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lastorigin/8941377 - 1편
https://arca.live/b/lastorigin/8956430 - 2편


수면의 위로 방울들이 올라온다. 그 방울은 숫자가 점점 많아지더니 그곳에서 봉우리가 물과 함께 솟아올랐다. 둥근 머리 위에 있던 물이 전부 떨어지고 점점 해변가에 가까워지는 그것은 탈출정이었다. 수심이 얕은 해변까지 올라오자 탈출정의 문이 열리고 거기서 한 인간이 철푸덕 바닷물 위에 쓰러졌다. 탈출정이 수면 위로 올라갈 때 그는 생각했다. 별로 좋은 편의성이 아니구나.


"끄응..."


고개를 들고 손으로 얼굴에 묻은 바닷물을 털어낸 그는 일어서려고 했으나 오른쪽 복부 쪽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비명을 지르며 다시 바닷물 위로 얼굴을 박았다. 잠깐 동안 정신을 잃은 그는 물 속에서 숨쉴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다시 고개를 들었고 최대한 상처에 무리가 주지 않게끔 움직이며 일어났다. 똑바로 일어서니 발목도 욱신거렸으며 목도 담이 걸린 것처럼 뻐근하고 아팠다. 그는 일단 물이 오지 않을 정도의 해변까지 올라가고 햇볕이 강하다보니 최대한 힘을 내서 걸어갔다. 커다란 나뭇잎이 그늘이 되어주는 나무 아래에 등을 기댄 그는 자신이 당한 부상들을 보았다.


오른쪽 아랫 복부 쪽은 커다란 철 조각이 박혀있었다. 그것은 라비아타의 검 조각이었다. 그녀가 자기방어를 위해 휘둘렀던 검을 그는 블랙 리리스의 권총의 화력을 한 곳에 집중시켜서 그녀의 대검을 파괴했으나 그 반동으로 조각 중 하나가 그의 복부에 박힌 것이었다. 발목은 삔 것이 확실했다. 이는 라비아타의 검격의 충격을 최대한 완화시키고자 리리스의 권총을 X자로 교차시키고 그 중간 지점에 칼을 받았다. 아무리 충격을 최대한 저지했다해도 권총은 조금만 더 사용하면 부서질 정도로 크게 파손되었으며 완화된 충격으로도 발목이 삘 정도였다. 목의 고통 역시 그럴 것이었다. 그는 사령관.


오르카 호에서 탈출에 성공한 전 사령관이었다.



☆ ★ ☆ ★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현 사령관인 그녀는 전 사령관의 오르카 호 탈출 소동이 일어나자 스노우 페더의 경호를 받으면서 패닉 룸으로 들어갔다. 패닉 룸 안에서도 전투의 소리는 들려왔고 지휘관 바이오로이드들이 직접 나서서 지휘한다는 것을 알자 그녀들이 직접 나서서 지휘할 정도라면 꽤나 큰일이 벌어진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빠르게 조용해졌다. 패닉 룸 안에서 리리스를 제외한 컴패니언의 경호를 받으면서 그녀는 패닉 룸에서 조심스럽게 빠져나왔고 오르카 호 안이 난장판이 된 것으로 모자라 여러 바이오로이드들이 경상을 입었다는 걸 알았다. 지휘관들을 소집해서 한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의 질문에 레오나가 제일 먼저 말했다.


"살짝....사고가 있었어."


"사고? 바이오로이드들끼리 한 판 붙었다는 거야?"


패닉 룸 안에 있어서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그녀로선 바이오로이들 간의 소동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아니지....바이오로이드들끼리 한 판 붙었다 해도 이런 피해 상황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


곧이어 그녀들끼리 붙었더라면 오르카 호가 이렇게까지 파손될 일이 없을 것이라는 걸 파악하였다. 지휘관 바이오로이드들은 이런 일이 벌어질진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전 사령관에게 그러한 수준의 전투력이 있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오르카 호에서 가장 똑똑한 닥터마저도 믿기지 않는다고 계속 중얼거리고 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사실대로 말해줘.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지휘관들은 그 말에 섣불리 대답하지 못 했다. 그녀는 자신이 마지막 남은 인류라고 믿고 있다. 자신들이 그렇게 말해줬으니 그녀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직 전 사령관에 대해서 그녀에게 말한 적 없고, 말할 생각도 없었다. 모든 지휘관들은 머리를 차갑게 굴리고 있었다. 전 사령관이 탈출했다는 말을 들으면 엄청나게 큰 문제가 발생한다. 그녀 외의 다른 인간이 남아있다는 것을, 심지어 남성인 인간이 있음에도 그녀가 마지막이라는 거짓말을 했다는 점과 그의 지휘 능력을 의심하여 축출했다는 점, 엄중한 감시 속에서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갑자기 뒤통수를 맞아서 감시망이 뚫리고 그가 탈출했다는 점은 그저 호통으로만 끝날 문제는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침묵할 수록 사령관의 의심은 깊어진다. 결국 칸이 대충 지어낸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미확인 철충 개체다."


모두 일제히 칸을 바라보았다. 메이는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는 말을 눈으로 하고 있었으며 레오나와 마리, 용, 홍련은 조금만 생각해도 금방 거짓말이라는 걸 들통날 것이 분명한데 뭐하러 그런 서툰 거짓말을 하는가 하며 그녀를 눈으로 질타했다. 칸 역시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하고 뱉은 말을 후회했다. 그 때였다.


"그런 개체는 처음봤어요."


뒤에서 라비아타가 칸을 거들어준 것이다. 라비아타는 자신의 플라즈마 양손검이 그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의 발차기를 맞아서 주저 앉은 상태였다. 그의 발차기가 큰 부상은 되지 않았고 그의 사격은 계속 그녀의 무기만을 노렸기 때문에 라비아타가 입은 부상은 실질적으로 없었다.


"라비아타."


"제가 전력을 다해 막아보려고 했지만....저마저도 그것에게 닿을 순 없었어요."


