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이야기가 있다."


경호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블랙 리리스는, 길을 가로막고 선 이를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어머, 바르그 양. 안 그래도 따로 인사할 생각이었는데… 하실 말씀이라도?"


바르그는 한걸음 다가오며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블랙 리리스, 너에게 대결을 신청하러 왔다."


"대결?"


바르그는 자신만만하게 삿대질 하며 일장 연설을 했다.


"그래. 들었겠지만, 나 역시 마리아 리오보로스 여제님의 경호대장이었다. 무예로 치자면 남 부럽지 않았지. 이제 새 주인을 모시게 되었으니, 너와 나 사이에 누가 경호대장에 걸맞는지 승부를 가리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주인님께도 좋은 일일 것이다. 둘 중에 더 강한 자가 경호를 맡게 될 테니까."


"…."


리리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참 바르그를 들여다보기만 했다. 바르그가 맹호처럼 이글거리는 눈으로 도발했다.


"왜 말이 없지? 혹시 겁먹었나?"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기습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에 바르그는 반사적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상대를 보자마자 멈칫한 바람에 손을 덥석 잡히고 말았다.


"아. 찾았다! 안녕하세요, 바르그 씨."


"넌…."


다가온 이는 뜻밖에도 하치코였다. 그녀는 리리스의 동생이자 경호대의 일원이었다.


"안 그래도 리리스 언니랑 같이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잘 됐어요, 헤헷."


"인사?"


"그럼요. 새 친구가 됐잖아요."


중대한 승부를 앞두고 내심 긴장하던 바르그였지만, 싱글벙글 웃는 하치코를 보자 왜인지 어깨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친구라니… 자, 잠깐. 뭐 하는."


돌연, 하치코가 웃는 낯으로 바르그의 볼을 혀로 핥아댔다.


바르그는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오르카호에 들어올 적 큰 사고를 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뒤로 이토록 친근하게 다가온 동료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하치코의 키가 더 큰 관계로 바르그는 조금 위축되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리리스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후후. 하치코 특유의 친근감 표시랍니다. 우리 하치코가 바르그 양이 마음에 들었나 봐요."


"마음에 들다니… 난 아무것도…."


"당신도 강아지 유전자가 있으니 이해할 거예요."


순간 얼굴이 붉어진 바르그는 머리 위의 강아지 귀를 쫑긋거리며 발끈했다.


"누, 누굴 보고 개라는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누군가 접근해왔다. 그러나 하치코 탓에 경계를 풀고 있어서 다른 팔도 맥없이 잡히고 말았다.


"오. 바르그 왔구나? 잘 됐어."


바르그가 돌아보니 붉은 머리의 늑대개 소녀 펜리르가 아닌가. 그녀 역시 컴패니언이었다.


"넌…."


"나 알지? 나 펜리르야."


"펜리르라고?"


잘 모르겠단 시선에 펜리르가 도리어 의아한 표정이었다.


"왜 그래. 우린 자매잖아. 네가 내 유전자를 써서 태어났으니까 말야."


자매라고? 말문이 막혀서 있으려니 펜리르는 웃는 낯으로 별안간 바르그의 볼을 깨물었다. 하치코와 마찬가지로 펜리르의 키가 더 큰 관계로 바르그가 안기는 것처럼 되었다.


"악, 뭐 하는 짓이야!"


바르그가 찔끔 놀라서 소리쳤으나 펜리르는 천연덕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펜리르는 늑대 같은 아이라서, 애정의 표시로 볼을 깨물곤 해요. 기뻐해도 좋아요, 펜리르도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


양쪽에서 핥기 공격을 당하는 바르그를 지켜보며 리리스는 빙글빙글 즐기는 모습이 역력했다.


싸우러 왔다가 난데없는 스킨십 세례를 받고 바르그는 오직 어쩔 줄 몰라할 따름이었다.


"그, 그만… 우하핫." 펜리르가 간지럼을 태우는 바람에 실소마저 터뜨릴 지경이었다.


"아, 맞다! 바르그 언니, 우리 밥 먹으러 가지 않을래요? 하치코 배고파요."


바르그를 물고 늘어지던 하치코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꺼낸 말이었다.


"…밥?"


"아, 그러고 보니 슬슬 저녁 시간이네요. 내 정신 좀 봐… 바르그 양도 저녁 안 먹었죠? 같이 먹으러 가요."


"밥이라니…."


바르그가 우물거리는 동안 펜리르가 채근했다.


"배 안 고파? 히말라야 산도 식후 땡이라고."


"아니, 배는 슬슬 고파지는데."


"그럼 혹시 선약이라도?"


"선약? 별로… 없지만."


"그럼 가기로 하는 거예요."


결국 바르그는 어쩌다 보니 리리스를 따라 컴패니언들과 저녁을 같이 먹게 되었다.


이날의 식사엔 근무를 하러 간 포이를 제외한 다른 자매들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리리스는 될 수 있는 한 자매들의 식사를 직접 챙겼는데, 오늘은 평소보다 더욱 풍성한 식단이었다.


