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arca.live/b/lastorigin/52006771



“...뭐?”


순간적으로 믿을 수 없는 하르페이아의 부탁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고,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반말이 나오게 되었다. 몇번 보지도 않은 인물 하나가 갑작스레 와서는, 자신의 애를 봐달라? 그것도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 옆에서? 이게 뭐하자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로 나에게 애를 돌봐달라고 하는거지? 어디 도망이라도 가는건가? 아님 뭐, 날 암살하려고 애를 우리집에다 데려다 놓는 것인가? 도통 무슨 속셈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하자는거야, 당신 미쳤어?”


“자기야 그래도… 애까지 데려가서는 그걸 하자는건… 그건 진짜 아니잖아…”


“...하아… 미친년, 무시하고 그냥 비켜주세요, 엘리베이터나 타게.”


아니, 우선 저 남자가 남편이 맞는건가? 아예 사랑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이럴거면 조금 더 심하게 대할걸 그랬다.


“애 눈앞에서 그러고 싶어, 응? 유미가 어떻게 생각하겠어?!”


“니년이든, 딸이 뭐라 생각하든, 난 상관없다고, 좀 가자니까? 한시가 급한데 뭘 애를 냅둔다만다야, 응?”


“...안돼, 아직 애가 알기에는 너무 벅찬거잖아! 제발… 내가, 내가 책임질게, 그러니까…”


“...”


“...ㄴ, 나 안가. 유미 여기에다 안맡기고 가면 나 절대로 당신 안따라갈거야.”


어이구, 이젠 내 의견은 철저히 무시되는 지경까지 왔다. 내 의사는 필요없다는건가?


“...하아… 씨발년…”


남자는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뭔가 일이 잘 안풀리고 있는 듯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랬으니까.


“...잠깐 부탁좀 합시다.”


“다 들었어요.”


“...”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치 내 대답을 기다리는듯한 눈치였다. 하르페이아는 졸고있는 어린아이의 팔을 잡고는 울먹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제발 수락해달라는 그런 눈빛, 그런 걸 바이오로이드가 하고 있다는 것에 구역질이 나오는걸 겨우 참아냈다. 나는 바이오로이드의 더스트가 섞인 혼혈인을 좋게 생각하지도, 내 집에 들이고 싶다는 생각도 없다. 저 남자의 수락만 있다면 저 두 모녀를 집어들고 13층 바닥 저 바깥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렇다고 그들을 거절하게 된다면, 저 바이오로이드는 울구불구 난리가 날거고, 저 딸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것이다. 그렇다면 새벽에 잠을 자던 사람들이 깨어날테고, 여자와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게된 그들이 경찰을 부를 거란 경우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될 것이고, 내가 들고있는 가방속의 총기와 탄약들을 들키게 될 수도 있다. 개정헌법에 의하면 불법총기소유는 무기징역부터 시작이다. 게다가 마약운반까지 들키게 된다면, 사형은 가볍게 받을 것이다. 어쩔수 없다.


“...다시 애를 데려오긴 할거죠?”


“그럴 겁니다. 자식인데.”


“...그래요… 자식이니까… 알겠어요.”


“...!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


“24시간 안으로 다시 데려가세요. 안그럼 이 아이, 걍 고아원에 보내버릴겁니다.”


“...! 애 앞에서 그런말을…”


“몇번 보지도 않았고, 새벽에 일 끝낸 사람한테 갑자기 애를 맡겨달라고 하는것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


“24시간, 그 안으로는 무조건 옵니다. 사례금은 두둑히 드리지.”


“필요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애 이름은 안유미에요, 그럼 이만...”


남자는 하르페이아가 잡고있던 아이의 팔을 낚아챘고, 곧장 나에게 넘겼다. 그에게 아버지나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나에게 애를 맡기고서 그들은 순식간에 엘리베이터에 몸을 옮기고 문을 닫았다. 다시 복도에는 아이가 졸아서 내는 옹알이소리말고는 아무런 것도 들리지 않았다.


“...하아.”


“...? 우웅… 누구…”


“몰라도돼. 그냥 집에서 엄마 올때까지 자기나 해라.”


