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령관은 그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흐레스벨그를 찾아냈다. 정찰 부대가 어느 지역을 탐색하던 중에, 신호를 받은 흐레스벨그와 마주친 것이었다.


몸수색을 받고 들어선 흐레스벨그는 절도 있게 경례를 올렸다.


"승리. 스카이 나이츠 소대지휘 유닛, EB-48G 흐레스벨그입니다. 복귀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냐. 살아남은 것도 대단한 거지 뭐. ……참, 몸수색은 언짢게 생각하지 마."


"아닙니다. 인간 사령관님의 경호는 철저해야 하니까요."


"하하,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한다."


사령관이 손을 내밀자, 흐레스벨그가 살짝 멈칫하다가 곧 마주 손을 잡고 악수했다. 이어 그녀는 다시 경례하고서 반듯하게 걸어 나갔다. 그녀가 발을 내딛을 때마다 단정한 긴 생머리가 조금씩 흔들렸다.


흐레스벨그가 나가자 사령관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본래 스카이 나이츠 대원들은 공군답게 다들 자유분방하고 개성 넘치는 성격이었는데, 흐레스벨그는 오히려 육군부대 스틸라인의 장교단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배정된 숙소로 향하던 흐레스벨그는 때마침 저편에서 걸어오는 린트블룸과 마주쳤다. 린트블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앗. 소대장님, 살아 계셨네요? 린티도 다시 만나게 되서 반가워요. 헤헤."


그런데 흐레스벨그는 인사를 받는 대신, 못마땅한 눈으로 린트블룸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린트블룸은 지정된 전투복이 아닌 스커트와 스웨터 차림이었던 것이다.


"린티. 옷이 그게 뭐죠? 무장도 없고."


그러자 린트블룸은 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아. 이 옷이요? 교복이란 건데, 사령관님께서 주신 거예요- 린티만큼이나 귀엽죠?"


린트블룸이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했다. 흐레스벨그가 뜻밖이란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배정받은 숙소에 들어서는데, 마침 책을 읽고 있던 참모 하르페이아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벨? 발견됐다고 들었는데, 정말 사실이었구나."


"참모도 계셨군요…… 복귀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냐. 살아만 있으면 됐지. 참, 린티는 만났어?"


하르페이아는 웃으며 흐레스벨그를 곁에 앉도록 했다.


"예.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이야기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


"린티의 복장이 불량해서요. 듣자 하니 사령관님께 선물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응. 맞아, 사령관이 준 선물이라 그런지 린티가 엄청 애지중지하는 옷이야."


흐레스벨그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간 사령관님께서 정말 옷을 선물했단 말입니까?"


"응. 나도 받았어. 그는 우리한테 선물을 종종 주거든. 참 좋은 사람이지."


"……."


이날은 스카이 나이츠 대원들끼리 흐레스벨그의 귀환을 축하하는 가벼운 파티가 열렸다.


파티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전대장인 슬레이프니르가 흐레스벨그에게 물었다.


"참. 벨도 인간 사령관하고 만났지? 어떻게 생각해?"


흐레스벨그는 잔을 들고 가만히 있다가 대답했다.


"음…… 잘 모르겠습니다."


"뭐가?"


"별로 권위적이지 않으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선물도 주신다 하고."


"아- 그래. 이번에 우리를 맡은 사령관은 원래 소탈한 사람이거든. 벨도 익숙해질 거야."


"맞아. 인간은 관대한 편이라서 그렇게 빡빡하게 대하지 않아도 돼. 소대장도 안심하라고."


그리폰이 거드는 말에 흐레스벨그가 돌연 정색했다.


"그리폰, 사령관님께 사령관도 아니고 인간이 뭡니까. 말투에 유의하세요."


그리폰은 별일이라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괜찮아. 그는 호칭 가지고 문제 삼지 않으니까. 전부터 계속 인간으로 불러도 아무 말 안 했어."


"전부터? 그러다 언제 문제 삼으시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최소한 예의는 차려야죠."


흐레스벨그가 훈계하듯이 하는 말에 그리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분위기가 이상해질 낌새를 느낀 블랙하운드가 서둘러 나서서 화제를 돌렸다.


"자, 자. 소대장님, 너무 걱정 마세요. 그리폰이 저래 보여도 사령관님 말은 잘 들으니까요. 그보다 이거 드셔 보실래요? 오르카호 전설의 파티셰가 만든 초코 케익이에요."


"그래, 그래. 사령관은 성격이 좋다고. 날 펭귄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말야. 게다가 우리 그리폰은 사령관을 구한 애니까, 나름대로 공신이지."


슬레이프니르가 그리폰을 두둔하고, 하르페이아도 나섰다.


"나도 예전에 사령관하고 모험까지 했는걸. 그는 위아래를 엄격히 따지는 성격이 아니니 안심해도 돼."


흐레스벨그는 그 이상 말하지 않고 디저트를 먹었다.


허나 이 같은 일로 다들 흥이 깨지는 바람에 파티는 얼마 못가 흐지부지되었다.


