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슈켈론 항구는 전쟁터를 방불할만큼 바쁘게 돌아갔다. 200명 가량의 순례자들이 배를 타고 온다는 소문이 곳곳에 돌았다.

 노점상인들은 간만에 한몫을 잡을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들은 흙벽 근처에 즐비한 채로 상품을 진열하고 있었다.

 헤진 리넨 옷을 입은 부랑아들은 맨발로 도시를 누비며 바쁜 어른들의 심부름을 하며 푼돈을 벌었다.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도시 안에서 맥동하며 왕성한 모험심 하나로 개미굴 하나까지 샅샅이 뒤지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아이들마저 조금 꺼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십자가를 들고 다니는 걸인 무리였다. 그들은 스스로 수도사를 자칭했다. 그러나 시체 같은 눈빛으로 사람들을 섬뜩하게 만들면서 종말을 설파하는데, 그 끔찍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오가 되고나서야 순례자를 태운 배가 정박하고 그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수도사들은 괴성을 지르며 그들에게 회개할 것을 요구했다.

 많은 순례자들이 그 광경을 보고 넋을 놓은 나머지 신을 찾기 시작했다. 하느님, 제가 무엇을 잘못했나이까.

 그녀는 그 광경을 무시하고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부터 그녀는 아옐렛이 되었다.

 아옐렛은 예루살렘에 가기로 했다. 그곳에 그녀의 운명이 있었다.

 “아줌마, 뭐 찾고 있나본데 내가 도와줄까요?”

 10살 남짓 되어 보이는 남자 부랑아였다. 그는 그녀의 정면을 막고 호기롭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줌마도 성지순례 때문에 왔죠? 어안이 벙벙할 거에요. 동방은 서방이랑 산도 물도 너무 다르니깐. 아줌마도 종잣돈으로 갖고 온 100두캇 정도는 있죠? 내가 싼 마부를 아는데 알려줄테니깐 3두캇만 줘요.”

 아옐렛은 잠깐 생각하다가 허리춤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꼬마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주머니를 강탈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옐렛은 주저하지 않고 꼬마를 쫓았다.

 “거기서! 도둑이야! 저 꼬맹이가 제 돈을 훔쳤어요!”

 꼬마는 군중 속을 잽싸게 헤엄쳤다. 몇몇 어른들이 꼬마를 잡으려고 했지만 재주 좋게 빠져나가는 형국이었다.

 돈주머니에서 돈이 짤랑이는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아옐렛은 사력을 다해서 달렸지만 발에 힘이 점점 풀리고 있었다. 늙다리가 아이의 싱싱한 다리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윽고 돈이 짤랑이는 소리가 완전히 멈췄다.

 아옐렛은 그제야 서류를 주머니에 넣었다는 걸 생각해냈다. 그녀는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거지꼴로 예루살렘에 도착한들 누가 내 말을 믿어줄 건가.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포기한 발걸음으로 힘없이 몇 발자국을 터벅거리며 전진했다.

 인파를 빠져나와 그녀가 본 것은 백마를 탄 기사였다.

 기사는 검은 갑옷을 입은 채 정의는 깨어있다는 듯이 남자아이를 낚아챈 채로 그에게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아이가 반성한다고 선언하자 기사는 자상하게 웃으며 그 아이를 땅바닥에 살포시 내려줬다.

 아이는 울먹이면서 아옐렛에게 다가가 돈주머니를 되돌려 줬다.

 기사의 흰 도포는 구름처럼 나부꼈다. 그녀의 붉은 눈은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그녀의 검은 피부는 석양에 비친 이 땅만큼이나 강렬했다.

 아옐렛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이 기사는 온 지구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기사도의 화신, 프레스터 요안나라는 것을.

 “아이가 반성했으니 크게 노여워하지 않길 바라오. 보아하니 순례자인 거 같은데, 내가 제안 하나 해도 되겠소. 내 부대가 지금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으니 그대 또한 따라와 주시길 바라오. 내 할 일과 의식주를 제공하리라.”

 아옐렛은 전율했다. 이것도 덴세츠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녀는 빚때문에 덴세츠에게 모든 걸 뺏기고 이 시대극의 엑스트라로서 프레스터 요안나의 하녀로서 살아가도록 정해졌었다.

