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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먼 옛날, 2032년. 한 과학자가 미지의 물질을 발명하게 된다.

 

페니실린이나 다른 여러 발명품처럼 실수로 만들어졌기에 발명의 순간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다. 단지 제작 방법과 제작에 필요한 소재에 대한 레시피만 남았을 뿐.

 

그 과학자의 이후 행적도 묘연했다. 마치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주고 사라진 것처럼 최초 발명자의 존재도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불이 인류의 역사를 바꿨듯이 그가 남긴 발명품도 인류를 뒤엎어버렸다.

 

오리진 더스트.

 

그는 자신이 만든 발명품을 그렇게 명명했다.

 

그야말로 꿈의 바이오소자. 인류가 수십 년 간 해결하지 못했던 수백 개의 불치병을 해결해주었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강화시술을 가능케 했으며, 돈 있는 사람들의 수명은 세 배가 되었다.

 

50대의 배우가 10대 여고생 연기를 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게 된 시대.

 

수많은 기업과 정부가 새롭게 개척된 신대륙을 보고 군침을 흘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먼저 돈 냄새를 맡고 움직인 사람은, 대한민국에 있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미세스 마리아.”

 

“......”

 

김지석. 애덤 존스와 함께 스타트업으로 창립한 삼안 사업을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괴물.

 

물론 기술에 대한 초월적인 재능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분야는 공동 창립자인 애덤 존스의 담당이었고, 김지석이 담당한 것은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적인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사람 보는 눈이 탁월했고, 사람의 마음을 본능처럼 꿰뚫어 보는 인간이었다.

 

“남편분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급성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 닥쳐.”

 

“하하, 제가 괜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은 분명 부인께서도 동의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는 재능이 없다면 재능 있는 전문가를 고용할 줄 아는 인간이었고, 사람이 있다면 위에서 지휘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설령 그것이 아무리 오만한 귀족 집안 자제라 하더라도.

 

“언론은 잠잠하지만, 남편분의 죽음, 그게 앙헬과 관련이 없을 수가 없죠.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

 

“그 능구렁이 같은 녀석이 부인의 능력을 두려워해 부인의 남편을 피살한 겁니다. 마음 같아서는 기자들을 동원해 도와드리고 싶었지만, 그쪽 정부에는 블랙 리버의 돈을 받아 처먹은 인간이 너무 많아서 말이죠.”

 

듣고 싶은 말을 해주면 사람의 마음은 무조건 열린다. 활짝 열리진 못할지언정 조그마한 틈이라도 만들어진다.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부군께선 참 훌륭한 분이셨는데 말이죠.”

 

김지석은 마리아 리오보로스의 남편을 만난 적이 없다. 자신의 남편만큼은 더러운 기업 간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그녀의 노력이었다.

 

허나 그러면 어떠랴? 지금 그녀가 듣고 싶은 말은 그녀의 남편을 뛰워주고 앙헬을 힐난하는 것이니 그런 립서비스만 해주면 된다.

 

지금 구상 중인 초거대 프로젝트. 그걸 조금 더 안정적으로 완성시키려면 마리아가 가지고 있는 블랙 리버의 지분, 자본이 필요했기에 김지석을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저희에게 바이오로이드 제작을 의뢰하셨죠? 설계도를 보니 꽤 위험한 아이를 만들고 싶어 하시던 것 같은데.”

 

“신경 쓰지 마. 의뢰할 기업은 개인적으로 찾았으니까.”

 

“저희 삼안 기업만큼 안정적으로 만들어드릴 곳은 없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좋으니 의뢰처를 바꾸시겠습니까? 거래 조건도 원하시는 대로 조정해드리죠.”

 

“... 아니. 이건 내가 할 일이야.”

 

보라색 비단옷을 걸치고 있던 마리아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소심한 움직임. 고르지 못한 시선 처리, 자꾸 짓씹는 아랫입술.

 

말하려 하는 본론은 아직이란 뜻. 김지석은 그녀의 빈 와인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앙헬 리오보로스의 암살 말씀이십니까?”

 

“뭐?”

 

“이 바닥에서 뒹군 것도 벌써 한세월입니다. 설계도만 봐도 무슨 목적으로 만드시려는지 알죠. 군용으로 쓰기에는 부적합한 와이어, 개량된 시한 폭탄, 그런 걸 주력으로 쓰는 바이오로이드는 사용처가 매우 제한적이죠.”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저희의 목적이 우연찮게 겹쳤다는 이야기입니다.”

 

김지석은 붉은 와인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말을 이었다.