그것. 전 사령관이자 아직도 자신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그 남자를 그것이라고 불러야하는 이 상황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현 사령관을 진정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라비아타는 자신의 파괴된 무기를 보여주었고 그 파괴된 무기를 보자 사령관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경악했다.


"라비아타가 당했다니....다친 데는?"


"다행히도 없답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제 능력이 모잘라...."


"무사하다면 그걸로 됐어."


그녀는 칸이 말했던 미확인 철충 개체에 대해서 라비아타에게 물어보기로 하였다. 라비아타가 직접 교전을 펼쳐봤으니 잘 알 것이라는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미확인 철충 개체, 어땠어?"


"...무척 강했습니다. 강했을 뿐만 아니라 정교하더군요. 마치 메스처럼요."


라비아타는 칸의 거짓말을 전제로 자신이 그와 교전하면서 느낀 점을 모두 말해주었다.


"저의 공격을 모두 흘려버리거나 피했을 뿐만 아니라 저의 무기만을 공격했죠. 목적은 저의 사살이 아닌 제압이었던 모양입니다."


"이상하네....라비아타도,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죽이러 오지 않고 그저 모두의 무기를 파괴하고 경상만 입히고는 탈출정을 이용해서 빠져나갔다?"


"저도 이런 개체는 처음이라...."


모두들 제발 그녀에게 전 사령관에 대한 정보가 흘러나가지 않는 것을 간절히 바라였다. 라비아타는 무척이나 차분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설명했다.


"신체의 모든 부위가 마치 인간 같았습니다. 전투 방식부터 무기를 다루는 기술까지, 인간의 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을 했었죠. 만일 그것이 정말로 저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절 정말로 죽일 수 있었을 겁니다."


"그 개체는 무슨 무기를 썼지?"


"제 눈이 틀리지 않다면 그것이 사용한 건 블랙 리리스의 쌍권총입니다."


"리리스의? 철충이 어째서 바이오로이드의 무기를 쓰는 거지?"


철충들도 자신들의 무기가 있으니 바이오로이드의 무기를 활용할 필요가 없다. 라비아타는 그녀의 궁금증이 더 심해지기 전에 메이를 지목하며 말했다.


"저희들은 모두 미확인 개체를 제압하느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메이 씨는 지휘관 회의실에 연결된 카메라로 전부 상황을 보고 있었죠."


"뭣?! 아...그, 그래. 둠 브링어는 오르카 호 안에서 활동하기엔 너무 강력하니까 난 그저 지켜보기만 했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간 거야, 메이?"


이제 사령관의 질문 대상은 메이로 바뀌었다. 메이도 라비아타처럼 칸의 거짓말을 전제로 자신이 봤던 것을 대입하여 말했다. 물론 살짝 거짓말을 섞기도 했다.


"어떤 바이오로이드의 보고로 오르카 호 지하에 특이한 것이 발견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왔어. 그건...."


"어떤 바이오로이드? 누구야?"


"그....그건....."


"브, 브라우니였습니다, 각하."


메이의 거짓말이 들통나기 전에 마리가 재빨리 어떤 바이오로이드란 브라우니라고 알려주었다. 사령관이 납득하자 메이는 다음 상황을 이어서 설명했다.


"블랙 리리스가 지하의 특이한 것을 조사해보겠다 지원했고 우린 그녀를 보냈지. 블랙 리리스와 미확인 철충 개체가 접촉하자마자 오르카 호의 모든 카메라가 먹통이 되었어. 그걸 복구시켰더니 블랙 리리스는 제압당한 채 쓰러져 있었고 그것은 블랙 리리스의 무기를 노획한 채 탈출정이 있는 곳까지 가기 시작했지."


"맙소사, 리리스는 무사해?"


"어, 으응. 무사하지. 머리 쪽에 큰 충격이 가해진 것 뿐이니까."


"하아....바이오로이드라 다행인건지..."


사령관이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안심했다.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 지휘관들에게 들었던 정보들을 모두 정리했다.


"언제 어디서 철충이 들어왔고 그 철충은 지금까지 숨어있었다가 꼬리를 들켰고 그걸 찾으려고 리리스가 들어갔다가 리리스는 제압당하고 무기까지 노획당함. 이후 여러 바이오로이드들이 철충을 막으려 했지만 철충의 무지막지한 전투력으로 인해 실패. 레오나의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가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약점을 공략당해서 단번에 뚫리고 우리 오르카 호의 최강자들 중 하나인 라비아타마저도 제압당함....하지만 철충은 특이하게도 바이오로이드를 죽이는 데에 관심을 두지 않고 탈출에만 집중함...."


이렇게 정리하다보면 뭐가 뭔지 잘 모를 때가 있는 법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할 수록 솟아나는 의문점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철충은 혼자 있었지...그럼 철충에는 단독 개체가 있을 확률이 높다는 거고, 그 단독 개체 철충이 우리 오르카 호에 들어왔지만 그 누구도 몰랐다....심지어 닥터마저도. 그렇다면 그 철충에게는 감지를 피할 수 있는 스텔스 기능이 있다는 것인가...."


이 이상 파고 들었다간 보강되지 않은 거짓말이 들킬 수 있었고, 들킨다면 모두에게 곤란한 상황이니 아스널은 여성 사령관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꺅!"


그녀는 깜작 놀랐지만 아스널은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복잡한 생각만 하면 머리가 빠질 거다! 철충에 새로운 개체가 나타났다는 것은 썩 좋지 않은 정보지만 우리가 그것을 몰아낸 거나 다름이 없지, 안 그런가? 그대, 이러한 승전보가 울렸으니 기뻐해도 좋을 거야."


"...맞아. 무슨 개체던 간에 모두가 무사하니까, 난 그거면 충분해. 아아...그런데..."


사령관은 난장판이 된 오르카 호 내부를 두리번 두리번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우리 공순이 애들이 많이 고생하겠네...."


