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리콘, 브라우니와 함께 다닌지도 벌써 며칠이 흘렀다.

그 동안 거처를 중심으로 이곳저곳을 뒤지며 물자를 확보해왔으나 슬슬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다.

도중에 브라우니가 주워 온 단말기에서 얻어낸 정보를 토대로 우리는 해안가에 위치한 군사시설로 이동하였다.

단말기에 적힌 내용이 아직 유효하다면 우리는 생존에 필요한 물자도, 방어에 유효한 방벽도 얻게 된다.

거기다 최후의 도시도 시작은 작은 마을이었으니, 일이 잘 풀린다면 이 시설을 발판으로 도시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방벽이 적 뿐만 아니라 우리가 확보하려는 시도도 막고 있단 것이다.


"이거... 안 되겠는데요. 게이트 단말기에 전원 공급이 되고 있질 않아요. 이래선 접근 시도도 무리에요. 이 정도 시설이면 안쪽에 발전기가 있을텐데... "

"레프리콘, 브라우니. 나랑 고스트 둘이서 둘러보고 올게. 잠깐만 기다려 줘."

"알겠습니다. 현 위치에서 대기합니다."


사출부양을 이용해 훌쩍 방벽을 넘자 브라우니가 또 땡그래져서 쳐다본다.

그 눈동자 속에서 돌아왔을 때 어떻게 했냐며 날 붙잡고 흔드는 모습이 보인다.


"어디보자... 아, 여깄네요. 제 추측이 맞았어요! 이 시설은 내부에 있는 핵발전기로 시설에 동력을 공급해요.

꽤 구식이긴 하지만... 한 번 가동해볼게요."


고스트가 비상전원으로 아직까지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패널을 스캔한다.

삐빅거리는 소리와 함께 일부 패널이 응답하는 거 같다.

잠시 뒤

강한 파열음이 고스트와 나를 덮쳤다.


"워우 놀래라, 뭐야!?"

"이런, 너무 오랫동안 중지된 상태에서 급하게 가동하느라 결함이 생겼나봐요. 발전기가 폭발했어요!"


("수호자님! 안쪽에서 큰 폭발음이 들렸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여긴 괜찮아, 그 쪽은?"

("여ㄱ")

("철충들임다! 놈들이 소리를 듣고 모여들고 있슴다!")


일이 꼬였다. 아주 심하게.


"수호자! 시설 내부는 안전한 거 같으니까 가서 저 분들을 도와줘요!

전 여기서 게이트를 최대한 빨리 열어볼게요!

그리고 수호자? 이 세계에서도 부활시켜드릴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아요.

그러니 아주, 아주 조심하셔야 돼요. 알았죠? 이제 가요! 어서요!"


*


유일한 인간인...아니, 이었던 오르카의 사령관은 머리가 아프다.

며칠 전. 탈론 페더가 정찰 도중 두 번째 인간을 발견했다고 영상을 보내왔다.

항상 육중한 갑옷에 헬멧을 착용 중이여서 얼굴은 못 봤지만, 인간의 뇌파라 했으니 맞겠지.

생존한 인간이라는 사실에 곧바로 데려오고자 하였으나, 마리와 생존개체들을 통해 구인류가 어떤 이들인지를 들었기에 보류하고, 어떤 인물인지 판단을 위해 지속적으로 관찰해왔다.

그러던 중 오늘, 관찰을 부탁한 탈론 페더에게서 많은 수의 철충이 두 번째 인간에게 접근하고 있다는 긴급 보고가 들어왔다.

레프리콘 하나, 브라우니 하나로 막기는 누가봐도 역부족이었다.

보호를 위해 급하게 스쿼드를 준비시키고 출격 허가를 내리려는 찰나, 다시 보고가 들어온다.

두 번째 인간이 전부 때려잡았다는 보고.

때려잡았다는 부분에 강조가 되어있었다.

지금 오르카 사령관을 괴롭히는 두통의 원인이다.

이게 말이 되나?

탈론 페더를 신뢰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같이 올라온 영상을 켰다.

철충의 군세가 몰려온다.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은 쉼없이 총을 쏘며 저지하지만 그 수가 너무 많다.

점점 좁혀지는 거리.

