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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질문입니다만,”

 

착, 고급스러운 스노우지가 덮이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폐하는 지금도 주무시고 계신가요?”

 

한숨이 나올 듯 조그맣게 벌린 입으로 아르망이 물었다. 그녀 옆에서 진땀을 빼고 있는 사람은 다프네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니라 수간호사님이 오셨었다면...”

 

“어쩔 수 없죠. 그분도 이젠 쉬셔야죠. 세상 무엇보다 고운 보석을 품고 계신 몸이시니.”

 

다시 표정을 고쳐 아르망이 웃으며 이야기했다. 썩 좋지 않은 감정이 안면에 스며들 뻔했으나, 마음을 숨기는 것 하나만큼은 시라유리에 지지않을 만큼 뛰어났기에 빙그레 웃을 수 있었다.

 

그녀의 앞에서 쭈구려 앉은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사람은 다프네. 정확히는 사령관이 바뀐 다음 오르카 호로 합류한 다프네였다.

 

사령관이 뛰어난 사람이란 건 알고 있지만 딱 그 정도뿐인 세대.

 

아르망과 같은 1세대의 바이오로이드가 보기에 그들은 딱하디 딱한 철부지들에 불과했다.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니 폐하를 실수 없이 보살필 수 있겠지.’

 

이전에 사령관이 쓰러졌을 때, 수간호사였던 다프네는 극심한 긴장으로 진료를 볼 수 없었다. 주사기 하나를 쥐는 것도 힘들 만큼 손을 떨었던 것을 보면 지금까지 온 것도 참 용하다.

 

“그럼 들어가 쉬세요. 나머지는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 추기경님?”

 

삐걱거리는 무릎으로 간신히 몸을 일으키던 다프네가 아르망을 보며 말했다.

 

허나 아르망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추기경이라 부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호칭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아... 네. 그러셨죠. 죄송합니다.”

 

아르망은 혀를 차며 생각했다.

 

‘하필 철충 놈들이 그런 호칭을 쓸 건 또 뭐람.’

 

사향, 데우스, 그 다음에 이름 모르는 무명(無名)의 추기경까지. 그놈들은 생각만 해도 진저머리가 난다. 특히나 그녀에게 ‘사령관의 죽음’이라는 데이터를 수백 번씩 반복해서 보여준 사향만큼은 더더욱.

 

‘그 씨발새끼를 내가 죽였어야...’

 

“네?”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때에 떠올리기엔 좋지 못한 기억이다.

 

아르망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자애롭게 대답했다.

 

“그나저나 아까 뭘 물어보려 하셨죠? 아직 질문을 듣지 못한 것 같아서.”

 

“아, 그... 별 건 아닙니다만.”

 

“?”

 

다프네는 주변을 조심히 살피며 눈치를 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 그... 추기경님은... 괜찮으십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원래 1세대 분들은 다들 자기 자리에서 중역을 지키시느라 이 병원엔 많이 안 계신 걸로 압니다. 하지만 제가 만나 뵀던 분들은 전부 표정이 좋지 않으셔서...”

 

“... 그래서요?”

 

“아... 그, 그래서 1세대 분들은 워낙 많은 시간을 함께 하셨으니까 지금 주인님의 모습을 보고 힘들어 하시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르망 님은 유독 괜찮아 보이셔서 여쭤봤습니다. 너무 참고 계시면 병이 될 수 있으니까요.”

 

병이라.

 

“......”

 

안 그래도 요즘 따라 속이 쓰리다 생각했다. 들고 다니던 책도 배로 무겁게 느껴졌고, 아침잠이 예전에 비해 유독 많아졌다.

 

늘어지고, 귀찮아지고, 의욕이란 감정을 잊어버린 듯한 감각. 병이 있다면 분명 이런 거겠지. 아마 홧병 비슷한 무언가이리라.

 

“괜찮습니다.”

 

하지만 아르망은 내색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다프네 양은 잘 모르겠지만, 다프네 양이 오기 전에는 이런 일이 수도 없이 많았답니다.”

 

“이런 일이라 하시면...?”

 

“뭐, 사람이 쓰러진다던가, 아침에 가보면 천장에 목을 매달고 죽어있는 상태로 목격된다던가, 자고 일어났더니 손가락 몇 개가 사라져버렸다던가, 그런 거 말이죠.”

 

아르망의 말에 다프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에...?”

 

“물론 지금은 없는 일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여하튼, 그런 일들을 겪고 나니 이런 일에는 괜찮아지더군요. 그러니 이해하려 하지 마세요.”

 

가까스로 일어서 있던 그녀의 팔을 붙잡고 부축해 일으켜준 후, 아르망은 사령관이 있는 방 안으로 향했다.

 

“저... 질문 하나만 더 해도 괜찮을까요?”

 

다프네가 그녀를 잡았다.

 

“그런 곳을 이렇게 바꾼 사령관님은 대체 어떤 분이시죠?”

 

실로 근본적인 질문.