저 멀리서 포츈이 과로사 할 예정인 거 같거든 하고 말하는 것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 ★ ☆ ★



탈출정 안에는 누가 넣어둔건지 모르겠지만 꽤나 쓸모있는 것들이 많았다. 의약품, 침낭, 수통, 투명한 큰 비닐까지. 성냥도 있었지만 전부 바닷물에 의해 젖은 상태라서 쓸모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의약품들을 배치해놓은 후 복부를 지금도 깊게 찌르고 있는 검 조각을 보다가 마음을 굳혔는지 심호흡을 하였다. 손도 베이지 않게끔 날카로운 검 조각을 손으로 잡고, 찔린 부위를 왼손으로 눌렀다. 그는 떨렸지만, 심호흡을 하면서 준비하였다. 하나, 둘, 셋. 셋이라고 하는 순간에 조각을 뽑아당겼고 찔린 부위를 꾹 눌러서 좀 더 쉽게 빠지게끔 하였다. 본래라면 이 자상을 일으킨 물체를 때면 안 되지만 찔린 부위가 복부라면 당장 빼내야한다. 안 그럼 더 깊게 박힐 테니까.


다행히, 그의 몸은 복부에 찔린 물체를 뽑는다고 죽는 몸이 아니었다. 드디어 검 조각이 뽑혔고 그는 당장 흘러나오는 피를 막아내고 침낭을 찢어서 큰 부위로 상처를 압박하였다. 우선 피를 더 흘리지 않게끔 해야하니 그는 침낭 조각을 그대로 상처 부위에 두고 붕대를 감아서 떨어지지 않게하였다. 한 바탕 자신의 몸과 큰 싸움을 벌이니 그는 지쳤고 검 조각을 뽑아내자마자 바로 압박을 했음에도 풀 위에 작은 피웅덩이가 만들어질 정도로 많은 피가 흘렀다보니 몸이 으슬으슬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면서 불을 피울 도구들을 찾기 시작했다.


천지에 깔린 것이 나무이다보니 그는 나무와 마른 풀들을 이용해 불을 붙히고자 하였다. 그는 상처에서 나오는 고통을 꾹 참은 채 핸드 드릴로 숯을 만들어내고 그 숯을 마른 풀에 옮기고 약하게 숨을 불어넣어서 불을 일으키고 장작더미에 불을 놓아 크게 만들었다. 피가 다수 빠져나가서 어질어질하지만 그래도 불이 피워지니 그는 기분이 썩 괜찮았다. 그저 몸이 으슬으슬해서 불을 피운 것만은 아니었다. 이 불이면 나중에 얻을 식량을 구워먹거나 물을 끓여서 안전하게 마실 수도 있다. 무엇보다 지금 상태에서 불은 의료 도구로서 사용될 수도 있었다. 그는 라비아타의 검 조각에 묻은 피를 수통 안에 든 물로 잘 닦아낸 뒤에 그걸 불 위에 올렸다. 이런 자상에 쓸만한 약들이 크게 보이지 않으니까 그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검 조각이 뜨겁게 달궈지자 그는 5겹의 나뭇잎으로 조심히 들어올렸고 붕대를 풀고 상처를 압박 중이던 침낭 조각을 때어낸 뒤에 상처에 드껍게 달궈진 금속을 올렸다. 뽑을 때와는 또 다른 격통에 그는 잠시 기절했고 곧이어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크게 번져진 상처를 확실하게 막기 위해 달궈진 금속 조각을 더더욱 깊게 밀었다. 슬쩍 들어보자 상처 부위를 지짐으로서 봉합하는 걸 성공했고 그는 누운 채로 근처에 잡히는 장작을 불에 넣고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눈을 떠보니 아직 태양이 떠올랐지만 그는 다음날이 되었다는 태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픔이 많이 줄어들었고 일어난 김에 약을 바른 뒤에 새로운 침낭 조각으로 상처를 압박하고 붕대를 감았다. 삐었던 발목에도 역시 근처에 떨어진 굵은 나뭇가지를 부목삼고 그걸 붕대로 감아서 해결했고 목의 부상은 그저 감당하기로 했다. 그는 해변가의 소리를 들으면서 바닷 바람을 느꼈고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되짚었다. 현재 확인된 철충 개체들 중 최상위 개체인 네스트를 격파하고 나서 3일 후, 바이오로이드들의 대규모 결집이 벌어졌고 거기서 마리, 메이, 레오나, 칸을 중심으로 자신을 축출하려는 소동이 벌어졌다. 라비아타와 블랙 리리스를 중심으로 몇몇 바이오로이드들은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반란이라고 말하면서 그녀들을 막으려고 했었다. 그 역시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의 축출에 찬성했던 페어리 시리즈의 맏언니 오베로니아 레아가 입을 열었었다.


그럼, 인류가 사용했던 방식으로 결정하죠. 투표 말이에요.


멸망 이전의 인류는 민주적인 투표 제도를 통해 사람을 선발하고 결정을 내렸었다. 확실히 민주적으로 투표를 해서 그를 축출한다면 적어도 의문을 품은 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파들은 찬성파들의 의도를 꿰뚫어보고는 크게 반발했다. 만일 투표를 하게 된다 쳐도 결과는 다수결이 나온다. 그런데 지금 사령관 축출을 찬성하는 자들이 많은가 반대하는 자들이 많은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를 끌어내리겠다는 심보는 블랙 리리스를 무척이나 열받게 했고 그녀가 선제 공격을 하려했으며 거기에 불굴의 마리가 막으려고 했었다. 리리스의 총이 발포된다면 그걸 시작으로 반대파와 찬성파들의 전투가 시작될 것이 뻔했다. 이미 찬성파들은 그를 사령관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 가능한 것이었다. 오르카 호가 피바다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가 말하였다.


그만. 그만해. 리리스, 총을 쏠 필요는 없어. 사령관 자리를 내려놓을게. 그의 말에 리리스, 소완, 리제는 극구 반대를 외쳤지만 라비아타는 그 셋을 말렸다. 어차피 그가 사령관 자리를 내놓으던 내놓지 않던 결과는 확정된 것이었다. 그도 그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사령관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 것이다. 또한....자신의 부족한 지휘 실력으로 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이 희생되었으니 거기에 대한 속죄도 포함이었다. 그 와중에도 레오나는 그래도 사령관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면서 내려왔다고 그를 칭찬해주었고 그는 그렇게 지하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지하에 갇히게 된 사이 이전에 발견된 여성이 새로운 사령관으로 등극되고 자신은 언젠가 세상이 철충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해진다면 그 때부터 시작할 인류 복원 작업의 종마 역할을 할 것이었다. 그래,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지 하고 그는 스스로에게 되뇌였다.


