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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당당한 선언. 

개선 장군처럼 뻣뻣이 치들은 고개에 나는 지금 그녀가 누구의 죽음을 말하는 것인지 잠시 헷갈렸다.

살면서 제법 많은 죽음을 봤다고 자신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마저도 너무 어려웠던 게냐?”

 

 

 

확실히 어려운 얘기라면 어려운 얘기다.

 

 

 

“...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허, 죽으러 가는 게 죽으러 가는 거지, 그럼 뭐, 말 속에 신묘한 도리라도 숨겨져 있단 말이냐?”

 

“... ...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될 것 같거든.”

 

 

 

죽는다는 건 백 보 양보해서 이해한다고 하자.

그럼 어디 가서 혼자 하면 될 것이지, 그걸 나에게 말하는 건 또 뭐란 말인가?


설마 나보고 죽여달라던가, 죽고 나면 장례를 치뤄달라던가... 그러는 건 아니겠지?

철충들에게도 장례 문화가 있을 지 생각하던 나를 보며 여왕이 한숨을 지었다.

 

 

 

“하아... 또 쓰잘떼기 없는 상상을 하고 있을 게 훤히 보이는구나.

너랑은 관계 없는 일이테니 안심하고 있거라.”

 

“이미 그런 말을 나에게 한 시점에서 관계가 있는 거 같은데...”

 

“말도 없이 훌쩍 떠버리면 네가 쓸쓸해할 것 같아서.”

 

 

 

감고 있는 여왕의 눈이 초승달 같은 호를 그리며 웃었다.

 

 

 

“그리고 너라면 알지 않느냐.”

 

“뭘.”

 

“나를 죽일 수 있는 자가 이 땅에 둘이나 있겠느냐?”

 

 

 

이내 그녀의 눈은 다시 잠잠한 일직선을 그으며 담담하게 변했다.

저 담담함이 왠지 모르게 소름 끼쳤다. 


그녀 말대로,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 짓을 할 만한 존재는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게 이 비참한 현실을 다시 일깨웠다.

아직 이 땅에는 괴물이 한 마리 남아 있다.

 

 

 

“... 교황에게 가겠다는 거군.”

 

“내 오랜 친구가 이리도 난장판을 벌였는데, 가서 말려보기라도 해야지.”

 

“교황이 너를 죽이지 않을 가능성은?”

 

“놈이 날 죽이지 않으면 내 스스로 죽을 것이다.

그 녀석이 나를 살린다는 건 날 어떻게든 이용해 먹겠다는 뜻이니까.”

 

“... ...”

 

“후후, 감사히 여기거라. 놈이 날 철충으로 개조 한다면 너희들 전부가 덤벼도 이기지 못할 테니.”

 

 

 

일말의 떨림조차 없는 여왕의 눈을 보며 나는 지난한 말 대신 침묵으로 답했다.

 

죽음을 달관한 듯한 초연함.

그게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저 여왕이 죽는 게 무섭다고 벌벌 떠는 모습은 오히려 상상하기가 힘드니까.

 

단지 이 이야기의 끝에 자기 자리는 당연히 없을 거라 생각하는 저 태도.

내 마음에 갈퀴처럼 걸려 있는 것은 이 기묘함이었다.

 

 

 

“살고 싶지 않아?”

 

“그럼 죽고 싶어 하는 작자가 있더냐? 실로 멍청한 질문이구나.”

 

“멍청한 생각을 하는 사람에겐 멍청한 질문이 제격이거든.”

 

“지금 이 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네가 어찌 아느냐?”

 

 

 

여왕의 어깨 너머에서 붉은 스파크가 튀었다.


그 불꽃은 화려하진 않지만 보기만 해도 섬뜩해지는 깊이가 있다.


하지만 그런 거로 겁을 먹기엔 나도 여기서 너무 오래 살았다.

 

 

 

“지금 무슨 생각하는 지는 몰라도, 그게 죽으려는 생각이란 건 알지.”

