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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미래 같은 과거, 과거 같은 미래






* * *







손목의 스마트워치가 저녁 8시를 알리는 알람을 울려댄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에서 직원에게 계산하고, 단골에게만 보이는 미소로 인사를 건네는 사장님께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빠르게 빠져나온다. 1인1인 외쳐대는 세상이므로 1인 술집이 있다고 이상할 것도 없고 그래서 찾은 것이지만, 저 미소만 보면 혼자서 술을 즐긴 보람이 싹 다 사라지는 것만 같다.


문밖으로 나서자, 조금 서늘하지만 완전히 차갑지도 않은 애매한 바람이 맞이한다. 어쨌든 귀가하면 난방을 켜야하는 건 다름없는데, 보일러가 고장나 난방다운 난방은 기대할 수 없다. 오늘도 전기장판에서 애벌레처럼 꿈틀대겠지. 그럴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다운되어 술로 덥혀놓은 몸도 급속도로 식어버렸다. 


아직 2주나 남았지만, 크리스마스를 테마로 한 일루미네이션이 거리를 이질적인 주홍색으로 채색하고 있다. 들뜬 남녀 한무리가 왁자지껄 떠들며 어깨를 스치듯 지나간다. 요리들의 향취와 술 냄새, 그것들을 품은 숨결들이 다양한 냄새를 퍼뜨려 코를 간질이고 떠나간다. 멀리서는 자동차의 배기음과 만남의 인사, 한 짝의 탄생을 알리는 탄성, 이별의 비명들이 한 점에 모여 독특한 화음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홀로그램을 가장한 네온등 밑을 지나가다가 멀리 역사가 보여 발걸음을 빨리 한다. 역사든 번화가든 인간은 많았고 모두 나와는 무연한 자들이다. 그렇게 밖에 여겨지지 않고 실제로도 그렇다. 일루미네이션이 내 안까지 주홍으로 물들였더라도 별다른 감상은 갖지 않았을 것이다.


지하철 내부는 불쾌하다. 여러 밑창에 깔린 진흙같은 눈들이 습기를 뿜어내고, 거나하게 취한 이들은 기름기 섞인 술냄새를 토해낸다. 특히 내 옆에 앉은 초로의 남성은 지독할 수준이다. 모처럼 이 시간대에 좌석을 차지했는데 지금 당장이고 일어날까 생각한다. 만약 다음 역에서 그가 내리지 않았다면 생각을 실행으로 옮겼을 것이다.  


여덟 정거장을 지나쳐 아홉 정거장 째가 되어서 내린다. 역사를 빠져나가고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이런저런 것들, 특히 먹을 것을 위주로 산다.


묵직해진 검은 비닐 두 장을 들고 다시 귀가길에 오른다. 보통은 일정한 톤으로 인사하는 남자 알바생이 나에게만은 살짝 높은 톤으로 배웅한다. 여기도 단골이니까. 어쩌면 목소리가 밝은 것은 단골이란 이유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고백이라던가 작업이라던가, 저쪽에서 먼저 성가신 짓만 하지 않는다면.


무수한 가선이 축 늘어지고, 진흙과 밑창에 더럽혀진 눈들이 구석에 쌓인 골목을 10분 정도 지나면 집이 나온다.


3층 건물의 3층, 가장 구석진 곳. 잘 쳐 봐야 5평도 안되는 방.


아, 정정한다. 집이 아니라 방이다.


필로티가 감싼 주차장을 가로질러 회색건물로 들어서서 계단을 오른다. 엘리베이터는 없다. 끔찍하게 가기 싫은 회사에도 엘리베이터는 있는데 말이다. 그래도 불평은 않는다. 집세가 꽤 싸니까. 오히려 이 정도 밖에 안되는 집세를 내면서 엘리베이터를 바라는 게 욕심이다.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알람이 채 다 울리기도 전에 문고리를 비틀어 문을 연다.


방은 불이 켜져있지않고 냉기로 가득하다. 덜잠긴 수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싱크대 쪽에서 들린다.


작디작은 냉장고는 거슬릴 정도로 웅웅거리고, 덜마른 빨랫감의 냄새와 익숙한 냄새가 한데섞여 이곳이 집임을 알려온다.


신발을 벗고 올라가 불부터 켜고 침대로 다가간다. 실은 매트리스만 바닥에 덜렁 놓여있기에 침대라 말하기도 민망하다.


한숨을 푹쉰 나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끄르고 스커트를 벗는다.


매트리스 옆의 협탁에 놓인 12인치 TV를 켠다. 한쪽 무릎을 껴안고 한동안 가만히 감상하다가, 보는 둥 마는 둥 의미없이 채널을 돌린다. 이용할 일 없는 홈쇼핑 채널이 지나가면 지극히 인공적인 웃음소리를 내는 쇼 프로그램이 나타나고, 웃음이 거슬려 또 돌리면, 계집애 같이 생긴 주제에 감히 누구를 지켜준다 만다 하는 가사를 읊는 남자들이 군무를 펼친다.    


케이블 채널의 쇼, 경쟁에서 뒤쳐진 듯 좀 이른 시간대에 방영되는 토크 쇼,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게 없다.


손목을 확인한다. 곧 9시. 늘 그랬듯, 나는 금방 시작할 뉴스를 미리 기다리고자 좀 더 채널을 돌렸다.


뉴스는 지금 막 시작한 참이다. 우측 상단에 현재 시각이 표기되어 있다.


2021년 12월 10일, 오후 21시 0분 21초.


그렇다. 지금 나를 품고있는, 이 작은 단칸 방이 존재하는 시간대는 한 번 적응해봤던 시간대다.


아주 잘 알고 있는 시간대다.


나는 아르망.


머나 먼 시간대에 다시 떨어졌다.







* * *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는 2주가 지나 크리스마스 이브가 왔다. 보통 시간이 지나간 것도 모른다고 하면 바빴기에 그랬을 거라 여기지만, 나는 정말로 2주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자각하지 못했다. 지나간 것도 지나갔다고 인식할만한 기억이 있어야 지나갔다고 말할 수 있다. 내게는 그런 기억이 없었다. 따라서 바로 어제를 2주 전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어쨌든 나는 이브 날 출근하자마자 사표를 던졌다. 사표 봉투에 맞은 부장은 처음엔 불같이 화를 내다가, 봉투의 정체를 확인하곤 허둥지둥 내게 들러붙었다. 어깨를 잡은 손이 간간이 머리칼을 훑기도 하고 뒷목에 닿기도 했다. 그게 해충보다도 소름이 끼쳐서 반사적으로 부장의 턱에 주먹을 꽂아버렸다.


이 시대에서는 보여선 안 될 반응이었지만 버릇이 돼버려서 어쩔 수가 없었다. 걱정도 없었다. 내게 맞은 것에 대한 조치를 취해 봐야 경찰을 부르는 게 다다. 그렇게 되면 나도 할 말이 있다. 그 동안 당한 성적인 희롱과 추행을 모조리 불어버리면 곤란해지는 건 부장이다. 증거는 꼬박꼬박 모아왔다. 증거가 없어도 내가 유리하다. 이 시대는 여자에게 아주 관대하니까. 성추행을 방어하느라 주먹을 휘둘렀다고 하면 그만이다. 


쓰러진 부장도 뒤로 하고 나를 쫓아 사옥 밖까지 나온 녀석들도 있었다. 하나같이 엊그제만 해도 나를 어떻게든 해보려는 똥파리 새끼들이었다. 그런 놈들에겐 내가 이제껏 보여준 적 없는 표정을 내보이는 것으로 대처했다. 지금까지 잘도 집적거린 주제에 상처받았다는 반응들이라, 찰나지만 당장 팬텀을 꺼내서 담궈버릴까 고민했다.


길고양이 녀석들이 돌아다닐 뿐, 오전의 주차장은 한산했다. 오늘로 마지막이라 츄르를 꽤 많이 챙겨왔다. 토트백을 열어 츄르를 꺼내 녀석들에게 흔들어보이고, 내 차로 향해서 운전석을 열어둔 채 시트에 앉았다. 고양이들은 운전석 옆에 일렬종대로 알아서 모여있다. 녀석들이 그 대열을 그대로 유지하게 하고, 한 마리씩 먹여준다. 한 녀석 당 두 개씩, 총 여덟 마리니까 16개를 먹였다. 


내게 볼 일 다 본 녀석들은 인사도 안하고 떠나갔다. 한 마리만이 남은 츄르 더 없냐는 듯 발목에 잠깐 부비댔다. 반응해주지 않자 그 마지막 녀석까지 떠나갔다. 길고양이 답다.


사축 기간 동안 나를 지탱해준 녀석들에게 앞유리 너머로 작별 인사를 건네고, 액셀을 밟았다.


대로에 들어서자마자 사고가 날뻔 했다. 그러나 가슴이 철렁대거나 고동이 연속해서 울리는 일은 없었고, 분노만은 치밀어서 차창을 내린 뒤 "야 이 씨발년아! 운전 똑바로 해!"라고 고래고래 외쳤다. 한 번으론 듣지 못한 것 같아 옆으로 나란히 달리면서 한 번 더 외쳤다. 나이대에 어울리지 않는 화장을 한 중년의 여성은 운전대를 잡은 채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나는 욕설을 퍼부었다. 내 목숨보다 출고된지 5일 밖에 안된 차를 사고로 떠나보낼지도 몰랐다는 게 더 싫었다.


목적도 의미도 없이 시간만 죽일 용도로 계속 운전했다. 강 위로 이어진 수십개의 대교를 하나하나 모두 건너고, 가끔은 액셀을 완전히 밟아 앞차를 추월하기도 했다. 그러다 간혹 추월 당한 것에 앙심을 품은 놈이 욕설을 해오면, 나도 똑같이 응수했다. 그 중에 기억나는 년이 있었다. 두꺼비 같이 생긴 년이었는데, 젊은 년이 이런 차를 타고 다니니 눈에 뵈는 게 없냐고 지껄였다. 그년에게 만큼은 욕을 하지 못했다. 웃겨서.


도시를 빙빙 돌아도 해는 떨어질 기미가 안보여 한적한 교외로 향했다. 시골은 아니지만 지금 사는 곳에 비하면 시골이었다. 이곳에 꽤 괜찮은 카페가 있다. 개인이 운영하는 영세한 곳으로, 브랜드 커피 전문점 보다 백 배는 나은 실력을 자랑한다. 열린 공간에서 로스팅을 하고 기계의 도움은 일절 받지 않는 곳. 내가 옆에서 훈수하듯 굴어도 묵묵히 미소로만 답하는 여주인이 제법 인상적이다. 커피 맛은 꽤 좋다. 그러나 돈을 많이 벌 생각은 없는지, 터가 안좋아 맛에 비해 손님이 적다. 내게는 이만한 곳이 없다.


오랜만에 왔다며 주문하지도 않은 잔을 건네는 주인에게 눈으로만 인사했다. 그러기만 했는데도 주인은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내가 그정도로 무뚝뚝하게 굴어왔던가. 그보다 나는 여주인에게 있어 단골이 된 모양이었다. 조용히 있고 싶을 때나 오던 곳이었는데.


테라스를 서성거리며 커피를 마시면서 약한 겨울 바람을 맞았다. 테라스 정면에는 연황색으로 잠든 논이 있었고, 뒤편의 주차장에선 소나무가 살랑살랑 몸을 흔들며 쌓인 눈을 털어내고 있었다. 


바늘같은 잎이 달린 소나무 가지를 하나 들고, 카페에서 기르는 고양이들과 잠깐 놀아줬다. 그걸 본 여주인은 '손님은 고양이에게만 다정하신 것 같다'며 조심스레 말을 트고 싶다는 기색으로 접근해왔다. 나는 점점 강하게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머플러 안에 정리하고, 10초 정도 고민하다가 여주인의 손을 잡아 끌었다.


"봄이 올 때까지 지켜줘요."