잠들면 자신에 의해 소모되었던 바이오로이드들이 피 칠갑이 된 상태로 나타났고 그럴 때마다 잠에서 깨어나서 다시는 잠들지 못 했었다. 그들은 눈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지독히도 증오하고 있었다. 혼자 있으면 환청도 들렸다. 정도를 넘어선 소모에 분노하는 마리의 호통, 그를 질타하는 메이의 호통, 그의 지휘 능력에 기가 찬 듯 차가운 말을 꺼낸 레오나, 무거운 침묵을 유지한 칸....괴로울 수록 그는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한 행동은 멸망 전 인류가 바이오로이드를 소모품으로 판단하고 소모한 것과 비슷한 행동을 했었으니까, 이건 마땅한 처벌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매마르고 있을 때 그는 새로운 꿈을 꿨었다. 이전처럼 자신에 의해 소모된 바이오로이드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꿈이 아닌 현실처럼 거기서 느껴지던 높은 고지의 찬바람이 피부를 만졌고, 태양빛은 눈을 잠깐 동안 감게 했었다. 그리고 그런 곳의 주위에는 어떤 자들이 모두 등을 보이며 서고 있었다. 모두, 자신의 앞에 있었다.


그들을 모를 수가 있나. 그들은 자신의 전우들이자 동료들. 자신이 섬광에 휩쓸려 정신을 잃기 전에 목숨을 함께하던 자들. 또, 자신처럼 모두 강요에 의한 삶을 살았던 자들. 또 다시 그의 머리 속에 그 광경이 나타나자 그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몸이 들썩거리는 것처럼 웃던 그는 곧이어 흐느끼기 시작했고 파도 소리가 날 때마다 끅 끅 거리는 울음소리를 내면서 최대한 자신이 우는 소리를 그 누구라도 듣지 못 하게끔 했다. 꿈은, 그 광경만을 보여주었다. 그들과 어깨를 함께 하려고 할 때마다 눈이 뜨여졌고 뜨여진 눈에 보이는 것은 천장이었다. 그런 꿈만을 계속 꿔왔다. 그저 바라만 보는 것 밖에 하지 못 하는 꿈을 꾼지는 그가 갇히고 나서부터 30일이나 계속되었다. 31일째가 되서야 그는 드디어 그들과 어깨를 함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깨를 함께하면 누군가 물었다.


두번째 삶을 기적적으로 얻었음에도 넌 아직도 누군가의 강요를 받고 있군.


그 강요를 벗어던질 생각을 못 하고 있어. 거부할 생각을 못 하고 있다고.


얼마나 우스운 결과야. 결국엔 강요에 의해 살고, 강요에 의해 죽는다니.


너가 한 말이 기억나지 않는 거냐? 너가 말했잖아.


"....죽는 것 만큼은, 우리가 정하자."


그 말을 듣고나서야 그는 탈출을 다짐하게 되었다. 콘스탄챠와 그리폰이 자신을 발견했을 때가 기억난다. 전신에 격통이 밀려오고 죽은건지 산 건지도 모를 정도로 엉망진창이 된 자신을 둘이 발견하고 오르카 호로 데려왔다. 자신이 이전에 입고 있는 옷은 상처 부위에 달라붙어서 그대로 뜯어내면 살갗도 함께 뜯겨나갈 정도였기에 입은 옷 부위를 가위로 잘라서 겨우겨우 벗겨내었으며 닥터의 약으로 부상으로 부어오른 곳들을 가라앉게 만들었으며 기관지에 가득 찬 피를 빼내기 위해 코에 물을 들이붓자 입과 코를 통해 대량의 피와 함께 덩어리 진 피까지 나오게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처음보는 여성들이 주위에 있었고 그녀들은 그에게 여러가지를 설명해주었다. 인류 멸망이 100년이자 지난 시점이고 유일한 인류의 생존자가 바로 자신이고 이 오르카 호의 총사령관도 자신이며 바이오로이드들을 지휘하여 철충의 위협을 종결시키고 인류를 다시 복원시켜야한다고.


대체 무슨 소리지? 그는 이따금 자신이 마치 물 속에 있는 것처럼 귀가 먹먹해지고 주위의 시간이 느리게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거의 항상, 그걸 느꼈다. 자신이 어쩌다가 이런 상황이 되었을까....난 왜 거기서 죽지 않았을까....대체 신은 내게 뭘 원하길래 날 살려둔걸까....왜 죽는 것조차 내가 선택하지 못 하게 하는걸까....곧 현실로 돌아오면 지휘관들의 질타와 실망, 한숨을 들었고 그럴 때마다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이 싫었다. 깨어나고 항상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우면 언제 들어온지 모르는 바이오로이드와 동침하여 그녀들과 섹스를 해야만 했었다. 그녀들의 몸은 남자의 그의 몸을 만족시킬 정도로 황홀했어도 그는 그 일이 끝나면 곧이어 다시 고뇌에 빠졌다. 인류 복원? 지금 이 바이오로이드들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나 말하는 건가 싶었다. 왜냐하면 아직 인류가 멸망하기 전의 기억을, 그는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오로이드들은 일상 속에 성공적으로 조화하여 항상 인간의 옆에 붙어다녔었다. 그리고 마치 길가에 널부러진 과자 봉지, 음료수 캔처럼 버려지고 장난감처럼 인간에 의해 망가지고 노리개로 전락하는 꼴을 너무나도 쉽게 봐왔다. 자신이 정말로 인류를 복원시킨다고 해보면 또 다시 바이오로이드들을 향한 인간의 학대가 시작될 것이다.