 

“내 목숨이 네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러느냐?”

 

“... 글쎄다.”

 

 

 

교류가 없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많지도 않았던 추억.

여왕은 지금껏 나와 거리를 두며, 내게 도움이 필요한 시기에만 조용히 나타나 나를 도왔다.

대원들에게도 마찬가지. 오르카 안에서 그녀는 철저한 외부인을 자처했다.

 

다만, 나는 누군가가 내 손에서 떠나는 것에 진저머리가 난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죽음을 각오해야 할 만큼 교황이 강력하다는 걸 믿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지.

 

단 한 번도 뜬 적 없는 그녀의 눈은, 아직도 변치 않고 나를 향해 눈썹을 치들고 있었다..

 

 

 

“네가 세 번째를 죽임으로 교황의 앞길을 막은 것은 맞다.

하지만 애초에 세 번째의 도움이 없더라도 놈은 스스로 실험을 마칠 수 있다.

그럼에도 추기경에게 맡긴 건 다른 계략을 꾸미고 있던 건지, 아니면 그저 유희였던 건지, 나로서 알 수 없다. 

어느 정도 짐작은 간다만.”

 

“... 그래서 지금 가야 한다? 실험을 막으려고?”

 

“놈이 실험을 마치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뻔하잖느냐.”

 

 

 

별의 아이를 만나본 적 있는 나는 알고 있다. 그것들은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간이 밀려오는 해일을 보고 대항하지 않듯이, 그 존재의 움직임에는 저항이란 개념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만약 교황이 그런 존재 중 하나가 된다면, 이 이야기의 끝은 보나마나 베드 엔딩이 될 게 뻔하다.

 

 

 

“마침 세 번째 덕에 외신이 만들어 놓은 제약의 심도가 약해졌다. 궁금한 게 있다면 말해주지.”

 

 

 

여왕은 선심 쓴다는 듯이 가슴을 활짝 피고 뽐내듯이 말했지만, 나는 별 달리 물어볼 말이 없었다.

 

내가 꾼 꿈 덕에 일이 어떻게 되는지 예상이 가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걸 알 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진짜로 없지. 살아 있는 우주 괴물하고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별로... ...”

 

“하?”

 

“... 궁금한 게 없을 것 같다.”

 

 

 

내 말에 여왕은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의 아이는 이 행성을 죽일 지 말지 결정하려고 하고 있고, 교황은 별의 아이가 되려 한다.

이 이상으로 해줄 말이 있어?”

 

“... 요약을 잘 하는구나.”

 

“그럼 그게 끝이지. 

난 그걸 막아야 하고, 못 막으면 인류 멸종. 깔끔하네.”

 

“묻고 싶은 게 없는 거냐?”

 

“아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궁금한 게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 남아 있는 철충이 몇이나 되는지, 제작자가 죽은 마당에 새로운 철충이 나올 수 있을 지, 카르디아처럼 이야기할 수 있는 철충이 또 있는지,

다만 질문을 차곡차곡 정리할 수록, 그것들은 둘 중 하나로 구분된다는 걸 깨달았다.

 

하나는 알아도 도움 되지 않는 자잘한 질문들이고,

 

 

 

“내가 교황을 죽일 수 있을까?”

 

“... ...”

 

 

 

다른 하나는, 내가 물어봐도 알 수 없는 질문이다.

 

내 물음에 여왕은 말을 줄였다.

지혜로운 선택이다. 어쩔 땐 침묵이 수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을 걸 전해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여왕이 나에게 전달한 것은, 미지였다.

 

자신은 대답해줄 수 없다는 것.

 

그토록 많은 걸 알고, 또 배울 수 있는 존재임에도 그녀는 내 질문에 확답하지 못했다.