테라스 바로 옆에서 눈사람 하나를 같이 만들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계산대에 붙은 계좌번호에 삼백만 원을 입금했다. 스마트폰으로 입금알림 메시지를 받은 주인은 눈치 빠르게 눈사람 하나 지키는 것에 삼백만 원은 지나치다고 했지만, 지금의 내게 삼백만 원은 돈도 아니었다. 오히려 삼백만 원은 부탁하기엔 너무 적은 돈인가 생각했다. 


논 너머의 해는 많이 들어가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어제까지만 살았던 원룸에 잠깐 들르기로 했다.


한 시간도 안되어 도착한 원룸 주차장에다 차를 대고, 회색이가 나타날 때까지 츄르와 사료를 손에 들고 기다렸다. 삼십분 정도 지나서 회색이가 나타났다. 녀석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먹이를 챙겨주고 다시 차에 타려다가, 여기에도 눈사람을 만들었다.


다시 차를 몰았다. 18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어도 해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대로는 가로등 빛으로 물들었고, 자살방지문구가 적힌 난간에는 크리스마스 조명이 넝쿨처럼 감겨 있었다. 강에서 멀지 않은 허공에서는 폭죽이 연달아 터지고 있었다. 어딜보나 크리스마스였다. 내가 운전하는 차 내부도 다르지 않아서, 오디오에서는 왬의 Last Christmas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나는 눈만이 아니라 귀까지 크리스마스에 침식 당하고 있었다.


라디오 방송이 시아의 snowman 다음으로 존 레전드의 Bring Me Love를 내보낼 때가 됐을 때 호텔에 도착했다. 시동만 끄면 되는 것을, 굳이 오디오를 두들겨 패서 꺼버렸다. 그런 나를 주차 요원이 할 말을 잃었다는 듯 멍청하게 보고 있었다.


발렛 파킹을 맡기고 호텔로 들어섰다. 찾을 곳은 객실이 아닌 레스토랑이었다. 

이미 한 번, 약 150년 전에도 와봤던 곳이기에 헤매지않고 찾을 수 있었다. 


레스토랑에 들어서서 지배인에게 예약을 확인시켜주고 자리를 안내 받았다.


"여어~ 장장 60년 동안 미쳐있던 아르망 씨~ 아, 아니다. 애 키우던 때까지 합치면 70년인가? ㅋㅋ 오랜만이다?"


가장 구석진 곳의 테이블에 남자가 있었다. 벽에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밤의 카페 테라스가 걸려 있었다. 그 두 그림의 분위기처럼 레스토랑도 적막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이곳은 크리스마스 특수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전세냈거든." 


어마어마한 짓을 저지른 걸 아무렇지도 않게 고백한 남자가 슬며시 웃어보였다. 생각이 읽힌 게 기분 나빴다.


"여기도 오랜만이구만. 그때는 두 명이 더 있었는데, 안그래?"


"…밥."


"응?"


나는 토트백을 테이블 아래에 던져넣고 의자에 앉았다.


"밥 언제 나와."


"아니… 야. 이런데서 밥이 뭐야 밥이. 적어도 식사나 메뉴라고 해라."


"처웃지마."


"왜?"


능글맞게 웃는 남자를 쏘아봤다.


"참기 힘들거든."


남자는 손가락 위에서 나이프를 휘휘 돌리며 답했다.


"뭐가? 내가?"

"응. 너."

"왜 참기 힘든데?"

"죽여버리고 싶어서."

"오. 그건 곤란한데."

"그렇지? 아직 고민 중이야."


테이블에 있는 내 몫의 나이프를 어떻게 다룰까 생각하는 중에 전채요리가 나왔다.


웨이터의 눈치는 아랑곳 않고 연어 샐러드에 나이프를 꽂아버렸다. 


시간을 2년전으로 되돌려 본다.







* * * 






"왜 네가 여기에 있냐니까?"


인적은 물론이고 개미새끼 한 마리 없는 공원에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남자 뒤편의 낡은 나무 벤치에는 신문 한 부가 놓여 있었다. 방금까지 남자는 벤치에서 신문을 읽고 있던 것 같았다. 병신도 아니고. 밤에 글자가 보이기라도 한다는 건가. 나는 추위에 떨며 그런 거나 살피는 덜떨어진 짓이나 하고 있었다.


"야. 일단… 그… 네 폐하 먼저 내려놔라."


고개를 내려 본 곳엔 폐하가 있었다. 내 양팔에 들려있는 상태였다. 젖어서 번들거리는 얼굴의 물기가, 있으나 마나 한 가로등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힘도 좋네, 계집애. 공주님 안기도 다 하고.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입고 있는 체스터 코트를 벗어 바닥에 깔았다.


"내려놔."


폐하를 코트 위에 눕히자 남자가 폐하를 살폈다.


"어이~ 이봐요~ …물 많이 먹었나 본데."


남자의 손길에 폐하의 셔츠가 뜯어졌다. 폐하의 흉부에서 굴러 떨어진 단추를 눈으로 쫓으니 기합같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폐하께 CPR 중이었다. 능숙했다. 그런 감상을 가지는 것 외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릎 꿇고 앉아 폐하의 흉부를 압박하고 입에 숨을 불어넣어야 하는 건 마땅히 내 몫인 걸 알았어도,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남자의 호흡이 서서히 거칠어질 때가 되어서 폐하가 바닷물을 토해냈다. 그것을 보고 나도 손가락을 이마에 문지른 다음, 입에 넣어봤다.


틀림없는 바닷물이었다.


"어후… 힘들다." 남자가 짧게 한숨 쉬었다. "정신 좀 들어요?……라고 말하려니까 정신을 잃었네."


남자는 폐하를 들쳐업고, "따라와." 라고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일단 자리를 옮기자는 의미가 눈에 배어 있었다. 잠깐 동안 느끼지 못한 추위가 다시 느껴져서, 나는 군말 않고 남자의 뒤를 따랐다. 이빨이 제멋대로 맞부딪히며 딱딱 소리를 냈다. 


어쩐지 익숙한 이 공원은 겨울 속에 있는 듯했다. 아니, 틀림없이 겨울이다. 방금까지 있었던 수심이 꽤 되는 바다 속도, 여름도 아니었다. 분명히.


남자를 따라 간 곳은 딱딱한 폰트로 '집회소'라 적힌 간판이 달린 곳이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뒤돌아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잠겨있는 걸 보고 안심했다. 안심할 수 없었더래도 남자가 열쇠를 찾겠다며 내게 폐하를 맡기느라 도망칠 수는 없었다.


주방 쪽에만 불이 켜져 있는 1층으로 들어서자 고양이 두 마리가 맞이했다. 남자는 그 고양이들을 각각 페로와 포이라 부르며 두 팔 벌려 다가가다가 하악질을 당했다. 공원에서 느낀 익숙함과 마찬가지로, 그 광경도 어쩐지 익숙했다.


남자가 일단 씻으라 권유해서 씻기로 했다. 나는 위화감과 기시감을 반씩 섞은 감각 속에서 이끌리듯 3층으로 향했다. 머리와 몸이 따로 놀고 있었다. 정신은 밤하늘 어딘가에서 부유 중인데, 몸은 멀쩡했다. 몸만은 '집회소'를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움직여졌다.


3층 샤워실에서 씻고 나오자 발매트 옆에 개어진 옷이 놓여 있었다. 사이즈가 큰 회색 트레이닝 상의를 먼저 입고 바지를 찾았는데, 없었다. 그래도 상의만으로 허벅지까지 커버가 돼서 괜찮겠다 싶었다.


다시 내려온 1층은 난방이 되어 있었다. 폐하는 반대편 끝쪽의 붙박이소파에 누워 있었고, 폐하를 덮은 담요 위에서는 페로와 포이가 식빵을 굽고 있었다.


바닷물도 빼냈고, 난방도 됐고, 고양이에게 체온을 나눠받고 있으니 이제 괜찮겠지. 나는 주방으로 들어가며 안도했다.


마치 이곳에서 엊그제도 커피를 내린 양, 나는 빠르게 커피 두 잔을 내리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테라스에 면한 테이블에 앉아서 그러는 나를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나무 트레이에서 잔을 한 잔씩 내려놓고 남자와 마주 앉았다.


"…어떻게 된 거야?" 


남자는 커피를 한 잔 소리내어 마시고 물었다.


답하기 전에 나도 한 잔 마셨다.


"모르겠어."


테라스를 살짝만 열고 품을 뒤지다가… 그만뒀다.


"저기, 계산대 쪽 선반 뒤져봐. 있을 거야."


남자의 말대로 담배가 있었다. 왜 담배를 주방에 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아니었다.


다시 자리에 앉아 테라스를 살짝만 열고 남자를 봤다.


"돌아온 거냐?"


"…돌아와?"


내가 눈썹을 추켜세우자 남자가 턱을 매만졌다.


"돌아온…건 아닌가. 그럼 떨어졌다? 날아와버렸다? 뭐 어쨌든, 다시 왔네."


"이건 분명히…"


"꿈은 아니야." 남자가 내 말을 가로챘다. "네 눈 앞에 있는 나는 현실의 존재야."


굳이 내 회피로를 막지 않아도 됐다. 아무리 꿈이라고 부정하고 싶어도 그렇게나 바람과 추위가 선명하면 현실이라 인정하게 된다. 한없이 선명하고 또렷해서 꿈을 현실이라 착각할 수는 있어도, 결국엔 꿈이다. 많은 이들이 꿈을 삶과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나아가서는 대소사의 결정에 까지 이용하려든다. 

멍청한 짓이다. 꿈에 대해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지만, 꿈이란 수면 상태의 뇌가 수집된 정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걸러낸 불순물의 총체에 불과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꿈의 대부분이 현실의 잠재적 열망과 소망에 근거한다는 점에서는, 불순 그 자체라고도 느껴진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에도, 한편으로 나는 이 모든 게 꿈 같은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환각이라 말해도 좋다. 좌우지간 한계에 다다른 내 뇌는 수집된 정보를 모두 엉망으로 처리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는 이… 집회소에 10초도 앉아있기 어려웠다.


"당황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야."


말은 그렇게 했어도 남자는 당황한 기색없이 차분한 어조였다. 


"이럴 때 가장 좋은 건, 뭐든 생각나는대로 풀어놓는거지. 아르망. 말해봐."


"…말? 뭐를?"


"뭘 겪었냐고. 되도록 처음부터, 있었던 일 모두 말해."


"내가 왜…"


라고 말하려는데 발목에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 보니 웬 라쿤 한 마리가 내 발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어떤 상황인지 알고싶은 거 아니었어? 뭐든 해보자니까. 그리고, 상황 파악만을 위해서 말하라는 건 아니야. 이왕 다시 보게 된 거, 난 알아야겠어. 네가 뭘 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왜 당신한테 말해야 되는데?"


남자의 눈이 가늘어지고 어조가 조금 거칠어졌다.


"왜? 네가 네 폐하를 볼 수 있었던 건 내 덕이야. 들을 자격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되는데."


말 못할 거라도 있어? 라고 남자는 떠보듯 덧붙였다.


아직도 내 발목에 들러붙어있는 심술이를 보고, 남자를 보고, 몸을 돌려 폐하를 봤다. 폐하는 좀 더 고양이들의 체온이 필요하신 듯했다.


폐하는 지금 듣지 못하시고, 뜸들여 생각해 보니 말하지 못할 것도 없어서,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자의 말대로 정말 폐하가 나타난 것, 몸을 되찾은 폐하의 외모는 150년 전의 폐하와 똑같았다는 것, 150년 전과 똑같이 콘스탄챠와 사랑에 빠졌고, 콘스탄챠만을 진심으로 사랑하셨던 것, 폐하의 눈을 내쪽으로 돌려보려고 부던히 노력한 것,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오르카를 거의 내가 이끌다시피한 것, 세균들이 늘어감에 따라 노력의 범위가 좁아져버린 것, 더는 내가 식사를 못차려드린 것, 공유했던 cd플레이어의 플레이 리스트도 더는 공유하지 못하게 된 것, 함께 유성도 못보게 된 것, 차라리 고백을 하는 게 낫다 싶을 발언을 했던 것, 폐하와 데이트했던 것, 노래방에서 안무를 곁들여 열창한 것, 함께 별밤의 무대에 선 것…… 폐하의 결혼기념일로부터 일주일 뒤에 철충이 습격해온 것, 콘스탄챠는 결혼기념일에 죽은 것.