 

“오르카 호의 과거는 가끔씩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만, 누구도 제대로 말해주진 않았습니다. 레아 언니가 알면 안 되는 거라 말씀 해주셨지만, 주인님에게 은총 받은 몸으로서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

 

“주인님께서 아픈 과거를 견뎌내셨다면 저희가 도와드려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그분 혼자서 감당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다프네 양.”

 

아르망은 차가운 어조로 다프네의 말을 끊었다.

 

순식간에 달라진 분위기와 서늘함마저 감도는 공기. 1세대 바이오로이드의 위압감을 눈앞에서 목격한 다프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호기심은 좋은 동력입니다. 하지만 과하면 해가 될 수도 있지요.”

 

“그래도 주인님을 위해서...”

 

“지금까지 질문 두 가지를 하셨으니 이번에는 제가 묻겠습니다.”

 

오감이 아득해지는 떨림.

 

“당신과 같은 질문을 제게 한 바이오로이드가, 지금까지 몇이나 될 거라 생각하십니까?”

 

눈빛이 핏빛과도 같아 차마 볼 수 없었다. 말 속에 담겨 있는 과거의 악취가 너무 지독해 차마 맡을 수 없었다. 음성을 담는 어조가 지독히도 낮아 들을 수 없었다.

 

이게 1세대, 그중에서도 사령관의 곁을 보좌한 추기경의 힘.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미지의 위압에 그녀의 입은 스스로 다물어졌다.

 

“...... 죄, 죄송합니다.”

 

“알 필요가 없는 것은 알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아닌 폐하께서 선택하신 일이니 따르세요. 그게 그분께서 내리신 유일한 명령입니다.”

 

솜털이 돋을 정도로 긴장해버린 다프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그제서야 고요해진 복도. 침묵이 맴도는 공간 안에서 아르망은 무거운 자신의 책을 들고 방 안으로 향했다. 안에서 있을 사람들을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수 없던 탓이었다.

 

‘... 명령.’

 

그는 평생 자신의 입 밖으로 명령을 내뱉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권리를 제 손으로 버리려 안간힘을 썼던 사람이다.

 

물론 그 행위에 선하다는 꼬리표를 붙이거나, 지혜롭다 같은 수식어를 붙일 수는 있겠으나, 완벽했다는 말로 꾸밀 수는 없었다.

 

그 스스로가 완벽한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그리하여 그가 마지막으로 내린 명령은, ‘잊으라.’였다. 

 

“... 폐하.”

 

아르망이 건의하지 않았다면 과거의 일을 담은 소설을 쓸 일도 없었을 것이다. 모든 기록을 전부 1급 기밀로 돌려놓고 아무 일 없던 듯이, 새로 온 바이오로이드들을 아늑한 오르카 호로 인도했을 것이다.

 

허나 그가 완벽한 인간이 아니었으니 그가 내린 명령도 완벽할 수 없는 법.

 

“... 예쁜 꿈을 꾸시길 바랄게요.”

 

그녀는 여전히 그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었다.

 

삶 전체가 요동쳤을 때도 자신들을 위해 도망치지 않았던 그를, 설령 생명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사랑을 멈추지 않았던 그를.

 

그런 기억을 잊지 못하는 그녀였기에, 방 안으로 들어서는 발걸음에 머뭇거림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예쁜... 꿈을...”

 

그래.

 

울지 말자.

 

이제 와서 울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어.

 

아르망은 망토에 묻은 먼지를 가볍게 툭툭 털어낸 다음, 그를 향해 걸어갔다.

 

톡.

 

작은 물방울 하나가 흘렀다.

 

하지만 유독 날이 건조한 겨울이었기에, 물방울은 금세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지금까지 죽여온 수만 방울의 물방울과 마찬가지로.

 

“이제야 왔군요. 아르망 추기경.”

 

“예, 조금 늦었습니다.”

 

조금 숙인 허리와 가벼운 목례.

 

그녀는 늘 그랬듯 인사를 건넸다.

 

 

 

*

 

 

 

“흠...”

 

“닥터?”

 

“흠...”

 

“닥터...?”

 

“흐으으음......”

 

모니터로 사령관의 상태를 스캔하던 닥터는 입을 삐죽 내밀고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기기로 온몸을 싹다 스캔해봤지만 나오는 흔적은 전무. CT 사진에는 그 흔한 하얀 점도 없었고, MRI 기록을 봐도 눈에 띄는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세상에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 하지 않았나?

 

그러니 닥터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지금 상황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짜증났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고? 대체 뭐가!”

 

쾅!

 

“히익!”

 

“대체! 씨발! 내가 뭘 모른다는 건데! 씨발!”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수라장이 얼만데.

 

결국 육두문자가 튀어나오는 닥터였다. 곁에 있던 트리아이나가 깜짝 놀라며 의자 위에서 넘어졌다.

 

“... 어, 뭐야. 벌써 왔어?”

 

“오기야... 하하, 아까 전에 왔지...”

 

“언제?”

 

“대충... 저기 안에 리리스랑 아르망이 와있었을 때부터? 근데 저 둘은 아까부터 무슨 얘기를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몸을 일으킨 트리아이나가 창문 밖 이야기를 하고 있는 아르망과 리리스를 가리켰다.

