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문학) 애프터 더 라스트 오리진 -5-

께르륵껭껭껭



플리아를 안은 바닐라씨의 뒤를 겨우겨우 쫓아 도착한 곳은 오르카의 상층부에 위치한 출격 포트였다. 


탐색이나 전투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바이오로이드가 아니라면 딱히 올 이유가 없는 곳인데...




“비켜! 난 섬으로 갈 거야!”




“너무, 위험함다! 이제 겨우 철충을 몰아냈을 뿐이지 가는 길에 철충한테 발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호위 병력 좀 붙여가면 되잖아!”




“아무리 제가 바보라도 그렇게 말처럼 쉽지는 않단 건 알고 있슴다! 사령관님 허락이 있어야 되는 검다! 아! 바인!”




브라우니 이모와 조금 허스키한 여성의 목소리가 말싸움하는 것이 들렸다. 


자신의 어머니를 닮은 분홍색 머리지만 길이는 어깨까지 밖에 오지 않는 짧은 단발.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 통이 큰 점퍼와 청바지. 건실보다는 자유를 더 사랑함을 주장하는 귀걸이. 




달래 누나였다. 




누나는 당장이라도 출격용 탐사정에 올라타려는 듯이 성을 내었다.


그 옆에서 난감하다는 듯이 머리를 감싸고 있는 노움 이모가 보였다.




“이모, 이게 무슨 일이에요?”


“자꾸 섬으로 가겠다고 해서 막는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령관님의 자제분이시기에 막는 것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오셔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헬레네 누나는 아직도 연락이 안 돼요?”




“찾아봤는데 방에도 훈련실에도 안 계셔서 지금 가능한 인원을 다 투입해서 찾는 중입니다.”


“일단 저한테 맡겨주세요.”


“부탁합니다. 못난 이모들이라 죄송합니다.”


“전 못난 이모들 밑에서 자란 적 없어요. 그런 말 마세요. 자, 그러면..”




천천히 다가갔다. 브라우니 이모는 내가 오는 것을 힐끔 보고는 이제야 일이 풀렸다는 듯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명령을 내리는 방법은 어렸을 때부터 귀에 박히도록 배웠다. 인간만이 온전히 할 수 있는 일이기에 만약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면서 말이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는 없었다. 




“브라우니 4908, 지금 당장 달래....누나를 저지하라... 하세요. 명령입니다.”




“그 말만 기다렸슴다. 잘했슴다.”




4908 이모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달래 누나를 포박했다.




“이모는 얼른 다른 곳으로 가세요. 번호 알려졌으니깐 누나가 또 명령할 수도 있어요. 노움 이모가 와서 도와주세요.”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지만, 인간의 명령이 있으면 어느정도의 수준까지는 인간의 행동에 제한을 걸 수 있다. 


불행인 건지, 다행인 건지 인간과 바이오로이드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지금도 이런 규칙은 계속 되었다. 


하지만 브라우니 모델 같은 바이오로이드들은 세세하고 정교한 명령, 그리고 인원 구별이라는 이유로


개체에게 제대로 되고 구체적인 명령을 하기 위해서는 번호와 함께 명령해야 한다는 제약이 있었다. 




“이거 놓아! 야! 가야 한다고!”




“누나 일단 앉아서 말하자 왜 섬에 가고 싶은 거야?”




“ㅅ팔! 왜 쟤 말만 듣고 내 말은 안 들어주는 거야! 빌어먹을 양산형!”




“그 입 다물어! 아...”




이성의 실이 잠시 끊어졌었다. 큰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말 없이 노움 이모를 바라보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멀리 플리아를 바라봤다.


 내 큰소리에 놀란 플리아를 바닐라씨가 달래주고 계셨다. 


달래 누나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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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형. 대량 생산품. 다 똑같은 것들. 소모품. 난 그 말들이 싫었다. 


남들이 이모들을 소모품이라고 부르는 것이 싫다. 


모두가 하나하나 세세하게 보면 그저 한 명의 인격체였다. 




3356번 브라우니 이모는 멸망 전 잡지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 


가끔씩 보이는 남성 속옷 사진에 너무 좋아하는 모습이 참 뭐라고 해야 할까. 




678번 브라우니 스팸을 굽지도 덥히지도 않고 차게 먹는 것을 좋아하신다. 


