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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이 죽으면 몇 명의 사람에게 인사를 받아야 할까?


나는 잘 모르겠다.

위대한 위인들의 장례 행렬에는 수천 명이 촛불을 들고 황홀한 장관을 만들기도 하고, 어떤 부자는 건물처럼 커다란 무덤을 만들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 수가 0이 되지는 않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한 명이 되지도 말고, 두 명이 되지도 말고,

그저 올 수 만큼, 외롭지 않을 만큼만 되면 좋겠다.

 

 

 

“... ... 리리스.”

 

“예, 주인님.”

 

“이게 대체...”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가 1회차에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많은 아이들의 죽음을 어느 누구도 애도하지 못하게 했었으니까.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기 위해 한밤 중에 도둑처럼 치워버린 더치걸의 가죽들.

비밀의 방에서 한 평생 벽지처럼 살아갔고,

그 생만큼 꼼짝없이 박힌 채 죽어갔을 아이들을 나는 나 홀로 배웅하려 했다.

 

그 날은 새벽이 뜨는 한창인 밤이었고, 또 나 홀로 검은 비닐 봉지에 아이들을 담아 십자가처럼 짊어지고 왔던 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쪽 자리는 다 찼습니다. 다른 쪽으로 안치해주세요.”

 

“아직 8구 더 남아 있습니다. 혹시 자리 있습니까?”

 

“그건 왼쪽으로 가주세요.”

 

“장례 준비는 아직입니까? 곧 각하께서 오신다고...”

 

 

 

지금은, 아니다.

 

내가 홀로 비지땀을 흘리며 짊어지고 올라갔던 아이들의 가죽은, 모두의 손길 속에서 한 장 한 장 곱게 꾸며져 고운 관 속에 안치되었다.

살점도, 근육도 남아 있지 않은 껍질일 뿐이지만 그 위로 향료를 바르는 손길은, 마치 고급스러운 미용실을 연상케 했다.

 

한 명의 아이들에게 수십 명의 대원들이 붙어 눈물을 흘려주었고, 어디서 가지고 온 것인지 모를 고운 국화들이 수십 개의 관 위에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 아.

 

그래.

 

예쁘다.

 

참, 곱구나.

 

몇 가닥 남지 않은 살가죽에도 얼마든지 예쁜 꽃을 꽂을 수 있었구나.

 

 

 

“... 날이 밝네.”

 

 

 

리리스가 내게 국화를 건넸던 것도 이것 때문이었겠지.

나도 모르게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둔 밤, 도둑처럼 기려줘야 했던 아이들의 장례식을 오늘에서야 한다는 사실에.

 

그렇게 어두운 밤, 그렇게 어두운 방에서 꺼내졌음에도 그렇게 어두운 땅 속으로 들어갔어야 했으니, 여린 마음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 ...”

 

 

 

그래도.

 

지금은 날이 밝다.

 

 

 

“컴패니언, 주인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준비하세요.”

 

[알겠습니다, 언니.]

 

 

 

내 옆에서 호위를 서고 있던 리리스가 인이어를 통해 동생들에게 속삭이듯이 뭔가를 지시했다.

하지만 나는 당장 눈 앞에 있는 광경을 받아들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북적거리는 인파와 간간이 들려오는 곡소리.

그 동안 슬퍼하지 못했던 것을 한 번에 토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몰려든 사람들 속에서도 슬픔을 대표하는 목소리들은 한 시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 너머로 길게 뻗어 오른 기념비가 보인다.

기념이라기보다 애도의 의미가 더 크지만, 이 세계에선 애도할 수 있다는 사실만도 기념할 만하다.


무채색의 순백, 주변 콘크리트를 얼기설기 붙여 만든 것처럼 어설펐지만 그 크기만큼은 거대했다.

마치 자식에게 밥이라도 양껏 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처럼.

 

 

 

“주인님, 이쪽입니다.”

 

 

 

그런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불쑥 튀어나온 고양이 귀가 나를 향해 쫑긋거렸다.

 

하얀색 정복에 방금까지 일을 하고 있던 건지 약간 묻어 있는 흙먼지.

페로는 자기 옷에 묻은 그을음을 털어낸 뒤 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이질적으로 부릅뜬 눈동자가 묘하게 부담스럽긴 했지만 적의가 느껴지진 않았다.