내가 지금 그녀에게 묻고 싶은 건 그런 것들이다. 이를 테면,

 

 

 

“어떻게 해야 별의 아이를 설득할 수 있을까? 이 행성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보이지 않는 신과 이야기하는 방법이나,

 

 

 

“교황이 별의 아이가 된다면 우리도 가능하다는 건가? 추기경이 했다던 실험은 대체 뭐였지?”

 

 

 

백 년 간 우위를 놓친 적 없던 적과 동등해지는 방법,

 

 

 

“만약 내가 교황과 싸운다면, 몇 명이나 희생해야 하지?”

 

 

 

생명을 저울질 하는 방법 같은 것들.




"... ..."




그 모든 것의 대답은, 예상했듯이 침묵이었다.


나는 그 침묵을 양식 삼아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너무 복잡한 고민은 쓸모가 없고, 너무 너절한 고민은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니까.




"그러니까... 정리를 해보자.

여왕은 교황을 만나러 가 시간을 벌고, 나는 그 사이에 준비를 해 놈을 친다. 그거 맞지?"


"... 그래. 아무리 교황이라지면 네가 운용할 수 있는 정도의 병력이라면 충분히 격퇴시킬 수 있을 게다."


"그럼 다행이지. 그럼 다행인데..."


"왜 그러지?"




나는 겨우 파편화된 걱정들을 문장으로 내뱉을 수 있었다.




"... 그럼 몇 명이나 죽을까?"




생각을 갈무리 한 끝에 결국 내 모든 질문이 단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나왔음을 깨달았다.


‘<라스트 오리진> 밖의 이야기’


조촐하기 그지 없는, 한 삼류 어플이 어떻게든 덮고 넘어가려 했던 이야기들이 나의 마지막 궁금증이 되었다.

 

 

 

“... ...”

 

 

 

여왕은 꾹 다문 입으로 바닥을 응시했다.

감긴 눈이 어딜 보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나를 피하려고 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네가 얼마나 많은 걸 알고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것들에 대답해줄 수는 없을 거야.”

 

 

 

그 말에 여왕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반응했다.

 

 

 

“... 하긴, 환생자에게 내가 무슨 오지랖을 부린 건지.

너라면 이미 모든 걸 알고 있겠지. 아닌가?”

 

 

 

여왕은 기계적으로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 보았다.

청초하게 움찔거리는 눈썹.

감겨 있는 눈은 금란을 연상시키며 익숙하게 다가왔다.

 

물론, 그녀는 금란이 아니었다.

철충도, 인간도, <라스트 오리진>의 등장인물도 아니었다.

그 말은, 그녀는 내가 아는 그 누구도 아니었단 얘기다.

 

 

 

“나도 모르는 게 있다.”

 

 

 

아니, 사실 모르는 게 아는 것보다 많지.

나는 여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왕. 한 가지 묻겠다.”

 

“뭐지?”

 

“내가 아는 이야기에, 네가 있었을 것 같나?”

 

 

 

내 물음에 여왕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고 말했다.

 

 

 

“있었으면 좋았겠구나.”

 

 

 

확신이라기보단 아련한 여운에 가까운 대답.

이런 메타적인 발언, 평소였다면 여기서 멈추고 대화를 끝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이 마지막이라 하니, 마지막 궁금증 정도는 풀어줘도 되지 않을까 하는 허탈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없었다.”

 

 

 

자신과 다른, 확신이 담겨 있는 말에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너는 내가 아는 이야기에 없었다. 카르디아도, 추기경과 집행관, 서기관도.

교황에 대한 것도 그런 게 있다고 넌지시 언급되었을 뿐. 난 녀석의 생김새를 이곳에 와서 처음 봤다.”

 

“그럼 네가 알고 있다는 것들은... ...”

 

“몇 가지 이벤트와 사건사고, 그리고 이 세계관에 대한 난잡한 설정들뿐.”

 

 

 

처음 이곳에 왔을 땐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여왕과 카르디아를 만났을 때도 내가 아는 것들을 사용할 수 있다면 큰 어려움 없이 돌파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점차 커져가는 스케일 속에서, 이 게임이 다룬 이야기의 규모는 한없이 작아질 뿐이었다.