남자는 듣는 도중에 두 번 말을 끊었다. "나같으면 그 자리에서 바다로 뛰어내렸다."라며 비웃고, 어쩜 그리도 구린 멘트를 던졌느냐고 놀려댔다. 그걸 말하는 거다. 갑판에서… 아르망으로 물든다, 라고 말한 것. 내가 생각해봐도 어쩜 그런 말을 맨정신으로 했을까 싶었다. 굳이 남자가 놀려대지 않아도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또 하나는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른 것이었다. 아무리 폐하의 프로듀싱에 참고해드리기 위한 자리였다고 해도, 아이즈원은 반칙이지 않냐며 남자는 배를 잡고 웃었다. 오르카에 장원영이 강림한 꼴이 아니냐고 삿대질까지 해댔다. …어딜 봐서 장원영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키가 큰 편이 아니다.


빼먹은 게 있어도 상관없을만큼의 이야기를 마쳤을 때엔 이미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남자의 스마트폰에 12월 25일이란 날짜가 보였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팔짱을 끼고 있던 남자는 꼬은 다리를 정신사납게 떨면서 나를 잡아먹듯 보고 있었다.


뭔가 문제 될만한 게 있느냐고 물으려는데, 뒤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깼군."


남자가 일어나는 것보다도 빨리, 나는 폐하께 거의 기어가다시피 달려갔다.


"폐하! 정신이 드셨어요!?"

"…"


폐하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배에 올라가 있는 고양이들을 보고, 옆에서 폐하를 연신 불러대던 나를 보았다.


"여기는, 어디…"

"아, 폐하. 그게, 여기는…"

"오. 늦었나 싶었는데 멀쩡한가보군."


뒤에서 다가온 남자가 페로와 포이를 한 번에 안아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습니다. 여기 주인입니다."


담백하게 인사한 남자는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고양이들을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나와 폐하가 어떻든 안중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여기가 어디…" 상체를 일으킨 폐하가 신음했다. "도시… 건물이야? 바다는 아닌데… 이렇게 깔끔한 곳이 육지에 있었나…?"


"폐하. 일단 쉬세요. 설명은 폐하께서 회복하시면 그때 천천히…"


"너는…"


내가 잘 안보이는지 폐하는 눈을 모으시더니, 이윽고 다음 한마디를 뱉었다.


"아르망이니?"


"어라?" "네…?"


지금, 폐하가 뭐라고 하셨지?


남자는 왜 놀란거지?


"아르망. 네가 왜 여기에 있어?"


폐하가 눈매를 사납게 만들고 추궁하듯 물었다.


아, 그렇다. 폐하께 나는 내쳐진 존재다. 내가 내쳐지고 난 이후에 뵌 폐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셨다.


"저는, 그게…"

"됐어. 그만."


남자에게 어깨를 잡혀 뒤로 밀려났다. 남자는 페로와 포이를 어깨 뒤로 휙 던지고는 몸을 수그려 폐하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저건 아르망이 맞습니다. 그래서, 나는 잘 보입니까?"


내쪽은 보지도 않고 어깨 너머로 나를 삿대질하며 남자가 말했다.


"보이는데…남자?"

"그래. 남자."

"…인간?"

"음. 인간이지."

"어떻게…인간은 모두…"

"여긴 2019년이거든."


아하. 2019년이구나. 나는 어떻게든 납득할 수는 있는 말이, 폐하께는 이상하게만 들린듯 했다.


"2019년, 알아? 인간이 아주 바글바글한데도 제법 평화로운 시대야. 바이오로이드는 없고, 오직 인간만 있지. 인류사에서 손꼽을 수 있는 평화로운 시대일 걸. 아마도."


막 정신이 든 폐하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어려운 정보들을 남자는 마구 뿜어냈다.


"당신과 아르망은 함께 2019년으로 떨어졌어. 일단 그렇게만 알아둬. 오케이?"


"당신은 누구…?"


"나? 음… 난 쟤 아빠야."


"아빠? 그러니까… 아르망의 아버지?"


폐하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댔다.


"아하. 당신한테는 아빠란 단어가 생소한가. 그래도 의미는 알지? 당신이 생각하는 그게 맞아. 쟨 내 딸이야."


폐하가 의아해하는 부분에 답이 되어줄 것 같은 대답은 아니었지만, 일단은 됐다. 나는 남자를 폐하로부터 떼어내고, 좀 더 편하게 해드릴 생각에 함께 3층으로 향하고자 했다.


"어허. 딸. 지금 맨즈토크를 시작하려는 참인데 어딜 끼어들어. 딸은 저기 삼총사 좀 돌보고 있으렴. 자, 그럼 사령관 씨. 우리 조용한 곳에 가서 남자끼리 대화 좀 할까?"


폐하를 부축해 2층으로 향하는 남자의 뒤를 나는 말없이 뒤따랐다. 남자 혹은 폐하께 할 말이 산더미였는데, 뭘 어디서부터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굳이 뭔 말을 꺼낼 필요가 있을까?


분명, 폐하는 말했다.


내 이름 석자를 말했다.


아르망.


떠올랐다.


150년 전의 그때와 달리, 나를 나로 봐주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단박에 이해했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첫발을 딛자마자 남자에게 제지당했다. 툭 밀쳐진 나는 그대로 계속 밀려서 벽에 부딪히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사령관 씨는 너무 딱딱하니까… 음… 후배님이라고 부를게? 후배님후배님. 먹을 것 좀 줄까?"


2층에서 남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남자보다 안쪽에 계신 건지, 폐하의 말소리는 뭉개져 제대로 된 문장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2층의 구도를 청각으로 파악한 나는 생각에 잠겼다.


폐하가, 2019년의 폐하가, 나를 봤다? 콘스탄챠의 안경을 쓰지 않으면 내가 누군지도 몰랐고 안경을 써도 정상적인 소통이 어려웠던 폐하가, 나를? 아르망을?


"그건 그렇고 어우~ 잘생겼네~ 우리 딸내미가 당신한테 뻑이 간 것도 이해가 가. 캬~ 150년 전의 당신은 거의 산짐승 같은 몰골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혹시, 혹시 어쩌면, 하고 내 안의 교활한 부분이 속삭인다. 다른 중요한 것들은 뒤로 하고 그런 것부터 떠올린 죄악감조차 삼켜버리는 달콤함이, 나를 간질인다. 


자세한 사정 따위, 말할 필요 없지 않을까? 내가 바라마지 않았던 그런 상황이 150년을 지나서 찾아왔지 않은가? 폐하가 궁금해하셔도 대충 얼버무려 말씀드리고, 앞으로의 인생을, 인간으로서의 삶을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연인이 되어 마음껏 섹스하고, 사랑을 속삭이고, 부부로 발전해 아이도 몇 명 낳을 수 있지 않을까? 진짜 엄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있잖아, 후배님. 일단 알아둬야 할 것부터 말해줄게. 잘 들어? 후배님의 아가씨들이랑 오르카는 말이야."


오르카 따위야 이제 아무래도 좋은 거 아닐까? 그깟 잠수함, 그깟 저항군이 사라져서 뭐? 어쩌라고? 더럽고 역겨운 세균들이 알아서 사라져 준데다가 시간대는 철충과 인연이 전혀 없는 21세기 초기. 완벽하잖아? 나는 이 시대를 어느 정도 알고 있고, 폐하는 몰라. 가령 내가 작정하고 폐하를 덮쳐서 온몸을 구석구석 핥고 폐하의 정을 탐한데도, 폐하는 나를 떠나지 못해. 그런 거친 방법은 취할 일이 없겠지만 그런 것도 가능하단 거야. 


"아,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된 거냐고?"


씨발거 그냥 내 마음대로 해도 문제 될 게 없다는 거야. 그런 상황이란 거야. 해볼까? 일단 폐하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첫섹스를 해볼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 따위 섹스로도 만들 수 있어. 떡정이 무섭다는 말이 왜 있는데? 생긴 건 반반해서 씨발놈의 새끼 존나 따먹고 싶었잖아. 얼마나 참았는데? 해버려? 해버리자. 그리고 말하게 하는 거야. 당신의 자지를 누구에게 전부 빈틈없이 넣었느냐고. 그럼 폐하는 아르망, 내 이름을 불러주겠지. 그렇게 되면, 폐하의 전신에 나를 오롯이 아로새기게 돼.


"…그게 후배님의 부탁이야? ……진심이지? ……알았어."


좋아. 그렇게 하자. 대화가 끝나면 남자에겐 잠깐 쉬고 가겠다 하자. 그리고 폐하를 씻겨드린 뒤에, 보호를 구실로 같은 침실에 들어가자. 그런 다음엔, 뭐부터 하지. 펠라치오가 괜찮을까. 처음이라 걱정은 되는데, 이 맛있는 새끼를 내 걸로 만드는 첫걸음으로는 그만한 것도 없겠지.


"알았어. ……눈 감아."


사정할 때까지 똑바로 내 눈을 마주보게 만들고, 애태우고 애태우자. 약올리듯이 흘긋흘긋 미소지으면서 애교부리자. 얼굴에 뿌리든 입 안에 싸든 한 방울도 남김없이 꿀꺽꿀꺽 삼키는 것도 모조리 보게 만들자. 


마지막엔 질내사정 하게 만든 다음 말하는 거다. 

내년 상반기 안으로 당신의 아이를 갖는 것이 일차 목…


타앙-!


표…!


……타앙?


그 소리가 뭘 뜻하는지 이해할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네 발 짐승처럼 계단을 기어올랐다.


2층에서 보게 된 것은 누워있는 폐하였다. 이마 중앙에는 사입구가 나있고, 거기서 흘러나온 붉은 줄기가 바닥을 물들이는 중이었다. 필시 고통스러울텐데… 고통스러웠을텐데, 폐하의 표정은 밝았다.


……상황을 파악하는 것을 거부하고 싶어도, 이렇게나 대놓고 드러나 있으면 어쩔 수가 없다. 굳이 남자에게 어떻게 된 거냐며 대화를 시도할 필요도 없었다. 남자는 혀를 차며 손에 들린 리리스를 손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그 남자에게 분노하며 달려들어야 할 타이밍인 건 알지만, 상대는 남자다. 나는 폐하가 죽어버린 것을 인지했음에도 터뜨려야할 분노를 좀 더 응축시키면서 손을 확인했다. 장갑은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샤워하기 전에 벗었고 그 뒤로는 착용하지 않았으니까, 아마도 3층, 화장실 근처에 있을 것이다. 


"여기서 기다려." 라고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금방 올게."


3층으로 향했다. 장갑은 발매트 옆에 놓여 있었다. 


왜, 내가 왜 장갑을 다시 착용하지 않았던 걸까? 안심해서? 다시 떨어진 순간, 공원이라는 걸 인지하자마자 21세기 초기라는 걸 직감해서? 철충이든 바이오로이드든 지긋지긋한 것들과는 인연없는 세계라는 것에 환희해서? 그래서, 곧바로 안일해져서?


"왔어. 저기, 있잖아."


2층으로 내려와서 팬텀을 꺼냈다.


남자는 나를 한 번 스윽 보고, 누워있는 폐하께 시선을 고정했다.


"널 죽이면 안되는 이유를 말해봐."

"네가 죽을 테니까."

"또?"

"그게 다야."

"아하."

"아르망."

"으응~?"


남자는 리리스를 집어넣고… 아마도, 환도. 금란을 꺼냈다.


"덤비지 말라곤 안 해. 할 거면 빨리 해."


"씨이발새끼야!!"


남자를 향해 발을 구른 순간 강한 현기증이 덮쳤다. 현기증의 원인은 플래시백으로, 지금에 비하면 너무나 약했던 옛 시절의 내 모습이 눈앞에서 지나갔다. 새하얀 방에서 몇 년이나 난자 당하다가 남자에게 달려들던 그때와 지금의 구도는 비슷했다. 차이점이라면 그때 만큼 나는 약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손목이 뒤틀리고 뼈가 꺾여 살을 뚫고 나오는 것이 생생히 보이는 싸움박질이었다. 물론 그렇게 된 건 나였다. 당하는 일이 적었던 나는 그 뒤틀림이 선사하는 고통에 어렵게 저항하면서 남자에게 칼을 박아댔다. 남자도 어느샌가 금란을 내려놓고 팬텀을 꺼내들어 내게 박아대고 있었다.