브라우니의 견제를 피해 측면을 파고 든 칙 엠페러가 레프리콘을 향해 기관포를 발포한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한 발만으로도 짓이겨진 고깃덩이가 될 것이고, 군용 바이오로이드라도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

발포화염과 동시에 영상의 사각에서 보랏빛의 방패가 날아와 포탄들을 틩겨내고, 그 충격으로 비틀어진 방패 궤도는 계산된 것처럼 칙 엠페러에게 박혀 폭발한다.

이윽고 방패가 날아온 방향에서 두 번째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측면이 노출된 레프리콘을 들쳐업고 브라우니를 향해 달려가 보라색 막을 펼친다.

모두 막 안에 있음을 확인한 그는 레프리콘을 내려놓고 어디서 다시 꺼냈는지 모를 보랏빛 방패를 든 채 밖으로 걸어나간다.

쏟아지는 총탄을 방패로 받아내며 밀어붙이고, 박치기를 가해 넘어트리면, 손이 빈 주먹으로 몸체를 꿰뚫는다.

방패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철충이 쓰러진다.

사령관은 급하게 회의를 가졌다.


*


마지막 철충에 주먹을 꽂아넣어 벌레를 으스러뜨렸다.

공허 빛을 거두고 일어서려는 찰나


"으헉!?"

"뭠까!? 어떻게 하신검까!? 엑소라는 분들은 다 이렇게 강하신검가!?"

"브라우니!"


흥분한 채 뒤에서 날 받아버린 브라우니에게 휘둘러지고 있는 사이, 방벽을 넘어 고스트가 날아왔다.


"다들 괜찮나요!?"

"말짱함다! 여기 수호자님이 지켜주셨슴다! 진짜 대단하셨지말임다! 막 슝! 하고 펑! 하는데!"

"자자 브라우니, 진정해요. 고스트님? 저희는 괜찮습니다."

"너무 늦어서 미안해요. 최대한 시도해봤는데, 전력을 복구할 수 없었어요.

주 발전기가 있던 지하시설이 통째로 날아갔어요. 방사성 물질이 시설 밖으로 유출되는 건 어떻게든 막았는데...

시설 내부는 방사성 물질로 뒤덮였어요. 시설을 이용하는 건 무리에요."


결국 우리는 시설을 포기하고 그나마 멀쩡해보이는 건물 하나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리고 난 지금 벽에 기대 앉아서 내 흉내를 내고 있는 브라우니를 보며 다음 계획을 생각 중이다.

'예전에 장벽 세울 때 처럼 벽돌이나 하나하나 세워볼까? 나 혼자니까 얼마나 걸리려나?'같이 실 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동작감지기가 빠르게 이 쪽으로 접근 중인 물체를 탐지했다.

붉은전쟁 개전 당시 난 탑에 있었다. 그 때도 이렇게 동작감지기가 갑자기 작동하고 직후 탑이 미사일에 피격되었었다.

포탄? 미사일? 무엇이 되었든 이미 피하기엔 늦었다.

방패를 다시 쓸 만큼 충분히 빛이 모이지도 않았다.

공허 방패보단 모자라지만 몇 번이고 목숨을 구해 준 빛의 방벽.

빠르게 둘에게 달려가 방벽을 세우고 방벽을 등진 채 둘을 끌어안았다.

방벽이 무너지고 내가 쓰러지더라도, 내 방어구가 이들까진 지켜줄 수 있길 바라면서.


"어머? 이건 꽤... 으흠. 흐흐흐!"


찰칵 하는 셔터음. 여기 미사일은 사진도 찍나?

그렇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자 등에 날개를 단 여성이 만족한 표정으로 서있다.


"아, 이게 아니지! 크흠! 인간 님? 반갑습니다. 저는 저항군 소속의 탈론 페더입니다.먼저 갑작스런 방문에 대해 사과드려요.

사령관님이 만나뵙고 싶다고 하셔서 모셔가고자 합니다."

"저항군? 사령관이요? 그 얘기,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고스트의 질문에 자신을 탈론 페더라 소개한 여성은 저항군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생존한 인간 한 명을 구심점으로 마지막 저항군이 철충에 대항해오고 있었고, 다시 인류를 재건할 목표로 활동 중이라고.

