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칸은 급하게 수복실을 향해 뛰었다. 그가 사령관을 만나러 간다고 말한 뒤 행여 무슨 일이라도 터질까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는데, 불길한 예감이 빗나가지 않자 그녀는 내면 깊은 곳에서 심한 흔들림이 이는 걸 느꼈다.

 

“제발 별 일 아니어라... 제발, 제발...”

 

큰일이 아닐 것이라며 주문처럼 자신을 다독이던 칸은 수복실에 도착하자마자 연락받은 병실번호를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어찌나 급했는지, 그녀는 힘 조절에 실패해서 문고리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부서지는 소리에 붕대를 감아주던 리제와 침상에 누워있던 리마토르 모두 깜짝 놀라 그녀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칸?”

 

“리마토르!”

 

침상에 몸을 뉘인 리마토르가 붕대를 온몸에 감고 있자 칸은 흔들리던 내면에 금이 가는 걸 느꼈다. 여지껏 지켜왔던 모든 것들이 다시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는 가루가 되어 손을 빠져나갈 것이라는 인상의 시작에 리마토르가 서 있자 그녀는 이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커억!”

 

“괜찮아? 어쩌다가 이렇게 다쳤어? 누가 그런 거야? 지금은 안 아파?”

 

“환자에게서 떨어져 이 햇츙!”

 

누워있는 그에게 달려들어 어깨를 잡고 탈탈 털듯이 흔들자 리마토르는 어지러움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리제가 간호사복을 입은 만큼은 자신의 소임에 충실하게 그녀를 그에게서 떨어뜨려놓는데 성공하자 리마토르는 빙빙 도는 머리를 붙잡으며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리제 씨. 칸, 그렇게 많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걱정하지 말라고? 당신이 이 꼴이 되었는데?”

 

칸은 기가 찬다는 투로 그에게 되물었다. 그녀가 본 그는 머리부터 다리까지 붕대를 안 감은 부분을 더 찾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왼팔에는 아예 깁스까지 하고 머리에 감은 붕대 너머로는 검붉은 핏자국이 언뜻언뜻 배어나오고 있었기에 칸은 심란한 머리를 손으로 지탱하며 리제에게 그의 상태를 물었다.

 

“리제, 리마토르의 상태는 어떻지?”

 

“왼팔과 갈비뼈 4개 골절, 이마와 복부에는 열상, 다리에는 타박상. 주인이면 주인답게 다치지 않게 잘 챙기라고 이 햇츙.”

 

리제의 말을 들은 칸은 리마토르를 ‘이래놓고 걱정하지 말라고?’라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괜찮다고 웃어주며 칸의 눈을 피하던 리마토르는 이번에도 리제에게 SOS를 요청했지만 리제는 그럼 몸조리 잘하라는 말만 남기고 방을 나섰다. 1인용 병실에 둘만 남게 되자 비로소 칸은 눌러놨던 감정을 그에게 꺼냈다.

 

“별 일 없을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이렇게 된 건데...”

 

“......”

 

칸은 침묵으로 답을 한 그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유일하게 멀쩡한 오른손으로 그녀의 의지가 전해지기라도 했는지, 리마토르는 말문을 열었다.

 

“미안해요, 또 걱정시켰네요.”

 

“미안하면 다야!”

 

리마토르는 순수하게 미안한 마음뿐이었지만 오히려 칸에게는 그 말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그녀는 벌컥 고함을 치고는 곧 자신이 언성이 높아졌음을 인지하고 바로 사과했다.

 

“...미안, 언성이 높아졌네.”

 

“아니에요. 제가 할 말이 없네요.”

 

리마토르는 칸이 쥔 자신의 오른손에 왼손을 얹으려했다. 깁스로 감싸 움직이기 힘든 팔이었기에 왼팔을 드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버둥거리자 칸은 그를 만류했다. 그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더니 침대 옆에 있던 메모지와 볼펜을 꺼냈다.

 

“제가 이렇게 됐다는 소식은 어디서 들었어요?”

 

“리제에게 연락이 왔어. 당신이 박살이 나서 실려 왔으니까 빨리 와보라고. 그 연락을 받고 바로 오니까 당신은 벌써 치료가 끝나 있네.”

 

“리제 씨가 의외로 간호업무에 능숙하니까요. 시위대가 사용한 물건 중에 살상력 있는 무기는 없어서 망정이었죠.”

 

다행이라는 투로 말하는 그를 본 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녀는 리마토르가 옆으로 몸을 밀어 공간을 내어주자 앉아있는 장소를 바꾸었다. 1인용 침대에 두 명이 앉자 공간이 빈틈없이 가득 찼다.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고 그와 붙어있게 되자 칸은 리마토르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새겨진 진홍빛 색감은 그의 말 위에 덧씌워졌다.