 그것을 증명하는 서류를 보여주지 않고도 운명은 이렇게 흘러가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기사님.”

 “그 남자아이도 같이 데리고 오시오. 시종이 필요하던 참이었으니. 당신과 함께 쓰겠소.”

 “하지만 이 아이는 부모가 있을텐데.”

 “아줌마, 고아 처음 봐요? 닥치고 그냥 가기나 해요.”

 아이는 아옐렛의 손을 잡아 당기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아옐렛은 깜짝 놀라서 마음을 정돈하고 요안나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얘, 우리 서로 나쁜짓, 나쁜말은 하지 않기로 하자. 나는 아옐렛인데, 너는 이름이 뭐니?”

 “알겠어요. 아옐렛 아줌마, 이제 나쁜짓 안 할게요. 저는 고프리에요.”

 고프리는 아옐렛의 손을 잡고 붕붕 돌렸다. 아옐렛에게는 따스하고도 정말 기묘한 감정이었다.


 아옐렛은 고프리가 잠든 걸 확인하고 그의 방에서 나왔다.

 예루살렘 성의 복도에는 순찰병들이 여럿 있었다. 다부진 남자 군인들은 아옐렛에게 경례하며 그녀에게 존경을 표했다.

 “편안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여사님.”

 아옐렛은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서류업무를 조금 더 하고 잠들 셈이었다.

 예루살렘의 검은 방패 새 시즌은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크게 흥행했다.

 이전 시즌에서 볼 수 없었던 음모와 책략이 판치는 궁정암투가 큰 호평을 받았다.

 아옐렛은 원래 빨래하는 하녀였다. 그러나 기이한 사건들로 인해 요안나의 친구가 되고, 그녀와 함께 예루살렘을 노리는 음모를 분쇄해나갔다.

 아옐렛은 창 밖에 펼쳐진 예루살렘을 내려다봤다.

 성지를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가. 이제 내일이면 모든 고난이 끝날 것이다. 요안나의 가장 큰 바람이던 바이바르스와의 평화협정이 24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아옐렛, 여기에 있었군.”

 요안나가 하인 하나를 대동하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하인은 검은색 천으로 온몸을 꽁꽁 감싸고 있었다.

 “요안나님, 밤이 늦었습니다. 내일 중요한 일이 있는데 왜 주무시지 않습니까.”

 “역시 아옐렛은 똑부러지군. 그래도 너무 걱정말게. 아옐렛이 갑자기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조금이면 돼.”

 하인이 요안나의 앞을 막아서며 근처에 있는 의자 하나에 손짓을 했다.

 요안나는 웃으며 그 자리에 앉았다.

 “저 하인은 누구입니까. 한 번도 못 본 자인 거 같다만.”

 “그보다 참 많은 일이 있었네. 예루살렘에서 기사가 됐을 때는 세상을 전부 가진 기분이었지만, 성지라는 칭호와는 별개로 궁정은 궁정이고 전쟁은 전쟁이었지. 사실 하느님께 울면서 빌었던 적도 있었네. 이 어둠에 내가 빠져들지 않기를 말이야. 지금은 그런 모리배들도 이기고 전쟁도 끝나가네, 아옐렛, 네가 도와준 덕분이네.”

 “저는 견마가 되어 거들었을 뿐이지. 예루살렘에 평화가 찾아 온 것은 전부 요안나님의 공이옵니다.”

 요안나는 아옐렛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요안나는 흥분하여 일어서려고 했지만 옆에 있던 하인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하인은 요안나의 뒷목을 세게 쥐어잡았다. 요안나는 작게 신음하고는 의자에서 의식을 잃었다.

 아옐렛은 깜짝 놀란 나머지 비명도 지르지 않고 괴한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허리춤에는 단검이 있었다. 아옐렛이 손잡이를 잡은 순간 괴한은 두건을 풀었다.

 척봐도 그는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을림 하나 없는 뽀얀 피부, 요란스러운 귀 피어싱, 민머리에 수놓은 잉어 문신. 그는 아시아인처럼 보였으며, 특히 일본인처럼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SF.류’입니다. 그냥 류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는 일본어로 말했다. 아옐렛은 깜짝 놀라고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일본어로 대답했다.

 “덴세츠에서 오신 분이군요. 그런데 지금 녹화중인 거 아닌가요?”