만약 이 게임을 다른 대형 개발사가 만든 것이었다면,

그렇게 해서 내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메인 이벤트를 전부 종결 지어줬었다면,

의미 없는 아쉬움이 침묵 속에서 메아리쳤다.

 

 

 

“... 그래도 너는 레모네이드 일행을 홀로 사로 잡지 않았느냐.”

 

“요행이었지.”

 

“세 추기경도 죽일 수 있었고...”

 

“그나마 알고 있는 이벤트들이라서 정보를 이용했을 뿐이다.

그마저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죽는 건 내 쪽이었을 테고.”

 

 

 

여왕은 나를 복 돋아주기 위해 내 업적을 칭송하듯 열거해봤지만, 그럴 수록 내 여정에 얼마나 큰 운이 따랐는지만 떠올랐다.

 

 

 

“여왕.”

 

“... ...”

 

“이건 어떤 만능 기록서에 적혀 있는 설화 같은 게 아니다.”

 

 


‘<라스트 오리진> 밖의 이야기’

 

<라스트 오리진>은 플레이어의 몰입을 위해 무수한 이야기가 생략되었다.

마치 싫은 기억들을 쓰레기통에 몰아 넣은 것처럼, 이야기를 선택하고 분류해 결국 필터링한다.


'주인공이 나타난 이후로 사망한 바이오로이드는 0명이고, 주인공은 육체적으로 언제든 대원들을 만족시켜줄 수 있다.'


싸구려 신화 속 영웅처럼, 그 주변은 늘 ‘설정’이란 굳건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그 밖에는?


세계 어디선가 죽음에 내몰린 바이오로이드의 역사가 있을 것이고,

철충에 감염된 AGS의 설화가 있을 것이며,

저항조차 못하고 압살 당해 버린 인류의 신화가 있을 것이다.

 

이 땅이 멸망하기까지,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중 어느 것도 알지 못한다.

그런 불쾌한 것들을 알려준 존재는 <라스트 오리진>을 포함해 단 한 명도 없었다.

 

 

 

“만약 내가 교황과 싸운다면, 전면전을 벌인다면 몇 명이나 죽을까?”

 

 

 

그리고 지금, 나는 <라스트 오리진>의 쓰레기통을 뒤지며 지저분한 이야기의 찌꺼기를 모아야 한다.

그게 내가 지금, 유일하게 궁금해 하는 거니까.

 

 

 

“전면전을 벌이지 않고 나 홀로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은?”

 

“... ...”

 

“AGS를 감염시킬 수 있는 존재를 상대로 AGS를 사용하는 게 바보 같은 짓이란 건 알아.

결국은 바이오로이드를 써야겠지. 그런 만큼 이번 싸움만큼은 사망자가 0명이 될 수 없을 거다. 나도 각오는 하고 있어.”

 

 

 

자기 입맛에 맞는 아이를 키우고, 기르고,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온실.

<라스트 오리진>이 만든 이야기는 딱 그 정도다.

 


 

“이미 마음 먹었다. 누군가는 죽겠고, 누군가는 살겠지..

그러니까 알려달라는 거야. 내가 어떻게 해야 사망자를 최소로 줄일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대답을 기대하고 했던 물음은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대원만 해도 그 수가 다섯 자리에 육박한다. 

모두가 실력이 출중한 것은 맞지만 교황이란 괴물 하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

 

게다가 단일로만 상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 밑에 있을 수많은 서기관과 집행관, 아직 남아 있는 철충들도 함께 싸워야 한다.

못해도 수십만 단위의 죽음이 속출할 게 뻔한 상황. 어떤 전술을 사용한다 해도 만족스러운 대답이 나오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 그래. 확실히 아무도 안 죽는 것은 무리다.”

