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알게 된 인간병기.

사랑을 꿈꾸게 된 스파이.

익숙한 클리셰지만 참 좋음.

에이미 되게 좋아했는데 서브스토리 잘 나와서 좋다.


되짚어보면 에이미도 이래저래 얘깃거리들이 있음.


현 오르카호에서 최초로 생산된 바이오로이드라는 것도 제법 상징적이고,

애기들 잘 챙겨주는 기믹도 좋음.


원래 근간이 스파이용 모델이잖음.

어쩌면 애기들 잘 챙겨주는 것도 스파이 임무의 일환으로서 교육받은 게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물론 그냥 성격이 그런 것도 있겠지만, 교육받은 게 있어서 처음부터 좌우좌를 잘 챙겨줄 수 있었던 거지.


모성애를 갖춘 따뜻한 레이디를 연기하기 위해 익혔던 애기들용 우쭈쭈.

처음에는 그저 오르카호에서의 새로운 삶, 새로운 역할을 위해 할 수 있으니까 한다, 내가 제일 나으니까 한다, 별로 어려운 건 아니니까, 딱 그 정도 느낌이었는데 점점 진심이 되어가는 거.

마치 요즘 스파이패밀리의 로이드처럼.


애기들 돌보는 게 진심으로 즐거워지고

애기들이 언니, 이모 하면서 따르는 게 행복해짐.


기존 냉혹한 스파이로서의 자아일 때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점점 가족이라는 걸 생각해보게 됨.

가족이란 걸 꿈꾸게 됨.


복원개체니 당연히 실제로 구 인류 시대에 살인을 저지르고 다닌 적은 없으나,

그러기 위한 목적으로 태어난 존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음.


어쩌면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나한테 이런 일은 어울리지 않아....'


인원이 부족했던 초기라면 모를까, 지금은 나보다 더 애기들을 잘 돌볼 수 있는 모델들이 많음.

애기들을 챙기는 일이라면 애초부터 그런 목적이었던 알렉산드라나 마리아 같은 모델이 더 잘할 테니까.


그런 생각에 좌우좌를 밀어내보려고도 함.

일부러 자원탐색에 더 자원해서 나가기도 하고, 그때마다 능숙하게 철충을 저격하는 자신을 보며 '그래, 역시 나는 이게 맞아...' 하고 생각하기도 함.


사령관과 더 뜨겁게 관계를 가지기도 함.

아주 능숙하게.

실제로 해본 적은 없지만, 미인계를 위해 학습된 수많은 밤기술을 능숙하게 해낼 수 있으니까.

그게 스파이니까.


그렇게 조금 좌우좌와 거리를 두고 지내던 어느 날.


자원 탐색을 마치고 방에 돌아온 에이미.

늦은 밤이니 좌우죄는 이미 잠들어 있을 거임.


조용한 문앞에서 생각함.

슬슬 방도 바꿔야겠다고.

좌우좌랑 같이 자는 것도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요즘 자신이 일부러 거리를 둔 탓일까, 좌우좌도 조금 쭈뼛거리는 느낌임.

이만하면 좌우좌도 다른 사람이랑 같이 쓰는 걸 더 환영할 수도 있음.


'적어도 충격은 받지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는 에이미.


방에 불은 꺼져 있음.

근데 좌우좌가 침대가 아니라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음.


뭔가를 열심히 하다가 잠든 걸까.

좌우좌와 거리를 두기로 했지만, 이미 자고 있으니까.

그리고 저렇게 자면 내일 허리가 아플 테니까.


그런 생각에 에이미는 좌우좌를 안아들고 침대에 눕혀줌.

좌우좌가 잠꼬대를 함.


"우우으... 받아라... 멸망의 사안...."


꿈에서도 찐조놀이인 걸까.

피식 웃고 마는 에이미.


그런데 뭘 하고 있었길래 책상에서 그대로 잠든 걸까.

에이미는 작은 호기심에 슬쩍 책상을 살펴봄.


그리고 그 위에서 좌우좌가 그리다 잠든 그림을 발견함.


에이미와 사령관.

그 사이에서 손을 잡고 있는 좌우좌.

환하게 웃고 있는 세 사람.

마치 행복한 가족처럼.


예상치 못한 그림에 몸이 굳어버리고 만 에이미.


그때 뒤에서 좌우좌의 잠꼬대가 이어서 들려옴.


"철추웅 따위... 짐의 사안 앞에서는 무기력하노라아... 그니까아... 에이미 가지 마... 내가 다 쫓아냈어...."


에이미의 눈에서 한 방울 또르르 눈물이 흐름.


지난 좌우좌의 과거 얘기가 기억남.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등대에서 기억도 안 날 만큼의 밤을 홀로 보냈다고.

매일밤 정말 외롭고 힘들었다고.

그치만 이제는 괜찮다고.

왜냐하면 짐을 보좌할 권속과 에이미가 있으니까.


에이미는 잠꼬대하는 좌우좌의 손을 잡아줌.

꼭 안아줌.

좌우좌가 기다렸다는 듯 품에 안김.

엄마를 기다리다 지쳐 잠든 딸처럼.


에이미는 후회가 밀려옴.

이 상처 많은 아이한테 자신이 대체 무슨 짓을 하려한 건지.

스파이 모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같잖은 이유로 자신을 이렇게 믿고 의지하는 어린아이에게 또 상처를 주려하다니.


"응, 괜찮아. 어디 안 가. 여기 있어. 여기 있을게. 미안해...."


에이미는 좌우좌를 토닥이며 속삭임.