그러던 중 우리를 발견했고, 내가 어떤 인물인지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계획은 이전처럼 도시를 세워 지켜나갈 생각이었지만, 그 첫 발판인 시설도 못 쓰게 됐고 갈 곳도 없겠다, 나쁜 선택지는 아닌 것 같아서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탈론 페더의 안내를 받아 폐허가 된 항구에 도착하자, 수면이 일렁거리더니 함선의 윗부분이 서서히 떠올랐다.

수면 위 만으로도 저 규모라면 움직이는 도시나 다름없네.

멋있다며 흥분한 브라우니의 큰 소리를 듣고 있으니, 함선으로부터 나온 작은 함정의 도크가 열리고 한 명의 여성이 걸어나왔다.


"인간 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외람되오나, 가지고 계신 무기는 소지하고 들어가실 수 없사옵니다. 다시 나오실 때 돌려드리겠사옵니다."


자신을 금란이라 소개한 여성을 따라온 로봇프레임들에게 내 파트너를 건네자 레프리콘과 브라우니도 따라서 자신의 무기를 건넸고, 더 무장이 없음을 확인한 로봇프레임들이 옆으로 비켜서서 길을 열어주었다.

앞장 선 경호실장을 따라 더 깊숙히 들어가니 분위기가 당장이라도 네 팔 달린 거구가 나와 빛 속에서 널 반긴다며 벨라스크라고 인사할 것 같다.

그렇게 옛친구를 생각하고 얼마 가지 않아 회의실이라 적힌 문 앞에 도착했다.

삑 소리를 내며 좌우로 열린 문 너머에 한 명의 남성과 네 명의 여성들이 탁상을 둘러싸 앉아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르카 호의 사령관입니다."


사령관이라는 자가 일어나 다가와서 손을 내민다.

인사할 때 얼굴을 안 보이는 건 여기서도 예의가 아니겠지.

나는 헬멧을 벗고 악수를 위해 손을 내밀었다.


*


인간의 뇌파가 나오는 헬멧 아래에서 AGS가 나온다.

짧은 순간, 지휘관들의 머릿속엔 하나의 생각이 스친다.

인간의 뇌파, 기계.

그 두 가지를 조합했을 때 떠오르는 하나의 단어.

'철충'


*


"각하! 위험합니다!"

"주인님! 숙이세요!"

"이 괴물! 더러운 술수를!"


어 뭐지?

오답이었나?

둥둥 떠다니는 공들을 내게 겨누는 금발의 장군.

파란 방어막에 감싸지는 사령관과 갑작스레 내게 총을 겨누는 메이드.

반사적으로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을 끌어당겨 내 뒤로 숨긴다.

고스트? 좀 도와줄래?


"저기,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요. 저흰..."

"닥쳐! 무슨 꿍꿍이지?"


고스트의 설득은 고함에 끊겨버렸다.

분위기 살벌하네.

미스락스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나는 두 손을 들어 싸울 의사가 없음을 보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환영파티가 아닌 건 확실히 알겠군요.

알겠습니다. 전 바로 떠나겠습니다.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 철충이 부탁을?"


은색 눈으로 매섭게 노려보며 비아냥거린다.

아니 나 철충 아니래도.

쏟아지는 차가운 시선들을 버티며 말을 이었다.


"여기 제 뒤에 둘, 이 둘은 저와 아무 연관도 없습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같이 다녔던 것 뿐입니다.

들어보니 저 밖에서 오래 고생해왔더군요.

이 둘만이라도 받아들여주셨으면 합니다."

"...네!? 안 돼요!"

"어떻게 수호자님만 다시 내보냄까!"

"각하! 어서 공격 명령을!"

"안 됨다! 아무리 대장님이셔도 절대 안 되지 말임다!"


뒤로는 안 된다며 앞으로 나서려는 둘, 앞으로는 무장을 겨눈 넷.

아수라장이네.

그 사이 사령관이 방어막 옆으로 걸어나온다.


"얘들아? 일단 진정하자"

"주인님! 나오시면 위험해요!"

"괜찮다니까. 일단 진정해. 이야기를 들어보자."