남자가 내 어깨를 찌르면 나는 남자의 팔뚝을 난자했고, 내가 남자의 대흉근 쪽을 난자하면 남자는 내 복부를 찔러댔다. 그 모든 교환에서 비명을 지른 건 나뿐이었다. 얼마나 찌르든, 남자는 비명은 커녕 짧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입꼬리를 슬쩍 올리고, 할 테면 얼마든지 해보라는 느낌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강해졌는데, 나는 이제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데. 좋게 말해 싸움이었지 남자는 내내 나를 애다루듯 했다. 이때의 나는 나를 그렇게 강하게 만들어준 것이 이 남자였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싸움은 얼마가지 않아 끝났다. 


"이… 미친놈… 넌 아프지도 않… 으윽…"


내 손에서 팬텀을 쳐낸 남자에게 쇄골을 찔렸다. 남자의 팬텀은 천천히, 그러면서도 아주 부드럽게 내 쇄골 안쪽을 파고 들었다.


"어휴. 아랫도리 다 보이는 것도 모르고 미친듯이 달려드는구만. 딸. 내가 처음에 말한 건 말이다. 그건 경고였어. 돕는게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남자의 얼굴 주름 한 줄 한 줄이 아주 잘 보일 정도로, 거리는 가까워져 있었다. 남자는 내게 쇄골을 박은 채로, 남은 한 팔을 내 등에 감았다. 폐하가 살아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서로 껴안고 있다고 오해하셨으리라.


"윽…으… 무슨… 경고…"


마지막 저항으로 남자의 셔츠 앞섶을 매달리듯 틀어쥐고, 이마를 가져다댔다. 실은 들이 받을 생각이었는데,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의식하기 싫어도 남자의 품에서 향이 느껴졌다. 좋은 향이었다. 불쾌했다. 그렇게 느끼는 나도 불쾌했다. 


남자의 손이 페로와 포이를 다루듯 내 등을,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안정감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적의만으로 가득한 손길이었다. 


"모두 말하라고 했잖니. 왜 네가 한 짓은 쏙 빼먹어?"


열띤 숨결에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오싹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발목까지 내려갔다.


"네 폐하가 그러더라. 넌 직위 해제시킨 개체라고.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그런 위치에서 단번에 짤린 걸까?…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 짐작가는 게 있었거든. 회수한 집을 보니까 말이지, 진짜 엉망이더라고. 얼마나 더럽게 썼으면. 됐고, 그냥 더러우면 말도 안 해. ……이, 개같은 년아. 그 냄새 어쩔 거야.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시체 썩는 냄새가 사방에서 진동을 하느냐고. 야. 너 집 돌아다녔지."


"흐… 하아…"


"대답해!"


쇄골에 박힌 팬텀이 옆으로 돌아가려 했다.


"아아아악! 돌아다녔어! 밥 먹고 술 마시고 다 했어!"


"그럼 내가 남긴 메시지도 확인했을 거 아냐. 분명히, 깨끗하게 쓰라고 했을 텐데?"


"으… 으으으…"

"뭐했어."

"뭐, 뭘해… 내가…"

"죽였냐? 바이오로이드?"

"……흐읍…하아…"

"아니 왜 씨발 대답을 안 해!"

"꺄아악! 아, 아아아악!"

"숨기지 말고 있는대로 다 말해라! 진짜 죽여버리기 전에!"


"…그, 그래. 죽였어. 씨발! 죽였어! 그 역겨운 씨발년들 되는대로 다 잡아 죽였다고! 휴가 중에 너랑 연락한 다음에도 죽였고 탐색 하다가도 죽였고 경찰 년들 옆에서 수사를 농락하는 와중에도 죽였어! 다 죽였다고 개씨발년들아! 아아악!"


나는 남자의 가슴에 머리를 계속해서 부딪쳐댔다. 


열 몇 번 즈음 들이받자 머리채를 휘어잡혀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두둑하고 머리카락이 뭉텅 뽑히는 소리가 날 만큼, 남자의 손은 무자비했다.


침이 목구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고개가 젖혀진 채, 나는 남자가 바라는대로 모두 불었다. 불다보니 이상하게 악에 받쳐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모두 말했다. 


그깟 씨발년들 좀 처죽인 이야기의 뭐가 재밌는지, 남자는 중간중간 피식거렸다.


"나는 호랑이로 키워냈다고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다 들은 남자가 조소를 흘렸다. "ㅋㅋㅋ 이건 뭐 완전 벌꿀오소리가 돼버렸네."


"으흐흫~ ㅋㅋㅋ…" 나도 비슷하게 맞받아쳤다. "벌꿀오소리는 독사도 잘 먹지~"


"도대체 폐하 보기 전에 어떻게 지냈길래 이 모양이 된 거니? 아, 아니다. 폐하 보기 전부터 그 지랄을 한 건 아니지?"


"했는데에~? 오죽하면 나한테 흡혈귀란 별명을 붙였더라고~ 내 이야기가 괴담으로 떠돌았다나? ㅋㅋㅋ 칸이 그러더라~ 그 칸이 말이야~ 세상에! 당신도 기억하고 있더라구! 네가 야바위로 놀아줬던 그 늘씬한 년 말이야 ㅋㅋ! 네가 따먹겠다고 농담 던진 년! 기억하지!? 응!?"


"흐음."


"씨발년들… 하나하나 잡아서 생피를 빨아먹었지. 세상에, 얼마나 맛있던지~ 오리진 더스트 함유량도 높아서, 피를 빨 때마다 100년은 젊어지는 기분이었어. 아아~ 진짜 기분 좋더라~"


"그 지랄을 오르카에서도 했다? 그 지랄을 한 건 그 노인네 때문이다, 이거지?"


"…ㅋㅋㅋ…ㅋㅋ…"


"또 대답 안 해?"


고개가 좀 더 뒤로 젖혀졌다.


"아앙~♡"


"ㅋㅋㅋㅋ 이거 봐라?"


쇄골에 박힌 팬텀이 다시 틀어지려고 해서, 나는 악을 썼다.


"그래! 그 아이의 말대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왜! 틀린 말도 아니잖아!? 바이오로이드는 씨발 역겨운 것들이야. 그런 년들을 인간님이 좀 죽이겠다는데, 그게 문제냐!? 야! 씨발아! 문제냐고!"


남자는 마지못해 인정해준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약이 올라서, 더욱 악을 써댔다.


"궁금한 건 세 가지야. 개인적으로."


첫째, 물약인 이유는 무엇이냐. 남자는 오메가를 왜 굳이 물약으로 죽여야만 했는지가 궁금한듯 했다. 고분고분 대답해줄 의리 따위 없었지만 입다물고 개겨봐야 안 끝난다. 궁금증이 가실 때까지 절대 안 놔주겠다는 의사가 머리채에서 느껴졌다.


"아, 그거? 별 거 아냐. 제일 간편하고 효과적이니까. 뇌는 수복이 안 돼. 아무리 몸뚱이는 멀쩡해져도, 약은 계속 원하게 된다고. 간편하긴 해도, 오메가같은 격조높은 년에겐 딱 어울리는 우아한 방법인 것 같다고 생각 안 해? 그리고 그 정도되는 년이면 알 수 밖에 없거든. 약에 절여진 순간부터, 자신은 쾌락을 고통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걸. 과한 쾌락은 고통과 다를게 없잖아? 감각의 경계가 무너진 처지를 비관하는 고성능 바이오로이드라니, 꽤 괜찮지 않아? 뇌를 조져버린다, 바이오로이드를 씹기엔 아주 그만이야. 다프네 그 씨발년은 내가 특별한 이유 때문에 약으로만 죽인줄 알았나 본데, 천만에. 저급하게 다루기엔 그만한 게 없어서였을 뿐이야."


"가관이구만. 둘째. 그, 뭐냐. 약물에, 섬광등? 정말 그 따위 것들로 최면이 걸렸냐? 진짜 궁금해서 그래."


팬텀과 유미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이다. 

그게 최면상태였는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효과 자체는 비슷했다.


"당연히 가능하지. 네 집에 살 때 책을 하나 읽었어. 마취 중 각성 상태를 겪은 환자의 이야기였는데, 그 상태에서 보게 된 빛이 원인이 돼서, 수술 후에 발작을 일으켰다는 경험담이었어. 요컨대 광과민성 간질, 발작이란 거지. 거기서 착안했어. 약물로 적당히 정신을 빼놓고, 패턴화 된 섬광을 연속해서 보게 해서 뇌를 조졌지. 일상적이라서 모르는 거지, 의외로 빛이 신경을 강하게 자극하는 요소라 하더라고? 뭐, 그러니까 빛 때문에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는 거겠지. 아 참. 간질성 발작은 기억 상실도 야기한다는 거, 알고 있어? ㅋㅋ 그 두 년은 있지, 그저 내 말에 따랐을 뿐인데 지들이 했다고 철썩같이 믿어서는, 나중에 가선 자살…"


"닥쳐. 셋째. 이건 그냥 확인하는 건데, 너. 그거 전부 따라한 거지."


"…뭘 따라 해?"


"네가 한 짓들, 약물로 절여 죽이고, 최면을 거는 방법 같은 거. 뭘 따라 했냐고? 내 집에 있는 tv. 셋톱박스에 들어있는 영화랑 드라마. 그거 보고 따라한 거잖아."


"그게 나빠?"


"아니. 절대로, 절대로 네가 못돼 처먹은 년인 걸 알려주려고 물어보는 게 아냐. 그냥 확인하는 거야. 진심으로 궁금해서. 이제 됐어. 그리고, 마지막."


"씨발… 궁금한 것도 많네."


"왜 예지 안했어."


"예지를 안했냐니?"


"물은 건 나야. 이번에도 또 다시 철충에게 침몰할 가능성에 대한 예지, 왜 안했냐고. 아르망 추기경이라면 했어야 됐잖아. 그러면 그런 상황을 막을 수도 있었던 거 아니냐."


"…"


"안한 게 아니지?"


"시끄러워."


"못한 거지?"


"닥치라고 이 개…! 우욱."


몸이 공중에 떴다. 찰나의 부유감은 발목의 통증으로부터 시작돼서, 바닥에 꽂히는 것으로 끝났다.


"엉겁결에 다시 네 아버지가 돼버렸으니까 정리해 줄게." 남자의 무릎이 복부를 짓눌렀다. "오늘 한정이니까 걱정은 말고. 자, 딸. 일단 내가 왜 화내는지는 말 안해도 알지?"


"씨…팔…새끼야! 네 목을 따라고 자극하기 위해서잖아!"


"내가 너 그러라고 가르쳤어?"


"ㅋㅋ…ㅋㅋㅋ…?"


"네 몸 지키라고 널 강하게 만들어준거지, 살육 쇼나 벌이라고 가르쳐준 거냐고. 응? 이 씨발년아. 폐하 보러 가라고 가르쳐준 걸 그 따위로 써먹어?"


"이거… ㅋㅋ… 웃긴 새끼네… 왜 화를 내지?"


"왜 화를 내지? 시간 낭비한 꼴이 됐잖아. 너 같은 년 돕겠답시고 낭비한 내 시간이 아까워서. …뭐, 됐어. 니네 일이지 내 일이냐? 할 말만 한다. 귀 똑바로 열고 들어."


몸이 눌려서 저항 수단은 고개를 돌리는 것 정도로 한정된 상태였다. 그것도 남자가 뺨을 쳐댔기에 금방 저지 당했고, 타이밍에 맞춰 남자의 손을 물려다가 주먹으로 맞았다. 저항할수록 남자의 수단은 단계적으로 강해져갔다.