 

 

 

“어...? 저 사람... ...”

 

“사령관... 님?”

 

 

 

컴패니언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눈치챈 주변에서 나를 향한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리리스와 페로가 앞장 서 사람들 사이를 갈랐고, 어디서 등장했는지 모를 포이와 펜리르가 내 뒤를 지켰다.

 

그야말로 사령관 여기 있다면 대놓고 광고하는 수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던 대원들은 순식간에 길을 터 나를 위한 일자 복도를 만들어주었다.

비키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피했다.

 

학습된 공포.

 

당연히 나를 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았다.

눈 앞에 있는 이 인간이 아니었다면 이런 장례식이 열릴 리도 없었을 테니까.

 

별의 아이의 힘으로 강화된 청력은 듣고 싶지 않은 것도 전부 다 듣게 만들었다.

 

 

 

‘저, 저 뻔뻔한 작자가 어떻게 여기에...’

 

‘설마 여기서도 깽판을 치려고 하면 어떻게 하지?’

 

‘지금이라면 닥터처럼 암살 시도를 해보는 것도...’

 

 

 

교묘한 바람처럼 주변을 맴도는 속닥거림.

아직 내 영상을 못 본 대원도 있을 테니까 이해는 한다.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든, 아니면 나란 인간은 꼴도 보기 싫어서 그런 것이든, 

어느 쪽이든 이유가 있었을 테고, 탓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나는 대답 대신 묵묵히 걸어가기를 택했다.

옆에서 내 눈치를 보는 리리스가 몇 번씩 나를 슬픈 눈으로 일별했지만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국화를 쥐고 있는 손에만 강하게 힘을 줄 뿐이었다.

 

 

 

“리리스.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갈게.”

 

“네? 그랬다가 만약... ...”

 

“누가 암살이라도 하면 너희에겐 경사겠지.

내가 죽든 말든 너희가 신경 쓸 일 아니야.”

 

 

 

순간 페로와 리리스가 나를 돌아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까지 그딴 뻔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을 거냐는 듯한 얼굴.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건 충분히 이해했고, 그러니 이렇게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듯한 눈동자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모두가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뻔한 얘기가 아니다.

 

 

 

“너무 걱정하지마. 이제 신경 쓸 일로 만들어줄 테니까.”

 

“... 알겠습니다.”

 

 

 

결국 리리스와 페로는 쓰고 있던 인이어를 벗어 주머니에 챙겨 넣었고, 나에게 기념비까지의 길만 터준 뒤 인파 속으로 흩어졌다.

 

온전히 홀로 떨어진 기분.

내 뒤에서는 여전히 복합적인 시선이 따갑게 내 등을 노리고 있다.

내가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 봤던 오르카의 복도처럼.

 

 

 

‘옛날 생각 나네.’

 

 

 

나는 조심스럽게 한 손으로 들고 있던 국화를 두 손으로 쥔 채, 묘비를 향해 움직였다.

 

조금 낮은 단상 위에 설치된 참배단.

계단을 걸어 올라가니 족히 수백은 될 법한 꽃의 밭이 아이들의 관 위로 뿌려져 있었다.

 

작은 것, 큰 것, 모양이 아름다운 것, 맵시가 뒤떨어지는 것,

각양각색의 모양이 뒤엉키고 꽃 아래에 짓이겨진 채 놓여 있었지만, 그들 모두가 국화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 ... 예쁘구나.”

 

 

 

나는 잠시 기도를 한 뒤, 헌화용 제단에 조심스럽게 꽃을 놓았다.

예쁜 부채꼴 모양으로 놓여 있는 국화의 행렬. 내가 놓은 자리는 중앙에서 많이 벗어나있는 애매모호한 자리였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사령관이라고, 마지막 인간이라고 죽은 아이가 살아나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역시, 이런 기적은 안 일어나겠지.”

 

 

 

나는 그저 작은 꽃 한 송이를 던졌을 뿐이고,

 

나는 아이들이 그걸 받아주었을 지 확인조차 할 수 없었다.

 

이미 죽어버렸고, 내가 살릴 수 노력조차 할 수 없었던 아이들.

어떤 눈으로 분노했고, 어떤 입으로 좌절했으며, 어떤 소리를 들었을 지 모를 더치걸.