그딴 짐은 짊어지기도 싫고, 그냥 벗어던지고 싶었다. 자신에게 그러한 의무를 강요해놓곤 지휘 능력이 부족하다, 남자답지 못 하다라고 지껄이는 바이오로이드들의 질타를 항상 참았다. 그 자신도 자신의 지휘 능력은 소질이 없다 못 해 형편없다는 걸 인정하니까. 모독적인 질타도 참은 이유는 형편없는 자신을 대신해서 직접 전략을 짜고 그걸 실행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못 했던 자신이 반발할 타당성 따위는 없었다. 그 정도가 심해져도 그저 참았다. 자신은 상황이 잘못 돌아간다 싶으면 바이오로이드를 마구잡이로 써대서 일단 상황을 모면했으니까....이렇게 보니 자신이 지휘관들에게 욕을 먹은 건 정말 당연한 거였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사실, 항상 생각해왔다. 인류 복원, 좆까라고. 인간들 사이에서도 좆간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인간은 악랄하게 그지없는 사회성 동물인데 그런 것들을 복원시켜봤자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머리에 총부리를 겨눈 적은 참 많았지만 자신을 응원해주는 라비아타, 사소한 것이라도 칭찬해주는 콘스탄챠, 자신을 친구처럼 신뢰해주는 LRL, 주인님이라 부르며 따르는 컴패니언, 항상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주는 소완과 자신에게 애정을 받으면 터질 것처럼 기뻐하는 리제....자신을 정말로 사랑해주는 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그 짐을 지금까지 짊어졌다. 결국 짐의 무게를 이기지 못 해 다리가 부러지고 주저 앉아버렸지만. 그는 타는 것처럼 느끼는 목을 축이기 위해 일단 먹을 물을 찾기 시작했다. 정말 운이 좋게도 그때 비가 내렸고 비는 담수를 의미하기에 그는 당장 땅을 파고, 적당히 파여진 구덩이 위를 비닐로 덮어서 물을 모았고 꽤나 많이 내리는 빗물을 가득 담는데에 성공했고 비닐 구덩이에 방금 고여진 깨끗한 담수를 들이켰다. 불은 꺼졌지만 마른 나무 쯤이야 어디에든 있으니 불은 걱정할 것이 아니다. 당장의 목을 축인 그는 거기서 더 빗물을 모으고 수통을 담가서 수통 안으로 물을 보관하였다. 식수를 해결했으니 이제 식량을 해결할 차례였다.


문득 그는 피식 웃었다.


"아, 옛날 생각나네."


오르카 호의 사령관이기 전에, 아직 싸우는 것이 일인 직업이기 전에, 자신은 일종의 탐험가이자 생존가였다. 이제와서 어린 시절은 기억나지 않지만 적어도 자신을 학대했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억이 난다. 살만 뒤룩뒤룩 찐 주제에 술이나 퍼먹었던 그 남자와 항상 바깥 남자랑 어울려다니고 나이마저 속여서 나이 어린 남자들만 노렸던 여자. 그런 작자들이 자신의 부모였고 그는 한 시라도 빨리 그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바깥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고 부모님에게 얻어맞는 어린애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차갑고 혹독하다. 꿈과 희망이 가득했어야 할 어린애 시절에도 그는 너무나도 빨리 현실을 알아버렸다. 그래서 그는 현실에서 살아남고자 하였다. 원래 가지고 있었던 동물 사육사의 꿈을 접고 부모와 현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군에 입대하였다. 그는 그저 필요에 따라 입대한 것 뿐이었지만 그렇다치고는 너무나도 훌륭한 군인의 모습을 보였다. 모든 훈련을 자연스럽게 소화해내고 테러리스트들을 상대로 총알 낭비 없이 한 발씩 정확하게 그들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으면서 그 능력을 입증했고 동기들 사이에서도 선망을 받거나 혹은 질투를 받기도 했다. 장관들은 그를 보며 '군인이 돼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며 평가했을 정도로 그는 뛰어났다.


너무 뛰어났기 때문일까? 그의 암흑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 ★ ☆ ★



침대에 누워있는 리리스의 얼굴이 조금씩 찡그러졌다. 그녀는 지하실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고 발견되었을 때 상태는 기절해있었다. 닥터의 진찰로는 머리에 큰 이상은 없을 것이다 라고 설명해서 컴패니언의 여동생들을 안심시켰다. 리리스는 지금 아주 나쁜 꿈을 꾸고 있었다. 깜깜하고 눈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리리스는 한 방향만을 보고 달리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정도로 뛴 그녀는 저 멀리서 빛을 내는 것을 보았다. 잠깐 달리는 것을 멈춘 그녀는 빛의 정체를 보았다. 너무나도 눈부시게 빛나는 그 존재는 어둠 속에서 신과 같은 자였다. 리리스는 그 존재를 계속 따라갔으나 자신이 가까워지면 그는 더더욱 멀어졌다. 리리스는 자신과 점점 더 빠르게 멀어지는 그를 따라잡으려고 뛰었고 뛰면서 외치려고 했다.


"주인ㄴ...!"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면서 리리스는 그만 큰 소리로 외쳐버렸다. 끝까지 말하는 것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자고 있는 늦은 시간인 지금 큰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스노우 페더였다.


"리리스 언니?"


"스노우 페더...? 전 왜 여기에..."


스노우 페더는 맏언니 리리스가 깨어났다는 사실에 울먹이면서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이 소란 때문에 하치코, 펜리르, 페로가 잠에서 깨어났고 모두 맏언니가 드디어 일어나자 그녀를 안아주려고 하였다.


"리리스 언니! 하치코에요! 기억하세요? 아아, 깨어나서 다행이에요!"


"하, 하치코. 언니가 하치코를 몰라볼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뒤에서 펜리르라 와락 안아왔다. 펜리르의 넘쳐나는 에너지를 리리스가 그 몸으로 받아내려니 그녀는 꽤나 힘들었다. 그래, 하치코와 펜리르는 무척이나 건강하고 활기찬 여동생이었지 하고 그녀는 다시금 되짚었다.


"안 일어날까봐 걱정했다고!"