 

“1차 연합 전쟁 얘기는 잘 아시겠죠. 앙헬, 그 인간이 AGS 부대로 영국 전선을 장악해준 덕에 여러모로 기업에게 좋게 끝이 났죠. 하지만 한 번 승리를 맛본 인간은 결코 한 번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

 

“이제 곧, 2차 연합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그건 아마 기업과 기업 간의 전쟁이 되겠죠. 설령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을 고민하고 계시다면, 그런 잡념은 접어두셔도 될 겁니다.”

 

뚝.

 

넘치기 직전까지 차오른 와인이 찰랑거렸다.

 

“제가 그렇게 되도록 만들 테니까요.”

 

“...그 얘기를 나에게 해서 어쩌라는 건데.”

 

“만약 이 세상에서 앙헬을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1위는 부인일 테고, 2위는 누구일까요?”

 

김지석이 미묘한 웃음으로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접니다. 부인. 2차 연합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누구보다 앙헬을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

 

“믿을 수 있는 얘기인가?”

 

“저는 이렇게 입이 가벼운 사람이 아닙니다. 부인. 이 정도 얘기를 했다는 것 자체가 신뢰의 증거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과도한 의심은 목적의 달성을 방해할 뿐입니다.”

 

마리아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졌다.

 

남편도 죽었다. 죽은 남편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의 동생이 돈을 뿌려 입막음 했다. 그의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게 방해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소수점 단위의 지분과 가문의 재산 일부. 그리고 눈두덩이처럼 불어나 버린 복수심뿐이었다.

 

“그럼 내가 뭘 해주면 되는데.”

 

“많은 걸 바라진 않겠습니다. 단지 블랙 리버에 대해 알고 계신 것을 알려주시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저희쪽 전문가들에게 주문하신 바이오로이드 제작을 맡기도록 하죠.”

 

“삼안 이름 달고 만들어진 것들은 필요 없어.”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광고용으로 만들 것도 아닌데요. 원하시는 비밀 의뢰처에 취업시키는 형태로 보내면 기술 지원만 깔끔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거라 해봤자 별 도움은 안 될 텐데. 무적의 용에 대한 것도 아는 게 없어.”

 

블랙 리버가 삼안의 라비아타를 뛰어넘기 위해 만든 바이오로이드 무적의 용. 하지만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해 아예 기밀로 부쳐진 존재였다.

 

“그 부분은 관심 없습니다. 애초에 그 바이오로이드의 설계도는 저희쪽에서 이미 접수했으니까요.”

 

“뭐? 어떻게?”

 

“2차 연합 전쟁을 준비하는 인간이 그 정도 쁘락치도 넣어놓지 않았겠습니까? 원하신다면 제공해드리겠습니다. 다만 다른 곳에서 떠들지만 말아주십시오.”

 

김지석은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신의 잔에 남은 와인을 따랐다.

 

마리아에게 준 것과는 다르게 잔의 이 할 정도만 채우고 입에 가져다 대 마셨다. 꿀꺽거리며 술을 넘기는 소리가 고풍스럽게 꾸며진 방 안을 채웠다.

 

“다만 저희 쁘락치들도 리오보로스 가 내부 사정은 잘 모르고 있더군요. 그래서 부인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우리 집안 사정 따위를 알아서 뭐하려고...”

 

“정보의 힘은 부인의 생각보다 강력합니다. 2065년에는 정보의 힘만으로 무명의 기자가 일본의 키리시마 의원을 쓰러뜨린 걸 아십니까? 그 작은 기자 한 명이 지핀 불이 여론을 불태웠고, 결국 덴세츠의 사업 대부분에 빨간 줄을 그었졌습니다. 살아만 있다면 저희쪽에서 써먹고 싶은 기자였는데, 아쉽게 됐죠.”

 

“...그런 사소한 얘기는 궁금하지 않아.”

 

“뭐, 결론은 정보란 건 누가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겁니다. 부인께 사소한 일이라도 여론에 뿌려지면 난리가 날 것들이 많겠죠. 남편 분의 일 같은 것 말입니다.”

 

남편의 이야기에 마리아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여론이나 정보 따위에 마음이 흔들리진 않았다. 그런 걸로 처벌을 해봤자 자기 동생 정도의 재벌에겐 감옥에서 조금 썩고 나오는 게 최선.

 

남편을 죽인 개자식에게 그 정도 벌을 주는 것으론 마음이 충족되지 않는다.

 

“물론, 미적지근한 법 따위로 부인의 복수를 끝낼 생각은 없습니다.”

 

김지석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보았다.

 

“정 불편하시다면 저희쪽의 도움만 받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목적이 같다면 언젠가 힘을 합치게 되는 날이 올 겁니다.”

