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문학) 애프터 더 라스트 오리진 -2-

께르륵껭껭껭



“아가씨! 거기 서세요!”




오르카 생활관의 아침은 속절없이 찾아왔다. 아침부터 멀리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노성은 자고 있던 소년의 잠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바인은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등을 켜고 시계를 살펴보니 시곗바늘은 8시 1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비전투 인원들의 기상 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밖에서 들려오던 소란이 조금 잦아들었다.


바인은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셨다. 냉수는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내려간다.




“오빠, 안녕!”




내려 갈뻔했다, 갑자기 작은 여자아이가 문을 열고 방으로 뛰쳐 들어오기 전까진.




“콜록! 콜록! 흠! 크흠! 후... 안녕, 플리아 아침부터 활기차네.”




“잘 잤어, 오빠?”




“하하... 네 덕분에 깼지.”






눈앞에 보이는 작은 소녀의 이름은 플로렌스. 그 이름에 어울리는 앙증맞은 꽃핀을 보랏빛이 감도는 갈색의 머리칼에 꽂은 활달한 8살짜리 꼬마 숙녀다. 물기가 맺힌 얼굴을 보니 분명 누군가 아침 세수를 시켜주다가 이 닦기 싫다고 도망쳐 나온 모양이다. 그러다가 내 방으로 숨어들어 왔을 테고.


일단은 손수건으로 얼굴에 맺힌 물기를 닦아 주었다. 플로렌스는 가만히 서서 웃는 얼굴로 닦는 내 손길을 가만히 기다려줬다.




“오늘은 같이 놀자, 오빠!”




“안 되는 거 알잖아. 오빠는 오늘 수업도 듣고 여러모로 할 일이 많아. 그건 그렇고 지금은 빨리 세수하고 일어날 준비를 해야지.


넌 사령관님이랑 같이 아침 식사해야 하잖아.”




“아빠랑 밥 먹으려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건 싫어. 그냥 먹으면 안되는 거야?”




“음... 내가 사령관님이라도 이렇게 눈에 눈곱 잔뜩 끼어있는 플로렌스랑은 같이 밥 먹기 싫을 걸?”




“앗, 그건 싫어.”




“그럼 오빠가 닦아줄게. 그럼 이제 나가자, 영차”




지저분한 눈을 휴지로 닦아준 뒤 플로렌스를 안은 채 복도로 나왔다.


조금 걷자 바닐라씨가 눈에 보였다. 달아난 아가씨를 줄곧 찾고 있던 바닐라씨는 내 품에 안긴 플로렌스를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가왔다.




“정말.... 찾고 있었습니다. 아가씨. 얼른 단장을 마치시고 주인님께 가셔야죠. 바인님도 함께 세안실로 가시겠습니까?”


“아, 전 제 방에서 할게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바닐라씨는 고개를 조금 숙여 가볍게 인사를 하고 플로렌스의 손을 잡고 세안실로 향했다.




“오빠, 조금 있다 나랑 같이 노는거야!”


플로렌스는 나를 향해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 오늘 할 일 다 끝내면 같이 놀자.”


멀리 복도 너머에서 ‘이예이~’ 라는 귀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열린 방문 너머에선 8시 반을 알리는 알람 소리가 울려왔다.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


.


.


.


“후우...”


눈위에 씌워져 있던 바이저를 올려 썼다. 온몸엔 온통 식은땀들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알렉산드라 선생님의 수업이 끝나고 마리 큰이모의 지도를 받아 전투지휘 시뮬레이션 훈련을 한다. 마리 큰이모는 이번 시뮬레이션의 결과를 평가하기 위해 내 옆에 다가오셨다.




“나날이 발전해가고 계십니다. 저번 훈련에서 조금 부족했던 경사면에서 병사를 움직이는 법을 이번엔 실수 없이 잘 해내 주셨습니다.


다만 여전히 시가전에서 취약한 면을 보이시는 군요”




“시가전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아서 그래요. 적의 기습이나 병력 분할 부분에서 조금 머리가 아파서....”




“그렇다면 제가 그 부분만 중점적으로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시고 저의 방으로......”




“큰이모!”




마리 이모의 얼굴 위에 음흉한 기색이 드리워졌다. 저 표정을 보니 또 이상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나 보다.




“조카랑 같이 자고 싶은 게 잘못은 아니지 않니?”




“이모가 생각하는 ‘자다’의 개념이랑 상식 수준의 ‘자다’는 조금 다른 거 같다고 생각 안 해봤어요?”




“.....그치만”




“그치만이고 뭐고. 제발 반쯤 헐벗은 채로 샤워실에 찾아오지 말아줘요.