.

.

.


집에 들어온 다음, 아이를 거실에 있는 쇼파에 다시 눕혔다. 어짜피 새벽에 잠깐 깬 아이일테니, 곧 잠들 것이 분명하다. 역시 아이는 다시 숨소리가 차분해지며 잠에 들었고, 나는 비밀 창고에 총기들과 탄약을 정리해 놓고, 아이의 옆에 앉아 고요히 그녀가 잠든 것을 꾸준히 바라보았다.


낯선 사람이 집에 들이닥친건 저 아이가 처음이였다. 그렇기에 내 비밀을 저 아이가 알아차릴수도 있고, 파해쳐낼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아이가 혐오스럽도록 싫었다. 엄마를 닮아 노란 머리를 하고있고,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바이오로이드와 인간의 합작품, 서로 섹스를 해서 낳은 저 역겨운 아이. 혼혈, 교배품, 욕망을 참지 못하고 낳아버리고, 몇년 살지도 못할 그런 피조물이 지금 내 눈앞에서 자빠져 자고 있다.


“...”


군에서 저런 아이들의 결말을 배운적이 있다. 혼혈인들의 몸속에는 바이오로이드들의 혈액인 오리진 더스트가 흐르고 있고, 유기물 덩어리들이 폭발적으로 더스트에서 만들어진다. 바이오로이드들은 티타늄, 철제골격으로 그 폭증을 버틸수 있지만, 인간의 모세혈관은 그걸 버티지 못한다고 한다. 인간의 혈관, 바이오로이드의 오리진 더스트가 합쳐진 그들은 10살이 되기전 신체 곳곳의 모세혈관이 터져 모두가 죽게 된다고 한다. 그것도 매우 고통스럽게. 의사들은 그래서 혼혈인을 출산하겠다 의사를 밝힌 부모에게 이 사실을 밝혀야 한다는 것은 전세계에서 의무화되었고, 저들도 마찬가지로 그 이야길 들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무계획적으로 욕망에 사로잡혀 섹스를 한 것이 임신으로 이어진 것이기에,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이를 낙태시킨다고 한다. 고통스럽지도 않게, 조용히. 하지만, 전체중 9할9푼9리의 연인들이 하는 결정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고, 그들 중 한명이 저 부부인듯하다.


“...무모한 새끼들.”


나는 저 아이가 혐오스러우면서도, 불쌍하다. 만약 저 남자가 인간여자와 만나 평범하게 만나, 아이를 갖게 된다면, 그 결말을 맞지 않아도 되지만, 저 좆같은 등신새끼가 바이오로이드와 만나 떡을 쳐 비참한 결말을 갖게된 아이가 태어났으니… 그리고 키와 덩치를보니, 곧 10대에 들어설 아이같은데, 곧 온몸의 혈관들이 혈압을 버티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죽게될게 뻔하지.


“...근데, 그럴거면 차라리… 내가 편안하게 보내줄까?”


…다시 창고안으로 들어섰다. 테리가 선물해준 권총을 꺼내들어보았다. 권총 한자루, 그리고 소음기. 조선족들이 가지고 있는 싸구려 총과는 다른, 부드럽고 손에 감기는 그립감.


‘...철컥!’


“지금이라면야, 고통스럽지 않게 갈 수 있겠지.”


견착도 해보고, 손에 익게 탄창빼고 격발도 몇번 한 다음, 창고에서 나와 그 아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새근새근 자고 있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평온해보였다. 지금 가면, 평온한 죽음이라 할 수 있을까?


몸속 모세혈관 하나하나가 터져나가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탄창을 집어넣고, 장전을 끝냈다.


‘철커덕!’


“...”


나는 천천히 총을 들어올렸고, 쇼파에 잠든 그녀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었다. 온 몸이 떨려왔다. 사람도, 바이오로이드들도 많이 죽여봤다. 그렇다고 어린아이는? 군에서 어린아이를 주저없이 죽이는 교육은 받지 못했다. 그리고 저 아이가 지금 죽어야 하는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단지 이후에 받을 고통을 위해 먼저 죽인다? 이게 확실히 맞는 말인가? 내 주장은 타당한 것인가? 모르겠다. 방아쇠를 어찌해야할지 모르겠-


‘벌떡!’