페로는 말 없이 리리스를 꼭 껴안았다. 리리스는 여동생들에게 감싸인 지금이 썩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하다고 할 수 있었다.


"여, 여러분. 언니는 이제 괜찮으니까 그만 놔주실래요...? 조, 조금 괴로워서..."


페로와 페더는 그렇다 쳐도 하치코와 펜리르는 그 에너지 때문인지 리리스에게도 꽤 버겁다. 그 말에 여동생들이 리리스를 놔주었고 페로는 리리스의 머리를 핥고 있는 펜리르에게 눈빛으로 주의를 줘서 그녀에게서 벗어나게 했다. 리리스는 일단


"제가 얼마나 누워있었던 거죠?"


자신이 얼마나 잠들어있었는지 물어보았고 그 말에 페로가 답해주었다.


"하루에요. 닥터의 진찰로는 별 이상이 없다고 했어요."


"하루...."


하루 동안 쓰러져 있었다면 주인님은....리리스는 마지막의 기억을 더듬었다. 미리 장치를 켜놓은 상태로 가서 교란파 생성기를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그 후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주인님을 오르카 호의 탈출정이 있는 곳으로 보내고자 하였다. 그 때, 뒤통수에 커다란 충격이 가해지더니 거기서 기억은 끊겨버렸다. 페로는 혼란스러워하는 리리스에게 설명을 계속 했다.


"전 주인님이 언니를 공격해서 기절시키고, 언니의 무기까지 뺏어갔어요. 지금은 오르카 호를 탈출한 상태구요."


"....가셨군요, 결국."


페로는 살짝 그에게 실망한 상태였다. 모두가 그를 향해서 질타와 무시를 뱉을 때 컴패니언 시리즈의 경호 메이드들은 그를 보호하고 옹호했다. 거기서 리리스 만큼 그를 가장 옹호한 바이오로이드도 딱히 없었다. 요리사랑 정원사를 뺀다면 말이다. 페로는 이것에 불만을 품어 툴툴거리며 말했다.


"전 주인님, 언니를 공격하다니 너무해요. 언니 만큼 전 주인님에게 잘 해준 바이오로이드는 없는데..."


리리스는 전 사령관에 대한 인식이 여동생들 사이에서 나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페로에게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었다. 그 때였다.


"하치코는 전 주인님이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하치코가 발언했다.


"전 주인님이 리리스 언니를 때린 건 하치코도 충격이지만....전 주인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역시 하치코다. 주인님에 대한 충성심으로는 1위를 당당히 차지하는 그녀이니 제아무리 언니를 공격한 전 주인님이라 하더라도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니....리리스는 자신이 동생은 정말로 잘 두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리리스는 전 주인님에 대한 말을 그녀들에게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비밀을 밝혀도 그녀들은 모두 지킬 것이다. 리리스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눈치챈 스노우 페더가 그녀에게 물었다.


"리리스 언니. 전 주인님은....왜 갑자기 언니를 공격했나요?"


"저도 잘 모르겠답니다, 페더."


"거짓말."


펜리르가 끼어들었다. 펜리르는 옆으로 흘긴 눈동자를 다시 리리스에게 집중시키고 리리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리리스는 설마 자신이 몰래 교란파 생성기를 가져다 준 것이 이미 오르카 호에 다 퍼졌나 싶었지만 펜리르가 그녀의 거짓말을 지목한 것은 다른 이유였다.


"리리스 언니, 아까부터 안절부절 못 하고 있는 걸. 손을 봐."


리리스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매만지고 있었기에 펜리르는 리리스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 쯤이야 쉽게 알 수 있었다. 리리스는 스노우 페더와 하치코, 페로를 보다가 고개를 조금 숙이고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다 알고 있었나요."


"죄송해요 리리스 언니. 하지만 아까부터 언니의 목소리도 뭔가 떨려서...."


스노우 페더가 리리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를 하나 더 말하였다. 리리스는 이제 자신이 비난받을 차례구나 라고 생각했다. 바깥에서 지금 철충에게 죽임을 당하고 있을지 아니면 이미 철충에게 죽었는지 모를 전 사령관을 밖으로 꺼내준 최대 공헌자는 자신이 아닌가. 리리스가 동생들에게 자세한 사정을 설명 안 해준 것도 바깥에 철충들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거기서 그를 내보내는 것이 정말 맞는것인지 스스로부터 계속 고민하고 있었으니까....결국 리리스는 동생들에게 모든 것을 불기로 했다.


리리스가 분 모든 정보를 들은 하치코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건....너무해요."


"미안해요, 하치코. 주인님에게 착한 리리스로 있고 싶었는데 그 행동이 동생들에겐 나쁜 언니가 되버렸네요. 전 언니 자격 따윈 없는 거겠죠."


"아니에요!"


하치코가 그 말을 부정했고 리리스가 조금 놀랐다. 하치코는 눈망울이 가득한 촉촉한 눈으로 리리스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너무하다는 건 언니가 아니에요. 기, 기억소거제? 라는 걸 전 주인님한테 넣으려고 하다니 그게 너무한 거에요! 그걸 맞으면 주인님의 기억이 사라지는 거죠? 그쵸? 주인님과의 즐거운 추억을 저희들만 간직하는 건 싫어요!"


"언니는 그렇게 기억이 지워지고 거짓된 삶을 살아가야할 주인님을 생각하기 싫어서....탈출을 도운 것이군요. 저희들은 언니가 옳다고 봐요."


스노우 페더도 리리스를 옹호하였고


"주인님이 가버렸지만 그래도 괜찮아. 다시 돌아올 테니까! 게다가 주인님, 바깥에서도 잘 살거 같고."


펜리르도 리리스를 옹호했지만 그것보다 뒤에 말한 말이 그녀에겐 더 신경쓰였다. 리리스는 그 말의 의미를 물었다.


"펜리르, 그게 무슨 소리에요?"


"응? 뭐가?"


"주인님이 바깥에서도 잘 살거라니....철충들 사이에서요?"


"아, 리리스 언니는 잘 모르겠구나. 기절해있으니까. 전 주인님, 엄청나게 강하다구?"


