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작 설정과 다를 수 있읍니다.


* 알고 있던 캐릭터 성격이 이상해질 수 있읍니다.


모음집 : https://arca.live/b/lastorigin/37576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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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위에 무엇으로 내용을 채울지 고민하는 것은 어렵다.

수천 년 세월 동안 인류는 그림과 활자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착실히 기록해 왔으며 후대에 이르기까지 잊히지 않고 길이 남을 표현물을 걸작이라 불렀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텅 빈 도화지 같은 어린아이에게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 어릴 적부터 교육받은 예절 따위의 것들이 개인의 인성을 함양하고 사람으로서 걸작을 완성 시키는 셈이었다.

때로 이들 중에서는 스스로 해답을 찾아 자신만의 도화지를 채워가기도 한다.

 

걸작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주변에 행복을 나눠주는 경우가 많은데, 사령관은 스스로 명백히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여겼다.

그의 속엔 유년기 기억의 나쁜 것들이 있고, 무심코 내뱉은 말엔 듣기에 아픈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하얗게 변해버린 리리스에게 사령관은 무엇으로 그녀를 다시 채워 넣어야 할지, 마치 잘 써 보이고 싶지만 한 마디도 쓰이지 않는 연애편지를 쓰는 것처럼 골머리를 감쌌다.

 

닥터에게 듣게 된 해리성 정체성 장애라는 평생 주변에서 접해보지 못할 가능성이 큰 병명은, 사령관에게 뿌옇게 보이던 불확실한 미래를 이제는 아주 컴컴하게 만들었다.

 

이런 사령관의 심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리리스는 여전히 침대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만을 들려주었다.

간병인용 침상에 걸터앉아 그녀의 권총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던 사령관은 탄창에 총알을 끼워 넣었다.

 

“누가 경호원인지.”

 

권총은 무거웠다.

들어 올릴 때는 거뜬했으나, 평소의 그녀 모습처럼 허공에 한 손으로 조준하니 팔이 뻐근해 다시 권총을 내려야만 했다.

 

새삼 그녀의 부담감이 다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 권총으로 수없이 많은 이들을 지켜내고, 그만큼의 철충을 학살했을 것이다.

그녀는 사령관을 지키지 못했다. 사령관 또한 그녀의 마음을 지키지 못했다.

서로가 필요함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야 함을 사령관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아니 이곳에 존재하는 대부분이 사령관을 향한 남모를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처음에야 일련의 오해로 시작된 이미지를 쇄신하는 데 서툴렀다 해도, 이제는 꽤 괜찮은 나날들이 이뤄지고 있었다.

 

다만 그들의 마음을 온전히 받을 수 없는 것은 그가 가진 주인공의 자리에 대한 저열한 열등감 때문이었다.

사령관은 부족한 것 없는 그녀들이 부족하기만 한 자신을 왜 좋아하는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잘 짜인 각본일지, 혹은 평생 사령관만을 바라보게 만들 저주일지 그도 모를 일이었다.

 

“주인님, 좋아해요. 버리지 마세요…….”

 

정적을 깬 잠꼬대는 피식거리는 웃음을 새어 나오게 한다.

이리저리 뒤척였는지 입술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물고 있는 리리스의 머리칼을 사령관은 다정히 넘겨주었다.

 

“내가 아니라 이 자리에 누가 있더라도 그 사람을 좋아했을 거야, 그렇지?”

 

잠든 이의 비겁한 입에서는 답변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사령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로 향했다.

가만히 그녀를 돌보기에는 그의 자리도 만만찮게 무거운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다프네, 리리스가 일어나면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다시 오라고 전해줘. 컴패니언 쪽에는 내가 일러둘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사령관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평소보다 힘이 없는 발소리였다.


 

*


 

“세상에, 오빠. 이게 다 뭐야?”

 

늦은 새벽, 닫힌 집무실 문틈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동한 닥터는 서류 무덤에 깔린 사령관을 목격했다.

 

닥터 자신도 개인 연구 때문에 밤새는 일이 잦다지만, 아침형 인간인 사령관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간신히 뜨고 있는 충혈된 두 눈에 대충 아무렇게나 옆으로 치워놓은 머그컵들 속에는 이미 다 마신 커피가 바닥에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일이 다 안 끝났어? 내가 좀 도와줄까?”