 

“생각해보면, 전 연인으로서 실격이네요. 분위기는 못 잡을망정 걱정이라도 안 시켜야하는데 뭘 하던 사건 사고를 몰고 오니까요. 많이 미안해요.”

 

“이제 알았어? 메타윤리학을 조금 더 공부해야겠네.”

 

칸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그의 오른팔을 감아 안았다. 듬직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그녀는 그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이렇게만 있어줘. 정말 소중한 사람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 오래오래 내 곁에 있어주면 돼.”

 

“얼마든지 그럴게요. 제가 칸 옆 말고 달리 있을 데가 또 어디 있나요.”

 

리마토르는 점점 빨라지는 심장고동을 느꼈다. 사령관과 대치했을 때도 그렇게 떨리지 않았건만, 칸과 대면할 때면 언제나 평소보다 빠른 박자로 심장이 뛰었다. 그 역시도 시간이 허락하는 한 오래 새로 찾은 행복을 꾸려나고 싶은 마음을 담아 그녀가 안고 있는 오른손을 들어 그녀의 목에 둘렀다. 그의 행동에 시선을 돌린 칸이 눈웃음을 짓자 리마토르는 이대로 죽으면 호상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치사량에 달한 행복을 살아서 만끽하는 게 행복의 총량이 더 크다 생각해 메모지에 볼펜을 놀렸다. 환풍기 쪽에서 보이지 않도록 칸으로 가려지는 절묘한 각도를 잡은 그는 혹시 모를 도청장치에 대비해 목청을 높였다.

 

“그거 알아요? 웃을 때 눈꼬리가 가늘어지는 게 전 그렇게 예쁘더라고요.”

 

‘이번 일에 사령관이 개입한 거 같아요.’

 

그가 적은 문장을 빠르게 읽은 칸은 그의 얼굴을 살폈다. 리마토르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있었지만 볼펜을 가볍게 톡톡 두드리자 칸은 그가 뭘 말하고 싶은지 이해했다. 펜을 잡은 칸도 평소보다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거 때문에 내가 좋은 거야?”

 

‘근거는? 물증이야 심증이야?’

 

“이유 중 하나죠.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이유가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자세히 알수록 더 들여다보게 되니까요.”

 

‘물증은 없지만 정황증거는 있어요. 시위대가 명백히 집단폭력을 저질렀음에도 경고하길 거부하더라고요.’

 

“상대를 알아가며 들여다보는 것과 들여다볼수록 아는 것, 뭐가 먼저일까?”

 

‘다른 증거는? 확실치 않으면 안 돼.’

 

“글쎄요... 닭이 먼저냐 달갈이 먼저냐의 문제에요? 뭐가 시작이고 끝인지 이거 애매하네요. 칸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저를 린치한 시위대에서 페로 씨를 보았어요. 생각해보면 컴패니언은 저를 합류 초기부터 계속 주시했는데, 사령관이 이를 이용할 가능성이 커요.’

 

“사실 나도 잘 몰라. 그래서 당신에게 물어본 거야. 이런 딜레마 논증은 논리학에서 무조건 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정황증거라기에는 객관성이 부족한데. 하지만 공작을 진행한 곳이 컴패니언이라면 말은 되네.’

 

“오, 메타윤리학 이야기할 때부터 놀랐는데 칸이 이렇게 소양이 풍부할 줄은 몰랐네요.”

 

‘컴패니언의 개입은 물증도 있어요. 리리스 씨가 환풍구를 타고 다니는데, 우리가 처음 본 영상이 환풍구에서 찍은 증거가 있었잖아요.’

 

“의무병도 전술을 배우면 지휘관 개체가 되잖아. 그 살아있는 사례인 내가 철학을 배워서 학자로 전직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지.”

 

‘그렇네. 이번 일이 경호담당인 컴패니언의 공작이라고 하면 사령관이 뒷배에 있다는 정황증거가 성립해.’

 

“멋져요. 전 학자의 삶 외에 다른 건 생각도 못하겠는데 칸은 경계 없이 자유자재로 넘어 다니네요. 나중에 에드워드 윌슨 교수의 <통섭>이라는 책 한 번 읽어봐요. 여러 방면을 넘어 다니다 보면 새로운 시각이 열릴 거에요.”

 

‘이 정도면 정황증거는 충분하네요. 문제는 대응이죠. 여론조작으로 시위대를 만들어 집단린치까지 가할 정도인데, 이런 상황에서는 저희 측이 어떤 주장을 해도 거짓으로 치부될 거에요. 팩트를 통한 반격이 필요해요.’