 

“날 부추기고 싶지 않다, 그거야?”

 

“맞습니다. 게다가 오늘 여기 오신 목적이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마리아는 분명 아직 하고 싶은 얘기가 더 있을 것이다. 그를 위해 김지석이 일부로 그녀에게 흘린 정보가 있으니까.

 

“... 네가 묘지를 만든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제대로 찾아오셨군요. 그 말대로입니다. 이제 나이도 있는데 죽을 준비를 해야지요.”

 

그가 대학생 신분으로 삼안 기업을 창립한 것이 2049년. 2075년에 끝난 1차 연합전쟁이 벌써 몇십 년 전 일이니 그의 나이도 벌써 황혼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가 살고 있는 세대는 오리진 더스트라는 마법이 있는 시대. 그런 곳에서 죽을 준비라는 건 80년을 살고 죽는 일반인들의 상식과는 많이 벗아나 있는 것이었다.

 

“들으신대로, 저는 지금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시설을 만드는 중입니다. 냉동 인간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부활 기술이지요.”

 

“그게 말이 되나?”

 

“알 될 것은 뭐가 있겠습니까? 바이오로이드 한 명이 인간 수백을 대체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일당백이 무의미한 시절이지요. 그런 마법 같은 곳에서 사람 하나 못 살리는 게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누구보다도 먼저 오리진 더스트의 가능성을 알아차린 김지석이었다. 그는 인생을 그 신물질에 걸었고, 그의 베팅이 옳았음은 그의 삶이 증명했다.

 

가히 맹신에 가까운 믿음. 하지만 그 기저에 깔린 과학과 공학은 그 어떤 종교가 주는 부활 신화보다도 설득력 있는 근거였다.

 

“그럼 내 남편도...”

 

“아쉽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미 부군의 화장을 하셨다고요.”

 

“내 동생이 억지로 진행시켜서...”

 

“죽은 사람의 신체를 재생시킬 수는 있지만, 재가 되어버린 인간을 되살릴 수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부인.”

 

“......”

 

살릴 수 없다. 애초에 그의 심장이 멈췄을 때부터 단념했다 생각한 그녀였지만 김지석이 뭔가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바보 같은 희망이 피어 올랐다.

 

바이오로이드의 시대를 연 그 인간이라면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냉랭한 단언.

 

괜히 뜰떠 이 먼 곳까지 날아온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지는 마리아였다.

 

‘......’

 

그 잠깐의 변화를 눈치챈 김지석.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는 지금이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한 적기임을 직감했다.

 

“언젠가 부군의 부활이 가능해질 때를 위해 부인께서 들어가시는 겁니다.”

 

“내가?”

 

“부활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죠. 저는 지금 시설 전체를 여러 인공지능으로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스스로 기술을 개발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단순 신체 재생이 아닌 진짜로 DAN 조각에서 사람을 만드는 기술을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 말에 마리아의 눈에 이채가 빛났다.

 

“무덤이 무너지는 일도 없을 겁니다. 시설 구조는 이미 설계를 끝마쳤고 침입을 염두해 경호 인공지능도 제작했습니다. 제가 아는 모든 바이오로이드의 정보를 투입해놓았으니 설령 누군가 바이오로이드를 이용해 무덤을 무너뜨리려 해도 문제 없이 대응해낼 수 있습니다.”

 

“... 만약 그 안에 새로운 바이오로이드가 만들어지면?”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대응책을 간구하게 해놨으니 괜찮습니다. 그러니 유전 정보만 주시면 저희쪽에서 모든 서비스를 보장해드리죠.”

 

앙헬가의 유전자. 특히나 앙헬 리오보로스의 누나의 유전자는 삼안 기업에게 있어 일급 기밀 정보다.

 

유전적 약점을 찾을 수도 있고, 그를 이용한 암살 시도도 유용할 것이다.

 

흔들리는 마리아 리오보로스의 눈.

 

남편을 되살릴 수 있다는 실낱 같은 희망이지만 아직 남아 있다. 그와 동시에 이건 앙헬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다.

 

“거기에 더해 무적의 용의 설계도도 드리도록 하죠. 바이오로이드 제작을 의뢰하실 때 그걸 이용해서 하나를 더 만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녀가 그렇게 느끼도록, 김지석은 지금껏 판을 짰다.

 

구태여 앙헬가의 일원 중 그녀를 택한 이유. 남편을 잃은 분노로 자신과 목적이 같은 것도 있었지만 그 속에는 한 가지 의중이 더 숨겨져 있었다.

 

“저희쪽이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만드려는 그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정보.