그게 참맛이고 음식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하신다. 




7853번 레프리콘 이모는 밤에 남몰래 시를 적으신다. 


가끔 내 방 경계를 보러 오실 때 내게 몰래 시를 읽어주시곤 한다. 




341번 노움 이모는 다른 노움 이모들에 비해 웃음이 더 많으시다. 


별 거 아닌 일에도 웃으시는 모습을 보면 참 긍정적인게 보기가 좋았다. 




6920번 레프리콘 이모는 나중에 한 번 예쁜 옷을 입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싶으시다고 내게 몰래 말하시곤 한다. 




8977번 이프리트 이모는 내게 항상 옛날 노래에 나오는 가사를 한 줄씩 읊어주신다.  




777 노움 이모는 번호에 어울리지 않게 실수가 잦으시다. 


구정물과 깨끗한 물을 착각하셨을 때는 생활관에서 조금 칙칙한 냄새가 나기도 했다. 그래도 본인은 새옹지마라며 웃고 넘어가신다. 9082번 브라우니 이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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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들이 양상형이고 소모품일 리가 없다. 그런 취급을 받으면 안 됐다. 


그런데도 아직 나는 누군가에겐 양산형 바이오로이드의 자식이다. 


어머니가 사령관님께 이름을 받았을 때 모두가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는 어머니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했을 지도 모른다. 단지 양산형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머니가 얼마나 특별하고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멋진 여자였는지 알지도,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은 자가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들의 인격을 죽이고 지우는 양산형이라는 말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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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을 사이에 두고 두 명의 ‘인간’ 사이에는 적막이 흘렀다. 두 사람 다 먼 산을 바라보며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15살 남자애와 17살 여자애의 거리가 이렇게도 멀었던가. 주위에서 지켜보던 모든 바이오로이드의 생각엔 그런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한 명은 다른 한 명을 강제로 묶어 짐짝처럼 옮겨버렸다. 


다른 한명은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을 내뱉고 말았다. 


누가 보아도 굉장히.... 껄끄러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플로렌스였다. 플로렌스는 바인의 옆에 앉은 뒤 달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언니는 왜 섬에 가고 싶었어?”




차마 양손을 볼에 댄 채 물어보는 막내를 무시할 수는 없었던지 달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자리 좀 비켜주면 다 말할게.”




바인은 근처에서 지켜보던 브라우니와 노움을 힐끗 바라봤다. 둘은 잠시 얘기를 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로 나갔다. 




달래는 얘기를 시작했다.


“토모... 알지?”


바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080 기관 소속의 스파이 임무용 바이오로이드잖아.”


“그렇다면 행복한 토모는 알아?”


토모들의 코드네임은 번호가 아닌 수식어로 구별된다고 어딘가에서 들었던 것을 기억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바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 애는 처음에 내 고등교육과정에서 나랑 같이 알렉산드라 밑에서 같이 공부했었어. 


뭐 어디선가 친구와 같이 학습한다면 학업효능이 더 높아진다는 생각이었는지 그렇게 같이 공부하게 되더라. 근데 걔가 어땠냐면...”




달래는 입꼬리에 살짝 미소를 걸친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바인은 그저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플로렌스는 학교 이야기가 재밌던지 옆에서 다리를 앞뒤로 흔들면서 같이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애가 어느 날 갑자기...”


“섬에 간 거였구나.”




“작별인사도 못 하고.”


“그래서 그렇게 가려던 거였어?”




“너도 알잖아. 오르카에서 섬에 물자 보내는 주기. 2주에 한 번 밖에 안 가는데 그동안 편지도 소포도 못 보내. 그런 답답한 건 정말 못 참겠거든.”


“아무리 그래도 아예 못 만나는 건 아니잖아. 가끔 가끔씩이라도 보면 되는 거 아냐?”




“너는 아직 어려서 그래. 못 보게 되면 더 보고 싶어지는 그런 게 있어. 난 진짜 걔 좋아했다고.”


“둘이 정말 친했구나.”




“그리고 걔가 키스도 진짜 잘했었는데.”


“?”




“뭐야? 뭔데?”




바인은 서둘러 플로렌스의 귀를 막았다. 바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달래는 그런 동생들의 모습이 귀여웠는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웃어버렸다.




“어.... 그... 뭐야..... 장난으로 한 거지?”