"내 생각은 그래. 잘못한 건 너만이 아니라고. 니네 오르카랑 사령관도 잘못이 있어. 너무 착했다는 것, 그게 잘못이야. 특히 너 같은 년도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감싸고 든 아자젤이랑 다프네는 아주 눈물겨울 정도야. 심리상담이라. 우리 다프네랑은 좀 다른데. 뭐 어쨌든, 넌 말이야. 내가 이끌던 오르카였으면 하루아침에 물고기 사료행이었어. …이빨 갈지 말고 똑바로 들어라."


"개…새끼… 죽인다… 이… 씨밸럼..."


"그렇게 좋은 동료들을 뒀으면서. 참 나. 어떻게든 폐하를 네 걸로 만들어야 했냐? 그냥 그 둘을 축복해주고 마음 접으면 될 일 아니었어? 반드시 폐하가 네것이어야만 했어? 다시 만나는 걸로는 만족이 안됐어? 그냥, 네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는 행복만으로는 안됐던 거야?"


"내가 이… 개새끼야… 당연히… 그냥 다시 보자고 그 시간을 버틴 게… 아닌 ㅋㅋㅋ… 데…"


"네가 뭔데."


"…인…간…"


"도대체 어떤 60년을 보내야 너같은 바이오로이드가 탄생하는 걸까? 응? 보나마나지 뭐. 야. 내가 말했지. 차라리 저항군에 합류하는게 어떻겠냐고. 내가… 씨발. 그래도 너 혼자 시간을 보내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한 내가 병신이었다. 당장 라비아타에게 데려가서 우리 딸 좀 잘 부탁한다고 절을 올려야했어."


"그…그랬으면… 라비아타 대가리는 그날로… 날아갔어…"


"헛소리 하지 마. 라비아타한테 처맞고 기절했다면서. 아, 그래. 그것도 있지. 야. 네가 아무리 강해졌다한들, 블랙 리리스를 맞상대하는 건 무리야. 하나 물어보자. 니네 리리스, 의료키트 매고 다녔지?"


"그게 지금… 뭐가 중…요해…"


"중요하지. 그걸로 구별하거든. 의료키트를 착용한 리리스는 호위용, 아닌 리리스는 살상용. 둘은 전투력 자체가 달라. 뭐, 그걸 감안해도 호위용 리리스는 강하지. 내 말은 그거야. 니네 리리스는 상당히 힘을 빼고 널 상대했을 거라는 거. 죽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 그러는 사이에 너는 리리스를 제압하는데에 몇 초가 걸릴지 계산했을 것이고. 이 못된 년 같으니. ㅋㅋㅋ 생각해보니까 웃기네. 예지는 못하게 된 주제에, 전투는 계산할 수 있어? 아무리 내가 전투를 가르쳤다지만 탑재된 기능에 손상을 줄 정도는 아니었는데?"


"언제까지… 지껄일 거야…"


"그나저나 전투 종료까지의 시간을 계산한다라. …아, 그거네. 이퀄라이저."


"으윽…"


"ㅋㅋ 따라할 게 없어서 덴젤 워싱턴을 따라 했냐?"


"내가… 그 아저씨보다 세니까… 좀… 따라 한다고… 문제 될 건… 없잖아…"


"하기야 니네 오르카 아가씨들은 덴젤 워싱턴을 몰랐을 테니, 보기엔 신기했겠네. ㅋㅋ 그냥 영화 캐릭터 따라하는 정신나간 년일 뿐인데, 안그래?"


"후읍…후읍…흐읍…"


"마지막이다. 숨 넘어갈 것 같아도 참아. 야, 바이오로이드."


"뭐… 뭐…"


"네가 무슨 인간이라는 거야. 똑바로 들어. 진짜 인간님이 말해준다. 넌 바이오로이드야."


"…그 말 취소해."


"싫어. 바이오로이드."


"취소해!"


"네가 청이라 부르던 그 계집애가 내린 저주라는 거, 그거잖아. 너한테 보낸 편지. 달리 말하면 유언장. …야. 넌 그게 진짜라 믿냐?"


"취소 하라고!"


"아니지? 헛소리인 걸 알면서도 꾸역꾸역 맞다고 받아들인 거지? 순 억지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거잖아. 저주의 탈을 썼으니까 그러기도 쉬웠던 거잖아. 세상에 저주만큼 억지스러운 것도 없으니까. 네가 뭐 인간이 돼서 그 계집애의 대변인이라도 했던 거냐? 야. 바이오로이드는 감정이 있어. 아무리 만들어졌대도 감정이 있는 이상 변할 수 밖에 없다고. 짐승도 똑같아. 짐승도 변하는데 바이오로이드라고 안 변하냐."


"그 감정조차 만들어졌어!" 복부의 압박감이 느슨해졌다. "인간을 위해서 태어났다는 년들한테, 감정? 씨발아. 바이오로이드에겐 감정이 탑재되어선 안됐어. 한없이 AGS에 가까웠어야 했어."


"…뻔한 대답이 돌아올 건 알겠는데, 그래도 물어나 보자. 왜?"


"그딴게 있으니까 인간이 타락했지. 간단한 이야기잖아? 감정이야말로 바이오로이드 최고의 셀링 포인트야. 감정이 없다면 그냥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형일 뿐이야. 다 큰 어른이 인형놀이를 하겠어? 아니잖아. 감정이 있으니까 그렇게 즐기고 괴롭히고 지지고 볶았지. 더해서 전부 여자에, 아랫도리까지 제대로 달렸고. ㅋㅋ 그렇게 가지고 놀아야 할 년들이 씨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들을 죄다 앗아가 버렸으니 인간이 빡칠만도 해."


"음. 맞는 말이네."


"그렇지? 오르카는 완전히 잘못돼 있었어. 인간이 바이오로이드를 욕할 순 있어도, 바이오로이드가 인간을 욕해선 안 돼."


"일부분만."


"동의할 거면 전부 다 해."


"싫어.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건 인정해. 근데, 진짜 바이오로이드 때문에 인간이 그 꼴이 됐다고 생각하냐? 사회와 가정이 무너지고 경제가 작살나는 건 인류사에서 몇 번이고 반복돼 왔어. 아주 여러 원인으로. 단지 그 시대에는 바이오로이드가 그 원인의 한 축을 담당했을 뿐이고, 바이오로이드가 탄생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게 원인이 돼서 인류는 몰락했을 거야. 그런 원인들에 비하면야 바이오로이드는 아무것도 아니지. 인간을 위했던 건 사실이니."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차원을 넘나들 수 있으니까. 실제로도 봤어. 바이오로이드가 탄생하지 않은 차원. 철충도 없는 곳이었지. 그런데도 멸망하던데? 야, 아르망. 다시 생각 좀 해봐라. 흥망성쇠는 인류사에서 정말 흔한 거야. 너로 한정해서 이야기하면, 사랑이 맺어지고 이지러지는 것도 너무나 흔한 이야기란 말이야.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그래. 백 번 양보해서, 그 저주 때문에 네가 인간을 옹호하게 되고, 품게 된 생각에도 일리가 있다고 쳐. 그걸 도대체 왜 오르카에 까지 적용했는데?"


"…인간이 있으니까. 폐하는 인간이잖아. 인간이신 분이 바이오로이드에게 물들어서야 되겠어? 그랬다간 폐하의 손에 재건될 인류는 도저히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될 거야. 그런 건 죽어도 못 봐."


"증말~ 돌아버리겠다. 그걸 왜 네가 판단해? 야. 또 말하는데, 넌 인간이 아니야. 바이오로이드야. 바이오로이드면 바이오로이드답게 네 폐하의 사상에 힘을 실어줘야지, 왜 멋대로 재단하려 들어. 그딴 짓 하라고 널 가르친 게 아니라니까? 너 진짜 뒈지고 싶어?"


"씨발아! 그럼 넌 왜 멋대로 판단했어! 왜 폐하를 죽였어! 폐하는 이제 끝났다고 판단해서 죽였냐!? 살려내. 살려내!"


"아래층에서 다 듣고 있었잖아. 내가 죽여야겠다고 판단해서 죽인 게 아냐. 네 폐하가 나한테 부탁한 거지. 빠르고, 깔끔하게. 그렇게 죽여달랬어. 난 들어준 거고."


"살려내!!!!"


"…설령 내가 살려낼 수 있다고 해도 의미없는 짓이야. 아르망. 모르겠니? 네 폐하는 내가 총알을 박기 전에 이미 죽어 있었어."


"아냐… 아니야…"


"네 폐하는 이렇게 부탁했어. …몸을 죽여달라고. 그때랑 같은 거야. 이번에는 자살이 아니라, 내가 죽여줬다는 게 다른 거지."


"아냐… 말하지 마… 아니야…"


"네 폐하는 오늘 죽은 게 아니야. 네가 말한 그날, 콘스탄챠와 함께 죽은 거야. 진짜 마지막으로, 확인사살 해줄게. 네가 분명한 바이오로이드인 이유. 네가 그 저주에 그렇게나 목을 맸던 건, 네가 바이오로이드이기 때문이야. 왜? 인간이라고 하면 껌뻑 죽는게 바이오로이드니까. 이런 거지. '어머!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주신 인간님이 내가 싫대! 저주한대! 아아! 그럼 달게 받아야지!' 대충 알겠어? 인간이라면 너처럼 그렇게 지독할 정도로 제 가슴을 후벼 파지 않아. 적당히 묻을 줄 알지. 너처럼, 아주 제대로 미친 바이오로이드나 그런다고."


남자가 그렇게 말한 직후에 눈이 감기고, 눈꺼풀 안쪽에서 눈부심을 느꼈다. 다시 눈을 뜨자, 겨울 아침 특유의 탁한 오렌지빛이 시야에 담겼다. 몸은 푹신한 침대에 뉘여 있었고, 스툴에 앉은 남자가 침대 옆에 있었다. 머리를 얻어맞았던 건지, 관자놀이 쪽에서 여운같은 두통이 느껴졌다.


"루미놀을 뿌려봤는데." 남자가 루미놀 반응으로 반짝반짝해진 티아멧을 살피며 말했다. "폐하 찾는데 방해된다고 어지간히도 썰어댔나봐?"


"…배 쪽이 이상해."


복부의 통증이 일으키려던 몸을 제지했다.


"수복 캡슐 먹인지 얼마 안됐어. 더 누워 있어라."


머리맡 근처의 협탁에 시선을 줬다. 시계는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 오픈 안 해?" 라고 나는 말했다. "고양이들 밥은 줬어?"


"걱정하는 거야?"


"걱정이 아니라, 할 일이잖아."


"네 기준으로 150년 전엔 네가 할 일이었지. 신경 꺼. 오늘 쉰다. 크리스마스야."


"아하…"


"슬슬 아침 먹을 건데." 남자가 협탁 쪽으로 다가갔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손질이 끝난 티아멧을 내 장갑에 수납한 남자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없어. 배 아파."

"수복되고 먹으면 되잖아."

"싫어. 네가 주는 건 안 먹어."

"네 폐하는 정리했다."

"…"

"보라고 해도 안 볼 것 같아서 말이지. 적당히 화장했어."

"…그래."

"우냐?"

"안 울어."


뺨에 손이 닿아서 이불 속으로 숨었다.


"왜 울고 그래. 네 잘못이 제일 크잖아."


씨발새끼.


"아, 그래. 아르망."


또 왜부르냐는 의미로 이불을 한 번 걷어찼다.


"좀 있으면, 네 사랑이 와."


이불에서 눈만 꺼내고 남자를 봤다.


"뭐?"


"고딩 시절의 풋풋한 그 아이가 온다고. 걔는 고딩때부터 여기서 일했거든. 편부모 집안이라, 내가 거의 아빠 노릇을 하는 중이지. …지금같은 옛날에도 그랬고."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창을 살폈다. 

집회소 근처엔 고양이 몇 마리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좀 있다가 온다니까. 음. 그래서, 어쩔래?"


"뭘 어째. 갈 거야."


"안 볼거야? 지금의 걔는 널 몰라. ㅋㅋ 아르망. 난 어떤 취향이든 존중하는 편이지만 웬만하면 남자를 좋아하는 편이 좋아. 안그러면 폐하가 섭섭해 할지도 모르잖아."


