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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전 이야기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제가 만들어졌을 때의 오르카 호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 정도 밖에는 안 납니다.”

 

“그럼 거의 기억 못 한다고 봐야겠네. 옛날에 오르카 상황이 좋았던 때가 언제 있었다고 그래?

나라고 모르는 거 아니잖아?”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지금 하는 얘기는 그 악마가 발견되기도 전의 이야기니까요.”

 

“... 생각보다 되게 먼 과거구나.”

 

“그래서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기억이 잘 안 난다고.”

 

 

 

발키리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래서 그냥 개인적인 부탁인데, 한 번 명령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명령?”

 

“네. 명령을 받으면 조금은 기억이 더 잘 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 그건 또 무슨 이상한 이유야?”

 

“정말 필요해서 그런 겁니다. 제 얘기를 듣고 싶으시다면 명령해주십시오.”

 

 

 

조금 이상한 요청에 어깨가 으쓱거려지긴 하지만, 뭐 어쩌겠나.

해달라는데 해줘야지.

 

 

 

“필요하다면 뭐...

... 그래. 네가 아는 건 전부 말해. 명령이야.

 

 

 

그제야 발키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떨리는 듯했다.

 

 

 

“... 뭐, 명령까지 거창하게 받았습니다만 그 때 이야기는 별 달리 해드릴 것이 없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자원 탐사에 나가고, 들어와서는 오르카 호를 수복하고,

자원을 찾고, 인간을 찾고, 검수 관리 하고, 매일 같이 똑같은 루틴의 반복이었죠.”

 

“그러고 보니 그 때 일은 나도 잘 모르고 있네. 보고서에도 기록되지 않았던 것 같고.”

 

“애초에 기록할 만한 일이 있어야 기록하죠. 늘 똑같은 날뿐이었는데 뭐를 보고서로 남기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언제 인간이 발견될 지도 모르는데 그런 걸 쓰고 있을 때가 어디 있겠어.”

 

“그렇죠. 여유가 없었으니까 기록은 뒷전이었던 겁니다. 

... 물론 나중엔 그랬던 걸 후회하긴 했지만.”

 

 

 

발키리가 고개를 돌리며 크흥, 하고 코를 풀었다. 먹먹한 눈빛은 망연히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 그 놈 때문이구나?”

 

“... 예. 평범한 하루가 그렇게 소중한 줄 알았더라면 뭐라도 기록해놨었겠죠.

단 하루 만에 저희가 누려왔던 모든 것이 송두리째 깨져버렸으니까요.”

 

“그 놈은 첫만남부터 지랄이었어?”

 

“첫 날, 사령관에게 친근하게 굴었다는 이유로 죽은 사망자가 34명이라고 하면 감이 오시겠습니까?”

 

“어우...”

 

 

 

역시, 이 창의적인 새끼는 단 한 번도 날 실망시킨 적이 없다.

제발 한 번만이라도 실망을 시켜줬으면 좋을 텐데. 개새끼.

 

 

 

“뭐, 친근하게 굴 만한 대원들이라고 하면 대충 감 오시지 않습니까? 하치코 양 같은 분들.

그런 대원들은 첫 날에 싹 다 죽었다고 보면 됩니다.

제가 그 때 살아남은 것도 이 퉁명스런 성격 때문이었죠.”

 

“... 그래서 나한테도 그렇게 퉁명스럽게 군 거야?”

 

“대충... 반쯤은? 그래도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오르카에 있었을 때도 각하가 좋은 분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요.”

 

 

 

발키리가 하나 남은 발을 꼼지락거리며 나에게 조금 다가왔다.

 

 

 

“그럼 언질이라도 해주지 그랬어.”

 

“제게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여유... 여유...

으휴, 그 놈의 여유가 뭐라고.

그래서 그 다음 이야기는 뭐야? 그 놈 밑에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받았을 게 뻔한데, 그런 얘기를 하려고?”

 

“싫으십니까?”

 

“아니. 그런 얘기를 할 거라면 나도 마음의 준비 좀 하게.

전에 앨리스 얘기를 들었다가 토하고 난리도 아니었거든.”

 

“결국 들으셨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무슨. 그런 칭찬은 내 쪽에서 사양이야.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려고? 창의적인 고문이 주는 고통? 아니면 명령 받아 자매들을 학살한 죄책감?”

 

 

 

더치걸 얘기를 하려나? 앨리스보다 더한 내용이면 어쩌지?

 

리제 정도? 안 그래도 환자 몸인데 그런 얘기까지 들으면 토하는 걸 멈추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발키리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 푸흡.”

 

“웃어? 나는 누구는 지금 걱정돼서 속이 막 벌렁벌렁 거리는대?”

 

“마음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냥 제가 아는 각하다워서 그랬던 겁니다.

그리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얘기는 안 할 테니까요.”

 

“안 한다고?”