 “걱정마십시오. 지금은 바이바르스 편을 방송 중이니까요.”

 ‘방송 중이 아니다.’ 그 한 마디를 듣자 아옐렛의 영혼은 산산히 흩어졌다. 앞에 있는 저 대머리 남자로부터 지독한 현대의 향수가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의 진짜 고향이 떠올랐다. 남아메리카 어딘가 아름다운 해변이 있던 그 곳. 그녀를 욕하고 괴롭히던 주정뱅이 아버지까지.

 “그 좆같은 회장새끼가 시켜서 왔지. 그 정신병자 새끼는 작품 말미가 되면 꼭 이래라 저래라 간섭이었는데.”

 “영화감독으로서 당신의 명성은 저도 익히 압니다.”

 “그럼 내가 어떻게 망했는지도 알겠군.”

 “인간 톱스타 두 명에게 덴세츠 생명보험에 가입시키지도 않고 위험한 배역을 찍게 했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덴세츠 생명보험 가입 권유만 했어도 당신만 독박 쓰고 빚지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아옐렛은 그 날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저... 오지(奧地)에서... 장대비가 쏟아지는... 키스씬이었다... 로맨스 영화에서 볼 수 있는 흔해빠진 장면이었다. 

 번개가 번쩍거리면서 아옐렛의 모든 걸 쓸어버렸다.

 “오직 하느님만이 알았을 테지.”

 아옐렛은 요안나를 잠깐 바라보다가 다리에 힘을 다시 줬다. 그녀는 성호를 그으며 비명횡사한 두 영혼의 넋을 위로했다.

 “정말 훌륭한 메소드 연기군요. 아무튼 저는 회장님 명을 전하러 왔습니다. 원래 이번 시즌은 평화회담을 하고 끝날 예정이었지만, 시청자들이 대규모 전쟁씬을 찍어라고 성화라서 찍게 됐습니다.”

 아옐렛은 그녀의 귀를 의심했다.

 “아, 걱정마십시오. 전 당신같은 실수는 하지 않아요. 전쟁씬은 잔뼈가 굵거든요. 병사 배역맡은 분들께는 오리진 더스트가 함유된 사망방지 물약과 덴세츠 생명보험에 가입할 기회가 주어질 겁니다. 가입을 안 할 수도 있지만, 가사(假死)도 죽음으로 치는 보험이라 병사 역 엑스트라에게는 짭짤한 수입이죠.”

 “왜, 어째서 전쟁을 다시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오. 요안나와 바이바르스는 이미 충분히 희생을 치뤘소. 드디어 그들의 꿈이 하나가 되었는데. 왜! 이번 시즌은 시청자랑 평론가들도 감동했다고 들었소.”

 “음... 사실 회장님이 갑자기 보고싶어 하셨습니다. 아, 요안나와 바이바르스의 싸움이 아닙니다. ‘미친 수도사’를 아십니까. 맡은 배역은 팽개치고 종말론이나 펼치는 무리들 말입니다. 회장님이 그들을 끔찍하게 싫어하셔서 이번에 다 쳐내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오. 바이오로이드가 아니란 말이오.”

 류의 이마에서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그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아옐렛이 말하는 도중에도 그는 몇 번이나 호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서 보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저 전투씬 한 번 찍고 덴세츠에서 쫓아낼 뿐입니다. 그 미치광이들에게도 사망방지 물약이랑 생명보험 다 줍니다. 여긴 덴세츠 드라마국입니다. 붉은 아레나가 아니에요.”

 류는 얼굴이 붉어지면서 목소리가 점점 초조해졌다.

 “저도 그 빌어먹을 새끼 때문에 이 지랄을 하는 게 믿기지가 않을 정도입니다. 그걸 좋다고 수락한 그 미치광이 새끼들도 이해가 안 가고. 아무튼 정해진 거요. 전쟁을 피할 순 없어. 당신의 그 고프리를 생각해서라도 잘 처신하십시오. 이번 시즌이 끝나면 예루살렘의 검은 방패의 엑스트라들은 전부 계약이 끝나니깐.”

 아옐렛은 급격한 현기증을 느꼈다. 주마등이 스쳐지나갈 정도로 강렬한 어지러움이었다. 주마등은 영화필름처럼 순식간에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하나의 이름과 하나의 사람만이 떠올랐다.