 

“한 명은 눈만 깜빡이고 있고, 다른 한 명은 손톱 뜯고 있... 아니, 저거 지금 손가락 물어 뜯고 있는 거 아냐...?”

 

특히나 자기 엄지 손가락을 냠냠 씹어먹고 있는 리리스를.

 

양 눈이 터질 듯이 빨개져 있는 그녀는 아르망이 그녀의 아랫배를 가리키고 나서야 자기 손가락 물어뜯는 것을 멈췄다.

 

“괜찮아. 내버려 둬.”

 

“저, 저저저저거 임산부가 저래도 돼?”

 

“당연히 안 되지. 그런데 저 짓거리라도 못하게 놔두면 스트레스로 홧병 나서 죽어버릴 걸.”

 

“그런가...”

 

“그러니까 이쪽 일은 신경 꺼. 그보다 밖으로 얘기가 세어나가진 않았겠지?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언니라 믿고 말해준 거야.”

 

닥터의 물음에 트리아이나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으스댔다.

 

“당연하지! 내 입은 생각보다 무겁다고? 인류 최초... 아니, 트리아이나 중 최초로 우주까지 찍고 온 초천재 모험가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

 

트리아이나가 우쭐거리며 자신의 업적을 으스대자 닥터가 영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 얼굴은?”

 

“아니, 이쪽도 저짝 못지 않게 진짜 마이페이스구나 싶어서.”

 

“저짝?”

 

“이번에 새로 데리고 온 장화라는 애 있어. 못 되게 생겨 가지고 말도 드럽게 안 들어처먹지. 강화 시술할 때 마취해주겠다는 걸 꾸역꾸역 거절하고는...”

 

말 그대로 뼈를 깎고 살점을 도려내는 강화 시술을 맨정신으로 버티다니.

 

태생이 미친년이었던 건지, 아니면 미친년이 되도록 살아온 건지, 둘 중 하나는 확실하겠다 생각한 닥터였다.

 

“음. 뭐 다 자기 사연이 있겠지. 그런데 사령관이 아프다는 건 내가 믿음직해서 알려준 거 아니었어?”

 

“아니, 그냥 혼자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히키코모리 같아서 알려준 건데.”

 

“엥?”

 

“이번에 잠수정 빌려줬을 때 GPS 로그 살펴보니까 저 어디 마리아나 해구까지 갔다 왔더구만. 오빠 같은 별종이 아니고서야 같이 가줄 사람은 없겠지.”

 

“......”

 

그새 그런 것까지 찾아보고 그러냐.

 

트리아이나는 입을 댓발 내밀고 툴툴거리며 발을 굴렀다.

 

“뭐 아무튼. 빌려줬던 잠수함은 오빠랑 아르망 언니가 잘 썼으니 다시 가져가도 돼.”

 

“진짜?”

 

“응. 어차피 이쪽에도 간이 잠수정 정도는 있고, 이미 묘지 내부에 침투조가 들어가 있으니까 더 들어갈 사람은 없을 거야.”

 

무심하게 말하는 닥터의 패널 너머로 묘지 내부 상황을 찍고 있는 카메라 드론이 보였다.

 

수십 개로 나뉘어진 화면 속에는 수십 명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진을 치고 순서대로 움직이며 고블린들을 소탕하고 있었다. 수천 마리의 고블린이 일말의 과장도 없이, 말 그대로 물밀 듯이 몰려들고 있었지만, 오르카 호의 대원들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대륙에 있는 지휘관들의 정예 부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이곳에 있는 바이오로이드들도 나름대로 에이스들이니까.

 

“물론 대규모 작전을 진행할 수는 없어서 조금씩 퇴각시키고 있긴 한데, 소탕 작업이 끝나면 남아 있는 사람들만으로도 데이터 회수는 할 수 있을 거야.”

 

닥터의 말에 트리아이나가 고개를 쑤욱 빼들어 패널 속 화면을 바라보았다.

 

“...저기 있는 잔해들이 전부 다 고블린이야?”

 

“지금까지 잡은 거에 비하면 일부지.”

 

“아니 어떻게 저런 데에 남을 생각을 다 하지? 나였으면 당장 잠수함 타고 도망쳤을 거 같은데... 혹시 제비뽑기 같은 거로 남기니?”

 

“남겠다 자원한 팀이 있었는데 굳이 뽑기를 해야 해?”

 

자원했다고?

 

트리아이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다시 한 번 화면 속 카메라를 보았다.

 

질척거리는 살점. 길게 늘어지는 체액, 보기만 해도 비린내가 나는 듯한 시신 더미들. 보고 있자니 빈속에 헛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으으... 하여튼 이렇게 잘 싸우는 사람들 보면 신기해.”

 

“언제는 우주까지 갔다온 초천재 모험가라면서.”

 

“우주 가는 거랑 잘 싸우는 거랑은 다르거든?”

 

“우주까지 갈 수 있는 잠수정으로 몸통 박치기만 해도 잘 싸우겠다.”

 

“내 소중한 잠수함을 그런 무식한 전술에 희생할 리 없잖아!”