그 뒤로도 남자가 몇 마디 더 했던 것 같지만, 듣지도 않고 집회소를 나왔다. 중간에 페로와 포이가 고양이 답지 않게 매달렸어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폐하와 오게 된 공원까지 가서 깨달았다. 내게는 다시 떨어진 2019년에서 살아갈 필수 요소들이 없었다는 걸. 돈과 식량은 물론이고 신분증조차 없었다. 


그래도 집회소로 돌아가는 것은 죽는 것보다 싫어서 공원 벤치를 지켰다. 오후가 돼서였을까. 옷도 제대로 껴입지 않아 슬슬 잔기침이 나오게 됐을 무렵에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녀 한 쌍이 내게 다가왔다. 그 둘은 말없이 사무용으로 보이는 서류가방을 내밀고는, 회장님이 건네는 최소한의 도움이라고만 말하고 사라졌다. 가방 안에는, 2019년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옷가지도 몇 벌, 집 열쇠도.


…그렇게 2021년에 이른다. 이 2년 동안 남자와는 몇 번 연락을 주고 받았다. 직접적으로는 아니고, 어디까지나 그 정장차림 녀석들을 통해서. 나도 그랬지만, 남자 쪽에서 절대로 직접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는 듯했다. 


그랬던 남자가 직접 연락해 온 것은 내 차가 출고된 날이었다. 24일 밤에, 네 기억에 있을 그 레스토랑으로 오라는 문자를 받았다. 나는 답장 하지 않으려다가, 원색적인 욕설 몇 줄을 적어 보냈다. 거기에 남자는 ㅋㅋㅋ라고 답했다. 진 것 같았다.







* * *







"그때는 미안했어." 고기를 씹어대며 남자가 말했다. "내가 좀 과했어. 하~ 좋은 아빠이고 싶었는데."


"지랄…"


"음, 기분은 어때?"


"기분? 화장실에서 볼 일 보다가 끊긴 기분이야. 촬영하던 영화가 제작 중단된 기분이고. 체감상으로 몇 십 초만에… 씨발… 2019년으로 돌아왔다는 게 말이 돼? 그리고 순식간에 2년이 지나갔다는 게 말이 되냐고."


"……자, 그래서." 내 대답은 무시하고 남자가 말했다. "감상은?"


진짜로 감상을 묻는게 아니다. 인간은 아름답다 뭐다 한 것에 대해 남자는 비아냥 대고 있는 것이다.


"좆 같았어."


"그러시겠지. 아아~ 사축이란~ ㅋㅋ 그렇게나 아름다웠다 예찬한 인간들을 다시 보게 되니까 역겨워지기라도 했나?"


"뭐, 괜찮아. 돈 벌려고 다닌 건 아니니까."


"그렇지. 아니면 굳이 150년 전과 똑같은 회사를 다닐 이유가 없지. 그래서, 이젠 현실이란 걸 받아들일 수 있겠어? 정말로 네가 다시 150년 전으로 떨어졌다는 거. 그걸 확인하려고 같은 회사에 입사했던 거잖아."


그랬다. 의식 아래에서는 분명 현실의 시간 속에 있다고 인지했음에도, 의식의 표면에서는 현실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었다. 


이것은 꿈이 아닐까. 나는 사실 침몰하는 오르카에서 죽었고, 여기는 사후세계가 아닐까……등등. 회피적 사고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하지만 꿈도 사후세계도 아니었다. 내 오감이 수집하는 모든 정보는 생생한 현실의 것이었다.


"응. 맞아. 진짜야. 부장도 차장도 대리년도 입사 동기였던 새끼들도 그대로였어."


시간이 제법 지났다. 부드러운 식감이 남다르다는 송아지 스테이크는 차게 식어 굳어버린지 오래였다. 그래도 나는 일반적인 스테이크의 식감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아무리 고급 호텔의 레스토랑이라도 이런 걸 어떻게 수십 만원씩 받아처먹고 팔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좋아. 그날 네 폐하 때문에 잠깐 틀어졌던 이야기를 계속하자고. 2년이란 간극이 있긴 했지만, 상관없지?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했잖아. 물론 나도 필요했고. 아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받더라고. 갑자기 연락해서는 고맙다고 한 주제에, 또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서는 지랄염병을 하니까. 나도 방금까지는 널 죽이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했어."


"난 지금도 근질거려."


돌아 본 메인 홀 쪽은 불도, 음악도 꺼져있다. 그래도 지배인이 와서 퇴장해달라고 부탁해오지는 않는다. 남자가 냈다는 전세의 범위는 시간에 까지 닿아있는 듯했다.


"웅웅." 남자는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고갯짓을 보였다. 불쾌했다. "그럼 이제 지나간 건 빠이빠이다? 쌓인 건 모두 털어내자고? 물론 너는 나한테 쌓인 것만이 아니라, 지나온 150년을 모두 털어내야겠지만 말이야."


"…"


남자는 부러 안타깝다는 미소를 지었다.


"없었던 일이 된 거나 마찬가지가 됐잖아."


이런 뜻이다. 다시 다녀 본 회사의 동료들도, 내가 잠깐 살던 원룸의 이웃집 노인네도, 단골이었던 술집 사장도 모두 날 기억하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라고 이해는 했지만, 왠지 납득이 안됐다.


"당신, 시간 여행자라고 했지."


"슈발리에 몽라쉐 그랑 크뤼 2013…"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비싼 건가? 야. 너 좋아 보이는 거 마신다? 근데, 스테이크엔 레드 와인 아닌가? 얼레? 왜 고기는 먹지도 않았대?"


"씨발… 내놔. 네가 사는 고기 먹을 바엔 그거만 마시는 게 나아."


"ㅋㅋ 레스토랑 온다고 와인을 따로 챙겨오는 정성까지. 아~ 이러면 싫어도 마셔줘야지."


"내놓으라고!"


와인병을 두고 옥신각신 하느라 끊긴 대화는, 남자의 턱에 주먹을 꽂는 것으로 재개됐다.


"으음…" 남자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과장되게 짓고 턱을 매만졌다.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고?"


"그래. 당신은 시간여행자니까 뭔가 알고 있을 거 아니야. 뭐든 말해봐."


"몰라."


즉답인데다가 너무 시원스러워서, 나는 잠깐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10초 정도 지나서 내가 맥없이 말했다.


"뭐…?"


"모른다고. 너한테 일어나는 현상이 뭔지."


"오늘…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대화하려고 만난 거 아니었어?"


"맞아. 맞는데, 나는 몰라."


"이…"


"어, 어어, 잠깐만. 병 내려놔."


심호흡을 반복해서 이성을 되돌렸다.

남자가 뭔가 할 말이 더 있다는 듯 황급한 손짓을 보여서 참기로 했다.


"내가 시간 여행자라고 해서 그런 쪽 방면의 지식이 풍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마. 난 아무것도 몰라."


"왜 몰라."


"우리 닥터가 말을 안해줬거든. 뭐, 말을 해줬어도 안들었겠지만."


지루한 건 질색이야, 라고 중얼거린 남자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난 그저 사용자일 뿐이라고. 설계자가 아니야. 그러니까, 그런 거지. 네가 스마트폰을 들고 20세기 초기의 학자와 만났다고 해보자. 그 학자가 네게 스마트폰에 집약된 기술에 대해 묻는다면, 말해줄 수 있겠냐? 넌 스마트폰의 기능이 필요해서 구매했을 뿐, 그냥 사용자잖아."


"네 시간 여행 장치를 만든 건 닥터고, 넌 그냥 받아서 쓰고 있을 뿐이다?"


"그거야. 이야~ 적절한 비유였는지 지금 막 걱정한 참인데, 이해가 빨라서 좋아 ㅋㅋ!"


"이 씨발아!"


결국 와인병을 던지고 말았다. 병에 맞은 남자는 바보같은 목소리로 비명을 질러대며 몸에 박힌 유리조각들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그런 걸 왜 이제 와서 말해! 오늘 널 볼 이유가 전혀 없었잖아! 진짜 이 개새끼씨발새끼…"


현기증을 느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오늘은 이사한 집으로 돌아가서 푹 자고, 내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선 그 후에 생각하기로 했다.


"잠깐만."


지배인의 배웅을 받으며 레스토랑을 나가는 참에 남자에게 팔을 붙들렸다. 


"나 아니면 털어놓을 인간도 없잖아. 누구한테 말할 건데? 나는 150년 뒤의 미래에서 왔어요, 나는 인간이 아닌 바이오로이드에요, 뭐 이러면, 진지하게 들어줄 놈들이 있을 것 같아? 잘 쳐줘야 미친 년 취급이야."


"내가 왜 누구한테 말할 거라 생각하는데?"


"아니… 내 말은! 뭐든 좋으니까 머리를 맞대보자는 거잖아. 브레인스토밍. 응?"


"싫어."


"야!"


엘리베이터에 타서 로비층을 누르고 닫힘 버튼을 연타했다. 들어오려던 남자는 토트백으로 후려쳐서 내쫓았다. 엘리베이터 문 너머에서 "이런 우라질 년!" 하고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프런트의 호텔리어들 외에는 아무도 없는 로비 중앙에 남자가 서있었다. 씩씩대고 있던 걸로 보아 계단을 뛰어서 내려온 듯했다. 중간에서 얼마든지 엘리베이터를 세울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빠르게 남자 옆을 지나가서 호텔을 나갔다.


차 키를 돌려받고 주차장에 서있는 내 차에 가니 남자가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그렇다고 놀라지는 않았다. 운전석 쪽에 그림자가 드리워져서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물어봐."


남자는 반 쯤 열린 내 차 문을 밀어닫고, 체중을 실어서 다시 못열리게 막았다. 나는 몇 번이고 다시 열려고 했다. 소리없는 실랑이가 그렇게 5분 즈음 이어졌다.


"그래. 나 멍청해. 그래서 내가 먼저 말해줄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물어봐. 2년간 생각해봤을 거 아냐. 의문점같은 것들. 명쾌한 답은 안되겠지만 아는 선에서 답해줄게."


남자의 눈을 빤히 올려다 보고, 어깨를 툭툭 쳐서 치워냈다. 


문을 열어 운전석에 걸터 앉고 담배를 물었다. 그러자 남자가 뭐하는 거냔듯이 쳐다 봐서, 여봐란 듯이 불을 붙였다.


"너는, 날 어떻게 기억하고 있어?"


"응?"


"친했던 놈들은 없지만." 폐에 연기를 담은 채로 말했다. "이 시대에서 알고 지낸 녀석들은 있었어. 그 녀석들 전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데, 넌 어떻게 기억하냐고."


"네가 그 인간들과 알고 지내기 이전 시간대로 떨어졌으니까, 겠지. 그게 가장 타당하지. 나? 나는 시간 여행자니까…겠지. 너처럼 떨어진게 아니라, 장비를 이용해서 자발적으로 시간대를 옮겨 다니는 거고. 이상할 게 없는데?"


"너야 차원을 옮겨 다닐 수 있다고 하니 그렇다 쳐. 내 말은 그거야. 혹시 내가 떨어진 곳은, 내가 살던 차원이 아니라…"


"아~ 그거야?" 남자가 제 이마를 탁 쳤다. "네가 원래 살던 차원이 아닌 다른 곳이라서 널 알아야 할 이들이 모르는 거다? ……그래서, 또 150년 뒤에 나타날 폐하가 내가 알던 폐하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게 걱정인 거지?"


바로 핵심을 짚어줘서 고마웠다. 남자답지 않게 시원시원했다. 그렇다. 나는 지금 그 부분을 걱정하고 있다. 생각해 볼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누구의 기억에도 없다는 건 내가 그들과 관계를 맺기 전으로 떨어졌기에 그렇다 쳐도, 분명 처음 떨어졌을 때와는 다른 게 존재한다. 