 

 

 

여왕은 내가 생각하던 것과 전혀 다른 규모의 대답을 했다.

 

 

 

“그럼 그걸 2명으로 간추릴 수 있다면 어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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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왕은 나에게 남긴 말을 끝으로 오르카 호를 떠났다.

허공을 손으로 찢어 리멘을 만든 뒤 사라지는 그녀를, 나는 붙잡지 못했다.

그 이상의 것을 바라는 건 욕심이라 생각했으니까.

 

 

 

“2명으로... 끝낼 수 있다... ...”

 

 

 

수십 만이 죽을 싸움을 2명으로 줄이는 것.

적어도 나는 그 이상의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다. 아니, 용이나 마리라 해도 그럴 수는 없겠지.

오직 교황의 성격에 대해 아는 사람만이 세울 수 있는 계획.

인류 역사 어딜 뒤져봐도 그보다 효율적인 전술을 만들 순 없을 것이다.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으며 방 한 가운데에 놓인 소파에 몸을 눕혔다.

푹신한 쿠션. 오소소 솓아 있는 작은 솜털들이 목 뒷덜미를 간지럼 핀다.

풋풋한 세재 향기가 나는 가죽 커버는, 손이 맞닿는 부분의 색이 조금 벗겨져 까끌까끌 거칠었다.

 

 

 

“... 앞으로 일주일이라고 했던가...”

 

 

 

'외신을 설득하려면 증명이 필요하다.'라던가, '교황의 가장 먼저 너를 노릴 것이다.'라던가,

여왕이 나에게 몇 가지를 말해주고 떠났고, 그 중 하나는 시간이었다..

교황이 실험을 마무리하기까지 남은 시간. 추측이긴 하지만 대략 그 정도가 남았을 것이라 말했다.

그러니 좋든 싫든, 우리는 그 안에 끝장을 봐야 한다.

 

소파에서 나는 냄새가 코 끝에서 잘게 으스러졌다.

수천 조각으로 나뉜 향기는, 이 자리에 앉았던 아이들의 수만큼 무수했다.

고작 일주일이란 시간 안에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똑. 똑.

 

그 때 사령관실의 문을 누군가가 두들겼다.

조금 쉬었다가, 다시 두들기는 템포. 

미묘한 차이긴 하지만 저렇게 하는 사람은 한 명 밖에 없다.

 

 

 

“주인님. 계신가요?”

 

 

 

성대에서 시작해 비강까지 닿는, 약간 간드러지는 청량한 목소리.

블랙 리리스가 말했다.

벌써 오후 경호 업무 시간이 된 모양이지.

진중한 목소리로 내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숨소리가 문 너머에서 바람처럼 스며 들어왔다.

 

 

 

“들어와도 돼.”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철컥, 문이 열린 뒤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이 조금 어지러웠다.

 

백발의 머리카락에 백옥처럼 하얀 피부.

호박색 눈동자는 예나 지금이나 황금처럼 반짝였다.

오랜만에 온 탓인가 그녀의 옷깃은 조금 구깃구깃 구겨져 있었다.

 

리리스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평소처럼 내 좌석의 옆자리로 걸어갔다.

두 손을 공손하게 앞으로 모으며, 조금 삐쳐 있는 자기 머리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다듬는 리리스.

 

 

 

“주인님?”

 

 

 

그러고는, 웃는다.

 

어제 했던 것처럼,

엇그제 했던 것처럼,

일주일 전에, 한달 전에, 일년 전에,

 

그렇게 돌아갈 수 있는 최대한 먼 기억으로 가도, 그녀는 언제나 웃고 있었다.

 

 

 

“오늘 별로 기분이 좋지 않으신가요? 얼굴을 조금 찡그리고 계시네요.”

 

“... ... 글쎄다.”

 

 

 

운이 좋다면 나는 일주일 뒤에도 너를 만나고 있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 ‘그렇지 않다면’은 무슨. ‘일반적인 경우’라고 해야지.’