“아니, 나랑 걔 둘 다 진심이었어. 저번 수면부상 때 달 아래에서. ”


“?!?!?!?!?”




달래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예상된 반응이었다. 이해해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아까 입에 양산형이라는 실언을 담기는 했지만, 달래 본인도 양상형이라는 그 단어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마음을 주게 된 행복한 토모도 다른 토모들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고,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는 너무도 달랐다. 


누구를 좋아하는지 그것이 너무 큰 다름의 이유가 되었고 그게 서로가, 서로를 이끌리게 해줬다. 




“서로 사랑하면 좋은 거 아냐?! 책에서 맨날 그래. 사랑하는 것은 좋은 거라고.”




“무슨 얘기 했는지 다 들었어?”




“언니 표정이 공주님들이 짓는 표정 같았어. 왕자님을 생각할 때 항상 이런 표정이었어! 오빠가 읽어줬잖아.”




플로렌스는 의기양양하게 오빠와 언니를 올려보았다. 두 사람은 당돌하게 사랑론을 펼치는 막내 동생이 귀여웠는지 그것도 아니면, 


신기했는지 계속해서 이 꼬마 숙녀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줬다. 그러다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고 시곗바늘은 어느새 1시를 가리켰고, 


달래는 품속에 있던 초콜릿을 플로렌스에게 건네주었다. 플로렌스는 초콜릿을 받아먹었다. 


바인은 나눠받은 초콜렛을 입안에 물고 있다가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는지 빠르게 자세를 고쳐앉았다.




“누나가 바라는 건 섬에 가서 토모씨랑 다시 만나는 거지?”


“연락이라도 주고받을 수 있으면 돼.”


“그러면 이렇게 할래?”




바인의 계획은 이랬다. 물자와 민간용 수송은 2주에 한 번씩이지만 경계 병력 수송은 3일에 한 번씩 교대로 오게 되니깐 그때 스틸라인에게 부탁해서 편지를 건네주고 3일 뒤에 다시 편지를 받으면 된다. 


바인은 본인이 마리와 담판을 짓고 꼭 약속을 지켜주겠다고 했다. 


달래는 반신반의 했다. 아무리 바인이 스틸라인에게 소중한 존재라고 해도 불굴의 마리는 사적인 정에 연연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적어도 달래와 다른 이들의 눈에 마리는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바인의 눈에 비친 큰이모로서의 마리는...




“괜찮으니깐, 기다리고 토모씨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있어 줘.”


바인의 눈은 결의로 가득차 있었다.




며칠 뒤 섬의 인원들의 편의와 원활한 소통을 위해 스틸라인의 군용 수송선에 익스프레스 76 한 기가 같이 동승할 수 있는 규정이 생겼을 때 


여러 바이오로이드들은 섬에 간 자매들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마리도 기뻐했다. 오랜만에 음쇼년 앨범에 귀여운 사진을 갱신했기 때문이다.




바인은 머리에 달린 커다란 리본을 떼어내고 ‘그래도 결말이 잘 되었으니깐 다 잘 된 거겠지?’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래도 눈물이 살짝 흘러나오는 것은, 기뻐서 흐르는 거겠지. 헤헤......




그날부터 달래 누나가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걸어주는 일이 잦아졌다. 


별거 없는 평범한 일상얘기부터 알렉산드라 선생님과 책상 얘기, 토모씨와의 편지 이야기, 


아니면 여자 얘기 같은 것들을 해주곤 했다. 부담스럽긴 했지만 이런 얘기를 나눌 사람이 생긴 것은 처음이라 흥미가 있기도 했다. 




그래도 ‘뭐? 아직도 관심 가는 사람이 없다고? 네 나이에? 야, 그거 안 쓸 거면 차라리 나 줘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순간 너무 당황해서 도망가본 적도 있었다. 




그래도 가족끼리 벽이 없는 건 좋은 것이니깐 괜찮겠지. 그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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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게 뒷 이야기를 올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분량조절도 실패해가지고 ㅠㅠ


동성애 묘사 죄송합니다. 가뜩이나 보비는 것도 싫어하는 라오갤인데 ㅠ


그래도 나중에가면 이런 상황이 있을것 같아서 적어 보았습니다.


달래가 누구 딸인지 숙련된 라붕이라면 알아맞추실수있을거라 장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