"바르그 양. 이것도 드셔 보세요."


다른 자매들도 바르그를 꺼리지 않고 이것저것 물어 보거나 음식을 권하기도 했다.


"…으음."


뜻밖의 환대에 바르그는 어색할 따름이었다. 더욱이, 가족을 자체하는 이들에게 둘러쌓일 줄은 몰랐다.


예전 주인이 세상을 떠난 뒤, 언제나 홀로 밥 먹는 데 익숙했던 그녀로선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자리였다.


식사도 마치고 이런저런 이야기 - 주로 컴패니언이 묻고 바르그가 답했지만 - 를 나누던 와중 펜리르가 불쑥 말했다.


"우리 밥도 먹고 배부른데 같이 게임이나 하러 갈래?"


"그러고 보니 사격장에 새로운 모델건이 나왔다고 했죠… 음, 펜리르의 훈련을 겸해서 식후 운동이나 하러 갈까요."


리리스는 웃는 얼굴로 바르그를 보았다.


"당신도 갈 거죠?"


"나? 아니, 난…."


눈이 마주친 바르그는 우물거렸다.


"같이 가서 놀아요. 별로 사격에 자신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


"…! 무, 물론이다. 이 난 엠프레시의 하운드의 대장으로서 사격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바르그는 그 모양으로 사격장에서 펜리르와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사격을 하고 보니, 펜리르와 바르그는 둘다 막상막하로 실력이 좋지 못했다.


아닌게 아니라 둘은 같은 혈통 답게 쌍검으로 접근전을 하는 것이 장기여서 사격은 아마추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캬하하, 내가 이겼다!"


펜리르는 그래도 경호팀 훈련을 받았다고 바르그보다 3점 정도 앞섰다.


늑대소녀가 주변을 빙빙 돌며 놀려 댔지만, 약이 오른 바르그는 그저 입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혼자 무예를 닦았다고 생각했는데 사격 실력이 형편없으니, 평소 여제의 사냥개 부대 대장이라고 자부했던 체면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앞으로는 검술만이 아니라 사격도 훈련해야겠어. 바르그는 부끄러우면서도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이때 리리스가 나서서 마냥 좋아라 하는 펜리르를 나무랐다. 적당히 바르그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함이었다.


"펜리르. 자랑할 일이 아니에요. 바르그 양이야 오랜만에 총을 쏘니까 빗나간다 쳐도, 사격 훈련 좀 더 해야겠어요."


"피이. 난 글레이프니르를 쓰니까 총은 안 써도 된다고…."


"훈련이 저조하면 주인님이 실망하지 않겠나요."


"알았어."


짐짓 엄한 표정에 펜리르는 꼬리를 내렸다. 바르그도 헛기침을 하며 총을 거두었다.


"자, 사격은 이쯤에서 슬슬 그만하고. 모처럼이니까 노래방에 가죠."


"찬성! 헤헷."


하치코가 해맑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바르그는 이번에도 머뭇거렸으나, 분위기에 휩쓸리는 바람에 거절하지 못했다. 사실, 노래방이라는 곳에 간 적이 평생 드물었던지라 약간의 긴장마저 하고 말았다.


어머님과 살 적에도 가 본 일이 한두 번 뿐이었는데.


- …내가 그대를 더 알게 될수록

그대 마음도 내 맘과

같길 바라죠

이런 맘 들키고 싶지 않지만

말하지 않아도 나를 안아주세요…


자매들과 한 곡조 뽑아 부른 리리스가 어색한 눈치인 바르그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바르그 양도 불러요. 기왕 노는 날이니까."


"난 노래를 잘 하지 못하는데…."


"괜찮아요. 다들 가수도 아닌걸요?"


리리스에 이어 하치코가 자꾸 권하자 바르그는 마지못해 자신이 평소 듣던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 …가을빛 물든 언덕에

들꽃 따러 왔다가 잠든 나…

아마 나는 아직은 어린가 봐 그런가 봐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기다리니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보고 싶지…


바르그는 노래를 하면서 목이 잠겨왔다. 이어서 자칫 눈물 흘릴 뻔한 것을 간신히 삼켰다. 돌아가신 예전 주인이자 어머니로 모시던 사람이 떠오른 탓이었다.


왜 지금 그런 마음이 들었는가.


컴패니언들을 보고 무의식 중에 다시금 가족을 떠올리게 된 탓일까. 혹은, 어머니처럼 자매들을 보살피는 리리스의 모습을 본 때문일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허나 어느 쪽이든 바르그로서는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컴패니언들도 바르그의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아무 말 없이 들어 줄 뿐이었고, 노래가 끝나자 박수로 화답해 주었다.


자리가 파하고 다들 바깥에서 바람을 쐬던 중, 리리스가 멈춰 서서 펜리르를 보고 말했다.


"펜리르. 이제 근무하러 갈 시간이에요."


"응, 알아. 그럼 나 먼저 갈 게."