내가 다른 이모들 눈치 봐서 말은 안 해주지만 나 진짜 이모 여자로 안 보인다고요!”




“....! 그렇......지? 나는 이제 여자도 아니지...?


다른 젊고 탱탱하고 파릇파릇한 젊은 여자들에 비해서 나는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는 거지?


나도 좋다고 이렇게 된 건 아닌데......흑...흑”




마리의 눈가엔 이슬이 맺혔고 입에선 한탄이 중얼중얼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바인은 순간 싸해진 분위기에 오한을 느끼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마리를 안아줬다.




“그게 아니라 이모, 우린 가족이잖아요. 가족끼리는 그러면 안 된단 말이에요.


이모는 충분히 멋있고 아름다워요. 난 우리 큰이모가 그 대단한 불굴의 마리라서 얼마나 좋은데요.


그러니깐... 그러니깐 이제 이런 일은 하지마요. 제발.”




마리 이모의 팔은 내 등을 감쌌다. 이모는 그렇게 3분 동안 나를 안고는


“음쇼년...”


의미 모를 말을 작게 속삭이고는 훈련실을 떠났다.




언제까지 주책 넘치는 큰이모 때문에 이런 짓을 계속해줘야 하는 걸까.


훈련이 끝나면 늦은 저녁 식사를 할 때가 된다. 스틸라인의 병영식당은 날마다 북적여댄다.


식기와 식판이 부딪히는 소리와 여기저기서 얘기를 나누는 소리, 그리고 날 보며 한마디씩 인사를 던지는 이모들의 말이 들려오는 곳이다.




메이드분들은 왜 병영식당 같은 곳에서 저녁을 먹냐며 차라리 방으로 식사를 가져다주겠다며 항의했다.


바이오로이드의 시각에서는 내가 병영식당에서 밥을 먹는 게 분명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행동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바이오로이드가 아닌 가족의 눈높이에서 본다면 이곳은 내가 이모들과 같이 식사를 하며 서로가 식구임을 확인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곳이 좋다.


겸사겸사 내가 같이 식사를 한다는 이유로 이모들이 예전보다는 좀 더 괜찮은 식사를 하게 되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기도 하고 말이다.




“오, 우리 복덩이. 오늘은 나랑 먹을래?”


배식을 기다리다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한 쌍의 토끼 귀가 쫑긋거리면서 나를 반겨줬다.


1034 이모였다. 날 복덩이라고 불러주는 이프리트는 1034 이모밖에 없었다.




1034 이모는 곧 식판을 들고 내 앞에 앉았다. 후드를 벗고 이어폰을 귀에서 뺀 이모는 수저를 들었다.


입속으로 밥을 넣는 모습만을 본다면 이모라는 호칭이 의심스러워지는 영락없는 꼬마 아이의 모습이었지만


1034번 이프리트 이모는 어머니와 함께 오르카의 기조를 닦아낸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내게 어머니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려준 분이기도 하시다.




“오늘 훈련은 어땠어?”




“아, 네, 뭐. 평범했죠. 마리 이모가 항상 열심히 가르쳐 주셔서 특별히 막히는 건 아직 없어요. 왜요?”




“아니... 너희 엄마가 너 낳았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지휘까지 하는 게 신기해서 그렇지... 정말 세월 참 빠른 거 같아서 그렇지.”




“나랑 밥 먹을 때마다 세월 얘기 꺼내시는데, 이모 입에서 세월 얘기 나오면 되게 이상한 거 알아요?”




“어유, 넌 다 늙어서 네 새끼 낳아도 나한텐 아직도 그 아기일걸.”




“진짜 우리 이모 하는 말마다 아줌마 다됐네. 다 먹었으니깐 먼저 들어갈게요.”




“가는 길에 철충 조심해!”




“그땐 이모 부르면 되죠.”




1034는 대답이 마음에 든 듯 바인에게 웃어줬다. 이모들의 배웅을 받으며 소년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


.


방문을 열고 침대에 걸터앉으니 둥글게 쌓아올린 이불에서 ‘아이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이불속에 숨어있는지 바인에게는 훤히 보였다. 이불을 들추자 역시 플로렌스가 장난기 넘치는 웃음을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이내 장미꽃보다 샛붉은 눈동자로 오빠의 눈을 깊게 들여다 보았다. 소녀는 이내 오빠에게 자신이 가져온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했다.


바인은 개구쟁이 동생의 부탁을 겉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하지만 흔쾌히 들어주었다.




마녀의 독사과를 먹고 쓰러진 공주님을 왕자님이 구해주는 이야기,


요정의 도움으로 유리구두를 신고 무도회에서 왕자님과 같이 춤을 춘 소녀가 공주가 되는 이야기,


엄지 손가락만한 공주 이야기.