 

 

 

... 나는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지도 모른다.

교황이 노리는 것이 복수라면 복수를 할 것이고, 정복이라면 정복을 하겠지.

부디 그런 날이 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리고, 어차피 이쪽도 충분히 준비해놨다.

세 번째 추기경을 잡은 뒤로도 시간이 제법 지났고.

오비탈 와쳐의 데이터 권한은 이쪽으로 위임시켜놨고, ASG로 정거장도 재활성화 시켜놓은 상태.

한 바탕 전쟁을 하기엔 더할 나위 없는 타이밍이다.

 

 

 

“리리스. 용이랑 마리한테 전해. 오일 뒤에 출발한다고.”

 

“알겠습니다.”

 

 

 

패널로 묵묵히 메시지를 전하던 그녀가 흘리듯이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이겠죠?”

 

“그래. 이걸로 끝이야. 교황만 잡으면 남은 철충 잡는 건 시간 문제니까.”

 

“그럼 주인님이 위험해질 일도 없겠네요.”

 

“그러겠지. 너희가 날 쥐어짜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농담조로 던진 말에 리리스가 큭큭 하고 웃었다.

 

 

 

“후후, 걱정하지 마세요. 살려는 드릴 테니까.”

 

“그 말이 더 무서운 거 알지?”

 

“그래도 기대되지 않으시나요?

이렇게 말해도 제가 주인님을 이겼던 적은 없잖아요. 매번 꿈만 크지.”

 

 

 

메시지를 보내고 난 리리스가 조용히 내 뒤로 다가와 내 목을 끌어 안았다.

 

너무 많이 안겨서 이제는 익숙한 그녀의 턱선이 제자리라는 듯 내 어깨에 착 하고 달라 붙었다.

약간의 틈도 없이 완벽하게 붙어버린 모양새.

하긴, 그렇게 많이 안고, 안겼으니 이렇게 변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입술을 타액으로 적셔 부드럽게 만든 그녀가 내 뺨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러니까 꼭, 다 끝나고 다시 봬요. 주인님.”

 

 

 

나는 그녀의 입술 자국이 남은 왼쪽 뺨을 지그시 매만졌다.

서로 볼 꼴, 못 볼 꼴 다 본 마당에 그런 거로 흥분이 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너무도 오래 만났기에, 너무 오랫동안 함께 있었기에 이게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익숙함이라는 건, 그리도 무서운 것이었다.

 

 

 

“잠시 걸을까요?”

 

 

 

리리스가 나를 자리에서 일으켜 손을 잡고 방 밖으로 끌고 갔다.

 

 

 

“어때요? 옛날에는 여기 복도 불도 제대로 안 들어왔었는데 이제는 대낮처럼 환하네요.”

 

 

 

그녀가 복도 윗면에 달린 LED 등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동으로 닦이는 유리창, 24시간 청소해주는 AGS, 이따금씩 나오는 향수까지.

마치 여행 가이드가 된 것처럼 리리스는 나에게 오르카 호를 알려주었다.

 

그렇게 얼마가 걸었을까, 리리스가 가는 길의 목적지가 점차 명료해졌다.

가는 길에 식당에서 검은색 비닐봉지에 담긴 음료수를 받은 뒤, 그녀는 곧장 오르카 호의 구석진 방 한 켠으로 들어갔다.

리모델링을 하면서 버려진 장소. 사람의 손길이 멈춘 지 얼마나 오래됐는지 알려주듯 구석엔 짙게 쌓인 먼지가 무더기로 있었다.

 

원래 오르카 호의 출구였던 곳. 

갑판으로 가는 엘리베이터가 만들어진 뒤 계단식 출입구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 덕이라고 할까, 대원들 몰래 밖으로 가기엔 그만한 곳이 없었다.

 

리리스는 꾸역꾸역,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환한 빛이 발하는 주변의 전경.

우리는 추기경을 잡은 뒤 재정비를 위해 한반도로 돌아온 상태였다.

