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벅터벅


평범한 차림새에 더벅머리를 한 남성은 조용히 들판을 걷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작은 새들의 지저귐, 그리고 도처에 깔려있는 이름 모를 들꽃들은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의 빛을 받으며 아름답게 피어나고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진짜 바깥 같네."


자신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결을 느끼며 남자는 잠시 자리에 멈춰 주변을 둘러보았다. 풀과 나무의 향을 머금은 바람과 새들을 담아내고 있는 들판은 마치 실제로 끝없는 초원 한 복판에 서 있는 듯한, 그런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저 하늘과 태양이 모두 과학기술로 만들어진 인조며, 이 들판은 결국 끝이 정해져 벽에 막힐 수 밖에 없는, 기억의 방주 속 한 공간이라는 것이 

아쉽고, 내심 씁쓸했다.


남자는 그 씁쓸함을 지우려는 듯 습관적으로 외투 주머니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각진 네모난 무엇인가 손에 잡히자 남자를 그것을 밖으로 꺼내려고

하였지만 이내 손을 멈추었다.


-불이라도 나면 큰일이지.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고 하나보다.- 라고 남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들판에서 흡연이라니. 혹여 불이라도 번지면 여기저기서 잔소리를 해 댈 것이 분명하다. 남자는 담배를 주머니 속에 구겨 넣을 기세로 강하게 찔러 넣었다. 순간적으로 혹시 안에 담배가 찌그러지면 아까워서 어떡하지? 란 생각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흔들며 담배 생각을 지웠다. 괜히 확인해본다고 다시 담배를 꺼냈다가는 흡연 욕구를 참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하기에.


"후.."


피우지도 않은 담배 연기를 내뿜듯이 길게 한숨을 뱉은 남자는 이내 입고 있던 외투를 꺼내서 들판 한 곳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 외투 위로

몸을 눕혔다.  


"...."


남자는 그대로 누운 채로 하늘을 빤히 바라보았다. 인공의 태양빛이 남자의 두 눈을 비췄고, 남자는 오기라도 부리듯 하늘을 노려보다가, 두 눈이 빛 때문에 시큰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이내 눈을 감았다.


'숨을 쉬는데? 아직 살아있는 것 같아!'

'그리폰 좀 더 정중하게 말하렴. 드디어 찾은 인간님인데..'


남자는 머나먼 옛 일처럼 느껴지는, 하지만 여전히 잊혀지지 않았던 그녀들과 첫 만남이 떠올렸다.

그의 운명이, 그녀들과의 인연이, 그리고 이 전쟁과 고통, 괴로움 그 모든 것들이 시작되었던 날.


"만약 내가 눈을 떴을 때, 그녀들이 없었으면.."


두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햇살이 부담스러운지, 남자는 한쪽 팔을 얼굴 위로 올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자 누워있던 남자를 조용히 지켜보던

연보랏빛 머리의 여성은 이내 남자의 곁에 앉아 그의 다른 한 쪽 손에 자신의 손을 겹치며 답을 했다.


"그렇다면 제가 주인님을 가장 먼저 찾아냈을 거에요. 그 누구보다 더 빨리."

"....."


남자는 자신의 곁을 지키는 여자, 블랙 리리스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예전 리리스와의 기억을 더듬을 뿐.


그녀는 철충의 습격으로 콘스탄챠 일행과 떨어지게 되었고, 그 때문에 최후의 인간과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콘스탄챠와 그리폰의 몫이 되었다.

블랙 리리스는 항상 그 것이 늘 아쉬웠다며 남자에게 종종 말하곤 했었다.


"리리스, 만약 내가 도망치고 싶다면 어떻게 할 거야? 이 모든 것으로부터 그냥 바보같이 도망치기만 하는 삶을 살고 싶다면."


철충, 펙스, 별의 아이. 최후의 인간이자 저항군의 사령관인 남자는 들판에 누워서 자신의 적을 상상했다. 어느 하나 무섭고, 두렵지 않은 상대가 없었다.


오르카호의 선원들, 새로 받아드린 난민들, 저 멀리 외지에서 명령을 받들고 있는 파견원들, 그리고 앞으로 그가 구해내고, 또한 지켜내야 할 것들.

어느 하나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그들 하나 하나가 모두 남자 의 머릿속을 가득 채워, 가끔은 숨이 막혀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젠가는 반드시 일어날, 일어날 수 밖에 없는 희생. 그의 명령 한 마디에 사라져갈 그 병사들을 생각할 때마다 남자는 온 몸이 늪에 빠진 듯이 무력해지는 기분에 휩싸였다.


"지켜드릴께요."


남자의 바보 같은 질문에 블랙 리리스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다른 답은 없었다. 그녀는 그를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했고, 그렇다면 그 뒤를 그저  지킬 뿐이다. 그 외는 전혀 상관없었다. 그렇기에 남자의 질문에도 블랙 리리스가 할 말은 딱 하나 뿐.


남자는 그녀의 대답에 입술을 깨물었다. 애초에 저것 말고는 그녀가 다른 답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정말 자신이 도망친다면 저항군의 모두가 자신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블랙 리리스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녀의 자매들도 포함되어 있겠지.

그 모든 것들로부터 블랙 리리스는 자신을 지켜줄 것이다. 왜냐면 그녀는 ...





-삐비비빅 삐비비빅


그의 생각을 멈추듯, 이 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남자는 눈을 떠 자신의 손목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 스스로가 정해 놓았던

휴식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알람소리가 시계에서 울리고 있었다. 


"일할 시간이네. 가자 리리스."

"네, 주인님."


그저 평범한 한 남자의 시간은 끝이 나고 이제 다시 저항군 사령관의 시간이었다. 사령관은 망설임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사령관의 충실한 경호원 블랙 리리스는 어느새 땅에 깔아져 있던 그의 외투를 챙겨 그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기억의 방주 정비도 끝났고, 외부 파견팀도 곧 복귀할테니.. 앞으로 꽤 바빠지게 될 거야. 팩스쪽에서 난민 이주에 대해서 대응도 곧 나오겠지."

"내 호위 문제는 믿고 맡길게, 리리스."


사령관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나가며 말했다. 블랙 리리스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지 않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사령관이 앞을 걷고 그녀가 뒤에서 그를 따르며. 언제나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네. 믿고 맡겨주세요. 주인님."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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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리스 미스 오르카 본선 진출 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