개구리로 변한 공주 이야기,


물거품이 되어버린 공주 이야기 등등


수많은 동화들이 바인의 목소리를 통해 허공에 그림을 그려가며 꼬마 숙녀에게 자신들의 멋지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뽐냈다.




플로렌스는 침대에 누워서 어렴풋이 꿈을 그렸다. 멋진 성에서 아름다운 하녀들이 자신을 보필해주었고 예쁜 노래를 부르는 귀여운 공주가 있었다.


말을 타고 달려온 멋진 왕자님은 소녀를 위해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그 공주가 나라면 얼마나 좋을까? 어?..’




플로렌스는 다시 한번 꿈을 그려보았다.


성은 아니지만, 세상에서 제일 멋진 잠수함에서 아름다운 바이오로이드 메이드들이 항상 예쁜 노래를 부르는 귀여운 소녀인 자신을 위해 일해주고 있었다.


더군다나 아빠는 이 잠수함을 호령하는 멋진 왕이셨다.




‘그래 나는 공주였구나!’ 플로렌스는 황홀한 깨달음에 들떴다. 그러나 이내 곧바로 그 황홀함은 슬픈 좌절로 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에겐 왕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랑을 속삭여줄 왕자가 없는 공주라니,


그건 참치를 싫어하는 LRL보다 말이 안 됐고, 마이티의 패치노트보다 공허했고, 책상 없는 알렉산드라보다 비참했다.


소녀는 생각했다. 왕자가 어디 있을까. 자신을 사랑해주고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왕자. 그런 왕자가 있다면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곁에 둘 텐데.




‘아.’




소녀는 줄곧 감았던 눈을 떴다. 정답은 바로 자신의 눈꺼풀 너머에 있었던 것이다.


소녀를 아껴주는 멋진 왕자는 바로 자신의 옆에 있는 소년이었다.




“오빠”




“왜 그래?”




“오빠는 왕자 맞지?”




“음..? 갑자기 무슨 소리야? 플리아? 왜 그러는 거니?”




“내가 오빠 사랑하는 거 알지?”




“어..? 알지. 그래. 나도 예쁜 우리 동생 사랑하지, 그..그런데?”




오늘따라 사뭇 달라 보이는 걸 넘어 이상해 보이는 동생의 모습에 당황한 바인은 침대에서 일어나 일단 동생과 거리를 벌렸다.




“그럼 나를 사랑해주는 거지? 동화 속의 왕자님이 공주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어? 아니 그건 아닌ㄷ..”




“그럼 나는 진짜로 공주가 되는 거지?”




‘뭔가 이상한 얘기로 흘러가는데?


일단 애를 좀 떼어놓아야 할 거 같은데. 바닐라씨를 불러야 하나? 통신기가 어딨더라? 책상에 놓았는데.


어디 갔지? 아 젠장 마리 이모 달래줄 때 훈련실에 놓고 왔구나.


어? 어? 애가 갑자기 진심으로 다가온다.


뭐지? 왠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위험해질 거 같은데?


어라?




어?




어?!!’






“플로렌스, 여깄었니? 엄마가 바인 오빠랑은 늦게까지 놀지 말라고 했잖니. 착하지, 우리 딸? 얼른 자러 가자.”




그 순간 문 너머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플로렌스의 어머니셨다.


잘 시간까지 방에 돌아오지 않은 딸을 찾으러 직접 오신 모양이다.


플로렌스는 아쉬워하며 동화책을 들고 내게 잘자라는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너무나 갑작스러웠던 상황에 잠깐 사고가 정지되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잠시 뒤 정신을 차린 뒤에도 한동안 상황파악조차 하기 힘들었다.




잠시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리했다. 나는 그저 동화책을 읽어주었을 뿐인데 플로렌스는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하며 다가왔다,


마치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나는 통신기를 훈련실에 놓고 왔고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플로렌스의 어머니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플로렌스를 데려가셨다.


그것뿐이었다. 문제가 될만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지금은 일단 나가서 플로렌스의 어머니께 인사를 드려야겠다.




문을 열자 멀지 않은 곳에서 플로렌스를 안고 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리제 아주머니!”




리제 아주머니는 잠시 뒤돌아서 내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는 다시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가셨다.




“히히! 오빠 내일 봐!”




“그... 그래...아마도...”




평온하던 일상에 커다란 파문이 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내게 평온함은 기대하면 안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


2편이에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5명중에 4명은 엄마를 생각해 놓았는데


나머지 1명은 생각을 안해놓았으요


누가 좋을까요, 되도록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애면 좋겠는데.



다음편은 철남충이 왜 리제를 안게 되었는지랑


셋째 딸이야기를 쓸 거 같아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