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관들이 사령관에게 호감을 갖는 건 어찌보면 당연했다. 오르카 호에서 유일한 남성이었고, 또 인간이었기에 여성 바이오로이드가 호감이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다른 사건이 있었다.


"쮸인님! 하치코가 전부 가져왔어요!"


정기 회의를 하던 어느 날, 누락된 자료가 있었고 당시 당직이던 하치코가 회의실로 자료를 가져왔다.


"하치코 참 잘했어요"

"헤헤헤헤 쮸인님 너무 좋아요"


사령관은 평소대로 하치코를 쓰다듬어주며, 환하게 웃었다.

지휘관들이 회의실이나 전투 때 본 사령관에서는 볼 수 없던 표정이었다. 아니, 멸망 전 인간들 그 누구에게서도 보지못했던 바이오로이드에게 진심으로 웃어주는 표정. 지휘관들을 상대하는 공적인 자리에서는 늘 근엄하게 있으려는 사령관이었기에, 지휘관들은 저런 미소를 자신도 볼 수 있으면 하는 마음을 그때부터 품게되었다.



x년 x월 x일 - 불굴의 마리


"거기 편하게 앉아있어"


사령관과 사적인 자리는 처음이기에 마리는 긴장한 채 뻣뻣이 있었다. 쪼르르, 하고 잔에 커피가 따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가 커피를 좋아하는 거 같아서 준비했어."


사령관이 손수 따라주는 커피에 어쩔 바를 모르는 마리의 귀밑이 붉게 물들었다.


"아..아닙니다. 커피는 그저 잠을 쫓는 것일뿐.."

"..진짜? 마리가 커피 좋아할 줄 알고 특제 블루 아이즈 화이트 드래곤 커피를 어렵게 구했는데 괜한 것이었나.."


시무룩 하는 사령관 표정에 마리는 당황해서 손을 저었다.


"사실은 좋아합니다. 사령관 각하께서 주시는 거라면 뭐든"


마리가 좋아한다는 말에 다행이다,며 사령관은 아이처럼 환히 웃었다.


"그러고보니 마리와 합류한 지는 꽤 됐지. 마리가 가장 먼저 온 지휘관이고."

"예, 그렇습니다"

"마리가 와서 참 든든해. 유능한 지휘관이 얼마나 좋은지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각하"


향긋한 커피 향이 진하게 올라왔다. 마리는 커피를 마시며 흘긋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건장한 청년 몸인 그가 조금만 더 어리고 작은 체격이었으면.. 하지만 어쩌면 지금 이대로도 나쁘진 않을 거 같았다.



x년 x월 x일 - 신속의 칸



"어..칸..?"


사령관은 레모네이드를 따르다가 칸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눈화장을 지운 칸은 부드러운 인상이어서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사령관.. 넘칠 거 같군"


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레모네이드를 쏟을뻔하자 사령관이 서둘러 손을 움직이며 자리에 앉으라 했다. 각자의 잔에 레모네이드가 가득 차고도 한동안 사령관은 말없이 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기다리는 건 익숙하지 않은데.. 내게 할 말은 없나 사령관?"


침묵을 먼저 깬 건 칸이었다.


"아 미안..! 칸의 얼굴이 너무 예뻐서 계속 바라봤.."

"쿨럭!"


생각지도 못한 복병에 칸은 마시던 레모네이드를 반쯤 뿜어버리며 쿨럭쿨럭 기침을 뱉었다.


"괜찮아?"

사령관은 냅킨을 쑥쑥 뽑아서 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자기가 닦을 수 있다고 하려던 칸은 사령관의 손가락이 얼굴과 입술에 닿자 온몸이 찌릿해서 움직일 수 없었다. 화장 없는 맨 얼굴은 붉게 물든 홍조를 가려주지 못 했다.


"시..실수했군.."


그 후 또 다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아..맞다. 칸은 빨리 빨리를 좋아했지. 내가 혹시 시간 낭비해서 싫은 거야?"