"철충을 어떻게 믿어!"

"저렇게 바이오로이드를 지키려 하는 철충 본 적 있어?"

"각하! 속임수인게 분명합니다!"

"우리 두 번이나 봤잖아. 자기 몸으로 감싸서 두 명을 지키려 했어.

난 저 분이 철충이라 하더라도 이야기 해 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대가 그리 생각한다면, 따르지."

"그래, 고마워. 우선 자리에 앉을까?"


사령관의 말에 지휘관들이 겨우 자리에 앉는다.

나도 앉아도 되지?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에게 이제 괜찮다며 진정시키고 옆자리에 앉혔다.

그 사이 말릴 틈도 없이 고스트가 빠르게 탁상 가운데로 날아갔다.


"아, 이제 말 해도 되는 거죠? 그렇죠?

첫째, 우리 수호자는 저 철충이란 것들과는 전혀 달라요.

둘째, 수호자는 원래 인간이었어요.

셋째, 그렇게 무례하게 대하곤, 사과도 없나요?"


고스트가 저렇게 말을 쏟아 내는 건 화났다는 건데.


"저희가 너무 과민반응했습니다. 무례하게 군 점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사령관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화가 조금 누그러졌는지 한껏 구겨져있던 의체가 조금 펴졌다.

그래 넌 의체 펴고 있을 때가 제일 예뻐.


"그리고 그 건에 대해서 질문이 있습니다. 인간이셨다고 했는데, 그 부분을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저는 엑소입니다. 기계에 인간의 정신을 담은 종족이죠. 인류의 황금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잠깐."


방금 전 나를 노려본 여성이 손을 들어 내 말을 막았다.

명패에는... 레오나 지휘관이라고 적혀있네.


"내가 멸망 전 생산된 개체는 아니지만 기억을 이어받아서 인류의 역사는 대강 알아.

황금기는 대체 무슨 소리인지 납득이 안 가는데? 철충의 헛소리로 들리는 건 나 뿐인가?"


난 그냥 외워 둔 자기소개 멘트 한 건데.

곤란해하고 있으니 고스트가 나서주었다.


"인류의 황금기는 21세기 말부터 시작되었어요. 여행자 덕분에 인류는 태양계 너머로 진출하며 눈부신 발전을 이뤘죠.

엔그램, 전쟁지능, 나노 로봇, 그리고... 엑소. 전부 황금기 때 개발된 기술들이에요.

납득이 어려운 건 당연해요. 왜냐하면 우린 다른 세계선에서 온 것 같고, 그 사실은 저도 받아들이기 어렵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고스트는 내 책상 위 작은 펜을 간단한 흰색 엔그램으로 압축했다. 이 정도면 믿을 수 있겠냐는 듯이.

그 모습을 보고 얼굴에 위장페인트칠을 한 지휘관이 입을 열었다.


"흥미롭군. 더 설명해줄 수 있겠나?"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하는지 의체를 굴리며 생각하던 고스트가 말을 이어갔다.


"전 수호자를 몰랐어요.

수호자의... 첫 번째 삶에서는요.

수호자는 제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전장에서 죽었죠."

"죽었다고?"


고스트는 놀란 적발의 여성을 향해 의체를 끄덕이곤 말을 이어나갔다.


"엑소는 원래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영생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어요.

하지만 결함을 이용당하며 전쟁 도구로 변질됐죠.

수호자는 이전의 삶에서 엑소가 되어 전쟁에 선두로 섰고... 죽었어요."

"그럼 지금 저기 앉아있는 이는 누구고, 그대와는 어떻게 만난 거지?"

"뭔가 특별한 것이 우릴 만나게 했죠. 그게 바로, 여행자였어요.

여행자가 처음 나타났을 때, 우리의 세계는 영원히 달라졌어요.

그 때가 바로 황금기였죠. 수 세기동안 인류는 온 우주로 뻗어나가며 번성했어요.

바로... 그 날까진."


고스트가 의체를 빙글 돌려 나와 눈을 맞춘다.


"우리의 붕괴."

"고대의 적이 온 우주를 넘어 여행자를 쫓아왔어요. 인류는 멸망을 목도했죠.

하지만 여행자가 선택을 했어요.