“아냐 괜찮아. 오늘치 일은 다 했어.”

“응? 이건 결재 서류가 아닌데.”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용지를 주워들자 그곳엔 정신분석학에 대한 논문이 있었다.

리리스의 상태를 돌려놓기 위해 사령관이 애쓴 흔적들이었다.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대. 일시적인 증상일 수도 있대.”

“…….”

 

닥터는 사령관이 왜 이렇게까지 스스로 혹사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환자에게 가혹하지만 스스로 자신만의 나쁜 세계에 갇혀버린 것은 그녀의 책임이었다.

그렇기에 사령관을 힘들게 하는 리리스가 조금은 미워지려 하고 있었다.

지금 이 남자의 모든 관심은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해있고 그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녀에게 과분한 애정이었다.

 

“…진실을 떠올려야 해. 기억이 사라졌다는 것은, 무의식이 진실을 떠올리기를 두려워하는 거야. 언니의 총은 그 진실을 떠오르게 하는 상징이고.”

 

닥터는 한숨을 내쉬며 아무렇게나 흩어진 논문들을 한 곳에 그러모았다.

시간이 부족한 경우에는 지식을 얻는데 양보다는 질이 압도적으로 중요하다.

사령관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모르기에 닥터는 그가 진정 필요로 하는 지식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총을 잡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상태가 나쁜데 무슨 수로?”

“직접 잡게 만들어야지. 언니 스스로 필요해서. 그게 트라우마의 극복 조건 중 하나야.”

 

사령관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망 때 체스판 위 나이트가 리리스 자체를 뜻하는 상징이라면, 리리스의 권총은 그녀의 정체감이다.

그가 다른 이들에게 스스로 깨닫게 하려 늘 써왔던 방식이었기에, 그의 눈에 해결법이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응. 고마워, 조금만 더 보다가 자야겠….”

“당장 자. 나 화낼지도 몰라.”

 

사령관이 보던 논문을 뺏어 든 닥터는 짐짓 화난 표정으로 사령관을 노려봤다.

조그마한 외양에서 흘러나오는 거대한 기에 억눌린 사령관은 부랴부랴 침대에 들어가 이불을 끌어 올렸다.

 

“졸리면 머릿속에 아무것도 안 들어온다고. 일찍 자고 내일 생각해. 나가면서 불 꺼줄게. 잘 자.”

“응, 고마워 닥터. 잘 자.”

 

불이 꺼지고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멀어져갔다.

똑딱거리는 초침 소리가 잦아드는 것 같더니 스르르 사령관의 눈이 감겼다.

의식이 멀어지고 위화감을 느낄 틈도 없이 꿈의 세계가 구축되었다.

잊었다 하였지만, 가끔 과거의 자신이 나타나 아직 사라지지 않았노라고 사령관을 골려주는 듯한 꿈은 오늘같이 여러 날을 몸을 뒤척이게 했다.

기억은 영속적이고 무의식에 남아있는 것들은 영구적이었다.

 

‘리리스가 잊고 싶었던 기억이라…….’

 

그녀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지우려 하는지 사령관은 모른다.

그저 사령관과 같이 악몽에 잡아먹히지 말기를 바랄 뿐이었다.

자아를 지워버리는 것은 영혼의 자살이라 부르는 것이 바람직했다.

그저 자신과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타인의 지식에 의지해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사령관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제외한 타인을 믿지 않는다.

이는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협력과는 동떨어진 사령관이 익힌 그만의 생존방식이었다.

요컨대 무기력하게 타인의 도움을 바라고 있는 것은 그의 성격에 어긋난다는 말이기도 했다.

 

“판을 좀 키워볼까….”

 

 

*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과가 시작되었다.

사령관이 긴급 소집한 지휘관급 회의가 시작된 것과 경호 대장 위치에 하치코가 대리 참석한 점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아, 이렇게 모여달라 요청한 것은 다름이 아니고 새 작전 브리핑 때문이다. 궁금한 것이 많겠지만 계획 실행에 앞서 촌각을 다투는 일이니 질문은 설명 이후에 부탁할게.”

 

사령관의 말에 몇몇 지휘관이 들었던 손을 다시 내렸다.

아무래도 경호 대장 위치에 똑부러진 페로 대신에 하치코가 와있는 이유가 궁금한 것이 분명했다.