익숙한 광경에 나는 오랜만에 고향의 공기를 폐에 가득 담았다.

 

 

 

“잠시만 도와주시겠어요?”

 

 

 

그녀는 나에게 비닐봉지를 넘기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리곤 나를 가볍게 들어 안고 훌쩍 뛰어넘어 버려진 항구 도시에 도착했다.

하지만 리리스는 나를 안은 채 도시를 지나 조금 더 걸어 들어갔고, 마침내 우리는 나무가 울창한 숲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주인님. 여기가 어딘지 아시나요?”

 

“음... 글쎄? 숲?”

 

 

 

인간의 손길이 끊긴 숲은 실로 울창하기 그지 없었다.

확실히 산책하기 좋아 보이긴 하네. ‘잠시’ 걷기엔 지나치게 광활한 것 같긴 하지만.

 

내 말에 그녀는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가는 것으로 답했다.

짙은 그림자로 덮여 있던 숲은 어느새 점차 밝아졌고, 나는 그 이유를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은 절벽이었다.

그것도 내게 아주 익숙한.

 

 

 

“... ...”

 

“이래도 기억 안 나세요?”

 

 

 

리리스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내 표정을 읽은 것인지 다소곳이 미소를 지었다. 




"이 아이들을 보기 위해서라도 꼭 돌아오셔야겠죠?

기운이 너무 없어 보이셔서 일부로 데리고 온 거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주세요. 꼭!" 




그녀가 양 손을 불끈 쥐며 기운을 복 돋았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돌아본 주변.

기억 안 날 리가 없지 않나. 내가 가장 처음 왔던 장손데.

 

 

 

“... 리리스, 음료수 좀 줄래?”

 

“직접 드실 걸로 드릴까요? 아니면 비닐 봉지에 담긴 거?”

 

“비닐 봉지 안에 있는 거.”

 

 

 

절벽의 끄트머리에는 작은 무덤들이 가득 세워져 있었다.

그 한 가운데에 꽂혀 있는 작은 나무 십자가.

우리가 이토록 오래 달려왔음에도 여기는 풀이 조금 무성해진 것 외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리리스가 나에게 건넨 병의 뚜껑을 땄다.

오르카 호에 있는 어린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료수. 그게 가득 담긴 병을 무덤의 옆에 조용히 놓았다.

 

 

 

“... 많이 컸구나. 더치걸.”

 

 

 

나는 내 손뼘 만큼 자란 무덤 위의 풀들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언젠가 내가 직접 땅을 파 만들어주었던 무덤.

비밀의 방에서 죽은 아이들의 시체를 수습하고 모아 빚어낸, 볼품 없는 묘지.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처음 시작됐던 곳이다.

 

 

 

“다녀왔어.”




오랜만에 만나는 탓에 화가 난 것인지, 뾰족한 풀이 내 손바닥을 쿡쿡 찔렀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는 리리스 때문에 아프단 투정도 못 부리겠다.


그래도 조용하긴 조용하네.

내 심지를 굳히게 하기 위해 데려온 곳 답게 주변에는 잔잔한 파도 소리만이 고즈넉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 리리스. 동생들은 일부로 안 데리고 온 거야?"


"전에도 이곳에 온 건 저와 주인님뿐이었으니까요."




리리스는 그 때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내 옆자리에 앉아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향기, 숨을 쉴 때마다 전해져 오는 심장의 맥박,

모두에게 버림 받았던 그 때, 한 줄기 빛이 되어준 사람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진정된다.


그 덕에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굳이 말해줄 필요가 없을 거라고.




'... 그래. 하지 말자. 괜히 걱정할 거야.'




이건 2명만 죽으면 충분한 게임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나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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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걱정할까봐 얘기하는 건데 이 소설, 해피엔딩 맞습니다


(하지만 충분한 나데나데가 없으면 흑화해버릴 지도 모르는데스.)





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