 

만의 하나라도 자신의 무덤에 침입해올 수 있는 그 미지의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데이터를 선점하는 것.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정보의 힘으로 그 자리에 오른 김지석은 그 무엇보다도 정보를 믿었다.

 

그랬기에, 바이오로이드의 시대를 연 그는 세상 모든 바이오로이드의 정보를 모아 무덤 속에 파묻어버렸다.

 

“그 정보만 넘겨주시면, 저희는 부인의 편입니다.”

 

세상 그 어떤 바이오로이드도 자신의 안식을 방해할 수 없도록.

 

그 어떤 일당백이 오더라도 자신의 성을 무너뜨릴 수 없도록.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그렇게 바르그는.

 

자신의 창조주를 마주했다.

 

[저의 아버지의 안식을 방해하지 마십시오.]

 

 

 

*

 

 

 

“... 개 좆같은 소리도 청산유수구나.”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검을 든 채 바르그가 말했다.

 

“넌 내 어머니가 어떠셨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마리아 리오보로스. 앙헬 가의 여식이자 남편을 잃고 둘도 없는 악종이 되어버린 여자.

 

한평생 그녀를 보필했던 바르그였고, 그를 어머니처럼 믿고 따랐지만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단 하나.

 

“내 어머니는 저렇게 웃지 않는다.”

 

그녀는 결코 미소 짓지 않았다는 것만 빼고.

 

“부군을 잃으셨을 때부터 세상을 향한 마음을 닫으신 분이시다. 그런 분이 고작 나 한 명을 위해 저리 웃으실 리 없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붉은 카메라 아이가 빙그르르 돌며 물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그 오랜 시간 믿을 사람이 오직 바르그, 당신뿐이었으니 부인께서도 마음을 고쳐 잡으신 모양이지요. 안 그러십니까?]

 

“그래, 그래. 우리 강아지. 내가 정말 보고 싶었단다.”

 

동우의 말에 마리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인형(人形)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수에 찬 눈과 감격에 젖은 듯 떨려오는 손가락. 울먹이는 그녀의 눈동자는 수십 년간 만나지 못한 이산가족의 상봉과도 맞먹을 정도였다.

 

“... 닥쳐.”

 

으직.

 

검자루가 으스러질 듯 소리를 질렀다.

 

저건 어머니가 아니다.

 

내 어머니는 이미 죽고 죽어, 차가운 땅에 가루로 돌아가셨다.

 

“바르그. 우리 바르그.”

 

“닥치라고...”

 

아무도 슬퍼해 주지 못하고, 아무도 배웅해주지 못한 채, 그리 먼 길을 홀로 떠나버렸다.

 

한때 앙헬가 전체를 들쑤실 정도로 복수에 미쳐있었던 여식은, 머나먼 피안으로 홀로 떠났다.

 

그게 수백의 목숨을 분노로 빼앗은 악당의 끝이었고, 응당한 정의의 구현이었다.

 

제 어머니가 천하의 악인이란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바르그는 그런 처참한 끝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인형은.

 

“나는 네가 정말로 보고 싶었단다.”

 

그런 끝을 부정하라며 그녀를 종용했다.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만약 부담스러우시다면 우리의 원활한 거래를 위해 제가 드리는 선수금이라 생각하십시오. 저의 아버지께서도 당신의 어머니께 그리 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이딴 장난질에 넘어갈 거라 생각했나?”

 

[이런 짓을 장난으로 할 만큼 제 알고리즘이 뒤틀리진 않았습니다.]

 

“내 어머니... 아니, 마리아 리오보로스 님의 DNA는 어디서 얻은 거지?”

 

[그분께 직접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떠한 공갈, 협박도 없었다 단언하죠.]

 

동우의 눈이 카멜레온처럼 움직였다.

 

[지금 당신의 눈앞에 계신 분은 본인의 의지로 여기 계신 겁니다.]

 

그 말에 동조하듯 복도 끝에서 팔을 벌리고 있는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운이 빠진 것처럼 흐느적거리는 몸, 힘없는 팔짓, 약간 술에 취한 듯 초점 잃은 눈, 모두가 그녀의 형상을 빼다 박은 것처럼 똑같다.

 

그녀의 눈에 복수심보다 체념이 들어차기 시작했을 무렵의 모습.

 

바르그가 그녀를 자신의 어머니라 생각했던 때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단다. 바르그.”

 

수천 번도 넘게 듣고 싶었던 말.

 

한 인간의 더러운 욕망으로부터 기인한 뒤틀린 모성애.

 

“오랜만에 만나기엔 여기가 너무 어둡구나. 같이 밖으로 나가지 않으렴?”