 

“아. 그래.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트리아이나에게 뒤로 가라며 손을 휘적인 닥터가 패널을 덮고 기판 위에 버튼을 눌렀다.

 

삐빅-

 

치직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사령관의 병실과 연결되는 마이크. 들려오는 소음에 병실 안에 있던 아르망과 리리스가 고개를 돌려 천장의 카메라로 시선을 돌렸다.

 

“언니들, 내 말 들려?”

 

“네, 들립니다. 닥터 양. 뭔가 알아내신 것이 있으신지요?”

 

서 있기 버거운 것인지, 찬 바닥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아르망이 대답했다.

 

“물론. 오빠가 쓰러진 것도 이제 일주일이 됐는데 아무것도 얻어낸 게 없으면 닥터가 아니지.”

 

“그리 말한다는 것은?”

 

닥터는 아르망과 리리스의 패널 위로 보고서 양식의 파일 하나를 보냈다. 알림 소리가 들리자 둘은 동시에 자신의 패널로 고개를 돌렸다.

 

“이게 뭔가요?”

 

“오빠의 옛날 신체 스캔 기록.”

 

“갑자기 이건 왜...”

 

“지금까지는 현재 스캔 기록과 과거 기록을 AI로 대조하면서 유사점을 봤거든? 데이터베이스의 크기가 거진 테라바이트 수준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해도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어서 결국 내가 직접 하나하나 다 비교해봤어. 그러더니 뭔가 걸리는 게 있어서 보여주는 거야.”

 

둘은 송신된 메일 속 파일을 열어보았다.

 

사람 모양의 그림 위로 복잡하게 표시되어 있는 신경계와 혈관계. ‘전신’ 스캔 기록이라는 명칭이 아깝지 않게 신체의 모든 기관이 자세하게 찍힌 사진 수십 장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집중해서 보았던 것은 그게 찍혔던 날짜.

 

“이건...”

 

“오빠가 처음으로 몸을 바꿨을 때 찍었던 사진이야. 자세히 보면 전두엽과 해마 부분에 뭔가가 걸려 있지.”

 

그녀의 말에 조금 더 날 선 눈으로 사진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확실히 작은 반점 같은 것이 두뇌에 찍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사진 몇몇 개에서만 간헐적으로 보이는 자국일 뿐. 대다수의 사진에는 자국은커녕, 그것과 비슷한 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사령관의 진짜 얼굴을 본다는 감격에 자세히 본 적 없는 기록이었지만 이렇게 보니 확실히 이상해보였다.

 

기다리길 싫어하는 리리스가 먼저 닥터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의미야?”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나도 몰라.”

 

“뭐?”

 

“원래 그 정도 크기의 점이 찍힐려면 거기에 동전 크기만한 종양 같은 게 있어야 해.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지. 게다가 같은 기계로 찍어도 언제는 찍히고 언제는 안 찍히지. 나도 그때는 몰라서 그냥 넘어갔던 거야.”

 

“몰라서 넘어가? 네가?”

 

지식이라면 폐허 속에서 발견한 멸망 전 논문 더미에라도 눈을 반짝이는 닥터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고?

 

닥터는 잠시 입술을 짓씹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 뭐, 그때는 우리 다 분위기 좋았으니까 구태여 숭한 말 해서 분위기 깨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 그리고 그것보다도...”

 

“그것보다도?”

 

“오빠가 신경쓰지 말라고 했거든.”

 

“주인님이?”

 

리리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실 오빠가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보여준 게 이 사진이었는데, 잠깐 고민하더니 나한테 신경 끄라고 했어. 내가 고민할 문제가 아니라고.”

 

“그 말은... 주인님은 이게 뭔지 알고 있었다는 건가?”

 

“오빠한테는 여기가 2회차니까... 괜히 멋있는 척 하겠다고 모르는 걸 안다 할 사람은 아니지.”

 

가능성 있는 추측이었다. 그녀들이 지금껏 만나왔던 사령관은 고작 허세 따위를 위해 자신의 안위를 가벼이 여길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자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위험을 무릎쓰지 않았다. 지휘관들에게 지금 몸 상태를 알리지 말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허나 그 사실이 위안이 되지는 못했다.

 

“운이 좋다면 오빠가 치료법을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가 알고도 이 상황을 방광했다는 것은, 좋게 생각하면 이대로 내버려둬도 다시 일어설 가능성이 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확신이 있기에 말을 하지 않을 것일 수도 있으니까. 사랑 받는 것 이상으로 사랑하기에 자신들을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일 지 모른다.

 

그가 자신의 몸 상태를 몰랐을까? 몸이 아픈 걸 숨기면 악화될 것임을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왜 자신이 쓰러질 때까지 아프다는 얘기조차 하지 않았던 것일까?

 

닥터는 말없이 펜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으직,

 

펜 위로 균열이 일었다. 그녀의 몸은 이제 과거와 달리, 플라스틱 조각 따위는 쉽게 부술 만큼 강인해졌다.

 

당신도 이만큼 강하게 만들어줬는데.