그처럼 복귀날에 다소간의 파란이 있기는 했지만, 흐레스벨그의 가세는 스카이 나이츠와 오르카호에 큰 도움이 되었다.


스카이 나이츠 대원들은 흐레스벨그의 전자전 능력으로 인해 전장에서 격추를 당하거나 부상 입을 확률이 현저히 낮아졌다. 덕분에 대원들은 물론 사령관도 흐레스벨그의 가세를 고맙게 여겼다.


하지만 흐레스벨그는 여전히 안심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스카이 나이츠 대원들과 사령관이 격의 없이 지내는 모습을 못미더운 듯이 지켜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흐레스벨그가 그리폰을 불러 세웠다.


"그리폰. 잠깐 얘기 좀 하죠."


"응?"


"경호팀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당신이 애들하고 같이 사령관님을 귀찮게 했다더군요."


그리폰은 머리를 긁었다.


"아. 그거? 예전부터 종종 있던 일이긴 한데."


"예전부터? 첫날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대체 뭘 하고 있던 겁니까. 실례를 끼쳐도 유분수지."


"걱정 마. 인간은 이제껏 그런 일로 화낸 적은 없으니까."


흐레스벨그는 인상을 썼다.


"그리고 또 하나. 사령관님에 대한 말투도 고치랬죠. 인간이 뭡니까, 인간 님도 아니고."


그리폰이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다.


"다른 애들도 나처럼 사령관을 편하게 대해. 그리고 나만 호칭 이상하게 하는 거 아닌데."


"다른 애들이 그런다고 당신도 따라합니까? 사령관님이 어느 날 갑자기 태도가 변하면 어쩌려 그럽니까."


"……."


"근신하세요. 이 일은 전대장께 보고하겠습니다."


정론이라서 그리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가 꺾인 그리폰은 자신을 지나쳐가는 흐레스벨그의 뒤에 대고 말했다.


"소대장은, 인간을 믿지 못하는 거구나?"


흐레스벨그는 멈추지 않고 다시 걸어갔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자기 부하들한테 전에 없이 규칙을 지킬 것은 물론, 특히 사령관에 대한 예의를 엄격하게 지킬 것을 요구했다.


슬레이프니르가 그같은 일을 보고해 오자, 사령관이 말했다.


"흐레스벨그가 날 조금 두려워하는 것 같네."


"너무 언짢게 생각은 말아 줘. 규칙에 빡빡한 애라서."


"언짢기는…… 솔직히 너희도 예의 좀 차렸으면 하는 때가 가끔 있어."


슬레이프니르가 머리에 손을 대고 머쓱하게 웃었다.


"아하하. 뭐, 아무튼 벨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기는 하니까."


"사정?"


"음, 벨이 나처럼 인류 멸망 전쟁 시대부터 살았단 건 알지? 난 연구소에서 보호받았지만, 그애는 나와 다르게 인간 장교들 아래서 복무했거든."


사령관은 비로소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인간들은 바이오로이드를 잘해봐야 애완동물, 대부분은 말하는 도구 취급이나 했던 것이다. 그러니 과거 인간들과 지낸 흐레스벨그도 사령관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로부터 얼마 후, 사령관은 흐레스벨그를 따로 불러냈다.


"승리."


흐레스벨그는 딱딱하게 경례를 올렸다. 사령관은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안녕. 요즘 지내는 건 어때, 괜찮아?"


"좋습니다. 불편한 것 없습니다."


딱딱한 태도에 사령관은 가볍게 쓴웃음 지었다.


"너무 긴장할 거 없어…… 그렇지, 벨이라고 불러도 될까? 흐레스벨그라고 하면 좀 부르기 힘들어서."


대원들 사이에서 통하는 별명을 들은 흐레스벨그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사령관님."


사령관은 벨에게 차를 대접한 다음, 기회를 보아 먼저 말을 꺼냈다.


"듣자 하니, 벨이 애들한테 예의를 지키라고 시킨다면서."


"……그렇습니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까진 없는데."


"그것은…… 대원들이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것 같지 않아서 주의를 주었습니다."


"난 괜찮아. 겉치레는 신경쓰지 말아도 돼."


"……."


벨은 눈을 굴리며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니 벨도 긴장할 거 없어. 난 예전 인간들처럼 행동할 생각은 별로 없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벨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사과받으려는 게 아닌데. 사령관이 머쓱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화내는 거 아냐…… 으음, 있잖아. 난 말이지, 그런 예의보다도 상호 간의 믿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믿음 말씀입니까?"


"응. 단순히 명령하고 받아들이는 입장을 넘어서, 서로 존중하고 믿을 수 있는 사이가 더 좋지 않겠어."


"……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뭐, 내 입장에서도 너희가 명령으로 마지못해 따르는 것보단 스스로 열심히 싸워 주는 게 이득이기도 하고."


벨은 여전히 석연찮은 모습이었다. 하기야 만난 시간도 짧은 인간의 말을 바로 믿기도 힘들 것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사령관이 다시 말했다.