 

그게 정상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만, 애초에 정상이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태생도,

 

그녀의 삶도,

 

그녀의 끝도,

 

더럽고 추잡하게 만들어져, 추악하고 우악스럽게 마무리되었다.

 

그랬기에 위대한 도덕심이나 장대한 윤리 같은 건 필요 없었다. 태생이 뒤틀렸기에 눈앞의 따스함 하나만을 바래왔다.

 

수천 번을 바래야, 수백 명의 바이오로이드를 죽여야 간신히 한 번 얻을 수 있는 따스함.

 

“하고 싶은 말이 있잖니. 얼마든지 들어줄게. 우리 강아지.”

 

그것이 매 순간마다 튀어나왔다.

 

“...... 어머니.”

 

“그래. 바르그야.”

 

하지만 그토록 뒤틀린 그녀의 삶 속에서도 진리는 존재했다.

 

복수의 도구로 태어나야 하는 전제 조건 속에서만 통용되는 진리가.

 

“당신의 기일은, 잊지 않겠습니다.”

 

“뭐?”

 

세상에 자신을 위한 온기는 없다는 것.

 

쉽게 얻을수록 허상일 뿐이고, 수천 명의 피를 묻혀야 간신히 닿을 수 있는 것만이 약간의 따스함이라는 것.

 

신뢰란 멍청한 것.

 

살기 위해 의심하는 것.

 

하루살이의 인생처럼, 하루를 살기 위해 평생 닦은 도(刀)를 휘둘러야 한다는 것.

 

그것이 그녀의 도(道)라는 것.

 

즉.

 

세상이란 그리 악독하다는 것이, 그녀가 증명해온 삶의 진리였다.

 

“그만 주무십시오.”

 

바르그의 몸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쿵.

 

둔중한 울림.

 

그녀의 발이 용수철처럼 정면을 향해 쇄도했다.

 

두꺼운 대검을 놓고 왔기에 소리가 크진 않았다.

 

다만 손에는 작은 단검이 들려있었다.

 

한 뼘 정도 되는, 약한 강철로 만들어진 검.

 

바이오로이드를 죽이기엔 충분치 않겠지만 사람 한 명은 고요히 피안으로 보낼 수 있는 크기의 검.

 

“바르...!”

 

“내 어머니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스슥!

 

눈 깜짝할 사이에 마리아의 지척까지 다가온 바르그가 순간 속도를 줄이며 모든 관성을 오른손에 모았다.

 

보이지 않을 속도로. 손은 정확하게 그녀의 경동맥을 향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깔끔한 정석이었다.

 

마리아의 눈에 칼이 비쳤다.

 

그 눈이 바르그의 눈에 담겼다.

 

진정 믿은 이에게 배신 당한 듯 당혹스러워 하는 눈빛.

 

차마 그것을 볼 수 없어 바르그는 눈을 감았다.

 

퓨수숙!!

 

손끝에 불쾌한 감각이 일었다.

 

검의 길이만큼 푹 하고 들어간 느낌. 부드러운 촉감은 분명 살점을 찌른 것이었다.

 

그런데.

 

-쿠오오오오...

 

살이 차갑다.

 

[바르그.]

 

눈을 떴다.

 

앞에 보이는 건 고블린. 그것도 수십 마리가 합쳐진 것인지 덩치가 수 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녀가 찌른 것은 그 고블린의 철갑 촉수 중 하나였다. 촉수가 어둠 속에서 뻗어져 나와 마리아의 목덜미를 지킨 것이다.

 

[유기물 재생 시퀀스 가동.]

 

[고블린 개체 14마리 합성 가동. 거부 반응 제거됨.]

 

[소요 시간: 15분 43초. 성공적.]

 

복도 안을 감도는 차가운 기계음.

 

[어리석은 선택을 하셨습니다.]

 

-쿠오오오오!!

 

순간 고블린의 촉수가 실지렁이들처럼 뭉쳐 바르그의 안면을 가격했다.

 

콰광!!

 

공사장 중장비가 떨구는 듯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바르그가 반응할 새도 없는 신속이었다.

 

-위험?위험?위험?위험?위험?위험?위험?위험?위험?

 

-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

 

쓰러진 바르그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격양된 동우의 말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제 아버지는 바이오로이드의 시대를 만든 창조주입니다. 그런 분께서, 고작 당신 같은 바이오로이드 하나도 예상하지 못하셨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하아... 하아... 하아...”

 

[오르카 호의 정예도 이곳을 감히 침범하지 못했습니다. 당신 따위가 넘봐도 될 곳이 아니란 얘기지요.]