"그...그게 무슨...?"


그 말에 페로가 그가 오르카 호 안에서 벌인 전투를 영상을 담은 타블렛을 건냈다. 리리스는 그걸 받고 재생 버튼을 터치했다. 리리스는 그 영상을 유심히 보면서 펜리르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신속의 칸과의 전투. 신속의 칸은 라이플을 적에게 쑤셔박고 영거리 사격을 하는 전투 스타일을 가졌고 '신속' 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엄청나게 빠르다. 그녀는 자신의 전투법을 살려 그가 반응하지 못 할 속도로 접근한 뒤에 라이플을 휘둘러서 제압하려고 하였다. 지휘관 개체인 그녀이다보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놀라울 정도로 칸의 움직임에 대응했다. 엄청나게 무거운 라이플은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일격인데 그걸 겨드랑이 사이에 끼우고 칸이 그의 근력에 당황하는 사이에 박치기로 거리를 벌린 후에 바로 칸의 하반신에 장착된 추진장치의 한 쪽을 사격으로 파괴하여 칸의 기동성에 이상을 일으킨 후에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리리스는 믿을 수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다음 영상을 보았다. 다음은 몽구스 팀의 홍련과의 교전 영상이었다.


홍련의 사격을 엄폐물을 이용하여 막고 그녀가 장전하자 그 소리를 듣고는 바로 엄폐물에서 나와 총격을 가해 홍련의 무기를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홍련의 냉기 화살을 쏠 수 있게 해주는 카트리지를 깨뜨려서 홍련의 하반신을 얼렸다. 그 다음 영상은....라비아타와의 교전 영상이었다. 라비아타는 그 강화된 육체로 무지막지하게 큰 대검을 깃털마냥 빠르게 휘두른다. 라비아타의 검격을 피하고 그녀의 검이 땅을 내려칠 때마다 검을 밟아서 라비아타가 무기를 다시 들 수 없도록 한 뒤에 플라즈마 제네레이터와 트롤스버드를 연결해주는 선을 발차기로 끊어버리고는 플라즈마 제네레이터를 사격으로 파괴하였다. 그 후 총을 중량을 이용한 근접전으로 라비아타와 다시 교전에 들어갔다. 라비아타가 휘두르는 검의 리치를 역이용해서 오히려 검이라는 무기의 위력을 내기 위한 회전력을 내지 못 하는 상태에서 라비아타를 몰아붙혔다. 그렇게 밀어붙히면서 라비아타의 검을 파괴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리리스는 영상을 정지 버튼을 터치했다.


"그 분께 이러한 수준의 전투력이 있었을 줄은...."


컴패니언 시리즈의 바이오로이드는 경호원으로서 임원을 지키는 데에 탁월하지만 이건 컴패니언 경호원인 자신인 블랙 리리스가 생각하기엔 조금 그렇지만 경호가 필요없을 정도의 전투력이었다. 리리스는 잠시 복도를 좀 걷고 오겠다고 말하며 방에서 나왔고 전등만이 앞을 밝혀주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정말로 우연의 일치인지 아님 그녀가 기다렸는지 소완이 나타났다. 소완은 이제 막 잠드려고 했는지 아니면 잠에서 깨어났는지 모르지만 란제리 차림이었다.


"어라, 당신을 여기서 만나다니 기묘한 우연이로군요."


소완이 비꼬듯 말하자 리리스도 피식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서 묘하게 그녀가 입고 있는 잠옷에 신경썼다. 소완에 대해서는 관심도 하나 없었기에 그녀가 잠을 잘 때 무얼 입는지는 몰랐지만 저런 것을 입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자신은 동생들처럼 동물 잠옷을 입는데 말이다. 리리스는 그런 소완에게 다가갔다.


"이상하네요. 애니웨어 시리즈의 숙소는 여기서 꽤나 떨어진 곳 아닌가요?"


"잠이 안 와 산책을 하고 있었지요. 소첩이 어디서 뭘하든 당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지요."


"그렇다면 저도 당신을 지나치고 가겠으니 즐거운 산책을 하시길."


그렇게 대화를 끝마치고 소완을 지나친 리리스는 다시 그 분을 생각하려고 하였고 소완은 그런 리리스를 한 마디로 세웠다.


"교란파 생성기를 샌드위치 옆에 두셨더군요?"


리리스는 당황했다. 소완이 어떻게 그걸? 소완에게도 안 들키게 몰래 옆에 둔 건데. 리리스는 바로 소완을 돌아보았고 소완도 천천히 리리스를 돌아보았다. 리리스는 아까와는 다르게 살기를 가득 띄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일 당신이 그 주둥아리를 잘못 놀려서 제 자매들까지 위험에 빠진다면 전 당신을...."


"후훗, 소첩은 당신과 그 정원사와 같은 광대가 아니니 그러한 실수는 결코 하지 않사옵니다."


"....샌드위치 옆에 두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죠?"


"기기 옆에 소량의 빵가루와 아주 자그맣게 마요네즈가 발라져 있었지요. 정말로, 쓸데없이 샌드위치와 교란파 생성기를 가까기에 둬서 그러한 실수를 범하시다니 정말 어리석게 그지없군요."


할 말이 없었다. 소완이 하는 말이 맞았으니까. 소완은 리리스를 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우스워서가 아니였다. 리리스도 그걸 알 수 있었다.


"그 기기는 그 분이 파괴하고 가셨더군요. 역시 소첩의 눈은 틀림없사옵니다. 굳이 당신을 기절시키는 것을 보면 그걸 알 수 있죠."


"그건 무슨 의미죠?"


"모르시나요? 만일 당신이 그 자리에서 멀쩡히 나왔더라면 아니면 그 자리에서 멀쩡하게 있었더라면 그 분의 탈출을 도왔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답니다. 당신을 기절시킨 이유는...."


리리스는 소완이 말하고자함을 깨닫고 그 말까지 소완의 입으로 듣기 싫어서 그냥 자기가 말하였다.


"제가 탈출을 '도운 것' 이 아니라 제압당해서 '막지 못한 것' 으로 바이오로이드들에게 판단케 하려고...."