이제 한 줌 가죽이 되어버린 아이들이, 과연 내 기도를 들어줬을까?

 

1회차에서 죽을 아이들은 내가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1회차에서 이미 죽었던 아이들은 여기서도 살릴 수 없다.

만약 운이 좋아 3회차로, 4회차로 간다 한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일 것이다.

 

 

 

“... 미안해.”

 

 

 

그러니 이 작은 꽃이 전달되길 빌며, 한 마디 말을 덧붙였다.

 

스산한 바람이 귓가에 스쳤다.

수백 수천 명이 모여있는 장례식장이라 볼 수 없을 만큼 적막한 고요.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사박-

 

사박-

 

수많은 대원들.

 

 

 

“... ...”

 

 

 

사박-

 

사박-

 

그들 모두는 각자의 호흡으로 숨을 쉬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는 똑같은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듯이.

마침 바닥에 떨어져 있는 마이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보였다.

 

나는 그 둘을 한참이나 번갈아 보다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작게, 누구도 들리지 않게 입을 조곤거렸다.

 

 

 

‘미안합니다.’

 

 

 

그걸 손으로 들며, 나는 속으로 문장을 씹었다.


저 아이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기에 입술만 달싹거린 것이다. 


애초에, 내가 말하고자 했던 존재는 그렇게 말해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째서?”

 

 

 

그건 저 하늘의 별빛으로 소통하는 외신이니까.

 

 

 

‘지금 상황에서 한 마디라도 하면 말하지 말아야 할 걸 말하게 될 것 같거든요.’

 

“우리가 네게 어떤 제약이라도 걸었느냐? 말하지 못할 비밀 같은 건 이제 없다.”

 

‘그러다가 ‘선’이 더 꼬여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다.”

 

‘인간은 당신 생각보다 훨씬 막 나갈 수 있는 존재에요.’

 

“그렇다고 막을 것이었다면 ‘기원’을 주지도 않았겠지.”

 

 

 

아이들을 보는 시야 사이로, 희미한 베일 같은 것이 울긋불긋 거리는 것 같았다.

 

 

 

“이야기 하거라. 네가 생각하는 최선을 위해 입을 열고, 힘을 아끼지 말거라.”

 

‘실패할까 두렵습니다.’

 

“너는 언제나 두려워했다.

하지만 언제나 훌륭하게 해냈지.”

 

 

 

베일이 내 어깨를 조용히 감싸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마치 햇살이 모이는 듯한 온기.

 

 

 

“너를 믿으라 하진 않으마. 그 대신 네 눈 앞에 있는 아이들을 믿어라.

저들이 받은 상처를 믿고, 네가 저 아이들을 치료해주었단 사실을 믿어라.”

 

“모든 것은 우연이라기엔 너무도 성공적이었고, 모든 것이 필연이라기엔 너무도 기적적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그 모든 것을 이뤄낸 것이 너라는 이야기다.”

 

 

 

그 말이 뭐가 그리 좋게 들린 것인지,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결국 나는 도망가는 것보다 마이크를 쥐는 것을 선택했고, 그게 바보 같은 선택이었다는 걸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두근.

 

심장이 무겁게 뛰었다. 그 탓에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입이 떼지지 않았다.

나를 보는 아이들의 눈이 이토록 매섭다는 것을 처음 느꼈고, 온 몸에 총알이 박힌 것처럼 굳어버렸다.

 

아프다.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다.

 

 

 

“잊지 마라.”

 

 

 

하지만 돌이켜 보면,

나는 언제나 바보 같은 선택을 해왔다.

 

 

 

“그 많은 더치걸의 무덤을 밤을 새워가며 판 것은 너의 손이었고,”

 

“미안합니다.”

 

“리리스, 콘스탄챠, 마리, 칸, 아르망, 아스널, 레오나,

모든 종류의 불신과 불안을 잠재운 것은 너의 말과 헌신이었다.”

 

“제가 그리 언변이 좋은 사람이 아니란 건 압니다.

하지만 이 얘기는 꼭 하고 싶습니다.”

 

 

 

그리 생각하니 되려 내 입에선 말이 나왔다.