"물론 벨의 걱정은 충분히 이해해. 사실, 내가 이렇게 말해봐야 결국 주인과 하인 같은 입장엔 변함이 없잖아. 그러니 나로서도 벨이 굳이 예의를 차리겠다면 말리진 않겠어."


사령관은 그렇게 말하자 벨도 다소 수긍하는 빛을 띠었다.


이윽고 할 말이 없어진 벨은 무심코 함장실을 둘러보다가, 문득 책장에 진열된 물체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사령관도 벨이 시선이 향하는 곳을 알자 살짝 당황했다. 벨 생각을 하느라 미처 치우지 못한 것이었다. 그가 무어라고 말하려는 순간 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어, 사령관님. 책장에 놓인 피규어…… 매지컬 모모의 초회한정판 아크릴 스탠드 버전 세트 아닌가요?"


사령관은 순간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을 받으며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응? 으응…… 어떻게 알았니."


벨은 대답 대신 사령관을 물끄러미 보더니, 대뜸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사령관님도 매지컬 모모를 좋아하십니까."


매지컬 모모 애니메이션판은 인류 멸망 전 특정 계층으로부터 큰 인기를 끈 프랜차이즈였다.


"……그, 글쎄?"


벨은 가만히 피규어와 사령관을 번갈아 보기만 했다.


역시 경멸스러우려나. 사령관은 벨이 자신을 오타쿠라고 싫어할까봐 걱정되었다. 피규어를 미리 치워둘 걸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때 벨이 다시 물어 왔다.


"혹시, 사령관님은 만화 같은 거 좋아하시나요?"


사령관은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솔직히 털어놓았다. 부하들한테 자기 취미를 숨기면 더욱 초라할 뿐이었다. 매도할 테면 하라지 뭐.


"으응. 그래. 만화도 좋아하고 게임도 좋아하지…… 그게 왜. 뭐 잘못됐어?"


그러나 벨은 뜻밖에도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갑습니다."


"?"


"사령관님도…… 오타쿠셨군요."


"도?"


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던 사령관은 순간 눈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살짝 부끄러운 듯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 실은. 저도 매지컬 모모 같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같은 걸 좋아합니다. 사령관님께서도 저와 취미가 같으실 줄은 몰랐군요."


사령관은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 얼떨떨해 있었지만, 이내 환한 표정을 지었다.


시선이 마주친 둘은 동시에 말했다.


"그렇다면……."


"동지."


벨과 사령관은 손을 굳게 맞잡았다.


벨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저는, 오르카호에서 동지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정말 반갑군요, 사령관님."


사령관도 감격스럽게 중얼거렸다.


"모두들 내 취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어. ……그렇지만 너라면 이해해 줄 것 같구나."


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관님께서도 취미를 이해받지 못하셨군요. 그 마음, 저는 알 것 같습니다. ……다들 저 같은 취미를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죠."


중얼거린 그녀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사령관님, 이제까지 사령관님을 믿지 못하고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사령관님은 확실히 과거 인간들과 다르시군요."


사령관이 뜻밖이라는 듯이 눈을 깜박거렸다.


"그, 그래. 믿어 준 건 고마운데. 갑자기 마음이 변했네?"


"훗.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오타쿠가 나쁜 사람일 리 없잖아요?"


"……."


벨은 눈을 내리고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드린 대로 아무도 제 취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동료들도, 멸망 전의 인간 장교님들도…… 하지만 사령관님만은 다르실 거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와 동류이시니까요."


그제서야 사령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좋아, 벨. 앞으로도 서로 취미 공유를 하자고. 적어도 오르카호에선 취미를 나눌 상대가 없으니 말야."


"물론입니다."


벨은 진지하면서도 기쁜 표정으로 경례를 올려 붙였다.


이후, 그녀는 수십년 만에 만난 동지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취미 이야기를 나누다, 저녁때가 되서야 돌아왔다.


슬레이프니르가 벨을 붙들고 물었다.


"어땠어, 사령관님은? 아직도 위험하다고 생각해?"


"아니요. 격의 없는 분입니다…… 아주 좋은 분이에요."


벨은 전에 없이 미소까지 띠며 말했다.


오히려 슬레이프니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갑자기 태도가 변하고."


"후후…… 일반인은 모르실 일입니다."


슬레이프니르는 이상하단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벨은 비밀스런 웃음을 짓고만 있었다.


그날 이후, 벨이 소대원들의 생활에 간섭하는 일은 크게 줄어들었다.


소식을 들은 사령관은, 어쩌면 벨의 엄격한 태도가 취미를 숨기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로 인한 위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젠 사령관이란 취미 동료가 생겼으니 스트레스가 덜한 모양이었다.


한편, 전대장인 슬레이프니르는 사정은 몰라도 어쨌든 벨이 오르카호에 잘 적응한 것 같아서 기뻐할 뿐이었다.




===

썼으니 나오겠지.




소설 모음 보러가기 (픽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