 “고프리는 이 시대에 태어난 아이인데... 혼자서 요즘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소.”

 류는 요안나를 업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요안나는 깨어나기 전에 제가 방에 갖다 놓을테니 걱정마십시오.”

 아옐렛은 그의 어깨죽지를 잡으면서 제지했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오.”

 “그냥 하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사실 제가 당신의 팬이거든요. 정말 고된 일이었을 텐데, 신앙심으로 헤쳐나가는 걸 보고 뭔가 숭고함을 느꼈다랄까요. 부디 무사하시길 바랍니다.”

 아옐렛은 그의 앞을 막아서며 그의 눈동자를 무섭게 노려봤다.

 “신앙심에 감화됐다고 말하는 자가 성기사(聖騎士)를 그렇게 대하는 거요.”

 류는 고개를 돌려서 요안나를 바라봤다. 요안나의 눈가가 악몽에 휩싸인 거처럼 파르르 떨렸다. 억지로 일어나려고 하지만 불가사의한 힘이 그것을 막는 거처럼 보였다.

 “성기사? 이거 말이오?”

 류는 피식 웃고는 그 방을 떠났다.


 머지않아 요안나의 군대와 바이바르스의 군대가 화친을 천명했다.

 양측은 예루살렘으로 함께 개선했고 백성들은 평화를 예찬하며 축제를 벌였다.

 아옐렛은 예루살렘 성의 고층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맛있는 음식과 달콤한 음료와 술을 마다하는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웃고 떠들며 분위기에 한껏 취했다.

 아옐렛만이 우수에 찬 눈빛으로 술, 아니, 사망방지 물약이 담긴 잔을 바라볼 뿐이었다.

 ‘웃고 떠들면서 마시면 30% 할인이라니 정말 웃긴 회사야.’

 그녀의 등 뒤로 누군가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아옐렛을 보자 한껏 흥분하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아옐렛! 왜 그렇게 우중충해요.”

 고프리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부딪혔다.

 그 때문에 아옐렛은 잔을 엎어버렸다. 아옐렛은 고프리를 바라봤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가가 조금 풀려 있었다.

 “아옐렛, 여기 있었군. 우리 둘이서 오래 찾았네.”

 요안나를 보자 아옐렛은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바이바르스님과 논의 할 게 많을 텐데 어찌 여기 계십니까.”

 “바이바르스도 자기 사람들과 회포를 풀고 있네, 나도 내 사람들과 오늘을 기려야 할 것이 아닌가.”

 요안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아무 말도 없이 예루살렘을 쳐다봤다. 그녀의 눈동자는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고, 어느 때보다 영롱한 빛을 내고 있었다. 마치 눈물로 닦은 진주같았다.

 이 장면을 전 세계의 몇 십억의 인구가 함께 봤고 함께 감동했다. 세계를 휩쓴 제2차 연합 전쟁도 드라마 시청을 막을 수 없었다.

 “요안나님, 대업을 이뤘으나 아직 끝난 게 아니옵니다. 이 땅을 보십시오. 아직 난제는 산적합니다.”

 “아줌마 그런 얘기는 집어치우고. 오늘만큼은 좀 풀어지세요.”

 “고프리, 행색을 보아하니 술을 마신 모양이구나. 내가 음료수만 마시라고 했을텐데.”

 요안나는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두 사람의 손을 잡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느님, 아, 하느님. 제게 이 소중한 사람들을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들이 없었다면 저는 그저 무력한 어린 양에 불과했을 겁니다. 하느님의 도시가 이제 하나가 됐습니다. 하느님의 아이들이 이제 하나가 됐습니다.”

 요안나는 엄숙히 기도했다. 아옐렛은 더욱 더 깊이 신앙에 빠지기 시작했고 천방지축인 고프리마저 눈을 감으며 내리쬐는 태양과 숨 쉬는 바람과 들려오는 기도문에 몸을 맡겼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드라마의 총결산이었다. 시청자들은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리며 희망을 얻었다.

 

 영원히 기억될 서기 2111년의 어느 날이었다.