 

“나는 새로운 탐색 지역에 대해 각 부대가 제출한 서류들을 검토하고, 철충들이 특정 위치로 이동하는 것을 확인했다. 발견된 철충들은 작은 교전이 이루어진 곳도 있으나, 각 부대가 진입하자마자 슬금슬금 후퇴하는 양상을 보였다고 본다.”

 

사령관은 널찍하게 복사된 지도에 말판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철충의 현재 위치로 짐작되는 곳을 설명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라고 했던가. 이 경우에는 호랑이를 직접 굴에서 꺼내는 것이 맞았다.

 

‘철충 발견지’

 

수많은 결재 서류를 한자리에서 앉아 처리하다 보면 가끔은 인간같이 행동하는 철충의 움직임이 보이곤 했다.

무작정 싸움을 걸어 온다기보다는 그들도 해볼 만한 전투인지 판단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병력을 투입할지 물릴지를 선택한다는 것이 사령관의 지론이었다.

 

무리 지어 다니는 철충의 특성상 그들을 지휘할 지휘 개체가 존재하고, 그들이 진격 및 후퇴 명령을 내린다는 것을 트릭스터 때 확신했다.

리리스가 총을 잡기를 두려워하면 총을 잡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하는 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당한 배경, 적당한 연극 배우들이 필요했다.

 

“우리는 한 곳으로 몰려든 철충을 일망타진할 계획이다. 처음부터 많은 병력을 보내면 점점 한 곳으로 몰아내기만 할 뿐, 그리고 몰아낸 곳에 무엇이 있는지, 얼마나 많은 적이 있는지도 확실치도 않다. 요컨대, 적당한 병력으로 철충을 유인하고 서서히 규모를 키워 뿌리 뽑아가자는 것이 내 계획이다.”

 

탐색 지역에 산개해 있는 철충을 어느 정도 끌어모아 한 번에 처리함으로써 세력의 일부분을 처리하자는 작전.

계획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유인은 어느 부대가 맡을까. 기동력이 빠른 호드? 애초에 호드는 기습에 특화되어 유인책으로는 맞지 않아. 분명 여기저기 산개하면서 난장판이 벌어질걸. 내가 봤을 때는 무리 지어 다니면서 유인 가능한 부대는 없어.”

 

레오나가 뼈아픈 지적을 했다.

사령관이 탐색 지역에 발키리를 혼자 보냈던 미숙한 시절을 떠올리다가, 트릭스터 때의 부대 운용 모습을 보아온 터라 무슨 무모한 짓을 벌일지 걱정이 되어 한마디거든 셈이었다.

 

“미끼는 내가 한다.”

“안돼!”

“각하, 안됩니다.”

“미쳤어?!”

 

여기저기서 반발이 이루어졌다.

그들의 심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하나 남은 인류가 스스로 죽으러 저승길에 들어간다는 데 말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워워, 진정하고. 무슨 걱정을 하는 줄은 알아. 여기 하치코와 밖에 대기하고 있는 리리스, 그리고 나. 셋이서 갈 거다. 경호 임무에 적합한 컴패니언 중, 훌륭한 벽이 되어 줄 하치코, 그리고 경호 대장이 함께니 안전은 어느 정도 확보된 상태다. 하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오르카 측에서는 저격수를 통해서 우리 상황을 확인하다가, 신호를 보내면 지원 사격을 해주면 돼.”

“하지만…!”

“난 스틸라인의 굳건함을 믿고, 호드의 기동력을 믿고, 둠브링어의 화력을 믿고, 발할라의 정교함을 믿는다. 너희들이 제 기량을 내줄 것이라 믿지 않았다면 이 계획 또한 없었다. 또 부하들을 사지로 내몰면서 나는 안전한 곳에서 나 몰라라 하는 것도 부하에게 좋은 귀감이 되지 않는다고 봐.”

 

사령관의 말에 특히나 많은 인원을 통솔하는 마리가 깊게 감명받은 듯했다.

반짝이며 눈빛에 생기가 도는 것이, 회의실이 아닌 연설장이었다면 기립박수라도 칠 기세였다.

 

“혹시 계획을 실행하기에 앞서 자신의 부대에 대한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편하게 말하도록. 나 또한 귀관의 부대들을 소중히 여기니, 위험하다 싶으면 발을 빼도 좋다. 그 경우에는 어느 책임도 묻지 않을 것이고 이 전술은 폐기하겠다.”