 

이제 더 이상 감출 것이 없어진 시설의 종속 인공지능들이 일제히 바르그의 규격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대상 검색: 바르그. 엠프레시스 하운드 소속 바이오로이드. 기체 넘버 1023002203. 데이터 베이스 검색 중.]

 

[설계 도면 검색 완료. 무적의 용 베이스. 유사도 계산 – 56%. 대응책 109939209. 가동 시작.]

 

[주무장 Skoll & Hati. 156 kg의 중장검. 대응 환경 재구성. 협소한 공간에서 전투 데이터가 현격하게 감소함. 승률 계산 중.]

 

그와 함께 흘러가는 문장 몇 가지.

 

[특이 사항: 극단적 바이오-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마리아 리오보로스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 존재. 모듈 설계 상의 불량 존재함. 전술적 이용 가능.]

 

별 것 아닌 것처럼 흘러가는 말이었을 뿐이었지만, 바르그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놈들은, 자신의 감정을 이용하고 있다.

 

“저런, 우리 바르그 많이 아팠겠구나.”

 

자신이 백 년의 시간 동안 간신히 닫아온 감정을, 잔혹하리만큼 꿰뚫어보고 있다.

 

저 멀리 벽에 날아가 처박힌 바르그에게 마리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며 다가왔다.

 

그리곤 단숨에, 그녀를 양팔로 꽉 끌어안았다.

 

“자, 엄마가 오랜만에 안아보자.”

 

“저리... 저리 가...... 커헉!!”

 

그러면 그 뒤로 고블린의 촉수가 날아들었다.

 

마리아의 몸을 교묘하게 피해 정확히 바르그의 몸으로만, 뾰족한 가시 같은 촉수가 박혔다가 빠졌다. 몸 위로 둥그런 구멍이 숭숭 뚫렸다. 검은색 구멍 속에서 붉은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도망가야 한다.

 

“제발... 제발 이거 놔...!!”

 

“우리 바르그. 그 동안 보고 싶었던 거, 엄마가 다 이해한단다.”

 

하지만 도망가려면, 이 사람의 팔을 잘라내야 한다.

 

밀쳐내야 하고, 이 따스한 온기를 거부해야 한다.

 

간신히 만들어낸 각오는 고블린의 촉수가 흩어냈다. 촉수를 피하려 하면 마리아의 얼굴 위로 상흔이 생겼다.

 

평생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미소가, 붉은 피로 더럽혀졌다.

 

“제발... 제발!!!!!!!!!”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바르그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탕!

 

그 순간, 복도의 반대편에서 섬광 같은 궤적이 고블린의 오른눈으로 날아들었다.

 

-쿠오오오오오오!!!!

 

온몸이 철갑으로 뒤덮인 고블린의 약점을 정확하게 노리는 신기.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은, 적어도 바르그가 아는 한 한 명뿐이었다.

 

“하아... 하아... 씨발! 뭐 하는 거야! 산보 갔다면서!”

 

미호.

 

분홍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날려온 그녀가 공이쇠를 당겨 총 속에서 탄피를 빼냈다.

 

“원래 엠프레시스 바이오로이드들은 산보 삼아 애들 죽이고 그런가? 오늘 길이 왜 이리 험한지.”

 

“으, 몸에 구멍 뚫린 거 봐. 너도 심폐소생술 해줄까?”

 

불가사리와 스틸 드라코가 미호의 말에 거들었다.

 

그와 동시에, 둘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균열이 일었다.

 

쿵!

 

바람처럼 고블린을 향해 쇄도한 둘은, 허공에서 갈라졌다.

 

불가사리는 위로, 스틸 드라코는 아래로.

 

눈 깜짝할 새 도달한 방해꾼들에 정신이 혼미해진 고블린은 우선 위로 도약한 불가사리에게로 시선을 돌려 수십 개의 촉수를 쏟아 붙였다.

 

“멍청아! 이쪽이다!”

 

하지만 그 순간,

 

콰과광!!

 

고블린의 다리 중 하나가 기우뚱, 옆으로 넘어졌다.

 

티타늄 같은 다리뼈가 산산히 부숴진 것이다.

 

그곳에는 아래로 돌아간 스틸 드라코가 방패를 메이스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쿠오오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이해할 수 있는 이성은 없었다.

 

자신의 하체는 스틸 드라코가 으스러뜨렸고, 어깨 너머에서 뻗은 촉수는 모조리 미호의 총알에 분쇄됐다.

 

거대한 거구가 순간 흔들렸고,

 

“정신 차려. 덩치.”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불가사리가 뾰족한 말뚝을 그대로 고블린의 머리에 박았다.

 

그와 동시에.