 

 예루살렘 바깥에 있는 봉화에 불이 짚여졌다. 검은 갑옷을 입은 광신도들이 진군하고 있었다. 성직자의 검은 코트를 입은 장군들이 수수께끼의 여성 병사들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을 사방으로 포위했다.

 요안나의 군대는 북쪽을 바이바르스의 군대는 남쪽을 맡기로 했다. 불세출의 두 기사도 검은 군대의 목적에 대해 짚이는 바가 없었다. 그들은 대화도 하지 않았고 광기에 차있어 종말을 부르짖었다.

 예루살렘의 병사들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아옐렛과 고프리도 덴세츠의 대본에 따라 무장을 하고 요안나의 곁에 섰다. 요안나가 고프리에게 종군할 것을 명령하자 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들은 해가 지도록 공격하지 않았다. 해가 지자 고위직으로 보이는 사제 하나가 성 앞으로 나와 크게 소리쳤다.

 “거짓된 성지의 아이들아! 나의 이야기를 들어라! 우리들이 종말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은 진실이다! 머지않아 인류 최후의 날이 도래할 것이니! 우리의 신께서 그리 전해주셨도다!”

 요안나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분노하며 대답했다.

 “거짓된 성지? 그저 별난 사제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실은 끔찍한 사교도들이었구나! 네놈의 속셈이 무엇이냐! 어째서 성지를 포위한 거냐!”

 “더러운 덴세츠의 도구야! 닥쳐라! 사람이 명하니, 그 입 닥쳐라!”

 막나가는 미치광이의 말에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이 경악했다. 저들은 제4의 벽을 넘고 있었다.

 “인류의 종말이 다가왔도다. 너희 바이오로이드를 사람의 뇌파가 조종하는 거처럼 신의 파동이 내 영혼을 지나갔다. 끔찍한 악몽을 꿨고 매번 같았다. 바로 오늘! 하늘에서! 종말이 다가온다! 성문을 열어라! 나는 신의 지혜를 빌려 종말과의 최종대결을 준비하였으니 저 성벽을 빌려서 종말을 물리쳐 새로운 인류사를 창조할 것이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아옐렛은 되뇌이며 요안나를 바라봤다. 요안나는 입을 꾹 다문 채로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사님이 왜 이러는지 난 모르겠어. 아옐렛, 아옐렛.”

 고프리는 아옐렛의 손을 꼭 잡으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 순간, 하늘에서 붉은 벼락이 떨어졌다. 벼락은 검은 군대의 한복판에 떨어졌고 맹렬한 모래먼지가 흩날렸다.

 “어이, 베냐민. 이상한 소리 나는 거 같지 않나?”

 “이건... 메뚜기 소리잖아.”

 모래폭풍 속 그 무언가는 모래폭풍마저 삼키고는 도망치는 검은 군대를 도륙했다.

 검은 파리처럼 생긴 거대한 기계처럼 보였다. 하반신은 없고 닻처럼 생긴 둥근 고리가 붙어 있었는데 자세하게 보면 십자가를 거꾸로 한 거 같은 모양새였다. 그것은 마치 ‘둥지(nest)’처럼 안에서 끊임없이 날아다니는 뭔가를 뿜어냈다. 거기서 나온 메뚜기같은 기계는 검은 군대를 모조리 갉아먹고 있었다.

 검은 군대의 사제들은 물론, 바이오로이드 병사들마저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리고 갉아 먹혔다.

 하늘에서 붉은 혜성이 끊임없이 떨어졌다. 붉은 혜성으로 뒤덮여 밤하늘은 피바다처럼 시뻘겋게 변했다.

 아옐렛은 사태가 심각함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것은 정부의 방식도 기업의 방식도 아니었다.

 “요안나님, 어서 백성들을 피난시켜야 합니다.”

 아옐렛이 말하니 그제서야 요안나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렇네, 자네가 이끌어서 백성들을 피난시키게. 난 여기서 병사들과 시간을 끌어보겠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큰 굉음이 울려 퍼지고 예루살렘의 성문이 두 동강이 났다.

 죽음의 메뚜기 떼가 성지를 침입하려들자 요안나는 그곳에 뛰어들어 단칼에 메뚜기 떼를 휩쓸어버렸다. 그녀의 검과 방패가 오리진 더스트의 빛으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혼신을 다해서 방패를 세우며 적을 막아냈다.