여행자의 희생으로 고대의 적이 파괴되고, 고스트가 태어났어요.

그게 저에요. 수호자의 고스트죠.

수호자는 여행자의 선택을 받아 되살아난 거에요."


"되살아났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엑소여서 가능했던 겁니까?"

"제가 아는 수호자 종족은 인간, 엑소, 각성자, 그리고... 음. 배다른 형제가 있었다고 해두죠.

수호자가 되면서 되살아난 거에요. 그 조건은 저희도 명확히 밝혀낸 게 없어요."


이어지는 질문들.


"그 방패는 엑소의 무기야?"

"아뇨, 그건 빛의 힘이에요. 여행자의 선택을 받아 다룰 수 있게 된 거죠.

그 중에서 우리 수호자는 공허 빛에 능숙해요."


이후로 쏟아지는 질문에 고스트와 함께 하나하나 최대한 성실하게 답변했다.

코헤이 교단을 아느냐는 질문도 들었지만 처음 들어보는 단어다.

미래전쟁교단은 아는데.

그리고 현재 인류가 처한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넘쳐나는 적대 외계 생명체, 풍전등화의 인류, 최후의 도시.

익숙하네.

사령관은 그런 현 상황에서 강한 아군을 필요로 한다며 내게 함께 해달라는 요청을 해온다.

이전 세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수호자로서 해야 할 말을 하였다.


"인류 재건을 위해 힘 쓰고 계신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말이 맞다면, 제 방패는 여러분들의 것입니다."


*


"오오! 수호자님! 이것 좀 보십쇼! 침대임다! 엄청 푹신함다!"


콘크리트 바닥에서 팔을 베개삼아 자오던 세월에 안녕을 외치는 다람쥐가 방방 뛰고 있다.

합류 의사를 밝힌 후 방 하나를 받았는데, 확실히 이전의 생활에 비하면 감격할 만 하다.


"아주...아주 긴 하루였네요. 오늘은 다들 푹 쉬는 게 좋겠어요.

아 참, 그러고보니. 이 함선에 샤워시설도 있더군요. 작은 욕탕도 있나봐요."

"샤워시설입니까?"


샤워시설이라는 말에 레프리콘의 얼굴에서 화색이 돈다.

고스트에게 시설의 위치를 대강 듣고는 침대를 더 만끽하고 싶다는 다람쥐를 질질 끌고 함께 샤워시설로 향했다.

몇 번을 봐도 자매같다.


"그럼... 우리는 좀 쉴까?"

"그래요. 저도 지쳤어요. 내일 해야 할 일도 있구요."


헬멧을 벗고 문에서 제일 가까운 침대에 몸을 뉘었다. 꽤 푹신하고 좋네.

눈을 감고 내일 할 일을 다시 생각한다.

다른 세계의 존재라는 것을 일단은 받아들인건지 기술이나 전투 쪽으로 협조를 요청했다.

우선 내 무기에 대해, 방패에 대해 특히 궁금한 것이 많다며 닥터라는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내일 연구실로 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난 다음엔 둘러보며 이 곳 인원들과 인사라도 해봐야겠다.

아무래도 이 세계는 빛이나 어둠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눈을 감고 있으니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이거저거 생각하는 사이 다 씻고 온 모양이다.

밤에는 시끄럽게 말하면 안 된다고 브라우니를 혼내는 레프리콘의 말이 점점 멀어져간다.

오늘 밤은 푹 쉬어야지.


*


"...그러니까, 이게 현실을 속이는 거라고?"


나는 워록이 아니다.

노련한 무기 제작자도 아니다.

가련한 천재 과학자는 더더욱 아니다.

그냥 무기를 쥐어주면 그걸로 싸우는 게 다다.

무기를 건네받으며 들은 말을 반복했을 뿐이다.

그런데 여기 닥터라는 꼬마 아가씨는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


"그게 말이 돼?

현실로부터 공간을 속여서 두 발이 겹쳐 들어가 있는 거라고?

그런 게 가능했으면 순간이동도 되겠지!"


되는데?

이전 세계의 우주선은 물질 전송기가 있어 단거리라면 해치를 열 필요없이 순간이동으로 승하선이 가능했다.