먼저, 외딴 시골… 첫번째 폐하가 자살하셨던 인근의 차도로 떨어졌었고, 이번에는 잘 알던 공원, 남자에게 훈련받던 곳으로 떨어졌다. 첫번째의 나는 이 즈음에 폐하를 찾으러 미친듯이 뛰어다녔고, 결국 폐하를 찾은 건 남자였다. 그리고 나도 자살하려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좋은 차와 집을 샀다. 다르다. 처음과는 다르다. 세부적인 것이 다르다. 그러니까 여기는 기존에 내가 존재하던 차원이 아니라 다른 차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의 나는 기존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존재…


"영화랑 드라마를 너무 본 거 아니냐?"


내 어깨에 팔을 얹은 남자가 사고를 정지시켰다. 


"여긴 네가 살던 그 차원이야. 넌 어디 다른 엄한 차원에 떨어지지 않았어. 그러니까 걱정 마. 폐하는 또 나타나고, 그 폐하는 네가 죽도록 사랑하는 그 폐하가 맞아."


"…납득이 안 돼."


"뭐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뭔가… 세계의 법칙을 몇 가지 간단하게 어겨버린듯한 감각이야."


남자는 키득거리다가 내 입에서 담배를 빼내고 제 입에 물었다.


"물론이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야 될 녀석이 인간이 득시글 거리는 곳으로 갑자기 떨어지게 됐는데, 고작 법칙 몇 가지를 무시한 수준이 아니지."


"그… 왜, 그런 건 없는 거야? 모순되는게 존재해서 문제가 생긴다던가…"


"이제 영화는 그만 봐라… ㅋㅋ 뭐, 앞으로 등장할 영화들도 다 똑같은 것들이겠지만. 야. 나는 멍청해서 나를 설명할 수가 없다면, 너는 애초에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을 겪고 있어. 시간과 차원을 넘나들게 해준 우리 닥터도 너에 대해선 절대 설명할 수 없을 거야. 생각해봤자 머리만 아픈 일이란 말이야. 그리고, 그게 중요하냐? 중요한 건 네 폐하지."


"당신… 당신은 그런 적 없어? 시간에 모순을 일으켜서 문제가 된 적이 있다던가…"


"없어. 내가 아는 한에선."


"지금의 청이는 당신을 알아. 어릴 때도 할머니일 때도 알았어. …그때와 지금의 청이는 같은 청이야?"


"아나… 아르망. 네가 청이라 부르는 그 애와 내가 처음 만난 건 2017년이었어. 이 차원은 '2017년에 나와 만난 청이.'가 있게 됐고, 그 이후로는 2017년으로 간 적이 없어. 됐어? 엄한 짓을 해서 다른 차원으로 갈라져 버린다는 영화같은 일도 없었어. 시간 모순? 가능이야 하겠지. 근데 일으킨 적은 없어서 몰라. 누구는 시간여행 자체가 시간 모순이라고 하겠지만, 난 멀쩡히 시간과 차원을 돌아다니고 있어. 유감스럽게도 나는 가방끈이 짧아서 우리 닥터처럼 말해줄 수도 없어. 의심해도 돼. 내가 시간여행자라는 것도 또 의심해도 돼. 증명할 방법은 없으니까."


"납득이… 전혀 안 돼…"


"현실을 받아들이기엔 2년으론 모자랐나. 간단하게 생각해. 아르망. 넌 다시 처음부터 살게 된 거야. 원점을 오르카가 아니라, 2019년에 둔다면 말이야. ……내 생각은 그래."


남자가 레스토랑에서 지나간 150년을 털어내야 한다고 말한 건, 이런 뜻이었다.


"정말로…"


"다만, 네가 지나왔던 시간은 분명히 존재했던 시간이야."


라고 말한 남자는 내게 달려들더니, 관자놀이를 강하게 후려쳤다. …그러려는 걸로 보였다. 반사적으로 몸을 숙인 나는, 내 관자놀이에 이상한 걸 가져다댄 남자의 손을 잡고 고개를 들었다.


"172년. 음. 역시."


"뭐?"


"네 뇌가 열화된 기간이야. 우리 차원에선 이걸 나이로 삼았어."


"…내 뇌가, 172년 만큼이나 열화 됐다고? 그게 내 나이라고?"


"그래. 이건 그걸 알려주는 장치야."


남자가 들이밀어 보인 것은 무선 이어폰 케이스 같이 생긴 물건이었다.

그 장치란 것의 중앙에는 푸른색으로 172라 적혀 있었다.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남자는 자신의 관자놀이에도 그 장치를 가져다댔다.

그리고 다시 보였다. 이번에는 2581이라 적혀 있었다.


"이게 내 나이."


"2581살…?"


"널 만났을 때가 2513살인가 그랬으니까, 너한테는 150년이, 나한테는 대략 70년이었네."


"…어째서?"


"여러 차원을 돌아다닌다고 말했잖아. 차원마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달라. 설명은 바라지 마. 나도 살면서 알게 된 거니까."


"하…하하…"


겨우 정신을 부여잡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자 남자가 놀라며 누가 첫차로 포르쉐를 뽑느냐고 헛소리를 해댔다. 돈을 많이 벌어서 샀다. 이왕 사는 거 좋은게 좋은 거니까. 


"이야. 그러고 보니 포르쉐에, 발망 코트, 프라다 백이네? 정신을 못차리는 와중에도 적응력이 끝내주는구만. 한 번 살아봤다 이건가? ㅋㅋ 돈은 어떻게 번 거야?"


나는 영혼없이 답했다.


"코인. 주식. 부동산 등등. 크게 벌 수 있는 방법 전부."


"대박 ㅋㅋ 어떤 의미에선 너 진짜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차를 몰아 대로로 나왔다. 남자는 은근슬쩍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대로 인근의 크리스마스 빛으로 물든 번화가에서 아리아나 그란데의 Santa Tell Me가 들려왔다. 연인들의 새된 소리도 미약하게 들렸다.


"나이는 그대로 먹은 상태라. 미래같은 과거라 해야 하나." 열린 차창에 턱을 괸 남자가 말했다. "ㅋㅋ 야. 꼭 그거같다 ㅋㅋ. 게임."


"…넌 씨발 이게 웃겨?"


"살짝은? 게임은 게임인데, 코인 수가 제한된 게임이구만. 어디보자. 네가 세번째 폐하를 보게 되면 대략 300년이니까… 8개인가? 아, 실질적으론 7개군."


"또 무슨 헛소리야."


바이오로이드의 기대수명. 알고 있냐?"


기대수명?


"천년이야."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멋대로 오디오를 조작했다. 

거리에서 흘러들어오는 음악과 라디오 방송 소리가 불협화음을 자아냈다.


"이번 150년을 지난 다음에, 또 다시 떨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잖아? ㅋㅋ 코인 수가 제한된 게 아니라 타임어택일지도 모르겠군."


"…아하."


남자의 비유는 그럴듯 하다고 생각했다. 시간 아까운 줄 모르고 인생을 곧잘 게임에 비유하는 놈들은 널렸지 않은가. 


어쨌거나, 남자의 비유는 그럴듯 한거지, 적절하지는 않다. 게임에는 제작 의도와 나름의 철학이 있는 반면, 인생에는 없으니까. 있더라도 인생이란 게임의 제작 의도와 철학 따위 알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좀 더 적절한 걸로 정정해준다.


간단하다. 내게 일어나는 현상이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면, 비과학적이고 비현실적이며 미신적인 것으로 설명하면 된다.


"저주." 나는 나지막이 내뱉었다. "게임이 아니야. 이건 저주야."


"이게 또… 됐다."


"닥쳐. 누가 내린 저주인지는 모르니까."


"그러냐. 난 또 걔 얘기 하는 줄."


"아니야."


"인간은 아니겠지."


"그렇겠지."


"그러면… 아하 ㅋㅋ 음. 저주라, 괜찮네. 누가 내린 저주인지 알 것 같아."


"…누군데."


"지배자."


"지배자?"


"그래. 세계의 지배자. 사랑. 네게 저주를 내린 건 사랑이야."



미친 새끼.









* * *








"그래도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야."


이사한 집으로 가기 전, 잠깐 공원에 들렀다. 찾는 이 한 명 없는 공원은 무서우리만치 조용해서 으스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젠 없어져버린 과거에서 아직도 허우적대고 있나 싶었거든. 좋은 옷, 좋은 차.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꼭 폐하도 신경안쓰는 것 같아 보일 정도야."


"아까, 저주라고 했잖아."


"어? 어어."


왠지 당황한 남자가 슬금슬금 벤치 끄트머리 쪽으로 거리를 벌렸다.


"저주를 내린 건 사랑이라고 했었지."

"어어. 진지하게 들을 줄은 몰랐다야..."

"진지하게 안들었어. 그럴듯해서 하는 말이야."

"뭔데?"


하늘 방향으로 연기를 뿜고, 담배를 벤치에 비벼 껐다.


"저주받을 년인게 맞는 것 같아서. 덜떨어진 추측일 뿐이지만… 진짜 저주라는 게 있다면, 처음, 내가 처음 떨어진 원인도 알 것 같아."


"말해봐."


"내가 먼저 저주해서야."


"으응?"


"내가 복원 개체던 시절에, 그랬거든. 한 번 말한 것 같은데? 폐하와 콘스탄챠를 진심으로 축복하지 못했다고. 원인이라면 그걸 거야. 그런 내가 괘씸해서, 한번, 그리고 이번까지 두번째, 과거 시간대로 떨어트리신 거지. 네가 말하는 그 염병할 것이."


"그…그랬다고 했지."


"시간이 지나서 난 내가 죄인인 것도 잊고 있었어. 그냥 죄도 아니라 원죄를 저지른 주제에. 아하. 이제 다 기억났어. 그런 주제에… 그런 주제에 폐하를 사랑한답시고 두번째 오르카에선 그런 짓까지 저질렀어. 정말로 저주받을만한 년이야."


"너무 그러지 마."


뻗어오는 남자의 팔을 쳐내고 일어섰다.


"뭘 너무 그러지 마야. 그냥 해본 소리야. 옛날처럼 과거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을 거야. 그리고, 사실상 없었던 일이 됐잖아? 전부. 나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지. 다르게 말하면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겠지. 그게 오히려 마음이 편해."


"오… 오오…"


"이게 씨발 다람쥐 챗바퀴 도는 거마냥 반복되고 있는 거라 해도,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세부적인 게 달라지는 건 알겠어. 2019년, 2020년에 일어났었던 사건이 그대로 일어난 것도 확인했어. 난 동일한 시간대를 한 번 더 사는 것 뿐이야. 지금의 나는 그때랑 다른 모습일 뿐이야. 그렇지?"


"…"


"왜 대답을 안해?"


"어, 어어… 그래. 이야~ 보기 좋네~ 파이팅 넘쳐서 아주 좋아. 그럼그럼. 열심히 해쳐나가서 콘스탄챠를 구하러 가렴. 안그러면 다음 폐하도 죽을게 확실하잖아. 그걸 알고 있다면 마땅히 구해줘야지."


그래. 그 부분이 마음에 안든다. 만약 폐하가 다음에도 그런 꼴이 된다면, 그것은 콘스탄챠가 죽어서다. 즉, 나는 폐하를 지키려면 콘스탄챠부터 지켜야한다.


어디까지나 다음에도 똑같다는 가정 하에서다. 


"너 왜 다음 폐하도 죽을 거란듯이 말하는 건데?"


"너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당연히 똑같이 반복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맞지 않냐? 첫번째도 두번째도 똑같았잖아. 그럼 세번째도 똑같이 바다 속에서 철충이 습격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맞지. 그러는 편이 리스크를 관리감수 하기에도 좋잖아. 뭐 이번엔 다를 거라고 회피하는 것보다야. 안그래?"


"…그래. 그렇지."


"그럼 선택해야겠군."


"뭘?"


"폐하의 사랑과 목숨. 둘 중에 하나. 이번에도 네 폐하는 콘스탄챠를 사랑할 것 같지 않아? 난 그럴 것 같은데."


이 남자는 무슨 소릴 하는 거람?


"둘 다 가질 거야."


"하?"


"폐하도 지키고 사랑도 가질 거야. 내 거로 만들 거야. 그리고 존나게 따먹을 거라고. 알아들었어!?"


