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오르카 교도소에 수감된 지 사흘째였다. 다행스럽게도 그동안 이곳 섹돌들한테 개같이 따먹히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사령관 이외의 남자랑은 자고싶지 않아서이든, 감옥에 들어올 정도로 질나쁜 인간이니 구인류급 좆간이 아닐까 경계해서이든, 이유가 뭐든간에 건드리지 않는다면 나야 좋지. 괜히 엮여봤자 내 형량만 가중될 테니까. 이 교도소 안에서 굳이 내 몸을 탐낼 자는 없을테니 그 부분은 안심해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바뀌게 된 건 점심 시간 때였었다. 


그 날도 괜히 눈에 띄기 싫어 식당의 구석진 곳에서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듣자하니 그저께 날 인터뷰(?)했던 스프리건은 오늘 아침에 출소했다고 한다. 돌아가서 오르카에 남은 스프리건들과 나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조만간 뉴스에서 얼굴 비출 거라던데 뉴스에 누가 나오든 내 알바인가. 아무튼 끈질기게 말 걸던 스프리건도 사라졌으니 조용히 밥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먹기 시작하려던 그 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보게 브라우니. 미안하지만 자리 좀 양보해주지 않겠나?"


"브? 앗...! 아, 알겠슴다! 식사 맛있게 하십셔!"


내 옆에 앉아있던 브라우니가 뒤돌아보고선 입이 쩍 벌어지더니 자기 식판을 챙겨 후다닥 다른 자리로 떠났다. 그리고선 텅 빈 내 옆자리에 한 여자가 털썩 앉았다. 그녀의 얼굴을 본 나는 브라우니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던 건지 곧장 알 수 있었다.


"아스널... 준장?"


오르카호에 있어야할 지휘관 중 한명인 아스널이 왜 여기있는건지 놀라다가 문득 내가 오르카호 안에서 재판받던 중 지휘관들 사이에 아스널이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니, 어쩌면 눈 앞의 아스널은 그 아스널 준장이 아닌 아스널 2호기나 그런 거일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했으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내 첫번째 추측이 맞다고 입증해주었다.


"여기서는 그냥 아스널일세. 죄수로 있는 동안엔 계급이 정지되니까 말일세. 그건 그렇고, 알아봐주다니 고맙군. 내 계급까지 외워뒀을 줄이야."


"아니, 그... 댁이 왜 여기있수? 죄수복까지 입고선?"


"후후, 궁금한가?"


아스널이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2주 전이었네. 그 날은 장기 파견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터라 성욕이 쌓일대로 쌓였었지. 이 넘치는 성욕을 고작 자위 따위로 풀기 아까웠던 나는 평소와 같이 사령관을 안기로 결심했지. 사령관실로 직행한 나는 임무 보고를 마치고, 그에게 동침권을 보여주며 당일 저녁을 비워놓으라고 언질을 줬다네."


아스널은 마치 무용담을 늘어놓는 듯 장황하게 설명했다. 벌써부터 엔딩이 예상됐지만 굳이 태클 걸 마음은 없어서 그냥 들었다.


"후후, 몸을 씻는 동안 손이 자꾸 아래로 가려는 걸 참느라 고생 좀 했지. 그 날의 쾌감은 그를 안는 것 만으로 느끼기 위해 아껴두고 싶었으니까. 저녁식사를 마치고 사령관실에 들어서자 내가 애타게 기다리던 그이가 나를 살갑게 맞이해주었다네. 침대 머리맡의 전등만 남겨둔 채 불을 끄고 그이에게 다가가자 그는 상의를 벗고 잘 다져진 몸을 과시했다네. 나 역시 그의 성의에 보답하기 위해 옷깃을 풀어헤치자 그의 시선이 내 가슴으로 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


아스널이 어깨를 펴고 가슴을 앞으로 뻗자 나도 모르게 거기로 시선이 갔다가 곧장 정신차리고는 식판에 얼굴을 묻었다. 아스널은 그런 내 반응이 재밌다는 듯 쿡쿡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의 몸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더군.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쓸어내렸네. 그리고선 손을 점점 밑으로 내려서 복근을 거치고, 고간에 도달했지. 살살 만져보니 바지 너머로 벌써 단단해진 게 느껴지더군. 나는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춘 뒤 그이의 바지 지퍼를 조심스레 내리자 그의 우람한 남근이 내 얼굴 위로 떨어졌는데-"


"잠깐 잠깐, 그 얘기 대체 언제 끝나? 이상하게 길어질 것 같은데."


"흐음,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인데. 관심 없는건가?"


"첫째, 밥 먹으면서 들을만한 내용이 아니잖아 그거."