 

그런 생각이 피릭,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면 생각을 정리해보도록 하죠. 폐하께서 겪고 계신 이 질병의 증상은 이미 예전에도 보였던 적이 있었고, 닥터 양은 그 정체를 모른다. 맞습니까?”

 

“응. 시간 날 때마다 계속 데이터를 모아보려 했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어. 보다시피 같은 몸을 같은 기기로 찍어도 나올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으니까.”

 

“그 말은, 이 병의 정체를 폐하께선 알고 계셨고, 닥터 양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는 거네요.”

 

아르망이 팔짱을 낀 채 턱을 괴었다. 리리스 역시 비슷한 자세를 취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닥터가 뭔가를 모른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으나 그 이상으로 기이한 것은 사령관의 태도였다.

 

지식이란 분야는 닥터에게 한해서 두 가지로 나뉜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거나, 앞으로 알게 될 것이거나.

 

그녀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단지 시간이란 재화가 부족하기에 발생하는 상태 이상에 불과하다. 헌데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감조차 잡지 못한 지식이라고?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 순간, 아르망과 리리스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외력外力”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유일한 기술.”

 

리리스는 손가락을 발작적으로 톡톡거리며 사고를 이어갔다.

 

“절대방위지역의 거대 AGS도, 철충의 감염 성채도 부석하고 전부 다 이해했어. 그런데 지금까지 정체도 파악하지 못한 게 별의 아이의 힘, 외력이야.”

 

“물론 그 외의 다른 세 번째 요인일 수도 있습니다. 허나 폐하께서 그리 단호하게 말씀하셨다면 분명 폐하께서 알고 계신 것, 그러면서 저희에게 숨기려 하신 외력의 존재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점점 잠이 길어지는 증상 역시 별의 아이가 촉발한 휩노스 병과 유사하니까.”

 

점차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될 때까지 그녀들이 아무 것도 밝힐 수 없었던 것도, 증상이 휩노스 병과 비슷한 것도, 전부 다 설명이 가능했다.

 

“하지만... 휩노스는커녕 FAN 파조차 검출되지 않는 걸?”

 

“FAN 파가 휩노스 병을 유발하는 유일한 촉매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별의 아이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 생물인지조차 우리는 모르고 있으니까요.”

 

“그럼 오빠는 왜 그런 위험한 걸 설명도 안 하고...”

 

“폐하께서 생각이 있으셨을 겁니다. 지금은 그리 믿어야 할 때지요.”

 

톡톡 거리던 아르망의 손가락이 멈췄다. 자기 나름대로 각오를 다졌다는 의미였다.

 

리리스도 마찬가지. 피가 흐르는 엄지를 반대쪽 손으로 감싸며 사령관이 누워있는 자리 옆으로 다가가 조용히 그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닥터.

 

“으으... 오늘은 온 타이밍이 영 좋지 않네...”

 

그리고 그걸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트리아이나가 있었다.

 

“그러면 일단은... 병의 정체는 저거랑 관련된 거라 생각하면 되겠지? 안 그래, 닥터? 저렇게 생각하면 명료하잖아.”

 

“......”

 

“나야 고물 잠수정만 뽈뽈뽈 타고 다니는 모험가라 자세한 건 모르지만 저것도 나쁘지 않은 가설인 거 같은데. 왜, 지금까지 닥터한테서 들은 풍월이 있잖아. 그걸 전부 다 종합해서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중에선 가장 가능성 있는...”

 

“아니야.”

 

닥터가 날 선 어조로 트리아이나의 말을 잘랐다. 자신의 문장 속에서 툭 튀어나온 차가운 말 한마디에 화들짝 놀란 트리아이나가 닥터를 조심히 쳐다보았다.

 

화가 난 건가?

 

아니, 화가 난 거다.

 

닥터의 손에 쥐어져 있던 펜이 이제 90도로 꺾여 있었다. 뾰족한 단면이 손가락을 꾹꾹 찌르고 있으니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면 안 돼.”

 

닥터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윗니로 짓이기듯 씹었다. 으직거리는 소리는 입술 껍질이 아닌 입술 자체가 뜯어지는 듯 섬뜩한 울림을 내뿜었다.

 

그제야 트리아이나도 한 걸음 생각을 더 나아갈 수 있었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좋은 것이다. 허나 그렇게 알게 된 것이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모르는 것 하나를 해결하니 다른 하나가 또 튀어나오니, 아니, 차라리 하나만 튀어나왔다면 다행일 것이다. 별의 아이는 지금껏 그녀들이 마주한 그 어떤 종족보다도 알고 있는 것이 적은 존재들. 모르는 것 하나를 해결했더니 모르는 것 수백 개가 동시에 튀어나온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게 그저 일반적인 연구였다면 쾌재였겠지. 허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아르망 언니.”

 

“...예.”

 

“만약... 만약 진짜로 이게 외력이랑 관련된 질병이라면, 그럼 지금 우리가 오빠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뭐지?”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서술어가 더 잘 어울릴 것이다.

 

“아무 것도 없나?”

 

“......”

 

“진짜 아무 것도?”