펜리르는 기지개를 펴며 물러갔다.


다른 자매들도 각자 일이 있다고 떠나고, 하치코와 바르그만이 남았다.


"하치코. 물 좀 떠올래요?"


"네? 네."


리리스가 넌지시 하는 말에 하치코도 냉큼 자리를 떴다.


그리하여 바르그와 단둘이 있게 되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주변엔 다른 대원들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조용한 가운데 먼저 침묵을 깬 쪽은 바르그였다.


"크흠! 자. 이젠…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을 거다. 승부를 보자."


바르그가 정색하자 리리스는 살며시 웃었다.


"아직도 그런 이야기를."


리리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끄러지듯 바싹 다가와 바르그의 옆머리에 총구를 대었다.


"!"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에 바르그는 흠칫하고 놀랐다. 이런, 선수를 뺏기다니.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리리스의 말이 이어졌다.


"이대로 방아쇠를 당겨서 소뇌를 뚫으면, 당신은 운동 능력을 상실하고 움직이지 못할 테죠."


잠시간 같이 놀았던 탓인지 방심해 버렸다. 바르그는 눈을 감고 묵묵히 있다가 중얼거렸다.


"정신적으로 풀어져 있었군. 이런 기습을 허용하다니…."


"원래의 당신이었다면 이런 빈틈도 없었을 텐데."


"그래… 내가 졌다."


나직하게 중얼거린 바르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따지고 보면 하치코와 펜리르가 엉긴 시점에서 그녀는 패한 셈이었다. 적어도 바르그의 사고관으로는 그랬다.


"글쎄, 저도 이긴 건 아니니까요. 진짜 적이었으면 이렇게 말할 필요도 없이 바로 쐈겠죠."


"…."


"우리 모두 주인님을 모시는 입장에서, 훈련도 아니고 사적인 대결로 서로 상처 입힐 수도 없는 일이에요. 당신의 말마따나 당신은 주인님께 도움이 될 인재니까."


타이르는 듯한 리리스의 말에 바르그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 이 싸움은 서로 진 걸로 하죠. 무승부예요."


상대가 이렇게 나오는데 계속 싸움을 걸기도 뭣했다. 머쓱해진 나머지 서로 마주 보고 있자 어느새 하치코가 쪼르르 달려와 물통을 두 병 내밀었다.


"다녀왔습니다."


뜻밖의 일격에 당황했던 것일까, 불현듯 갈증을 느낀 바르그는 고맙게 받아 마셨다. 그러나 하치코는 방금 전의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웃으며 열심히 재잘거릴 따름이었다.


"바르그 언니. 다음에 또 놀아요."


"그래…."


헤어질 때도 하치코는 웃는 낯으로 손을 흔들었다. 바르그는 적이 무안한 기분으로 마주 인사하며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바르그 건을 마무리한 뒤, 리리스는 돌아오는 길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시 주인님의 판단이 옳았어.


사실, 남자는 호전적인 바르그의 성품과 예전의 역할을 생각하면 어떤 식으로든 리리스와 부딪힐지 모른다고 판단해 놓고 있었다. 마침 리리스도 일찍이 그런 낌새를 눈치채고 상담을 해 왔던 것이다.


궁리하던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 직접 싸우지 말고, 마음을 공략하는 게 어떨까. 병법에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상책이라고 하잖아.


- 마음이요?


- 바르그는 진지하니까, 싸우다가 서로 크게 다칠지 몰라. 내 생각에는 싸움보다는 다른 방향으로 풀어가는 게 좋다고 생각해.


- 다른 방향이라면….


- 이를테면, 하치코는 모두와 잘 지내지 않니? 펜리르도 자신의 사촌을 보는데 반가워할 거야.


리리스는 남자의 말에 힌트를 얻어서, 미리 동생들과 머리를 맞대고 상의한 끝에 바르그와 싸우는 대신 환대한 것이었다.


운이 다소 따라주긴 했어도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물론, 바르그가 컴패니언을 찾아갔다는 첩보를 들은 남자도 곧 전화로 결과를 물어 왔다. 그 역시 자신의 전력들이 서로 싸워서 상하는 걸 원하지 않았던 참이었다. 리리스는 웃는 얼굴로 잘 끝났다고 답해주었다.


- 모두, 주인님 덕분이에요.


- 내가 뭘… 리리스가 현명하게 잘 대처했지.


- 후후후. 물론 펜리르와 하치코의 도움이 컸어요. 역시 피는 못 속인달까요.


- 잘 됐네.


- 나중에 그 애들한테 상을 주셔야 해요.


- 당연하지.


남자와 리리스는 만족한 채로 전화를 끝냈다.


한편, 그날 이후로 바르그가 노래방에 갔다는 소문은 금방 퍼졌다.


바르그의 예전 동료 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가끔 노래방에 같이 가기를 권했고, 그녀는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어울리게 되었다.


덕분에, 바르그는 오르카호에서 처음 맞이하는 겨울이 춥지만은 않다고 생각할 때가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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