 

퍼버버버벙!

 

파일 벙커 뒤쪽에서 사람 키만한 크기의 화염이 뿜어져 나오며 고블린의 머리를 살점 조각 수천 개로 으스러뜨렸다.

 

10초.

 

고블린 수십 기가 한데 뭉쳐 만들어진 변형체를 세 명이서 잡는 데까지 고작 10초가 걸렸다.

 

“야이 개새끼야!!!”

 

거기까지 가자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패널 너머에서 닥터가 복도 끝의 카메라 아이를 향해 고함쳤다.

 

“너 이 씨발 새끼가 감히 나를 차단해?? 넌 씨발 내가 알고리즘 코드 뺏어서 반드시 기계어 단위로 쪼개버린다!”

 

“우와, 닥터 옛날 성격 나왔다.”

 

고블린의 채액을 닦아내던 스틸 드라코가 얼굴을 닦으며 벌벌 떨었다.

 

“... 닥터?”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바르그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르그? 어... 아직 살아있지? 거의 반송장이 됐네.”

 

“너... 여기 어떻게...”

 

“어떻게는 무슨, 나 닥터야. 한 번 모르는 건 있어도 두 번 모를 수는 없지. 저 개새끼가 방화벽을 우회하고 들어왔길래 그 부분을 보완하고...”

 

“그 얘기가 아니란 걸 알고 있지 않나!!”

 

오미크론 섹션의 인공지능은 타 구획의 감시권도 가지고 있다. 언제 어떤 침입자가 어느 입구로 들어왔는지 전부 확인할 수 있도록 동우의 눈은 무덤 모든 지역에 뻗어 있다.

 

마리아 리오보로스의 재생을 미리 해놓은 것도 그것 덕분. 바르그가 이곳에 올 타이밍에 맞춰 완성품을 선보일 수 있던 것도 그녀가 이곳에 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세 명은?

 

“어서 도망가라! 놈이 너희가 오고 있단 걸 모를 리가 없어!”

 

“여기까지 와서? 진짜로?”

 

“거절한다. 사령관을 살릴 데이터를 눈앞에 두고 돌아갈 순 없어.”

 

불가사리가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미크론 섹션으로 향하는 입구로 눈을 돌렸다.

 

“저 인공지능은 너희의 존재도 알고 있다! 그럼 대응책도 미리 간구하고 있었을 거란 말이다!”

 

“그래봤자 고블린 정도겠지. 여기 올 때까지 그것 외의 다른 걸 보인 적은...”

 

“그게 아니니까 하는 말이다!”

 

몽구스. 그게 제아무리 대테러부대였다고 한들 개인 사병이었던 엠프레시스 하운드보다 감춰져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그곳 소속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정보도 필시 이곳에 존재할 터.

 

[맞는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불길한 기계음이 무미건조하게 울렸다.

 

[대상 검색: T-14 미호. 몽구스 소속 바이오로이드. 기체 넘버 484266532. 데이터 베이스 검색 중.]

 

[대상 검색: AS-12 스틸 드라코. 몽구스 소속 바이오로이드. 기체 넘버 48425592. 데이터 베이스 검색 중.]

 

[대상 검색: T-60 불가사리. 몽구스 소속 바이오로이드. 기체 넘버 484268599. 데이터 베이스 검색 중.]

 

[검색 완료. 대응 넘버 102203059643 가동 시작.]

 

툭. 툭.

 

꺼지기 시작한 복도의 조명.

 

구역 전체에 그림자가 짙게 깔렸고, 치직거리는 유압 기계 소리가 닫힌 문 너머에서 연달아 들렸다.

 

바이오로이드의 눈으로도 쫓을 수 없는 암흑.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렸다.

 

[특이 사항: 전술적 이점을 위해 설계된 모듈-지능적 유대 관계.]

 

[부대 작전관에 대한 인공적인 애착 심리. 전술적 이용 가능함.]

 

그 너머에서, 푸른 눈송이 같은 것이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지 않았습니까? 닥터 양. 제가 왜 쓸모 없는 고블린들을 수거하지 않았는지 말입니다.]

 

“또 뭔 씨발 개짓거리를...”

 

[당신들의 전술적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애초에 고블린 생산 설비를 조금만 바꾸면 바이오로이드 생산 라인으로 바꿀 수 있는데, 남성 호르몬 때문에 오리진 더스트 효율이 떨어지는 고블린을 구태여 유지할 필요가 없죠.]

 

저벅.

 

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한둘이 아니었다. 못해도 수십. 하나의 분대가 뚜벅거리며 굳게 닫힌 문 너머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철컥.