 

“... 없지는 않습니다.”

 

아르망이 확신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기억하시겠습니다만 일전에 폐하께서 두 번째 추기경을 상대로 외력을 사용하셨을 때, 무리한 운용으로 신체 일부가 훼손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말은 외력이 물리적인 육신을 훼손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 그건 저희가 막아드릴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지금까지 했던 일을 해야지요. 오미크론 섹션에서 유기물 재생 코드를 찾아 폐하의 육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키는 일 말입니다.”

 

아르망은 조심히 옆에 앉아 있는 리리스를 보았다.

 

작지만 확실히 부풀어 있는 배. 자세히 보지 않으면 티도 나지 않을 만큼 작은 생명의 흔적이었지만 그 모습에 만감이 교차했다.

 

자신의 아이를 보지도 못한 폐하를 이대로 떠나보낼 수는 없다.

 

저 불쌍한 여자를 과부로 만들 수는 없다.

 

과부조차 되지 못한 자신을 위해서라도 포기할 수 없다.

 

헌신, 동정, 이기심, 무어라 불러도 좋을 감정들이 한 가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하면 됩니다.”

 

죽음이 그를 앗아가지 못하게 하자.

 

아르망은 난생 처음으로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 그래, 좋아. 그럼 하던대로 하자고.”

 

“닥터 양, 지금 고블린 소탕 작업이 어떻게 되고 있죠?”

 

“일단은 오미크론 섹션 중심부까지는 마무리 되고 있는 추세야. 버려진 유기물들이 자동으로 회수되고 있긴 하지만 고블린이 새로 만들어지고 있지는 않고 있고.”

 

“오미크론 섹션의 프로세스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걸까요... 일단 호재는 맞는 것 같군요.”

 

“악재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잖아.”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이 있나요?”

 

닥터는 너저분한 책상 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작은 태블렛 하나를 찾아냈다. 그 안에 적혀 있는 무수한 메모 중 하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데이터 회수에는 대규모 작업이 불가능하니까 한 팀만 남기고 내일 다 철수할 예정이야. 남은 팀은 자원 받아서 한 거고 실력도 나쁘지 않으니까 괜찮겠지.”

 

“닥터가 그렇게 말한다면 믿을 만 하겠죠.”

 

“여튼 그 팀으로 오미크론 섹션의 기술 데이터를 회수하고 마무리. 데이터 디스크를 쥐어가지고 보냈으니까 목적지까지만 도착하면 자동으로 회수 작업이 진행될 거야.”

 

“목적지라면?”

 

“오미크론 섹션의 최심부.”

 

아르망과 리리스의 패널이 다시 한 번 울렸다. 이번에는 묘지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 첨부 파일이었다.

 

“극초단파 스캔으로 시설 전체를 훑어보니까 오미크론 섹션에서 가장 데이터 이동이 많은 곳이 저곳이야. 아마 저쪽 시설을 통제하는 인공지능의 중추도 저기 있는 거겠지.”

 

“12번 입구로부터 4.5 km 떨어진 곳... 도착까지 쉽지는 않겠군요.”

 

“지금까지 쉬운 일만 해온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오빠가 해온 것들에 비하면 가서 30분 버티고 생환하는 일은 쉬운 편에 속하지.”

 

“... 예, 뭐. 그렇게 생각합시다.”

 

아르망은 헛웃음이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막아세웠다. 사령관이 이룩한 업적에 비하라니, 농담도 그렇게 잔혹한 농담이 없을 것이다.

 

확실히 교황과의 싸움은 수천 만의 목숨이 달려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사람 한 명 걸린 이번 일 따위는 태양 앞에 별빛을 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허나 그 별빛이 없으면 죽을 사람이 수천 만이다.

 

그러니 농담도 이렇게 잔혹한 농담이 없을 것이다.

 

띠링-

 

그 때 둘의 패널로 또 다른 메일이 날아왔다.

 

“아, 그리고 하나 또. 전에 장화가 들어가서 깽판 치고 돌아온 거 있잖아.”

 

“네. 그 때 보고서에 실패라 적었던 것이 닥터 양이었지요.”

 

“근데 그거 조금 바꿔줘야겠더라. 엄청 대단한 건 아닌데 같이 갔던 드론이 그 사이에 몇 개 알아온 게 있더라고.”

 

닥터의 말에 아르망은 패널로 시선을 돌렸다.

 

16진수 숫자 수백 만개가 이해할 수 없게 나열되어 있는 기다란 수열.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데이터 덩어리였다.

 

“이게 뭐죠?”

 

“장화가 가서 알아온 거.”

 

“흐음...”

 

“일단 오미크론 섹션의 인공지능은 다른 통신망과 전부 격리된 곳에 있어.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관찰한 내용으로는 인간이나 그보다 조금 못하는 3세대 인공지능이라 생각하고 있었거든? 근데 아니야.”

 

“그게 무슨 의미죠?”

 

“지금 거기 보이는 데이터양. 그 정도 데이터를 다룰 수 있으려면 못해도 도시급 경영이 가능한 4.5세대 인공지능이어야 해.”