 

“알겠어. 당신처럼 책에 빠져 살지는 못해도 노력은 해볼게. 이제 보니까 당신은 이미 책이랑 플라토닉 러브를 하는 중 아니야?”

 

‘당신이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 이상으로 그럴 의지가 없다는 것도 보여주자. 페더에게 여론조작 대응을 지시할게.’

 

“에이, 그럴 리가요. 이렇게 칸이랑 연애 중인데 무슨 말이에요.”

 

‘좋아요. 혼선만 만들어도 와해될 거에요.’

 

“그럼 다행이네. 당신이 오롯이 내 거라는 증거니까. 리제도 나한테 주인이라고 말하지 않았어?”

 

‘추가로 사령관에게 항의를 넣을게. 당신이 다쳤으니 뭐라도 해야 할 거야.’

 

“그랬나요? 그래도 칸이 주인이라면... 상냥하게 대해주세요.”

 

‘괜찮겠어요? 사령관에게 찍힐지도 몰라요.’

 

“걱정 마. 당신이 다치는 모습은 보기 싫으니까 굉장히 조심해서 대해줄게.”

 

‘당신이 다친 게 더 중대한 문제야.’

 

“고마워요. 저도 피학성 변태 성향은 없어서 말이죠.”

 

‘고마워요. 그래도 많이 조심해요.’

 

메모지를 빼곡하게 메우며 이야기하던 칸과 리마토르는 결론에 다다르자 펜을 내려놓았다. 종이를 구겨서 주머니에 넣은 칸은 그에게 시야를 맞추며 화제를 돌렸다.

 

“아까 알면 들여다보는 거랑 들여다보면 아는 것 중에 뭐가 먼저냐고 그랬지? 난 들여다볼수록 알게 되는 거 같아. 나태주 시인이 쓴 풀꽃이라는 시도 있잖아.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칸은 마지막 행을 말하며 리마토르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성숙한 아름다움이 가득한 호선에 그는 대답할 말도 잊어버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갈색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눈 안에 다시 그녀의 눈동자가 있었다. 마주본 거울처럼 비친 서로의 형상에 자신이 비치고, 비친 자신의 형상 안에 서로가 비쳤다.

 

“...전 알게 되면 더 들여다보는 거 같아요. 최재천 교수라는 진화생물학자가 있으신데, 그 분이 내건 슬로건이 ‘알면 사랑한다’에요. 알게 될수록 더 관심을 갖고 사랑하니까 제가 지금 칸을 사랑하고 있겠죠.”

 

화가 클로드 모네는 한순간에 잡힌 풍경의 인상을 캔버스에 옮기는 인상파의 거두였다. 인상파의 대표 작품으로 꼽히는 모네의 걸작 <인상-해돋이>에는 그가 본 새벽 해돋이가 만든 순간의 붉은빛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 인상은 지금 바다 속 병실의 두 사람을 표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안개만큼이나 혼탁한 상황에서도 조양(朝陽)은 떠올라 마주본 둘의 뺨에 붉은 자국을 남겼다.

 

“.....”

 

칸은 말없이 그를 끌어안았다. 겹쳐진 몸 사이로 울려 퍼지는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그의 것인지 그녀의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속삭이며 고백했다.

 

“우리, 이대로 계속 있자. 당신을 들여다보니 좋아하게 되었는데, 좋아하게 되니까 더 알고 싶어져.”

 

“그래요. 같이 행복해져야죠. 처음과 같이, 이대로 영원히...”

 

리마토르는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칸을 안았다. 기억을 되찾은 이후 흔들릴 때마다 옆에 있어주었던 그녀가 그토록 애틋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둘은 시간이 흐르는 사실도 잊고 그대로 한참동안 있었다. 20분 뒤, 델X트 오렌지 주스를 들고 찾아온 아스널과 LRL, 에밀리가 난입하기 전까지 말이다.

------------------------------------------------------------------------------------------------------------------------------------------------------------------


사령관의 사정을 보여주기 전에 잠시 리마토르 에피소드. 원래는 한 편으로 올리려고 했는데 사령관 쪽 분량이 생각보다 방대해져서 따로 끊게 되었어. 다음 편까지 해서 가짜 뉴스 에피소드는 끝날 거야. 그 후로는 말랑말랑한 일상 에피소드가 한동안 올라갈 예정이고.


이번 편에 언급된 메타 윤리학은 '윤리학이란 학문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윤리학의 한 갈래야.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아는 메타인지의 개념을 생각하면 금방 이해가 될 거야.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준 모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다들 좋은 하루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