"허어…"


공원에서 나가려는 나를 남자가 다시 불러세웠다. 뭐가 더 할 말이 있는가 해서 돌아보니, 둘 다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재수없는 소리나 지껄였다. 둘 다 하나라도 얻기 어려운 것들인데, 다 가질 수야 없는 노릇이라고. 


지랄하지 마라. 나는 한다. 나는 씨발 한다면 하는 년이다. 폐하의 목숨을 지키는 건 물론이고 내가 폐하의 연인이 될 것이다.


"이제는 절대 안 도와 줄거야. 이번에는 이미 도와주기도 했고." 


남자가 말했다.


"벌이야. 아직 너한테 화난 부분이 있거든. 음, 그래. 장갑은 계속 너 써라. 몸을 지킬 장비는 있어야지."


"나도 폐하를 죽인 새끼한테 도와달라고 할 생각은 없어. 그런데, 괜찮아? 장갑 나 줘도. 네가 거느린 바이오로이드들의 유품이라며? 유품이란 게 아무한테나 막 줘도 되는 거야? 니네 아가씨들이 알면 저승에서 통곡하는 거 아냐?"


"이미 신나게 써놓고 뭔 소리야. 너 써. 이젠 없으면 허전하잖냐. 난 기억하고 있어. 네가 우리 티아멧을 인형마냥 안고 자던 거. 그리고 임마. 우리 아가씨들은 그 정도로 안 슬퍼해. 슬픈 축에도 안 들어."


"그래?"


"그래. 그보다 더 한 짓, 많이 저질렀거든."


그럼 잘해봐라. 꼭 해주하길 바라. 라고 말한 남자는 불어온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종종 집회소에도 가니까 자기 보고싶거든 찾아오라면서.


그럴 일은 없다. 

그곳엔 청이가 있으니까. 


모든게 원점으로 돌아와 버려서 좋은 점이 있다면, 그 아이다. 나는 그 아이에게, 존재 자체가 죄였다. 그저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분명, 그때와 같아질 것이란 직감이 든다. 그런 미래가 될 것이란 직감이 든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청이를 찾아가지도 않는다.

이제는 없었던 것이 된 한때의 사랑을 부수지 않기 위해서도. 

그녀가 품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도. 


나는 공원을 나서며 그녀와의 관계에 끝을 고했다. 맺어진 적도 없는 관계에.


나는 살아간다. 다시 한 번, 첫번째와는 다른 삶을 살아간다.


마지막에는 그 삶을 바쳐서, 폐하를 뵈러 간다.


내게 내려진 저주의 해주법은 폐하가 살아남는 미래. 그것도 저항군이 온전한 상태로.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타당하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저주해버린 상대를 구원한다면, 분명 세계의 지배자께서도 고개를 끄덕여주시지 않을까. 


물론 저주같은 건 없다.  미신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난 그런 건 안 믿는다. 그저 납득할만한 자기암시적인 설명을 필요로 할 뿐이다. 


이번에 모두 끝낸다. 다시 떨어지는 일 따위 없다. 네번째 폐하를 보는 일 따위 없다. 그러니 남자의 바이오로이드의 기대수명이니 뭐니 하는 개소리도 신경 쓸 필요 없다. 


공원을 나서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하자, 이제 막 자정이 된 참이었다. 날짜는 바뀌어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구나. 첫번째 2021년은 어떤 크리스마스였었지. 나는 오늘 내리는 눈을 보며 또다른 오늘이었던 크리스마스를 머리 속에 그렸다.






* * *






두번째 2051년. 크리스마스 이브.


이 때까지의 시간은 딱히 특기할 만한 것이 없다. 바이오로이드 등장 이후에 비하면 너무나 평화로웠고, 그렇게나 평화로워서 어쩐지 공허하기까지 했다.


카페 사장이던 때와는 달리, 비싸게 먹고, 비싸게 운전하고, 비싸게 잤다. 내가 새로 산 집은 뷰가 좋아서, 하루하루 아침에 기상하는 맛이 있었다. 그 집에서 내내 살았다. 


정신건강도, 신체건강도 모두 좋아져서, 가끔 거울에 비치는 내 얼굴은 늘 밝았다. 그래도 웃지는 않았다.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럴 필요가 있어서 사치스럽게 지낸 것이다. 폐하를 위해서라면 나부터 챙겨야 하는 건 당연하고, 2052년 이전의 사회에서 부유함 만큼 견고한 갑옷은 없었으니까. 


그 갑옷은 두르는 자에 따라서 더욱 견고해진다. 요컨대, 나같이 한 외모하는 년이 명품을 두르면 그 누구도 감히 접근할 엄두를 못내지만, 술집년 같은 것들이 명품을 둘러봐야 똥파리는 꼬인다. 내가 포르쉐를 타면 부유층 자제 즈음으로 보지만, 다른 년이 타면 카푸어로 본다. 그런 이야기다.


똥파리라고 부르기엔 미안한 몇몇 남자들이 대쉬해오는 일도 적지 않았다. 물론 모두 거절했다. 가끔 과하게 질척거리는 놈들은, 어디 한군데 부러지면 정신을 차렸다. 


누구에게도 관심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폐하 단 한 명이다.







* * *







두번째 2060년. 크리스마스 이브.


평화로운 시간은 끝났다.









* * *







두번째 2075년. 크리스마스 이브.


이번에는 남자에게서 '미끼'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유령같았던 그때와 달리, 바이오로이드로 살아가게 됐다. 제작된 적 없는 바이오로이드. 그것도 아르망 추기경. 사회망에 포착되면 기업이 기를 쓰고 회수할 것은 뻔했기에, 나는 도저히 인간이 살 수는 있는지 의심이 되는 곳에서만 살아갔다. 복장은 다시 올블랙이 됐고, 심심하면 칼과 총이 날아오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조금이라도 편해질 방법은 있었다. 예를 들면 그 샌님. 내가 죽이지 않아 두번째에선 2075년까지 살아있던 그 놈은, 신나게 바닐라를 강간하고 있었다. 안전해지고 싶다는 충동에 못이겨 찾아간 그 놈의 집에서 목격한 것이었다.


그래도 죽일 생각은 들지 않았고, 저런 새끼한테 내가 왜 죄책감을 가졌던 걸까, 하는 의문은 들었다. 


첫번째의 나를 붙잡고 뒤흔들고 싶다.


인간은 역겹다.








* * *







두번째 2095년. 크리스마스 이브.


남자의 가르침 중엔 '위협이 되는 요소는 찾아가서 없애라.' 도 있었다. 그래서 첫번째의 나는 부러 원더랜드를 찾아가 발본색원했던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강해지고 변해버린 내게 있어서도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하루하루였기에, 찾아가서 없앤다는 과감함을 보일 수는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자의 가르침은 정확했다. 이번에도 원더랜드가 나를 노렸고, 원더랜드의 위협이 첫번째와는 비교도 안됐다는 점에서.


시작은 리앤이었다. 이번에도. 똑같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짐작 자체는 했지만, 역시나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남자에게 마틸다 소리를 듣던 첫번째의 내 모습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두번째의 나는 아르망 추기경과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리앤은 나를 특정했던 것이다. 어떻게 안놀라겠는가.


"찰리 다운. 찰리 다운."


콜사인이 찰리인 놈을 처리하고 상황을 살폈다. 장소는 원더랜드. 어쩌다 원더랜드로 몰렸는지는 몰랐다. 그렇게 된 과정이 기억에 없었다. 그만큼 정신이 없었다. 첫 번째 때와는 달리 하나같이 4안식 투시경을 쓰고 있는 놈들이 한가득이었다. 확실히 군 출신이라는 놈들 다웠다.


 전투력이 어마어마했기에, 왜 연합전쟁때 소규모 전투 한정으로 바이오로이드가 쓸려나갔는지를 잘 알 수 있었다. 날 노리는 방법들 중엔 아주 기상천외한 것들도 있어서, 목숨이 날아갈 뻔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전투에 한해서는 가능한 예지도 먹히지 않았다. 뭐, 당연하다. 상대는 인간이다. 변칙성의 총체같은 놈들이다. 그런 놈들을 계산하는 것보다 목에 칼이 들어오는 게 더 빨랐다. 인간에게 예지는 오히려 방해였다.


녀석들은 날 잡겠다고 바이오로이드도 끊임없이 투입했다. 범죄 사양이라 불리던 년들 말이다. 이년들은 인간에 비하면 정말 상대하기 쉬웠다. 


그리고 원더랜드의 지하에 있던 녀석들. 남자가 죽여놔서 상대하지 않아도 됐던 녀석들도 상대했다. 


사냥개처럼 다뤄지던 리리스, 외설적이고 거친 그래피티로 점철된 날개를 가진 스노우 페더, 얼굴이 피어싱으로 범벅된 하치코. 이녀석들도 인간에 비하면 쉬웠다.


꼬박 하루가 걸려 원더랜드를 정리했다. 왼쪽 팔이 날아가서 수복 캡슐을 삼켰다. 남자가 줬다. 그날, 헤어지기 전에. 스무 개 쯤 받았는데, 이젠 다섯 개도 안남았다.


죽어있는 원더랜드 놈을 내려다 봤다. 복면과 투시경으로 덮힌 무기질적인 얼굴은, 죽기 전이나 죽은 후나 똑같아 보였다.


인간은 두렵다.








* * * 







두번째 2098년. 크리스마스 이브.


크윽, 신음하는 사장을 쓰러트려서 발로 눌렀다. 리앤은 진즉에 죽여버렸고, 이제는 사장 하나 남았다. 드디어 안전하다. 안전해지기까지 장장 3년이 걸렸다. 첫번째 때는 존 윅같은 얼굴이라 존 윅처럼 싸울 것 같던 남자가 그 막강한 화력으로 모두 쓸어버려서 어이없게 끝났지, 정작 존 윅처럼 싸운 것은 나였다. 안전해졌음에도 왠지 화가 나서, 사장의 왼팔에 리리스 전탄을 박아버렸다.


그런데도 사장은 한마디도 안했다. 처음 제압 당할 때랑은 달리 신음도, 날 노린 이유도. 아무것도 안흘렸다.


"당신이, 당신은 모르는 당신이 그랬어." 라고 나는 말했다. "앨리스에게는 이상한 나라로 보일 거라고. 맞아. 정말이야. 이상한 나라네. 혹시, 루이스 캐럴은 그런 경험이 있던 게 아닐까? 갑자기 과거의 시간대로 떨어져버리는 경험."


"…헛소리 말고 빨리 끝내라."


그게 남자의 마지막 말이었다.







* * *






두번째 2099년. 크리스마스 이브.


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찾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도, 딱 한 번.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그저 멀리서 훔쳐보듯 해도 좋으니까.


한 번만 보자고 생각했다. 이 정도 시간이 지났으면, 내가 모습을 드러내도 그 아이의 운명적인 사랑에 손상을 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기억을 더듬어 그 아이가 살고 있을 부촌으로 가서 집을 찾았다. 첫번째와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모양을 한 집이 있었고, 안쪽의 소정원에는 콘스탄챠와 리제가 있었다.


고양이는 없었다.


살고 있었어야 할 노인들도 없었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살고 있었다.


뒤를 돌아 부촌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멸망이 찾아왔다.


순식간이었다. 14년이란 시간은.


한 번 150년을 살아봤으니 두번째 150년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고 느꼈지만, 이때만큼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 적은 없었다.








* * *







두번째 2115년, 그리고 217x년.


의미가 사라진 크리스마스 이브.


첫번째 같이는 굴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여전히 바이오로이드는 싫었다. 아무래도 깊게 밴 관성은 그렇게 쉽게 고쳐지지는 않는 듯하다. 


이번에도 꽤 많은 녀석들이 내 손에 죽어나갔다. 오해 말기를. 이번에는 살려고 죽였다. 일궈내는 것보다는 약탈하는 편이 효율이 좋았으니까.







* * *







두번째 217x년. 등대 앞.


"안녕. 폐하."


나는 다시 폐하와 만났다.

폐하는 나를 처음 만났다.







* * *






반갑습니다. 글싸개입니다.


대화문 위주로 써보면 분량이 적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더 길어져 버렸습니다...


모자람을 느낍니다. 더 노력해야겠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신 경우엔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