 

아르망은 눈을 깜빡거렸다.

 

“...무슨 의미입니까?”

 

“하고 싶은 많은데... 쉽게 말하자면 닭 잡는데 소 잡는 칼 쓰는 격이야. 고작 무덤지기 노릇이나 하면 될 인공지능이 이렇게 고성능일 필요는 없으니까. 김지석 이 인간... 대체 멸망 전에 뭔 물건을 만들어 놓은 거야?”

 

“왜 자기 무덤에... 아니, 그보다 다른 인공지능들은 어느 정도 수준이죠? 저희를 도와주던 오메가 섹션의 인공지능이나...”

 

“걔들은 잘 춰줘봐야 3.5세대. 생체 재건 장치를 관리하는 녀석은 2세대. 멍청할수록 명령을 곡해할 능력이 없거든. 오미크론 섹션을 제외하면 전부 다 자기가 시킨 것만 잘 하라고 만들어둔 거 같아.”

 

“그렇군요. 하긴, 똑똑한 인공지능이라면 자신이 관리하는 시설이 그렇게 고블린으로 가득 찰 때까지 내버려둘 리가...”

 

그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는 의문 하나.

 

“... 닥터 양?”

 

“그래서 내가 임무 실패는 아니라고 하는 거야.”

 

오미크론 섹션의 인공지능이 그렇게 고성능 개체라고 한다면...

 

“왜 자기 시설이 그 모양이 되도록 내버려 둔 거죠?”

 

“뭔가 꾸미고 있는 게 있다는 의미겠지. 인공지능 주제에 격리된 네트워크 망을 이용하는 것도 그걸 숨기기 위한 거였을 거고.”

 

“그럼 지금 당장 임무 중지를...”

 

“뭐?”

 

닥터의 대답에는 오한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언제 죽을 지 모를 사령관을 눈앞에 두고서 따뜻한 어조로 대답해줄 만큼 독립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 아닙니다.”

 

결국 아르망은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데이터 회수 작업은 계획대로 진행할 거야. 물론 스캔 작업으로 화학 무기나 기타 터렛 같은 위험 요소가 없다는 건 확인했고. 오빠를 위해서라면 위험을 무릎쓸 거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언니들을 냅다 던질 사람은 아니라고.”

 

“...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이 결전의 날이라 생각하면 되겠군요.”

 

“응. 그러니까 리리스 언니랑 같이 가서 쉬고 있어. 상황 지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뭐, 생산 설비 밖에 없는 오미크론 섹션에서 내가 지휘할 일이 생길 지나 모르겠지만.”

 

닥터의 말에 아르망은 다시 한 번 사령관의 얼굴을 본 뒤, 리리스의 어깨를 부축한 채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차마 봐라보기 힘들 만큼 수척해진 사령관. 허나 그것도 이제 끝이다. 적어도 유기물 재생 코드를 가지고 오면 저 몸만큼은 전성기 그 이상으로 돌려보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문 밖으로 나가려 했을 때,

 

“아, 맞다. 이건 진짜 별 거 아닌 내용인데 알고 있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닥터가 입을 열었다.

 

“뭐죠?”

 

“이번에 회수한 데이터 중에 김지석이 생전에 모아 놓은 생체 코드들이 몇 개 나왔어.”

 

“생전에 모아 놓은 생체 코드요?”

 

“일단 주석으로 적혀 있는 것들을 보면 이 시설에 투자한 인간들의 DNA 정보인 것 같아. 아니면 거래 대금 대신으로 자신의 유전 정보를 준 사람들이거나.”

 

“투자...? 이런 시설에 말입니까?”

 

“글쎄, 뭐, 옛날엔 냉동 인간 되겠다고 자기 몸까지 갖다 바친 사람도 있다는데 그럴 수도 있지. 유기물 코드만 건네면 자기가 나중에도 부활할 수 있다 생각했나봐.”

 

어디까지나 사령관의 신체 재건를 위해 사용했던 곳이지만 김지석의 묘지는 어디까지나 그의 사후 부활을 위한 장소.

 

지금까지 유용하게 사용한 생체 재건 장치도 부활을 위한 안배였다. 그러니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상류층 인사들이었다면 그를 위해 아낌 없는 투자를 감행했을 것이다. 애초에 묘지의 규모는 한 개인의 자산으로 만들 수 없을 만큼 광활한 곳이었으니 태생이 기업인이었던 김지석에게 투자를 모으는 것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터다.

 

허나 실제로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는 법. 죽은 인간의 DNA로 새로운 신체를 만든다 한들 그건 그저 다른 사람일 뿐, 죽기 전의 인간과 동일한 사람은 아니었다.

 

“... 그렇군요.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죠? 저희에겐 주인님이 아닌 인간은 필요 없습니다.”

 

“그건 맞는데 혹시 모르잖아? 멸망 이후로 백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데이터를 보관하고 있는 걸 보면 오미크론 섹션의 인공지능에겐 이게 중요한 정보일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아르망은 닥터가 보낸 명단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그 길이가 어찌나 긴 지, 그저 훑어보기만 해도 스크롤을 내리는 손가락이 아플 지경이었다.