“...!”


순간 그 아이가 눈을 부릅 뜨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체처럼 미동없이 잠들던 아이가 자리에서 펄떡 일어난 거에 나는 깜짝 놀라 뒤로 자빠져 떨어졌고, 그 와중에 아이에게 총을 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지로 총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엉덩방아를 찌면서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퓻-!’


소음기를 껴서 덕분인지, 화약소리만 잠깐 새어나왔고, 총알은 정확히 내 허벅지에 맞아들어갔다.


“으윽!”


찌릿한 느낌이 허벅지에서 다리 전체로 퍼져나갔고, 나는 오랫만에 느끼는 총상에 눈을 질끈감고 출혈을 막기위해 다리를 꾸욱 눌러댔다. 그리고, 그 광경을 아이가 지켜보고 있었다.


“크으윽…”


“ㄴ, 누구세여?”


“몰라도 된다니까… 으윽… 그냥, 옆집 아저씨야… 아으… 존나아프네…”


“괜찮아여? 왜 누워있어여?”


“ㄱ, 그, 쇼파에 찧었어… 으윽…”


나는 곧장 다리를 절뚝거리며 화장실 안으로 최대한 빠르게 들어갔고, 문을 잠갔다. 영악한 년, 혹시 내가 자길 죽일거라 예상하고 반격한건가? 일단 침착하고, 화장실 선반에 숨겨둔 집게와 지혈제, 아 참, 수건도 꺼내들었다.


“흐으… 흐…”


수건을 펼쳐 입에 베어물었고, 총알이 박힌 허벅지에 집게를 가져다 댔다. 구멍 안으로 빠르게 집게를 집어넣고, 이리저리 후비면서 총알이 어딨는지를 찾아다녔다. 그때마다 엄청나게 짜릿한 고통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흐으응~! 흐으… 허으윽…”


마침 뭔가가 집게에 틱틱거리며 걸렸고, 나는 곧 어디에 총알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집게의 양쪽 손에 총알을 건 다음, 잽싸게 뽑아버렸다. 그때 느낀 고통은 군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였다. 뭔가… 더 날것의 고통이랄까?


“허으응ㄱ!!!!”


수건을 물며 소리를 질렀기에, 고함은 화장실 안에서만 갇혀있었다. 총알을 빼낸 다음에는 지혈제를 투약했고, 물고있던 수건을 허벅지에 돌돌 감고, 타이트하게 매듭을 지어 응급처치를 끝냈다.


“허억… 허억… 후우……”


다행히 요새는 지혈제의 성능이 좋아, 이대로 몇시간만 냅두면 새살이 돋아나 아무런 일이 없던듯이 괜찮아지니, 유일한 증거인 총알을 씻어내곤 선반 깊숙히 숨겨놓은 다음, 나는 천천히 화장실 밖으로 절뚝이며 다시 나갔다.


“...흐으…”


역시나 밖에서는 소파에 앉아 화장실을 계속 쳐다보던 소녀와 나는 다시 눈을 마주쳤고, 우리 둘은 아무말도 없이 몇초간 둘을 쳐다보았다.


“...”


“...”


“...아저씨, 괜찮아여?”


“...어, 어… 응… 미끄러졌어.”


“...근데 누구세여?”


“그… 옆집이야, 응.”


“옆집? 방금 엄마손잡고 나왔었는데…”


“엄마? 그, 하르페이아 말하는거니?”


“우리 엄마 이름은 안, 수, 밍!”


“...”


바이오로이드에게 이름이 붙었다는건 언제나 들어봐도 이상하다.


“그래, 뭐… 너는 유미라 했니?”


“넹! 아저씨는요?”


“...몰라도 된다니까.”


“히잉…”


“아침에 어머니 다시 돌아온다니까 다시 자. 새벽에 사람 놀래키고 뭐하는 짓이냐.”


“...”