 

숨을 삼키는 소리가 여럿 들려왔다.

사령관은 리리스를 위해 이들을 움직이기 위한 명분과 미끼가 필요했다.

명분은 그들의 주적인 철충을 없애는 것, 미끼는 각 부대의 자존심을 건드는 것이었다.

 

호승심이 강한 메이, 가장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있는 스틸라인의 마리, 부대의 자존심이 센 레오나, 그리고 야생 늑대와 같은 호드의 칸.

오래 알고 지낸 각 지휘관 사이에서 먼저 발을 뺀다는 것은 부대의 이름이 걸린 자존심 문제였다.

 

부대명이 사령관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선뜻 위험하다고 나서는 이는 없었다.

반발을 막기 위해 상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사령관은 서둘러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 문제없는 것으로 보고, 오전 10시 30분에 작전을 실행하겠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에서 사령관은 회의 종료를 알리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궁금한 게 있어.”

 

지휘관들이 생각을 깊게 하지 못하도록 도망칠 계획이었던 사령관을 불러 세운 것은 메이였다.

 

“진짜로…진짜로 괜찮은 거 맞지? 들려오는 소문에는 경호 대장이 자기 구실을 못한다는 말이 들려오는데…….”

 

메이가 입을 열자마자 회의실에는 싸늘한 정적이 맴돌았다.

광인처럼 리리스를 업고 복도를 질주하던 사령관의 모습에서 그녀의 상태를 어느 정도 짐작했을지도, 혹은 어디선가 이야기가 샌 것일지도 몰랐다.

언제나 그렇듯이 소문은 발보다 빠른 법이기 때문이었다.

 

“같은 동료면서 서로의 자질을 의심하는 것은 좋지 않아. 리리스는 독방에 갇히면서 몸이 안 좋아졌을 뿐이야.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동료의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의지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전우라 생각한다.”

“아니…그러려고 말한 게 아닌데 내 말은….”

“걱정해서 하는 말인 것은 알아. 다들 조용히 있지만 아마도 같은 마음이겠지. 나도 불안해도 너희들을 믿고 위험을 감수하는 거야. 혹시 자신 없어?”

“…섭섭한 소리. 좋아, 이번에도 우리의 저력을 보여주겠어.”

 

사령관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휘관 사이에서 숨만 간신히 쉬는 하치코의 손을 이끌며 회의실을 떠났다.

 

“주인님, 언니를 진짜 돌려놓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럼. 이번엔 하치코의 역할이 중요하단다. 리리스에게는 우리 계획을 숨기고 피크닉가자고 할 거야. 나와 리리스에게 날아오는 총알들을 잘 막아줘야 해, 알았지?”

“네, 주인님!”

 


*


 

한가을의 소풍. 비록 명분이지만 단풍이 휘날리며 기분 좋은 바람이 코를 간질이는 게, 들판을 걷는 이들의 마음이 붕 뜨는 것만 같았다.

 

질투의 전조가 보이는 소완에게 다음에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자고 설득하여 받아온 수제 도시락을 바구니에 넣어 들고, 넉넉한 크기의 돗자리를 챙겨 든 사령관은 목 좋은 자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그가 생각하는 목 좋은 자리란 철충에게 발각되기 쉬운 평야이면서, 저격수를 통해 사령관의 위치를 확인하는 오르카의 시야에 들어오는 자리였다.

 

그의 곁에서 함께 걷는 리리스는 기분 좋은지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오판에 대한 책임으로 단둘이서 데이트를 가자는 권유에, 리리스는 사령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대었다.

 

하치코도 따라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개의 유전자가 섞였다더니 산책하는 기분이 들어 기분 좋은 것인지, 언니를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분 좋은 것인지는 몰랐다.

그저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이 그녀의 기분이 좋다는 사실만 알면 되었다.

 

리리스도 하치코가 동행하는데 딱히 의문을 품지 않았다.

유독 자매들을 아끼던 그녀는 가족 한정으로 질투심을 품지는 않았기에, 하치코를 호위역할로 데려온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옳은 선택이었다.

 

“음. 여기쯤으로 할까.”

 

펄럭이며 펴진 예쁜 체크패턴의 돗자리는 먼 사이를 물리적으로 가까이 앉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좋은 수단이었다.