"그렇다면 나중에 운동 시간에 이어서-"


"둘째, 남자로서 느낀 그 이야기의 가장 큰 단점은 여자 시점에서 서술했다는 거지."


"으음, 과연... 맹점이었군."


"셋째, 내가 물어본 건 당신이 뭘 잘못했길레 여기 들어왔냐는 건데 사족이 너무 길어."


"흠.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 불필요한 부분은 스킵하겠네 그럼."


아스널이 그렇게 말하자 주변에서 아쉬운 마음에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니들 또 엿듣고 있었냐.


"요점만 말하자면 사령관과 섹스하던 중 막판 스퍼트에서 힘조절을 잘못해 그이의 골반을 중파시켜 버렸다네. 이유가 뭐든 간에 그에게 상해를 입힌 건 사실이니 감옥에 넣어져도 할 말 없긴 하지."


"...대충 그럴 것 같았다."


나는 식판으로 고개를 돌려 식사를 재개했지만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도로 아스널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아스널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이 쪽을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왜?"


"난 아직 본론은 꺼내지도 않았다네. 내가 뭣 때문에 자네 옆에 앉았을 거라고 생각했나?"


"아... 그래 그럼... 무슨 용건인데?"


"자네에게 제안할 게 있다네. 아마 자네도 마음에 들걸세."


그 순간 머릿속에 어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오. 자네가 생각하는 '그거'가 뭔지 참 궁금한데, 어디 한번 말해보게나."


"...난 말 안해."


"그렇다면 내가 대신 말하도록 하지." 


아스널이 의자에 앉은채로 슬쩍 거리를 좁히더니 내 어깨 위에 팔을 걸쳤다.


"나와 섹스하지 않겠나? 자네가 여자한테 관심이 있다는 건 확인했고, 그럼에도 참고있었으니 나와 마찬가지로 성욕이 꽤나 쌓였을거라고 본다만."


"...진짜로 그 용건이었냐..."


"이 섬에서 남자는 귀하지. 비록 내가 죄수 신분일 지라도 어느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다네. 내게 몸 한번만 대주면 편의를 봐주도록 하지. 어떤가?"


"아니."


나는 어깨에 올려진 아스널의 팔을 밀어 밑으로 내렸다.


"흐음? 거절하겠다는 건가? 이유라도 있나?"


"아니."


그냥 싫어. 내가 뭔 남창도 아니고.


"주변의 눈이 신경쓰여서 그러는 거라면 걱정말게나. 이 교도소 안엔 오르카호 보다도 감시카메라가 적어 의외로 사각지대가 많거든. 예를 들어 저 격리구역이라던가 말이야."


"격리구역?"


내가 의문을 표하자 아스널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손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켈베로스가 지키고있는 문이 보였다.


"이 교도소 건물은 크기에 비해 사용하는 인원이 적은 지라 쓰이지 않는 공간이 좀 있다네. 저 문 뒤로 이어지는 지하1층 격리구역도 마찬가지지. 교도관들이 쓰는 창고나 휴게실 외엔 먼지만 날리는 빈 방밖에 없다더군."


이프리트가 알려줬지. 아스널이 작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저기서는 조용히 즐길 수 있을것이네만, 아직도 내 제안에 관심이 없나?"


"...없어."


"훗, 세 번이나 거절당했으니 어쩔 수 없군. 알겠네, 자네 뜻이 그렇다면 더 묻지 않도록 하지. 마저 들게나."


아스널이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하고 나서야 나 역시 평화롭게 먹던 밥을 마저 먹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격리구역이라. 수상쩍은 공간이긴 하다만 켈베로스가 문 앞을 지키고 있으니 아무런 빽도 없는 죄수로선 들어갈 방도가 없지.


***


교도소 수감 닷새째. 마음속으로 탈옥해야지 하고 생각하고는 있는데 실제론 탈옥 계획에 아무런 진전도 없다. 당장 내가 갇혀있는 이 감방을 빠져나갈 수도 없다. 한쪽 벽면을 이루고있는 철창을 끊을 힘도 도구도 없고, 천장에 환풍구가 하나 있긴 하나 그 크기가 코코도 못들어갈 정도로 작다. 영화같은데서 보면 환풍구로 탈출하는 게 단골소재더만 여기선 안되겠구만.


그렇다면 외부에서 감옥을 부숴주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떨까? 지금 오르카호엔 무용도 있고 알파도 있다: 8지는 이미 건너왔다. 엔젤도 있다: 성역 이벤트도 이미 끝났다. 그리고 요안나 아일랜드가 멀쩡히 남아있다, 아직 9지엔 들어가지 않았다는 뜻이다. 장미 이벤트는 아직인지 이미 끝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지금 시점은 성역 이벤트와 9지 사이라는 거다.


