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것은 스무 살이 된 이후 어느 날이었다.


그때의 난 주인으로 모셨던 이의 사랑을 얻기 위해 다른 여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꼭두각시로 삼아 조종했으며, 그것이 화근이 되어 저항군을 이끌던 남자에 의해 벼랑 끝에 몰리고 끝내는 주인과 함께 자폭하여 불길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기억에 구역질이 몰려와 여러 번 구토했고, 그 바람에 정신을 잃고 병원으로 실려가 한동안 입원해야만 했다.



그 날로부터 수 년이 지난 지금도 전생의 기억은 날 괴롭히며, 가족들과 지인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미칠 것만 같다.


전생에서 원수 같았던 자매들과는 화목한 가족이 되었고, 전생에서 그토록 괴롭혔던 이들과는 누구보다 친한 친구로서 지내고 있었다.


이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이 내게는 통탄할 따름이었다. 전생 어쩌고 하는 얘기를 털어놓으면 분명 이상한 눈으로 바라볼테니.


"하아.."


"또 한숨쉰다, 그러지 말고 고민 있으면 말하라고 그랬지?"


"응? 아, 아냐 엄마.."


"아니기는, 바람이라도 쐬고 와. 그럴 땐 좀 달리면 상쾌해진다더라." 하며 어머니는 물통과 함께 등을 떠밀었다.


"딸, 올때 맛난 것도 사오고!" 


"네에." 아버지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난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뜻하지 않게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다.





"저기요, 이거 떨어트리셨어요."


뒤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음성.


돌아보니 어디서 본 것 같은 건장한 남자 한 명이 내 지갑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그.. 감사합니다."


난 무심결에 그의 손에서 빼앗듯이 지갑을 낚아챘다.


"저기, 혼자 오셨어요?"


그 남자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그럼 같이 걸으실래요?' 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조금 당황한 나머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나는 그대로 뒤돌아 달려나가고 말았다.


다시 제정신을 찾은 건 한참을 달려 산책로를 두어 바퀴 돈 이후나 되서였다.


"아, 쪽팔려.."


그 남자를 다시 만나면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와 재회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 저번에 산책로에서 만났던.."


"아.."


그것도 같은 회사, 같은 부서에서.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주변의 동료들의 질문을 얼버무리고 옥상 쉼터로 올라와 얼굴을 감싸고 웅크렸다.


"으으..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저기.."


어느샌가 따라온 그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히익?!"


"아, 그.. 괜찮으세요?"


이전의 무례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 그는 부드럽게 내 안부를 살폈다.


그러한 그의 태도에, 난 더더욱 창피한 마음이 들었고..


"죄.. 죄송해요!"


"네?"


"저번 주말에 산책로에서.. 그랬던거.."


"아아, 괜찮아요. 별로 신경 안 써요."


놀랍게도 내 태도를 크게 신경쓰지 않는 그였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오늘 저녁에 같이 어떠세요?"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식사 제안까지 하는 게 아닌가.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안에서 휘몰아쳤고, 결국 그의 제안을 나는 받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와 그의 관계는 직장 동료 그 이상이 되었다.


만남을 시작한 지 반년쯤 되었을까, 사귀자는 제안을 하게 되었고 1년 반쯤이 지난 후에는 청혼을 받아 어느덧 그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나도 기뻤지만, 동시에 스멀스멀 나를 엄습하는 어두운 기운을 느끼게 되었다.


바로 나의 전생.


그 끔찍하고 피로 얼룩진 기억은 내겐 행복해질 자격 따윈 이번 생에도 없다는 듯 속삭였고 그때마다 내 마음은 무저갱으로 굴러떨어졌다.


"자기야, 표정이 어두운데 괜찮아?"


"응? 어어.."


애써 말을 얼버무리고 결혼식을 준비하려 했지만, 전생의 기억은 계속해서 발목을 잡으며 날 괴롭혔다.


몇날 며칠을 머리를 싸매고 고뇌에 빠져있던 나는 이성을 상실한 것인지 결국 황당한 판단을 내리고 말았다.


'그냥 그이에게 말해 버리자.'


그럼 파혼은 시간문제고, 나 같은 여자와 결혼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게 내 결론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새벽, 나는 그를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산책로에서 만나자고 불러내어 내 전생에 대해 모두 털어놓았다.


"...전생 얘기라 재밌긴 한데.. 왜 이런 이야기를 지금 한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내가 당신과 결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어, 라는 것이 그의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는 화내는 대신 잠시 멀뚱멀뚱 내 쪽을 바라보고는 피식 웃었다.


"왜, 왜 웃어..?"


"그런 걸로 결혼을 안 한다니, 그럼 섭하잖아."


"에..?"


그이는 애정 가득 담긴 눈으로 잔뜩 벙찐 나를 바라보았다.


"자기가 전생에 누굴 죽였고, 어떤 짓을 했는지는 그닥 중요하지 않아. 지금이 중요하지. 그때의 잘못은 죽고 나서 전부 처벌받았을 거고 말이야."


"설령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 일이 다시 생각나도, 내가 옆에서 함께 있어줄게. 더 이상 외롭지 않도록. 그리고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도와줄게. 그러니까, 날 믿어줘."


그의 말에, 수 년간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와 한참을 그의 품에 안겨 울었다.


눈물이 그친 건 호수 너머로 동이 트기 시작한 시간에서였다.


"벌써 시간이.." 난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빨리 갈까? 오늘, 우리 결혼하잖아."


"그렇네, 가자."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다시 집으로 향했다.


전생의 모든 것은 그 자리에 두고.





몇 년 후.


"미안 여보, 오늘은 회의 때문에 조금 늦을지도 몰라."


"괜찮아, 만약 일찍 오게 되면 문자해?"


"꺄아!"


"우리 딸, 아빠 갔다올게!"


나는 딸과 함께 웃으며 현관에서 그이를 배웅한다.


"잘 다녀와요, 애기 아빠♡"


전생에는 느껴보지 못한 행복에,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오늘도 그이가 무사히 퇴근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