대충 창고에 있는 은박지 패턴의 돗자리를 챙겨 가려다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미적 감각이 부족하다 느끼고 고르고 골라 가져온 돗자리였다.

 

“어…….”

 

돗자리를 펼친 것은 좋았으나, 세 명이 한 곳에 마주 앉아 처음 닥친 위기는 다름 아닌 적막이었다.

 

막상 계획을 실행한 것은 좋았으나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사령관은 몰랐다.

가족끼리 단란하게 소풍이란 것을 가본 적이 없고, 학교에서는 늘 혼자였기에 보통 이런 자리에서는 어떤 대화를 하는지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다.

여성과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사령관이었으나, 그는 여전히 숙맥이었다.

사령관은 있지도 않은 종교에 들어 철충이 나타나기를 빌어야만 했다.

 

“저, 주인님.”

 

숨 막히는 정적을 뚫고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리리스였다.

예전 같았으면 호위 임무만 아니라면 가까이 있을 때 언제든지 사령관에게 애정표현을 해오는 그녀였는데,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애매한 거리감이 둘 사이엔 남아있었다.

여전히 하얀 그녀는 사령관이 알던 리리스와 조금의 심적 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감사하다는 말을 먼저 드리고 싶어요. 경호 대장이라면서, 어째서 주인님 앞에서는 반편이가 되는지…. 저는 늘 신세만 지게 되네요.”

“그런 말 하지 마. 상황이 여의치 않았을 뿐, 평소엔 무척 의지하고 안심하며 지내니까.”

 

아무래도 의지한다는 말이 그녀에겐 위로가 아닌 역효과였던 것 같았다.

자신을 의지하는 상대에게 기대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리리스는 금세 침울해져서는 사령관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바닥의 체크무늬만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녀는 자존감이 많이 낮아진 상태였다.

 

“리리스, 사실 이거….”

 

탕-

 

리리스에게 혹시 몰라 안주머니에 챙겨온 그녀의 권총을 제복 단추를 끌러서 보여주려는 찰나, 리리스가 사령관을 덮치는 타이밍과 동시에 총성이 울렸다.

 

“주인님 제 뒤에 서세요!”

 

리리스보다는 조금 늦은 반응이었어도, 하치코는 총성이 들리자마자 가을바람을 만끽하던 도중에 단숨에 눈빛이 변하더니 방패를 들어 둘을 지키고 우뚝 섰다.

 

“이런!”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붉은색 안광들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더니 검은 형체들이 순식간에 숲에서 튀어나와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림잡아 수십 마리는 될 것만 같았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수에 당황한 사령관은 밀려오는 공포심에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하치코의 뒤로 붙었다.

이어서 숨돌릴 틈도 없이 마치 굵은 빗방울처럼 총알 세례가 정면에서 퍼부어졌다.

하치코의 방패는 쉴새 없이 강철끼리 맞부딪히는 소리를 내었고, 기분 탓인지 점점 너덜너덜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하치코가 한 손에 든 권총으로 교전을 해보려 했으나 쉴새 없이 퍼붓는 총알 세례에 방패를 겨우 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늘 웃는 인상인 하치코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을 보니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리리스는 불안에 떠는 사령관을 감싸고는 사령관에게 새는 총알을 초인 같은 반응속도로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리리스의 치료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많은 수의 철충들이 정면에서 벗어나 측면으로 서서히 이동하며 사격 범위를 늘려가는 것이 보이고, 하치코는 얼마나 버틸지 장담할 수 없었다.

 

사령관은 제복 안에 넣어둔 손수건을 꺼내어 오르카호에 신호를 보내려는 찰나 한 발의 총알이 사령관의 팔을 꿰뚫었다.

 

“끄아악!”

 

오리진더스트로 어느 정도 강화된 몸이긴 하지만 고통은 생생했다.

무언가 피부를 짓누르는 불편한 감각 이후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팔 전체에 느껴졌다.

공격을 받자마자 기절했던 세이렌 때와는 달리 정신을 잃지 않아 실시간으로 고통을 느끼던 사령관은 터져 나오는 비명을 삼키려 입술을 콱 깨물었다.

리리스는 고통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사령관의 모습에 적잖이 충격받은 듯해 보였다.

 

“어…어…?”

 

사령관이 품 안의 손수건을 꺼내려고 움직여댄 탓인지, 리리스는 사령관의 제복 속 결속되어있는 자신의 권총을 발견했다.