"아..아니다 사령관. 이렇게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고 나쁘지는 않군"

싫지 않다니 다행이네, 하면서 사령관은 활짝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나도 칸의 예쁜 얼굴을 보는 시간이 좋아"


칸은 다시 한번 레모네이드를 뿜어버렸다.



x년 x월 x일 - 나이트 앤젤


"응 왔어?"


사령관은 따뜻한 허브차를 따라주었다. 나이트앤젤은 가볍게 목례를 올리고 앉았다.


"원래라면 메이가 왔어야 하는데 대신 오느라 고생이 많아."

"아니에요 부관이 할 일인걸요"

"메이는 여전하지?"


나이트 앤젤은 몸을 반쯤 앞으로 기울이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기며 넌지시 떠보았다.


"사령관님은 메이 대장이 궁금하세요?"


"역시 생각해보니, 메이에 대한 이야기를 제3자랑 하는건 메이에게 실례인거 같아. 메이도 나를 별로 안좋아할테니 내가 다른 사람이랑 메이 얘기 하는 것도 싫어할거야."


나이트 앤젤은 애꿎은 머리카락만 만지작 거리면서 다시 한번 체감했다. 이 사령관은 진짜 표면 그대로를 믿는 바보구나. 이런 바보한테 그동안 온갖 독설과 비웃음을 퍼부은 메이 대장이 새삼 불쌍해졌다.


사령관은 정말이지 착실하게 메이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둠 브링어의 근황이나 나이트 앤젤의 고충 등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렇게까지 쑥맥인 사령관을 골려보고 싶었다.


"아 개인적인 고충이라면 있긴 한데.."


나이트앤젤은 자신의 평평한 흉부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사령관도 알다시피 저도 여성의 매력을 갖고 싶은데..태생이 이 모양인지라..뭐 그래서 흉부를 풍만하게 해주는 시술이 가능할까요?"


쑥맥 사령관이라면 여자의 가슴 이야기가 나오면, 설령 나이트 앤젤의 평평한 흉부여도 이성으로서 본능을 간질거릴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사령관은 자신의 흉부를 쓰담는 나이트 앤젤의 손을 덥썩 잡았다.


"나이트 앤젤... 군인으로서 성능을 위해 여성의 매력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어? 네..사령관.."


놀리려 했는데 생각 외로 진지한 사령관의 반응에 당황한 건 나이트 앤젤 쪽이었다.


"단순한 시술이라면 가능하지..하지만 전장을 누비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시술 하는 것은 현재 기술적으로 힘들어. 그리고 오르카 호의 자원을 쓸 여력도 안 되고"


"사령관.."


"하지만 나중에 모든 전투가 끝나고 나이트 앤젤이 무사히 퇴역할 수 있으면 그 때 꼭 시켜줄게. 그 전까지는..미안하지만 부탁할게. 나이트 앤젤이 군인으로서 있어줬으면 좋겠어."


사심따위는 나이트 앤젤의 흉부만큼이나 0에 가까운 사령관의 말이지만 어째서인지 나이트 앤젤의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x년 x월 x일 - 발키리


발키리의 노크 소리에 사령관실의 문이 열리자 달콤한 코코아 향기가 넘쳐흘렀다. 사령관이 자리를 권하자 절도 있는 자세로 발키리는 앉았다.


"각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나야말로 바쁜데 불러서 미안.."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근황이나 전투원들에 관한 '공적'인 이야기는 발키리는 막힘 없이 요건만 짚어서  대답했다. 하지만 '사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자 말문이 막혔다. 애꿎은 코코아잔만 휘휘 젓던 사령관은 뭔가 얘기거리를 찾으려다 문득 발키리의 오른쪽 눈에 시선이 고정됐다.


"..? 각하, 제 눈에 문제라도..?"

사령관의 시선을 느낀 발키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응? 발키리의 눈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은 처음이어서 그런데..눈이 예뻐서"

"아..아닙니다..이..이건 보다 저격수로서..잘 보기 위해 개조한 눈입니다..예쁘지 않습니다."