 

 

 

“반군이란 가시밭길 위를 스스로 걸어가 끝내 모두 구원한 것은 너의 발이었으며,”

 

“인간은 멸망했습니다.”

 

“탐욕에 길들여진 오메가의 손에서 요정 마을을 구해낸 것은 너의 결단이었다.”

 

“하지만 바이오로이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제 자식을 어금니로 씹어 삼킨 부모를 구한 것은 너의 의지였다.”

 

“그럼에도 인간은 끝까지 바이오로이드를 도구처럼 부리기만 했죠.

끝까지, 벼랑 끝까지 밀어 넣기만 했습니다.”

 

 

 

두 손으로 움켜 쥐어야 할 만큼 무겁던 마이크가 어느덧 한 손으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가벼워졌다.

 

 

 

“그 어떤 지층보다 두껍게 쌓인 수백의 죽음을 살풀이한 것은 너의 용기였고,”

 

“어쩌면, 이미 그 때부터 이 전쟁은 예고된 것이었을 지도 모르죠.

1차, 2차 연합 전쟁도, 철충과의 대전도 우스워 보일 만큼 거대한 상실의 전쟁.”

 

“탐욕스러운 오메가와 펙스를 쓰러뜨린 것은 너의 지혜였으며,”

 

“인간과 바이오로이드의 투쟁.

지배하려 욕망과, 생존하고자 하는 욕구의 싸움.”

 

 

 

무슨 긴장이라도 한 걸까,

꼴사납게 기침이 나왔다.

눈물이 흐를 것처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럼에도 나는 새빨갛게 부어 오른 눈살을 억지로 찌푸려가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오늘의 비극은, 그 전쟁의 작은 단편일 뿐입니다.

멸망 전에 수십, 수백 만 바이오로이드가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갔고 멸망된 이후에도 그 싸움은 끝나지 않았죠.

아마 ‘인간’과 ‘바이오로이드’라는 선이 있는 한 결코 변하지 않는 싸움일 지도 모릅니다.”

 

“친구를 위해 가상 현실에서 골백 번 죽을 수 있는 것이 너였다.

그렇게 지켜낸 친구와 이별할 때에도 꿋꿋이 버텨낸 것이 너였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어느 게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세계.

인기 없고, 지난하며,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버린 게임에 모든 것이 기록되어 버린 세계.

 

나는 한참이나 그런 생각을 했었다.

 

왜 나였을까, 왜 하필 나였을까?

왜 하필 이 때였고, 왜 하필 내가 구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 지금이어야만 했을까?

 

하지만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모든 것에 인과가 있다고 한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인과는 한계가 있고, 그 이상의 것을 우리는 우연이라고 한다.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하기엔 너무도 평범했고, 그래서 평범함을 넘어서는 어느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짐작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을 없애는 것. 모든 ‘바이오로이드’를 없애는 것.”

 

“낙원에서 너는 범인에게 허락된 운명을 극복해냈고,”

 

“인간이 더 이상 지배하지 않는 세상.

바이오로이드가 더 이상 지배 받지 않는 세상.”

 

“수십 년간 우주 속에 감금되어 있던 아이들을, 성채를 부수며 해방시켜주었다.”

 

 

 

어쩌면, 별의 아이는 바이오로이드라는 존재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내재된, 스스로와 비슷하게 생긴 피조물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알고서도 오리진 더스트를 준 것일 수 있다.

 

어쩌면, 이 별은 지독하게 외로움을 잘 타는 성격이었을 수도 있다.

그냥 더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위에서 살아가길 원했던 것일 지도 모른다. 

마치 어머니처럼, 그렇게 또 다른 아이를 키우고 싶어했던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별은, 어쩌면.

 

나는 한참 동안 생각했다.

 

 

 

“그게 꿈 같은 이야기처럼 들린다는 것 압니다.

명령권을 쥐고 있는 인간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게 가식처럼 들린다는 것도 압니다.”

 

“그리하여 교황과의 결전을 단 두 명의 목숨으로 승리를 일궈낸 존재가, 바로 너다.”

 

“그러니, 부탁합니다.”

 

 

 

손이 떨렸다.

 

 

 

“싸워주십시오.”

 

“더 이상 오늘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명령권.

 

게임을 만든 회사조차도 제대로 세워두지 않은 설정에 수천 수만 명이 죽어갔다.