 

매끄럽게 잘빠진 동고동락을 함께했던 권총 두 정.

저 불길한 검은 것을 손에 쥐면 마치 정말로 끝이 날 것만 같아서 리리스는 두려웠다.

 

하지만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관계의 불안함, 불길함이 아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사랑하는 이가 더는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겁쟁이였던 자신을 후회하는 나날들.

그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리리스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주인님. 오늘 하루만… 딱 하루만 나쁜 리리스가 될게요. 하치코, 주인님을 잘 모셔드려야 해. 알겠죠?”

“언니?!”

 

미끄러지듯이 방패 옆으로 달려나간 리리스의 손에는 권총 두 자루, 눈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철충의 일부가 방패 뒤에서 튀어나온 리리스에게 총알을 퍼부으려는 찰나, 리리스는 마치 움직임을 예상한 듯이 자신을 겨누는 철충에게 먼저 총알을 박아넣었다.

 

은발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휘날리며 총을 쏘는 모습은 마치 무희가 추는 검무 같았다.

철충 한 개체의 숨을 끊어 놓는 데는 단 한발이면 되었다.

사격 도중에도 빈 탄창을 버리고 함께 딸려온 탄알집을 순식간에 채워 넣는 것이 예술의 경지에 다다랐다.


절도있는 움직임과 정확한 명중률, 그리고 철충을 농락하면서 적진에서 춤추는 듯한 모습은 잠시나마 고통을 잊고 넋을 놓고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언니!”

 

하치코의 눈에 감격에 젖은 눈물이 배어 나왔다.

저 모습이야말로 함께했던 자매들이 진정으로 그리워하던 그녀의 본모습일 것이다.

 

마지막 총성과 함께 한 마리 남아있던 철충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철의 무덤 위에 당당히 서 있는 모습은 사령관과 하치코, 그리고 지원 사격을 할지 말지 고민하며 지켜보던 오르카호 인원들의 망막에 강렬히 새겨졌다.

그림 같은 모습은 경호 대장 리리스의 부활의 신호탄이었으며, 이 상황을 지켜본 이라면 그 누구도 그녀의 자질을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

 

리리스는 멍하니 자신의 손에 든 권총 두 자루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도 손아귀 속에 격한 울림과 열기가 계속 이어질 것만 같았다.

 

총알을 전부 피할 수는 없었는지 리리스의 온몸에 여기저기 상흔이 남아있었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기에 무아지경에 빠져 쉴 새 없이 방아쇠를 당겼을 뿐.

 

리리스는 손에 든 검은 것이 상처입히기 위해 만들어진, 버려야 할 불길한 것이 아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것임을 다시 깨닫는 데까지 너무나 멀리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언니! 우리 언니에요!”

“잠깐 하치코! 주인님을 두고 오면 어떡해요!”

“아…!”



*


 

다프네는 수복실의 병상에 누워있는 단골 환자인 사령관, 그리고 이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리리스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째서 제일 다칠 위험이 적은 두 분이 여기 누워 계신지 모르겠네요.”

“면목이 없다, 다프네.”

“저도요.”

“하치코는 안 다쳤어요!”

 

다프네의 원래 업무는 자매들과 함께 정원을 가꾸는 일이었다.

사령관이 처음 부임한 봄에야 발키리가 자주 다쳐오는 일이 잦았다지만, 계절이 두 번이 바뀌어도 일반 바이오로이드가 이곳에 실려 오는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본업으로 복귀하려고 할 때면 가장 위험과는 거리가 먼 사령관이 이곳에 환자로 나타나기에, 질투 많은 언니가 혹여나 자신에게 투지를 불태울까 속이 쓰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경호 대장님이 옛날 모습을 되찾으셔서 다행이네요. 점심 아직 못 드셨죠? 식사 가져다드릴게요.”

“후후, 걱정했나요? 고마워요. 하치코, 언니는 괜찮으니까 식사하고 와요.”

“네!”

 

다프네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는 하치코를 데리고 주방으로 향했다.

탐색 지역에 대해서는 각 부대가 커다란 섬을 샅샅이 뒤졌으나 철충은 더는 보이지 않고 한 번에 사령관 쪽으로 다 몰려온 모양이었다.