당황해하며 말을 더듬는 발키리에게 사령관은 순진하게 웃으면서 한 번 더 꽂아넣는다.


"하지만 예쁜건 예쁜거야."

"무..무슨.."



얼굴이 새빨갛게 된 채, 발키리는 당황해 하며 아무 말을 늘어놓았다. 요즘 그렘린이 셀주크를 개조하러 다닌다는 등, 님프가 머리에 나뭇잎을 붙이고 다닌다는 등, 알비스가 여전히 탄창주머니에 초콜릿을 넣는다는 등


"알비스..여전하네.. 하지만 귀여워서 차마 못 혼내겠어."


다른 주제거리가 나오자 발키리는 반기며 말을 이었다. 동료의 이야기를 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알비스가 용서해주길.


"그러고보니 발키리는 알비스를 많이 귀여워 하는구나."

"네, 동료니까요."

"응, 많이 귀여워하는 거 같아."


아뇨, 그럴리 없다면서 반박하기에는 이미 사령관과 많은 대화를 알비스의 귀여움에 대해 논해버렸다. 자신의 은밀한 취향을 들켜버려서 어쩔줄 몰라했다.


"나도 이미지 관리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사실 귀여운게 좋아"


사령관은 하치코가 꼬리 흔들면서 달려올 때, 페로가 임무 중 깜빡 잠 들었을 때, 보리의 발바닥이 말랑하다느니 등 온갖 귀엽고 아기자기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발키리는 상상만으로도 흐뭇해했다.


"지금은 여건이 안 돼서 어쩔수 없지만.. 나중에 좀 더 좋은 환경이 되면 귀여운 강아지랑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

"토끼도 가능하면 좋겠습니다."


토끼도 좋지, 하며 사령관은 맞장구 쳤다. 그렇게 한동안 발키리는 자신과 은밀한 취향을 사령관과 함께 했었고 부디 다음 티타임에도 같이 할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

인적이 별로 없는 으슥한 창고에서 두 여인이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빨래판이 사령관의 총애를 가져가겠어!"

"동감입니다."


일단 서로 손을 잡아서 어떻게든 사령관의 마음을 돌리려는 메이와 레오나. 나이트 앤젤이 조언한대로 모든 걸 솔직히 말한다는 선택지는 맨정신의 그녀들에게는 있을 수 없었다.


"...후우..그러면 역시 '그 방법'밖에 없을텐데 감당할 수 있겠어요, 멸망의 메이?"

"흐..흥 물론이지! 절대로 빨래판따위에게 질 수 없어!"



그날 밤, 사령관실의 문틈으로 종이 한 장이 쓱 하고 밀려왔다. 잘 준비를 하던 사령관은 종이를 꺼내 읽었다.


"이..이건.."


《사령관, xx월 xx일 xx시에 지하 2층 xx호에서 만나고 싶어. 꼭 혼자서 와야 해. 메이와 내가 기다릴게. 이건 비밀이야?》


"막고라..?"


평소 사령관의 자질에 불만을 품은 두 지휘관이 사령관 자리를 두고 결투를 신청한 것이 틀림없다,고 사령관은 생각했다. 다른 병력을 불러서 진압할까 생각해보았지만, 선상반란이 일어나고 내전이 생기면 어떤 식으로든 바이오로이드의 희생이 따를 터. 차라리 자신이 숙청당하더라도 희생이 자기 선에서 끝내는 게 오르카호를 위해서도 나은 일.



사령관은 굳은 표정으로 남은 시간을 계산했다. 상대는 여성이지만 베테랑 군인이자 신체 능력이 뛰어난 바이오로이드. 사령관이 이길 가능성은 없었고 생존 가능성조차 불분명한 상황. 그동안 자신을 위해 봉사해준 바이오로이드들에게 감사를 담아 사령관은 유서를 먼저 써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