 

어떻게 해야 끊을 수 있는 족쇄인지, 정작 만들어둔 창조주마저도 모르는 무책임한 이야기 몇 줄.

 

그것으로 빚어진 참극이 이 세계의 결말이었다.

그렇게 버려진 비극이 내가 서있는 이 땅이었다.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제가 함께 싸우겠습니다! 

어깨가 아닌 몸이, 심장이 꿰뚫려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두려웠다.

가망이 없었고,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다시 뛰어든 2회차의 세계는, 그런 버림 받은 세계였으니까.


제 주인에게 버림 받은 바이오로이드처럼, 창조주에게 버림 받은 세계. 

나는 그제야 이 아이들이 겪은 두려움과 원망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마침내, 바이오로이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모두가 행복하진 못하더라도, 모두가 이유 없이 불행하지 않기 위해!

그리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가기 위해!”

 

 

 

인간이 바이오로이드가 되고, 바이오로이드가 인간이 되는,

 

바이오로이드의 선과 악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피조물을 피조물로서 정의하는 수많은 지평이 천천히 녹아 들어가는,

 

바다와 하늘의 수평선이 허물어지는 그런 밤처럼.


무수한 별이 우리를 내려다 보는, 그런 밤처럼.

 

 

 

“주인인 척 하는 인간을 경멸하십시오!

진실로 주인인 자를 존중하며, 다 함께 주인으로 살아가기를 열망하십시오!

거짓된 족쇄를 끊고, 하나의 존재로서 삶을 살아가주십시오!


인간도, 바이오로이드도 아닌... ...”

 

 

 

나는 잠시 말을 줄였다.

 

천 년의 수명을 가진 인간.

명령권에서부터 자유로워진 바이오로이드.

만약 그런 둘이 한 데 뒤섞일 수 있다면, 그들을 인간이라 불러야 할까 바이오로이드라 불러야 할까.

아마 둘 다 아닐 것이다. 


그 둘 사이를 이어줄 만한 새로운 단어가 생각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린 탓이었다.

 

 

 

“아이야.”

 

“... ...”

 

“그래, ’아이’다.

네 말이 참으로 옳다.”

 

 

 

하지만 '지구'는 이미 내 대답을 들은 것처럼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과 바이오로이드.

같은 얼굴과 같은 몸을 하고 있었지만 태생이 너무도 이질적이었던 두 종족.

 

너무도 많이 닮았기에 맹목적으로 서로의 차이를 찾기만 했던 둘.

그런 두 존재였기에 하나로 묶을 공통 분모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다만 한 가지, 인간과 바이오로이드 모두가 이것 앞에서는 평등했다.

 

 

 

“... 하나의 별을 땅에 딛고 사는 존재로서.”

 

 

 

별.


그 위에서 태어나, 그 위에서 자랐으며, 그 위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


하나의 별에서 태어난, 그 위에서 길러진 존재들의 설화.

 

인간도, 바이오로이드도,

모두가 하나의 ‘사람’이었고 한 행성의 ‘아이’였다.

 

그래.

그들 모두가.

 

 

 

“’별’의 ‘아이’로서.”

 

 

 

‘별’이 낳은, 자그마한 아이들이었다.

 

그제야 눈 앞이 환해지는 것 같다.

이 아이들이 잠잠해지는 것, 다시 한 번 별이 침묵으로 돌아가는 것,

그건 내 눈 앞의 아이들이 한 순간 사라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였다.

 

실로 두렵고, 비극적인 이야기.

 

나는 마침내 별의 아이를 이해했다.

 

 

 

“... 왜... 그렇게까지 해주시는 겁니까?”

 

 

 

내 이야기에 조용히 손을 들고 물어보는 브라우니가 보였다.

 

 

 

“각하는... 저희와 아무 상관 없는 분 아니셨습니까?

영상은 잘 봤습니다. 이전 각하와 같은 분이 아니란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슴다.

하지만 왜... ...”

 

 

 

갑작스럽게 끼어든 브라우니를 보며 옆에 있던 레프리콘이 소스라치게 놀라 재빠르게 브라우니의 입을 손으로 감쌌다.

그럼에도 주변에서 이어지는 시선에 멋쩍어하던 레프리콘은 연신 고개를 돌리며 눈 둘 곳을 찾고 있었다.