 

오르카호의 인원들은 철충 사살 작전으로 알고 있었으나 본래의 목적은 리리스의 트라우마 극복이었고, 리리스는 피크닉인 줄 알고 따라 나왔기에 사령관은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이 치솟았다.

 

“미안해.”

“네? 뭐가요?”

“피크닉. 기대했었잖아.”

“어머, 계속 신경쓰고 계셨던가요?”

 

리리스는 사령관의 말에 옆 침상에서 꺄르르 웃어 보였다.

 

“…이것도 나쁘지 않네요. 같은 곳에 누워서 단둘이 얘기하고, 다프네 씨가 오면 식사도 같이 할거고. 돗자리보단 푹신한 침대가 더 편한걸요?”

“그래도 기분이란 게 있잖아….”

“상관없어요, 저는. 옆에 주인님만 있다면야 어디든.”

“너는 참 한결같구나.”

 

사령관과 리리스는 동시에 웃어 보였다. 스스로 내뱉고도 민망함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아쉽네요.”

“뭐가?”

“기왕이면 돗자리에 주인님과 함께 눕고 싶었는데.”

“이쪽으로 건너올래?”

 

사령관이 이불을 들추고 이리 오라는 손동작을 보이자 리리스는 침대에서 튕기듯이 일어나 재빠르게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수복실에 오기 전까지 사령관에게 다친 곳을 보여주며 칭찬해달라고 생색내는 모습이 영락없이 어린아이 같았는데, 아무렴 멀쩡한 것 같았다.

 

“너 사실 안 아프지.”

“주인님 지키려고 맞은 데가 아직 아픈걸요. 여기 팔이랑 여기, 그리고 보여줄 수 없는 곳에. 주인님이라면 보여드릴 수도 있고요.”

 

당돌한 리리스의 말에 사령관은 허허 웃기만 했다.

참으로 힘들었다.

몸의 상처는 언젠가는 아물고 극복할 수 있지만, 마음에 난 구멍은 메울 수 없다.

그저 위로 마음을 덧대기만 할 뿐, 구멍이 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리리스도 언젠가 또 같은 일을 겪게 될 수도 있다.

사령관은 다음에도 같은 방식이 통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리리스.”

“네?”

“다시는 아프지 마. 힘들어하지도 말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명령이야. 힘들고 아픈 건 나 혼자 할 테니까.”

 

리리스는 답이 없었다.

자나 싶어 고개를 돌려 옆을 봤더니 얼굴이 빨개진 채로 호박색 눈을 이리저리 굴려대고 있었다.

 

“…싫어요.”

“명령이랬잖아.”

“아프고 힘든 것. 그게 경호 담당의 일인걸요. 그러니까 주인님은 늘 곁에만 있어 주세요.”

 

리리스의 진심이 맞닿은 살결을 통해 사령관에게 느껴졌다.

이런 위로를 받는 것이 얼마 만인지,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유혹에 빠져버릴 것만 같았다.

 

긴장감이 풀리자마자 사령관의 눈이 살살 감겨왔다.

푹신한 침대, 따뜻한 이불, 은은한 체취에 피로감을 호소하던 사령관의 눈이 스르르 감기더니 이내 기절하듯 잠이 들고 말았다.

 

침대가 좁은지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사령관은 리리스를 꼭 안고는 편안한 자세를 찾은 듯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깊게 잠들었다.

굳어버린 리리스는 그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자신도 그를 꼭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오늘만은 나쁜 리리스니까, 어리광 좀 피울게요.”

 

두 사람은 서로의 체취에 잠겨 잠이 들었다.

조금은 이상한 둘만의 피크닉에 누군가 낄 틈도 없이 엉겨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새근거리는 숨소리만이 가득하고 수복실은 고요했다.

 

“식사 가져왔….”

 

다프네는 조용히 잠든 둘의 모습에 작게 웃어보이고는, 데스크에 식판을 내려놓고 조용히 불을 끄고 둘만의 피크닉을 즐기게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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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자라다는 의미에서 반푼이라는 단어를 더 자주 썼는데, 반푼이라는 말이 방언이라고 함.

반편이라는 단어는 좀 쎈 표현이긴 한데 반병신이라는 말의 준말.


반푼이라는 말이 방언인 것도 첨 알았슴...

그냥...신기해서 써봤슴...할말도 없고...


부족한 거 읽어줘서 감사...

시간 뺏어서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