을 부리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얄미웠다. 이쪽을 흘겨보는 그녀의 붉은색 눈은 계속 웃고 있었다. 반쯤 감긴 채 곱게 휘어지는 그녀의 미소는 얄미운 그녀의 행동과는 달리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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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서부터는 모음용 링크를 만들 예정. 링크 어떻게 만드는지는 모르지만 검색해보면 나오겠지. 그리고 아스널 왠지 제갈민보다 힘 셀듯.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 설정오류 지적도 언제나 환영.
 


1화 https://arca.live/b/lastorigin/44976706

2화 https://arca.live/b/lastorigin/44999112

3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036211

4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120694

5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159204

6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239531

7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275420

8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373070

9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402274

10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599944

11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709272

12화 https://arca.live/b/lastorigin/46158758

13화 https://arca.live/b/lastorigin/46363544

14화 https://arca.live/b/lastorigin/46558197 

15화 https://arca.live/b/lastorigin/47054292

16화 https://arca.live/b/lastorigin/47163165

17화 https://arca.live/b/lastorigin/47255307

18화 https://arca.live/b/lastorigin/47322842

19화 https://arca.live/b/lastorigin/47605809 

20화 https://arca.live/b/lastorigin/47674100

21화 https://arca.live/b/lastorigin/47840387

22화 https://arca.live/b/lastorigin/48097810

23화 https://arca.live/b/lastorigin/48211939

24화 https://arca.live/b/lastorigin/48320432

25화 https://arca.live/b/lastorigin/48398544

26화 https://arca.live/b/lastorigin/48747959

27화 https://arca.live/b/lastorigin/48918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