 “아옐렛, 어서 피난하시오!”

 “기사님을 두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옐렛, 요안나님이 명령하잖아! 도망쳐야해!”

 예루살렘의 장병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고 있었다. 남녀노소 할 거 없이 큰 혼란에 빠진 채로 도망치고 있었다. 드라마에서 짜여진 각본은 사라지고 진짜 공포가 이 세트장에 가득했다.

 “고프리, 너는 주변을 둘러보며 낙오된 이를 모아서 도망치거라.”

 “난 못 해. 아옐렛이 하면 되잖아, 어서 도망치자.”

 아옐렛은 고프리의 뺨을 때리고 무섭게 꾸짖었다.

 “아가, 내 아가, 내가 가르쳐 준 것은 잘 기억하고 있느냐. 요안나님에게서 배운 것도 기억하고 있느냐. 그 모든 게 오늘을 위해서 짜여진 각본이었단다. 이제 너는 당당한 주인공으로서 움직여야 하느니라. 하느님이 보우해주실 것이다.”

 고프리는 울먹거리며 아옐렛을 한 번 보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끔찍한 비명이 난무하는 난리통에서 약자를 구호하는 고프리의 함성이 나지막하게 들렸다.

 아옐렛은 검을 뽑아서 요안나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요안나를 덮치는 메뚜기 떼를 베어버리고는 자신은 역습을 당한 나머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요안나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큰 슬픔에 빠져버렸다. 모든 걸 포기하려는 그 순간.

 요안나는 약자를 구호하는 고프리의 함성을 똑똑히 들었다.

 “예루살렘의 병사들이여! 점호하라!”

 요안나가 소리치자 성벽에서 싸우고 있던 소수의 병사들이 대답했다. 그들은 사력을 다해서 요안나의 곁에 모여 들었다. 그 숫자는 백 명이 채 되지 않았지만, 기천의 메뚜기 떼를 기적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오늘 아옐렛 자매가 악과 맞서다 순교했도다. 우리 중에 그녀보다 육체가 강한 이는 있어도 믿음이 강한 이는 정녕 없도다.”

 병사들은 그저 엑스트라일 뿐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인도 아니었고 아메리카, 아프리카, 유라시아, 오세아니아에서 온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이곳은 예루살렘도 아닌 아프리카 어딘가에 있는 고립된 섬이었다.

 “그러나 용감한 우리들, 행복한 우리들은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열심히 싸웠으니 천국의 말석에 들기에 부족함이 없도다.”

 22세기에 종교인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었다. 있어도 코헤이 교단 같은 음란한 사이비일 뿐, 누군가의 말대로 종교란 마약과 다름없는 현대에, 그들은 중세시대의 순수한 신앙을 고스란히 재현해냈고 실천했다.

 용사들은 한 명씩 쓰러져갔다. 그들은 원통해하며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그들의 체내에 섞인 미량의 오리진 더스트 덕분에 가사 상태에 빠졌을 뿐이었으나 그들이 다시 살아날 가능성은 없었다.

 결국 요안나 혼자 남아 피 웅덩이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순교자들이 박해 속에서 빛을 꿈꿨듯 나 또한 그렇도다.”

 요안나는 검에 용사들의 피를 발랐다. 붉게 칠해진 검은 오리진 더스트로 인해 반짝거리고 있었다.

 요안나는 크게 분노하여 메뚜기떼와 그것의 둥지(nest)를 바라봤다.

 요안나의 검은 점점 강렬하게 빛을 발휘했다. 요안나가 흘린 피와 용사들의 피 속에 담긴 오리진 더스트가 힘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요안나가 검을 휘두르자 주변에 있던 메뚜기는 모조리 소멸되었고 빛의 검은 절정에 이르렀다.

 요안나는 기합소리와 함께 달려들어 사악한 둥지(nest)를 일격에 파괴하였다.

 

 고프리는 피난행렬의 말미에서 노인들, 환자들, 아이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바이바르스 군대의 마차가 와서 거기에 환자를 싣고 있을 무렵. 예루살렘 쪽에서 폭포 같은 빛줄기 하나가 포착됐다. 피난길에 있던 누구나 그 빛의 정체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요안나의 숙적, 바이바르스는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떠올렸다. 그리고 고프리를 바라봤다.

 “기사도는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