벡스들은 아예 허공에 차원문을 구축해서 나타났고.

하지만 이 이야기를 입으로 꺼냈다간 더 힘들어질 거 같아 그냥 말을 삼켰다.


"하아... 그래 그렇다 쳐... 그리고 이... 방벽.

정말 빛을 고체화시켰다는 것 까진 이해하겠어 그런데...

이게 어떻게 기계 오빠랑 감각으로 이어져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작은 손가락으로 방벽을 콕콕 찌른다. 간지러.

고스트가 헬멧 너머 내 표정을 꿰뚫어본듯 의체를 빙글 돌리며 대신 답한다.


"수호자의 빛은 내면의 힘이에요. 그래서 자신의 신체처럼 반응하는 건지도 몰라요.

이 힘은 저희 세계에서도 제대로 밝혀진 게 없어요."


머리를 싸매는 닥터.


"...일단은 알겠어... 기계 오빠? 이 무기 조금 더 연구하고 돌려줘도 되지?"


더 있다간 날 해부할 거 같다.

고개를 끄덕여서 무기를 제물로 바쳐 서둘러 연구실을 나왔다.

잘 가 나의 광대탄약통 로켓아...

로켓에 대한 미련을 끝내 못 버린 채 복도를 걷고 있으니 다리에 두 물체가 부딪히는 감각이 느껴져왔다.

허리 위로 초코바와 참치캔이 폭죽처럼 흩뿌려지고 그 너머로 조그마한 아이가 달려오는 게 보인다.

권총을 들고.

뭐야. 무서워.


"궈,궈, 권속이여! 어서 나를 지키거라!"

"사령관 살려줘!"

"LRL! 알비스 언니! 대체 몇 번 째에요, 이게!"


쪼르르 내 뒤로 숨는 아이 둘.

어느샌가 나는 권총을 든 채 씩씩거리는 여자아이 하나와 대치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어... 그러니까... 꼬마 아가씨? 일단 총부터 내려둘까?"

"...? 누구...?"


뒤에 숨어있던 아이들이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권총을 든 아이 뒤로 쪼르르 자리를 옮긴다.

사령관이라고 착각한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숙녀분들! 만나서 반가워요."

"우와! LRL! 이거 봐! 별사탕이 날아다녀!"

"별사탕이라뇨! 저는 고스트에요!"

"저기 그래서 누구...세요?"


권총을 든 아이가 쭈뼛거리며 물어봐온다.

권총 들고 그러면 무서워 얘.


"아저씨는 수호자란다. 만나서 반가워, 꼬마 아가씨들."


수호자라는 말에 안대를 낀 꼬마가 반응한다.


"수호자!? 그럼 용이랑도 싸운 적 있어!?"


갑자기?

뭐, 용...용이라. 아함카라도 용이긴 하지.


"그럼! 소원을 들어주는 용이었는데, 사악한 용이여서 힘을 합쳐 무찔러버렸지!"

"우와!"


그렇게 얼떨결에 복도에 앉아서 아함카라 토벌의 모험담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쭈뻣거리며 경계하던 안드바리란 아이도 어느샌가 푸욱 빠져선 이야기를 들어준다.

최후의 도시에서 아이들과 놀아줄 때가 생각나네.

그 땐 내기에 진 벌칙이었긴했지만.


"복도를 막고 있으면 안 되죠, 공주님들?"

"에이미!"


LRL이 쪼르르 달려가서 품에 안긴다.


"어머? 당신이 우리 자기가 말한 두 번째 인간이군요? LRL을 돌봐줘서 고마워요. 공주님들은 이제 공부하러 갈 시간이랍니다?"

"히잉... 더 놀고 싶은데... 두 번째 권속! 다음에도 또 노는 거다! 약속이야!"

"수호자님! 나중에 뒷이야기 꼭 들려주셔야 해요?"

"다음에 만나면 알비스가 초코바 많이 줄게! 또 봐! 별사탕도 안녕!"

"고스트라니까요! 나원 참..."


그 초코바는 어디서 구할 예정이냐며 알비스의 볼을 당기는 안드바리를 말리고 아이들을 에이미에게 보냈다.

여기 오길 잘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