곧 좌우좌는 다시 깊은 잠에 빠지고, 에이미는 다시 좌우좌의 그림을 살펴봄.


너무나 행복해보이는 세 명.


스파이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임.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딸.

전부 가져서는 안 되는 것들임.


그러나 에이미는 그 그림 속, 좌우좌가 그린 자신의 모습이 정말 행복해보인다는 생각을 함.


뭇 남성들을 단번에 홀릴 수 있게끔 만들어진 우아하고 뇌쇄적인 미소보다

어린아이가 크레파스로 어설프게 그려놓은 저 초승달 같은 미소가 더 행복하게 느껴짐.


그리고 주제넘게도.

스파이에게는 분에 넘치는 소망임에도.

진심으로 저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망하게 됨.


'사랑하는 자기... 사랑하는 딸.... 내게도 그런 날이....'


에이미는 눈물을 닦고 좌우좌와 같이 누움.

곤히 잠든 그녀의 얼굴을 쓸어주며 생각함.


새로운 시대.

새로운 조직.

새로운 삶.

그러니 한낱 스파이도 새로운 임무를 꿈꿔도 되지 않을까.


어쩌면 스파이에게는 가장 어려운 임무일 수도 있음.


Misson 001.가족 만들기

 - 진심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만들 것. 기한 없음.


그렇게 임무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는 듯도 함.

익숙한 체계라서 그런 걸까.


그래도 이제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을 거임.

예를 들면,


"잘자라, 우리 아가...."


아무도 듣지 않는데 하는 자장가 같은 것들.


에이미는 그날 밤, 좋은 꿈을 꿈.

사령관과 좌우좌와 함께 셋이.......


사실 기억은 잘 나지 않음.

이상하게 일찍 일어난 좌우좌가 시끄럽게 굴어서 중간에 깬 탓인지.

그래도 괜찮음.


셋이 무언가를 했고, 행복하게 웃었다는 느낌만은 분명하니까.


좌우좌가 어제 그 그림을 들고 에이미 앞으로 다가옴.

보여주려고 들고 왔으면서도 조금 쭈뼛거리고 있음.


"저기, 에이미, 이거...."


에이미는 그런 좌우좌의 머리를 쓸어주며 웃음.


"어머, 엄청 잘 그렸네요? 우리 자기랑 나랑 LRL?"


어젯밤 그렇게 뚫어져라 봤으면서도 처음 본 듯이.


그제야 웃는 좌우좌.

신나서 재잘재잘 에이미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쏟아냄.


그러다 곧 에이미가 나갈 시간이 됨.

그러자 다시 조금 쭈뼛거리는 좌우좌.


"에이미, 저기, 혹시 오늘도 늦게...."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아는 에이미는 그녀를 안아줌.


"오늘은 빨리 올게요. 아니, 오늘은 아무 데도 안 갈게요. 같이 만화 볼까요, 용살자님?"


좌우좌의 얼굴에 꽃이 핌.

정말? 진짜지? 하고 웃으며 뛸 듯이 기뻐함.

에이미에게 폴짝 뛰어 매달림.


에이미는 사령관에게 얘기만 하고 오겠다고 그녀를 잠깐 떼어놓는데,

그때 좌우좌가 말함.


"아, 맞다. 권속하니까 생각난 건데 저번에 둘이 방에서 뭐한 거야? 알몸 레슬링?"


방에서 나가다가 흠칫 몸이 굳어버린 에이미.

아차 싶음.


언제 들킨 거지.

안 들키게 한다고 한 건데.

한창 마음이 심란할 때라 방비가 미숙했나.


그래도 곧 스파이다운 능숙한 표정 연기를 하며

능청스럽게 말함.


"어머, 들켜버렸네요. 역시 용살자의 사안을 피할 수는 없네요. 그래도 쉿, 아직은 비밀이에요. 용살자 못지 않게 스파이도 비밀이 중요한 거 알죠? 특급 임무에 관한 거거든요."

"흠흠! 훗훗훗, 역시 그런 거였군! 알겠노라! 걱정말거라! 짐이 그 비밀을 지켜주겠노라!"


금세 또 좋아하는 좌우좌.

단순해서 다행임.


잠시 후.

조금 달아오른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사령관을 만나러 간 에이미.


에이미는 사령관을 만나서 보고를 하다 슬그머니 손을 잡음.

무척 따뜻한 손임.


"에, 에이미?"


그리고는 당황하는 사령관에게 우리 자기 웃는 얼굴이 보고 싶다며 웃는 얼굴을 보여달라고 함.


"갑자기...?"


뜬금없는 요구에 더 당혹스럽지만 그래도 사령관은 따라줌.

에이미가 쓸데없는 부탁을 하는 타입은 아니니까.


그래도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웃는 거라 조금 어색한 웃음이 지어짐.


"이렇게...?"


에이미는 그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옴.

꾸며낸 웃음, 정교하게 설계된 뇌쇄적인 웃음이 아닌 정말 웃음이 나와서 웃는 웃음.


남자와 손을 맞잡고 그런 웃음을 짓다니.

익숙한 일은 아니지만 결코 나쁘지는 않음.


아니, 더없이 행복함.


"자기, 어떡하면 좋죠? 나 이런 건 처음인데. 정말 좋아져버렸어요."


사령관도 좌우좌도 아이들을 돌보는 것도.

그 무엇에도 정을 주어서는 안 되는 스파이의 새로운 삶에는 좋아하는 것들이 너무 많음.


벽 한가운데 떡하니 붙여놓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보이는 그림도 역시 그 중 하나.


"자기,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정말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