소완은 딱히 대답은 하지 않았다. 아아, 주인님....리리스는 마지막까지 주인님께 민폐였군요. 리리스는 자신을 공격한 그가 이젠 완전히 용서되었고 동생들에게도 이를 설명한다면 모두 주인님에 대한 이미지를 계속 좋게 유지할 수 있음이리라. 소완은 리리스가 이것 저것을 깨달은 것을 알아차리고는


"아아, 소첩은 이제 피곤하니 들어가봐야겠군요. 아 참, 리제 양이 정원 쪽에 있더군요."


마치 리제에게 가보라는 듯이 소완은 리리스에게 말하고는 애니웨어 시리즈의 숙소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리리스는 리제 그 스토커가 있는 곳을 왜 알려주는 거지? 하고 생각했다. 소완이 걸어가고 있을 때 리리스는 소완을 향해 말하였다.


"...당신이 만든 토스트와 샌드위치. 비록 그 분은 한 입씩 밖에 안 드셨지만, 맛있다고 하셨어요."


그 말만 남기고 리리스는 리제가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소완은 그 말에 눈물을 스윽 훔치고는 마치 도망가듯 빠르게 숙소 쪽으로 걸어갔다.


이 시간의 정원은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 아침과 낮에도 풍기는 생기로운 이 향은 밤이 되니까 더욱 그윽해졌다. 리리스는 이런 시간에 정원에 올 일이 없었지만 이건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정원에는 꽃들을 스윽 스윽 하나씩 만져주는 리제가 있었다. 리제는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자 거기서 리리스가 있는 걸 보았다.


"...햇츙."


"스토커."


리리스는 리제가 만지고 있는 꽃을 보았다. 리리스는 꽃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만큼 무슨 꽃인지는 몰랐지만 리제가 그 꽃만을 만지고 있다는 것은 그와 관련이 있다는 걸 뜻했다. 리제는 그런 리리스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에게 그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인님이 한 번 정원에 들리신 적이 있으셔. 정원에서 주인님이 나를 부르셨고 난 그 부름에 바로 답했지. 물어보셨어, 나한테. '그리움이라는 꽃말을 가진 꽃이 여기에 있나' 라고."


"그게 지금 당신이 만지고 있는 꽃인가요?"


"맞아. 벌개미취. 청초와, 너를 잊지 않으리 즉 그리움을 의미하는 꽃말을 가진 꽃이야. 그 후로 주인님은 항상 벌개미취를 보러 오셨어."


리제는 벌개미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정원사인 그녀로서는 꽃은 부드럽게 쓰다듬어야하는 애완식물이었다. 반응하진 못 하지만 이렇게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면 아주 기뻐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햇츙, 오르카 호 안에서 주인님이 무력 행사를 벌인 건 너가 도와준 탓이지?"


"....정말 신기하군요. 누구한테도 떠벌린 적 없는데 소완과 당신은 잘 알고 있다니."


소완 뿐 아니라 리제도 자신이 그 뒷공작을 벌인 주범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니 리리스는 정말로 어이없게 생각했다. 리제는 꽃을 계속 쓰다듬었다.


"그런 것 쯤이야 바로 알 수 있어. 이전과 같았더라면 너를 조각조각내서 꽃들의 양분으로 주고 싶지만....주인님께 기억소거제가 투여될 바에야 주인님이 바깥으로 가시는 것이 훨씬 나을 거야."


기억소거제까지? 리제가 그런 거까지 알고 있다니....그렇다면 소완도 알고 있겠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지휘관 햇츙들이 하는 이야기를 몰래 들었거든. 너도 그거 때문에 도왔을 테니까."


"...저희 셋 모두 입을 잘 간수해야겠군요."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햇츙,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주인님을 수렁에서 꺼내줬으니까. 나도 요리사 햇츙도 하지 못 했던 걸 너가 해줬으니까."


리제가 이런 여자였나? 리리스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리제의 기억과 지금의 리제의 모습을 보니 무척이나 큰 괴리감을 느꼈다. 소완 그 년에게 이용당하고 자신이 이용당한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자각한 멍청한 년이고 흥분하면 대화도 안 통하는 년인 줄만 알았다. 그래도....한 번 자신을 구해주고 함께 싸운 적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자신도 리제를 마음 한 구석에선 라이벌로 인정하고 있었다. 리리스는 리제의 새로운 모습에 자신도 살짝 마음을 보였다.


"후훗, 주인님께 좀 더 다가가려는 저의 계략이니까요. 제가 당신 둘보다 더 앞서있다구요?"


"금방 추월해줄 테니까 우쭐대지 마, 햇츙."


리리스는 그만 가보겠다고 인사하고 리제는 대답해주지 않았지만 여전히 꽃을 쓰다듬었다. 리리스는 그대로 돌아가진 않았다. 그녀는 그가 갇혀있었던 지하실에 잠시 들려보았다. 이제 누굴 가두지 않으니까 감시자들은 없었고 문도 열려있는 상태였다. 방 안으로 들어와 그녀는 아직 남아있는 노란색 커다란 천을 보았고 거기로 다가가 천을 거뒀다. 거기에선 아주 푹신할 뿐만 아니라 이불까지 좋은 향이 나는 침대와 식사를 위한 탁자와 의자가 있었다. 모두, 그를 위해서 축출 반대파들이 준 것이었다.


그걸 단 한 번도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 리리스는 단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가구와 그가 누워 잠들었던 이불 하나, 그리고 먼지가 가득한 방 안에 오랫동안 서있자 자신도 모르게 쭈그려 앉으면서 울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로 가버렸구나....정말로 그 분이 가버렸구나. 그가 오르카 호를 떠났다는 사실이 체감이 되자 리리스는 억눌렸던 슬픔이 함께 터져나와 그만 펑펑 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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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 과거 떡밥은 담화에 마저 푼다

전 사령관이 갇힌 방에 있던 커다란 노란색 천은 안에 있는 가구들을 덮은 천이었음. 전 사령관은 그걸 한번도 쓰지 않았던 것