 

몇몇은 눈이 동그래질 만큼 유명한 사람이었고, 몇몇은 세계 경제의 거물들이었다. 몰락한 연예인의 이름도 있었고, 기업 총수의 친인척도 있었다.

 

“흐음...”

 

그 중에는 리오보로스 일가의 사람도 보였다.

 

“김지석이랑 앙헬은 원수 관계였다잖아. 라비아타 언니의 설계도를 훔치려고 PMC를 고용하기도 하고 암살자를 보내기도 했을 정도니까. 아마 앙헬 리오보로스를 싫어하는 누군가가 자기 유전자를 주는 대가로 뭔가를 받았겠지. 유전자 코드만 있다면 유전 질환을 일으키도록 암살 시도를 할 수도 있을 테니까.”

 

“앙헬 리오보로스! 나 그 사람 무덤 털어봤어!”

 

“오빠랑 같이 턴 거잖아. 트리아이나 언니.”

 

“그래도 턴 건 턴 거지!”

 

옆에서 으스대는 트리아이나를 뒤로 한 채로, 닥터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때, 아르망 언니? 눈여겨 볼 만한 사람이 있을까? 내가 이런 정치 같은 분야는 약하거든.”

 

“... 솔직히 말해도 됩니까?”

 

아르망이 눈이 아픈 듯 콧등을 잡으며 말했다.

 

“응. 편하게 말해.”

 

“신경쓸 일 아닐 겁니다.”

 

‘아니다.’라는 확신도 아니고 ‘아닐 겁니다.’라는 추측 섞인 서술어.

 

“그래? 의외네. 아르망 언니라면 이런 거 하나도 꼼꼼이 살펴볼 거라 생각했는데.”

 

“평소라면 그랬을 겁니다. 폐하의 안위가 위험한데 이 한 몸 따위에 관심이라도 가겠습니까. 다만...”

 

그렇게 말을 이어가던 아르망은 그 순간, 삐긋, 발을 접질렀다. 옆에서 아르망의 도움을 받고 서 있던 리리스는 이제 되려 아르망을 부축해주는 입장이 되었다.

 

“언니?”

 

“...... 조금, 힘듭니다.”

 

리리스의 팔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아르망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부쩍이나 앙상해진 얼굴. 총기가 가득했던 눈은 어느덧 시장 바닥에 굴러다니는 썩은 물고기의 것처럼 푸석해졌다.

 

단 한 시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사령관의 미래를 계산해왔다. 모듈이 과부하되든, 손발에 경련이 오든 신경쓰지 않고 그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예측해온 그녀였다. 그 덕에 사령관이 일어났을 때 그 곁에서 함께 장화에게 갈 수 있었고, 그가 장화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몸을 이토록 갉아먹고 있었음을 잊고 있었다.

 

“지금 제 상태로 저 데이터에서 유용한 정보를 뽑아내려면... 며칠은 걸릴 겁니다. 그러면 데이터 회수 작업도 뒤로 미뤄야 할 거고...”

 

“언니...”

 

“... 그러면 안 됩니다. 일단 눈여겨 볼 만한 인간은 없는 것 같으니 작전을 속행하죠. 이미 죽은 인간들 따위가 폐하를 방해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아르망은 임신부인 리리스를 먼저 돌려보낸 후, 다시 방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그녀의 눈은 사령관을 향했다. 이미 자신의 모든 생애보다, 앞으로 살아갈 모든 시간보다 지금 한 순간의 그가 더욱 중요해진 자신을 보았다.

 

늘 그 앞에서 여유로운 모습은 연기해온 그녀였다. 태생이 배우였기에 숨 쉬는 것보다 속내를 감추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 폐하.’

 

조금은 솔직해져도 되지 않을까.

 

‘저, 너무 힘들어요.’

 

다시 한 번 자신의 옆에서 그가 걸어가주기를, 함께 발걸음을 맞추기를 기대하며 아르망은 사령관의 옆에 쭈구려 앉았다. 닥터가 서둘러 돌아가 쉬라 몇 번이고 말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제아무리 따스한 곳이 있어도 이곳보다 따스할 수는 없다. 사령관의 옆자리보다 따스한 곳이 있다면 그곳은 뜨거운 곳이고, 이곳보다 서늘한 곳이 있다면 그곳은 차가운 곳이다.

 

‘그러니까 내일은...’

 

그렇게 그녀는, 그와 함께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당황해하는 트리아이나가 두꺼운 이불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 그녀 몸에 덮어준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삐빅-

 

[유전자 코드 기증 명단]

 

아직 닫지 않은 아르망의 패널.

 

[카렌 오넬]

[돌로리아 밀러]

[제니퍼 코튼] 

[존 제이콥]

.

.

.

 

그 끄트머리에 적혀 있어 아르망이 미쳐 보지 못했던 이름들은 대략 수십 개 정도였다.

 

그리고 그 가장 마지막에 적혀 있던 것은, 

 



[마리아 리오보로스]



 

그녀였다.

 

 

 

*

 



본격적인 떡밥 뿌리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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