안유미는 내 말을 듣고는, 아니 지도 졸린 건지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다시 드러누웠다. 정말 속마음이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나 또한 다리를 절뚝이며 소녀가 누워있는 쇼파 옆에 앉아 다시 계속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저 나이대의 애들은 궁금한게 많을 나이이다. 그리고 그 궁금증이 우리집에서 사라진다는 보장도 없으니, 집을 뒤지기 못하게 감시해야했다.


그나저나 저 어린아이, 내가 총구를 겨눴을때, 어째서 쏘기 직전에 일어난 거지? 초인간적 감각을 지닌건가? 아니면 그저 우연에 일치였을까? 아니면 정말 스파이같은 것일까? 말투나 그런걸 보면 꾸며낸 어린아이 말투같지는 않은데…


생각을 정리하자. 어짜피 이 아이는 그 년이 데려가면 다시는 안올 존재인데, 신경쓸 필요가 있을란가. 그냥 내 일에 집중해야한다. 약 운반은 끝났으니, 이젠 그 경찰년을 잡는 일만 남았다. 경찰 ID카드는 그 조선족 사채업자애들을 완전히 작살낸 다음 수하한테 잔뜩 가져다 줬으니, 서버실 입장은 쉬워질테고, 그 미스 세이프티가 어디서 뭘 하는지 알 수 있겠지.


…도대체 그 미스 세이프티는 어디에 있을까. 도심에서 운영되는 수많은 미스 세이프티들 사이에 숨어 계속해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까, 아니면 다른 도시로 가서 지내고 있을까, 아니면 다른 경찰, 아님 인간과 만나 결혼을 했을까…


상관없다. 만약 경찰직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면, 그 년을 잡아 얼굴가죽을 드러내, 근무하는 경찰서 꼭대기에 매달아놓을거고,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을했다면, 그자의 남편을 잡아다가 눈앞에서 고문해버릴 거다. 내가족을 그렇게 파탄냈는데, 그정도는 감당해야지. 바이오로이드들은 그렇게 인간들을 좀먹고, 인간들에게 반기를 들 것이다. 하아… 과거에는 바이오로이드는 커녕, 안드로이드나 로봇이 주변에 안보이는 세상도 있었다는데, 그때로 돌아갈 수 는 없는걸까?


생각이 깊어질수록 바깥의 풍경은 점점더 밝아져갔다. 새벽이 개고, 아침이 다가온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하늘은 점점 주황색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던 그때,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어째서인지 나는 누가 온 것인지 알 것만 같았고, 그 인물은 정말 예상대로 하르페이아였다.


“...”


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아직 사람들이 깨기에는 이른 아침이였기에 조심스레 문을 열고, 하르페이아를 노려보았다.


“...”


“...ㄱ, 고마워요…”


“...”


나는 다시 문을 닫았다. 절뚝이는 다리를 이끌고, 쇼파에서 자던 아이를 들어올려 문밖으로 나섰고, 그녀에게 던지듯이 돌려주었다.


“받아.”


“...! 다리는 왜그래요?”


“알바야?”


“혹시 딸이랑 노시다가…”


“시끄러, 당신 얼굴만 봐도 화가 나서 싹다 집어던져버리고 싶으니까.”


“...”


“...”


“고마워요… 남편이랑 이혼했는데… 아이한테 그런건 보여주기가 싫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사례는 어떻게든 해드릴테니-”


“사례?”


“...네? 아, 네 사례요.. 혹시 원하시는거라도-”


“원하는거야 있지.”


“...뭔데요?”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고, 문도 두들기지마, 너같은 년은 볼때마다 헛구역질이 나니까.”


“...!”


나는 문을 닫았다. 임무를 끝내고 편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을 저 새끼들 때문에 날렸다.


“...하아… 저 좆같은 년들…”


그 자식들을 보내주고나서야 나는 다리에 제대로 붕대를 감을 수 있었고, 한층 나아진 허벅지를 끌고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

.

.


“커흐윽! 으으윽!!”