 

“네. 다 아시는 얘기, 반복해서 할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제가 뭔 짓을 당했는진 보고서에 다 적혀 있지 않았습니까?

자원 탐사 도중에 갈비뼈 12개가 부러지고, 명령을 받아 어린 아이들 수십 명을 학살하고, 

뭐... 그런 것들 말입니다.”

 

“... 되게 덤덤하게 말하네.”

 

“덤덤해질 만도 하죠. 게다가 그런 게 덤덤해질 만큼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얘기는 그겁니다. 그리고 그 얘기에서 사령관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의외의 말에 나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 정수리 부근쯤에 물음표 표시가 두어 개 정도 떠있었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발키리가 말한 것들은 하나 같이 끔찍한 트라우마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들이다.

 

LRL이나 코코 같은 애들을 하나하나 손수 밧줄에 매달아 죽였다고 생각해봐라.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잘 게 분명하다.

 

부상은 또 어떻고? 망치에 맞아 죽어본 입장에서 갈비뼈 12개가 부러진 일은 다신 상상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다.

 

그런데 그런 걸 다 재치고 다른 얘기를 한다고? 이젠 걱정보다 호기심이 앞설 지경이다.

 

 

 

“그래도... 나였다면 그 새끼 욕부터 했을 것 같은데.

... 혹시 그 놈이 뭐 돌봐주거나 하고 그랬어? 그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으려면 그런 도움이 필요하긴 했을 것 같은데...”

 

“각하라지만 그런 말씀은 또 새롭게 역겹군요.

돌봐주긴 누가 누굴 돌봐줬다는 겁니까? 설마 그 악마가 저를?

제가 임무에 나갔다가 죽을 고비를 넘겼던 게 몇 번인지 굳이 또 말씀 드려야겠습니까?”

 

“... 미안해.”

 

 

 

발키리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에게 말했다.

 

 

 

“... 그래도 뭐, 돌봐줬다는 게 틀렸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 동안 자원 탐사를 전담했던 덕분에 제가 다른 대원들보다 찾아오는 자원의 양이 몇 배는 많았으니까요.

그 인간 눈에는 제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보였겠죠.”

 

“황금알이라... 하긴, 그 때라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시절이었을 테니까...”

 

 

 

나도 애들이랑 같이 굶고 추운 데에서 몸 부대끼며 자본 입장으로, 자원을 찾아오는 게 얼마나 큰 능력인지 알고 있다.

 

그러니 발키리 같은 아이는 예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겠지. 굶주릴 수록 눈 앞에 있는 자원의 양에 따라 하루 기분이 달라지는 법이니까.

 

 

 

“덕분에 저는 사령관의 부관으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큰 의미가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만, 그래도 몇 가지 편의는 볼 수 있었죠.”

 

“편의? 무슨 편의?”

 

“별 건 아닙니다. 차라리 있느니만 못하는 것들뿐이었으니까요.

이를 테면... ... 아, 그게 있겠군요.”

 

 

 

발키리가 자기 귀를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가 각하께 사상자 보고서를 보여드렸던 그 때 일, 기억하십니까?

그 때 제가 경호대장의 감시망을 뚫고 각하께 바로 메시지를 보냈었었죠.”

 

“그랬지...?”

 

 

 

발키리가 아직 오르카에 있을 때, 갑작스럽게 나와 만나자 연락하고 사상자 보고서를 보여줬던 적이 있었다.

 

그 때 리리스가 수사를 하면서 내게 연결된 통신망은 전부 확인했었는데 발키리가 범인이란 건 발견하지 못했다. 발키리가 내게 메시지를 보냈던 건 사령관 전용 회선이었으니까.

 

 

 

“그 전용 회선의 암호 코드. 사령관의 부관으로 있으면서 얻은 것들 중 하나입니다..

저를 감옥에 감금하고 심문하시며 여쭤보셨죠? 전용 회선을 어떻게 해킹했냐고.”

 

“... 해킹한 게 아니라 이미 암호 코드를 가지고 있던 거였구나. 그 새끼 부관으로 있었으니까.”

 

“각하께선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셨으니 암호를 바꾸지도 않으셨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죠. 그걸 좀 착한 일에 썼다면 좋았을 텐데.”

 

 

 

발키리가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그 위에 새겨진 균열들을 셈하듯이.

 

 

 

“저는 그 사람의 부관으로 살며 여러 악행을 보았습니다.

더치걸, 앨리스, 시저스 리제, 그녀들의 일을 가장 옆에서 보았던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 그랬구나.”

 

“그래서 압니다. 그 자의 악행은 단순하게 일장일단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악한 일이죠. 하지만 누군가를 살리는 것도 악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아십니까?

하루는 사령관이 LRL 두 명을 제 앞에 데리고 오더군요. 둘 중 하나를 죽여야 하는데 저보고 고르라면서.

한 명은 온 몸이 너덜너덜해진 LRL 양이었고, 다른 한 명은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깔끔한 옷을 입고 있던 LRL 양이었습니다.”