9지가 시작되고 나면 철충이 요안나 아일랜드를 침략하게 된다. 그 난리통에 몰래 빠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무리다. 섬을 버리고 도망가야 할 정도로 철충이 사방에서 총을 갈길텐데, 양치기의 품에서 벗어난 양이 무사히 도망칠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 공습이 시작되면 다른 애들이랑 같이 피난 행렬에 껴야 살 수 있겠지.


그냥 다른 바이오로이드들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지내면서 출소를 기다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 벽에 걸린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오후 9시, 스프리건 뉴스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자유시간 동안은 워낙 따분한지라 TV 뉴스는 꼭 챙겨보는 편이다. TV를 틀자 요안나 아일랜드에 남아있는 스프리건이 화면에 비춰졌다. 


[반갑습니다! 9시 뉴스의 스프리건 아나운서입니다!]


초반부는 섬 안에서 일어난 이런저런 일이나 가십거리를 공유하는 내용이었다. 


이 좁은 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래봤자 하품 나오는 것들 뿐이여서 그냥 TV 끌까 했으나 뉴스가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오르카호쪽 소식을 비추겠다고 하자 나는 이번엔 색다른 소식이 있지 않을까 싶어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자, 그럼! 지금 오르카호 안에선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오르카호의 스프리건 기자와 연결해보겠습니다, 스프리건 기자?]


[네, 스프리건 기자입니다!]


머리를 푼 낯익은 모습의 스프리건 대신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잠수함 안의 스프리건 쪽으로 화면이 전환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찌 된 영문인지, 오르카 스프리건의 표정이 다급해보였다.


[빅 뉴스입니다! 오늘의 지휘관 회의에서 두번째 인간님의 처우가 결정됐다고 합니다!]


"뭐?"


나도 모르게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우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감옥에 가둔 걸로 끝이 아니었나?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건지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TV속의 포니테일 스프리건은 빠른 속도로 말을 계속했다.


[제가 입수한 극비정보에 의하면, 두번째 인간님은 전쟁이 끝날 때가지 냉동수면장치에 들어가 동면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은 전시상황에 인간이 두 명이나 있으면 지휘체계가 혼란스러워질 것을 우려해서-]


[스프리건!!!]


스프리건의 어깨 너머로 블러디 팬서가 험상궃은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게 보였다.


[자, 잠깐만 팬서 대장! 지금 촬영중...] 


[카메라 꺼, 당장!]


[대장! 시청자들에겐 알아야 할 권리가-]


[치이익---]


스프리건이 손사래를 치며 말리려했으나 팬서는 스프리건을 옆으로 밀치고 카메라를 움켜쥐었다. 화면이 팬서의 손바닥으로 가려지더니 이내 콰직하는 소리와 함께 끊겼다.

노이즈로 가득 찬 화면은 몇 초 뒤 다시 머리를 푼 요안나 아일랜드의 스프리건 쪽으로 전환되었다.


[어, 어... 잠시, 진행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만... 방금 들으셨습니까? 두번째 인간님이-]


뚝.


이번엔 TV가 강제로 꺼졌다. 전원버튼을 눌러봐도 먹통이었다. 왠지 바깥이 소란스러워진 듯 한게 기어코 모든 감방의 영상 송출을 차단해버린 모양이었다.


"브으으! 무슨 일임까! TV가 갑자기 꺼져서 안켜짐다!"


"간수님! 간수님! 저희 방도 TV가 안나와요! 수리공 언니 좀 불러주세요!"


"조용! 현 시간부로 모든 감방의 TV 사용을 금지한다! 상부로부터의 명령이니 토 달지 말도록!"


"방금 그 내용은 진짜야? 사령관님은 정말 두번째 인간을 동면 포드에 집어넣으려는 거야?"


"너희들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수감자들이 아우성 치는 걸 교도관들이 고성을 내지르며 통제하고 있었다. 저 반응으로 보아 좀 전의 뉴스가 단순 짜라시가 아닌 진실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나를 감옥으로도 모자라 이젠 동면포드에 집어넣겠다고? 냉동수면? 언제까지? -복-이 어떻게 수습할지 생각도 안하고 스토리에 싸지른 별의 아이를 모두 잡을 때까지? 그게 대체 언젠데? 몇 년 뒤? 몇 십 년 뒤?


게다가 정말로 전쟁이 끝난 뒤 나를 곱게 풀어준다는 보장도 없다. 그 전에 동면포드 안에 잠든 채로 쥐도새도 모르게 암살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사실상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이젠 정말로 물러설 곳이 없다.

탈옥해야만 한다. 

무조건.



참된 기자...!

여기선 기레기 스프리건 대신 진실을 알리는 참된 기자로 묘사해봄


반대로 여기 사령관은


라붕이, 탈옥 타임어택 스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