또 시작이다, 눈을 뜨자마자 내 눈앞에는 생기없는 동태눈깔이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싶어도, 돌릴수가 없었다. 죽은 시체의 눈깔을 계속해서 마주보았다. 아무리 온 몸을 비틀어보아도, 그 죽은 눈은 피할 수 없었다.


정말 미치도록 피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온 몸을 흔들수록 그 동태눈깔에 나는 점점더 빠져들어가는듯 했다. 더이상 도망칠 수 없을정도로 그 확장된 동공에 나는 낭떠러지로 고꾸라졌다.


“크허억!”


일어난 곳은 침대였다. 그 어느곳도 아닌, 우리집 침대였다. 또다시 악몽에 사로잡혀있었다. 온 몸에 소름이 끼쳤고, 나는 내 몸이 정상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침대 옆에 있던 항우울제를 입안 가득 털어넣었고, 와그작거리며 씹어댔다. 달콤한 향이 코로 빠져나왔고, 정신은 몽롱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몇초동안의 몽롱함은 어지럼증과 헛구역질을 일으켰고, 나는 침대에서 튀어나와 옆에 있던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변기에 얼굴을 쳐박았다.


“우웁…! 우웨에에에엑!!!”


뭘 먹지도 않았는데, 속에서는 뭘 그리 많이 뽑아내는지 한동안 그 변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겨우 속을 비워낸 다음, 입을 헹구고, 세수를 한 다음, 잠시 진정하는 시간을 가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해는 머리위에 떠있었고, 허벅지에는 오늘 새벽에 있었던 상처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도심 외곽에서도 충유시가 얼마나 바삐 돌아가는지 차량의 소리들과 경적소리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후우…”


시간은 계속해서 지나갔고, 그렇기에 난 더이상 멈춰있을 수가 없었다. 출근준비를 위해 붕대를 푼 뒤 온 몸을 씻었고, 깔끔하게 정장차림으로 옷을 입은 다음, 집 밖으로 나설 준비를 끝냈다. 문을 박차고 나가 다리 밑 사무실로 가기 전, 내 현관문 사이에는 노란색 종이가 끼워져 있었고, 문을 열자 2장의 종이가 스르륵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게 뭐야?”


나는 그 종이들을 꺼내서 확인해보았다. 한명은 ‘안유미 보냄’이라고 쓰여져 있었고, 다른 한장에는 안수- 아니 ‘하르페이아 드림’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나는 우선 안유미의 이름이 적힌 종이의 뒷면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아지씨 저는 옆집에 있는 안유이라고 해요. 어제 가치 노라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미아내요(엄마가 이것도 쓰라고 하셨어요.))


라는 내용과 함께 종이 곳곳에는 애가 그린듯한 그림들이 있었다. 다음에는 하르페이아가 보낸 걸 읽어보자.


(어제 새벽에 힘들게 일하고 오셨을텐데, 갑작스럽게 이렇게 부탁해서 미안해요, 그리고 그 부탁 들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남편이 갑자기 더이상 같이 지내지 못할 거 같다고 이혼신고를 하러 가자고 했는데, 우리 유미한테 그런 꼴을 보여주기 너무 싫었어요. 부디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유미랑 같이 노시면서 다리를 다친거 같은데, 정말 미안해요, 봉투에 돈을 넣어놨으니, 치료비로 써주세요, 화가 많이 나셨을텐데, 정말 죄송해요, 그리고 다시 한번 감사해요.)


“...”


나는 곧장 다시 집으로 들어가, 포스트잇을 하나 꺼냈고 빠른 글씨로 이리저리 휘갈긴 다음, 옆집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그 포스트잇을 붙이고, 그녀가 보낸 지폐다발을 문앞에 집어던졌다.


푸른 종이들이 이리저리 나풀거리며 문앞에 떨어졌고, 나는 곧장 일을 끝마친 다음, 엘리베이터로 몸을 실었다. 그 포스트잇에는 이렇게 적었다.


(니 년이 주는 돈 따위는 관심없고, 내 눈앞에 한번만 더 나타나기만 해봐.)


6화 끝, 혹시라도 몰라 박소한씨의 집구조를 공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