 

“... ...”

 

 

 

발키리가 어색하게 침을 삼키며 말을 이어갔다.

 

 

 

“... 고르지 않으면 둘 다 죽여버리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결국 골랐습니다. 제 기준으로 왼편에 있는 LRL 양이 죽기 일보 직전이었기에 그 아이를 죽이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 ... 나름대로 이성적으로 판단하려 했습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 이해해...”

 

“... 그 인간은 이상하게도 별 다른 고문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알아서 죽이게 내버려두었죠.

그래서 권총으로 빠르게 보내주었습니다. 더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데 살아남은 아이의 반응이 이상했습니다.

눈동자가 반쯤 풀려서 실금을 했는데, 몸이 축 늘어져서 그 인간이 부축해줘야 겨우 설 수 있었죠.

알고 보니 이곳에 오기 전에 두 아이에게 말해놓았던 겁니다.

여기서 죽지 않는 애가 오늘밤 밤상대를 하게 될 거라고.”

 

“다음 날 아침, 저는 사지가 잘린 채 성기가 짓이겨진 어린 아이의 시체를 치워야 했습니다.”

 

“... ...”

 

 

 

발키리의 입에선 과거의 악몽들이 밀물처럼 서서히 밀려 나왔다.

 

시력을 잃은 눈은 담담하게 밀물을 받아내었다. 눈썹의 움찔거림조차 그녀의 눈에선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것일까? 아니,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일을 셀 수도 없이 겪어 봤으니까.

 

이 이야기는 그녀가 겪어야 했던 것들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그랬기에 발키리는 말을 끝낼 때까지 덤덤했다.

 

그녀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더 말해주었고, 나는 가만히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 해서,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생각나는 것들의 반의 반도 다 하지 못했는데, 너무 오래하는 것 같아 걱정이군요.”

 

“... ... 괜찮니, 발키리...?”

 

“고작 말하는 것일뿐인데 문제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런 게 힘들었다면 진작에 죽었을 겁니다.”

 

“... ...”

 

“제가 마리 대장보다 더 많은 죽음을 보았다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용 참모총장보다 더 많은 전장에서 싸웠다고 할 수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끔찍한 광경들을 보았다고 자부할 수는 있습니다.

저는 그 인간의 부관이었으니까.”

 

 

 

부관.

 

오르카 호의 사령관으로 살다 보면 부관이란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 당연히 그 놈에게도 부관이란 게 있었을 텐데, 왜 그걸 생각하지 못 했을까?

 

그 놈의 부관으로 살면 당연히 그 누구보다 많은 악행을 보았을 텐데, 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을까?

 

어쩌면 발키리가 삐뚤어진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을 수 있겠다.

 

 

 

“... 수고했어. 발키리.

그 놈 부관으로 살았으면 당연히 내가 상상도 못할 일들을 겪었겠지.”

 

 

 

그러니 이제 한 번 생각해보자. 그 새끼의 부관으로 살면서 겪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이 뭐가 있었을까?

 

어린 애들을 학살한 거? 아니면 자기 자매들을 암살한 거?

 

... 생각하면 할 수록 내 빈약한 상상력에 한탄이 나온다.

 

 

 

“... 각하. 굳이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티나...?”

 

“네. 엄청 납니다.”

 

 

 

발키리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제가 겪은 일은 각하께서 짊어질 필요 없는 것들입니다.

피가 흘러 강이 되고, 산처럼 쌓인 살점에 진물이 흐르는 광경들.

모두 제 눈으로 담고 봉하면 족한 것들뿐입니다. 그런 일차원적인 고통은 제가 감당할 수 있습니다.”

 

“... 일차원적 고통?”

 

“... ...”

 

 

 

그녀의 입은 전과 달리 조금 머뭇거렸다. 

 

숨을 깊게 들이 마신 뒤, 발키리가 자신의 입을 떼었다.

 

 

 

“각하.”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얘기와 함께.

 

 

 

“두 번째 인간에 대해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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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 다 써놓긴 했는데 170화가 169화보다 조회수만 많고 추천수는 적어서 삐졌다고 하네요... 수구...

근데 본인은 개추 뽕맛 중독자라 추천 댓글 많이 받으면 바로 다음화 올릴 거임 수구...


근데 왜 진짜 왜 그렇지?170화가 재미가 없었나?

혹시 누군가 다중이로 계정 돌려가면서 추천을 해줬던 건가? 그런 사람이 아주 만약에 있었다면 매우 고마움


그리고 발키리 썰은 매운 맛 별로 없을 예정

라붕이랑 처음 만났을 때 지 혼자 삐뚤어져 있었던 이유를 알려줄 거라서 매운 맛은 따로 없을 거심

딴 애들은 잘만 기다렸는데 자기 혼자 사상자 보고서 보여주고 반군 데리고 오고 했던 이유 말이야




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