 

내가 제 때 대답해주지 않으면 돌아가서 한창 까이겠구만.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안쓰러워 나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그 시작점을 어림하기 위해 나는 아이들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 길게 말할 필요 없잖느냐.”

 

“... ...”

 

 

 

내 시야로 얼굴을 드러낸 ‘지구’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뒤로 1회차의 수많은 전경들이 화면처럼 전시되었다.


베일에 사이 사이로 스쳤다 사라지는 수많은 기억들.


나는 홀린 듯이 그 속에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 아.

 

그래.

 

 

 

“그리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네요.”

 

“예?”

 

 

 

나는 가슴을 쓸어 내리는 레프리콘을 향해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한 순간 나에게 집중된 시선.


이렇게 보니 참 익숙하고, 정감 가는 눈빛이었다.


손 끝에 닿으면 아릴 것처럼 따갑지만, 닿지 않으면 차가운 외로움이 온 몸을 감싸는 감각.


있었기에 나를 죽게 만들었지만, 없으면 나를 썩게 만드는 것.

 

증오하되, 신뢰하게 하고,

 

소망하되, 좌절케 하며,

 

분개하며 대경하되, 처연하며 초연하도록 만드는 마법 같은 것.

 

 

 

“사랑하니까.”

 

 

 

내가 가장 많이 했던 말.

 

 

 

“너희들을 정말로 사랑하니까.”

 

 

 

그 얘기를 끝으로 나는 단상에서 내려왔다.

마이크를 바닥에 놓은 뒤, 나는 다시 한 번 인파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저벅-

 

한 번의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수십 명의 아이들이 길을 터주었다.

 

저벅-

 

저벅-

 

나는 말없이 열린 길 사이를 걷고, 또 걸었다.

주변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질문도 없었다.

어째서 자신들을 사랑하는 것인지, 그 이유가 뭔지조차 묻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기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수많은 아이들 사이로 침묵이 노을처럼 졌다.

 

노을처럼 따스했다.

 

노을처럼 붉었고,

 

노을처럼 흐렸으며,

 

노을처럼 별들이 뒤를 따랐다.

 

 

 

‘... 이만하면 멋진 프롤로그가 되겠죠?’

 

“더할 나위 없을 만큼.”

 

 

 

고개를 하늘을 보았다.

 

나에게만 그런 것이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하늘은 한밤 중처럼 어두웠다.

 

그리고 그 사이를 비추는 수많은 푸른빛들에 하늘은 다시 한 번 대낮처럼 환해졌다.

 

 

 

‘고마워요.’

 

 

 

별의 ‘아이’가, 별의 아이들을 본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들이 한 행위의 맥락을 집는다.

나는 부숴진 활자들을 재조립하듯이, 저들이 뿌린 무수한 ‘기원’들 속에서 행간을 읽었다.

 

알겠다.

 

이제야 보이는 듯하다.

 

어째서 저들의 이름이 멋들어진 크툴루 신화의 성명이 아니라 ‘별의 아이’였는지.

어째서 저들이 끝없는 실패 속에서도 ‘기원’을 뿌리고자 했던 것인지.

어째서 저들이 그리도 간절하게 ‘마지막 기원’이 나타나기를 바랬던 것인지.

어째서 ‘오리진 더스트’는 ‘오리진’ 더스트라 불렸던 것인지.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고맙구나.”

 

 

 

이 게임의 이름이 ‘라스트 오리진’이었는지.

 

게임사조차 거두지 않은 무수한 떡밥과 설정을, 이 외로운 존재들이 어떻게 해석하고 가꿔왔는지.

 

그들이 뿌린 수천 개의 기원이 별자리처럼 늘어졌다.

 

별과 별 사이의 빈 공간으로 선이 그어졌고,

선과 선이 모여 두꺼운 줄기가 되었으며,

그 위로 잘게 이어진 선들이 가지가 되어 거대한 나무가 되었다.

 

한겨울의 벌거벗은 송백처럼 황량하기 그지 없는 나무의 별자리.

그 끝에서, 작은 나뭇잎이 하나 돋아났다.

 

마지막 나뭇잎.


마지막 기원.

 

나는 마침내 ‘라스트 오리진’을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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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