 

그들의 손에는 모두, 컴파운드 보우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닥... 닥터...?”

 

미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불가사리도, 스틸 드라코도, 모두 같은 반응이었다.

 

“저게... 뭐야...?”

 

[대(對) 몽구스 전략. 진행 시작.]

 

홍련.

 

그야말로, 쏟아지는 홍련의 무리.

 

그들의 활시위 끝에 달려있는 빙결 앰플들이 한 겨울의 눈송이처럼 빛나고 있었다.

 

“정신 차리고 도망쳐라!!”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바르그였다. 어안이 벙벙해진 닥터와 세 명은 수십 명의 홍련이 총구를 들이밀 때까지 그 자리에 얼어 붙어 버렸다.

 

철컥.

 

활시위를 매기는 소리가 수십 번씩 울렸다.

 

그와 동시에 쏟아지는 눈송이의 연격.

 

피슉! 피슉!

 

간신히 자신의 검이 있는 곳까지 도달한 바르그는 겨우 적의 화망 속에 작은 안전 지대를 만들 수 있었다.

 

콰직! 콰자자작!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쏟아지는 빙결 엠플에 그녀의 거대한 검도 전부 얼어버리기 시작했다.

 

“이 멍청이들아! 적은 이미 대비책을 가지고 있었다! 살아돌아가는 게 급선무다!!”

 

“적... 적? 우리 엄마가 왜...”

 

“니네 엄마는 지금 병원에서 애 낳고 있다! 스틸 드라코!! 정신 차리고 뒤로 빠져라!!”

 

그럼에도 얼어붙은 세 명의 발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답답하다. 하지만 홍련이 임신한 후, 그녀로부터 반강제적으로 독립한 그녀들에겐 그러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것이다.

 

제 손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베는 것.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상관 없다. 자신이 어머니라 믿고 따랐다면 그 자가 바로 어머니가 되고, 부모가 된다.

 

“바르그~ 우리 강아지~”

 

저 목소리의 주인이 그런 것처럼.

 

“엄마에게 검을 겨누고 뭐하는 거니? 무슨 버릇이야, 그게.”

 

“닥쳐라! 너는 내 어머니가 아니야! 내 주인을 모욕하지 마라!!”

 

“으음, 아니지. 아니야.”

 

세상에는 자기 배로 낳았음에도 부모가 되지 못한 자가 있다.

 

자기 배로 낳지 않았음에도 부모가 된 자가 있다.

 

그러니, 그의 배에서 태어나지 않았어도 그의 자식이 된 자도 있지 않겠나?

 

적어도 그녀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날 죽이려 했을 때, 너는 진심이 아니었잖니.”

 

“... 닥쳐!”

 

“정말 날 죽이려고 했으면 그런 작은 검이 아니라 내가 준 그 대검을 썼겠지. 나는 너를 그렇게 무르게 키우지 않았단다.”

 

그렇게 믿고 있었기에, 그게 진실이었다.

 

그랬기에.

 

“너는 날 죽일 수 없어.”

 

자신의 부모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 그러니까 우리 강아지, 반항하지 말고 어서 엄마 품으로 돌아오렴. 그러면 너는 안 죽고 살 수 있을 테니까... 응?”

 

단 한 명.

 

“뭐지? 이 와이어는...”

 

태어나자 마자 버림 받은 사람을 제외하고서.

 

삐비비빅-

 

미호의 패널로 기계음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복도 전체의 자그마한 조명의 필라멘트가 모조리 터져나갔다.

 

능숙한 솜씨의 사보타주. 완벽한 어둠 속에서 삐빅거리는 시한 폭탄의 LED 수십 개가 적을 향해 날아들었다.

 

“길 안내 해주느라 수고했어.”

 

등 뒤에서 웅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은 그녀들을 피해 허공을 수놓은 수백 개의 와이어.

 

점차 붉어지는 와이어들이 유일한 광원이었고, 그 빛 속에서 붉은 눈이 그녀들을 향해 희번뜩 반짝였다.

 

솜털이 바짝 서는 느낌.

 

바르그의 동공에 흩날리는 단발의 붉은 머리카락이 비쳤다.

 

“집으로 가라. 바르그.”

 

자신을 세상에 나게 해준 존재. 부모.

 

부모를 감히 죽일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이젠 내가 할 테니까."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은,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다만.


단 한 명. 


태어나자 마자 버림 받아 죽은 사람.

 

즉.

 

자신의 생일(生日)이 곧 자신의 기일(忌日)인 존재.

 

“마리아 리오보로스.”

 

장화(薔花)가 있겠다.

 

"덤벼."


 

 

*


 


300화. 덤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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